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선사 실달학원 앞에 선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 두 스님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종단 개혁을 구상하고, 도선사를 수행 정진 도량으로 만들자는데 마음을 같이했다. 성철과 청담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 불사, 즉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승가대학을 세워보자는 염원을 담아 실달학원(悉達學園)이란 현판을 도선사에 걸었다. 실달이란 부처님 이름인 싯다르타에서 따왔다. 성철은 틈만 나면 승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전암이 산자락 벼랑에 제비집처럼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그 안의 성철은 산보다 더 큰 존재였다. 법명이 누리를 덮었다. 그러자 성철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다. 파계사 한송 스님 상좌가 성전암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봤다. 파계사를 수행의 명찰로 만들고 싶었던 한송은 성철을 곁에 두려 했고, 이를 알아차린 한송의 상좌는 성철을 극도로 경계했다. 성철이 파계사를 접수할지 봐 전전긍긍했다.
“성전암에 금은보화가 감춰져 있다.”
누가 퍼뜨렸는지 이런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보니 산 중 인심이 험했다. 한송의 상좌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성전암을 부수려고 모의하고 있다는 얘기도 큰 절에서 올라왔다. 성철이 군사정권에 협조하지 않자 파계사에 성철을 손보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말도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설(說)이었지만 성철의 제자들은 불안했다. 결국 성철은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상황이 다급해서 불서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 많은 불서를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성전암을 떠나왔다. 헤아려 보니 한 곳에서 10년이었다. 그 뒤를 천제와 만수가 뒤따랐다. 세 사람은 큰 절 쪽을 피해 반대편 방향으로 내려갔다. 산을 넘어야 하는 30리 길이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성전암에 두고 온 불서였다. 흡사 볼모로 잡혀있는 듯했다. 천제는 나와서도 수시로 들러 불서가 ‘잘 계시는지’ 확인했다. 불서는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서 눈먼 이들은 그것이 법계의 보물임을 알 수 없었다.
성철 일행은 갈 곳이 마땅찮았다. 부산으로 내려가 어느 대학 총장의 별장에 머물렀다. 별장은 다대포에 있었다. 그 총장은 성철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려가 별장에 머물 수는 없었다. 산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여름을 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천제와 만수는 아직 스승을 모실만한 인연을 축적해 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철이 나서서 누구에게 청을 놓을 리도 없었다. 발 닿는 곳이 여수였다. 고찰 흥국사에 들렀다. 주지에게 잠시 머물 방을 내줄 수 없냐고 사정했다. 주지는 빈방이 없다고 단번에 거절했다. 성철이 들어갈 방 하나 없었다. 행색을 살피던 주지는 흥국사 위 암자에 가보라 했다. 세 사람이 다시 산길을 올라가 암자에 들었다. 홀로 암자에 머물던 노장이 반갑게 맞았다. 천제와 만수는 그 노장의 환대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암자에서 며칠 머물렀다.
스승을 모시고 이렇게 유랑할 수는 없었다. 천제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 스승 모실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천제는 먼저 석호(서옹) 스님을 떠올렸다. 서옹은 성철이 있던 천제굴에 자주 찾아왔다. 그래서 천제와 자주 대면했고 천제는 서옹의 온화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옹 스님(1912~2003)은 1932년 백양사 만암 대종사 문하에서 득도했다.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조실을 지내고 조계종 제5대 종정을 역임했다. 백양사를 고불총림으로 승격시키고 방장에 취임했다.
당시 서옹은 동국대학교 선원장을 맡고 있었다. 예상대로 서옹은 천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인자한 미소로 맞이했다.
“큰스님 모실 데가 마땅치 않습니다.”
순간 서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바로 천제와 함께 서울 외곽에 있는 절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대절해서 달려갔지만, 군사지역이라 몇 번의 검문을 받았다. 갈 곳이 못 되었다. 그런데 서옹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불현듯 천제에게 말했다.
“이보게 천제, 도선사 청담 스님을 찾아가면 어떨까?”
이튿날 천제는 도선사를 찾아갔다. 도반이었지만 성철과 청담은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정화 운동에 뛰어들어 동분서주했고, 한 사람은 한 곳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천제는 스승이 갈 데가 없다고 말했다. 청담이 놀라서 소리 질렀다.
