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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시대 전통 금속공예 내부의 금은기 제작 기구와 작품 미학 풍모
明代内府金银器的制作机构与作品风貌
출처: 대중 고고학자: 张燕芬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한 서론은 제작자에 따라 명나라 금은기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내부에서 만든 것으로 비교적 명확한 생산 표준이 있고 예절의 엄숙함과 등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민간 제품이며, 다른 하나는 내부의 제한과 민간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 내부 작품의 수준이 가장 높고 영향력이 가장 크며 명나라 시대의 주류 미학을 가장 잘 반영합니다. 현재 내부에서 만든 금은기는 주로 무덤에 묻히는데, 무덤 주인의 신분은 대부분 황실이나 귀척, 황후, 내빈, 번왕, 외척 등이며, 그 재질이 우수하고 제작이 정교하여 매우 대표적입니다.그것들은 어떤 기관에서 생산합니까?
그 인원은 어떻게 배치되나요?제작과 사용 기간이 어떻게 관련되나요?다음 토론은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둘째, 생산 기관과 인력 배치 명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금은기 생산 기관은 은작국입니다.
명태조실록은 "홍무 30년(1397) 가을 7월 경술...…은을 국으로 두고, 내부의 금은기를 만들어 사용합니다."'명사'는 홍무 30년에 은작국이 설치되었다고도 하는데, '대명회전'에 기록된 홍무 26년에 반포된 관복제도에서 친왕과 친왕비가 사용한 '금책 한 부, 은사건 한 부, 금봉일 일 부, 금비녀 한 쌍' 등은 이미 '은작국(銀作局)에서 취급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은행 사무국 설치 시기는 더 논의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림1:1 내관감이 나선두추각금잠(螺旋头頭锥脚金簪)을 만들어 출토실물을 점검한 결과, 영선대명문이 있는 작품에는 '수행은작국(随驾銀作局, [별표1]의 4, 5, 16, 17, 18 참조)'이라는 문구가 수시로 등장하는데, 이 기구는 언제 나타난 것입니까?
후에 왜 또 사라졌습니까?그것은 은작국과 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명태종실록의 영락 6년 12월 갑신 조항에 따르면 명례부는 오군도독부, 육부도찰원, 대리사, 금의위인을 주조하여 모두 14개에 인문과 함께 행재라는 글자를 붙였습니다.
내부 상선 등감, 임금석회 등사, 병장 등 국에서 모두 16개를 인쇄하고, 문자와 함께 '수송'이라는 두 글자를 넣습니다.은작국은 내부 감독국에 속하며 '수행'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수행 은작국'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은행국은 난징의 원래 은행국에서 분리되어 성조를 따라 베이징을 순찰했을 수도 있습니다.실물에는 영락 14년 8월, 영락 18년 4월 수행은작국에서 녹인 금은괴가 있습니다([별표 1]의 4, 5 참조).
영락19년 정월 초에 북경에서 경사로서 행재(行在)라는 6부에 가서 북경에 설치된 수행은작국(随驾銀作局)도 반드시 수행(随驾)이라는 글자를 생략해야 하며, 실물로 영락22년과 홍희원년 은작국 제기를 볼 수 있습니다([별표1]의 6~15 참조).
인종은 즉위 후 난징으로 환도하기로 결심하였고, 홍희 원년 3월 "북경에 있는 모든 사들에게 '행재(行在)'라는 두 글자를 명하였으나, 그 나라를 향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환도할 수 없었습니다.선종이 즉위하여 비록 환도하지는 않았지만 베이징의 행재(行在)라는 칭호를 유지하였고, 각 감국에서도 늘 '수행가(随行驾)'라는 두 글자를 붙였습니다.
현재 보이는 선덕내부의 금은기 제작 기관으로는 '수행은작국'([별표 1]의 18, 19 참조)과 '수행어용감'([별표 1]의 16 참조)이 있습니다.정통 6년 11월, 영종은 북경을 경사로 확정하였습니다.지금까지 더 이상 베이징 행이 아니라 '수종은행작국'도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운전은행작국(및 기타 운전감독국)의 출현과 소멸은 명나라 초기의 우여곡절의 수도 결정 과정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림 1:2 은작국 나선형 두추각 금비녀 은작국 외에도 내관감과 어용감도 내부의 금은기를 만드는 중요한 기구입니다.
