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그의 저서 <고도의 과학기술. 고도의 사유>에서 "미래는 각 교실마다 컴퓨터 한 대와 시인 한 명이 있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딱딱한 껍질로 덮힌 컴퓨터 상자가 있는 곳에,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1. 소원해지는 마음
한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만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의 상황이 쉽게 발생한다:
1) 영양 섭취와 사랑의 행위에서부터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쉬운 것을 취하고, 속전속결의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길거리에 인스턴트 식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식사는 그저 고픈 배를 채우는 행위에 불과하며, 좋은 음식을 향유하는 것은 오히려 호화로운 소비행위로 인식된다. 그리고 사랑은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성행위 정도로 인식되며, 종교 신앙은 임의로 해석.취급되어 시끌시끌한 저자거리에서 애완물을 사고 팔 듯 하는 새로운 업종으로 등재될 것이다. 신속하게 미끄러져 움직이는 컴퓨터의 마우스와 같은 생활의 보조(步調)에 맞추어, 한 무리의 사람들은 뭔가를 채우려고 쉼 없이 맹목적으로 찾아 헤맬 것인데, 그것이 이름하여 '의미'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2) 생활은 늘 공허하고 적막하고 우울한 느낌이 들고, 인간관계는 소원해지고 냉담해진다:
피할 수 없는 것은 현대는 날이 갈수록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각자 생활을 꾸려 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생활이 바빠서 가족들끼리 대화할 시간도 변변찮으며, 어쩌다 함께 모여 앉을 시간이 있을 때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그것이 제시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끊임없이 채널을 이리저리 바꿀 따름이다. 친구나 동료들 간의 왕래도 늘 술잔이 매개가 되어, 서로 한턱 내고 한턱 받고 하는 가운데, 점차 피로를 느끼고 마침내 만사가 귀찮게 여겨진다. 군중 가운데 고독하다고, 몸은 사람들 가운데 자리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어떤 적막감에 사로잡힌다. 친구간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듯 해도, 사실은 서로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어쩌지 못한다. 한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허무하게 느껴진다.
3) 유전공학(基因工程) 가운데 그 어떤 부분은 인륜의 질서를 뒤엎어 버린다. 이 같은 과학에 대하여 숭배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1997년 면양(綿羊)의 흉부 조직의 단일세포(單一細胞)로부터 직접 복제하여 키운 '돌리'는 성숙한 세포분자 신호(세포핵)를 세포핵(細胞核)이 없는 미수정란(未受精卵)에 이식하는 '핵이식(核移植)'기술로 만들어 낸 첫 번째 복제동물(複製動物)이다. 이것은 복제인간의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전공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이제 장생불사(長生不死)라든가, 남자가 아이를 출산하는 일과 같은 것들이 그리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니게 되었다. 다가올 미래는 과연 어떤 세상으로 변할 것인가? 생명의 의미를 다시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2. 지속되는 성찰
그러므로, 몇 가지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오래된 문제를 가지고, 한 인간 생명의 의미에 대하여 자리 매김을 해보자:
물음1: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뿐인가? 당신은 누구 인가?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장차 어느 곳으로 가는가? (철학)
물음2: 인간은 육신의 죽음 뒤에,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존재하는가?
1) 만일 그렇다면, 자살의 방법으로 불만족스러운 이승의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다음 생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한가?
2)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짧은 인생을 사는 우연한 존재(偶然存在)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학)
물음3: 당신을 복제하고, 나를 복제하는 자기복제의 시대가 왔으니,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성교(做愛)를 할 필요가 없고, 하느님(上帝)이 마음쓰게 할 필요도 없다면, 생명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다시 새롭게 풀이할 수 있는가? (과학)
물음4: 만일 당신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살날이 한 달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죽음의 날이 다가올 때, 당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라. 당신은 과연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가? (生死學)
철학.신학.과학과 생사학..... 등, 각 분야가 모두 생명철학의 기치아래, 다시 새롭게 통합하고, 신 과학기술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안신입명(安身立命)할 수 있는지 탐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한 네 가지 문제는 바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라고 본다.
3. 인생의 의미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은 왜 반드시 사고(思考)를 해야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인간을 이성의 동물(理性的動物)이라고 부를 때의 '이성(理性)'이라는 두 글자는 간단히 말하면 '판단(判斷)'과 '選擇(선택)'의 능력이며, 판단은 선악(善惡)이 아니고, 선택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의 자주능력(自主能力)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고하는가? 어째서 돼지처럼 근심걱정 없이 즐겁게 살아가면 안 되느냐?'하고 묻는다. 이 말에 내포된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하여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하나는 (우리는) 이미 인간이 되었으므로, 돼지가 될 수 없다. 인생은 순조롭기만 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이런 와중에서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기본현상이다. 일반인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식분자들처럼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훈련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풀어 가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비록 동물성의 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그 때문에 스스로 자랑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생활 경험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성의 능력이 보다 완전하고 만족스럽게 실현될 때, 인간의 마음도 그 만큼 행복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마음(心靈)이 안정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떠한지를 가름하는 진정한 원천은 이성적으로 자신을 긍정하거나 혹은 그 어떤 비판을 가하는 것에 달려있다.
