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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문화기행 스크랩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1
봉추선생 추천 0 조회 122 07.06.22 17:0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기쿠치 요시오가 쓴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번역 요약정리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1 - 크세노폰의 도주극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직업

고대 오리엔트의 사료를 보면 매춘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반적인 결혼이 금지된 무녀가 불특정다수의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이른바 신성창부(神聖娼婦)가 그것이다. 방화, 약탈, 강도, 살인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16세기 독일 용병부대(란츠크네히트)는 치사하게도 자신들의 부대를 숭고한 사명을 가진 기독교기사단이라 부르고 있다. 물론 용병의 기원이 종교에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쟁이란 것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매춘과 용병의 비슷한 점이라면, 고대 오리엔트시대서부터 자신의 몸을 재산으로 돈을 벌기 위한 서글픈 직업으로 존재해왔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매춘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면, 우리들 용병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직업이다'라고 하는 20세기의 한 용병부대원의 말처럼, 용병제는 일찍부터 기본적인 군사제도의 하나로 정착되어 왔다.
고대 오리엔트국가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비군 없이 유사시에는 각지에서 강제징병과 용병으로서 군을 편성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부대도 항상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크세노폰이 이끄는 1만명의 그리스인부대가 적지 페르시아제국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크세노폰의 그리스인부대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철학자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는 본래 군인이었다. 그는 기원전 401년, 페르시아의 왕자 큐로스가 자신의 형 아르탁셀크세스 2세의 왕위를 노린 원정에 참가해서 패전, 큐로스의 사후 페르시아에서 적중 6000Km를 돌파해서 조국 아테네로 도망쳤다. 이때 그의 뒤를 따른 것이 1만명의 그리스인 용병들이었다. 당시 참가인원은 중무장보병 만천명, 경무장보병 이천명으로 총합 만3천명이었고, 이중 1만명이 패전후 살아남아 도망을 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인 용병들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군대는 시민군이 중심이었다. 시민들에게 있어서 병역은 직접세로서 무기와 무장도 자비로 마련하였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의 총인구는 23만명, 이중 실제로 시민이라고 불릴 수 있는 아테네 태생의 성인남성은 3만명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의 발전과 함께 전 지중해에 걸친 식민지 획득에 의해 부는 증가하였지만 시민의 핵심이 되는 중소 토지소유자들이 몰락하면서 점차 병역기피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고대 그리스 또한 고대 오리엔트의 국가들과 같이 용병이라는 제도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아테네의 쇠퇴와 용병의 발생

기원전 431년은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시작된 년도이다. 당시 아테네의 진용을 보면 중무장보병 만3천, 요새와 성벽의 수비병 만6천, 기병은 천2백, 궁병 천6백, 취항 가능한 3단 갤리선 300척으로 육군이 3만2천, 해군이 6만이었다. 앞서 말한 3만의 시민으로는 도저히 동원할 수 없는 숫자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점차 병역기피현상을 보이는 시민을 징집하기 위해, 일당을 지불하기 시작하였지만, 전염병의 발생 등으로(이 전염병으로 페리클래스가 사망한다) 도저히 병력을 동원하기 힘들게 되자, 아테네시 당국은 크레타제도나 바레아레스 군도에서 다수의 용병을 고용하게 된다.
이러한 용병의 고용은 일시적으로 아테네의 우위를 가져오게 되지만,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전쟁을 끝나게 된다. 하지만 승자인 스파르타를 포함해서 그리스 전체의 국력 쇠퇴는 가중되고 많은 그리스인들이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외국에 고용되어 용병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2 - 팍스 로마의 종언(終焉)

병역은 로마시민의 자부심

고대 그리스의 중무장보병의 밀집방진전술(팔랑크스)는 이후 마케도니아에서 개량되어 알렉산더 대왕의 대제국건설에 한 몫 했다. 이 전술이 당시 이탈리아반도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로마에 전파되기까지는 10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군의 중추는 시민이었다. 시민이란 일정이상의 재산을 가진 자로 자산이 없는 사람은 병역면제였다. 즉, 병역은 로마시민의 자부심이었다. 또한 그러한 자부심을 가진 시민들로 구성된 로마군단은 이탈리아 반도 통일에 이어서 첫번째 해외 파병이라 할 수 있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업국가이자 고대 오리엔트국가와 같이 용병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카르타고의 용병들은 골인, 스페인인, 리구리아인, 바레알인, 혼혈그리스인 등등으로 그 대부분은 탈주한 노예였으며 아프리카인도 상당수 있었다. 제 1차 포에니전쟁 후 급료지불을 거부한 카르타고 정부에 맞서 3년4개월 간 12만의 용병들이 '아프리카전쟁'이라 불리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에게 진압된다.

시민군에서 지원병제로

카르타고와의 전쟁, 마케도니아 등과의 전쟁도 끝나고 로마는 시칠리아, 스페인, 마케도니아, 북아프리카 등에 속주를 두게 된다. 각 속주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속주세 등으로 로마 내부에서는 점차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고 중소토지소유자는 몰락해 가게 된다. 마침내 누미디아 왕국과의  유구르타전쟁에서 병역대상자의 부족에 직면한 로마당국은 병역자격대상의 폭을 크게 낮추고 병력을 모으지만 그러한 질 낮은 병사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유구르타전쟁의 조기 종결을 외치며 집정관에 당선, 병역자격을 폐지함으로써 병역제도를 징병제도에서 지원병제도로 바꾸게 된다. 이는 곧 병역이 의무가 아닌 직업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군대는 상비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집된 병사들에게 있어서 제대 후 생활의 보장을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령관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각 군단은 장군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로마는 제정의 길로 나서게 된다.

용병화의 시대가 시작되다

제정이후 로마군은 상비군이 설립된다. 30 ~ 35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로마군은 군단병말고도 보조병이라는 이름으로 속주의 병력을 모으게 되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메리트는 제대 후 주어지는 로마 시민권이었다. 이러한 지원병제인 군단병과 보조병이라는 제도하에서 로마군단은 점차 용병화의 길을 걷게된다. 이러한 현상에 박차를 가한 것은 212년 카라카라황제의 제국내 전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정책이었다.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한 속주민의 보조병 지원은 당연히 그 의미를 잃게 되고 병력의 충원이 힘들어지게 되자, 제국 밖의 민족, 특히 게르만족을 용병으로서 고용하기 시작한다.
이후 군인황제시대의 내란과 스페인과 칼파치아 산맥의 금광고갈로 제정의 어려움에도 값싼 가격에도 기꺼이 용병이 된 게르만족이 로마군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데,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시대에는 총 50개 군단으로 군비를 증가하면서 게르만족 용병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오도아케르의 권력찬탈

395년 정식으로 동서로 나뉘어진 로마제국은 특히 서로마에서 그 폐해가 드러나 일설에는 총 30명의 가짜황제가 등장했다고 할 정도로 혼란이 가중된다. 이러한 와중에 군대에서의 게르만용병의 비중은 날로 커지고, 특히 근위대의 요직을 대부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467년 근위대 사령관이었던 게르만 스키리오족의 족장 오도아케르에 의한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질적으로는 동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오도아케르 그 자신은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는 총독의 지위를 얻는 형식이었지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에서 시작된 지원병제도가 결국 군의 용병화의 길을 걷게 되고, 그 결과 서유럽의 중세를 불러온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3 - 기사(騎士)의 시대

전사계급의 탄생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후 여러 게르만왕조의 흥망을 거치며 결국 서유럽은 800년 칼대제가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으며 통일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서유럽은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들어간다. 중세의 시인 프라이당크가 노래한 '신은 세개의 신분을 만들었다.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밭을 가는 사람'에서 기도하는 사람, 즉 성직자의 경우는 둘째치고라도 싸우는 사람이라고 하는 신분은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키고, 상당한 병농분리가 진행되었다.
전투는 밀집방진과 같은 대규모 보병이 아닌 소수의 기병위주가 되었다. 고대로마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편자의 보급은, 기병의 기동성 향상과 함께, 기병전법의 변화를 가져오고 점차 군사적 스페셜리스트인 전사계급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왕은 그러한 전사계급의 정점에 선다.
866년 프랑스 샤를왕은 가신을 소집하면서 반드시 말을 타고 올 것을 엄명한다. 이때의 기병들은 단순히 말을 탄 병사들이 아닌 왕으로부터 봉토를 받은 기사들이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는 봉건제도에 돌입한 것이다.

