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2구간 (구미→왜관) ④ 구미→칠곡보(왜관)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독보 32km]▶ 백파
☐ [구미]→ [감천] 방초정- 직지사- 매학정→ 숭선대교→ 구미 산호대교→ [구미대교]→ 동락서원→ [구미공업단지 기념비]→ (사람의 길)→ 남구미대교→ 칠곡 낙동강 동안(東岸) 수변공원 길→ [왜관전적기념관]…. 아, 6.25전쟁 ¶ 낙동강전투의 현장→ [칠곡보]…¶ ‘6·25노래’.→ [낙동강 다리]→ [왜관]
구미→ 구미공업단지 기념비→ 남구미대교→ 칠곡 왜관지구전적기념관→ 칠곡보→ 왜관
사람의 길
오후 1시 25분, 낙동강 제방 길, ‘구미공업단지 기념비’ 앞에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경제발전과 그의 남다른 생애를 회고하면서 .......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와 뜨거운 연민의 정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저기 서쪽 하늘에 묵연히 솟아 있는 금오산을 바라본다. 그 산록의 가난한 초가집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가름하는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 불꽃처럼 살다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생각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무언지 모를 안타까움과 허허로움이 온몸에 엄습했다. 그리고 ‘인간’,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가슴 속에 맴돌았다.
아, …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 존재와 그 존재 방식에 대해 그 근원적인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인생은 유한(有限)한데, 사람의 마음은 늘 무한(無限)한 생각으로 살아간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목숨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비극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
우리 몸은, 분명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귀한 목숨 값을 지니고 있다. 그 진정한 생명가치는 아주 미미한 것 같지만 사실 경이롭고 우주적이다. 저 태백산 깊은 산곡의 한 방울의 물이 유장한 강(江)이 되어 바다로 통하고, 그 망망대해의 그 물이 무한 우주의 기운이 되어 순환하는 것처럼, 인간의 작은 숨결도 알고 보면 바로 무한 우주의 숨결이다. … 나는 몇 차례 히말라야 5,500고지에서 그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산소가 아주 희박한 고지에서, 숨을 쉰다는 자체가 아주 절박한 일이었다. 사실 숨은, 내가 쉬는 게 아니라, 천지대자연의 기운(氣運)이 내 몸을 통하여 호흡(呼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희박한 산소가 여린 내 숨결이 되고 그것이 내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생(生)과 사(死)의 경계를 몸으로 느꼈다.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숨을 쉬며 살아가는 모든 목숨은 그래서 희한(稀罕)하고 귀하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우리는 ‘도(道)’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道理)는 천지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동양의 현자들은 그것을 간파했다. 특히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인간의 마음[人爲]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無爲]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그것을 ‘물’에 비유했다.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처럼 사는 것이다! …
한편, 유가(儒家)에서는 사람이 사는 도리의 근원을 ‘하늘’[天命]이라고 한다. 하늘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本性]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도(道)는 바로 하늘이요, 하늘은 곧 인간의 본성이다. 하늘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그 무엇이다. 하늘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양심(良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천벌(天罰)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고 했고, 맹자는 인간이 그 본성을 잃었을 때 그것을 역천(逆天)이라고 했다. 영혼이 맑은 시인 윤동주는 그 본성을 지키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왜, 지금 무위(無爲)와 천지자연의 도(道)를 이야기하는가. 오늘날 인간이 누리는 문명이 풍요롭고 편리하기 그지없지만, 이 문명의 시대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또한 여간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有爲]이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만들어진 유형·무형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작금 문명(文明)이 양산하는 유형·무형의 ‘쓰레기’로 인한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인간의 문명 생활이 배출하는 온갖 쓰레기에 의해 지구의 온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고, 하나의 생명체인 지구는 자정(自淨)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아, 드디어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이아의 이론’을 세운 제임스 러브록(1979)에 의하면 ‘가이아(Gia)란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물을 비롯해 토양, 바다, 대기권 등의 무생물계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다. 즉,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기조절 시스템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는 범유기체이자 거대한 생명체(生命體)가 바로 지구(地球)라는 이론이다.’
러브록의 의하면, 가이아 즉 생명체인 지구가 인간에게 반격(反擊)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최근 프랑스에서 주목받는 장르 소설가 막심 샤탕이 펴낸 ‘가이아 이론’의 첫 부분은 이렇게 경고한다. “인간이 다 지배하려는 욕심 때문에 지구는 몸살에 걸렸고, 그 몸살을 만든 세균은 바로 인간이다.” … 사실 요즘 우리가 겪는 일련의 재난을 생각하면 실감이 가는 말이다. 이러한 우려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남극이나 북극, 대륙의 빙하까지 녹아내려 해수면이 상승함으로써 온갖 기상이변이 일어나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우리는 자연의 생명성(生命性), 천지자연의 도(道)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자연 즉 지구가 병들면 인간도 생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심각한 것은,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신문화의 빈곤이다. 물신적 자본주의와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가 불러온 인간성의 타락은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대량생산-대량소비의 경제구조와 극도에 달한 인간의 이기심이 우리의 삶을 삭막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인간의 부조리는 모두 인간의 탐욕[人爲]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문명[有爲]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상대적으로 자연의 순수한 가치[無爲]를 경시하기 일쑤다. 그 사례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갖가지 이기적 행태와 파렴치, 위선과 오만 … 그리하여 세상은 탐욕이 빚어내는 온통 갈등의 연속이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生存)이 위협 받고, 영혼(靈魂)의 강(江)이 메말라가고 있다. 자연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 자연을 살리고 인간도 살기 위해서는 자연의 생태 즉 ‘무위(無爲)’의 가치를 잊지 않아야 한다. … 무위(無爲)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자연의 순수한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다.
