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음악을 넘나든 삶의 그림자
-김정환 시인의 『거푸집 연주』에 대하여
백소연 추천
‘삶’과 ‘죽음’이란 표현을 더 짧은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때로 이 두 단어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삶은 관계와 관계이며 미완성의 변주곡이다. 이때 언어는 사고와 인식을 재탄생시키고 사상과 감정을 정화시키는 관계망을 형성한다. 김정환시인의 『거푸집 연주』는 전체 4부로 구성되었다. 20세기의 시대정신에 대한 성찰이 21세기에 이르러 어떤 아포리즘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는지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큰 테두리는 사유와 어우러진 음악과 생을 디자인한 처절한 시대정신이다. 삶은 고뇌의 연속이다. 인간은 그 경도된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프로이트(S·Freud)는 꿈의 해석에서 무의식을 지배적인 힘으로 파악한다. 선과 악은 서로 상반 되어 보이지만 의식과 무의식은 겉과 안처럼 기대고 살기 때문이다. 칼·융(C· G· jung)은 원형론에서 생물적 본능과 심리적 원형을 연결하여 설명하였으며,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잠재하는 것을 원형이라 규정했다. 예를 들면, 탄생과 죽음, 천사와 악마, 아니마 아니무스 등이다. 또 윈체스터(T.C. Win-chester)는 『문학비평의 제원리』에서 “개개의 정서는 순간적이지만, 인간 정서의 일반 특질은 크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연속하고 있는 개개의 감정의 물결은 잠깐 동안 일어나서 부서져버리지만, 물결의 대양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끊임없이 파도치고 있다”는 비유의 말을 하였다. 우리는 어둠 속의 그림자를 만날 때 오싹한 신체적 현상과 더불어 공포라는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감정일 뿐 누구에게나 동일할 순 없다. 사상과 정서의 표현방법에 따라서 기쁨과 고통, 공포와 경이, 슬픔과 고뇌, 권태와 향수, 사랑과 미움, 노여움과 반가움에 대한 시인의 각(角)은 새롭게 펼쳐지기 마련이다.
잘난 사람들은 모른다
내 날개가 바로 어깻죽지의
운명이라는 것을.
날아오르는 날개는 없다.
내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
떠받침이 있을 뿐.
숭배보다 더한
그 무엇이 있을 뿐.
지상의
짐승의 시체를 파먹으며
내 날개가 느끼는 것은
유가족 집단의, 집단적인
위의(威儀)
산 귀속 슬픈 노래와
죽은 귀 속으로
살아남는 선율의.
그 사이 벽의.
그 벽인 나의.
-<독수리>중
김정환 시인의 독특한 형식과 광활한 시야와 그에 따른 폭넓은 지식의 깊이는 섬뜩함과 동시에 자아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것은 제동 불가능한 21세기 현대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풍경소리와 흡사하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과 죽음,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다. 그러함에도 사는 것에 몰두하다 보면 나와 죽음은 무관한 듯 멀리보기 마련이다. 시인은 말한다. 삶을 뒤집어야 죽음이 보이는 것이라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에 따른 무수한 사유들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망 즉 그의 시적 세계관과 직결된다. 그래서일까. “내 날개가 느끼는 것은 유가족 집단의, 집단적인 위의(威儀)” 라는 구절에 다다를 즈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내 날개가 바로 어깻쭉지의 운명이라는 것을”깨닫게 된 것이다. ‘날개’라는 명사 속에는 자동사와 타동사로서의 ‘날다’와 ‘접다’라는 의미망이 숨어있다. 누구에게도 간섭 받고 싶지 않으나 어떠한 것들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기제가 우리 모두의 일상이다. 때때로 날개를 접어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침잠해 있다. 짐승의 시체를 파먹으며 날개를 퍼덕이는 어깻죽지는 좌절된 희망마저 움직이게 하는 어떤 힘이다. 어둠을 깨트려야만 비로소 새벽을 맞을 수 있는 꿈틀거림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반추된 죽음은 삶과 동일한 알레고리다.
너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체위를
무슨 결심하듯 허공에 단 한번
손뼉 짝 박수를 치고
속도와 방향의 운이 좋은 그사이 나는 죽는다.
눈 깜짝할 사이고, 합장이다. 운이 나쁘면 내가 긴 다리를
더 쭉쭉 뻗으며 죽음의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착하다면 네가 연민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건 ‘뒤늦은’보다 ‘하마터면’에 더 가까울 것.
