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갑 (死甲)」단편소설
글/조홍열
‘내가 너의 증조할아버지뻘이다’ 남수는 두 살 밖에 안 된 생질의 며느리인 아이엄마 등에 업힌 어린애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 흔들면서 던진 말이다.
남수는 어린애의 손을 잡는 순간 아프리카에서 퍼져 나갔다는 인류의 기원이 북쪽의 파미르 고원이나 오흐츠크 해 언저리에 살던 조상이나 몽골의 대초원을 달리는 몽골리언 아니면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시베리아의 사하공화국의 나와 닮은 검은머리며 누런 얼굴에 백인들 보다 납작한 코 원숭이를 닮은 광대뼈며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그 위 증조할아버지의 얼굴도 저럴 것이다 생각해보니 더욱 친근감이 생기는 것은 저 멀리서부터 내려왔다는 핏줄을 의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수가 아내로부터 사망한지 한참 된 큰집조카 병익(남수와 당 숙질관계)의 사갑 잔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마치 “오래된 창고에 보관 중이던“ 필림속 의 영상을 꺼내 돌려 보는 듯 명대로 살지도 못한 채 먼저 저세상에 가있는 조카의 살아생전의 기억들이 실타래 풀리듯 나왔다.
“죽은 사람 에 대한 회갑 잔치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요”
남수는 아내에게 되물었으나 “그래도 사갑을 해줘야 돌아가신 분 의 한도 풀어지고 집안도 편안 해진대요”
아마 형수께서 몇 년간 시봉을 하셨던 남한산성 절에서 사갑 행사를 치른다고 하니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가시느라 고생 하면서도 한 동내서 같이 살았던 남수의 어머님이 혼자 사실 때 친 며느리 이상으로 보살펴준 것을 생각 한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참석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감 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사촌 형수님은 30대에 과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젊음을 억누르며 재혼 하지 않고 이 집안에 붙어 두 아들을 키우며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대단한 인내력과 희생정신이 아니면 불가능 했다
그렇지, 사망한 조카가 사갑을 치를 정도의 세월이 다가 왔구나 하고 생각 하는 순간 “그동안 잊고 살았으나 인연은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년기에 남수의 기억에 남은 병익조카의 아버지인 사촌형님은 그래도 큰집의 사촌 형제 중 에서도 훤 출 하게 키가 크고 미남형의 인상이며 일제강점기 에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듯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내 쓸 만한 젊은 사람들을 모조리 전쟁터에 내몰아 인적자원이 바닥이 나자 일본 제국주의는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하며 조선반도의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명분하에 가미가재 특공대등 태평양전쟁의 총알받이 로 내몰았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징집된 사촌형님은 8.15해방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와 고향에서 장가도 들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되지 않은 전답이 있어 직장에서 근무 하다가 아침과 저녁나절 출퇴근 전후에 꼭 들러 손바닥만 한 땅을 열심히 일구어가며 잠시나마 신혼의 단꿈에 젖어 살았으나 운명의 신은 잠시도 가만 놓아주지를 않고 6.25 한국전쟁이 터져 국군이 후퇴한 고향땅은 인민공화국으로 접수 되어 허울 좋은 의용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낙동강 전선으로 끌려가던 중 도망 처 나와 숨어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천상륙작전 덕분에 수복되어 안심 하였으나 나라에서 다시 국군 징집통지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휴전을 앞둔 시점이라 인민군과 함께 참전한 중공군과 대치중인 국군과 유엔군은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동부전선에서 수없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시점이므로 전쟁터에 나간 장병 대부분이 전사통지서가 날아오는 형국이었기 사촌형님은 고민 고민 하다가 누구 말을 들었는지 간장을 많이 마시면 신체검사에 떨어진다는 허황된 말만 믿고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간장만을 몇 사발씩이나 마셔 얼굴이 노랗게 부어서 마치 황달기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져 목적은 달성 하였으나
위가 상하는 바람에 끝내 삼십대 초반에 아들 둘과 꽃 같은 아내를 남겨 놓고 요절 한 것이다.
