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좋았는교?
올 한해도 이렇게 저무는가 보다. 송년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행사중 가장 큰 덩치가 동기회 모임인데 만나서 밥먹었으니 올해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뜻이다. 고교동창이라는 인연으로 이렇게 햇영감 시점까지 끈질기게 만나고 있으니 아마 모두 몇생에 걸쳐 동무하며 꽁알거리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자주 볼 일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만나니 늘어난 주름살 놀려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해년 황금돼지해 12월 27일, 우리들의 만남은 해운대 외식 1번가라는 궁전 포스의 고기집에서 이루어졌다. 가는 돼지해 말일에 우습게도 돼지고기 아닌 쇠고기로 쫑파티를 하는구나.
식당에 들어서니 삐까번쩍한 샹데리아가 나를 압도한다. 뭐 이런 정도로도 감탄하니 내 수준도 알만 하겠지만~. 마침 양태종 교수와 마주쳤다. 칸트풍의 철학적 근엄함은 여전하다. 작년보다 한 두 개 더 늘어난 주름살에 지혜가 번뜩이네.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니 벌써 꽤들 자리잡고 있다. 아직 모임시간 30분전인데 일찍들 서둘렀나 보다. 옛날에는 대개 약속시간보다 30분쯤 지나야 겨우 자리가 채워졌는데 군기잡힌 쫄들마냥 시간들은 칼같이 지킨다. 이제 그런 나이들이 되었남? 자리순례하며 반갑게 인사 나누다 낯선 얼굴이 문득 보인다. 누구신교?
허~, 미국에서 날아온 이원익이다. 고교시절 한 반인 적 없고 졸업후 근 50년이니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서로 ‘웬 영감?’할 사이다. 그래도 홈피에서 간헐적이나마 반갑게 조우하다 보니 전혀 낯설지 않다. 일부러 옆자리로 초대하였다. 어부인께도 깍듯하게 인사 올렸으니 원익법사도 속으론 빙글빙글했으리라. 6시 30분, 시간이 차니 사람도 거의 찼다. 내 테이블엔 조용수교수와 이홍걸이가 함께 하였다. 평소 내가 괴는 친구들이라 함께하는 시간들이 더 빠르게 흐르겠다 예상된다.
실내를 한바퀴 둘러보니 가운데 테이블 세 개에 어부인들께서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전체 그림은 성 한가운데 공주들을 감추고 삥 둘러 기사들이 지키는 형국이라! 우리 친구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기사도정신이 투철하였나? 비로소 철들 드나보다. 고기가 들어 온다. 아싸~! 갈비다. 회비도 없다니 맛은 두배겠다. 먼저 구워 먼저 먹겠다는 심산으로 고기집게를 들었다. 그런데 용수가 자기가 굽겠다며 집게를 낚아챈다. 늘 보듯 귀공자 아우라가 풍겨나는 친구가 고기를 굽겠다니~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용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버릇인 팔짱을 끼지도 않는다. 곧 퇴직이라더니 외려 마음은 더 평화로워졌나보다. 다들 좋아하는 친구에겐 이유가 있다. 오늘 고기를 구워주었으니 담엔 내가 밥사야겠다.
용수 곁의 홍걸이는 하회탈 닮은 얼굴에 연신 부드러운 미소를 흘린다. 전혀 울트라맨 같질 않다. 회장인 김병호 정형외과 원장친구의 진단으론 무릎연골이 다 닳은 상태라는데~ 그런데도 100키로가 넘는 울트라마라톤 코스를 매번 완주하는 철혈의 사나이같질 않다는 얘기다. 인간승리와 마주하고 있으니 갈비맛이 더 좋다. 홍걸이는 갈비살보다 뼈에 붙은 살점만 뜯는다. 튼튼강력한 이빨이니 갈비맛 제대로 아는 친구라 이해는 되어도 앞접시에 갈비뼈토막만 수북하니 경이롭다.
원익과는 주로 미주생활 근황과 법사로서의 인연 등을 요모조모 묻고 또 답하였다. 탁월한 문재로 홈피를 빛내는 그답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매우 균형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자주 만나 종교적 나눔을 갖고 싶으나 홈피공간이 그 역할을 대신할 듯 싶다. 동해안 어촌 흥해출신 촌놈이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인생발자취가 밝고 뚜렷하다. 등쪽 테이블로 눈돌리니 상주농부 서명식이가 약간 불콰한 얼굴로 기분좋게 환담중이시네. 농부라기엔 너무 미끈하게 잘생긴 친구다. 그래도 포도농사를 하니 격이 맞는 것 같다. 미인포도라 하지 않는가! 농부이전 삶은 들을 기회가 없어 잘 모르나 많은 고생 끝에 현재의 수확을 거두고 있단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변화보다는 꾸준함이 덕목인 농사일이라 보수쪽 열혈팬이라는 점이 십분 이해된다. 그가 키워낸 포도와 아로니아를 몇 번 먹어 봤는데 신선하고 맛있다. 서농부, 하늘과 땅이 그대와 함께 하리라.