아르바이트에 열심인 기사들

봉건제도하의 정규군의 기사들이 아르바이트로 용병기사가 되는 것은 이 당시 드문 일이 아니었다. 기사가 군주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는 당연히 군역(軍役)이었다. 그 군역의 내용은 군주와 기사간의 교환되는 봉신계약으로 정해져 있었다. 보통은 기사가 자비로 군역을 부담하는 기간은 년간 40일로서, 원정지는 어디어디까지라는 식으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황제가 제관식을 위해 로마원정을 행할 경우를 제하고는 독일이외의 지역으로 출진할 의무는 없었다. 또한 독일 국내라고 할 지라도 어디어디 강변까지, 어디어디 기마로 1일 행군거리까지, 어디어디 주의 어디까지 등등, 세밀한 부분까지 제한이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나는 출진요청에는 당연히 특별수당이 나왔다. 이러한 점에서 기사들이 용병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될 것이다.
물론 기사가 이러한 아르바이트에 열심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독일의 경우 미니스테리아레(家士)라고 불리는 비자유민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귀족이 아닌 기사들이었다. 12세기가 되면 그들 또한 봉토를 하사받아 귀족인 자유기사들과 거의 구분이 없어지지만, 여하튼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그다지 없었다는 점이다. 그중에는 '황제를 포함해서 44명의 영주와 계약하고 있는 것이 자랑'이라는 미니스테리아레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위와 같은 점에서 기사가 용병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에 아무런 심리적 장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이 여러 영주와 계약을 할 정도의 실력이 없는 기사의 경우는 돈이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갑옷, 투구 등등 모든 장비를 갖춘 기사 한 명에 드는 돈이 150헥타르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과 맞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기사들에게는 돈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기사용병시장의 성립

11세기에 유럽은 경제팽창을 시작한다. 각지에서의 은광과 금광의 개발로 점차 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토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하의 중소영주들, 즉 기사계급의 경제적 몰락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점차 기사들은 현금수입을 바라게 되고, 자비로 봉사해야하는 군주에의 군역은 점차 금전으로 대납하고 용병업으로 그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이게 된다.
한편 군주들에게 있어서도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여러가지 제약이 많은 기사들을 출진시키기 보다는 그들이 내는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 여러면에서 효율이 좋은 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맞춰지면서 유럽에서는 기사용병시장이 출현하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사투(私鬪)라고 하는 법이 아닌 개인의 무력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다툼이 성행하였고 이러한 사투에 고용된 용병기사들은 점차 집단을 이루어가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는 집단을 이루어 도시나 마을을 약탈하는 집단도 나오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집단들은 점차 용병기사단이 되어갔는데, 그 대표적인 용병기사단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로바로사가 1164년과 1174년 두 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황제군의 주력이 되었던 브라반트단(團)이었다.

악명높은 용병기사단

브라반트단외에도 스페인의 피레네산맥 출신자들인 아라곤단, 바스크단, 나바라단 등의 용병단이 활동하였다. 이러한 용병단은 어디든지 악명 높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브라반트단의 경우 잔인함으로 공포와 증오로 가득 찼다.
한편으로 이러한 용병단의 등장은 낡은 질서와 특권계급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의 행동을 위협으로 여긴 귀족사회 또한 그 대책으로 강구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1179년 라테라노공회의(公會議)에서는 용병단을 사용해 전쟁을 하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1215년 그 유명한 마그나 가르타에서도 그 내용중에 '왕국의 불명예인 외국인기사, 노사수,용병'의 즉시 추방으로 규정한 곳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11세기의 십자군전쟁은 이들 용병단에게 또 다른 활약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돈만을 바라며 사투에 몰입하고, 심지어는 약탈, 강도짓까지 하던 용병기사들에게 '신(神)의 전사(戰士)'라는 명예와 함께 지금까지 하던 돈벌이를 계속 할 수 있었으니 그들에게 있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십자군전쟁도 13세기에 끝나고, 이어 발발하는 프랑스, 영국간의 백년전쟁도 백년동안 매일같이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용병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돈벌이를 위한 장소는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야말로 금맥을 발견했다. 중앙권력 없이 철저한 각도시의 자치로 분리된 14세기 이탈리아였다.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4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 용병대장

한나라의 운명을 거머쥔 용병대장

이탈리아반도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일관되게 중앙권력이 없이 지내왔다. 그리고 중세에는 대체로 3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우선 칼대제의 세력권안에 들어갔다가 이후 각 도시국가가 세력을 떨치게되는 북이탈리아. 그 밑으로 로마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로마니아지방. 그리고 시칠리아를 포함한 남이탈리아였다.
남부이탈리아는 서로마제국 멸망 후 게르만왕국과 동로마제국,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석권한 이슬람세력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남부 이탈리아지방을 통일한 것이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이었다. 이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을 건설한 사람은 프랑스북부 노르망디지방출신의 용병대장의 후예였다.
덴마크계 노르만인들이 건설한 노르만공국은 11세기 급격한 농경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구의 증가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상속받을 토지의 부족 등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노르망디를 떠나 외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들의 주요 행선지가 바로 남부이탈리아였다. 노르망디의 오토빌 라 기샤르라고 하는 마을 출신의 한 용병대장의 일족이 남부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끝에 백작, 공작의 지위를 거쳐 끝내는 당시 이슬람세력하의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교황청의 분열을 틈타 나폴리의 왕관까지 손에 넣어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을 건설한 것으로 노르만인의 영국정복과 함께 노르만인의 정복사가 완성된다.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은 이후 왕위계승자가 사라지고 왕국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6세에게 넘어가지만, 이후 프랑스의 앙주가문으로 다시 그 주인을 바꾸게 되고, 앙주가의 샤를의 폭정에 시칠리아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시칠리아의 주인은 다시 스페인의 아라곤왕가(王家)로 바뀌게 된다. 한편 나폴리에서는 앙주가문의 여왕 조안나2세의 치세에 상속다툼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 여왕은 한 용병대장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게 되는데, 아텐도르 스포르챠라는 이름의 이 용병대장은 여왕을 배신하고 스페인 아라곤왕가에 나폴리왕국을 넘기게 된다. 그야말로 일개 용병대장의 손에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 것이다. 이후 이탈리아는 밀라노공국, 베네치아공화국, 피렌체공화국, 로마교황령,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이라는 5개의 거대 세력위에 그 틈에 낀 작은 세력들이 넘치는 혼란이 계속된다.

국장(國葬)으로 받들어진 용병대장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용병대장의 기마상중에는 웃체로의 '존 호크우드의 기마상'이 있다. 이 기마상(騎馬像)의 주인공 존 호크우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인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용병대장들은 2가지 타입이 있었다. 하나는 존 호크우드를 대표로 하는 외국인 용병대장. 그리고 앞서 소개한 아텐도르 스포르챠와 같은 이탈리아인 용병대장이었다. 외국인 용병대장들은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는 자세로 떠도는 방랑형이었다면, 이탈리아인 용병대장들은 작지만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정착형이었다.
외국인 용병대장에는 호크우드외에 독일인 베르나 폰 울스링겐, 콘라트 폰 란다우, 알베르트 슈테셀, 봉갈덴 등이 있었다. 모두 잔혹무도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울스링겐의 경우 '신의 적, 동정과 자비의 원수'라고 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갑옷에 새기고 다닐 정도였다. 봉갈덴과 슈테셀의 경우 도시국가 세나를 습격해 약 7천5백 골드굴덴을 탈취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호크우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호크우드에 관한 한 일화를 보면, 2명의 수도사가 호크우드에게 '신이 당신에게 평화를 내리시기를'이라는 축복의 말을 건네자, 호크우드는 화를 내며 '신이 너희들의 양식을 거두어서 죽어 버려라, 이 빌어먹을 놈들아! 신이 나에게 평화를 내린다면, 나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돈에 미친 호크우드는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말년에서 전장이 아닌 자신의 침대 위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고용주였던 피렌체는 그의 장례식을 국장과도 같은 규모로 치루고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에 그의 기마상을 세웠다고 한다.