형수님은 “사람이 갈 때 가 되니 이상하대요? 매일을 정 없이 지냈는데 하루는 팔베개를 해주대요” “조금 살아가는 재미가 있을 라나 했는데 벌써 가버리니”형님 없는 형수의 나날은 고생의 연속 이었다.
물려받은 전답에서는 간신히 보리 고개를 넘길 만한 식량 밖에 나오지 않았기 호구지책으로 *도보행상을 하면서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웠다.
산업시대에 막 들어선 60년대 후반이 다 그랬듯 남수는 공고 건축과를 나왔으나 지방에 소재한 학교로 서울에 있는 학교의 선생님은 선후배들과 교류가 많아 건축주류인 건축 설계 사무소나 건축현장에 실습 나왔으나 상대적으로 지방학교는 불리한 여건이 많아 비주류인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에 실습 나와서 간신히 싸구려 하숙비도 내기가 버거웠고 일과 후 의 잔업이나 밤 세워 일하는 철야근무가 아니면 용돈쓰기도 어려웠으며 더구나 저축하여 방을 얻어 자취생활 하기 에는 너무나 돈이 적게 모였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시는 아버지에게 어렵다고 편지를 보내면 정 어려우면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답신에 따라 고향에 내려 가봤자 뻔한 사실은 달리 집안일을 도와 줄 수도 없고 장사하시는 부모님 일을 같이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사한 동창 들 중 에는 약싹 빠르게 행동 하거나 본사사무실 직원에게 잘 보여서 사무실 직원인 기사가 되거나 같은 업종의 다른 회사로 선발되어 더 나은 조건으로 이직도 잘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남수는 그저 하루하루를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특별한 일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 친척을 통하여 병익의 소식을 들었다 병익은 남수가 사는 곳 에서 십 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방을 얻었는데 방을 보니 정나미가 떨어졌다 지붕 끝 처마에 벽을 쌓아 간이 방을 만들었는데 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있는 방을 보고 지금까지 이런 방 에서 잠을 자본적이 없는데 하며 한탄만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사정도 모른 채 병익 의 말만 듣고 싸구려 하숙집을 나온 터라 도리 없이 이곳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는 기름밥을 먹어야 합니다. 때는 월남전 중반인 산업시대에 막 들어선 때문인지 조그마한 도금회사에 다니고 있던 병익 은 기계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최고의 기술자가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자주 말하곤 하였다.
도시에서의 생활이 다 그렇듯 둘이각각 방을 얻어 생활 하는 것이 같이 생활 하는 것보다 생활비가 더 드는 것은 명약 관아 한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 되어 그래도 형편이 좀 나은 병익 이가 고척동 산골짝의 허름한 집을 얻어 놓았기 남수는 얼마 안 되는 보따리를 가지고 병익이 얻어놓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남수의 수입으로는 생활비나 교통비를 제외 하면 남는 돈이 얼마 없어 유일한 여가나 취미라면 버스를 한번타고 나가면 관람 할 수 있는 영등포 번화가의 연흥극장 이나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는 용산의 남영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 한 낙이었는데. 