고요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낙동강 종주 대장정을 시작할 때 화두로 삼은 것이 상선약수(上善若水)였다. …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과 같이 사는 것이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공을 다투지 않고, 모두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므로, 도(道)에 가깝다. … 낮은 땅에 처하면서도 마음은 깊은 심연으로 향한다. 남과 함께 하면서 늘 한마음이 되고, 말을 하면 (말없이) 미덥다. 다스리면 잘 다스려지고, 일을 하면 큰 능력을 발휘하며, 움직이면 늘 시의(時宜)에 맞는다. 애당초 남과 다투지 않으니 … 허물이 없다.(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夫唯不爭 故無尤)”
낙동강은 저 아래쪽의 설치한 [칠곡보]로 인해 거대한 담수호가 되어 있다. 머문 듯 흐르는 강물이다. 동락서원에서 병자호란을 상기하며 아픈 역사가 눈물을 흘리고, 구미공업단지 기념비 앞에서 한 시대의 '유별난 지도자'를 만나 뜨거운 감회에 젖었다. 강물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모든 세월을 그냥 삼키고 있지만, 수백 리 흘러온 물길은 인간의 유구한 역사,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애환은 시퍼런 강심(江心)에 간직하고 있다.
구미, 낙동강 양안의 공단 풍경
구미의 제방 길,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발길을 옮겨 놓는다. 호수처럼 고여 있는 낙동강을 적막하기 그지없다. …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시야에 펼쳐진 길은 거침없이 한 일(一)자로 뻗어있다. 나는 지금, 낙동강과 구미 제2공단 사이의 제방 길을 걷고 있다. 낙동강 양안(兩岸)에는 거대한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강 건너 구미시 시미동 ‘LG Disply’ 백색의 건물이 보인다. 연이은 건물에 ‘Grobal No.1 Disply Company’ 라고 적은 영문 광고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구미국가산업단지 제3단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공장이다. .... 내가 걷고 있는 오른쪽으로, 도로 너머 공단 제2단지에는 ‘LS전선’ 그리고 ‘삼성전자 구미1사업장’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LG전자 A3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구미, 호젓한 수변공원 길
오후 1시 40분, 강둑의 길에서 둔치의 수변공원 길로 내려섰다. 강둑의 사면에 맑은 햇살을 받은 눈부신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강안의 공원 길로 내려오니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아주 호젓하다. 공원으로 조성된 너른 둔치의 풀밭, 지금은 가을의 마른 풀밭이다. 몇 그루 나무와 벤치가 있는 풍경도 있다. 한가로운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 저 앞에 낙동강을 가로질러 가는 큰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내가 건너야 할 그 신구미대교이다. 대교의 중간에 높은 낙동강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공원 길의 길목에 ‘↑낙동강 하구둑 241km ↓안동댐 144km’가 적힌 원주의 이정표가 보인다. 부산 앞바다까지 갈 길이 아직도 멀다. 대교 아래에 예쁘고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뽀얀 억새꽃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남구미대교 낙동강 전망대
오후 1시 50분, 강을 건너기 위해 남구미대교에 올라섰다. 구미시 공단동과 칠곡군 석적읍을 잇는 일반도로의 교량이다. 다리의 가장 자리에 바이크로드가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구미시 구간은 낙동강의 서안의 제방 길이었다. 이제 다리를 건너면 칠곡군이다. 앞으로 칠곡군 영역(신구미대교→석적→칠곡보-왜관)은 낙동강의 동안(東岸)의 강변 길을 걷게 된다.
남구미대교 한 가운데 지상 4층의 전망대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의 전망대에 올라갔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주변의 모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북쪽으로는 내가 지금까지 걸어내려온 낙동강 주변, 강 건너에는 ‘LG Disply’ 공장이 선명하게 보이고, 서쪽은 구미공단과 구미시가지와 멀리 금오산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강의 하류, 남쪽으로는 호수 같은 낙동강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낙동강을 가로질러 가는 경부고속도로 교량[왜관낙동강교]이 보이고, 강의 좌측으로 칠곡군 석적동의 하얀 아파트군도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전망대에서 내려와 대교를 건넌다. 다리 중간, 바이크로드 바닥에 구미시와 칠곡군의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그 경계의 다리 난간에, 하얀 바탕에 빨간 하트 무늬를 담은 깨끗한 ‘입간판’을 붙여놓았다.