앞쪽 건너편 테이블엔 주위에 항상 친구들이 끓는 이상렬이 역시 막걸리를 비우고 있다. 식당에 막걸리가 없을까봐 손수 사들고 오신 걸로다! 동기라면 모르는 이 없고 누가 와도 격의없는 이 친구, 누구보다 평안하다. 비록 위암 초기 수술을 받았으나 매일 막걸리 한 두통은 너끈히 즐길 정도로 건강이 회복돼 기쁘다. 친구들에게 줄곧 웃음을 선사하니 ‘우정의 술항아리’란 의미의 우담(友壜)이란 호도 받았다. 내 와이프 초등학교 1년 선배라 내한텐 쪼끔 으스대는 듯도 한데~
옆쪽을 훑어보니 김주호와 함께 김지원이 옆모습이 보인다. 지원이는 고려시대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꽉짜인 체형의 거구에 큼지막한 주먹하며 부리부리한 마스크가 호걸풍이다. 무신정권 아래서라면 분명 큰 권력을 쥔 장군으로 호령할 상인데 세상이 북적대 좁쌀만해지니 운신할 공간이 부족한 듯 싶다. 미인이신 어부인과 꽁냥대지만 말고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펴 보기를!
주호는 함께 술마시던 그 때나 내가 술끊은 지금이나 항상 그 자리에서 정겹다. 옛날에 몸이 극히 안좋았을 때가 있었다는데 한 번 뜻을 세우면 끝까지 가는 소신통이라 건강도 노력으로 우뚝 세운 한국형 순혈할배다. 동기들중 할배되기 아마 1번일걸? 세상경험이 많이 쌓여 매사 긍정적이라 대화하기 참 편한 친구다. 오늘은 아차싶은 해프닝이 있었다. 뜨거운 냉면육수를 나르던 종업원끼리 부딪히면서 주호 어깨로 국물을 쏟는 사고가 터진 것이다. 찬물을 동원하고 내과의 전창민까지 나서 닦고 씻고 붙이는 등의 응급처치로 마무리는 되었으나 좀 다들 놀랬다. 별일 없겠지? 전창민은 미남로터리 일대에서 페스탈로치로 명성이 자자하다. 의사가 아니라 봉사를 천직으로 삼은 듯한 평소 생활상이 우리 귀에까지 들려온 결과이다.
맞은 편에 앉아 있다 가장 놀랬을 사람은 김지은이다. 지원이와 이름은 비슷해도 풍기는 외양은 사뭇 다르다. 해군 UDT출신답잖게 나긋나긋하고 순박하다. 그러고 보니 지원이나 지은이나 둘다 해군출신이네~ 한사람은 장교요, 한사람은 특수부대원의 차이일 뿐! 지은이는 요새 부쩍 미용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저번 모임은 뽀글파마였던데 이번엔 쫙 편 게 스트레이트파마구나. 갈수록 마음이 젊어지는 것 같아 보기가 참 좋다.
문득 보니 우리 옆테이블에 앉은 이종찬도 원익과 열심히 얘기중이다. 두 사람이 꽤 친한 것 같으네. 친구들 안부에서 종교얘기까지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종찬이는 평생 몸담았던 금융계를 떠나 지금은 자연을 벗삼아 수양에 힘쓰는 눈치다. 큰 진전이 있을거라 짐작된다. 맞은 편엔 기린아 김안석이 동부인하여 앉았다. 어부인 갈비구워 챙겨주느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인데 암~ 그래야지! 학창시절 고문을 가르치시던 안평재 쌤의 속을 많이도 썩였으나 나중 세무서장으로까지 우뚝선 그 뚝심은 기림받아 마땅하다. 연말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동부인하는걸 보니 맛있는 자리엔 꼭 모시는가보다. 안그런 친구들은 좀 본받으시고~
저쪽으로 훌쩍 눈길 띄우니 변재국이가 보인다. 이 친군 매력포인트가 참 여러 군데인데 학창시절 친했다가 다 늙어 다시 만난 게 너무 아쉽다. 대우자동차였던가 중국 계림의 지사장으로 오래 근무하였다 들었는데 그 때도 계속 연락중이었다면 계림여행시 실컷 대접받을 기회를 놓쳐서이다. 아무튼 얘길 나눌라치면 가볍거나 말랑말랑하거나 어떤 화제라도 즐거운 친구다.
가장 북쪽 테이블엔 서울치과 장인철 원장과 로맨티스트 윤일근, 헬스대부 박철기가 마주 앉아 권커니 잣커니하고 있다. 안락동, 반여동파쯤 되겠는데 그들끼리 코드가 참 맞다. 인철이는 내 치아 주치의로 우리 가족 모두의 이빨이 그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친구사이니까 다 그렇다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케어해주는 마음씀에 항상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진다. 치과의인 박찬석이나 강영건이도 마찬가지로 다 품넓은 친구들이란 소식이 들려온다. 힐끗 보자니 찬석이가 명식이 자리까지 원정와서 서농부의 歸釜를 소주로 환영중이시네.