업체에서 정식업무가 끝난 후 할 수 있는 잔업이나 한 달에 일요일만 2번 쉬는데도 바쁠 때만 할 수 있는 평상시에 주는 일당의 배를 주는 시간외 잔업이나 밤 세워 일하는 철야를 해야 나오는 특별수당이 여분으로 저축 될 수 있는 금액이나 이일도 반장이나 조장의 눈에 들어야 선택 될 수 있어 남수의 입장에서 보면 업체에서 반장이나 조장은 갑의 입장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이런 식으로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면 시골에서 날이 새면 일하고 저물 으면 쉬는 등 자연과 같이 생활 하는 것같이 계절의 바뀜을 음 미 할 수 있으나 지금이 보리가 익어 갈 때 인지 아니면 벼를 추수할 시기가 되었는지 알수 없어 마치 북한에서 한다는 운동의 하나인 별보기 운동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수 아버지는 시골에서 5일장을 돌려가면서 장사를 하는 소위 장똘배기 인데 요즘 들어 몸이 약해져서 인접 조치원 장날에만 장사하러 가고 나머지는 이따금씩 찾아오는 고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였다. 그래도 전의 5일장만큼은 제대로 장사를 하는데 오후 파장이 되면 수금을 하러온 도매상 업자 들 에게 원금을 못 갚아 사정하기 일 수였다. 아버지는 예이 ‘이럴 바에야 도시로 이사 가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봐“ 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는데 옆집 서대장간 큰아들이 서울과 인접한 광주 대단지에서 철거민 상대로 이주 할 수 있는 땅인 속칭 딱지장사를 하므로 광주 대단지로 이사 가기로 결정 하였다. 남수의 생각은 못사는 사람들만 몰려있는 광주 대단지보다 지금 한창 개발되고 있는 개봉동으로 이사 가면 잘살고 못사는 사람 틈에 끼어 살아가기가 훨씬 좋을 것 이라고 생각 하였으나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은 훗날 큰 대가로 돌아왔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병익 어머니는 우리를 믿고 달랑4만원만 가지고 이불과 살림 보따리를 이고 전 가족 4명이 이사 왔다. 시골에서 재산 정리한 아버지는 우선 살집을 얻고 상대원동에 20평씩 분양된 땅을 구매 하였다. 부동산 이란 구매 할 때도 중요 하지만 처분 할 때는 호기가 왔을 때 처분 하여야 하는데 나중에 헐값으로 팔릴 것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우리가족은 살집으로 전세를 얻었으나 병익네 가족은 가져온 돈으로는 전세도 얻을 수 없어 남수는 공터에 무허가 집을 지어야 되겠다고 판단한 결과 풍생고등학교 뒷산에 무허가 건물이 많아 그 틈 사이를 헤집고 우선 집지을 터를 닦았다. 그 당시 무허가 건물이 다 그러 듯 지붕은 아스팔트 루핑으로 덮었고 벽체 및 골조는 합판과 각목으로 공사 하였다. 청계천 등지 에서 무허가 건물에 살던 철거민을 경기도 광주군의 일부인 중부면에 이주시켰는데 이주민중 일부는 이곳에서 호구지책으로 배정받은 땅을 팔아먹은 후 같이 묻어온 무작정 상경자 들과 함께 공터만 보이면 무허가 건물을 때려 짓곤 하였다 .여러 사례에서 보듯 애매하게 돈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집도절도 없는 사람 은 맨몸으로 부딪쳐 일찍 성공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병익 네 가족은 남수네 가족 보다 일찍 집을 소유 할 수 있었다. 병익 가족은 풍생고등 학교 뒷산에서 살다가 학교주변 정비 계획으로 재차 단대리 고지대인 달나라. 별나라라는 후미진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15평의 땅을 배정받아 논골 이라는 곳에서 엉성하게 단독주택을 지었다. 남수의 가족은 남수가1974년 군 제대 후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집을 장만 할 수 있었다. 당시의 땅값은 15평에25만원 이었는데 삼성 이코노 티브이가 10만원 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티브이 값이다.
