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교회의 표지들
헤르만 훅스마(H. C. Hoeksema), 손정원 목사 역
우리가 참된 교회의 표지들이라는 우리 주제를 올바르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사로 잡혀있던 메데라는 나라에서 다리우스 왕이 제위에 있을 때에, 다니엘을 모함하려는 원수들이 왕에게 이르기를, “왕이여,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한 법령을 세우도록 합시다”라고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왕의 금령을 알고서도 유유히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전과 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단 6:4-10).
다니엘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답은 의심할 여지없이 시 137:5-6에 있는 포로 시대에 부른 노래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믿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의 습관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기도하는 것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질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환경은 정말로 다니엘이 살았던 그 시대의 환경과 다릅니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곳이 한 곳뿐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시온은 가나안 땅에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민족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전 세상에 걸쳐서 설립되어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 그 교회를 대표하는가? 누가 그 교회의 이름으로 가야 하는가? 누가 복음을 선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례를 시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문제들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분별하는데 더 많은 통찰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환경은 다르나, 원리는 늘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환경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따라서 살아간다면, 그들의 생활을 움직이는 힘이 다니엘을 움직이게 했던 것과 같은 어떤 힘일 것입니다. 다니엘이 참된 교회인 시온을 향하여 기도한 것은 믿음으로 행한 일입니다. 또한 다니엘이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라면, 그들이 그 영향력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 희생제사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교회의 표지들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표지들에 의해서 구별되고 구별되어질 수 있는 교회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소논문의 한계 안에서 이 중요한 성경적 개념을 완전하고 상세하게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이 개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할 것입니다.
1)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교회는 구체적인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모임으로서 세상 가운데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는 막연한 것도 아니고 여기 지상에서 나타나지 않는 영적 추상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그 교회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모임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로 나타났고 신약시대에는 사도시대에 설립되었고 이른바 교회로서 서신서에서 선언되는 여러 교중들의 모임으로서 나타났습니다. 개혁 교회들은 이 사실을 신앙고백서 27장과 28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상에 당신의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말씀의 사역자를 주셨고, 실제로 모든 직분자들과 그 기능들을 부여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엡 4:11에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장로와 집사의 직분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직분자들을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며 당신의 몸을 양육시키고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령과 말씀에 의해서, 전 인류로부터 택한 백성들을 계속해서 모으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표지들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교회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조직화된 지교회의 교중 가운데 있는 직분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직분자들의 기능을 통해서 하나의 단체로서 나타나야 하고,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확실한 지교회로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일어나는 혼돈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론하고 있는 주제는 참된 신자들의 표지들, 곧 기독교를 믿는 자들의 표지들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참된 교회가 완전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들 곧 참된 신자들로만 참된 교회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거짓 교회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없는 교중이나 종파로 보인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어디에 교회의 제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가? 어디에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교회를 설립하셨는가? 어디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직분들과 직분자들이 있는가? 어디에서 교회를 위해 기능을 수행하고 축복하고 모으는 것이 하나님의 집에서 직분자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족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기 세상에서 나타납니다. 교회는 인정되고 발견되고 연결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교회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회들이 다 순수한 교회는 아닙니다.
3) 세 번째로, 참된 교회에 자발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라는 진리가 이 주제의 기초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고백서 28장에서 간략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공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요, 그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태나 조건 속에 있든지간에 이 거룩한 모임에서 벗어나서 살아서는 안되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공회에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고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바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교회의 원리와 그 가르침에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복종하고 서로가 동일한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형제들을 성장시키는데 봉사한다.
