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요한복음 18:10-18, 25-27
제목 : 나는 아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또 귀한 날 하루 허락하셔서 새벽 시간을 깨우게 하시고
주의 전에 나와 아버지 앞에 찬양하며 고백하며 또 이 시간 말씀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님들 지금 어디에 있든지 주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 목요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모든 주안의 성도님들에게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라고,
우리 주안성전에서, 또 송도 예배처에서 예배드리는 분들,
그리고 지금 온라인으로 들어오셔서 예배드리고 있는 분들 모두에게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 성 목요일에 일어난 일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인 성 목요일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식사도 있었고, 또 식사 도중에 감동적인 세족식도 있었지요.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결단의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금요일 새벽에 예수님이 잡히셨으니까
실질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상을 사신 마지막 날이 바로 목요일, 오늘입니다.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면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두 제자가 있는데, 바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이지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마지막 식사를 하다가
"속히 행하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스승을 팔아넘기는 거사를 실행에 옮깁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명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당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의 충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예수님을 잡으러 온 종의 귀를 잘라버리는 극단적인 행위까지 저지르지만, 잠시 후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지요.
오늘은 베드로에 대한 말씀을 중심으로 성 목요일 새벽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18장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동산으로 이동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전 17장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긴 가르침을 행하셨고,
또 바로 앞 장인 17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긴 기도를,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예수님은 입을 굳게 닫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어가십니다.
공관복음에는 바로 이때 즈음에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졌던 겟세마네의 기도의 내용이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그 장면이 생략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잔을 그저 묵묵히 받으시며
십자가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은 금요일 새벽입니다.
베드로가 새벽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그 일보다 한 두 시간 전에 예수님이 잡힌 것으로 보아서
대략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 세 시 경에 원수들에 의해서 체포되셨을 것입니다.
그날은 유월절의 시작인데, 그날 금요일 저녁부터 본격적인 유월절이 시작되지요.
이 유월절 기간에는 늘 유대인들의 소요 사태가 일어날 위험이 컸습니다.
제가 화요일 설교에서도 언급했듯이 평소 5만 명 정도가 살던 예루살렘에
유월절에는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일시에 모이게 되므로 여러 가지 안전사고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또, 특별히 열심 당원 같은 과격한 유대인들은 로마를 물리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테러 사건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존재는 로마 당국에는 요 주위 인물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중에 로마의 군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당국이 합심해서 예수님을 체포한 겁니다.
악한 무리가 예수님께 다가오자 예수님은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고
마치 얼른 잡아가라는 듯이 "내가 그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순순히 체포 당하시는 예수님과는 달리 베드로는 흥분해서 즉흥적인 행동으로 저항을 하지요.
자신의 칼을 빼들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버린 겁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열심히 스승님 예수님을 따랐고, 자타공인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곁을 늘 지켰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고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의 행동은 정말 스승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가 놀랍게도 말고의 귀를 자른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불과 몇 시간 전에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베드로였지만,
스승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잡혀가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죄인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자
그(베드로)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소위 멘붕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그 집 안뜰까지 따라갑니다.
그의 충성심과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여종이 '너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그만 '아니야'라고 부인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거푸 세 번 벌어집니다.
▣ 베드로의 부인 과정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 요한복음 18장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특이하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지금 18장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무리에게 잡혀서 고초를 겪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과 관련된 내용이 적게 기록되어 있어요.
특이하게 예수님에 관한 기사들보다 이 요한복음 18장은 마치 베드로가 주인공인 것처럼
베드로가 어떻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지 그 동선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붙잡은 무리는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예수님을 끌고 가지요.
안나스는 직전 대제사장으로서 그 해에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장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안나스는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야바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산회드린 공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야바보다 지금 말하자면, 회장보다 증경회장에게 데리고 갔던 것 같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언급했듯이,
예루살렘 당시 유월절과 같은 큰 절기에는 예루살렘에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나타났었고,
이로 인한 유대인들의 소요 사태들도 있어왔기 때문에 로마 당국과 유대교 지도층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처럼 등장했고, 유대사회 총책임자였던 그 당시에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야바는 흘러가는 판세를 읽은 다음에 산헤드린 공회의에서
"한 사람이 모든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1:50)고 권고한 바 있었습니다.
그는 소위 유대인의 왕 예수 한 명을 죽여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을 했던 거지요.