도시국가의 발전과 용병의존의 관계

도시국가 피렌체가 군사력을 용병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말이었다. 그때까지는 귀족정치를 타파한 시민들이 주력이 된 민병 보병군이 군의 주력이었다. 하지만 모직물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부유한 시민과 그렇지 못한 시민의 경제력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고, 부유층의 정권독점이 심화된다. 이에 더해서 부유한 시민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판로 확장을 위해 인접한 피사나 세나에의 침략전쟁을 일으키게 되면서 일반시민들은 점차 병역을 기피하게 된다. 한편 부유층들은 원래 병역을 싫어하면서 아예 병역면제세를 신설하게 되고, 전쟁의 양상이 점차 민병 보병으로는 중무장을 한 전쟁의 프로들인 기병에게 상대가 되지 않게 변하자, 병역면제세로 모은 돈으로 국내치안유지를 겸해서 프랑스, 스페인, 독일에서 흘러들어온 용병기사단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즉, 경제의 발전은 경제력의 차이를 낳게 되고, 그와 동시에 시민개병제도는 무너지고 용병이 군의 주력이 된다. 이것이 당시 공화제 도시국가의 흐름이었고, 피렌체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베체치아공화국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원래 해상무역이 주 활동지였던 베체치아군대의 주력은 해군이었다. 전함에는 항상 베네치아시민만이 탑승했다. 그러나 베체치아의 국력이 발전하면서 점차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육군은 용병대장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용병대장에서 밀라노공작으로

로마교황 피우스2세는 '안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너무나도 변화를 좋아하는 우리 이탈리아에서는 노예라도 왕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한 시대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효웅(梟雄) 프란체스코 스포르챠였다. 그는 앞서 소개한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을 스페인에 팔아 넘긴 용병대장 아텐도르 스포르챠의 서자로서, 아버지 아텐도르는 로마니아지방의 작은 농가의 아들에서 스포르챠가문을 브라키오가문과 함께 정착형 이탈리아인 용병세력으로 키운 인물이었다.
아들 프란체스코 또한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수완가였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강국, 밀라노공국을 통치하는 비스콘티가의 용병대장으로 활약했다. 한편으로는 밀라노공국의 적, 베체치아, 피렌체등과도 내통하면서, 로마교황에게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대 베네치아전의 도중 비스콘티가문의 마지막 공작 필립포 마리아가 죽자, 그의 딸과 결혼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챠는 베네치아와 내통하고, 이후 베네치아를 밀어내고 피렌체의 힘을 얻어 밀라노공국의 공작위를 손에 넣는다.
아무리 하극상의 시대라고 해도, 피우스2세의 말처럼 노예가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스포르챠의 경우가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하지만 많은 야심가들은 스포르챠의 뒤를 이어 자신도 권력을 잡기를 원했지만 현재의 권력자들이 그것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스포르챠의 경우는 자신과 같은 사람은 자기 하나로 충분하다며, 야심을 가진 용병대장들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고 한다.

용병들의 사기극 전쟁

도시국가 세나가 포위되고 시에서는 한명의 용병대장과 계약했다. 그는 용감무쌍한 전투를 거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시민들은 그의 훈공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를 의논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도시의 권력을 차지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의 업적은 위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의견 끝에, 한 시민이 말했다. 그를 죽여서 우리 도시의 성인(聖人)으로 모시는 것이 어떠한가. 모든 시민이 그 말에 찬성했다.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많은 용병대장들이 너무나 많은 전공을 세우면 오히려 적대시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버려지는 일들이 발생했다. 그러자 용병대장들도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나치게 승리를 거두면 안된다. 져서도 안된다. 용병대의 계약기간은 보통 제1확정기간과 제2예정기간을 합쳐 6개월 정도였다. 너무 빨리 결착이 지어지면 제1확정기간으로 계약이 종료된다. 따라서 서로 상대하는 용병대장끼리 전투를 질질 끌게 되었다. 이것이 '밀집방진을 풀고, 산개해서 전선에 돌입하는 이탈리아인의 공격'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과 같이 한마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판 전쟁게임과도 같은 형태의 전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당시 용병대장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용병대장들이 고대 로마제국군의 빛나는 선례를 무시하고 보병부대를 가지고 노는 것은 그들이 영지가 없어 다수의 보병을 고용하지 못하고 소수의 기병으로 전투를 하기 때문이다. 최근 24년간의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숫자가 고대에서 10년간의 전쟁에서 지휘관이 숨진 숫자보다 적을 정도이다. 그 중에서는 전사자가 낙마에 의한 1명이라고 하는 전투도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전투를 질질 끄는 무혈전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은 실제와는 좀 차이가 있고, 낙마에 의한 전사자 1명이라는 전투도 사실은 군의 중심이 되는 기사의 수만 해아린 것이지, 실제 전투가 기사들만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고 기사의 시종이나 보병 또한 상당수 있었다. 이들의 희생은 기록에도 잘 남지 않을 정도였는데, 당시 이탈리아의 가난한 농가나 도시의 직인들인 용병대의 하급병사들을 용병대장들에게 싼값에 부려먹히는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상비군적 용병부대

한편 15세기에 들어서자 용병대장도 대부분 이탈리아인이 되었고, 스타일도 많이 바뀌게 된다. 즉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방랑형 용병에서 자신의 영지를 가진 정착형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선 페라라공, 만도바공, 울비노공 등의 소군주(小君主)가 자신들의 궁정유지비를 위해 용병대장으로 돈벌이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밀라노공국을 찬탈한 프란시스코 스포르챠에 비교한다면 상대도 안되겠지만 몇몇 용병대장들은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는 교황령 로마니아지방의 도시나 마을에서 멋대로 주권자를 참칭하게 되었다. 이들 소군주나 소참왕(小僭王)들이 각각 강력한 도시국가에 용병대장으로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랑형에서 정착형으로의 변화는 상비군적 용병부대의 성립을 의미한다. 돈을 쫓는다는 용병대장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밀라노공 스포르챠의 경우 용병대장에게 돈이 아닌 토지를 하사하여 상비군으로의 길을 걷게 되고, 베네치아 또한 용병대장의 정착율을 높이기 위해 보수는 싸지만 계약기간을 가능한 길게 하였다. 계약상대는 주로 소군주, 소참왕들로 그들의 영지가 베네치아의 위성국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피렌체만은 여전히 필요한 기간에 필요한 만큼의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뒤바꾼 스위스 장창부대

그러나 상비군적인 용병부대든, 비상비군적인 용병부대든, 15세기말이 되면 이탈리아 용병부대의 이용가치는 크게 떨어지게 된다. 우선 용병의 가격이 대폭 상승했기 때문이다. 방패잡이, 종자, 말을 포함한 기병 1기의 가격이 13세기말에서 15세기중반까지 거의 10배는 상승했다. 그런 주제에 용병대장은 사기극 전쟁만 벌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평화시에는 시민들을 벗겨먹고, 전쟁에서는 상대편에게 벗겨 먹히는'이라고 하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그 군사적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용주는 물론이고, 용병대장, 아니 이탈리아 전체가 용병부대가 쓸만한 전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사건이 1494년 가을에 일어난다. 바로 총합 9만명의 대군을 이끈 프랑스 샤를8세의 이탈리아 침공이었다. 이후 약 반세기동안 계속되는 이탈리아전역(戰役)은 유럽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샤를8세의 침공이유는 아라곤가의 나폴리왕 페란테의 사망후 앙주가의 나폴리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군의 침공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공포를 가져다 준 것은 화려한 프랑스의 기사가 아니었다. 또한 말 12마리에게 운반되어 온 대포 또한 아니었다. 당시 대포는 아직 드는 돈에 비해 조작도 어렵고, 포병의 확보도 어려운 대단하지 않는 병기였다. 이탈리아인의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프랑스군 보병의 주력이 된 스위스 장창부대였다.
피리나 북에 리듬을 맞춰 행군하면서 원시적인 불합리한 습관들, 용감함과 잔인함이 가득찬 전장에서의 외침 등이 스위스 장창부대원들은 세련된 르네상스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하튼 그동안 이탈리아가 즐겨온 기병에 의한 예술품과도 같은 전쟁은 끝나고 보병의 밀집방진에 의한 전쟁으로 그 양상이 바뀌어가게 되었다.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5 - 피의 수출