그리고 이 일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이 국가의 행정 명령이나 칙령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비록 죽임을 당하거나 신체의 형벌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들을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설립하신 이 교중들에게 스스로를 연합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의 마땅히 행할 바이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 내에서 신자들 사이를 분리한다거나 스스로를 교회에 연합시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소명이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신자들이 기꺼이 이 세상 가운데에서 설립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르침과 감독과 지배하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르는 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행복과 안녕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분명히 자신이 어느 교회의 회원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경솔하게 결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확실히 자기 옷을 바꿔 입듯이 그렇게 쉽게 자기가 속한 교회를 바꿀 수 있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세상적이고 육적인 생각으로 교회를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영적 생활의 성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지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다른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분리되어서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만 삽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하여서만 생명을 소유하고 즐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순히 지체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몸으로서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즉 교회는 모든 지체들이 몸과 지체들로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관된 몸 안에 있는 지체로서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주를 고백합니다. 모든 신자들과 함께 한 성령에 참여합니다. 모든 신자들과 함께 한 주를 믿는 보편적인 믿음에 참여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참된 교회를 찾아가고 그 교회에 자신을 연합시키고, 이 현 세상에서 가능한 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구체적으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은 중생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충동이고 새로운 생명이 주는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교회에 소속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활은 다른 지체들과의 교제속에서 주어지는 생활입니다.
4) 하지만,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매우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은 거짓 교회가 이 현 세상에서 존재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발전은 세상 가운데서 거짓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교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교회가 발전되는 이유들 중 한 가지는 육적인 사람들의 후손들이 역사의 진행 속에서 계속해서 교회 내에서, 곧 신자들의 가문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마치 영적 후손들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문 안에서도 선택 받은 자와 유기된 자들이 갈라집니다.
두 번째로, 거짓 교회가 발전하는 이유는 신자들이 완전하지 못하고 오직 새로운 순종에 있어서 작은 시작을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자신들 안에 죄악된 옛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함과 연관하여서, 교회는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악한 영향력 앞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은 이 현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가 불확실하다는 의미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이지 세상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 자체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서 정정당당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주어진 교중들로 여기 세상에서 나타나게 되는 교회는 세상의 영향력 앞에 개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철학의, 이 세상의 사상의, 이 세상의 투쟁 앞에 개방되어져 있고 이른바 유혹이라는 표제아래에 분류되는 온갖 종류의 영향력 앞에 개방되어져 있고, 그 유혹은 영적으로 분리된 교회의 위치를 떠나게 하는 것이고 거룩한 교회로서 교회의 위치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고 악한 세상과 같이 일반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역사 전체가 계속적인 발전이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그 자체로 세상 가운데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항상 불완전하게 나타남으로, 참된 것에서 떠나고, 교회의 소명에서 떠나는 발전이 있고, 그 발전은 악한 세상의 범위 안에, 무익하고 인간적인 철학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 교회 곧 모조품 교회가 생겨납니다.
그 밖에도 역사 가운데 종말 곧 만물의 마지막을 향한 운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회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목적 곧 큰 음녀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요한 계시록에서 그려지는 적 그리스도의 왕국과 연합한 거짓 교회의 최종적인 출현을 향한 발전이 있습니다. 대조의 최종적인 실현을 향한, 모든 역사가 종말을 오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 거짓 교회가 완전하게 죄의 악함을 드러내는 목적에 기여할 때에, 세상 가운데서 신실한 교회가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해서 더 이상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을 그런 상황의 실현을 향한 발전이 있습니다. 곧 주의 오심의 날을 향한 발전이 있습니다!