내관감은 은작국(銀作局)보다 일찍 홍무(洪武) 17년에 설치되었으며, 홍무(洪武) 28년에는 내관감에게 '혼례 혼수관, 舄, 우산, 부채, 금요, 장막, 의장 및 내관, 내사(內使)를 관장하여 황제를 만들고 궁내 기용·장신구·쌀·상고각 문서·염창·빙향'을 만들도록 규정했습니다.
작중지에도 내관감이 소장한 '10작' 중 '혼례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내관감이 혼례용과 장신구 제작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관감조(內官監造)'라는 명문이 새겨진 실물도 이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별표 1]의 2, 3 참조).[그림 1] 나선형 두추각 금비녀([별표 1]의 3, 6, 39 참조)의 경우 삼자의 모양과 무늬는 다르지 않지만 [그림 1:1] 금비녀는 내관감에서, [그림 1:2, 3] 금비녀는 은작국에서 나옵니다.
간행된 명문이 있는 출토물의 대부분은 은작국([별표 1] 참조)에서 생산되는데, 이는 은작국이 설립된 후 금은기 장식을 전문으로 하여 내관감의 기능을 분담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원장은 일찍이 오 원년 9월에 어용감을 설치하였으나 홍무일조 때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습니다
.선덕 원년(1426)에 이르러 '어용사(御用司)'를 '수행어용감(随行御用監)'으로 고치고, 3년 동안 '서상북문(西上北門) 밖에 어용감 공방(御用監工坊)'을 만들었습니다.그리고 그 기능은 '명사'에 따르면 '어전에 사용된 스크린, 침대 및 목기, 자단, 상아, 흑목, 나전 및 기타 완구가 모두 만들어졌습니다'라고 합니다.비록 금은그릇을 만들었다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실물에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명실록'에 따르면, 정통·성화 시대에는 은장이 어용감(御用監)을 섬겼고, 심지어는 벼슬이 금의위대봉(錦衣衛帶俸)에 이르러 검사(俭事)를 지휘하는 직책까지 있었습니다.출토된 유물은 또한 만력조 시대에 어용감이 여전히 황제와 태후를 위해 금은그릇을 만들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으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만력제의 금약통이었습니다([별표 1]의 66 참조).
▲ 그림 1:3 은작국은 나선형 머리와 송곳으로 만든 금비녀의 세 가지 기관 중 은작국이 가장 늦게 설치되었지만 가장 전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사'에는 '은작국, 내시 1인, 관리, 첨서, 글씨, 감독에 고정 인원이 없으며, 금은 장식을 만듭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생산량도 가장 많습니다.내부에서 만든 금은기는 주로 공급 용기, 의장 및 관복 장신구의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금은 공급 용기는 현재 출토된 실물로 볼 때 대부분 은작국에서 제작한 것입니다[별표 1].금은의장은 내부에서 만들고 홍무간에서는 범친왕·왕세자에게 '관복의장행내관감조', '세자병비·군왕병비는 초봉(初封)이니 은조대기에 한 푼을 주고 은조국 관령(官領)'이라고 규정하였으나, 이후 은조국이 금은의장 제작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관복 장신구의 경우 내관감, 은작국에서 제작하였으나, 금은사건, 금봉, 금비녀, 금추 등의 장신구는 은작국에서 대부분 제작하였습니다.또한 출토된 실물로 볼 때 실제로 은작국에서 만든 물품이 대다수를 차지합니다([별표 1] 참조). 은행 업무국은 기능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장인 분업도 섬세합니다.대명회전'에 따르면 자징 시대에는 화공, 도자기, 상감, 금박, 광택, 도금, 은박, 실뽑기, 실을 뽑는 장인이 포함되고 띠를 매는 장인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장인들은 마땅히 주좌장이어야 합니다.명나라의 공역 장인은 소속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교대 근무와 주좌로 구분되며 교대 장인은 공부에 소속되어 있고 주좌 장인은 내부의 관청에 소속되어 있습니다.내부 감독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주로 주좌장이었습니다.