“당신을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우리에게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라고 쓴 제목의 입간판이다. 그 아래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힘들 땐 손을 내밀어 보세요. 우리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고 쓴 문구가 있고, 그 아래 빨간 하트 안에 ‘408-4087 / 구미보건소 구미정신보건센터’가 적혀 있다.
이 낙동강 다리 위에서, 인생의 힘든 처지를 어쩌기 못하고, 저 깊은 강물에 … 극단적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따뜻한 간판이었다. 아, 여기에서 가끔 절망적인 일이 일어나는 곳인가 보다. 잠시 낙동강 깊은 강물을 내려다보며 막막한 인생을 생각했다. 사람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고 아픔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평소 깨닫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는 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산다. 인생의 어느 한 굽이, 누구나 한두 번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무거운 질문이 주어진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한국은 OECD 다른 국가의 세 배인 하루 40명(40분마다 1명)이 자살하고 1년에 1만 5천 이상이 자살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제적으로 유족한 나라, 하필 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좀 살만하다고 하는 나라에서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극단적인 선택이 다만 개인적인 문제로 돌릴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부조리한 사회의 생명 가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잘못된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닐까.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절망감을 생각하니 인생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인간 존재에 대한 처연한 감정이 저 강물처럼 가슴을 채운다. 나는 지금 혼자서 천 리 길을 걷고 있다. 아득하게 먼 길을 걸으며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고행이다. 지금은 멀고 막막한 길이지만 가다보면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 하나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남구미대교에서 대덕대교까지의 수변공원 길 그리고 칠곡보 왜관
칠 곡
오후 2시 12분, 남구미대교 다리를 건넜다. 이제 칠곡군 영역이다. 배가 고팠다. 길가에 아름다운 카페 건물이 있고, 그 앞에 간이식당이 있다. 거기에 들어가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식사 후, 작은 하천(광암천)을 끼고 ∩턴하여 강안으로 내려가 남구미대교 교각 아래를 지나는 강변의 바이크로드로 들어선다. 그런데 강안으로 내려가는 길, 광암천 하수구에서 쏟아나오는 시커먼 물을 목격했다. 기가 막혔다. 하수구에서 불과 20여 미터 아래 낙동강이다. 오염된 폐수가 여과 없이 그대로 낙동강에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4대강 정비사업의 보(洑)를 건설하면서 가장 우려하고 걱정한 것이 수질오염인데, 오늘 이 멀건 대낮에 페수 방류의 현장을 눈으로 보고나니 참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
나는 네이버 검색창에서 전화번호를 확인하여 칠곡군청에 전화를 했다. 담당자와 통화하는 절차가 복잡했지만, 폐수 방류의 현장, ‘남구미대교 앞 S오일 주유소 옆 광암천에 시커먼 폐수가 그대로 낙동강에 쏟아져들어 간다‘고 신고를 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개선을 촉구했다.
바이크로드를 따라 강안으로 내려가니 남구미대교 교각 아래 벤치가 있었다. 이른 아침 구미시장에서 산 노란색 귤을 두어 개 까서 먹었다. 제주도 바닷바람을 머금은 귤의 향기가 깊었다. 완강한 콘크리드 교각 아래 낙동강은 고요한 호수가 되어 있었다. 아래쪽에 칠곡보가 있기 때문이다. … 가을색 짙은 절벽 아래를 돌아가는 길, 강안에 낙동강물이 넘실거리고 있다. 저 아래 칠곡보로 인해 가두어진 낙동강물이 호수처럼 고여 있다. 길바닥에 ‘↑낙동강 하구둑 239km ↓안동댐 146km’ 이정을 표시해 놓았다. 절벽 때문에 길을 내지 못하는 곳에는 나무테크로 수상탐방길를 시설해 놓았다. 벼랑의 나무, 넘실거린 강물, 수상의 테크 길, 강변의 바이크로드는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어지는 바이크로드는 제방 길로 올라간다.
칠곡 두드림[Do Dream]공원
눈앞에는 낙동강 넓은 둔치에 수변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제방의 바이크로드를 따라 가지 않고, 수변공원에 나 있는 길로 들어섰다. 아주 너른 잔디밭이다. 잔디공원의 입구에 작은 안내판이 있다. ‘두드림[Do Dream]공원’이라고 했다. 꼭 해석하자면 ‘꿈을 꾸세요!’라는 메시지인데 기교가 넘치는 이름이다. 맑은 하늘, 엷은 구름이 드리우고 있지만, 따뜻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청명한 날이다. 길은 강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고 있다. 오른쪽 강가에는 짙는 갈색을 띄고 있는 억새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왼쪽에는 칠곡군 석적읍, 하얗게 도색한 깔끔한 분위기의 ‘우방신천지’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조금 내려가니 수변공원에는 석적체육공원, 우방야구장도 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의 거대한 교량 왜관낙동교가 강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아, 태백에서 발원하여 수백 리를 흘러온 낙동강이, 이제 여기에서 근대화의 상징이 경부고속도로와 만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강둑 너머, 67번도로와 나란히 왜관-대구로 내려간다. 다리 아래 그늘이 시원했다. 잠시 더운 기운을 식히고 무거운 다리를 풀어 놓았다. 그늘에서. 맞는 강바람이 아주 상쾌하다!