이렇게 원리적으로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신앙고백서가 이 분리를 “이거나-아니거나”라는 용어로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곧 참된 교회 아니면 거짓 교회로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사이에 참된 교회로부터 거짓 교회로 향하는 계속적인 운동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교회들이 다 한꺼번에 완전히 거짓 교회로 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는 것을 들을 수 없는 완전한 거짓 교회는 참된 교회에서 거짓 교회로 향하는 진행 과정의 결과입니다. 참된 교회로부터 점진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 곧 최종적으로 어떤 교회가 완전히 거짓 교회가 될 때까지 거짓말과 거짓 교리의 능력과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증대됩니다. 이 발전 과정의 실제적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가운데서 발견하는 상황이 단지 두 가지 교회 곧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라리, 실제적으로 말하면, 이 두 교회 사이에 많은 단계들이 있어서, 가장 순수한 단계, 덜 순수한 다양한 단계들의 교회들, 완전히 거짓된 교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앞에서 보았던 절대적인 분리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 원리의 빛에 비추어 보면, 항상 참된 교회를 향한 운동이 있거나 거짓 교회를 향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문제는 이 사실을 둔하게 만드는 영적인 관점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덜 순수한 교회의 소속에서 “떠나서”, 차라리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갈 수 있고 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향한 심각한 현세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신자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참된 교회를 찾아서 자신을 연합시켜야만 하고 연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앞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이 질문은 특별히 16세기 종교개혁시대 이래로 복잡한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 본래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즉 민족적 기원에 관한 한 다른 교회들,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교회들, 언어가 다른 교회들, 지리학적인 위치가 다른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들은 교회의 영적인 성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다른 수백 혹은 수천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즉 그 교회들은 교리가 다르고, 고백이 다르고, 교회정치가 다르고, 예배와 의식이 다르고, 성례가 다르고, 권징이 다른 교회들입니다. 이런 많은 다른 교회들 속에서 여러분은 가장 큰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물론 그 차이점은 누가 공적으로 성경을 거부하는가 그리고 누가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버렸는가, 누가 가장 근본적인 믿음, 예를 들면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 그리스도의 부활 등의 교리를 부인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교회들도 신자들과 그 교회의 회원됨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생명이 그곳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교제와 생명을 유지시킬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그곳에 계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지하는 것 곧 지지하는 정도,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교회를 제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요한 교리들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다른 많은 교회들에 직면하게 될 때에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됩니다. 교회들이 나누어집니다. 예를 들면, 예정의 진리에 따라서, 속죄와 관련하여서, 주의 재림의 교리와 관련하여서 나누어집니다. 또한 성례와 권징의 실행에 있어서도 예리하게 차이가 생깁니다.
또한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대체로 개혁주의 공동체에 속한 여러 교회들이 있으나 이 안에서도 크게 다른 사람들이 있고 예리하게 나누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가 어디 있는가? 내가 신자로서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연합시킬 수 있는 참된 교회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런 분리가 모든 곳에 있다면, 참된 교회라고 인정될 수 있는 교회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어떻게 그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지하게 가지는 이 문제는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교리적인 문제도 아니고 정말로 실제적이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어디에 교회가 있는가? 어디에 내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로서 연합할 수 있는 참된 교회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답을 제시하는 나머지는 다음 호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Ⅱ
다른 것과 구별되는 표지
교회가 필연적으로 참된 교회에서 거짓 교회로 향하여 움직이게 되면서 생겨나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거짓 교회가 생겨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보편주의자의 대답입니다. 그는 교회와 교파의 차이점을 따져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런 교회와 교파의 차이라는 분리의 벽이 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들이 큰 하나의 교단으로 연합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일단 여러분이 이런 길로 들어섰다면,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입장을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온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교회가 하나의 교회가 될 때까지 곧바로 나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계 교회는 계시록 17장에서 말하는 큰 음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태도를 따르면서 동시에 자기 신앙고백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는 전통주의자의 대답입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났고 세례를 받은 자기 부모들이 속해있는 그 교회가 자기를 위한 교회라는 표준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는 자주 “우리 교회가 바르다 혹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둘 중의 한 가지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는 맹목적으로 자기가 속한 교회를 지지하고 신뢰하고, 종종 이 교회는 절대 잘못될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단체로서 교회를 신뢰합니다. 혹은 그는 단지 자기가 속한 교회가 나가는 방향과 상관없이 곧 소위 말하는 지도자들이 교회의 방향을 계획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개인적으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는 무식하게 그리고 아무생각없이 그냥 지도자들의 계획에 따라갈 뿐입니다. 이런 태도는 근본적으로 교회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고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위험스러운 태도입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어떤 특별한 교회가 잘못될 수도 있고 심지어 전적으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요한 계시록 3장(14-22)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영적으로 바벨론처럼 혹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타락은 분명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간의 과정 속에서 거짓 교회가 발전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세 번째는 중립주의자의 대답입니다. 어쨋든 중립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정말로, 같은 것을 믿은 것에 어떤 큰 차이점이 있을리 없다. 즉 우리 모두는 동일한 하나님과 동일한 그리스도를 믿고 동일한 하늘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속한 교회가 어떤 교회냐에 달려있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구원받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이 사회적 복음을 믿는 시대에 중립주의자들은 우리가 믿는 바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가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는 이 문제에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고백서에서도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거룩한 교중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로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려는 자들을 향한 약간 편협한 태도로서 종종 나타나는) 이 중립주의의 태도는 전적으로 잘못된 접근임이 드러납니다. 이런 태도는 이 소논문 처음에 인용했던 시 137편의 말씀에서 표현된 그런 태도가 아니라 자기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교회가 얼마나 자기 개인적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지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즉 교회에 대해, 진리에 대해,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태도입니다.