사실, 황실 도구의 큰 수요와 높은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내부 정부는 자연히 상대적으로 높은 기술과 낮은 이동성을 가진 거주자와 좌장을 선택해야 합니다.물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면 교대장을 내부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정 8년에 인수궁을 지으면 은작국에 매 시즌 12명의 장인을 증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은작국의 장인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가정 10년(1531) 재고 결과에 따르면 은작국 274명을 포함하여 12,255명의 장인이 남아 있습니다.가정 40년(1561)에 다시 한 번 조사하여 은작국 221명을 포함하여 총 17,178명의 장인과 장인이 보관되었습니다.융경 원년(1567)에 이르러 노약자로 인해 15,884명으로 줄였는데, 이 중 은작국에는 장인 23명, 군민장 166명 등 총 189명이었습니다.
200명 정도가 대규모 제작팀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왕실의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친왕 이하 종친은 내부에서 새로 만든 금은 의장용기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홍무 연간에는 "옛 집안에서 재작년에 세자를 봉한 자는 금보의장을 물려주고 따로 주지 않는다"며 "세자 병비, 군왕 병비는 초봉이니 은조대기에 한 푼을 주고 은조국 관령으로 삼아야 하며, 습봉한 자는 물려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종실이 무성하여 정부 지원이 어려웠고 가정은 44년에 '군왕과 비를 처음 봉하고 은과 큰 그릇을 모두 갖추도록 명령하였으니 주지 말라'고 결정했습니다. 비록 만력 10년에 또 "제손자, 의장, 집, 관복 및 사후의 묘가는 관례대로 모두 주겠다"고 합의했지만, 명 전기에 비해 후기에는 종번에 대한 금은기 하사금이 축소되었는데, 이 상황은 당시 내부 각 감국의 생산능력과 형편없는 재정상황에 상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명나라 때 매판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는데, 만력 13년(1585년)에 은작국은 '다섯 공주의 혼례에 금과 그릇을 함께 사용하는 것, 행상부 매판'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은작 등 감국에서 제작하던 금은기 장신구들이 명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재정난과 종실분봉 압력, 금은기 시장화 등으로 인해 전액 공급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생산 시간과 사용 시간 및 도구 생산 시간은 생산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물리적 비명, 묘지 정보 및 문헌의 분류 및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관련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 그림 2:1 양장왕비 금팔보팔찌 첫째, 내부는 금은기 제작기간이 대부분 황실 성원의 책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이 중 금 帔추는 양장왕계비 기씨(紀氏)가 선덕 8년에 봉해지고, 그 봉문금 帔추는 선덕 7년 은작국조([별표 1]의 17), 낙안 소정왕비 송씨(宋氏)가 경태 2년에 봉해지고, 봉문금 帔추는 경태 원년 은작국조([별표 1]의 19), 익장왕원비 왕씨(王氏)가 정덕 10년에 세자비(세자비), 봉문금 帔추는 정덕 9년 은작국조(별표 3년 손비(별표 34)에 봉문책혼에서 하사한 금은 장신구는 반드시 맞춤 제작이 있습니다.
현재 보이는 실물 중에서 번왕 종척 등의 묘에서 출토된 누사금봉잠, 나선두추각금잠[그림1], 사주환, 매화환, 광소금천, 화금천, 금팔보팔찌[그림2], 帔추는 대부분 《대명회전》에 기재된 친왕납비 장신구와 일치하며[표1], 이는 고급묘장의 일부 금은 장신구 품목이 비슷하고 생김새가 유사함을 설명하고 명나라 여성들이 시집가 혼수에 들어가는 풍습을 보여줍니다.
