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오후 1시51분, 법정(法頂) 스님이 79세(법랍 56세)로 입적(入寂)했다. 그가 평생을 따랐던 석가모니보다 한 해 먼저 ‘무소유(無所有)’의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입적 이틀 전(前) 그를 만난 현장(玄藏) 스님에 따르면, 법정 스님은 “내 소원이 뭔지 알아? 빨리 몸 벗어나서 하루빨리 다비장 장작불에 들어가는 거야”라고 하더란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弊)를 끼치지 않고 싶어서’가 이유였다고 한다. 생전(生前)에 법정 스님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이 말에 스님의 철학이 들어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이것이 법정 스님의 구도(求道) 철학이었다. 지인들은 “내가 죽고 난 뒤에 관을 짜지 말고, 사리를 수습하지 말고, 만장(挽章)을 하지 말라”고 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증언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법정 스님의 지인(知人), 속가(俗家) 친척, 그를 모셨던 상좌승(上佐僧) 등 그를 가장 잘 아는 6명을 만나 79년 그의 삶을 추적했다.
육신에 손대면서까지 삶에 집착해야 하나
법정 스님은 2007년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폐암(肺癌)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 관절이 좋지 않았던 스님은 종종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법정 스님과 6촌 간으로, 현재 대원사 포교당의 주지를 맡고 있는 현장 스님의 얘기다.
“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간 김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폐에 이상 증세를 느껴 찾아간 것이 아니었고, 생각지 않았던 병이라 처음에는 놀랐다고 들었습니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병을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속가 아버지도 폐병으로 돌아가셨다’면서요. 정확히 폐암 몇 기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수술이 시급하다고 들었습니다.”
―곧장 수술을 받았습니까.
“애초에 안 하려고 했습니다.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인 데다, 육신(肉身)에 손을 대면서까지 삶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법정 스님의 제자와 지인들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몇몇 지인은 미국에서 수술받기를 강권(强勸)하다시피 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사는 것이 번거롭고 너절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습니다. 수술받기 위해 외국에 나가고 입원하고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지요. 제자들이 ‘더 오래 사셔야 불법(佛法)을 세상에 더 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어렵게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장 스님에 따르면 법정 스님은 이후 미국 휴스턴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암 전문 병원인 ‘MD 앤더슨’에서 폐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고(故) 최종현(崔鍾賢) SK그룹 회장, 이건희(李健熙) 전 삼성그룹 회장 등이 이곳에서 폐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법정 스님과 목포상고, 전남상업초급대(전남대 상대의 前身) 동창인 박광순(朴光淳) 전남대 명예교수는 “스님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며 매우 만족해 했다”며 “다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해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줄만 알았다”고 말했다.
“부처님보다 오래 사는 것 미안해 해야”
법정 스님의 중학교 시절. 목포 상업학교 뜰에서 친구들과 함께. 뒷줄 오른쪽이 법정 스님이다.
몸에서 버린 줄 알았던 암은 올해 초, 다시 그를 찾아왔다. 법정 스님은 지난 1월 말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암도, 법정 스님의 태도도 달랐다. 암은 그의 몸을 떠날 줄 몰랐고, 그는 육신에서 마음을 떠나보냈다.
현장 스님의 얘기다.
“스님의 평소 몸무게가 64㎏ 정도였는데, 두 번째 투병 기간을 보내면서 입적 직전에는 45kg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과거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승복(僧服) 속에 감춰진 스님의 몸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해탈을 하셨을 때의 고행상(苦行相)처럼 온몸에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출가한 후부터 평생 부처님을 좇았습니다. 스님이 79세에 입적했는데, 부처님보다 한 살 적습니다. 저희는 스님이 부처님보다 더 오래 사는 걸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은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 중에 연로(年老)한 분들을 보면 늘 나이를 물었단다. 이 중에 80세가 넘는 이를 만나면, “어이구, 부처님보다 오래 사셨네요. 미안한 마음 가지고 살아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법정 스님은 40여 년 동안 천식을 앓았다. 법정 스님이 발의(發議)했던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상임국장을 지냈던 진명(眞明) 스님의 증언이다.