광주대단지(자금의 성남시)는 무허가 복덕방 및 여관과 여인숙 구멍가게 등이 난립해 있었고 그 지역에서 벌어먹을 수 있는 생산시설인 공장이나 사무실 등이 없고 제3한강대교가 개통 전 이었으므로 유일한 다리인 지금의 강동구와 성동구를 연
결한 광진 대교를 이용하여 2∼3시간을 버스로 이동 하여야만 간신히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심지어 잠실의 아파트는 성남 사람이 아니면 공사를 진행 하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고 강력범죄가 일어나면 꼭 성남사람이 끼어있어 성남에 산다는 것이 창피하여 이름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신도시나 위성도시를 만들려면 현지에서 일할 수 있는 산업시설이나 사무실 등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빈민층인 청계천에서 무허가로 살던 사람들을 무더기로 광주대단지 에 조그만 땅만 주고 거주하게 하였고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땅값을 일시불로 내라고 고지서가 나온 결과 당연히 폭동사건은 예견된 사태였고. 성난 주민들은 폭동 진압 차 나온 1971년 당시에 서울시장인 양택식 시장의 찝차를 전복시키는 등 폭동 사태로 관할 관청인 시 사업소가 흥분한 주민들에 의해 방화되었고 이에 놀란 나머지 서울시는 서울시로 편입되는 것을 포기하고 독립시 로 만들고 부랴부랴 제1공단이니 제2공단이니 하는 공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즈음 북한에서는"가난해서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어린애를 잡아먹는다는 등" 유언비어가 퍼진 상태에서 광주대단지 폭등 사건을 대대적으로 정치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형수인 병익 어머니는 악착스럽게도 평지인 모란시장에서 남한산성자락을 오르내리면서 한겨울이나 무더위를 무릅쓰고 산성 주민을 상대로 억척스럽게 생선 장사를 하였다. 형수 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 첫째인 병익은 남수보다 2살 아래로 일찍이 남수를 따라 숙식을 같이 하며 알루미늄 삿슈 기술을 배워 사업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알코올 중독자로 제대로 가장노릇을 못 하였고 둘째인 병선 이는 고 지식 할 정도로 알루미늄 업체서 일을 잘하였다. 어찌되었든 병익은 춘천에 살고 있던 처녀와 결혼 하여 정연이 를 낳았다. 병익의 사갑을 아들인 정연이가 주재하고 남수는 정연이가 낳은 아이의 손을 잡고 증조 할아버지뻘 이라고 말 한 것이다. 정연 이는 아버지인 병익이 사망 하였는데도 홀어머니가 열심히 키워 대학교와 R. O. T. C를 나와 농협에서 간부로 근무 중이다. 둘째인 병선 이는 이혼한 상태로 2딸을 두었으나 암에 걸려 얼마 전에 사망하고 2명의 딸은 성인이 되어 간호 보조사를 하며 결혼도 하고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나 . 형수는 이혼한 며느리대신 2명의 손녀딸을 성인이 될 때까지 돌보는 등 마치 어머니의 역할까지 대역 하며 살았고. 근처에 혼자 살고 있는 남수어머니를 며느리 와 같이 돌보며 살다가 90이 넘은 상태로 이제는 정부의 혜택으로 생활을 하면서 남수가 용돈이라도 주려고 하면 정부가 주는 돈이 많다고 거절하기 일쑤 이었다. 형수는 안정된 삶을 이어 오다가 노령이 되어 혼수상태 일때 작은아들이 사망 한 것도 모르고 돌아가신 것이다. 형수의 삶은 초기에 천대받던 성남시의 역사와 엇비슷하게 삶을 이어 가다가 사망 한 것이다. 그래도 덕을 쌓은 것이 많아서인지 노후에 여유 있게 생활 하시다 돌아가시고 증손자로 대를 있고 손녀가 2명이나 있다. 손녀는 최근에 결혼하여 성인으로 살아간다. 병익의 사갑을 치르며 두 아들을 앞세우는 등 형수의 한 많은 삶은 성남시의 역사와 함께 하였고 잊어버릴 수 없는 가족사의 한 토막이 되었다. 뉴스에는 성남시장 출신이 대선에 나와 경쟁하는 등 마치 천지개벽을 한 것 같아 옛날에 비해 너무나 바뀐 것이 많다. 지금의 성남은 신도시인 분당과 판교가 들어서면서 강남 못지않은 도시가 되었고 모두가 기피하던 성남의 구도심은 재건축의 의지로 활기가 넘친다. 반세기 만에 강남과 한강 남쪽에 접한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성남은 모든 허물을 덥고 계속 발전 할 것이다.
*도보행상(물건을 머리에 이고 이집 저집 들러 곡식 등을 받고 생필품을 물물 교환하는 행상)
저자 조홍열 약력
한국 문인협회양천지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시집 구름동굴외 공동저서다수
양천문학상.안성문협 공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