윤일근에게 밴드 굿맨의 근황을 물었다. 보컬이자 베이스담당인 반정열이가 건강이 나빠져 좀 휴가중이라 전한다. 정열이가 있었다면 몇잔 술에 기분이 Up되어 하이톤의 노랠 읊조리거나 분위기를 띄워 시끌벅적하였을텐데 그의 부재가 아쉽다. 정열이의 쾌유를 빈다. 일근이에겐 항상 빚진 마음이다. 내 꾐에 빠져 밴드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드럼구입비는 딸들의 환갑축하금을 몽땅 털어 마련한 돈이다. 그러니 굿맨 소식에 따라 나도 희비가 엇갈릴 밖에~. 일근아, 열심히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건강도 열리고 로맨스도 열릴 것이라며~!
이러구러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도 미끈하게 뻗은 긴 다리의 매력남 강봉호도 눈에 띈다. 봉호에겐 세월이 비켜가는 비결이 무언가 있는 모양이다. 내 한참 뒤편에 사진작가 김재섭이가 그림처럼 앉아 있다. 같이 있어보면 알겠지만 과묵한 친구다. 열정을 속으로 승화시켜 앵글로 폭발시키는가 보다. 논도 경작하는 농부인데 지난 벼농사는 왜구 아닌 멸구 땜에 망쳤다지. 그런데 요즘 농부들은 다 이렇게 예술까지 아우르는 멋쟁이들인가?
어부인들 계시는 聖地를 훔쳐 보았다. 헐~, 화백들이 다 계시는구먼. 최근 수채화 대전에서 입상한 서유선씨(민호 총장을 보살피고 있음), 독특한 화풍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남궁정화씨(방문성이 보디가드임), 말그림으로 저명한 류한씨(바른 사나이 장기남의 연인) 등~. 웬지 그녀들의 공간은 아름다운 색채로 일렁이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몇몇 의사동기들이 안보인다. 근무일인 금요일 저녁이라 해운대까지 시간맞추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올 때마다 양주 한 병은 꼭 챙겨오는 따뜻한 사나이 문두찬 피부과 원장과 아기들의 대부 이철 소아과 원장도 갈비맛보러 안오신다. 송년회중 참가숫자로만 봐서도 역대급인 날에! 갈비 몇점 챙겼다가 다음 만날 때 좀 구워줄까나?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대망의 경품찬스가 왔다. 재섭이는 자신의 사진작품 두 점을 판넬로 만들어 협찬하였다. 전회장인 유영호 사장은 매실주 5병에 미니소주 90병도 챙겨 왔네. 영호 이 친구 소주 안마셔본 사람 나와봐라 해보지! ‘마~ 좋은 친구’란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갑다. 어허~, 상주의 서농부는 아로니아 즙 3박스를 들고 왔구먼. 상주까진 무궁화호밖에 없고 왕복 7시간 가까이나 걸리는데 그 먼 길을 3박스씩이나 낑낑(?)거리며 들고 오다니. 남궁정화 화백께서는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넣은 월달력 40개를 희사하셨다. 부엉이 가족을 담은 독특한 화풍이 오래 애장하고픈 마음이 든다. 경품시간은 괜스레 떠들썩해진다.
크게 비싼 협찬품들은 아니나 사랑이 크길래 다들 좀 챙겨볼거라 욕심을 내 본다. 이 대목에 내 얘기 한조각! 내 평생 어디가서 경품 당첨돼 본 기억이 없는데 이날 난 재섭이 사진 한 점 먹었다. “마눌님이여 기뻐해다오, 경품 묵었소” 마눌님은 김장 손질중이라 혼자 도망치듯 송년회 자리에 온 죄가 막중한데 그래도 면피했단 생각에 갈비맛이 조금 더 배가되네. 경품시간 내내 "참가번호 7번은 왜 안뽑아주나"라며 궁시렁대던 친구가 있는데 누구였지? 이번 경품은 낙첨하였어도 내년 경자년엔 더 좋은 일이 있을거라!
참석한 친구들 모두 언급하기가 어려워 갈비뜯던 중간중간 눈마주친 친구들만 거론하였다. 혹 심기를 거스른 문귀라도 있다면 나의 불찰이다. 갈 시간이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 시간들이 행복한 기록으로 남는 즐거운 이벤트였다. 이런 자리를 기획하고 사전 답사에다 한 명 한 명 전화로 참석을 독려하였던 민호총장의 노고를 가슴에 담아 본다.
이젠 술들을 다 피하는가보다. 회식자리인데도 차를 가져온 친구가 적지 않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짝을 짓거나 동부인하여 줄줄이 빠져 나간다. 다들 좋았는교?
날씨 탓인지 발걸음도 총총, 하늘의 별들도 총총, 나도 이만 총총~
내년에 보입시더!
ps: 총장의 청탁으로 첨엔 모여서 밥먹고 놀다 헤어졌다 위주로 쓸려 했다가
이벤트의 목적이 밥먹는데 있지 않단 자각에 행사후기치곤 길게 쓰게 되었으니
동기제현의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