“스님은 40대부터 천식이 심했습니다. 봄이면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을 하셨어요. 온도차에 따라 알레르기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겨울에 따뜻한 남쪽, 여름에는 강원도를 오가는 생활을 한 것도 천식과 알레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님이 무슨 거처를 저리 자주 옮기느냐’며 수군댔습니다. 체질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요.”
대학 때, 당대의 高僧 효봉 스님과 첫 만남
법정 스님의 출가 한달 전 모습.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 1953년 11월 25일. 아랫줄 오른쪽이 법정 스님이다.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님의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여동생 한 명이 그의 세속 직계 가족인데, 법정 스님은 사실상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훗날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준 것이 나의 창작 활동을 북돋웠다”고 회고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일(忌日)이면 근처의 노인복지원 등을 찾아가서 도움을 주고 돌아오곤 했다.
친할머니와 홀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그는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상업초급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해 춘원 이광수(李光洙) 선생의 책을 즐겨 읽었다.
그와 불가(佛家)의 인연은 대학 때부터 시작됐다. 목포의 정혜원 사무실에서 일을 도운 것이 계기가 됐다. 법정 스님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고승(高僧)인 효봉(曉峰) 스님과의 첫 만남도 이때 이뤄졌다.
효봉 스님은 ‘판사 스님’으로 알려진 고승이다. 일제 시대에 평양 복심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했던 효봉 스님은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난 뒤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삶에 회의를 느낀다. ‘과연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根源的) 질문이었다.
그는 이윽고 출가를 결심하고, 출근 길에 집을 떠났다. 엿판을 메고 3년 동안 전국을 엿장수로 떠돌아다닌 그는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금강산 도인’ 석두스님에게 계를 받고 머리를 깎았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한 효봉스님은 무섭게 정진했고, 금강산을 떠나 떠돌다가 1937년 송광사에 머물게 된다. 훗날 조계총림의 초대 방장이 된 구산스님이 효봉 스님의 맏상좌다. 상좌란 불교에서 스승의 대를 이을 여러 제자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는 뜻이다.
정병조 동국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훗날 법정스님은 환속한 시인 고은씨,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박완일씨와 함께 효봉스님의 삼제자로 불렸단다. ‘효봉-법정’의 인연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현장스님은 “효봉스님이 정혜원에서 정기 법회를 열었는데, 대학생이었던 법정 스님이 강의를 듣고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대학시절에 염주를 두르고 사진을 찍기도 한 법정 스님은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생각이 많았다. 6.25 전쟁,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컸다. 결국 그는 출가를 결심했지만,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현장스님은 “집안의 어른들이 ‘없는 돈 들여서 공부를 시켜 놓으니 중이 돼 버렸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현장스님에 따르면, 법정스님은 출가한 이후 속가 친척들에게 냉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끔 절로 찾아와도 일부러 쌀쌀맞게 대하고, 입적하기 며칠전에야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는 등 속가 생활을 회상했다고 한다.
삭발하니 훨훨 날 것 같아 종로통 한 바퀴 돌아
법정스님은 1955년,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당초 스님은 오대산으로 갈 요량으로, 밤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눈이 내려 길이 막히자 스님은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을 찾아갔고, 이곳에서 스승인 효봉스님을 재회하게 됐다. 그는 효봉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법정스님은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 바퀴 돌았다“고 회고했다.
법정스님은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행자 생활은 불교에서 정식승려가 되기 위해서 기초적 소양을 닦으며,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듬해 사미계를 받았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수행을 정진했다. 스님은 1959년 양산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1960년 봄부터 통도사에서 운허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4.19와 5.16을 겪은 뒤 유신철폐 운동등에 참여하면서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씨 등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스님은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내려갔다가, 그 뒤편에 불일암을 짓고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부처님처럼 쉰 다섯 넘어서야 제자 받아들여
현장스님의 얘기다.
“본인이 14평 부지에 설계해서 지은 것이 불일암입니다. 이곳에서 당신 식대로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엌 아궁이 옆에 ‘먹이는 간단 명료하게’라는 글을 써 놓고 혼자 밥을 지어 먹고, 처마 밑에서 가꾼 야채로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장작을 패서 군불을 때고, 스스로 빨래를 하면서 그렇게 혼자 지냈습니다.”
-통상 스님들께서는 시중을 드는 스봉승이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혼자 지내신 건가요.