기병군의 대패(大敗)

1302년 7월11일 해질무렵, 콜트레이크전투가 끝났다. 콜트레이크는 오늘날 벨기에 서부에 있는 도시로 당시 프란들 백작령의 자치도시였다. 프란들 백작령은 프랑스왕가와 신성로마제국 양쪽에서 봉토를 받은 영지로 이루어져있었다. 물론 이러한 것도 당시 프랑스나 독일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변경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11세기 유럽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프란들 백작령은 모직물산업을 배경으로 어느새 유럽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독일에서 이 곳을 그냥 나둘리는 만무했고, 프랑스의 필립 미왕(美王)은 프란들 백작령을 프랑스왕국과 병합시키기 위해 정예의 흉갑 기병군을 파견했다.
프란들군은 콜트레이크시 인근 평원에 약 600미터 정도 늘어선 보병밀집방진을 구축했다. 프랑스기병군은 이 인간의 방벽에 돌진했다. 하지만 이 인간방벽은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창과 부창(斧槍)으로 무장한 시민, 아니 시민뿐만 아니라 백작과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 밀집방진에 참가하여, 귀족, 기사, 상인, 직인 모두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의 공격을 막은 것이었다. 프란들 보병군은 프랑스 흉갑기병군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이 격전은 유럽군사상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유럽에서의 전투는 보병이 중심이 된 것이다. 중장기병의 군사적 가치의 저하는 백년전쟁의 하일라이트, 크레시전투에서도 어느정도 드러났다. 크레시전투에서 영국군은 5천의 장궁병을 동원해서 프랑스기병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 전투 또한 그러하듯이 유럽의 전쟁은 어느새 고대로마군이래의 보병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믿을 것은 자신들의 강건한 신체라고 하는 산골짜기 병사들의 용감무쌍한 전투가 있었다.

스위스 서약동맹의 발족

13세기초 극히 험준한 곳에 있었던 곳토할트고개가 통행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스위스중앙부가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요지가 된 것과 동시에 이 지역이 유럽 각 열강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 시작은 스위스에서 가문의 역사가 시작된 합스부르크가에서 스위스에 대한 강권정치를 시작하고, 윌리엄텔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스위스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1291년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3개주는 상호간의 대립을 하지 않는다는 동맹을 맺게된다. 이것이 스위스 서약동맹의 시작이다. 당시 독일황제는 합스부르크가의 알프레히트1세를 사이에 두고 낫사우가의 아돌프, 룩셈부르크가의 하인리히7세 등 반 합스부르크파가 계속되었다. 이 2명의 황제는 스위스 서약동맹에게 자유특허장이라고 하는, 합스부르크가로부터의 독립을 인정하는 증서를 부여했다. 합스부르크가로서는 불만인 이 조치 등의 이유로, 하인리히7세의 사후, 합스부르크가의 프리드리히미왕(美王)은 제위탈환을 노리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와 대립하게 된다.
당연히 스위스 서약동맹은 바이에른후작을 지지하고, 이것을 구실로 프리드리히미왕의 동생, 레오팔트가 가문이 자랑하는 합스부르크기병군을 이끌고 스위스로 침공한다. 1315년 합스부르크 기병군은 몰갈텐산의 산길을 남하하려고 했다. 스위스군 4천의 군대를 농민병에 불과하다고 얕본 것이었다. 결국 돌과 통나무 등으로 배후를 차단당하고, 대혼란에 빠진 합스부르크가의 흉갑기병들은 스위스군의 장창 돌격앞에 1500명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압제자와 싸운 권선징악적인 측면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미 시대는 보병의 시대였던 것이다. 몰갈텐의 전투는 그러한 사항을 잘 알고 있던 숙련된 지휘관들을 보유한 스위스주정청(政廳)이 용의주도하게 합스부르크기병군을 몰살한 것이었다. 이러한 스위스보병의 힘은 1386년 합스부르크가와 2번째 정면충돌인 젠파하 전투에서는 기습공격도 아닌 정면에서의 실력대결에서 완승을 거두게 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

관광이라고 하는 산업이 출현하기 이전, 스위스는 단순한 산악지대에 불과했다. 경작면적이 좁은데다가, 스위스는 조방락(粗放酪) 농경제가 발달하였다. 한마디로 남자 손이 그다지 필요없다는 생산형태였다. 산골짜기에서 자라나 튼튼한 팔다리를 길러낸 강건한 남자들의 일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남자들은 외부로 돈벌이를 나가는 수밖에 없었고, 당시 대량의 고용을 보장하는 최대의 산업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각각 개인적으로 용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위스 서약동맹의 각주는 소수의 도시귀족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벌주정청(州政廳)은 농민들을 하나로 묶어서 스위스보병을 필요로하는 유럽의 각 세력들과 용병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즉 스위스용병부대는 국가관리의 용병이었다. 각 주정청에 의한 강제모집도 필요 없었다. 일할 곳이 없는 강건한 젊은이들이 앞다퉈 용병모집에 응했고,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이 되었다. 그야말로 '피의 수출'이었다.
이 '피의 수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7세기 프랑스 루이14세의 고급관료가 스위스용병대의 사령관에게 '프랑스가 스위스용병에게 지불한 임금은 금판으로 파리에서 바젤까지의 도로를 모두 뒤덮을 것이다'라고 스위스인들의 탐욕스러움을 불평했다. 그러자 그 사령관은 '프랑스를 위해 스위스인이 흘린 피는 파리에서 바젤까지의 모든 하천을 넘치게 할 것입니다'라고 되받았다. 확실히 '돈없는 곳에 스위스용병 없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탐욕스럽게 돈과 약탈품을 찾아 유럽 각 세력의 용병이 된 스위스용병부대지만 그 최대 고객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를 위해 300년간 50만이상의 스위스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 때문에 프랑스 최고참 연대 '피카르디'의 연대기는 스위스용병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로 되어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가간 정식 용병계약은 1474년에 시작된다. 이 용병계약의 첨부조항에는 '스위스병사를 신성로마제국 및 스위스와 동맹관계에 있는 국가를 상대로 전투에 투입하지 않을 것, 해전에 투입하지 않을 것, 스위스병은 분산시키지 않고 하나로 모을 것, 스위스병이 귀국을 원할 시 허가할 것, 프랑스왕은 임금을 체불하지 않을 것' 등이 있었지만 점차 이러한 조항들은 사라지고 나중에는 스위스병간의 전투도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프랑스왕 뿐만 아니라 스위스용병부대를 관리하는 각 주정청에 의한 배신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그들은 배신당하고 팔린 것이었다.

