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 | 경기도 이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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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서신일(徐神逸) |
주요 집성촌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대북동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전라남도 무안군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
주요 인물 | 서목, 서필, 서희,서봉,서눌, 서유걸,서유위,서유(주)행,서준방,서준영,원목왕후,서한,서석,서추,서약진,서정,서존,서균,서숭조,서공,서순,서성,서안정,서언,서웅,서익,서린,서청습,서진부,서균한,서효리,서찬,서희팔,서춘,서릉,서적,서박,서직,서준,원묘국사 요세,서윤현,서념,서첨,서영계,서중계,서원계,서돈경,서민경,서원경,서신계,야사불화,서윤,서충,서성윤,서희찬,서후상,서맹원,서온,서인,서욱,서의,서정희,서인한,서홍찬,서인조,서인한,서문한,서천량,서수,서구방,서효손,서진,서기준,서영,서중보,서보,서희준,서광준,서식,서신,서견,서원,서운,서인비,서문보,서유,서진,서선, 서호,서효리,서효주,서효환,서효당,서즐,서강,서경생, 서기,서림,서윤련,서지,서우,서연,서경충,서인원,서예원,서경춘,서득천,서사원,서사적,서홍도,서응두,서응시,서대근,서경붕,서우신,서희신,서춘무,서일남진걸,서승춘,서련,서봉령,서달증,서숭로,서문보,서국장,서국빈,서국정,서한중,서경창,서흔남,서태금,서열,서천일,축원,치익,자흔,서인주,서병학,서봉관,서일,서상용,서두수,서승태,서기환,서민호,서왈보,서종채,서상렬,서광조,서태석,서성우,서진수,서성달,서성길,서우순,서상록,서정범,서종식,서정수,서연식,서희환,서남표,서향순,서남동,서경수,서석조,서성환,서준산,서홍송,서경보,서재응,서영택,서영훈,서용희,서기호,서향희,서용택,서기원,서인석,서혜정,서봉연,서준호,서윤복,서장훈,서인영,서현,서희경,서규용,서남수,서생현,서진규,서정원,서현진,서지혜,서형정,서정민,서상섭,서한샘,서갑수,서종석,서태선,서정선,서혜숙,서만술,서송숙,서수민,서영배,서경배,서영필,서준혁,서혜경,서관모,서교일,서거석,서재홍,서영수,서강수,서유석,서원석,서한옥,서재석,서의열,서영환,서민환,서재관,서혜석,서진환,서경환,서재원,서종화,서균렬,서활,서순팔,서경원,토시가와,대니서,서진형,서병길,서병인,서정욱,서철,서윤석,서관희,서동명,서윤제,서한규,서재국 |
인구(2000년) | 172,072명 (45위) |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 시조이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신통(徐神通) 아들 서목(徐穆)(문하시중)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이섭대천(利涉大川)
이처럼 이천 서씨는 고려 황제국 건국에 협력해 내의령 서필(徐弼) 평장사 서봉(徐逢), 내사령 서희(徐熙), 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 장야서령 서유위(徐惟偉) 달성군 서유(주)행(徐惟(周)行),원목왕후,형부상서 서준방(徐俊邦) 연산군 서준영(徐俊英)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서수 (徐琇) 판삼사사 서정(徐靖) 병부상서 서존(徐存) 군기소윤 서한(徐閑),좌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좌복야 서진부(徐振扶),평장사 서성(徐成) 동지추밀사 서순(徐淳(諄) 판삼사사 서공(徐恭) 6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명문 귀족가문이 됐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판도판서 서진(徐晉),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판내시부사 서춘(徐椿), 문하시중 서릉(徐稜),대광내의령 서린(徐鱗),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문하찬성사 서영(徐穎),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판내부사사 서진(徐璡), 평장사 서충(徐忠), 평장사 서윤(徐玧),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밀직사 서원(徐遠),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평장사 서희찬(徐希贊),밀직사 서영계(徐永桂),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평장사 서인한(徐仁漢) ,문하시중 