고즈넉하고 평화스러운 수변공원의 길
수변공원의 길은 잔디밭이거나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자박자박 걷는 맛이 좋다. 사실 사람이 지기(地氣)를 받으려면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이 아닌 흙길을 걸어야 한다. 제방 위에 조성된 바이크로드는 아스콘으로 포장되어 있다. 공원의 길은 고즈넉한 가을의 풍취를 풍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니 광활한 잔디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거기 너른 잔디밭에는 군데군데 사람들이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칠곡군의 낙동강 ‘석적파크골프장’이다. 남녀 사람들이 시원한 강가,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는 잔디공원에서 맑은 공기를 쐬며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참으로 여유 있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자연 속에서 여가를 즐기는 삶이 유족해 보인다.
대덕대교를 지나다
오후 2시 20분, 파크골프장을 지나, 아래로 내려오면 포남야구장이 있다. 그 아래 또 하나의 교량이 낙동강을 가로지른다. 서쪽의 칠곡군 북상읍 오천에서 동쪽의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를 잇는 33번 도로의 대덕대교이다. 33번 도로는 구미시 선산읍에서 구미시 낙동강 동쪽의 양포동을 경유하여 내려오다가 이곳 석적읍 포남리에서 덕적대교를 건너 칠곡군 북상읍 오천(-약목)으로 이어지는 국도이다.
다시 이어지는 수변공원 길, 자연스럽게 자란 갈색의 잡초 사이로 쭉 뻗어 있다. 길은 길고 길었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강변에 조성된 공원은 참으로 평화스럽고 여유가 있다. 가을 햇살이 내리는 풍경은 그야말로 천지자연의 맑은 기운이 거리낌없이 충만해 있었다. 가을의 태평성대가 아닐 수 없다. 남구미대교부터 은근히 딱딱하게 느껴지던 다리가 무척 무겁다. 한가로운 강변 풍경과는 달리, 아득한 길을 걸어가는 무거운 발걸음, 인적이 거의 없는 넓은 수변공원 길, 마음을 가다듬고 유연하게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오늘의 일차적인 포인트(목적지)는 칠곡보, 그리고 그 아래 왜관읍에서 이상배 대장을 만나, 유숙할 예정이다. 아직 칠곡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지만 갈 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오후 3시 52분, 둔치의 마른 풀더미 너머로 낙동강 물이 너른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 망망한 수면 위로 아주 멀리 칠곡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각적으로 너무나 아득하게 보이는 거리이다. 수변공원의 길은 여전히 길게 이어진다. 길가에는 억새꽃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제방 길 바이크로드
오후 4시 5분, 제방 위의 바이크로드에 올라섰다. 좌측에는 67번 국도가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67번국도는 구미시 양포동에서 칠곡보와 왜관읍을 경유하여 달성구 하빈으로 이어지는, 낙동강변을 따라 가는 도로이다. 낙동강과 도로 사이의 긴 제방 길, 화사한 가을 햇살을 받아 아주 쾌적한 풍경이다. 낙동강과 쭉 뻗는 길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돌아보니 지나온 수변공원과 멀리 덕적교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길옆 원주(圓柱)의 이정표에 ‘↑낙동강 하구둑 209km’를 표시해 놓았다. 이제 부산까지 500리 정도가 남았다. 조금 내려오니 낙동강에 유입되는 반지천을 만났다. 67번 도로의 교각 아래로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 반계교를 건너 ‘참살이 허브농원’ 앞을 지나 다시 낙동강 강안으로 내려왔다. 강둑의 왼쪽으로 조금 내려와 67번 국도의 굴다리를 통해 강변의 둔치에 들어섰다. 둔치의 길을 따라 걷는다. 강물은 발아래까지 다가와 넘실거리고 강안에는 습지가 이어진다.
경부고속철도 교각 칠곡보생태공원
오후 4시40분, 시야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였다. 김천구미역에서 동대구역으로 이어지는 경부고속철도의 교각이다. 강철로 건설된 직선의 다리이다.오후의 맑은 햇살을 받은 강변의 풍경이 정결하다. 철로의 교각을 지나고 나서도 넓은 둔치의 공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주 잘 가꾸어진 ‘칠곡보생태공원’의 너른 잔디공원이었다. 아주 광활한 공간이다. 거기, 좌측의 산 아래 ‘왜관전적기념관’이 있고, 그 오른쪽 산기슭에는 대형 태극기가 휘날리는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있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이다. 뒤쪽의 산속으로 고속철도가 들어가고, 그 앞에는 67번 도로가 지난다. 도로의 아래 잔디사면의 ‘호국 평화의 도시 칠곡’이라고 쓴 글자구조물을 설치해 놓았다. 아, 여기 칠곡-- 왜관의 낙동강 주변은 6·25동란 중, 한 나라의 명운을 건 최후의 낙동강 전선,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아, 6·25 전쟁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작오산 아래의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은, 6.25 전쟁이 터지고 파죽지세로 경상도 일대까지 남하한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 방어 전선이 구축되면서, 왜관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격전을 알리고 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호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기념관의 전시물을 통해 치열하게 펼쳐진 전투 상황을 알리며 6.25 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상기하여, 자유와 평화 수호의 의지를 일깨우는 교육장이다. 기념관 앞에는 한국의 전쟁에 참여한 16개국의 국기와 평화의 UN기가 펄럭이고 있다.