제후의 신분이 지극히 존귀하여 정릉에는 기년명문금기 75점이 있는데, 이 중 경신년 명금기 17점은 만력의 승하로 인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신축년 명금은기는 만력제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신축년은 황장자 및 제황자의 관혼식이 있었던 해이므로 이 금은기들이 계기를 같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즉, 관책결혼식과의 밀접한 관계가 금은기를 내장한 의제의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림 2:2 익장왕비 금팔보팔찌
▲ 그림 2:3 익단왕비 금팔보팔찌 둘째, 많은 내부제 금은기가 재사용됩니다.황실의 책혼례에 필요한 금은기의 수는 매우 많으며, 모든 장식품을 당나라에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고물개신'인데, 예를 들어 량좡왕이 사용한 금수저는 '내부 개조'로 만들어졌습니다([별표 1]의 8 참조).성화·홍치·가정·만력시대 무덤에서 영락금비녀([별표 1]의 6, 7, 9, 10 참조)가 출토되고, 푸대접을 받은 효정황후가 사용한 물건 중 융경조제([별표 1]의 45, 46 참조), 천계 연간에 입장한 비빈이 사용한 금은그릇은 선덕 6년, 9년, 홍치원년 연식(별표 1]의 16, 18, 22, 24 참조)이 있습니다.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영락22년 10월' 명금비녀([별표 1]의 6-10 참조)와 같이 '전조유물'의 제작 시기는 여전히 책혼 시기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영락(永樂) 22년 10월(홍희황제) 주고열(朱高烈)이 대통을 이어받아 봉건번왕을 봉건하였는데, 번왕을 봉건할 때는 반드시 현녀를 ‹3›에 맞추도록 하였으니, 당시 관책혼례에 많은 조작을 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도리였으리라.
▲ [표 1]친왕 납비용 금은 장신구와 번왕묘 출토물 네 가지 작품의 풍모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1) 관료의 보편적이고 엄격한 사용 관복의 외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며, 금은기도 예외가 아니며, 재질이 고귀하고 감독도 매우 엄격합니다.
홍무시대에는 이미 의복과 관대를 '법대로 제작'해야 했고, 황제, 황태자, 친왕의장 등도 '의식에 따라 수리'해야 했으며, 영락7년에는 '구정관민관복, 그릇제도를 서책으로 그려 국내외의 다양한 장인에게 반포하여 준수할 것을 알게 하였다'고 하였고, 가정7년에는 황제가 직접 참여하여 충정관복과 보화관복을 제정하여 도책으로 예부에 하사하고 왕부에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지역 직조 융모 毼 및 기타 재료도 '내림 패턴'에 따릅니다.조정에서 공포한 이러한 '법'과 '양식'은 이른바 '관식'으로, 기형과 장식을 명확하게 규정할 뿐만 아니라 법도의 사용을 암시합니다.
▲ 그림 3:1 만리빈비 금란봉문 은평분 '관양'은 기물의 통일된 모습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귀천을 구별하는 직접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그래서 관료 양식은 널리 배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히 준수하도록 명령되었습니다.
만약 참람하면 목숨을 잃는 화를 자초할 것입니다.예를 들어, 정통 3년, 영종은 '도찰원에 명하여 장시성 도자기 가마 공장에서 관양 청화백지의 도자기를 굽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처형하고 온 가족이 입 밖에 내도록 명령했습니다'.
금은기는 도자기보다 고귀하고 사용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내부에서 하는 일은 반드시 관식에 따라야 하며 감독도 더욱 엄격할 뿐이며, 구체적인 스타일에서 재료에 이르기까지 '매화환 한 켤레, 금발 무게 5전', '금팔보팔찌 한 켤레, 여덟 냥, 외보석 14조각' 등 규정이 있습니다. 문헌은 공식 샘플이 보편적이고 엄격하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며 물리적 제품은 심오한 영향을 입증합니다.
첫 번째는 카테고리의 제한으로 위에서 언급한 액세서리의 종류가 예시이며 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친왕용 '금·은 공양그릇'을 참고하여 금기 11종 24점(부)과 은기 8종 46점을 사용하여 예법에 따라 제작하였으며, 주전자, 집호, 우자, 수우, 대잔, 작, 잔, 접시 및 그릇의 수저 등 출토된 그릇은 대부분 상호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그림 3:2 효정황후 금란봉문 은평은 화분문양 모사본과 동일품목으로 모양이 반드시 유사해야 하며, 문양의 제재와 장식공법이 일치하면 모양은 반드시 비슷하거나 심지어 같아야 하며, 예를 들면 [그림 1, 그림 2]에 나타난 금비녀, 금팔찌와 같습니다.