그렇지 않더라도 내 다리의 기나긴 경련은
너나 나나 속수무책일 것이다.
바퀴벌레 같은 소리.
네 말마따나 목숨은 기계와 같다. 다만
거기까지만 너의 말,
나의 정신을 보지 못한 네가 정신을 잃는 나의
순간을 보았을 리 없다. 그 순간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1>
동양의 오랜 전통에서 시詩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곧 언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상서尙書』의 「순전舜典」편에 전하는 ‘詩言志歌永言’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시’의 의미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음악과 시 소설 평론 등 외적인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창작에 몰두해 온 시인은 파격적인 형식과 행갈이를 시행한다. 삶은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찰나의 연속이다. 편편마다 네 삶이 곧 내 삶이 되는 물활론적인 정서의 환기에 주목한다. 이는 나와 대상을 직간접적으로 치환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칸트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알려면 일체의 관심(interest)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을 주장한다. 즉 관심은 선입견이나 편견이 될 수 있으며 무관심성은 일체의 것을 배제한 정신적인 조화를 일컫는 셈이다. 시인은 눈 깜짝할 사이 죽음을 맞는 생과 자신을 몰아일체 시키고 있다. 나와 대상에 대한 거리는 곧 삶과 죽음에 대한 간섭이 찰나에 있음을 직시하게 한다.
너의 시간은 흘러간다. 위태하다. 째깍째깍 나의 육신을
찢어발기는
의성과 의태 모두
나의 시간은 명멸한다. 그 명멸 속으로 나도 명멸한다. 명멸이
원래 나의 삶이기도 하였다는 생각. 정신을 잃으며
시간은 누구에게
빛인가.
너는 이상한 장소 이상한 시간이다.
너의 계단은 불안하지만 불안은 나의 계단이다.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1>중
“째깍째깍 나의 육신을 찢어발기는” 죽음은 생명 있는 것들을 간섭하는 개별적이고도 집단적이다.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모양새로 ‘삶’과 ‘죽음’은 다른 듯 같은 한 몸인 것이다. 켜졌다 꺼지는 순간이 명멸이다. 즉 살아있기에 떠남에 대한 무늬가 드러나고 숨어있던 욕망과 애증의 결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자연’이라 일컫는다. 이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구 불멸한 것이 아니라 극히 제한된 영역이요 찰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일체를 온전히 받아들여 그 내성을 기르는 일은 인간에게 있어서 늘 숙제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여 그도 天刑이라 불리는 시인이 되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살다보면 자루 속을 뒤집듯 있는 사실이나 있었던 사실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 때, 불현 난감한 경우가 발생한다. “너는 이상한 장소 이상한 시간이다 너의 계단은 불안하지만 불안은 나의 계단이다”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 앞에 천착 되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칼·융은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자신에 관한 앎을 견딜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과제의 한 작은 부분을 해결한 것이다. 즉 그는 최소한 개인적 무의식을 극복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흐르는 음악에서
건축인 음향을 뺀다면(그러니까 당신, 너무
덜컹대면 곤란하지. 무너진다.) 네 눈동자에 어린
내 얼굴 보고 내 눈동자에 어렸을 네 얼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탄생한다.(그러니까 당신, 너무 토라지면
곤란하지. 등 돌리면 평면은
아무리 깊어도 표정이 될 수 없다.)
나는 내 차원에서 너는 네 차원에서
움직일밖에 없지만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내 차원이고 네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네 차원이기에 그것은
끊임없이 세계의 주인공
모성 속으로 운동하는
중력의 댓가로 입체를 입는다.
-중략-
말은 생각의 목소리이고 언어는 생각이 말로 되는
순간의 생각이고
언어는 조각이다.
-중략-
우리는 어느새 시간을 조각한
광경이고 언어다.
그렇게 목구멍, 소리를 내고
음성, 그대를 알고
우리는 말이 된다.
그렇게 생명은 생명의 가상현실을 벗고
서로의 손은 서로의 그릇 너머 벌써
거푸집이다.
-<조각의 언어> 중
문명이 고도의 편리함과 윤택함을 안겨줄수록 21세기 현대인들은 흔들린다. 쾌속에 쫓긴 자아가 끝내 여러 개로 쪼개져 이중인격, 다중인격 등 인격장애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해리된 정신세계는 가식과 진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페르소나(persona)를 형성하게 만든다. 안과 밖의 닮은 듯 다른 이질적인 관계망이 조망된다. 종국에 분리되어 있지만 결속 되어 있는 너와 나의 시간은 벌써 거푸집이다.