그리고 15절에 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등장하는데 여기에 보면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또 다른 제자 한 사람", 이 사람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눈을 통해서 베드로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이 됩니다.
이 또 다른 제자는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의외로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다 그랬어요.
그래서 대제사장의 뜰 안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들어갑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 대문 밖에 혼자 서 있는 처지가 되지요.
그런데 이때 "또 다른 제자 요한"이 여종에게 부탁을 해서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16절이지요.
이 과정에서 그 여종이 돌발적인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졌어요.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느닷없이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얼떨결에 '나는 아니야'라고 잡아떼며 그 상황을 겨우 면하지요.
그리고 급히 뜰 안으로 들어가서 불 쬐는 사람들 속에 몸을 숨깁니다.
그 시간 예수님은 안나스에 의해서 심문 받고 계셨고, 안나스는 종들을 시켜서 예수님을 폭행하고 있었습니다.(23절)
그 상황을 옆에서 다 듣고 있던 베드로는 겁을 먹었을 겁니다.
그 때, 같이 불을 쬐고 있던 안나스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또 다시 묻습니다. (25절)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 순간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예수님은 지금 근처에서 심문 당하시고 폭행 당하고 있어요.
만약 이 상황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는 곧바로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런 공포 속에서 베드로는 재차 예수님을 부인하지요. "나는 아니라"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마지막 결정타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바로 베드로가 귀를 베어버린 그 말고의 친척이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친척은 심지어 말고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무리들 가운데도 있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다 목격했고, 특히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며 나서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어요.
그 사람이 이제 나섭니다. 그게 26절의 기록이에요.
(26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하필이면...... 그 자리에 증인이 있었던 거지요. 이제 베드로가 아무리 부인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리고 만 거예요.
증인이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이번에도 저주하며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세 번째로 예수님을 강하게 부인하고 맙니다. 그러자 곧바로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엄청난 내적 상처를 입게 됩니다.
새벽 닭이 울고 난 후에, 베드로에 대한 기사가 성경에 한동안 나오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여러 시간 동안 괴로운 심경 가운데 놓여 있었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실 때에,
요한과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 밑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당연히 있어야 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부탁해서 니고데모와 함께 은밀히 장사 지낼 때에도,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나타나지 못했겠지요.
▣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부인하였나?
그러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부인한 건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셨을 당시에는 단연 최고의 열정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어요.
정말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주저 없이 말고의 귀를 벨 정도로 말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제자 베드로를 칭찬하셨지요.
특별히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반석같은 믿음을 보시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까지 극찬을 해 주셨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혹은 '게바'는 둘 다 '반석', '바위'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무기력한 죄수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결박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자
반석과도 같았던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이별을 예고할 때만 해도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도 평소처럼 "주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변함없이 열정을 보였어요.
심지어는 잡히시던 현장에서도 베드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고의 귀를 내려쳤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안나스의 집에서 폭행을 당하시고,
권력가들에 의해서 조리돌림을 당하실 때에, 베드로의 마음은 휘청거리고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에게는 능력의 예수님만 익숙했지 고난 당하는 예수님은 너무도 낯설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를 행하시는 예수님만 생각했지
포승줄에 묶여서 사람들에게 심문 당하고 조롱 당하는 나약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베드로와 별반 다르지 않나요?
또, 능력의 주님, 그 능력의 주님을 원하고 찬양하지
연약하고, 고난 당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외면할 때가 많지 않나요?
열심히 말씀 보고, 찬양하고, 기도하라는 명령은 순종하겠는데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망설이지 않나요?
우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성공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원하지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않나요?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깨달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신 주님인 동시에 고난 당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에,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복 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만 바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NO', '아니야'라고 응답하시고, '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 베드로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요한복음 21장)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에,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의 열정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렇게 실망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서 예전에 하던 고기잡이 일로 되돌아가지요.
예수님께서 부활 후, 여러 번 만나주시고 나타나시고 그리고 성령까지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건만,
베드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실패한 인생이 되어 이전의 고기잡이 인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곳까지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요한복음 21장이 그 장면을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주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까지 찾아가 베드로와 만나 대화하는 그 장면이 우리에게 정말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오늘 본문의 사건과
그 21장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과의 대화의 장면이 오버랩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질문하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어디서 봤던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예수님은 실망이 가득 차 있는 베드로를 위해서 숯불을 지피시고 생선과 떡을 구워 아침 식사를 대접해 주신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그 유명한 질문을 하셨어요.