왜관지구 전투 상황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南進)을 계속하여 7월 말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해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美軍)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國軍) 제1사단이 담당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수안보(水安堡)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동강방어선전투 [洛東江防禦線戰鬪] (두산백과)
왜관지구 전투는 당시 왜관교 남쪽에서 낙동강을 도하(渡河)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금무봉으로 침투했던 적병을 소탕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 1950년 8월초 미 제1기갑사단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왜관, 현풍 일대에 이르는 방어를 담당하여 낙동강 강변에 제5, 제8, 제7기병 순으로 병행배치하고 있었다. 사단은 9월 9일 새벽 3시부터 북한군 제3사단의 도하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적의 선두부대는 왜관교 남쪽 3km의 노촌에서 총을 머리에 받쳐 들고 강행 도하(渡河)를 시도하였다. 정면의 제5기갑연대는 즉시 강을 향해 저지사격을 집중하였으나, 적을 관측한 시점이 너무 지체되어 이미 적 주력의 일부가 도하한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제5기갑 연대장은 즉시 북한군 주공부대가 후속하여 도하할 것으로 예상하고 도하저지작전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으며, 곧이어 예상대로 적(敵) 제3사단 제7, 제9연대가 신기 부근에서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각 조명탄과 예광탄으로 대낮같이 정면을 밝히고 노출된 적을 향해 보전포(보병, 전차, 포병)의 저지사격을 집중하였다. 도하 중인 적은 순식간에 대부분 궤멸(潰滅)되었으며 일부만이 다시 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 1개 대대가 금무봉으로 침투했음이 정찰대에 의해 밝혀졌다. 사단장은 예비부대인 제7기병연대 제1대대에 이를 구축하도록 역습명령을 하달하였다. 대대는 강력한 공격준비 사격을 가한 후 전차중대의 지원 하에 즉시 공격에 나섰다. 다음날에도 포병과 공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1대대는 전차를 투입하여 금무봉 후사면으로 교란한 후 전면과 후면에서 각각 협공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 주력을 격퇴하는데 마침내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 간에 금무봉 옆 도로상에서 부사단장 일행이 적의 매복에 걸려 피습을 당하였고, 또 사단장과 전술 토의를 하고 있던 제1대대 부대대장 등이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사단장과 부관은 피해를 면했지만 부대대장과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낙동강 도하 작전의 실패로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낙동강방어선에서도 9월 16일을 기해 역사적인 총반격 작전이 결행되어, 미 제5연대전투단은 금부봉을 거쳐 20일에 왜관과 작오산을 탈환하였으며, 미 제1기갑 사단은 다부동을 거쳐 23일 상주로 진격, 낙동강을 도하하여 일로 북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과 아군의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 고수(固守) 작전에서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한, 왜관 일대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 정병의 용감무쌍한 무용(武勇)은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적이다. 그리하여 그 불멸의 전적을 기념하고 그들의 피로 맺어진 한·미간의 우의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78년에 전투지 주변에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왜관지구전적비]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광장의 가장자리에 '왜관지구전적비'가 있다. 거기에 새겨진 국문과 영문으로 병기한 위령시(慰靈詩)와 함께 그 아래 왜관지구 전사(戰史)의 약사문(略史文)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영령들이여!
우리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기억하노라.
이곳 유학산 봉우리에 그리고 낙동강 기슭에 남긴
그때 그날의 거룩한 희생을 고귀한 피의 발자국을
우리 겨레는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The spirit of the departed / We saw and we heard and we will remember / And we keep dear in our hearts forever / The sacred sacrifice of that day and the broody footsteps / Left on the peak of Mt. YUHAK and on the bank of the NAK-DONG river
낙동강 전선 ―, 왜관 그리고 다부동
동족상잔의 6·25 전쟁, 이 비극적인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것이 낙동강(洛東江)을 사이에 둔 피아간의 처절한 낙동강 전투였다.