부르고뉴전쟁

스위스용병부대와 프랑스간의 정식용병계약이 맺어진 1474년은 부르고뉴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부르고뉴공작가는 프랑스왕가의 분가로서 부르고뉴지방과 네덜란드지역을 다스리며,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번영하였다. 필립 호용공(豪勇公), 존 무외공(無畏公), 필립 선량공(善良公), 샤를 대담공(大膽公)등으로 이어진 대군주는 모직물산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로 화려한 중세궁정을 구가하였다.
최후의 부르고뉴공작 샤를 대담공은 동시 경솔공(輕率公)이기도 하였다. 공작은 명목상 프랑스왕의 가신이지만 프랑스왕가의 밑에 놓이기를 거부한 그는 외동딸 마리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3세의 장남 막시밀리안1세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프랑스왕가로부터 독립하여 브르고뉴공국을 왕국으로 격상시키고, 그에 더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까지 노리게 된다. 한편 당시 프랑스왕 루이11세는 왕권확장의 최대 장벽이었던 브르고뉴공국을 몰수하여 그 영지를 직할령으로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을 두고 있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은 샤를 대담공과 루이11세의 대립과 어부지리를 노리고 개입한 프리드리히3세의 3자구도가 되지만 실제 전투는 스위스보병부대와 화려한 금양모기사단(金羊毛騎士團)을 주력으로 한 부르고뉴기병간의 전투로 이루어졌다. 에리쿨전투, 그랑슨전투, 물텐전투 등의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은 패배를 거듭한다. 그 전투기간 동안 부르고뉴군은 점차 군의 주력을 기병에서 보병으로 바꾸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사의 전투로 종결했다. 이에 반해 스위스군은 대부분 보병이었다. 베른시만으로도 2만병, 각주에서 합계 5만4천의 병력을 동원했다. 스위스는 법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소속이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은 사분오열의 상태로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가능 했던 것은 스위스 서약동맹 정도였다.
스위스 용병부대의 보병은 앞으로 56명, 뒤로 24명의 진형을 짜고, 사령관의 명령에 충실히 움직였다. 부르고뉴기사군이 각자 제멋대로 움직인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보병들에게는 기사도적인 승자의 관용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기기 위해 적을 말살할 뿐이었다. 그리고 1474년 난시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은 전멸하게 된다. 쌓이고 쌓인 시체 속에서 샤를 대담공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부르고뉴공국의 운명은 다하게 된다.
프랑스왕 루이11세는 즉각 부르고뉴공국을 몰수한다. 한편 네덜란드지방은 샤를 대담공의 사위, 막시밀리안1세가 얻게 된다. 막시밀리안1세는 당시 로마왕의 자리에 앉아 다음대의 신성로마황제의 자리를 약속받은 상태였다. 부르고뉴전쟁 결과 프랑스왕가 바로아가와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가에 의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북동부지방의 영토분할이 일단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두가문의 다음 목표는 이탈리아였다. 선수를 친 것은 프랑스로서 루이11세의 뒤를 이은 샤를8세의 이탈리아침공이 그 것이었다. 부르고뉴전쟁에서 그 명성을 높인 스위스용병에 대한 수요는 많아져, 프랑스뿐만 아닌 로마교황,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 신성로마황제 등이 스위스용병을 찾게 되었다.

사악한 전쟁

스위스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전쟁을 근본부터 바꿀 각오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포로는 몸값을 뜯어내기 위한 중요한 인질이라는 것이 그때까지의 통념이었지만, 스위스용병은 포로를 바로 죽여버렸다. 죽임으로서 적들에게 공포를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전투는 문자 그대로 적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종래의 사기극과 같은 '예술품으로서의 전쟁'이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로 바뀐 것이었다. 중세기사이야기를 너무 읽었는지 샤를8세는 이러한 전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폴리왕국을 탈환하고 그 기세로 콘스탄티노플까지 손을 뻗쳐 세계제국을 건설하겠다던 샤를8세의 꿈은 그가 그러한 사악한 전쟁을 관철한 각오를 가지지 못해 1년도 지나지않아 이탈리아에서 도망쳐나오는 것으로 끝났다. 샤를8세의 후계자 루이12세는 선왕보다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1499년, 루이12세는 스위스 서약동맹과 10년간의 용병계약을 맺는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스위스용병들은 참 쉴 틈도 없이,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전장을 떠돈 것 같아 보인다. 사실 그들을 용병으로서 외국에 보낸 스위스의 각 주정청이 용병들의 귀환을 그다지 달가와하지 않았었다. 용병들이 보내는 돈은 환영이지만, 피에 절은 용병들의 귀환은 사회질서를 흐트러뜨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위스 주정청은 이 용병귀환자들을 다시 어딘가로 팔아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루이12세가 산 것이었다.
루이12세는 선왕 샤를8세의 이탈리아에서의 퇴각이라는 프랑스왕가의 수치를 씻기 위해 1499년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루이12세의 조모(祖母)는 스포르챠가문에 밀라노공국을 빼앗긴 비스콘티가의 공녀로서, 루이12세는 밀라노공국의 정당한 후계자가 자신임을 대의명분으로 하였다. 당시 밀라노공국은 스포르챠가의 시조, 프란시스코 스포르챠에서 4대째인 루도비코 마리아의 통치하에 있었다. 사실 그는 적통이 아니라 자신의 형의 아이들이 아직 어린 것을 이용, 섭정의 자리에 있다가 끝내 조카를 국외추방시키고 자신이 밀라노공작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일 모로라는 별칭으로 더욱 알려진 그에게는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의 후처였던 조카가 있었다. 따라서 루이12세의 밀라노공략은 바로아가와 합스부르크가의 전면충돌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노바라의 배신

하지만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었다. 일 모로의 군사력은 대부분 스위스 용병부대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에 대항하는 밀라노공략의 프랑스군의 주력도 스위스 각 주정청이 팔아먹은 용병 귀환자들의 부대였다. 스위스 각 주는 서약동맹은 맺고 있지만, 스위스 전체가 통일국가기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주의 용병계약에 따라 이러한 동포간의 전쟁이라는 비극도 일어날 수 있었다. 1500년, 밀라노·신성로마제국군과 프랑스군의 양 군대는 밀라노에서 서쪽으로 47킬로미터 떨어진 노바라에서 대치한다. 프랑스군의 스위스용병 약 2만, 밀라노진영에는 약 9천, 합계 3만에 가까운 스위스인이 동포끼리 싸워야 한다는 비극을 앞에 두고 있었다.
스위스용병간의 동요는 계속되고 결국 밀라노군의 스위스용병들이 프랑스군으로 돌아설 것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일 모로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기는 너무 하다고 생각했을까, 표면적으로는 프랑스군에게 넘기기로 했지만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돕겠다고 일 모로에게 약속한다. 일 모로는 그 약속을 믿고 스위스병사로 변장하고 전장에서 탈출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주 출신의 용병 루돌프 탈만이 500크로넨의 현상금에 넘어가 이 사실을 밀고하게 된다. 일 모르는 프랑스군에 잡히고 이어 처형된다. 이 것이 악명높은 노바라의 배신이었다. 우리주정청은 즉각 밀고자 탈만을 체포해 처형하지만, 이미 스위스용병의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사건에 뒤이어 프랑스왕의 봉급지불 거부라는 사건이 이어진다. 스위스용병부대는 분노하게 되고, 스위스 각주는 반프랑스, 친프랑스파로 나뉘어 정쟁이 벌어진다. 이어 반프랑스파가 주도권을 잡고 스위스 서약동맹은 로마교황, 신성로마황제와 새로운 용병계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급료지불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교황이나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용병은 고용주가 있고나서 용병이기에 자신들이 스스로가 고용주가 되지 못한다면 각 열강들에게 휘둘려지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스위스 서약동맹 스스로가 유럽의 열강의 자리에 올라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밀라노공국을 제압해야만 했다. 노바라의 배신 이후 밀라노공국을 다스리고 있던 사람은 일 모로의 장남 막시밀리아노였다. 그는 노바라의 배신 이후에도 여전히 스위스용병부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실증이 난데다 스위스 서약동맹은 밀라노를 거의 속국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차라리 거액의 연금과 맞바꿔 밀라노공국을 프랑스에 팔아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막시밀리아노는 그 생각을 실현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지은 것이 마리냐노전투였다.
1515년 밀라노 남동쪽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마리냐노에서 밀라노공략을 위해 진군한 프랑스군과 스위스군이 격돌한다. 결과는 스위스군의 대패로 끝나고 스위스 서약동맹은 밀라노를 잃게 된다. 덧붙여 이때의 프랑스왕은 루이12세에서 바로아왕조의 걸물(傑物) 프랑소와1세로 바뀌어져 있었다. 프랑소와1세는 이 대승리후 무참한 패자인 스위스 서약동맹과 '영원한 협조'를 맺게 된다. 그야말로 영원히 프랑스의 용병으로서의 길만이 남은 것이었다. 이렇게 유럽의 열강으로 나설 찬스를 잃은 스위스는 이후 용병산업, 즉 '피의 수출'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무적을 자랑하던 스위스장창부대가 패한 것일까? 한마디로 스위스장창부대는 스스로의 장창밀집방진에 너무 자신하여 전술의 개량에 태만했기 때문이었다. 마리냐노전투 이전에 벌어진 제2차 노바라전투에서도 스위스군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미 이때부터 스위스식 장창밀집방진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위스군은 옛부터의 전술만을 고집하였고 결국 패배하였다. 스위스용병부대의 무적신화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이어 결정타를 맞게 된다. 그 결정타를 날린 것이 독일용병부대, 란츠크네히트였다.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6 - 란츠크네히트의 등장(상)