서신(徐信),병부령 서수(徐秀)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판관 서원(徐元),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조선 태조 때 개국원종공신 사재감 서인비(徐仁庇),개국원종공신 사재령 서원기(徐元奇), 태종 때 익대좌명공신 예조판서 서유(徐愈), 사재감정 서진(徐晉), 남원부사 서호(徐顥(灝), 세종 때 우군도총체(右軍都摠制) 서선(徐選),목사 서경흥(徐敬興),사헌부 장령 서근(徐赾), 단종 때 암행어사 서호(徐皞), 사롱사 형제 (단종 충절) 종묘서령 서효리(徐孝理) 무공랑별제 서효주(徐孝宙) 예빈사정 서효환(徐孝寰) 전생서판관 서효당(徐孝堂),우승지 서혼(徐混),세조 때 예문관 직제학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 《손자주해(孫子註解)》를 편찬한 서강(徐崗), 예종 때 익대공신 서경생(徐敬生), 중종 때 반정(反正)에 참여 이조판서에 오른 서지(徐祉),충순위병절교위 서우(徐祐),장령 서산보(徐山甫),참봉 서학종(徐鶴踵),참봉 서연(徐演), 성균관 전적 서희려(徐希呂), 선조 때의 학자 서기(徐起),임진왜란 때 좌부장으로 함흥ㆍ홍원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서경충(徐敬忠),서득천(徐得天)과 서사원(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私財(사재)를 털어 武器(무기)와 식량을 구입하여 義兵(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고,호조참의 선무원종일등공신 서사적(徐思迪),의병장 서대근(徐大謹),서홍도(徐弘渡),서진걸(徐晋傑),서승춘(徐承春),서적(徐迪),서의(徐誼),서희복(徐希福),서희우(徐希祐),서희례(徐希禮),서영우(徐永佑),서사도(徐思道),서정원(徐廷原),서영상(徐永祥),서약(徐鑰),서응후(徐應厚),서덕숭(徐德崇),서천동(徐千童),서계철(徐繼哲),서인손(徐仁孫),서연후(徐延厚),수군첨절제사 서덕룡(徐德龍),병조좌랑(兵曹佐郞) 서경춘(徐景春),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받은 서춘무(徐春武),서응두(徐應斗)는 의병장으로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나갔는데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뒤에 호조참판에 추증,조헌(趙憲)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戰鬪)에서 칠백의사((七魄義士)와 함께 순절(殉節)한 서응시(徐應時)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서정후(徐廷厚)와 서진문(徐振文)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선무원종 1등 공신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행차하였던 서경붕(徐慶鵬), 정묘호란 때 의병장 서일남(徐馹男), 병자호란 때 의병장 서국장(徐國章),서흔남(徐欣男),서언길(徐彦吉),이조좌랑 서국정(徐國楨),성균관전적 서국빈(徐國濱), 공조참판 서국평(徐國平), 절제사 서국보(徐國寶), 제주판관 서련(徐憐),조선 학자 서경덕(徐敬德),서봉령(徐鳳翎),서달증(徐達曾),서의중(徐義中),서경창(徐慶昌),서영환(徐永煥),서한주(徐漢柱),서일원(徐一元),서걸(徐傑),서종하(徐宗夏),서자통(徐自通),서응문(徐應文),서억만(徐億萬),서문숙(徐文淑),서원지(徐元之),서태원(徐兌元),서복기(徐復基),서몽희(徐夢曦),서상덕(徐尙德),서상남(徐尙男),서우량(徐友諒),서응회(徐應會),서자적(徐自適),서태수(徐台壽),서한남(徐漢男),서천일(徐千鎰),서할(徐劼),서승우(徐承佑),서만조(徐萬組),서효원(徐孝源),서문숙(徐文淑),서석린(徐錫麟),서우흠(徐于欽),서상렬(徐相烈),서강수(徐江水), 위항시인 서병옥(徐秉玉),서병수(徐秉수),서의석(徐義錫), 조선 화가 서문보(徐文寶), 조선음악가 서창서(徐昌瑞), 조선 효자 서즐(徐騭),서채량(徐采亮),서병홍(徐柄泓),서준여(徐俊汝),서태금(徐太金),서영측(徐永側),서영팔(徐永八),서봉주(徐鳳周),서덕길(徐德吉),서만(徐萬),서재대(徐再大),서언유(徐彦儒),서윤옥(徐崙玉),조선 혁명가 서림(徐林) 서윤련(徐閏連) 서양갑(徐羊甲),병조참판 서숭로(徐崇老),공조참의 서봉록(徐奉祿),부총관 서보우(徐補禹),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서홍련(徐鴻連),도호부사 서확(徐臒),도호부사 서일명(徐一明),군자감정 서의건(徐義健),군자감정 서효행(徐孝行),장례원 판결사 서사근(徐思近),공조참의 서지관(徐志寬),종성부사 서호(徐琥),동래부사 서경천(徐慶千),참군 서의민(徐義敏),부사 