세 번째로 이런 중립주의의 태도는 종종 정확히 교회가 거짓 교회로 되어져 가는데 많은 기여를 하는 냉담한 무관심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이 없을 때, 교회가 경계하지 않을 때, 바로 이런 때를 이용해서 거짓 선지자들이 별 문제없는 교회 속에 온갖 종류의 잘못된 것을 도입하여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적인 답변은 우리 신앙고백서 29장에 나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참된 교회의 지체로 연합시키는 것은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세 가지 표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고백서에서 이 표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된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 가운데에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를 순수하게 계속 이행하며, 교회의 권징이 죄를 징벌함으로 실행된다면 이는 참 교회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교회의 머리로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몇 가지 설명들을 덧 붙혀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 가지 표지는 모두 첫 번째 표지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성례와 신자의 권징은 말씀의 설교 없이 의미가 없습니다. 성례는 말씀에 의존합니다. 왜냐하면 성례는 말씀에서 설명된 것을 가시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내고 인치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권징도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기독교인의 권징의 내용과 권세가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의 설교는 주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순수하게 설교되는 곳에서 성례도 신자의 권징도 쉽게 부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교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뜻이 알려집니다. 그곳에서 진리가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설교되는 곳에서는 아마도 성례가 남용되지 않을 것이고 신자의 권징이 부정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원리적으로, 우리는 이 세 가지 표지를 모두 하나의 표지 곧 가장 중요한 표지인 말씀의 설교로 축소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말씀이 설교되는 곳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말씀이 설교되지 않은 곳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이 불순하게 설교되어지는 곳에서는 교회가 회개하거나 죽거나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된다!”
두 번째로 우리 신앙고백서에서 우리 시대에 보기에는 약간 이상스럽게 보이는 언어로 첫 번째 표지를 설명하는 방식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즉 “만일 순수한 복음의 교리가 설교된다면 이는 참된 교회이다” 이 말은 바로 복음이 교리, 교훈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참된 교회는 이른바 아주 간결한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특징지워지지 않습니다. 참된 교회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상관없는 너그럽고 느슨한 의미의 복음전도를 위한 설교 혹은 인기있는 이른바 영혼 구원 운동을 위한 전도 설교에 의해서 특징지워지지 않습니다. 참된 교회는 순수한 복음의 교리를 설교합니다. 이런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순수한 복음의 교리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에서 성경의 복음을 상실했고, 이런 설교는 설교의 근본적인 특징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형태에 있어서 단순한 설교를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기본 교리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의 교리를 가져야만 합니다. 곧 순수한 복음의 교리를 가져야만 합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이고 성경에 따라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 표지들이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이해할때만이 이 표지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 표지들을 생각하고 거짓교회의 표지들이 무엇인가 하는 빛 가운데서 적용해야만 합니다. 또한 이 거짓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도 우리 신앙고백서 2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회는 어떠한가 하면, 거짓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와 법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와 법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는 교회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성례를 시행치 않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교회이다.”
달리 말하면, 근본적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냐 인간의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표지인 이유는 바로 교회의 성격과 관계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워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참된 교회를 위한 다른 터가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건설된다면, 바로 이 터위에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복음의 교리외에 다른 것을 선포하는 자는 누구나 이 터위에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 다른 터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인간적인 단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의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를 불러서 건설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뻐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설교에 대항하여 온갖 종류의 반대를 하려고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합니다. 이 반대자들은 고안된 여러 가지 매혹적인 것들로 순수한 복음 교리의 설교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씀의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는 것이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 양들이 그 목자를 따를 것입니다. 그 목자는 양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꼭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반드시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연관성이 있어야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현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인간의 말이 아니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징을 통하여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를 가질 것입니다. 이 표지들이 사라진 곳에는 그리스도도 사라지실 것입니다. 이 표지들이 부패되고 부패되는 범위 내에 있는 곳에서는 내가 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하여 이 전체 문제가 말하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심각한 것입니다!