막시밀리안1세와 남독일 용병부대

위대하고 용감한 황제 막시밀리안에게 신의 은총을!
폐하의 밑에 한 기사단이 나타나
피리와 북으로 여러나라를 다니니
이것이 바로 란츠크네히트라 함이로다.
자신을 독일용병(란츠크네히트)부대에 있었다고 한 이엘루크 그라프가 부른 리트(가요)의 한 소절이다. 이 리트가 가리키는 것처럼 란츠크네히트부대는 합스부르크가 중흥의 시조이자, '중세 최후의 기사'라고 일컬어지는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1세와 아주 관련이 깊다. 황제는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창설자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강력한 육성자임은 틀림없다. 15세기말부터 16세기, 17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유럽의 전장뿐만 아니라 신대륙 남미를 포함해 세계의 여러 곳에 등장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군사역사상 아주 특이한 군사조직 란츠크네히트부대는 이전 장에서 설명했던 부르고뉴전쟁에서 그 시작을 알리게 된다.
부르고뉴전쟁전 샤를 대담공은 현재 알자스지방에 있는 합스부르크 세습영지를 점거하고 부르고뉴공국에 편입시키기 위해 한명의 관리를 파견한다. 하겐바하 폰 페타라고 하는 이 관리는 잔혹한 성격에 용서 없는 강권정치를 해서 나중에 농민반란이 일어나 처형되지만, 그는 군사적 식견에서는 앞서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시대는 보병의 시대라고 생각한 그는, 하지만 스위스용병은 부르고뉴전쟁에서의 적의 편이었기에, 알자스와 남부 독일에 대량의 돈을 뿌려서 많은 보병을 모으고, 그들에게 스위스식의 장창을 쥐어 주었다. 물론 급조된 장창부대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농민반란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때 만들어진 부대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전신이 되었다.
부르고뉴전쟁이 끝나고 부르고뉴지방과 함께 네덜란드일대 또한 프랑스는 자국령으로 포함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1세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대프랑스전을 결의하게 되는데 그것이 1479년 기네가테전투이다. 문제는 당시 로마왕이었던 막시밀리안1세의 휘하에는 군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로마왕은 신성로마황제의 후계자이지만, 그의 신하에 해당하는 독일의 각 제후들은 모른척 할 뿐이었고,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3세도 당시 대 헝가리전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막시밀리안1세는 스위스용병과 함께 대량의 독일용병을 남부 독일에서 모으게 된다. 그리고 보병방진전법을 채택, 프랑스에게 승리를 거두게 되고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또한 이후 막시밀리안1세는 남부독일 용병부대를 자기 군대의 중추로 삼게 된다.

란츠크네히트의 고향

그나저나 왜 남부독일지방일까? 남부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안에서도 바이에른후국을 제외하고는 유력한 제후가 없는 약소한 제후들의 밀집지였다. 이러한 약소제후국들은 바이에른후국과 황제가 합스부르크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사이에 위치하여 양쪽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게다가 이 일대에는 여기저기 교회령이 산재하고, 아우크스부르크를 시작으로 제국직할의 도시들까지 그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결국 각 약소제후국들은 바이에른후국에 대항하여 슈바벤동맹이라고 하는 군사동맹을 맺게 되지만 이후 바이에른후국이 이 동맹에 가입하면서 대부분의 제후국들은 합스부르크가나 바이에른후국의 예속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남부독일은 북쪽에 비해 토지가 좋아서 전통적으로 남자균일상속제도가 채택되고 있었다. 따라서 농지는 점차 세분화되고 영세농민들만 가득하게 된 상태에서 더 이상 나눠줄 토지도 없고, 농가의 차남이하의 자식들은 도시로 난민이 되어 흘러들어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을 통제할 각 제후국들도 강력한 공권력이 없었기에 농민의 도주, 도망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당시 사회는 태어나서 마을 교회의 첨탑이 보이지 않을 곳까지 나가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의 정착형 농촌사회였다. 하지만 여기 남부 독일지방은 그러한 사회에서 벗어난 방랑자, 무숙자들을 대량으로 안고 있는 지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용병모집에 응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게된 곳은 끝을 모르는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로, 이러한 남부 독일 출신들의 용병들이 란츠크네히트라 불리게 된다.

스위스용병부대와의 차이

란츠크네히트, 독일어로 Landsknecht라고 쓰고, Land는 나라, 토지, 시골이라는 의미, Knecht는 병사(兵士)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란츠크네히트의 어원에는 많은 설이 있다. 우선 Lands가 기병의 창 Lanzen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란츠크네히트는 스위스용병과 같이 보병용 장창을 무기로 한다. 다음으로 스위스용병과 같은 산악지대출신이 아닌 '평지(란트)출신의 병사'라는 의미는 어떨까? 그렇지만 란츠크네히트에는 알고이지방(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의 산악지대)이나 티롤 출신의 병사도 많았다. 도시가 아닌 '시골(란트) 출신의 병사'라는 것은 더욱 이상하다. 란츠크네히트부대에는 그 시작때부터 도시출신의 병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국토(란트)방위의 병사'라고 하기에는 실제로 란츠크네히트와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들은 국토방위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용병들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란츠크네히트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당시에서도 란츠크네히트부대와 스위스용병부대의 차이는 확실히 강조되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원 그 자신들이 그러한 차이를 자랑하고 다닌 셈이었다.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과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란츠크네히트의 시작이란 결국 스위스용병부대를 흉내내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항상 스위스용병부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전장에서 스위스부대와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던 란츠크네히트부대가 어느새 스위스용병부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더니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된다.
1486년경의 사료를 보면 란츠크네히트부대원을 모병하면서 부대에 들어오면 혼자서 스위스병사 2명은 간단하게 상대하게 된다고 선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부르고뉴전쟁의 시작 무렵부터라고 추정되는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십수년이 지나자 어느새 스위스용병부대와 라이벌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후 두 용병부대는 상호간의 적개심을 불태우며 경쟁하게 되는데, 스위스용병의 관습과 무장, 전법까지 따라하며 성장한 란츠크네히트와 스위스용병부대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유'야말로 우리들의 정체성

'란츠크네히트는 그 복장, 무기 어느 쪽도 스위스용병부대보다 훨씬 로맨틱한 색상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우선 복장을 보면 괴이한 정도였다. 소수의 기사군에서 대량의 보병군으로 시대의 흐름이 옮겨간 중세말기, 군주의 국가독점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상비군을 운용할 돈이 없는 군주는 필요시 용병을 사용하게 된다. 당연히 그러한 용병에게 똑같은 제복을 입히는 고용주가 있을 리가 없고 용병들의 복장은 제멋대로 였다. 그리고 돈이 좀 되는 자들은 정말로 화려한 복장을 입는다.
란츠크네히트부대로 들어오는 자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먹고살기 힘들거나 정착하기 힘들어 자신이 살던 사회를 등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살던 마을, 도시를 떠나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자유를 다양한 복장으로 표현하였다. 남근(男根)을 과시하듯 나타내는 가죽 '앞가리개', 거대한 깃털장식의 모자 등등이었다. 이러한 의상이 실제 전투에서 움직임에 불편할 지경이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의상에서 나타나는 란츠크네히트의 자유는 그 조직형태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위스용병부대는 용병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국가관리의 용병부대였다. 이에 반해 란츠크네히트부대는 어디까지나 사기업(私企業)이었다. 모집인이 돈을 뿌려 병사들을 모으는 형태였고, 이들을 모으는 용병대장이야 말로 전쟁기업가인 셈이었다.

