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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후집【5】 봉창죽옥蓬窓竹屋 * 쑥대로 얽은 창문과 대나무로 엮은 집.
得趣不在多 (득취부재다)하니
盆池拳石間 (분지권석간)에
烟霞具足(연하구족)하고
會景不在遠 (회경부재원)하니
蓬窓竹屋下 (봉창죽옥하)에
風月自賖 (풍월자사)니라.
<해석, 서정>
우아한 취미를 지니는 것은 (得趣)
깊은 자연 속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不在多)
좁은 연못과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盆池拳石間)
안개와 노을이 깃든다. (烟霞具足)
좋은 풍경을 두루 감상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會景不在遠)
쑥밭이 보이는 창문과 대나무로 엮은 집에도 (蓬窓竹屋下)
(쑥대로 얽은 창과 대나무로 엮은 집에도)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이 스스로 한가롭게 스민다. (風月自賖)
<풀이, 조지훈>
”종일 산과 들을 헤매었건만 봄을 못 보더니 돌아와 울타리의 매화 향기를 맡으니 봄이 이미 가지 끝에 무르익었더라“는 시가 있다. 풍취는 제 마음속에 있으니, 작은 풍경에도 큰 즐거움이 있고 마음만 한가로우면 눈앞과 발밑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절로 넉넉하다.
<적용>
봄은 이미 가지 끝에 무르익었더라 (春在枝頭已十分)
날이 다하도록 봄을 찾아 헤매었으나 봄은 보지 못하고 돌아와 보니 매화 가지 끝에 이미 봄이 한창이더라는 시는 인간의 인지 한계를 스스로 보여주는 솔직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한시(漢詩)는 중국 당나라 때 무명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불도의 진리를 깨달음을 기리는 오도송(悟道頌)과 송나라 때 대익(戴益)의 봄을 찾아 나서는 시 탐춘(探春)이 거의 같은 내용이어서 요즘 같으면 저작권 침해문제가 제기될 듯하다.
먼저 오도송을 보면 진리는 가까이에 있음을 깨우쳐 주는 듯하다. 몇 년 전에 ‘가까이 있는 도(道)’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 잠시 인용하면 이러하다. 도(道)는 지식으로 전달받을 수 없다는 장자(莊子)의 말이나, 깨달음과 아는 것은 별개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일치한다. 불교에 이런 일화가 있다. 부용산의 영훈 선사가 귀종 선사를 찾아가 부처님이 무엇인가 물으니, 귀종 선사 왈 ‘알려줘도 안 믿을 것이니 말하지 않겠노라.’ 영훈 선사가 또 묻기를 ‘내 진심으로 믿지, 어찌 아니 믿겠는가?’ 귀종 선사가 웃으며 왈, ‘자, 그럼 알려주지. 자네가 바로 부처님이네! 도(道)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크게 깨달으면 부처님이 되는 거라네.’ 이 말에서 영훈 선사는 툭! 깨달아 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깨달음이란 이론을 통해서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이 아니다. 영훈 선사는 내가 나를 깨닫는, 곧 나의 면목인 부처의 성품을 깨닫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통해,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고(見)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이루었다고 한다. 즉 그는 대오성불(大悟成佛)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예를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난 다음의 활연대오(豁然大悟)의 깨달음이나, 미국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큰 바위 얼굴을 보고 자랐다. 그 바위를 닮은 위대한 인물의 등장을 믿고 기다렸다. 그는 많은 유명한 사람을 만났으나 곧 실망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을 만나 그가 그 얼굴인지를 물었으나 오히려 시인은 주인공이 바로 큰 바위 얼굴임을 깨우쳐 준다. 요즘의 세태로 비유하면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반드시 먼 곳 산티아고까지 고행할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해파랑길, 남 파랑길, 서 파랑 길도 있고, 동네 둘레길이나 자락길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탐춘(探春)시에서 자기 주위에서 봄의 정취가 무르익었음에도 다른 곳에서 그 정취를 찾은 수고로움을 비유하고 있다. 이른 봄 매화꽃을 보기 위해 굳이 섬진강 축제를, 벚꽃을 즐기기 위해 진해군항제를 들어야 그들의 진수(眞髓)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가을 동네 둘레길에서 맞닥뜨린 단풍풍경이 절경이어서 이런 시를 써보았다.
가까이 있는 향연
북한산이나 설악으로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단풍은 산동네 자락에서
이미 절정이었다.
그 화려한 숲속의 향연에
흠뻑 젖어 들기란 색감의
성찬이다. 색깔과 색조가
질서 있게 엉켜 눈부시다.
이 숲에 들어가려면 화려한
의상보다 무채색이 어울린다.
선글라스는 무례하게 보인다.
그저 감탄만 보내면 족하다.
혹 단풍잎에 향기가 있을까?
그리하면 더 바랄 수 없는
천국이 되겠지. 그곳에는
온통 향기로 덮여있다기에.
2022.11.13. 비 온 뒤 산동네 단풍풍경
그러면 이들 시의 화자는 어찌하여 지팡이 짚고, 짚신이 닮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찾아가서 봄을 확인하지 못하였을까? 그러한 유명 관광지는 상춘객이 숱하게 몰려오는 곳이다. 어쩌면 친구들과 함께 화전놀이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곳에서는 자신의 내부와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그러하려면 혼자여야 하고 정신은 외로워야 한다. 고독한 상태에서 사물과 홀로 대면하여 대화하고, 때로는 절대자와 단독자로서 마주쳐야 한다. 그래서 구도자와 같이 내부의 가장 깊은 심연이나 비밀스러운 부분에 이르기까지, 즉 영혼의 심층부까지 자기를 비워 ‘Penetralia’의 상태가 될 때, 그때에야 사물의 진수나 가치, 그리고 진리와 가까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니란자 강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내면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온다. ‘이 강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그에게는, 이 강과 그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비밀을, 아니 모든 비밀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마침내 그가 깨달은 것은 그의 인생이 하나의 강이어서 젊은 싯다르타와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공자도 논어 자한(子罕) 편에서 시냇가에 앉아 긴 시간을 보내며 말했다. ‘모든 흘러가는 것들이 저와 같구나. 밤낮 쉬지 않고 흐르고 있도다.’ 공자는 흐르는 물이 무한한 시간을 두고 이동해 왔을 뿐 끝내 성취해야 할 목표가 없는 것과 같이, 인생도 그러하다면 너무나 무서운 일일 것이기에 목적이 있는, 가치를 가진,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한 것으로 보인다.
사월이 되자 이제 봄은 절정에 가까이 다가오는 듯, 하얀 목련과 벚꽃은 이미 지고 새잎이 푸르다. 이 푸르름에 대조를 이루는 붉은 색조의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예수는 이런 계절쯤에“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고 하셨다.
이러한 징조나 낌새를 알아차리려면 자신의 내부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낸 ‘Penetralia’의 상태가 될 때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름이 옴을 확인하러 너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서양 속담과 같이 아름다움은 보는 자의 눈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으면 될 것이다.
2023.4.9. 부활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