또 다른 예는 은작국 만력 9년과 10년에 만든 은화분 두 개입니다.동사묘촌의 만력비빈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금란봉문 평연분[그림 3:1], 높이 5.1cm, 구경 27.6cm, 분내 바닥에 금테를 둘렀고, 분내에는 선두와 꼬리를 잇는 하나의 난란일봉, 분내에는 8개의 연속된 연꽃이 있습니다.
이 분저명은 대명만력신사년은작국조(大明萬历辛巳年銀作局造)로 신사년 만력 9년(1581)에 숙녀를 선발하여 구원(九媛)을 준비하고 10년 3월에 구빈(九嫔)을 책봉하는데 이 은분은 구빈(九嫔)을 책봉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두 번째 계통은 높이 5.5cm, 구경 28.4cm인 효정황후 왕씨의 것으로 [그림 3:3]은 문양의 모사본으로 그 모양, 문양, 구도, 장식 기술 및 치수는 거의 전자와 동일합니다.
분 밖 바닥에는 '대명만력 임오년(大明萬历壬午年年)'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해(1582) 6월 왕씨(王氏)가 공비(恭妃)에 봉해졌습니다.대명회전'에서는 황비의 의장수 대야를 '은, 간금, 중운봉문, 테두리 허브문'‹4›로 규정하고 있으며, 공비 왕씨와 '구빈'이 사용한 은 대야는 책봉 당시 의장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이 둘은 여기까지 유사한데, 본보기가 없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관양은 명나라 금은기의 모습을 형성하는 기초가 됩니다.
▲ 그림 3:3 효정황후 금란봉문 은평분(2) 재질이 장식보다 앞선다
▲ [표2] 대명회전에 황제, 태자, 친왕의장용 금은기는 일반적으로 관식은 조형 및 문양을 강조하지만 금은기는 재질이 먼저 고려되고 그 다음 조형 및 문양이 뒤따릅니다.소재는 금과 은으로 구분되며, 색상도 다릅니다.예를 들어 궁정과 번국이 사용하는 물건과 그릇의 모양은 거의 동일하며, 재질과 장식이야말로 융살의 장소입니다.
황제, 태자, 친왕 의장에 사용된 일부 금은기를 예로 들면 [표2], 재질이 으뜸이고 금질이 은질보다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금기라면 색의 높고 낮음, 문양의 귀천, 같은 은기라면 먼저 장식된 금의 양을 비교한 다음 문양보다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량좡왕부는 회사에서 만든 광소 스트레이트 은병[그림 4:1]을 받들고, 목은 긴 원통형이고, 양 끝에 볼록 테를 용접하고, 목 아래에 화분 모양의 배를 연결합니다.이 은병은 은작국에서 만든 운봉문 일자 금병[그림 4:2]과 모양은 동일하지만 둘의 모양은 재료의 높낮이와 문양의 유무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 그림 4:1 광소직통 은병
▲ 그림 4:2 운봉문 금통 금병 또 만력신축년(1601) 은작국제 삼점금수우([별표1]의 56-58)는 [그림 5:1, 2, 3]를 참조하며 각각 만력제와 효단, 효정후의 물건입니다.수우 바닥에 관리자와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크기와 무게의 차이가 거의 없어(그림 참고) 감독이 엄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기구는 모두 바닥이 평평하고 배가 약간 부풀어 오르고 입을 다물고 가장자리에 말립니다.그러나 만력과 효단 용품은 문양이 있고 소재와 구도가 일치합니다:
외벽은 운룡희주, 강애해수, 내벽은 운룡희주, 내벽은 1리터당 운룡희주, 비록 서로 다른 장인의 손에서 나왔지만, 풍신은 서로 통합니다.효정황후(孝靖皇皇后)는 광소를 사용하였는데, 이때(만력 29년) 아들 주상락(朱常洛)이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씨 신분은 공비(恭妃)에 불과했습니다.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기물은 '모양'만 남기고 '무늬'는 장식하지 않으며 더 중요한 것은 재질은 '60% 광금'으로 황후가 사용한 '80%'보다 낮습니다.