쉽게 구별하는 문제
오늘날 신자들은 복잡한 교회 현장에 직면하게 되지만, 실제로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사이에 차이점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고백서에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이로써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이 참된 교회로부터 분리시킬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된 교회는 확실하게 알려진다.” 그리고 또한 “이 두 유형의 교회(곧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서로 구별된다.”
왜 이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 참됩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표준에 의해서 참된 교회가 알려지고 구별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 말은 참됩니다. 그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하고, 분명하여서 가장 무식한 하나님의 자녀도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빛 가운데서 가장 무식한 하나님의 자녀도 거짓말로부터 진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혹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서 분명합니다. 너무나 확실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거짓 교회를 향하여 출발하기 시작할 때 구별하는 것이 가능한 객관적인 이유입니다. 일차적인 표지인 순수한 복음의 교리의 설교가 타락했을 때 구별하는 것이 가능한 객관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인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관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은 각자가 다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 교회의 영, 진리의 영, 지혜와 이해의 영, 구별의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당신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신자는 오늘 교회 현장을 보고 쉽게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지들의 빛 가운데서 판단해보면, 오늘날 교회 현장은 부정적으로 무시무시한 배교 가운데 있습니다. 이 현장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 멀리 떨어져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개혁주의 교회 현장을 보십시오. 아직도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서 분류되는 자들을 보십시오. 종종 신학적 자유를 가장한 무시무시한 교리적 배교가 있습니다. 곧 우리 조상들이 언제나 가졌던 신앙이 가볍게 외면당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잘못이 점점 더 처벌되지 않고 책망되지 않도록 위해서 관용되고 허용됩니다. 설교에 배교가 있습니다. 곧 순수한 복음 교리의 선포로서 설교 곧 주석적인 설교가 주로 희귀한 소논문이 되었습니다. 주제 설교, 도덕주의, 사회 복음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설교에 싫증을 느껴서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새롭고 매혹적인 것들 예를 들면, 히피족 예배, 회담, 드라마, 현대적인 것, 텔레비젼 의식주의, 새롭고 상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둡니다. 게다가, 또한 참된 통일성을 희생시키면서 그리고 참된 복음을 희생시키면서 세계 교회 주의(에큐메니칼) 운동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른바 교회의 비제도화라고 불리우는 것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이 최근에 일어 나고 있습니다. 곧 교회가 형태로 제도화되는 것을 파괴시켜야만 한다고 외칩니다. 교회가 “행위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하고, 믿음보다 차라리 행동을 강조해야만 한다”고 외칩니다. 오늘날 믿음 안에서 오직 사람에 따라 그리고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교회를 만들기 위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온갖 종류의 수정과 개조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바로 기독교인의 삶의 표준에 있어서도 부패와 타락이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거나 혹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회개의 요청과 상관없이, 교리와 행실이 올바른가 하는 것과 관계없이, 누구든지 교회의 지체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게 됩니다. 주의 상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지게 되고 이로 인해 주의 상이 더렵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오용됩니다. 교회의 긴 의자가 텅비게 됩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세상을 친구로 삼아서 세상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흥청거리며 술취하게 되고, 세상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보게 됩니다. 주님의 교훈에 따른 기독교인의 도덕성과 성화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상황 윤리의 사단성이 교회가 나가는 길에서 발견됩니다. 교회와 세상, 신자와 불신자,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거의 모든 인간 생활의 영역에서 함께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오늘날 교회가 요청받
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공적인 교회를 모방하여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비록 이런 모든 현상들이 특별히 근년에 재빠른 속도로 성장했을지라도, 대부분의 경우에 점진적으로, 거의 은밀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은 이른바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이름 하에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 나타나는 비참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잊지말아야 할 것은 참된 교회가 또한 세상가운데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도 또한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참된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에 의해서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들은 우리가 참된 교회를 나타내고 있고, 지상에서 그리스도 몸의 가장 순수하게 표명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증거합니다. 우리는 자랑함 없이,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겸손한 지식 가운데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자랑함 없이 모든 겸손함 가운데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망설임 없이 이 증거를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를 교회의 표지들에 의해서 제대로 분별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자들이 우리에 대해 말해왔고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충격적인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사실 그대로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자들도 참된 교회의 표지들이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들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 내에서 성경과 신앙고백의 표준에 따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순수한 복음의 교리가 설교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소수가 모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는 순수한 복음 교리를 설교하고 순수하게 성례를 집행하고 신실하게 기독교인의 권징을 시행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들을 살펴야 하는 소명
