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石南寺) 석남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가지산(1,240m) 남쪽에 있다. 현재 여승의 수도의 도량인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 보림사의 개종자 도의가 헌덕왕 16년(824)에 창건하였다 한다. 그 후 이조 제 18대 현종 15년 (서기 1674년) 탁영, 선철선사에 의하여 중건되고 다시 또 조선 제 23대 순조 3년(서기 1803년) 침허, 수일등의 선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고 6.25사변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그 후 비구니인 인홍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해 오면서 석남사를 재건하였다.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쇄당, 무진료, 상락료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이 절을 창건한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신라에 돌아와서는 남선을 전파시켰으며, 도의의 남선에 의하여 북선과 함께 두줄기 선문이 생기게 되었다. 도의는 돌아온지 3년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이렇듯 유서깊은 석남사에는 건물 이외에도 대웅전, 극락전, 정수원, 강선당등의 건축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정조 15년(1791)에 세웠다는 극락전이고 다음 가는 건축물은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이다. 이 사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 1기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수조 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 석조부도는 높이 3.53m에 이르는 팔각원당형으로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1965년 5월에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때 기단 중단석 윗면 중안에서 직사각형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하대석에는 사자와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에 있는 창모양의 안상 속에는 꽃무늬띠를 새겼다. 8판 연꽃대좌 위에 있는 탑몸돌에는 신장(神將)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부도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간월사지(澗月寺址)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512-1에 있는 폐사지로, 금당지 1개소, 석조여래좌상 1기, 석탑 2기가 남아 있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재위: 647-654)때 자장율사가 처음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폐사되었고, 그 후 1634년(조선 인조 12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현재 금당지 등의 건물터와 축대, 주초석, 장대석 등이 남아 있다. 1984년의 발굴조사로 금당지는 가로 13.72m, 세로 10.72m 크기의 사각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임이 확인되었다. 근처에서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기와조각, 질그릇조각 등도 출토되었다.
보물 제 370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과 두 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말기 불교미술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높이 1.35m의 석조여래좌상은 대좌의 일부와 광배가 없어졌으나, 전체의 형태는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목 윗부분은 떨어져 나간 것을 복원한 것이고, 불당은 1979년에 세운 것이다. 옷은 U자 모양의 계단식 법의이다.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리어 땅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런 손모양을 항마촉지인이라고 한다. 불상을 안치한 대좌는 3단으로 되어있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화려한 편이다. 어깨 부분이 약간 좁고, 몸은 풍만하나 양감이 부족한 통일신라 말기 불상 조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두기의 석탑은 금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나란히 서 있으며 기단부와 3층까지만 남아있다. 이중 탑신부의 1층만이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2층과 3층은 후에 만든 것이다. 1층 탑신부에는 가운데 문과 문고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문의 양옆으로 신장(神將)이 각각 하나씩 모두 8명의 신장상이 돋을 새김으로 만들어져 있다.
석남사 3층석탑과 간월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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