서택선(徐宅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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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서성달,서한샘, 서재관,서혜석, 서경원,서상섭, 서기호, 이천그룹 회장 서상록(徐相錄), 태평양그룹 회장 서성환(徐成煥), 국무총리 서영훈 , 총무처장관 서석순, 건설부장관 서영택 ,과기부장관 서정욱 ,농림부장관 서규용 ,교육부장관 서남수 , 교육부차관 서범석, 건설부차관 서종대,세계불교법왕 서경보,카이스트 총장 서남표, 조선대총장 서재홍,한글학자 서정범, 서정수, 불교학자 서경수, 핵학자 서균렬, 의학자 서병설, 서활,서순팔, 신학자 서남동, 서예가 서희환,피아니스트 서혜경, 발레리나 서희,가수 서현,서인영,배우 서인석, 서지혜,서현진 ,운동선수 서윤복, 서정원, 서향순,서재응,서장훈,서희경,장군 서윤택,서경석,서길원,서상국,서정열,민주화운동가 서동만,서승,서준식,서경식,연평해전 중사 서후원,하사 서정우, 천안함 하사 서승원,하사 서대호 등의 인물이 있다.[1]
성씨제도(姓氏制度)는 원래 왕가(王家)에서만 사용하다가 차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퍼진 것이다. 한국의 경우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왕족에 한하여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三國時代) 고구려의 주몽이 고씨(高氏), 백제의 온조가 부여씨=서씨(扶餘氏), 신라의 혁거세가 박씨(朴氏)를 성씨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2]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장수왕(419∼491), 백제는 근초고왕(346∼376)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달리 신라 진흥왕(540∼576) 순수비에는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성(性)보다는 본(本)을 썼다는 것으로 풀이된다.[3] 고려 문종에 이르러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명문화하여 다양한 성씨가 생겨났다. 이와 함께 사대부 가문에선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정리한 가계 기록인 가승(家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족보는 양반의 자손임을 입증해야 과거를 볼 수 있었던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이며 훌륭한 조상에 뿌리를 둔 가문임을 내세우기 위해 시작됐다.[4]
조선 세종 5년(1423년)에 발간된 문화 류씨(文化 柳氏)의 《영락보(永樂譜)》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다. 아쉽게도 《영락보》는 서문(序文)만 전해지고 있을 뿐 현존하지 않는다. 이천 서씨의 족보는 1524년 《갑신보(甲申譜)》가 최초로 발간됐다.[5]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백제왕족 후손설이 있다.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서국(徐國)는 단군 조선의 제후국이며 동이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부른다.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서언왕이 동이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가 두려워 서언왕을 동이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6]
기자의 후손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7]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6][8]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9]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백제왕족의 후손설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 융과 손녀인 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서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서신일(徐神逸, 817~902년)로 신라 말기에 벼슬이 아간(阿干)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려놨다. 그의 생애 동안 헌덕왕에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이 난무했다.