1950년 6월 25일 개전 이래 전 전선에 걸쳐 후퇴를 거듭하며 차례로 서울·수원·천안·대전을 인민군에게 내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7월 말 낙동강을 건너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8월 1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워커라인’이라고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을 설치하여, 왜관에서 마산과 진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서부방어선은 미군이, 왜관과 동해변의 영덕을 잇는 동부전선은 국군이 사수하도록 했다. 8월 3일에는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 위의 모든 다리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낙동강전투는 양측 병사들의 시체가 산야를 뒤덮고 핏물이 강을 붉게 물들이며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낙동강전투에서, 아니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투가 8월 16일에 있었다. 이날 왜관 건너편 낙동강 대안 일대에 인민군 4만 명이 집결, 대규모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왜관이 곧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워커 중장은 일본의 UN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폭격을 요청했다. 일본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 98대가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의 지역에 퍼부은 폭탄은 960t. 낙동강을 건너려고 한데 모여 있던 인민군 4만 명 가운데 적어도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또 하나의 전장이 다부동(多富洞)이다. 조선시대에는 다부원(多富院)으로 불리며 역참(驛站)이 들어서기도 했던 이 작은 한촌(寒村)이 동족이 서로를 살상하는 전쟁의 고비에서 피로 얼룩진 전장이 된 것은 그 지형적인 특징 때문이었다.
마을의 서북쪽에 유학산(839m)이, 동쪽으로는 가산(902m)이 솟아 국군으로서는 방어에 유리한 지점이 이곳이었다. 반면 이 지역이 돌파될 경우에는 10㎞ 남쪽의 도덕산(660m) 일대까지 철수해야 하고, 그럴 경우 대구시가 인민군 지상 포화(砲火)의 사정권 안에 들게 되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 방어의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여기에서 인민군 3개 사단과 국군 1개 사단은 창과 방패가 되어 1950년 8월 초부터 달포가 넘도록 피로 점철된 전투를 전개했던 것이다. … 1981년 정부는 다부동전투를 기리는 전적비 겸 기념관을 유학산 기슭 다부동에 세웠다. ☜ [낙동강, 왜관 그리고 다부동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흥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낙동강전투 ―, 워커 장군, 그리고 워커힐(Walker Hill)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지상군총사령관 겸 초대 주한 미8군 사령관이다. 낙동강 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해 인천 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장군이다. 워커 대장은 6.25 전쟁 발발 직후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선에서 막아내면서 부하들에게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쟁평론가들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가 낙동강전투에서 밀렸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낙동강 전선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생명선이었다.
전쟁 발발 1개월 반 만인 8월 초, 북한군은 목포 진주 김천 포항을 함락시켰고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전선사령부가 있는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이 오기 전에 끝내라.”, “8월은 승리의 달이다”라고 전투지령을 내렸다. 전쟁 발발 35일 만에 미 24사단이 상주에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하였으므로, 이곳 낙동강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한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은 13개 사단의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워커장군은 이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했다. 낙동강방어선
2개월여 동안 대한민국의 사활을 건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 할 만큼 치열했던 전투였고, 낙동강전선이 뚫리면 미군은 바로 철수한다는 계획이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절체절명의 전투에서 워커대장은 낙동강방어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발판을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
그런데 낙동강전선 사수의 영웅 워커대장은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워커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서울 아차산에 워커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워커힐(Walker Hill)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후 아차산 기슭에 그 이름의 호텔이 지어졌다.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 1950년 8월 13일~8월 30일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 전선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이다. …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년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제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고, 당시는 7월 20일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던 직후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게 된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하는 것, 둘째,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 셋째,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 넷째,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으로의 공격하는 것 등이었다. 이는 4개의 공격축선에서의 동시 공격으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8월 초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왜관일대의 미 제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무렵인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 동경에 있는 미국 극동공군사령부는 8월 16일 낙동강변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단행했다. 이는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사령부가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맥아더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실시된 폭격이었다. 이 융단폭격은 북한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8일 가산에 침투한 적(敵)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후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낙동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제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
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었다.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고, 이로써 8월의 다부동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백선엽 장군 ◇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다부동(多富洞)은 6, 25 당시 낙동강 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있는 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는 대구방어에 있어서 마지막 전술적 요충지이다.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의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전차 약 20대 및 각종 화기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가지고서도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했다.
당시 윌턴 해리스 워커 장군은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해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이곳 전투에서 국군이 밀리자,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백선엽 장군은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며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우리가 밀리면 미군들도 철수한다. 내가 앞장선다!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용감한 국군병사들이 이를 따랐다. 그리하여 극적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다부동 전투 승리 덕분에 국군은 낙동강에 전열을 다시 재정비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다부동전투는 처참했다. 백 장군은 자신의 저서『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는 하천을 이뤘다. 시체가 풍기는 냄새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제1사단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당시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백선엽 장군은 영어로 직접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다.”며 “어렸을 적 평양에 살아 길을 잘 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1950년 10월19일 평양을 점령한 1사단은 김일성 집무실에 지휘소를 차렸다.
백선엽 장군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막아내 동부 전선 붕괴를 막아내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나섰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살 나이에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6·25 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선엽(白善燁, 1920년생) 예비역 대장이 2020년 7월 10일 밤,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작오산 아래, 왜관전적기념관 위쪽 산록에 있는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은 최근 2015년에 개관한 기념관으로,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서 총반격의 계기가 된 낙동강방어선전투 재조명하고, 사실감 넘치는 전시, 다채로운 체험을 통해 국민들에게 호국안보의식, 나라사랑정신의 함양, 추모·체험·교육·여가기능을 갖추어 보고 느끼게 하는 호국평화체험의 공간이다.