일년의 반을 늑대들과 산다는 그는
나머지 반 집 생활 식탁에서도 좀체
야채를 먹지 않는다. 늑대들 사이 자신의 서열이
떨어진다는 거지. 늑대도 그중 비루한 것들은
야채를 먹는 모양. 피에서 야채에 이르는 서열의
냄새와 모양 사이 늑대의 언어가 있다. 사이 속으로 있고
갈수록 있다. 늑대는 동거고 의미는 시간 흐름 아니라 전무후무한
광경. 공전절후도 없지. 나날이 생이 생애의 공간, 이어지지
않으므로 매번 새로운.
그것을 느끼면 늑대 동거 더 행복할 것이다.
-<늑대 동거> 중
흰개미 여왕벌 공룡 물고기 철새 귀상어 연어 늑대 바그너 멘델스존 헨델 하이든 바흐 베토벤 쇼팽 슈트라우스 윌리스 스티븐스 로버트 프로스트 예이츠 그 밖의 위인들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각에 조망된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는 어둠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도전과 긍정의 날개를 편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진 밝음의 뒷면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할까. 신산(辛酸)한 삶의 관계와 관계망 속에 상실의 시대가 놓이고 상실은 또 다른 꿈을 꾸게 만든다. 희망은 늘 그렇게 좌절과 고통 속에서 바로 서기를 기대한다.
3백년이 역사 아니라 시사 같다.
혁명은 슬픔 닮은 짐승의
포효 없는 야만을 부르고 그 내용도 아닌
형식이, 민주주의라는 듯, 연민 없는 배설의 내용도 아닌
형식이 계몽이라는 듯이.
경건의 광포를 평생 음악의 근면으로 다스리려 했던
나의 연습이 나의 신약,
나의 의미는 혼탁하다.
나의 이성은 깨지지 않은 정신분열의 거울,
음계.
나의 거처는 삶과 죽음 너머로 흔들린다.
-<음악의 세계사 그후5> 중
내부에 감추어진 음계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의미이면서 의미가 될 수 없는 존재다. “경건의 광포를 평생 음악의 근면으로 다스리려 했던” 투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언어는 큰 환기력을 부여한다. 긴 호흡은 심연에 숨겨진 분열된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혼돈과 무질서, 도착과 공포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자본과 제도의 틈새에서 스스로 닮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음악은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시각의 총체를 음악이라고도 칭한다. 시대와 사유가 통합된 정서와 음악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발상을 구사하는 시인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셈이다. 그러한 광활함 때문일까. 김정환 시인의 시가 이상하다고들 한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이상한 기분에서 누구도 홀가분할 수 없는 사유의 슬픔과 아름다움에 사뭇 시선을 못 박게 된다. 심연의 상승과 시의 흐름에 빠져 들다보면 해박함을 넘어선 다각도의 시선이 우리들 기억에서 정전되었거나 말소된 북극성을 찾게 만든다. 쉽지 않은 외침이고 고도의 노련한 설득이다. 통찰되고 동화되어야할 성질로서의 그림자에 대한 깨달음은 전체 인간에 미치는 체험과 고통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망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긴장된 시선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이 죽는 줄 알고
죽을 줄도 알지만
죽은 줄은 모르지.
죽은 자가 스스로 죽은 줄 모르고
걸어가는 혹은 다가오는
거리의 사물 형상 빛이 약간 더 생기 있다.
살아 있는지 모르고 살아 있을 때 이따금씩
우리를 놀래키는 그 빛은
때로 약간 더 멀쩡하고 약간 더 본질적으로 보인다.
-중략-
명작의 값어치를 능가할 수 없는
선물은 명작의 감동에 다가갈망정
끝내 명작일 수 없는
우리 생 속에 생의 일부로 있고 각각의 생애로 빛난다.
‘그러나’가 갈수록 빛바래는 세계.
