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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 1장 -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문화 / 장태원(울산환경운동연합 의장) / 2009-02-12 14:36:00
(原文)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토(吐) 달아서 읽기
1)道,可道(도,가도)하나 非常道(비상도)요, 名,可名(명,가명)이나 非常名(비상명)이니라.
2)無名(무명)은 天地之始(천지지시)요, 有名(유명)은 萬物之母(만물지모)니라.
3)故(고)로 常無欲(상무욕)으로 以觀其妙(이관기묘)하고, 常有欲(상유욕)으로 以觀其徼(이관기요)하나니,
4)此兩者(차양자)는 同(동)이나, 出而異名(출이이명)이라, 同謂之玄(동위지현)하고, 玄之又玄(현지우현)하니, 衆妙之門(중묘지문)이로다.
非=아닐 비, 부정 조사.
常=항상 상. 언제나 그러한 상태.
非常=항상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故=고로, 그러므로, 접속사로 쓰임.
欲=하고자할 욕.
妙=묘할 묘.
徼=돌 요, 샛길 요, 막을 요, 구할 요. (徼道=샛길)
玄=검을 현, 가물타, 멀다. 아득하다.
1)도를 도라고 할 수 있지만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도라고 할 수는 없고,
(현재 세상에서 말하는 것도 도라고 말할 수 있고 도(道)가 아님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도는 시간이나 상황적으로 변해서 내가 말하는 본체의 도와는 다르기 때문에 가변적인 道(非常道)라고 한다.)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 이름일 수는 없다.
(현재 천하에 불려지는 이름도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그러나 시간적으로 달라지고 사라지므로 가변적인 것이어서 항상 그 이름은 아니다.(非常名))
2)천지의 시작에는 이름이 없었으나,(無名 天地之始)
만물이 생겨나면서야 계통이나 이름을 같게 되었다.(有名 萬物之母)
3)그러므로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無欲) (만물이 생겨나는) 전체의 오묘(妙)함을 보게 되고, 이름을 붙이면서(有欲)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徼道)
4)이 둘은 같다.(始-母. 有-無) (이름을 붙이나 안붙이나) 나오면서 이름이 다를 뿐이다. (이 둘은) 같이 가물(同謂之玄)하다고 하는데, 가물하고 또 가물해서(玄之又玄, 현묘, 현묘하고 현묘해서, 가물하다는 것 자체까지 가물해서,)
뭇(모든) 현묘함이 드나드는 문(衆妙之門)이라고 한다.
이 첫 장(章)은 노자를 한번 읽어 보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기를 죽이는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자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 놓고 또 그렇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필자는 노자를 읽는데 있어서 노자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첫 장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도(道)는 지금까지 흔히 쓰여온 도의 개념과 다른 형이상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설사 표현을 했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도(道)라는 개념 자체가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인간의 인식체계 문제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이기는 하지만 항상 꼭 맞는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지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아무것도 이름이 없어서 구분할 수가 없었는데, 이름이 생기면서 비로소 사물을 계통에 따라서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과, 모든 유(有)는 무(無)에서 비롯되고, 형체를 같게 해주는 것(有名)은 만물의 어미가 된다는 것이다. 만물에 이름이 없으면 그것을 인식하고 구분하기가 어려우니 이름을 붙이기는 하지만,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道)의 오묘(妙)함을 보고 이름을 붙이면 그것의 요(徼, 가장자리, 눈으로 보이는 것)를 본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지만 나오면서 이름만 다르다. 같다는 것은 둘이 모두 가물하기 때문이고, 가물가물해서 잘 모르지만 모든 현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좀 더 풀어서 해석하면... 지금부터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도(道)라는 것인데(말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도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도라고 하는 것 하고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그 이름은 영원하지 않다.) 또 그 이름을 도(道)라고 붙였는데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도(道)라는것은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항상 같지는 않다.(본래 차별적인 유형의 모양도 없고, 그 모양에 따른 명칭도 없어서)
여기까지를 종합해 보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 된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을 그렇다 안그렇다로 가르게 되면 사물을 인식하는 데 문제가 있으니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그래야 지금부터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천지가 시작할 때는 당연히 사물의 이름이 없을 수밖에 없다. 만물이 생겨나서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만물의 근원자리의 오묘함을 보게 되지만 (힘이 들고), 이름을 붙이고 보면 좀 더 가깝게 보는 길을 찾게 된다. 이 둘은 같다. (이름을 붙이나 안 붙이나) 나오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다, 둘 다 가물하게 현묘한 것이다. 현묘하다는 것 자체가 또한 현묘해서, 모든 현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도(道)를 도(道)라고 하지만 항상 도(道)는 아니다? 이름을 지어서 그 이름을 부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은 아니다?(이 문장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 나아가 깊지 않은 지식이나 선입견, 고정관념에 매여서 “예스”면 “예스”요 “노”면 “노”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일 수밖에 없다.