그는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한천(漢川 : 지금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孝養山) 아래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효양거사라 칭하고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니, 제자들이 몰려와 집 안팎으로 가득찼다.
서신일은 74세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이에 제자들이 “저희 가운데 스승님의 대를 잇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훗날 스승님의 묘(廟)를 누구에게 의탁하겠습니까. 다시 부인을 얻으시어 아들을 얻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청하여 그는 아내를 다시 얻었다. 어느 봄날 서신일이 노비들을 거느리고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에 꽂힌 사슴 한 마리가 불쑥 그의 앞으로 뛰어와 쓰러졌다. 서신일은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른 다음 멍석 아래 사슴을 숨겼다.
곧이어 사냥꾼이 나타나 사슴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서신일은 “사냥꾼인 당신을 두려워하여 도망쳤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사슴이 왔겠소?”라며 사냥꾼을 돌려보냈다. 덕분에 사슴은 사냥꾼의 눈을 피했고, 상처를 치유받아 숲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밤 서신일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낮에 살려준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했소.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재상(宰相)에 올라 영달(榮達)을 누리도록 도우리라.”
그 일이 있은 뒤 서신일이 나이 85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내의령(內議令)에 올랐다. 내의령은 내의성(내사성과 문하성을 합친 최고의 중앙기관)에서 가장 높은 종1품의 수상격에 해당한다. 서필의 아들이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다. 서희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의 땅을 회복한 장군이자 문신이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10] 이 때문에 서씨 가문은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묘소와 관련 사슴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서신일이 천수를 다하니, 사슴이 나타나 상주(喪主)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상히 여긴 상주가 사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어느 양지바른 산기슭에 멈추어 서서 발굽으로 자꾸만 땅을 파헤쳤다. 이것은 필시 산신령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장사하니 지금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마을 뒤의 효양산 산록에 있는 시조 서신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11] 고려시대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인주(인천) 이씨, 해주 최씨, 남양 홍씨와 더불어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서목(徐穆)은 시조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했다.[12]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 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고려 인종은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고종 때는 영창(永昌)이라 불렀으며 공양왕은 조비 신씨(祖妣 申氏)의 고향이라 해서 남천군(南川君)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에 이르러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44년 조선 세종(26년)에 이르러 호수(戶數)가 1000호 이상이 되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613년(광해군 5년) 현으로 강등됐고, 1623년(인조 1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돼 이천군에 합병되었다. 1996년에 이천시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서(徐), 신(申), 안(安), 한(韓), 장(張), 왕(王), 홍(洪), 황(黃)의 여덟 성씨가 살았는데 일곱 성은 모두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으며 오직 서씨만이 뒤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13]
이천서씨 족보인 《계미보서》(癸未譜序)[14]에는 조선시대 서씨(徐氏) 성을 지닌 시조가 태어난 곳, 즉 ‘관향’(貫鄕)을 크게 세 곳으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 서씨(徐氏)의 관향(貫鄕)에 두드러진 것이 세 곳이다. 이천(利川)은 아간공(阿干公)을, 부여(扶餘)는 온조왕(溫祚王)을, 달성(達成)은 소윤공(少尹公)을 선조로 삼았다. (중략)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기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해 이천 서하성(徐河城)에서 살았으므로 자손이 그 지명을 취해 성을 서씨(徐氏)라 했으니 이것이 노담(老聃 : 주나라 철학자)이 성을 얻은 것과 같고 가장 오래된 일이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이 난을 피해 남으로 와서 부여성(扶餘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의 30세 의자왕에 이르러 신라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그 뒤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에서는 부여융의 여(餘)란 글자를 고쳐 서(徐)라는 성을 주었으니 이것이 원백(袁伯)이 성을 전한 것과 같고 가장 근래의 일이다. 달성 서씨(達成 徐氏)의 선조는 고려 말에 일어났으니 선조 윗대에 반드시 성을 얻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따져 볼 길이 없다.