▲ 그림 5:1 운용분 금수우통 높이 5.9cm, 구경 4.3cm, 무게 375g
▲ 그림 5:2 운용문 금수우통 높이 6cm, 구경 14cm, 무게 373g
▲ 그림 5:3 광소 금수우통 높이 5.8cm, 구경 13.9cm, 무게 297g 실제 사용 과정에서 가장 고귀한 금기는 종종 보석 옥석을 박아 양장왕이 사용한 행엽 금집호 순소[그림 6:1]와 같이 만력에 사용된 보석[6]을 박아 넣습니다.
신료들이 천자의 총애를 받으면 헌종의 총애비인 만씨 동생의 보배 금집호(金执壶)와 독신교의 세종은 방사 도중문(陶仲文)에게 보석을 상감한 물우(水盂), 금관(金冠)을 하사받았고, 신종과 태후는 장거정의 어머니에게 보석을 상보한 금보석면을 하사받았습니다.
▲ 그림 6:1 량좡왕 행엽금집호
▲ 그림 6:2 보행엽집호, '출경입 跸도'의 국부 (3) 안정 중의 변화는 명나라 때 거의 300년 동안 내부 금은기의 풍모가 안정되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안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다른 스타일과 스타일을 결정하려면 프로세스가 필요합니다.또한, 성숙한 스타일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왕의 취향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나 간접적인 유행의 침투로 인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동합니다.
▲ [표 3] 시기별 帔 동일 카테고리 스타일의 확립 및 변화.명나라 왕비 군주 등 외명부들이 사용한 금 帔추는 명 초기([별표 1]의 2) 영락전기(永樂前期), 영락22년([별표 1]의 11) 선덕7년([별표 1]의 17) 홍치5년([별표 1]의 26) 홍치9년([별표 1]의 32),가정 26([별표 1]의 40)년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표 3] 참조): 은작국 초기에 제작된 帔추락은 모양이 편평하고 봉조가 장식 모티브이지만 몸집이 작고 가늘고 가냘프며 꼬리 깃털이 길고 완곡하며 주체는 상서로운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구름은 얕은 부조로 매우 생동감 있고 조송의 유풍이 있다.
영락후반에서 선덕에 이르기까지 帔추복이 뚜렷하고 봉조의 몸매가 커지며 자태가 더욱 편안해지며 상운의 수는 감소하였으나 분포 법칙은 이미 그 조화의 풍격이 이미 두드러졌다.물론 이러한 결과는 미적 탓도 있지만, 명나라 후기에 종실 구성원이 계속 증가하여 내부의 생산력이 제한되어 있는 현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 그림 7:1 성조 인효문황후의 국지적인 모습의 변화를 보여줍니다.은작국에서 만든 금루사와 봉잠의 경우, 봉잠은 금편추 揲로 만든 봉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실로 만들어졌으며, 금봉은 상운을 밟고 날갯짓을 하는 등 명나라에서 만든 새로운 양식입니다.
이 봉황 비녀는 주취연거관에 꽂혀 있으며, 황제 납후와 황태자, 친왕 납비의 납정 선물 중 하나로 명성조 후상에서 비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그림 7:1].출토물 중 양장왕비 위씨, 익단왕비 팽씨[그림 7:2], 익장왕비 만씨가 사용한 금봉비녀는 바로 이런 것으로 뒷부분 두 쌍의 비녀 발에는 '은작국 영락22년 10월 내조구성색금이이양외용접이분(銀作局永樂二十二十二十二十二月內造九成色金二兩外焊二分)'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동사묘촌 명묘에서 출토된 한 쌍의 봉잠[그림 7:3]은 스타일과 크기가 앞의 세 가지와 같지만, 그 필라멘트는 더욱 깔끔하고 붉은 사파이어가 박혀 있어 전기 작품과 비교하여 후기의 제작은 단아하고 화려합니다.이전 세대의 패턴에 따라 조정되어야 하므로 모양은 비슷하지만 모양은 다릅니다.
▲ 그림 7:2 누사금봉잠
▲ 그림 7:3 보루사금봉잠은 조형보다 장식 문양의 변화가 더 유연하여 활용 범위가 넓습니다.선판꽃의 경우, 꽃심 안에는 작은 원을 만들어 꽃심 바깥쪽에 나선형 방사상으로 꽃잎이 배열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그림 8:1]금비녀두(양장왕묘 출토), [그림 8:2] 금은잔 밑(은작국제, 정릉 출토), [그림 8:3]청화고족잔 밑(양장왕묘 출토)입니다.
