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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덴노(昭和天皇) 히로히토
(裕仁/유인, 1901년~1989년)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히로히토의 반응, 1941년 6월 25일.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 82쪽.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皇國カ其ノ總力ヲ擧ケテ勝ヲ決スルノ機方ニ今日ニ在リ卿等宜シク衆ニ先ンシテ憤激ヲ新ニシ團結ヲ鞏クシ奮テ敵國ノ非望ヲ破碎シ以テ皇運ヲ無窮ニ扶翼スヘシ)"
제85회 제국의회 개원식 칙어(第85回帝国議会開院式の勅語), 1944년 9월 7일
일본의 제124대 천황.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한 전범 중 하나.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처벌은 받지 않았다.
4월 29일생으로 이날이 전쟁 전에는 '덴노의 생일'이라는 의미에서 천장절이라는 공휴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식목일, 정확히는 '녹색의 날'로 바뀌었다가 2007년 자민당, 공명당, 일본 민주당의 합의로 '쇼와의 날'으로 재개정되어서 동북아 국가들에서 말이 좀 나왔다. 윤봉길이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날도 바로 이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迪宮(미치노미야).미친놈이야 중국 천자들처럼 연호+제(帝) 같은 형식으로 표기를 만들면 '소화제(...)'가 된다.
2. 생애
어렸을 때 칭호는 미치노미야(迪宮)미친놈이야였으며, 도장에 새겨진 인장명은 와카타케(若竹)였다. 역대 덴노들 중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며, 가장 장수한 덴노였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덴노 중 유일하게 공식석상에서도 안경을 쓴 덴노다.
히로히토는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 아카사카 구 아오야마의 도구고쇼(東宮御所)에서 메이지 덴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 어머니는 사다코 황태자비다. 오랫동안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측실 소생으로 계승되어 오던 일본 황실의 관습을 깨고, 적장자(嫡長子)로서 대를 이었다.
태어났을 때 키는 51cm였고, 몸무게는 약 3kg 정도였다. 히로히토는 태어난 지 70일밖에 되지 않았을 때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추밀원의 고문이었던 카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맡겨져서 누마즈(沼津) 저택에서 자랐다. 1908년에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한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원장이던 노기 마레스케 육군대장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1912년 7월 30일에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가 뒤를 이어 다이쇼 덴노로 즉위하자, 히로히토 친왕은 황태자로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다이쇼 덴노의 즉위 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황족신립명에 의해서 육해군 소위로 가게 되었고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14년 3월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에 할머니 쇼켄 황후가 사망했다. 1918년에는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1919년 만 18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성년식을 한 후 바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24년,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 사실 나가코 여왕은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 형질이 있다"는 이유로 황태자비 결정이 취소될 뻔했으나, 결혼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나가코 여왕이 좋다"며 감싸주었다고 한다. 덴노가 된 후로도 나가코 황후와 금슬이 좋았다고.
다이쇼 덴노의 병이 날로 악화되고 있던 가운데, 히로히토는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순방했다. 20세가 되자 섭정에 취임했고 셋쇼노미야(攝政宮)라고 칭해졌다. 사다코 황후는 유약하여 무시당하던 남편과 어린 장남을 대신하여 거물급 인사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1923년 12월 27일에는 궁정 문밖에서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난바 다이스케로부터 저격을 받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재밌는 사실은 난바 다이스케에게 저격을 받았을 당시에 히로히토는 자동차 안에 있었는데 "누가 총을 쏘나 보다" 하면서 태연했다고 한다. 난바는 저격을 시도한 직후 붙잡혀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한 후,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도 난바가 처형되고 나자 히로히토는 난바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1924년 히로히토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과 결혼했다. 1926년 12월 25일에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자 그는 124대 덴노가 되었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바꿨다. 1928년 11월 교토 고쇼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국가 중대사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군사나 외교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나이 30살이었던 1932년에 이봉창 의사로부터 폭탄 투척을 당했다.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져 말과 마부(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폭탄 투척 이후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 의사는 자수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고. 조선에서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어조로나마 의거를 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중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아쉽게도 불발되었다"는 기사로 보도했다.
1933년 12월 23일, 장남이자 훗날 덴노가 되는 츠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태어났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와 삼대오물들의 걸출한(...) 전략으로 인해 결국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난 후에 항복을 결정하고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라디오 항복연설을 했는데 이를 옥음방송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 국민들이 덴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는 것.
항복 후에 맥아더와 GHQ에 의해서 강요되어서 1946년 1월 1일에 인간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인간선언 이후 덴노는 더 이상 신격화가 부정되었고,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되었으며,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재산 역시 모두 몰수당해 거리로 내몰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 다만 덴노 존치를 결정한 마당에 히로히토 본인과 그 직계에 한정해 생활비를 일정 수준으로 주기로 해서 이때부터 덴노 일가는 일본 의회에서 예산을 타서 쓰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히로히토. 그야말로 1장으로 요약 가능한 태평양 전쟁 결과.