“송광사 내려올 때 스님 나이가 마흔 넷이었습니다. 큰 절에서 수련중인 행자승들이 법정스님의 제자가 되려고 많이 찾아 왔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악착같이 덤비는 제자들이 있었지요. 스님은 그럴 때면 오히려 말이나 행동을 밉게 해서, 정나미가 떨어지게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중에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부처님은 시봉승을 쉰다섯에 받았다. 마흔넷인 내가 수발드는 제자를 두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요. 스님은 세속나이가 쉰다섯이 지난 다음에 첫 상좌를 들였습니다. 보통 큰 스님들은 20~30 명의 상좌를 두는데, 스님에게는 7명 뿐인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까탈을 부려 선별했다기보다는 시봉승을 들인 시점 자체가 늦었던 겁니다. 법정스님은 부처님의 행을 닮아 가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된 그의 산문집 <무소유>는 이때 나왔다. 1975년 4월에 출간된 <무소유>는 지금까지 34년 동안 총 340 만부가 팔렸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무소유
법정스님은 <무소유> 외에도 <산에는 꽃이 피네>(1998년) <산에는 꽃이 피네>(1998년)
<홀로사는 즐거움>(2004년)<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2006년) <오두막편지>(2007년)<아름다운 마무리>(2008년) 등 숱한 저서를 남겼다. 출판업계에서는 책 판매에 따른 인세 수입만 해도 수십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중 대다수를 스님이 무기명으로 기부를 했다는 것이 그가 입적한 이후에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의 사회 활동을 묵묵히 도왔던 진명 스님의 얘기다.
“스님은 평소에 물건을 두 개 이상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작은 물건이라도 두 개가 생기면 늘 남에게 나눠 줬습니다. 출판사에서 인세가 들어오면 어느 시점에서 불교 단체나 봉사 단체에 나눠 줬습니다. 저도 과거에 스님 덕분에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1992년에 동국대 불교대에 다닐 때 인사를 갔습니다. 사실 등록금 때문에 고민이 컸던 시기였는데, 스님이 선뜻 2학기부터 장학금을 줄 테니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이 소리 소문 없이 기부를 맣이 하셨나 봅니다.
“저희에게 절대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몇 년 전에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초등학생의 사연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어린 학생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일주일 동안 할머니 시신과 함께 살았던 얘기예요. 법정 스님께서 그 사연을 TV를 통해서 보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나가시더군요. 방송국에 찾아가서 그 아이를 도와주라며 성금을 주고 오셨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극구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시는 성품이셨습니다.”
진명스님은 ‘내가 무엇이 부족하냐. 내가 뭐가 가난하냐. 내가 뭐가 부족한지 돌아보라’ 고 했던 법정스님의 말씀을 항상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았던 진명스님은 10대 후반에 운문사로 출가한 비구니다. 출가를 결심하고 스님을 찾아갔을 때, 스님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진명스님은 출가 이후 훗날, 법정스님이 발의한 '맑고 향기롭게‘의 상임국장을 지냈다. 법정스님의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셈이다.
법정 스님이 ‘두개 이상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것은 다른 이들도 전하는 얘기다.
현장스님은 “법정 스님은 먹을 음식도 이틀치 이상은 두지 않았다. 즐겨 보는 책도 필요한 것만 남겼다. ‘소유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무소유‘라고 말했다”고 했다.
함석헌 선생이 찾아오자 감자 잔뜩 쪄서 내놔
법정스님의 식사 역시 그의 성품 그대로였다. 인터뷰에 응한 지인들은 한결같이 “법정 스님의 식사는 1식 3찬을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송광사 서울 분원 법련사의 주지를 맡고 있는 보경스님은 고등학교 1학년때, 광주시민회관에서 법정스님의 강연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83년에 출가했다. 그때 법정스님은 청중에게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그 원한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출가 이후 지근거리에서 법정스님을 모셨다.
보경스님의 얘기다.
“법정스님이 불일암에 계셨을 때 행자 스님들 사이에서는 그리로 심부름을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반찬이나 우편물을 가져다 드리는 것이 행자의 소임중 하나인데, 서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덕조 스님이 법정스님의 반찬을 자주 가져다 날랐는데, 반찬이 세 가지를 넘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깻잎 장아찌와 두부찌개를 좋아하셨습니다."