신으로부터 우주 만물이 창조되는 서양문명의 영향으로 인과론적인 수직구도에 익숙해진 것도 한 가지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우주는 인과론적이 아닌 상호 상관적인 관계로 얽혀 있는 것으로 본다. 우선 무(無)와 유(有)를 생각해보면, “없다”라는 것이 있어서“있다”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게 동양철학이다.
음(陰)과 양(陽)을 사유(思惟)의 중심에 놓고 보면 무(無) 속에 이미 만유가 내포(內包)되어 있고, 자연(自然)의 자기질서(自己秩序) 속에 이미 무와 유의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 속에서 현대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이 새로운 길(道)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각설(却說)하고,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동양철학에서는 변하는 궤도나 법칙은 변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어서, 모든 사물을 봄(觀)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고 본다, 노자, 장자와 더불어 동양의 삼현학(三玄學, 세 개의 심오한 학문)이라고 하는 주역(周易)을 변화에 대한 상징적인 책으로 보는데(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 주역을 읽으면서 이루어짐) 주역을 영문으로는 변화의 책(the book of changes)으로 쓰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동양적 사고나 변화의 철학에 대하여 적응하기 어렵다. 또 노자에는 현실과 정반대되는 것 같은 주장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현대문명이나 서양철학 중심의 사고 체계에 길들여진 질곡을 바로 볼 수 있기도 하다. 그것이 노자(老子)를 또는 고전(古典)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하기도 한다.
이 장(章)은 노자가 기존의 학파(法家, 儒家)들이 주장하는 개념보다 더 상위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 이름을 도라고 하고, 지금까지 일반적인 道(기존의 주장) 와 常道(자기가 말하려는 상위 개념의 도)로 구분하면서 도의 위상이나 존재형태, 쓰임 등으로 자기주장을 펴는 시작으로 보아도 좋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변화 한다는 것, 말이나 문자로써 표현하는 것의 한계 등을 내포하고, 2장에 나오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 등 노자 사상의 중요한 대목들이 등장하는 장이다.
**백서(帛書)본에는 상(常) 자가 항(恒) 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가 항(恒)이었는데 뒤에 한(漢) 문제(文帝) 유항(劉恒)의 이름 자와 같다는 것을 꺼려 해서 비슷한 의미인 상(常)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항(恒)과 상(常)은 같은 의미 같지만 깊이 보면 상(常)은 영원불변, 고정불변하는 것을 상징하는데 영원불변은 서양의 본체 개념이나 신(神) 개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 동양사상(東洋思想)에서는 영원불변의 도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순환 속의 영원’이란 말이나 또 변화의 철학이라고 하는 [주역]의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에서와 같이, 변하는 궤도나 법칙 자체는 불변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도[恒道]로 있기 위해서는 항상 멈추지 않고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항(恒)은 영항(永恒, 오래도록 항구하다)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항도(恒道)로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김충열교수의 <노자강의> 129쪽) 필자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현(玄)에 대한 풀이 : 현(玄)이란 모든 색깔을 하나로 합쳤을 때의 색깔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멀리 있는 산에는 실제로 수많은 색깔들이 있지만 멀리서 보게 되면 검게 가물가물하게 보이고, 검푸른 바닷물이 한 바가지를 떠보면 투명하게 맑지만 모아놓으면 검푸른 빛깔이 되듯이(바다는 그 깊이에 따라 물의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모든 것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의 현묘함. 해석을 붙이기에 끝이 없을 것 같다. 필자의 실력 탓이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차차 이해하게 될 것으로 본다. -한심당(閒心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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