4. 자아의 실현
그러므로, 끊임없는 사고는 예컨대, 혼돈(混沌)의 날(日子)에 그 가닥을 잡아내고, 그 실상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르(泰戈爾)가 그의 아름다운 시에서 노래하였듯이, 우리는 '삶을 여름날의 꽃처럼 찬란하게 하고, 죽음을 가을의 낙엽처럼 그 정적이 지닌 아름다움으로 드리워야(使生如夏花之絢爛,死如秋葉之靜美)'(飛鳥集) 만 한다. 현대의 복잡 현란하고 빈틈없이 짜여있는 생활 가운데서 그리고 새로운 과학기술문명이 끊임없이 전통가치를 위협하고 전복시키는 격변의 시대 한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여름날의 꽃처럼 찬란하게 자아실현을 하여, 우리 생명이 이 지상에서 그 막을 내릴 때, 의연하고 흔쾌히 일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다. 아래에 몇 가지를 제안하니, 참고가 되기를:
1) 신앙을 가지라
인생은 신앙이 필요하다. 종교신앙은 기복(祈福) 곧, 신명(神明)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기구할 수 있고, 흠숭(欽崇) 곧, 조물주의 위대함을 예배하고 찬미할 수 있고, 해석(解釋), 곧, 인생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苦難)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고, 정합(整合) 곧, 인생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그 지평을 제시해 주는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만일 종교신앙이 없다면, 마땅히 그에 버금가는 인도적 신앙(人道信仰)을 가지고, 진.선.미.현.성(眞.善.美.賢.聖)의 경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인생은 고(苦)이고 짧다. 자기를 알고, 자재(自在)와 여유(從容)를 배워 익혀라. 그리고 덕행을 기르고 강화하는 가운데 존재의 의미가 점차 승화되는 것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2) 전문지식을 배양하라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고, 존재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예컨대, 가난에 절은 작가는 창작을 하는 가운데 그 존재의 의미를 느끼고 실현하지만, 아무도 그 작품을 감상하지 않으면, 수입이 없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매일 막대한 수입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이 둘을 결합할 수 있다면, 즐거움 가운데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 가운데 경제의 기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제일 좋은 안배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것 가운데서부터 시작하여 실질적으로 전문지식을 배양하는 일. 이를 통해서 생계도 도모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일하는 즐거움과 만족도 얻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은 일이 바로 성취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3)두루 넓게 좋은 인연을 맺어라
서양에 이런 말이 있다. "관념에 따라서 행위가 이루어지며, 행위에 따라서 습관이 생긴다. 습관에 따라서 성격이 형성되며, 그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한 사람의 운명이 좋으냐 나쁘냐하는 것과 그의 성격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행하는 'EQ'(정서지수)가 사람들에게 주목되는 이유이다. 성격이 포악한 사람이 어떻게 좋은 사람과 인연이 맺어질 수 있겠는가? 성격은 또한 한 사람의 습관과 관련이 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냉정하게 문제를 대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동쪽에서 넘어지고 서쪽을 향해서 화풀이를 하는가? 물론 이것은 한 걸음 나아가서 개인의 어떤 사안에 대한 느낌과 관념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 거지아이(乞 仔) 라이똥진(賴東進)과 오체불만족(五體不滿足)의 오토다케히로타다(乙武洋匡)는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고 각자 스스로 서로 다른 운명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사람은 먼저 나날이 자신의 덕행의 연마를 추구한다. 좋은 인격의 소유자는 늘 두루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며, 또한 곳곳에서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연의 소중함도 이해할 것이고, 더욱이 홍이법사(弘一法師)가 말씀하신 세월의 인연에 따라서 닦여지고 또 자재(自在)하게 될 것이다.
생명(生命)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자재(自在)함을 추구할 뿐이다!(生命所求者何? 尋其自在罷了!)
* 이 글은 天主敎輔仁大學(Fu Jen Catholic University)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 益世評論(Catholic Observer a Biweekly)(第275期,2001년 4월1일자)에 林麗珊이 기고한 원제 '生命哲學-談科技時代生命的意義'입니다.(양재오 번역, 2001/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