“많고도 많은 절을 두고 어찌 성철 스님 갈 곳이 없단 말인가. 당장에 모셔 오거라.”
청담은 성철의 ‘미련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도 결코 얘기할 위인이 아니었다. 마침내 성철은 서울로 올라왔다. 여름의 끝자락에 도선사 일주문을 넘었다. 청담이 뛰쳐나와 성철을 부둥켜안았다. 이 광경을 보며 제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청담의 원력이 스며있는 도선사는 우람하면서도 정갈했다. 청담은 1961년 도선사 주지로 부임했다. 맨 먼저 한 일이 법당 정리였다. ‘부처’ 외에는 모두 산문 밖으로 쫓아냈다. 불상이 무속 탱화와 함께 모셔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내 뜯어냈다. 봉암사에서처럼 칠성탱화, 산신탱화, 용왕 탱화 등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신도들의 항의가 거셌다.
“웬 마구니가 도선사에 나타났다.”
청담은 그들의 항의도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랬더니 도선사에 인적이 끊겼다. 하지만 3년 후에는 신도들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청담은 야외법당, 법당, 석불전, 삼성각 등을 갖춘 중창 불사를 회향했다.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성철과 청담은 북한산, 남한산성, 회암사 등을 찾아갔다. 성철은 청담과 서원문을 지었다. 육필로 번갈아 쓴 서원문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정진하여 청정지구의 길을 걷겠다는 맹세였다.
‘부처님과 조사님의 가르침을 중흥하고 말세에 정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삼가 삼보 전에 천배 하옵고 다음의 서원을 올리니 만약 이 서원을 어길 때에는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겠습니다. (청담)
오직 삼보께옵서는 특별히 가호를 주시어 이 서원을 원만 성취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성철)
1. 항상 산간벽지의 가람과 아란야에 머물고 도시 촌락의 사원과 속가에 머물지 않겠습니다. (성철)
2. 항상 고불고조의 가르침과 청규에 모범을 보이도록 실천하고 일체의 공직과 일체의 집회와 회의에 참석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성철)
3. 항상 부처님과 조사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 기타 어떠한 일에도 발언 또는 간여하지 않겠습니다.
갑진년(1964년) 9월 13일 삼각산 도선사 청정도량에서’
종단 개혁을 구상하고, 도선사를 수행 정진 도량으로 만들자는데 마음을 같이했다. 성철과 청담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 불사, 즉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승가대학을 세워보자는 염원을 담아 실달학원(悉達學園)이란 현판을 도선사에 걸었다. 실달이란 부처님 이름인 싯다르타에서 따왔다. 성철은 틈만 나면 승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절집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 교육을 해야 한다.”
도반의 마음을 섞은 실달학원은 실제로 1964년 11월 학인 모집에 나섰다. 당시 ‘대한불교’에 실린 공고문의 ‘수학 요강’은 다음과 같다.
1. 일상 수행은 오직 불조유훈(佛祖遺訓)의 청규를 준수할 뿐이며, 개인의 사견과 망동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2.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계율(菩薩戒)의 수행을 다짐하며 단속(團束)한다.
3. 불전의 예는 아침에는 ‘대능엄주’를 외우며 저녁에는 ’대참회법‘으로 한다.
4. 불전에는 필히 사시중(巳時中)에만 마지를 올리고 기타 시간에는 불공을 봉행하지 않으며 삼보 이외의 잡신들에게 예배 공양을 일절 엄금한다.
5. 불공과 기도는 참회법으로 봉행하며 영가의 천도재 등은 전경(轉經)으로 행한다.
6. 잘 때와 대소변 시 및 특수한 시간 이외에는 항상 오조가사와 장삼(직탈) 법의를 입고 있을 것이며 외출 시에도 또한 그러하다.
7. 공무 이외의 출타는 절대 불허한다(허용되는 특수사항에 관하여서는 예외로 함).
8. 참선과 간경 과정은 원규(院規)의 정하는 바에 의한다.
9. 의식과 금품 등의 시물(施物)은 공적 헌납에 한하고 개인 거래는 일체 불허한다.
10. 기타 세칙은 불조 청규 각 장에 의해 행한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다. 바로 봉암사 결사 공주규약이다. 두 사람은 교육을 통해 한국불교를 바꿔보려 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르쳐 보자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성철과 청담의 간절한 서원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22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