"숯불!" - 생각나는 장면이 있지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8장 18절을 보세요.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숯불" - 개역개정판 성경이 번역을 잘못했어요. 그냥 불이라고 번역했어요. 그런데, 원문에는 숯불로 돼 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들이 그냥 '불'이라고 번역을 해서 개역개정판도 그냥 그걸 맞추려고 통일시킨 것 같아요.
그런데 원문은 숯불입니다. 영어 성경도 'a fire of coals'라고 돼 있어요. 숯불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해변가에 숯불을 피워 놓으신 것은 의도적인 셋팅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주님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숯불 자체가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피운 숯불 가에서 주님을 부인했던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 질문을 하셨어요.
(요한복음 21장 14절)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세 번째다"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주님 부활하신 후에 처음 나타났었을 때, 두 번째 나타났을 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저 같으면, 처음 나타났을 때 "베드로, 왜 너 나 부인했어?"라고 할 것 같은데,
처음에도, 두 번째에도 아무 말도 안 하셨다가 세 번째에 이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고 세 번째 나타났을 때에, 세 번 부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요한이 왜 이런 걸 강조하고 있을까요?
아니 처음 하면 어떻고, 두 번째 하면 어떻고, 세 번째 하면 어떻기에... 세 번 물으셨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이런 모든 내용들이 우리에게 뭘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까?
이것은 베드로가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장면으로 이끌고 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그 가야바의 집 뜰로 이끌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바로 그 실패의 자리로 베드로를 이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처절하게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손을 다시 잡아 일으켜 주길 원하셨던 겁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실패의 깊은 심연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서 지금 옛 생활로 돌아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베드로야, 나는 너의 실패를 알아. 나는 네가 나를 부인했다는 거 알아. 그런데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현재가 중요해.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니? 그러면 나는 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너를 다시 사용하기를 원해"
주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도 자세히 보면 참 의미가 있어요.
제가 전에 한번 이것을 자세히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예수님이 처음에는 비교급을 통한 최상급의 사랑을 물으셨어요.
1) 시몬아, 네가 이 사람(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요 21:15)
→ 비교급을 사용한 최상급의 아가페 사랑을 물으심
여기 '이 사람'으로 번역된 투톤이란 말은 '이것'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어요.
"이 사람들보다, 이것들보다,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니?"
[아가페] -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 사랑하니?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에게 "너, 누구보다도 더 나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니?"
최상급을 물으신 거예요. 최고의 사랑은 물어보신 거예요.
그때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랑은 '필리아'입니다. '친구 간의 우정'
"주님, 제가 어떻게 감히 주님을 아가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그것도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렇게 못합니다." '필리아'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번째로, 비교급을 통한 최고의 사랑에서 한 단계 낮추고 양보해서 그냥 원급으로 물어보십니다.
2) "그래 시몬아, 그럼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니?" 비교급을 뺐어요.
→ 그럼 너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니?"
비교급을 뺀 아가페 사랑을 물으심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더 양보해서,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마침내 시몬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오십니다.
3)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리아)하느냐?(요 21:17)
→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의 사랑을 물으심
세 번째 예수님의 질문이 사랑은 '필리아'예요.
"그래, 네가 나를 필리아의 사랑으로도 사랑하니? 나 그 사랑 원한다."
예수님의 처음 두 질문은 '아가페'예요.. 베드로는 세 번 다 그냥 '필리아'입니다.
베드로가 아가페를 말 못 하니까,
세 번째 질문은 "그럼 너 필리아로라도 나 사랑하니?" 그렇게 물어보신 거예요.
사랑의 강도를 낮추고 낮추고 낮춰서 시몬의 수준까지 내려오십니다.
결국 이 모든 내용이 뭘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과거의 실패를 책망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의 이 질문은 "베드로, 너 왜 전에 나를 부인했어?"
"어떻게 네가 나를 그렇게 배신할 수 있어?" 책망하심이 아니에요.
오히려 주님은, 주님을 향하신 그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지금 이 질문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 실패를 딛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었던 것이지요.
"베드로야, 비록 네가 실패했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너를 사용하기를 원해"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마음에 치유하기 힘든 큰 상처를 입었지만,
예수님과 이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똑같이 세 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모든 상처를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게 된 겁니다.