-<선물과 명작>중
비극의 구조는 어떤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비극에 몰입하는 원인을 두 가지 감정으로 지적했다. 즉 ‘연민(eleos)’과 ‘공포(phobia)’다. 단순히 불쌍하고 무섭다고 느끼는 상황이 아니다. 상대가 처한 상황을 언제든지 자신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전이된 감정을 말한다. 칼·융에 의하면 자아(ego)가 의식의 중심인데 반하여 자기(self)는 정신 전체의 중심이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대극적인 합일점을 찾아 모든 것이 통합될 때 건강한 인격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공수신퇴(功遂身退) 생이불유(生而不有)라는 경구가 있다. 이는 명예나 지위가 생겨도 자신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죽음이란 삶을 투사하는 또 다른 그림자이다. “명작의 값어치를 능가할 수 없는 명작의 감동에 다가갈망정 끝내 명작일 수 없는”그것! 죽은 넋이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의 전환이며 그림자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림자와의 관계와 그림자의 분리는 치유과정을 반영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것은 한 인간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응시한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망과 生의 깊이. 그것은 우리와 가장 밀접한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직시하며 애환의 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삶의 통상성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통한 인간의 물욕과 성욕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일흔 넘은 아일랜드 시인의 이제껏 시집
열두권을 번역, 한권으로 묶은 책이다. 겉 하얗고 단단하다. 누구는
이글루 벽돌 한 장이라 했다. 시 한편 생활의 응축이니 시집 한권
그간 생애의 응축인데 어떻게 응축되지, 생활보다 더 뭉툭하게?
-<전집의 역전> 중
“시는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던가. 시적인 요소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김정환 시인은 대식가임에 분명하다. 그의 시는 핵분열이 일어나듯 요설이 난무한 21세기 시풍을 뒤흔든다. 나직하고 우렁찬 울림 있어 숨기기 급급한 생채기를 마구잡이로 쏟아내 리얼리티 이미지 속으로 끌어당긴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초스피드 시대에 접속된 곡절은 구성과 비구성 사이에 직면한 충돌을 유발한다. 마치 허기에 지친 자가 식탐을 부리듯 기필코 직면하는 자신의 각을 낱낱이 재구성하고 있다. 시집 속으로 파고들며 음미할수록 가슴을 뛰게 만드는 방대한 말의 놀이. 시제의 원근법에 의해 초조하고 불안하고 지독하게 아름다운 가위눌림!
가면도 이상한 가상현실이다. 식물의 죽음으로 완강하게
동물의 죽음을 밀어낸 목제가면
골격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식물의 꿈과 동물 알레고리의
응축된 인격보다 더 강력한 가상현실의
데스마스크를 목제가면은 구현한다. 훨씬 더 오래된
청동가면은 너무 크게 뚫린 눈이 장님 같다.
-<중략>
영화가 없는 극장 속
죽음이 있으므로 색은 늘 화려하지 않다.
그 밖으로 산더미만하던 배를 와락 껴안으니
불다 만 풍선처럼 푹 꺼졌던 그 Russian
virtuoso pianist, 이럴 수가
풍선 터진 지 벌써 몇 년 되었다니. 저기 지붕 위
훨씬 더 작은
오색 풍선들 올라간다 숱하게, 가볍게, 출렁이며.
-<목제가면> 중
그의 시는 “좌절한 희망의 울화 아니라 보람 이후 보람의
음미 습관 같다”
-<수박색 샤프펜슬> 중
무대 위에 오른 세상, 우리는 Russian virtuoso pianist일지도 모른다. 빛 뒤의 어둠처럼 모든 물질은 부풀어 오르면 터지거나 꺼지게 되어 있다. 흡사 욕망의 원리와 무위자연의 도를 뿜어내는 노자의 자연관을 옴싹 시의 정신적 배경에 들어앉힌 듯 환기력과 의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문장과 시간을 떠오르게도 한다. 물질과 물질 사이, 生과 死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은 태고 적부터 욕망으로 빚어진 제도의 문제성과 물질문명의 속성을 깨트린 자연회귀를 꿈꾼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으므로 얻을 수 있는 값진 선물은 종국에 자연인이 되는 길 아닐까. 가상현실에 대한 페르소나(Persona)를 깨달음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음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재’로 돌아가는 자연의 미학적 발견과 전통의 복원을 회복시키는데 그 본질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욕망에 가 닿지 못한 지난한 삶은 늘 덜컹거리기 마련이다. 하여 김정환 시인은 독자를 항시 불안하게 만든다. 그 불안함을 해소할 즈음 또 다른 불안 요소가 밀고 들어온다. 20세기가 그에게 격정의 세월이었다면 21세기에 이른 그의 시는 끊임없이 속삭임을 시도한다. 그의 말은 따뜻하고 단단하고 슬프고 난해하다. 시집 한 권에 이토록 많은 것을 총체적으로 모아 놓은 시인도 드물 것이다. 스스로를 투사한 그의 불투명한 심연을 통해 운율은 태어난다. 외부세계가 불안전하듯 우리네 무의식의 세계도 불안전하다. 고로 인적 없는 길을 걷는 개척자 같이 그는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