란츠크네히트의 모병

신성로마황제, 독일의 제후, 제국도시, 프랑스왕, 스페인왕, 영국왕, 로마교황,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 등이 전쟁을 결의하면 몇명의 용병대장에게 모병 특허장을 교부한다. 이 모병 특허장은 최고사령관과 용병대장간의 용병계약서이자 용병대장에 대한 임명장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제국도시 아우크스부르크가 불크할트 폰 엠스라고 하는 용병대장과 맺은 계약을 보자.
1개연대 12개중대 약 6천의 병사를 확보. 군인복무규정 조건 작성. 고용기간은 약 3개월. 열병의 일자와 장소 확정. 연대장의 월급 20 굴덴. 각 중대는 중대장외 기수가 1명. 중대장 월급은 12굴덴. 기수는 10굴덴. 병사의 월급은 4굴덴. 연대장의 호위병은 8굴덴. 월급의 대상 기간은 28일. 모병시 지급되는 계약금은 일인당 40크로이차 등등의 상세한 조항이 붙는다. 참고로 월 4굴덴이면 직인중 우두머리급의 벌이 이기 때문에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액수였다. 더군다나 월급의 대상기간이 28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30일이라는 것에 비하면 더욱 매력적이다.
여하튼 연대장 엠스와 아우크스부르크시장간의 계약이 맺어지고,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 그러면 모병특허장은 공식적인 임명장이 된다. 엠스는 평소 데리고 있던 부하들을 모아 그들중 몇명에게 모병을 명하게 된다. 모병담당은 도시안이나 마을을 돌며 피리나 북으로 사람을 모은다. 그리고 '제군들. 소시민적인 평범한 생활을 버리고, 지금 곧 란츠크네히트부대에 들어가자~ 마을을 버린 제군들은 자유의 전사가 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선전, 그리고 현금을 흔들어 준다. 사람들은 서둘러 서기담당에게 출신지와 이름을 대고, 회계담당에게 계약금을 받는다. 이들은 이것만으로 흥분해버려서 모병리스트에 실린 자신의 이름 뒤에 '장창값 2굴덴'이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열병지에서 장창이 지급되고 장창값 2굴덴은 최초의 급료에서 빠진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도 이미 늦은 것, 계약금은 손에 쥔 순간 그들은 자신의 몸을 란츠크네히트부대에 팔아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병뒤에는 열병이다. 열병지까지의 가도에는 여관과 술집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우는 여관이나 술집이 끊이지 않았기에 당국에서 항상 적당한 가격으로 잠자리에 식사를 제공하도록 주의를 기울일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열병지까지의 도중에 계약금만 손에 넣은 채 도망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지만 놀라울 정도로 그 수는 적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모병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자는 반드시 열병지에 출두한다고 하는 것이 란츠크네히트의 도덕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용병(傭兵)의 이천년사(二千年史) 6 - 란츠크네히트의 등장(하)

역사상 유래없는 민주적인 군대

열병지에 도착하면, 여기서부터는 전쟁기업가라고 할 수 있는 용병대장의 실력이 발휘된다. 열병에는 용병대장의 고용주인 최고사령관은 잘 나타나지 않고, 보통은 병참관을 대리로 보낸다. 병참관은 지원자본인과 장비를 점검하고 최종적인 채용을 결정하며 급료와 배속을 정하는데, 이때 보통 장비가 좋으면 급료가 오르게 된다. 따라서 병참관에게 각종 부정행위가 일어나는데 일반적인 것이 다른 사람의 무구나 장비를 잠깐 빌린다든지 하는 일 등이다. 무엇보다 극심했던 것이 병력 수를 속이는 것인데, 어린애나 여자들에게 장창을 들려 인원수를 채우게 하는 등의 수법으로, 그중에는 13개의 가명으로 13개 중대에 각각 이름을 올려 돈을 받았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착복한 돈은 대부분 용병대장에게 들어가게 되고 중대장이하는 그러한 돈의 일부라도 챙기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여러가지 부정행위의 결과 1개중대 약 500의 정원은 보통 1할정도가 빈 상태(물론 장부상으로는 정원을 꽉 채운채) 사열은 끝나고 바로 군인 복부규정의 낭독이 있게 된다. 보통 3장으로 나뉘는 군인 복무규정의 첫장은 병사의 공사를 규제하는 일반적인 규율과 연대장, 장교, 상관에의 복종이 주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병사의 통제를 위한 형리, 임시재판 등의 규정, 헌병 및 사법관의 권한, 연대장의 허가없이 병사들의 집회 금지 등의 규칙도 함께 따르게 된다. 이러한 군인 복무규정의 유효기간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계약종료시점까지로 부대의 해산과 동시에 미움받기 쉬운 형리들은 일찌감치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제2장은 부대내의 예법과 전시관습, 위반규정 등이다. 예를 들어 가짜서약에 의한 신를 모독하는 행위의 금지, 교회와 사제의 보호, 임산부와 부녀자의 보호 등이다. 또한 이중에는 제분소의 보호가 정해져 있는데, 중세 독일에서는 농민은 정해진 제분소만을 사용한다는 제분소법이 있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3장에서는 병사의 권리와 동시에 공동결정권, 자치의 제한 등이 주요항목이다. 즉 부대내 병사집회를 연대장의 허가없이 개최하는 것의 금지, 병사의 급료, 지불 방법, 약탈의 권리 등등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병사집회를 통한 공동결정권이다.
위와 같은 낭독까지 끝나면 연대장은 각 중대장, 사법관, 헌병, 병참대장, 병영대장 등을 소개한다. 이후 각 중대별로 중대장이 기수와 하사를 소개하는데, 기수는 그야말로 중대의 꽃으로 중대장, 연대장으로의 출세 코스라 할 수 있었다. 보통 도시귀족의 자제중 모험을 찾아 란츠크네히트부대로 들어온 사람들이나 소영주의 기사들의 자제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하사관의 조수격인 특무병이 병사집회에서 선출된다. 이러한 특무병중에는 아밋서텐이라는 직책이 있다. '전권위원(全權委員)'이나 '외교사절'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단어로 이 특무병의 역할은 연대장과 그 고용주인 최고사령관에 대한 부대전체 병사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즉, 란츠크네히트는 연대장등의 군당국의 관리통제를 받지않는 자신들의 자치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병사집회는 급료 미지불에 대한 항의, '돌격금' 등의 특별수당의 획득, 약탈품의 공동분배 등의 공동결정권을 구사해서 군당국에 의한 부정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란츠크네히트는 군사역사상 보기드문 민주적인 군대였다. 물론 먼저 설명한 군인복무규정에서의 연대장 허가없는 병사집회 금지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여러가지로 군당국은 이러한 병사들의 자치를 제한하려 하였다.