베드로는 그 캄캄하고 차가운 새벽,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에 난도질한 큰 상처를 안고 있었어요.
이 상처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이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은 최고로 숙련된 정신과 의사처럼, 천천히, 천천히 베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반복된 세 번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큰 마음의 상처를, 세 번의 반복된 사랑의 초청으로 어루만져주신 거지요.
그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16,17) 하는 이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또 그 잘못이 빚어낸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의 대화를 통해 마침내 과거를 씻어낼 수 있게 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치유의 역사가 오늘 우리 안에도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여러분을 만져주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도 베드로처럼 온전히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이효진 대표의 이야기
여기 상처의 수렁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건짐 받아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는 한 자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효진 자매(이효진 대표)..
세 살 때 펄펄 끓는 주전자의 물이 쏟아지면서 얼굴과 왼손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근처 병원에 데려갔더니, 화상이 너무 심해서 수일 내에 사망할 수도 있겠다라고 하는 비참한 얘기를 듣지요.
천신만고 끝에 겨우 살아나기는 했지만,
어린 이효진은 얼굴의 심한 화상으로 인해 학창시절 내내 파충류, 괴물, 귀신이라는 놀림을 받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무료로 수술해 준다는 의료진을 만나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는 더 참혹했고,
그녀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에 빠집니다.
너무 힘들었지만, 20살이 되면 제대로 수술해서 나을 수 있다는 엄마의 말만 믿고 어떻게든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세가 되어 병원을 찾았습니다. 결론은,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수술로도 정상적인 얼굴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깊은 좌절 속에 빠집니다. 엄마 때문에 억지로 믿은 하나님이 가장 원망스러웠지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나의 얼굴을 이 지경이 되게 놔뒀느냐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원망을 넘어 하나님을 저주하기에 이르릅니다.
어느 날, 수면제를 한 번에 100알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했지요.
천만다행으로 동생이 발견해서 응급실에서 급하게 위 세척을 해서 겨우 살아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유일한 대화상대였던 엄마마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십니다.
그녀에겐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지요.
장례식장에서 하나님을 포함한 모두를 원망하고 울고 있던 그녀에게
엄마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 사모님이 효진양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엄마가 너를 위해서 항상 눈물로 기도하셨어. 효진이를 치유해 주시고
효진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어머니가 눈물로 늘 기도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은 이 효진 자매에게 엄마의 유언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이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오신 분들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이 계신가요?" 목사님이 느닷없이 설교 중에 그런 말을 던졌어요.
효진 자매는 마치 하나님이 그녀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 하나님, 예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계속 말씀합니다. "그분의 죽음이 작은 밀알이 되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말씀이 그녀를 치유하기 시작했어요. 비록 화상 입은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얼굴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져 있던 그녀의 마음이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어서 남동생 부부도, 언니, 형부, 조카까지 줄줄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효진 자매의 속 사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매 주일 눈물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은혜의 폭포수가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녀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 주셨어요.
그리고 건축회사 '예인 건축 연구소'를 설립하는 비전을 주시고,
그녀를 CEO가 되게 해 주셨고, 사업을 통해 수많은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바쁜 와중에도 수많은 집회에 간증자로 서게 하셨고,
여러 권의 책들도 출간하게 해서, 귀한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게 했지요.
그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상처 받은 자, 상처 입은 자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지금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 나가는 말 :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실패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는 놀라운 십자가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상처 받고 쓰러진 우리에게 오늘도 찾아오셔서 치유하시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손길에 여러분의 손길을, 우리의 손길을, 우리의 상처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여러분의 모든 힘들고 무거운 짐을 다 맡겨드리기 원합니다.
그리고 "저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를 회복시켰던 주님께서 우리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복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주님이 회복된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내 양들을 먹이라"고, "내 양들을 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복음의 사명자로 일어나실 수 있길 바랍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의 증인들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모두 이번에 예수사랑 큰잔치에 우리 다 함께 동참해서 꼭 한 영혼에게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놀라운 회복의 역사와 살림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가운데 이번엔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실망과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오늘의 베드로인 우리에게도 함께 하셔서
우리를 모든 실망과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 달라고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VIP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생명의 역사가, 회복의 역사가, 살림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이 시간 주님 한 번 부르고 기도합니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