오후 4시 46분, 강안에 가을 햇살을 받은 자줏빛 핑크뮬리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고,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일 오늘의 마지막 햇살을 지상에 뿌리고 있었다. 낙동강 수면 위에 금빛 노을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저만큼 오늘의 포인트인 6개의 주탑(柱塔)이 우뚝한 칠곡보가 가까이 다가왔다.
☆… 아, 이렇게 평화롭고 고즈넉한 이곳 낙동강 유역에, 70년 전 수많은 젊은이들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갔다.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투의 현장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걸어내려온 안동-삼강-상주-구미가 모두 6·25 격전지이고 국군과 유엔군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밀리어 이곳 왜관지역까지 후퇴한 것이다. 그러므로 왜관의 낙동강 방어선은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다부동은 지금 눈으로 보이는 ‘칠곡호국평화공원’ 뒷산, [작오산]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위치해 있다. 이 작오산-황학산-유학산-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낙동강 방어선 즉 워커라인이다. 지금 중앙고속도롤 가산 나들목 부근의 산이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다. 거기에는 지금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있고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다부동전승기념비’가 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 영령(英靈)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나의 낙동강 여정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지나고 있다.
호국경 ― ‘6·25 노래’비
오후 4시 53분, 칠곡보(漆谷洑)에 도착했다. 해가 서산 위에 걸려 있다. 그런데 칠곡보(洑)의 다리 앞에 다채롭고 아름답게 조형된 노래비가 있다. 제목은 ‘호국경’인데,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니, 하단의 원구의 단면에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 노래’를 새겨놓았다.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참 오랜만에 만나는 ‘6·25 노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이 ‘6·25 노래’가, 여기 낙동강 전투의 현장에서 만난 것이다. 차가운 빗돌 속에 갇힌 뜨거운 노래! 그 결의에 찬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공산군의 대공세에 맞서, 국가존망이 걸린 전투 현장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노래이고, 울분으로 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유추해 보건대, 죽이고 죽이는 격렬한 전투의 현장에서 목에서 피가 터지게 불렀음직한 노래다. 꽃다운 젊은 나이에 적의 총탄을 맞으며 절규하듯이 부른 용사의 노래일수 있고,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전우의 모습을 보고 복수의 열망으로 불렀음직한 반공(反共)의 노래이다.
‘6.25’는 우리 민족사(民族史)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겨준 사변(事變)이었다. ‘6·25 노래’는 참혹한 6·25전쟁을 겪고 전후 반세기 동안 때만 되면 부르던 노래였다. 그 당시는 반공(反共)이 국가안보의 근본이었다. 앞서 낙동강 전투에서 돌이켜 보았듯이 북한의 남침은 국가를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노래는 6·25전쟁을 몸으로 겪은 시인이 당시의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고 전쟁 중에 희생된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서 지은 시(詩)이다. 전후의 반공의 정서가 팽배한 가운데 이 노래는 자연스럽게 국민가요가 되어 교과서에 실리고 학교에서 불려졌다. 특히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응원가로 열창하던 노래였다.
요즘의 아이들은 이런 노래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교과서에도 없고 학교의 현장에서도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6·25 전쟁을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위하여 부르던 노래이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노래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치열했던 전선의 강가에 서 있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6·25 노래’는 물론 ‘6.25’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아니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6·25전쟁은 남한이 북한을 침범하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역사를 날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더구나 종북 좌파 문재인 정권에서 노래 속의 ‘조국’은 ‘우리 민족끼리’의 나라이고, 노래 속의 ‘원수’는 이 정권이 해바라기처럼 신봉하는 ‘수령’이 대체해버린 실정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6.25전쟁을 통해서 보면, 피를 함께 나눈 동족으로서 평화로운 이 나라를 침공하여 10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저들은 ‘원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쳐서 무찔러야 할’ 대상이었다.