이천(利川) 달성,대구(達城,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봉성(平當,逢城), 남평(南平) 서씨 등이 있다.
달성 서씨(達城 徐氏)와 대구 서씨(大丘 徐氏)의 분리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은 《대구서씨족보》의 서문에서 “서씨는 본(本)이 둘이 아니었는데 뒤에 나누어진 모든 파(派)는 이천(利川)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모두가 아간공 서신일의 후손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15] 이천 서씨에서 분관된 달성 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향파(鄕派)로 나뉘었다. 두 파는 조선 숙종 28년(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제작해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 충돌이 심했다. 결국 영조(英祖)대인 1736년 경파(京派)가 단독으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두 파는 완전히 갈라섰다. 족보상으로 달성 서씨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라 하고 대구 서씨는 소윤공(少尹公)파라고 갈래지운다. 소윤공파에 약봉파(藥峯派)가 있는데, 그 선대에 5세 실전(失傳)이라는 계대(繼代)의 단절이 있다.조선 3대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사람은 약봉 서성(徐渻)이다.
죽석공 서영보(徐榮輔)의 선대와 후대는 8대를 잇달아 대과에 합격했다. 그중에 두 명은 장원 급제자다. 조선 시대 초유의 일이다. 그의 고조부인 서종태(徐宗泰)가 영의정, 증조부인 서명균(徐命均)이 좌의정, 조부인 서지수(徐志修)가 영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삼대 정승집’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삼대 정승집은 이외에도 청송 심씨의 심덕부, 심온, 심회와, 동래 정씨의 정유길, 정창연, 정태화와 청풍 김씨 김구, 김재로, 김치인을 들 수 있다. 김구의 둘째사위는 서명균(徐命均)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공원 내에 있는 김구의 묘비문 글씨를 쓴 이도 서명균(徐命均)이다.
대구 서씨는 또한 ‘삼대 대제학’ 집으로도 유명하다. 대구 서씨의 서유신(徐有臣), 서영보(徐榮輔), 서기순(徐箕淳)과 광산 김씨의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과 연안 이씨의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과 전주 이씨 백강 이경여 집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삼대 정승과 대제학이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문은 대구 서씨가 유일하다.
대구 서씨는 조선조에 영의정 7명, 좌의정과 우의정 각각 한명씩 총 9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하였고 대제학 6명, 왕비 1명으로서 정승의 배출은 전주이씨가 22명으로 가장 많고 동래정씨(東萊鄭氏)가 17명으로 그 다음이며 신안동김씨가 15명, 청송심씨(靑松沈氏)가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가 12명, 여흥민씨 (驪興閔氏)가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가 11명에 이어 남양홍씨(南陽洪氏)와 같이 제8위이다. 달성서씨의 대표적 인물은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으로서 세종과 성종에 이르는 6대왕조를 섬긴 신하로서 45년간 6조의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성리학자로서, 한문학과 천문.지리.의약 등에까지 통달하였으며 경국대전, 동국통감, 대동여지승람,동문선, 동인시화를 편찬하고 향약집성방을 국역하였다. 고려 성리학의 적통인 양촌 권근의 외손자이며 그의 종현손 약봉 서성이 달성서씨 가문을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약봉 서성은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인으로 공조판서와 판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서인인 까닦에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네아들 모두 출중하였고 특히 서경우(徐景雨)는 우상(右相)에 올랐으며 선조의 부마가 된 서경주(徐景주)의 가문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문벌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손자 서문유(徐文裕)는 이조판서이고 서문중(徐文重)은 영의정, 문유의 아들 서종옥(徐宗玉)은 이조판서, 서종옥의 아들 서명선(徐命善)은 영의정, 서명응(徐命膺)은 대제학, 명응의 아들은 직제학, 손자 서유구(徐有渠)는 대제학에 올랐으며 병조참판 서문상(徐文尙)의 아들인 서종태(徐宗泰)는 영의정겸 대제학, 그의 두 아들인 서명균(徐命均)은 좌의정, 서명빈(徐命彬)은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의정, 지수의 아들인 서유신(徐有臣)은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도 대제학, 서영보의 아들 서기순(徐箕淳) 또한 대제학에 올라 3세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고, 서경보(徐耕輔)는 이조판서에, 서긍보(徐兢輔)는 참판. 그의 아들 서정순(徐正淳)은 예조판서, 서당보(徐堂輔)는 영의정을 지냈다. 따라서 서종태- 서명균 - 서지수는 3세 상신을 지냈고, 영의정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이 대제학에 올라 서유신 - 서영보 - 서기순이 3세로 연이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서종태로부터 직계 5대 가족이 3세 상신에 3세 문형을 배출한 명문인 것이다.