법정스님의 이런 원칙은 출가 당시부터 계속됐다. 현장 스님은 과거 법정 스님과 함석헌 선생의 식사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을 들려줬다. 함석헌 선생은 아침, 점심 식사를 거르고, 저녁에 세 끼를 몰아서 먹는 대식가로 알려져 있다.
현장 스님의 얘기다.
“하루는 함석헌 선생이 찾아왔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무언가 대접을 해야 하는데, 드릴 것이 없는 겁니다. 법정스님은 혼자 식사할 때는 1식 2찬, 손님이 있으면 1식 3찬을 기본으로 했는데요. 그런데 어쩝니까? 법정스님이 부엌에서 감자를 잔뜩 쪄서 내왔습니다. ‘대식가 함석헌 선생한테 감자만 대접해서 민망하구먼’ 이라고 말씀하시면서요.”
길상사 지었지만 하룻밤도 길상사서 잔 적 없어
그런데 <무소유>가 히트를 치고, 유명해 질수록 법정스님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1992년에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았던 산골 오두막으로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장스님은 “불일암에서 글을 쓰고 강연회를 다니면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번거로워했다. 불현듯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강원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스님이 현실세계와의 끈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스님은 1994년, ‘맑고 향기롭게’라는 단체를 조직해 사회계몽 운동을 시작했다.
진명스님의 얘기다.
“한일그룹 홍보부에서 우리 단체의 소식지 인쇄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법정스님은 후원금에 문제가 생길까봐 몹시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후원금을 감사하던 날이면 스님과 저, 모든 직원이 앉아서 회계와 영수증을 꼼꼼히 살폈어요. 후원금에 대해 엄격하다 보니, 직원들의 월급이나 제 활동비가 무척 적었습니다. 저는 총무를 맡고 있었는데 한 달 활동비로 50만원을 썼습니다. 매일 자동차 운전해서 여기저기 봉사를 다니면 부족했어요. 저희 사정을 들은 보살 한 분이 제게 100만원을 주시면서 모자라는 부분을 메우라고 했습니다. 스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고 쓰다가 걸렸어요. 스님은 대노 했습니다. 눈물이 속 빠질 정도로 혼이 났습니다. 이후에는 지원금을 따로 받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법정스님은 이즈음 길상사를 송광사의 말사로 조계종에 등록하며 절을 짓기 시작했다. 길상사는 잘 알려진 대로, 제 3 공화국 시절에 대형 요정 ‘대원각’이 있던 자리였다.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씨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대원각 7000여 평의 부지를 시주한 것이 계기가 됐다.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 들였고, 1997년 창건 법회를 열었다. 법정스님은 이후 길상사의 회주 (법회를 이끄는 어른 스님)를 맡아 정기 법회에서 법문을 해 왔다. 하지만 정작 절을 지은 그는 이곳에서 하룻밤도 보낸 적이 없다.
현장스님은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하룻밤도 자지 않았다. 다비식을 치르기 전날 처음으로 밤을 보냈다. 육신을 떠난 뒤에야 본인이 세운 절에서 첫 밤을 보낸 셈이다”고 했다.
투병중에도 “앞으로 날 만나려면 불일암으로 와”라고 말해
법정스님은 생전에 스승인 효봉스님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와 40년 동안 교분을 쌓아 온 정병조 동국대 교수의 얘기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효봉 스님에 대해 말을 많이 했습니다. ‘효봉 스님의 수행이 뛰어 났다’, ‘나는 따라가지도 못한다’면서요. 특히 효봉 스님께 혼쭐난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법정스님이 효봉 스님의 시봉 노릇을 오래했는데, 효봉 스님이 고법 판사를 했지만, 출가가 늦다보니 다른 스님들보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이 효봉 스님의 엉덩이를 씻어 드렸는데 피와 진물, 고름이 뒤엉켜서 볼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효봉 스님은 방에 불을 때지 않고 겨울을 보냈는데, 이것이 마음에 걸렸던 법정스님이 효봉 스님이 주무실 때 방에 불을 땐 겁니다. 그 일 때문에 효봉스님께 꾸중을 들었다는 얘기를 웃으면서 지인들에게 많이 했습니다.”