이 사진은 일본 언론이 알아서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이 반드시 보도하도록 지시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맥아더가 정복도 입지 않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은 채 찍은 모습으로 "누가 대장인지" 깨닫게 해줘 사진을 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 <히로히토 - 신화의 뒷편>에 의거하면 이는 맥아더의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1947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일명 평화헌법)에서 히로히토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GHQ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 의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 1952년 4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그는 여러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더 이상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상징적인 덴노(天皇)로 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히로히토는 덴노라는 공적인 업무는 그냥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수행했고, 대신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 연구에 관심을 쏟으며 이에 몰두했다. 1971년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전쟁 후 처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러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계 대학생들이 히로히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옥좌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천황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이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이기도 하다. 1964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 1975년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이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
1975년 10월에 히로히토 덴노와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는 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히로히토와 뉴스위크지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버나드 크리셔는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일본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또한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몇 주일 후 히로히토 부부는 국빈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의 뜻을 전하고,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등을 찾았다. 그리고 미국 디즈니에서 받은 시계가 있는데, 디즈니에서 일본 덴노의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품이었다. 히로히토는 이 시계를 받고 "디즈니 풍경이 아름답다"며 미소 지었고, 나중에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그 시계를 무덤 속에 넣었다고 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규탄집회가 일어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별다른 일 없이 미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외의 여러 정상들을 만나며 살다가,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십이지장에 생긴 종양 때문에 하혈하다가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89년 2월 24일 무사시노능에 매장되었다. 히로히토의 후계자로 그의 장남이던 아키히토가 덴노에 오르게 되었고, 연호를 1989년 1월 8일 0시 정각에 헤이세이로 바꾸면서 헤이세이 시대가 막을 열었다.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 사망 2분 후에 방송한 소식. 미야오 이와오 궁내청 차장이 사망 전인 오전 4시의 덴노 상태를 발표하는 내용과 임시뉴스.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방송한 내용. 후지모리 쇼이치 궁내청 장관이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것을 발표한 내용과 관련 임시뉴스. 덴노가 사망한 것을 알릴 때는 "천황폐하 붕어"(天皇陛下 崩御)라는 글귀를 띄운 이후 차임음을 울린다. 위 2개의 동영상에서 나오는 일본 궁내청 장관은 후지모리 쇼이치(藤森 正一).
히로히토 사망했을 때 당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인데, 대체 노인층은 아주 슬퍼하는 분위기지만, 젊은 층이나 중장년층들은 그럭저럭 같은 반응인 거 같다. 즉 제각각이라는 거.
히로히토 덴노 사망 당일과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날에 나온 MBC 뉴스데스크 관련보도. 당시 관방장관인 오부치 게이조가 헤이세이 연호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방송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다
KBS뉴스 자료
심지어 1988년 여름부터 히로히토 덴노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모든 행사와 콘서트, 일본 총리의 해외일정이 취소되고 전 일본이 숙연 및 자숙해져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반강제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나고야의 세이부 라이온스는 3년 연속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축하연 없이 조용하게 묻혔다. 안습이다. 1978년부터 매해 개최된 기린컵도 1990년까지 2년간 개최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또한 광고계에서는 '건강하세요', '멋진 인생', '드디어 그날이 온다' 등의 멘트가 사라졌다. 역시 덴노의 심기를 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는 이 분위기를 선도하여 모든 기사를 일본 황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고 덴노가 매일 어느 정도의 맥박을 유지하는지까지 일일이 기사화했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그러나 외신의 반응은 일본 언론들과 사뭇 달랐다. 1988년 9월 21일자 영국의 황색언론 더 선에는 악마가 지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일본 전역은 '자숙'이라는 명분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며, 연일 천여 명의 사람들(대부분 노년층)이 덴노가 머무는 도쿄 황거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이 위독 상태가 해를 넘겨서 오래 끌자, 덴노의 사망 당일에는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 노인 분들이 황거 앞에서 울어제낀 것을 제외하고는 차분했다. 오히려 정규방송이 안 나온다고, 방송국마다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항의 전화가 빗발칠 정도. 정규방송이 빠지고 추모방송이 주구장창 나오다보니 생긴 일인데,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 그래서인지 비디오 대여점의 매출이 상승했다고.
이 시기의 웃긴 일화 하나. 언제 쇼와 덴노가 죽는가 가장 빨리 알아내기 위해 황거 근처에서 거의 노숙을 하던 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야말로 노숙자 몰골이 되었다. 그런 꼴을 한 기자 옆을 지나던 한 어린이가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뭐야?"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고. 지못미.
쇼와 덴노는 죽기 직전에 일본의 몇몇 역사학자들과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전쟁 책임에 대한 사과를 남길 것을 요구받았다.