대구서씨(大丘徐派)는 서미성(徐彌性) 목사(牧使),서거광(徐居廣)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서거정(徐居正)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서호(徐浩) 의금부사(義禁府事),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서성(徐渻)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경우(徐景雨)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서원리(徐元履) 관찰사(觀察使), 서문중(徐文重) 영의정(領議政), 서광보(徐匡輔) 부사(府使),서병순(徐秉淳) 부사(府使), 서상후(徐相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형리(徐亨履)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서유봉(徐有鳳)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서유복(徐有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서헌수(徐獻修)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서유련(徐有鍊)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서신수(徐愼修) 부사(府使), 서경보(徐敬輔) 영장(營將), 서병준(徐丙俊)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서기순(徐耆淳) 이조참의(吏曹參議), 서상조(徐相祖)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서경순(徐經淳) 좌부승지(左副承旨),서상준(徐相駿) 승정원부정(承政院副正), 서상범(徐相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서상하(徐相夏)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서연순(徐璉淳)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병길(徐丙吉)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서상욱(徐相旭)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서상진(徐相臻) 도사(都事), 서상익(徐相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무순(徐戊淳)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서정악(徐廷岳) 비서원승지(秘書院承旨), 서명순(徐明淳) 돈녕부사(敦寧府事), 서병일(徐丙逸) 도사(都事), 서상건(徐相健) 오위장(五衛將),서화순(徐華淳)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서홍순(徐泓淳) 부호군(副護軍), 서정순(徐貞淳)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서유건(徐有健) 부사(府使), 서춘보(徐春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서명무(徐命茂) 부사(府使), 서유룡(徐有龍) 어사(禦使, )서치보(徐致輔) 부사(府使), 서유영(徐有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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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시조는 서진(徐晋)
달성 서씨의 원조(遠祖) 서진(徐晋)은 고려 사람으로 벼슬은 봉익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 달성군이었고,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부인은 초계 주(周)씨였다[17]. 학유공파(學諭公派)는 달성 서씨 7세손 학유공 서도(徐渡)의 후손들로서, 학유공의 호는 군줍이었고, 일호는 월촌(月村)이다. 벼슬은 조선 무공랑 성균관 권지학유를 지냈고, 부인은 월성 정(鄭)씨였다. 묘소는 영천시 금호읍 귀암리 마당골 신좌(辛坐)이고 묘향일은 한식(寒食) 익일(翌日)이다.[18] 호잠파(湖岑派)는 달성 서씨 10세손 서수영(徐壽永)의 후손들로서, 서수영은 조선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고, 부인은 제주 양(梁)씨이며, 서기 1500년에서 1565년까지 살았다. 달성 서씨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오늘날 달성공원의 주소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번지이다.[19]
일반인에게는 우리나라의 모든 서씨(徐氏)가 이천 서씨(利川 徐氏)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수도 장안에 끌려간 부여융에게 당 고종이 서씨의 성을 하사해 본국으로 보냈다고 전한다. 그 뒤 세계(世系)를 알 수 없으나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이천서씨 서신일 5세손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742년 이천서씨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달성, 부여, 평당, 장성, 연안, 남평을 본관으로 둔 서씨가 모두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갈라진 뿌리”라고 소개하고 있어, 부여 서씨가 이천 서씨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20] 그러나 1925년 부여서씨족보인 《보계변》(譜系辨)은 서씨의 연원을 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인 기준(箕準)이나 단군시대 여수기(余守己)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부여 서씨를 이천 서씨의 계보 안에 포함시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21] 부여 서씨는 이천 서씨와 한 집안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절강 서씨(浙江徐氏)는 중국계 귀화성씨다.