주보상인(酒保商人)의 존재

군대에 있어서 병량지급은 전투력유지의 근본이 된다.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군당국은 이러한 병량지급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하청받은 외주업자들에게 맡기는 형태였다. 그리하여 빵과 고기, 술 등의 병량의 조달과 배분은 민간업자인 주보상인들이 맡았다. 주보상인은 그러한 병량뿐만 아니라 무기, 탄약, 갑옷 등과 함께 생활에 필요한 잡화도 취급하였고, 각종 약탈품을 싸게 매입하기도 하였다. 전투가 끝나면 병사들에게 주점이나 도박장을 열어주고, 요리, 세탁, 제봉, 간호를 담당할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필요시는 병사들에게 이런 여자들을 통해 섹스까지 제공하였다. 물론 이들이 연대장을 비롯한 군당국에게 뒷돈을 바치며 이러한 사업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일종의 병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주보상인과 그에 딸린 여자, 예능인 등의 비전투원의 숫자는 상당해서 란츠크네히트 1개 연대가 6천명이라고 한다면 거의 같은 수의 민간인들이 연대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행렬은 행군의 속도를 극도로 늦추게 하여 전투중에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나 오히려 커져가기만 하여 17세기 30년전쟁 당시는 군대의 1.5배의 규모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군대의 조직적인 병참지급은 근대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기업가 연대장의 자격

이러한 특수한 군대 란츠크네히트부대를 이끄는 연대장, 즉 전쟁기업가인 용병대장은 어떤 사람들일까? 병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기업주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연대장이 있어야 병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부대내의 재판권, 전투중의 작전지휘 등, 글자그대로 병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급료를 주고, 먹여주는 것은 신성로마황제, 독일제후, 프랑스왕, 스페인왕 등등 그 어떤 용병의 고용주도 아닌 연대장 그 자체였다. 병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고용주가 누구인지,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따위는 관심밖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어느 연대장을 따라야 급료도 늦지 않게 받을 수 있고, 많은 약탈품을 얻을 수 있는가에만 있었다.
독일용병 란츠크네히트는 스위스용병과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한번 용병으로 일을 시작하면 고향에서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용병계약기간이 끝나고 부대가 해체되면 이미 월 4굴덴의 급료는 부대내의 도박, 술값, 창녀에의 화대 등으로 날린지 오래고, 갈 곳도 없는 제대병사들은 걸식, 행상, 예능인 등의 비정주형사회에 몸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무전취식, 도둑질, 강도질, 방화, 살인, 약탈 등을 저지르며 지내다 어디선가 용병부대의 모병이 있으면 앞다퉈 모병에 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는 또다시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에 고향이 있다면 그것은 란츠크네히트부대 그 자체였다.
이러한 란츠크네히트부대원들에게 그 부대를 이끄는 연대장은 뭔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부대원들과는 좀 다른 신분의 사람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입신출세를 꿈꾸며, 부와 권력을 갈망하는 몰락기사, 귀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그들도 그러한 변화에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용병대장인 연대장도 행군중에는 말을 타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연대장은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도보로 전투를 벌였다. 아니 오히려 부대의 맨앞에 서서 진두지휘를 하지 않으면 안됬다. 고귀하고 용감한 기사가 보통때라면 상대도 하지않을 비천한 출신의 보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를 한다는 것, 말에서 내린 다는 것은 기사로서의 긍지를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란츠크네히트의 육성자는 스스로 말에서 내렸다. 기네가테전투에서 막시밀리안1세는 전투중 일순간이긴 하지만 창을 손에 쥐고 보병의 맨 앞열에 섰었다. 1485년 간시(市) 입성시에는 이 로마왕은 창을 어깨에 매고 그의 란츠크네히트부대를 도보로 앞장서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막시밀리안1세의 행동은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제스처는 사실 병사들에게 향한 것만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향한 것이기도 하였다. 쓸데없는 기사로서의 긍지를 버리고 병사들의 맨앞에서 서서 싸우는 진정한 전사가 되라! 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

앞장에서의 막시밀리안1세의 기대에 가장 잘 부응한 것이 게오르크 폰 프른츠베르크였다. 그는 민델하임의 소귀족 출신이었다. 장남이 아니기에 상속받을 땅도 적었고, 따라서 군인의 길을 걷다 승진을 거듭해 모병특허장을 교부받는 용병대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고용주는 항상 합스부르크가였고, 막시밀리안1세와 그의 손자 카를5세를 모셨다. 사실 전쟁기업가로서의 측면으로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항상 합스부르크가를 위한 전쟁에만 참가하다 보니 이익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병사 수를 부풀려 급료를 착복하거나 병사들에게 질낮은 장창을 비싼값에 파는 일도 없었다. 병참으로서 식품, 탄약, 무기등을 납품받으며 리베이트를 챙기는 일도 없었고 주보상인들의 뇌물도 거절, 그의 부대는 항상 적절한 가격의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전투에서는 용감하지만 결코 무모하지는 않아서 전황이 불리하면 즉시 퇴각하여 병사들의 개죽음을 막았다. 이러한 프른츠베르크를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라고 병사들을 따랐고, 당연히 그의 군대는 막강했다.
할아버지 막시밀리안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황제가 된 카를5세는 이 프른츠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히트 최강의 부대를 주력으로 하여 숙적 프랑스왕 프랑소와1세와의 대결전을 벌이게 된다. 1525년 파비아전투였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의 패권을 다투는 합스부르크가와 바로아가의 계속된 사투를 결정지으는 전투이기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스위스용병부대와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그것이기도 하였다.

파비아전투

1524년 가을, 2만여명의 프랑스군에게 포위된 이탈리아북부의 도시 파비아. 농성중인 4천의 황제군 란츠크네히트부대는 병력부족에 시달리며 이미 말과 노새, 개와 고양이까지 먹어치울 판이었다. 그러나 원군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항복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1525년 1월말, 황제군은 알프스를 넘어 파비아시 교외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군세는 약 2만, 역사상 유명한 파비아전투가 시작됬다.
황제군의 총수는 부르봉공작, 프랑스 부르봉가의 총수로서 프랑소와1세와 대립하고 황제군으로 돌아선 사람이었다. 황제 카를5세는 동시에 스페인왕 카를로스1세이기도 하였다. 그 스페인군을 이끌고 있는 페스카라장군.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황제군의 주력은 프른츠베르크를 시작으로 역전의 용병대장들이 이끄는 란츠크네히트부대였다. 그리고 그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창방진이 천오백의 화승총대를 지키는 모양으로 최전선에 섰다.
한편 프랑스군의 국왕 프랑소와1세의 친정이었다. 최전선은 프랑스흉갑기병과 스위스용병부대였다. 당시는 아직 스위스서약동맹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라우뷴덴주의 정예 용병부대, 가스코뉴용병, 영국 리차드 서포크백작이 이끄는 '흑부대(사실 프랑스군에 고용된 독일용병부대)' 등 또한 프랑스군에 참가하고 있었다.
전투는 9시간반동안 계속되었다. 먼저 프랑스군이 지형의 이점을 살려서 밀고들어왔다. 하지만 프른츠베르크가 이끄는 황제군 란츠크네히트부대의 창방진이 서서히 그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의 뒤에는 천오백의 화승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흉갑기병은 점차 쓰러지고, 순간 프른츠베르크부대가 정면으로 에임스부대가 좌측으로 하여 프랑스 '흑부대'에 돌격하였다. 이러한 전투과정에서 보듯, 화기(火器)가 이제는 전투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변화를 읽지 못한 프랑스군과 스위스용병부대는 무너지고 뒤이어 그라우뷴덴용병, 가스코뉴용병도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패주병사냥은 처참하였다. 그야말로 시산혈해의 참상이었다. 파비아 근처를 흐르는 티티노강까지 몰린 스위스용병부대의 대다수는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 속에 떨어져 비명과 함께 숨져갔다. 프른츠베르크의 종군서기관 라이스나는 '신은 이날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라고 쓰면서, 이 파비아전투를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라고 불렀다.
수일후 스페인 마드리드궁정에서 머무르고 있던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에게 '폐하, 대승리입니다. 프랑스왕 프랑소와1세는 우리군에 잡혀서 지금은 폐하의 손안에 있습니다.'라는 승전보고를 만족스럽게 듣게 되었다. 포로가 된 프랑소와1세는 마드리드로 호송되어 감금되었다. 그러한 포로의 치욕과 함께, 처음부터 무리가 따랐던 왕의 밀라노 공위의 계승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부르고뉴전쟁에서 루이11세가 프랑스왕가로 편입한 부르고뉴공국또한 합스부르크가로 넘겨주는 굴욕적인 양보를 해야한 했다.
이 마드리드조약으로 샤를8세의 이탈리아침공 이후 계속된 '이탈리아전역'은 합스부르크가의 대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후 란츠크네히트를 포함 용병의 대량실업사태가 오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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