북한의 침공으로 벌어진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 국군(國軍)의 사망자는 무려 137,899명에 이르며, 실종자(失踪者) 수는 32,838명이나 된다. 부상을 당한 국군도 450,742명에 이른다. 민간인(民間人)들의 사망자는 학살당한 사람까지 합쳐서 37만여 명에 이르며, 부상당한 사람도 23만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다. 여기에다 피난민(避難民)이 240만여 명, 전쟁고아가 10만여 명이나 발생했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20만여 가정, 남편을 잃은 부인도 20여 만명이나 발생했다. 부상자도 그냥 부상자가 아니다. 팔과 다리를 잃고, 악성 총상으로 신음하다가 조금 남은 논밭전지마저 모두 탕진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미국(美國)을 포함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3만 6천 9백여 명이고, 11만 6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종(失踪)되거나 포로가 된 병사들이 6,9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 ‘6·25 노래’가 거칠고 공격적이어서, 지금의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국민 정서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고집스럽게 격정적인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6·25전쟁의 발발과 참상을 잊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북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여 ‘서울 불바다 운운’하며 우리를 철저하게 적대(敵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북의 대남전략으로 볼 때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 망상이다. 잘 포장된 비굴한 종북의 행태일 뿐이다. 대통령이 북으로부터 소대가리 소리를 들으면서 친북을 하는 것은 우리의 자존까지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 당 대회에서 북의 김정은은 국지전(局地戰)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핵폭탄을 소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중거리·단거리 미사일을 탑재할 핵잠수함 건조 계획도 비쳤다. 북은 이미 수도권은 물론이고 중부권까지 타격할 대형 방사포를 무수히 배치했다. 북한이 전술핵을 동원해 선제(先制) 공격할 경우 우리 군이 어떤 무기로 퇴치(退治)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피로 얼룩진 낙동강 전투의 현장에서 말로 다할 수가 없는 비통함을 느낀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은 늘 전쟁을 준비하며 가해자(加害者)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눈치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참으로 비굴하기 짝이 없다. 6·25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100만 명의 원혼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칠곡보 ― 왜관 ‘호국의 다리’
오후 5시가 넘어가면서 짧은 가을해도 서산(西山)을 넘어가고 있었다. 낙동강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왜관까지는 2km를 더 내려가야한다. 몸은 천 근이고 다리는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왜관에서 산책을 나온 사람이 있어 칠곡보를 배경으로 하여 인증샷 한 컷 눌렀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은 가난한 노을을 받아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때 이상배 대장으로부터 왜관에 도착하였다는 전화가 왔다. 마지막 남은 나의 인내심이 다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왜관 ‘호국의 다리’
여기 왜관전투의 현장인 낙동강에는 그 동안 고속도로, 철도, 국도가 지나는 다리가 새로 놓였다. 그런데, 그 아래 이따금 사람들만이 오가는 다리 하나가 있다. ‘호국의 다리’라 불리는 왜관 인도교이다. 이 다리는 낙동강전투에서 폭파되었던 철교를 복구한 것으로, 서로 적이 되어 죽고 죽이면서 무수한 동포들의 피로 물들인 그 낙동강전투의 상징물이 되어 있다. 일반 철교를 지나고 1번 도로의 왜관교를 지나고 ‘호국의 다리’ 아래를 지났다. ..... 강가에 안내판이 있어 읽어 보았다.↓
“엘리엇 미 육군 중위와 그의 부인 이곳에 잠들다"
제임스 호머 엘리엇 미 육군 중위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두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불행이도 1950년 8월 호국의 다리 인근에서 야간 작전 중 실종되어 영원히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엘리엇의 부인 알딘 엘리엇 브렉스톤은 평생 동안 기다렸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의 유해를 남편이 잠들어 있는 호국의 다리 아래 뿌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201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아들(제임스)와 딸(조르자)은 여기 호국의 다리 아래에서 어머니의 유해를 뿌려 부모님의 사후 만남을 기원했다. 엘리엇 가족의 슬픈 사연을 알게 된칠곡 군민은 2018년 10월 제6회 낙동강 세계 평화 문화대축전에 엘리엇의 아들과 딸을 초청하여 엣리엇 중위의 희생을 기리고 명예군민증을 수여했다. / 칠곡군민은 호국의 다리 아래 잠들어 계시는 엘리엇 부부의 사후 재회와 영면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엘리엇 중위를 비롯하여 한국을 위해 희생하신 모든 참전용사의 명복을 빕니다. / 2018년 10월 칠곡군수 백선기”
오늘의 낙동강 종주를 마치며
오늘은 구미의 매학정에서 시작하여 숭선대교-산호대교을 지나 구미시를 관통하고 남구미대교를 건너 낙동강의 동안(東岸)의 길고 긴 칠곡 수변공원을 걸어 칠곡보에 지나 왜관에 도착했다. 장장 32km 이상을 걸은 것이다. 해가 저물어 어둑한 강변 풍경, 몸과 마음이 모두 무거웠다. 강둑을 넘어서 왜관읍 시내로 들어갔다. 도중에서 마중을 나온 이상배 대장을 만났다. 내일, 왜관에서 출발하여 달성 해빈을 거쳐 대구의 강정고령보까지 동행하기 위해서, 오늘 왜관에서 만나는 것이다.
오늘 낙동강 종주 가운데 가장 험난하고 뜨거운 역사의 고비를 넘어왔다. 구미대교 강 건너 동락서원에서 장현광 선생을 만나 병자호란의 아픈 눈물을 흘렸고, 또 구미공단 기념비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생애를 생각했다. 그리고 남구미대교 위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 사는 길’에 대하 깊이 생각했다. 무엇보다 칠곡의 수변공원에서 피와 살이 울부짖는 왜관지구-다부동지구 전투를 상기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몸을 떨었다. 이제 낙동강은 모든 인간사를 무거운 어둠 속에 묻어버리고, 그 어둠은 나그네의 격렬한 마음마저 삼켜버렸다. 마른 입안에서 단내가 난다. 참으로 무거운 하루였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