절강 서씨(浙江徐氏)의 시조(始祖)는 서해룡(徐海龍)으로 증손 서학(徐鶴)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여러 전투에서 공(功)을 세우고 경북 성주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다. 그 뒤 후손들은 서해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인 절강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22]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시조 서간(徐趕)은 고려 때 중국에서 귀화한 팔학사(八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당성(唐城, 남양의 옛 지명)에 정착했는데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랐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고,서희팔(徐希八)공은 이천서씨 서신일 후손으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삼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23]
당성 서씨(唐城 徐氏)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시조 서간(徐趕)의 12세손으로 교리(校理)를 지낸 서원길의 둘째 아들인 서득부(徐得富)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당성(唐城)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24] 따라서 남양 서씨와 당성 서씨는 한 집안이다.
상서공(尙書公) 6세손 휘린(諱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상서공(尙書公) 13세손 휘연(諱演) 강호공파(江湖公派)
상서공(尙書公) 7세손 휘념(諱恬) 문한공파(文翰公派)
상서공(尙書公) 10세손 휘선(諱選) 공도공파(恭度公派)
공도공(恭度公) 10세손 휘기(諱起) 문목공파(文穆公派)
상서공(尙書公) 8세손 휘윤(諱玧) 시랑공파증(侍郞公派證)
상서공(尙書公) 10세손 휘보(諱輔) 전서공파(典書公派)
상서공(尙書公) 11세손 휘신(諱信) 목사공파(牧使公派)
상서공(尙書公) 13세손 휘호(諱皞) 사인공파(舍人公派)
상서공(尙書公) 현손(玄孫) 휘광(諱珖) 예빈공파(禮賓公派)
증손(曾孫) 휘익(諱翼) 부령공파증(副令公派證)
상서공(尙書公) 8세손 휘학종(諱鶴踵) 참봉공파역(參奉公派譯)
상서공(尙書公) 7세손 휘첨(諱詹) 소윤공파(少尹公派)
상서공(尙書公) 6세손 휘릉(諱稜) 절효공파(節孝公派)
상서공(尙書公) 2세손 휘눌(諱訥) 원숙공파(元肅公派)
서령공(署令公) 7세손 휘유(諱愈) 양경공파(良景公派)
서령공(署令公) 7세손 휘척(諱陟) 창사공파(倉使公派)
서령공(署令公) 7세손 휘진(諱晉) 교리공파(校理公派)
교리공(校理公) 후손 휘인원(諱仁元) 명암공파(嗚嚴公派)
경기도 이천시 부본면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대북동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전라남도 무안군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서희(徐熙, 942~998년)는 고려의 외교관이자 문신, 군인이다.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등용됐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돼 귀국했다. 성종 12년(993년) 거란(契丹)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히 반대해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 결과고려는 거란과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 곧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를 포함한 강동6주의 영토를 수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숨을 거뒀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됐다.
서일(徐一, 1881~1921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우리정부는 서일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이 항렬자는 을미보(1845년)를 발간할 때 지은 것으로 시조 아간공(阿干公)을 1세로 하여 27세를 기점으로 천간지지(天干地支)에서 22자를 골라 뽑아서 항렬자의 순서로 정했다. 혹시 이름이 서로 겹칠까 염려하여 두 글자씩 뽑았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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