인터뷰에서 나선 많은 사람이 법정 스님에 대해 “깐깐하지만, 위트가 있는 분‘ 이라고 말했다. 송광사 총무를 맡고 있는 진경 스님은 법정스님을 오래 모신 지묵 스님에게 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묵 스님이 법정스님이 시킨 일을 마음에 썩 들게 처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스님께 죄송한 마음에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문을 나서는데 법정스님이 붙잡으시더래요. ‘이리 앉아라. 밖에 이슬비가 오는 걸 보니 네가 있으라는 신호인가 보다. 가랑비가 오고 있으면 가라고 하려고 했는데’라고 하시더래요.”
현장스님은 법정스님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는 ‘앞으로 스님 뵈려면 어디로 갈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이 ‘내세에서나 보자’는 답을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불일암으로 와’이러시더군요. ‘다리가 아파서 불일암까지는 못 가겠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럼 길상사로 와. 거기 오면 나 볼 수 있지“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위트있는 말씀을 하시는 모습이며, 영락없는 법정스님이다 싶었습니다.“
영화 보면서도 좋은 대사 나오면 즉석에서 메모
법정스님은 평소 그를 찾아오는 스님들에게 ‘출가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고 한다.
현장스님은 “출가를 결정하고 나서 법정스님을 찾아갔다. 한참 얘기를 듣더니 스님이 ‘출가자에게도 사회적 역할이 있다.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기초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진명스님의 증언도 비슷하다.
“법정스님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에 ‘요즘 수행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수행만 해서는 안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기반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대학에 입학한 목적이 공부냐, 수행이냐’고 묻더군요. 제가 ‘수행을 위해 공부를 한다’고 답했더니 기뻐하셨습니다. ‘수행은 암자나 토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하는 것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진명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법정스님은 사회의 각 분야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진명스님은 “스님은 철학, 문학, 예술 등에 감각이 뛰어났다. 이런 분야에 마음을 열어뒀고, 음악을 많이 들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혼자 계실 때 차이콥스키 음악이나 백건우씨의 연주 음반을 자주 틀어놨다. 러시아 성악가인 이반 레브로프의 음반을 선물로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근래에 듣기 어려운 목소리’라며 무척 좋아했다”고 기억했다.
그런가 하면 법정스님은 ‘메모광’이었고, ‘직설적 화법’을 즐겼다고 한다. 법련사 주지인 보경스님의 얘기다.
“법정스님과 다른 스님이 극장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법정스님 손에 메모지가 들려 있더래요. 같이 갔던 분이 ‘스님, 그게 뭡니까’라고 했더니, ‘응, 아까 좋은 대사가 나오기에‘ 이러시더래요. 깜깜한 극장안에서 마음에 와 닿는 영화 자막을 좋은 문구나 글이 있으면 꼭 메모지를 꺼내서 적어 놓곤 하셨습니다. 매사에 직설적으로 말씀하셨고요.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완곡하지만 명쾌하게, 단호한 어투로 스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입적 전날 휠체어 타고 병원 복도 산책
정갈하고 자비가 넘쳤던 분, 늘 팔을 앞뒤로 흔들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던 법정스님. 그도 병마를 끝내 피하지는 못했다. 병세가 위중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난 뒤, 불과 일주일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마지막 입적의 순간까지 의식이 또렷했다고 한다.
입적 이틀 전에 그를 만난 현장스님은 “몇 차례 병문안을 갔지만 의식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간혹 기력이 쇠해 말을 못한 적은 있었지만, 모든 얘기를 전부 듣고 이해했다”고 말했다.
스님의 입적 당시에 중국에 있었던 진명스님은 “입적하기 전날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고 휠체어를 타고 병원 복도 산책을 다닐 정도여서 입적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보경 스님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법정스님은 죽음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담담했죠. 종교인이라도 북음을 앞두면 동요가 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법정스님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산중 스님들의 내공이라고나 할까요. 오히려 웃으면서 ‘사는 날까지 사는 거지~’라며 여유롭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역시 큰스님이라고 느꼈습니가.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시간 만에 다시 찾아 뵀습니다. 얼굴이 그렇게 평온해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법정스님은 저서 <오두막 편지>에는 이런 글을 썼다.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