구성이 간단하고 고도로 패턴화되어 있기 때문에 장인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양을 얻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그림 8:4]은도금분합(동사묘촌명묘출토)은 상단에 새긴 문양이 원문에 꽃잎을 한 겹 더하고, 나선화는 나련화고정무늬이며, 꽃심은 [그림 8:5]금상보석단추(왕선명묘출토)와 같이 다양한 보석으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림 8:6] 보금띠 장식(정릉 출토)의 뒷면으로 나선꽃은 문양이자 구조이며 아름답고 실용적입니다.다른 문양과 결합하여 [그림 8:7] 소스 색상의 나선 무늬 금금(명대장경 표구 봉인)과 같은 새로운 문양을 얻습니다.또한 동일한 출처의 공식 샘플이 다양한 범주에서 서로 참조됨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림 8:1 선판화금잠
▲ 그림 8:2 금은잔 밑바닥 선판화
▲ 그림 8:3 청화자기사발심선판화
▲ 그림 8:4 은도금화훼문삼절분합합뚜껑선판화
▲ 그림 8:5 금감보단추의 선판화왕선명묘출토
▲ 그림 8:6 선판화감주얼리금대장식 뒷면 정릉출토
▲ 그림 8:7 장색선판문금
오 소결
1.명나라 때 내부의 금은기 제작 기관으로는 어용감, 내관감, 은작국이 있었습니다.어용감이 가장 먼저 설치되었고 황제를 위해 특별히 봉사했으며 생산된 금은기는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았지만 현재 볼 수 있는 물리적 수는 적습니다.
내관감은 어용감보다 약간 늦게 설치되었고 기능은 외정공부와 동일하여 제작 분야가 방대하고 그에 의해 만들어진 금은기구는 대부분 혼수품입니다.은행국은 가장 늦게 설립되었으며 기능이 특별하고 내정과 번국을 서비스했으며 제품 범주가 가장 풍부하고 생산량이 가장 높았습니다.관련 감독국의 설립, 인력 배치 및 분업은 명나라 내부 금은기 생산의 기초입니다.
2. 수행은행작국, 수행어용감 및 기타 기관의 설립 및 소멸은 명나라 초기의 우여곡절의 수도 결정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3. 내부 금은기의 일괄 생산은 대부분 관책 결혼식과 관련이 있으며, 재료의 귀중함과 수요 증가로 인해 금은기(특히 그릇)의 중복 및 순환 사용이 적지 않습니다.이것은 이 범주의 풍부함을 어느 정도 감소시킵니다.
4. 은작 등 감독국은 법에 따라 생산 및 제조하며 생산 요구 사항은 대부분 공식 샘플로 발행됩니다.강력한 정부 감독과 참혹한 처벌로 인해 공식 샘플이 더욱 구현되었습니다.이러한 요소는 내부 건축 금은기 조형의 상대적 통일성과 높은 수준의 공식화를 촉진하여 공통성을 명확하게 합니다.
5. 관형 금은기는 다른 문류와 다른 점이 있는데, 재질의 세분화에 반영되어 사용되며, 같은 양식은 "금감보석"에서 "은광소"로 바뀔 수 있으며, 이러한 재질에서 장식에 이르기까지 점차 감소하여 친척의 살과 현자를 구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통성이 뚜렷한 가운데 각 기구의 차이를 보장합니다.
6. 특정 양식이 성숙하고 그 양식이 안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며, 이미 성숙된 양식은 시대에 따라 제왕의 취향도 변합니다.일반적으로 명나라 때 내부의 금은기는 단정하고 온화한 사당의 아름다움을 반영했습니다.
7. 문양 디자인의 유연성 - 이것은 명나라의 전체 제작의 특성이어야 하며 금은기에서도 다채롭게 표현됩니다: 개별 문양이 결정된 후 적절한 증감 및 변형을 통해 새로운 상동 문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는 다른 문양과 결합하여 문양 집합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물론 같은 문양의 크로스도어 사용에도 유리합니다.
▲ [별표 1] 명내부대명 금은기 일람 기사는 2018년 고궁박물원간호 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본문 라벨: 명대 내부의 금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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