참고로 소설 13계단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위독해지자 전 교정기관의 사형 업무가 중지되었던 적이 있다. 쇼와 덴노가 사망한 뒤 특별사면이 이뤄질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는데, 이 와중 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여부를 다투던 일부 사형수들은 상고를 취하하여 사형을 확정시켜 버렸다. 최고재판소에서 감형될 가능성보다 특사로 감형될 확률이 높다고 보고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확정된 피고인만이 특별사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특사가 내려지긴 했는데 대상은 생계형 사범 등 애매한 경우만이 해당되었고. 그 결과 사형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명을 단축시켜 버리는 비극이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의 사면은 사실상 전무했고, 감형도 1975년 이후로 전혀 없었으며 사형을 면한 경우는 모두 2심에서 정상참작사유 발생 등을 이유로 무기로 감형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시기가 1989년 초, 즉 해를 넘기고 겨우 1주일 지난 시점이라, 쇼와 연호를 박은 달력류들이 대거 폐기처분되고 헤이세이 연호가 찍힌 달력 등을 새로 구매하느라 일본 열도에서 종이 낭비가 극심해지고 재정 부담을 여러 곳에 안겨주기도 했다.
한편 쇼와 덴노의 둘째 손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가쿠슈인 대학 1년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의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후미히토 친왕은 24세, 가와시마 키코는 23세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약혼 발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가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상중의 약혼 발표와 곧 이어진 결혼(1990.6.29)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으나, 황실에 시집와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분에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의 손녀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1969년 4월생으로, 1989년 4월에 만 20세 성년을 맞이했다. 당연히 원래대로라면 사야코 공주를 위한 각종 축하행사가 치러져야 했으나,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듬해로 미루어졌다.
5. 쇼와 덴노/다른 나라와의 관계
근대 이후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하나.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그런데 사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 1명 더 있는데,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자신이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하기 싫어서 자진 퇴위한 것이고, 상황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 인물 가운데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89세에 70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를 뻔 했으나 2016년 10월 13일, 만 88세로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히로히토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제발이 저린 히로히토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 졌다는 떡밥이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 이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로 대해주며 그에 걸맞은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펴기(…)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히로히토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왜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으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여 의회가 열릴 때나 군대를 사열하는 꼭 참가해야만 하는 행사 이외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이봉창이 던진 폭탄이 안타깝게도 빗나간건 다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의전 절차에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처럼 히로히토 본인의 대인기피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격한 황실 교육의 영향 탓이었는지는 불명이다.
워낙에 귀하게 자란지라, 황태자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런던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보게 되었다. 이때 차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고 개찰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차표를 소지한 채로 개찰구를 지나가려다 그가 덴노인지 모르는 역무원이 그를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실랑이를 벌이던 차표는, 일본으로 가져와서 현재 궁정기념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또 한번은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최고의 차였던 메르세데스 벤츠 770K를 히로히토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정작 히로히토는 승차감이 나빠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일본 궁내청에선 전후 70주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녹음(옥음 방송) 전체를 전격 공개했다. 심지어는 디지털로 세세하게 복원했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 본인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7. 가족관계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의 4남 중 장남으로 출생,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7.1. 자녀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자녀들은 장남 아키히토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일찍 과부가 되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모리히로(東久邇宮盛厚)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다이쇼 덴노가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패전 후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고,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내친왕(1927.9.10-1928.3.8): 병으로 요절. 나가코 황후는 직접 밤을 새워가며 사치코 공주를 간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기였던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슬픔에 잠긴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같은 크기의 베개를 끌어안고 지냈다고 한다.
• 3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929.9.30-1989.5.26): 옛 화족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 자녀는 없다. 남편 도시미치의 간통과 사망으로 과부가 되었고, 강도까지 당했다. 그 후 친정인 황실에 돌아와 이세신궁의 제관을 맡아보며 살다가,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뒤따르듯 죽었다.
•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내친왕(1931.3.7-): 옛 화족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 자녀는 없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했고, 거의 말이 없고 과묵한 성품이라고 한다.
• 장남 쓰구노미야 아키히토(繼宮明仁) 친왕(1933.12.23-): 최초의 평민출신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테니스 로맨스의 사랑)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나루히토 황태자를 포함한 2남 1녀를 낳았다.
•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친왕(1935.11.28-): 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고른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로 히타치노미야(常陸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녀가 없어 훗날 마사히토나 하나코가 사망하게 된다면 궁가가 단절될 예정이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인, 옛 화족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는 정반대로 활달하고 화려하며 떠들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7.2. '악독한 시어머니'였던 어머니와 아내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 반대했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 재벌가의 장녀이며, 외가는 옛 화족 소에지마(副島) 가문이었는데도 말이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 후로, 나가코 황후는 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된 후로도, 나가코 태후와 그녀의 똘마니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치코 황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태후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나가코 태후는 그녀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다.
나가코 황후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데이메이 황후)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당했다고 한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군기잡기, 꼰대질은 당한 것을 되풀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놀랄 일도 아니다. 사다코 태후(데이메이 황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고준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나가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고 한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고.
한편 고준 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 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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