우리가 참된 교회의 표지들을 살피고 적용해야 하는 소명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간략하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신실한 교회는 자기 교회가 가진 것을 굳게 붙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식 안에서 자라야 하고, 진리 안에서 더 강해져야 하고, 믿음 안에서 자라야 하고, 더욱 더 그리스도께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또한 신실한 교회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파멸 당하지 않기 위해서 복음의 신앙 안에서 신실하게 미래의 교회인 언약의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게다가, 신실한 교회는 항상 원수들을 주시하고 지켜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시온의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들의 소명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소명은 그들과 함께 하는 전체 교중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2) 참된 교회의 표지에서 떠나고 있는 교회에서 소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가 참된 교회의 표지에서 이탈하고 불신실하게 되는 첫 번째 표징이 나타날 때 이때 소명은 한 마디로 회개하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탈하고 불신실하게 되는 것의 시작은 교회가 이미 잘못된 길로 몇 마일 이상 내려갔을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역사적으로 항상 이미 늦은 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요한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주께서 보내신 서신들을 읽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신실한 교회가 불신하는 방향으로 나갈 때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서 두 교회는 나무랄 데 없는 교회였고 세 교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참된 교회에서 이탈해 있었고 나머지 두 교회는 거의 죽었습니다. 신실한 교회들이 이렇게 이탈하는 자들에 관하여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신실한 교회는 이탈하는 자들을 포기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그들의 소명은 신실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어떻게 해서라도 맛이 간 이 사람들을 신실하게 되게 하여야 하고 회개하도록 그들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실패한다면, 신실한 자들은 배교한 교회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신실한 남은 자들을 불러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행하신 것이 아닙니까?
4)개인적인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한, 이 자녀는 참된 교회를 찾고 그 교회에 자기를 연합시키기 전에는 아무것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끝낼 때까지 신자들은 영적으로 갖추어져야 하고 준비되어져야 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의 지식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참된 교회를 찾아야 하는 이런 거룩한 소명을 외면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들을 가져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참된 교회에 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에게 닫혀졌던 것이 열려지게 될 때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한, 만일 젊은이들이 이른바 교회 문제가 우선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구혼을 할 때 이 문제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참된 교회를 찾아야 한다는 강요는 흔히 교회와 세상에 의해서 비난당하고 무시당하고 배척당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시온에 대한 사랑에 신실하여서 경멸함을 당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137편에서 “내가 예루살렘을 나의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의 표준으로 삼으십시오.
5) 하나님의 자녀들 각자가 교회 속에서 타락에 직면하게 될 때, 이 참된 교회를 향한 소명은 그가 개혁을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을 포함합니다. 그는 또한 자기 교회 조직에 협력하거나 혹은 반대하여 저항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개혁은 거룩한 의무입니다! 게다가, 만일 항의하는데 실패하여서 육적인 요소가 그 교회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그 교회 조직이 저항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한다면, 그의 소명은 끝없이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저항하는데 실패한 것을 슬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 개혁을 해야 하는 그의 의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안에서 그가 따로 떨어져 나와서 필요하다면 새로운 교회를 조직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또 매우 진지해야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는 첫 걸음이 온갖 육체적인 생각들로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예루살렘을 자기의 가장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면,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목적으로, 시온에 대한 사랑을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짓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일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참된 교회를 찾아서 자기 자신을 그 교회에 연합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언제나 신실하게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내가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는 주의 약속을 확신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참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소명을 더욱더 각성하시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