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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성놀이 [ 踏城- ]
답성놀이-전북 고창군 고창읍-국립민속박물관
- 분야
놀이
- 계절
겨울(음력 윤달)
- 다른이름
성돌기, 성밟기(城-)
정의
윤달이 드는 해를 윤년이라 하는데 윤년의 윤달에 부녀자들이 성곽 위에 올라가 산성(山城)의 능선을 따라 밟으며 열을 지어 도는 풍속. 성돌기, 성밟기라고도 한다.
내용
윤달의 답성(踏城)놀이는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공통점이며, 부녀자들이 윤달 든 해에 행렬을 지어 산성을 도는 보편화된 세시풍속이다. 윤달에서도 엿셋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초엿세날, 열엿셋날, 스무엿셋날을 답성일로 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1678년에 현감 이항(李恒)은 고창 모양성(牟陽城)을 개축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으며, 순조 3년(1803) 고창읍에 읍치풍수의 석조물을 조성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다. 이러한 답성놀이는 개성 천마산성(天魔山城), 전북 고창의 모양성(모양산성 혹은 고창읍성),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 전북 기념물 9호)을 비롯하여 전남 영광 지역에서도 전해오는 풍속이다.
답성놀이가 대표적으로 행해지는 곳으로 전북 고창 지역의 모양성이 있다. 고창 모양성의 답성놀이 풍속은 숙종 4년(1678) 고창 현감 이항이 정유재란 이후 폐성된 모양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개축에는 여덟 개 현의 혈기왕성한 남성들을 동원하였는데, 윤3월에 모양성 개축을 완공하면서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돌을 머리에 이고 모양성을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왕생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모양성 밟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양성 답성놀이는 축성설화와 관련이 있다. 모양성에 오뉘힘내기형 성 쌓기 설화가 전해오는데, 다음은 고창 모양성과 아산 서산고성의 성 쌓기 설화이다.
“옛날 백제 때 남자와 여자가 두 패로 나뉘어 성 쌓기 내기를 했다. 평지와 산으로 된 모양성은 여자들이 쌓고 아산면 성틀봉의 서산고성은 남자들이 쌓기로 하였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세니까 여자들이 자기들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여유를 부리며 날마다 여흥을 즐기느라 성 쌓는 것을 게을리 했고, 반면 힘이 약한 여인들은 꾀를 내어 성틀봉이 마주 보이는 북쪽 문은 쌓지 않고 똑같이 마주 보이는 북쪽에서 장구 치며 노는 것처럼 꾸미고 상대 쪽에서 보이지 않는 곳은 부지런히 쌓아갔다. 북쪽을 빼놓고는 거의 완성을 해가는 데 상대편 남자 쪽에서 한밤중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와서 성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되돌아가 자기편에게 여자 쪽 성이 북쪽만 남겨두고 거의 완성되었음을 알리게 되었다. 그제야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 쌓을 돌들을 부랴부랴 실어 나르는데 여자 쪽에서 성을 완성하여 만세를 부르자 한탄을 하며 성 쌓기를 중단하고, 그때 버리고 간 성돌이 쌓여서 고인돌의 무더기가 생겼다.”라는 전설이 전한다.
모양성은 고창읍의 동남쪽에 있으며 서고산성은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성틀봉에 있다. 서고산성은 전설처럼 남자들이 성 쌓기를 게을리하여 패한 관계로 실제 성터 흔적만 남아 있다. 성터는 성틀봉의 테두리 산성 형식인데, 석성이 보이지 않고 산성의 틀만 보인다 하여 성틀봉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지금도 고창읍에서 무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성틀봉의 성터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성 쌓기를 중단하고 버린 돌이 고인돌 무더기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입증하듯이 성틀봉 아래에는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고창 모양성 답성놀이는 윤달에 북망산천의 저승문이 열린다는 속설로 전국 각지에서 소복단장을 한 부녀자들이 성밟기를 하려고 찾아든다. 부녀자들의 소복단장은 생전에 극락왕생을 체험하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모양성의 북문[拱北門]은 저승길에 열리는 극락문이라 할 수 있으며, 그곳으로 들어가면 극락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북문으로 들어가 높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북문으로 돌아오는 방식의 모양성을 현실속의 극락세계로 설정했다고 보고, 나이 많은 부녀자들이 생전에 극락세계를 한 번 다녀오고 싶어 이곳의 답성놀이를 즐겼다고 본다. 손 없는 윤달에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모양성을 밟아야 저승길에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답성풍속을 만들어냈으며, 4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윤달 특히, 윤3월에 답성을 하면 더욱 효험이 있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모양성 답성놀이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인 답교놀이와 유사하다. 답교놀이는 다리밟기를 하면서 소원성취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세시풍속인데, 모양성 답성놀이도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의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답성의 순서는 북문으로 들어선 후 손바닥 크기의 성돌을 머리에 이고 동쪽 성곽 위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동문의 등양루에 오르면 문루의 창문을 세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소원하는 치성(雉城)을 올린다. 모양성에는 여섯 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곳에 이르면 부녀자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에도 반드시 노자가 따르는 법으로 알고 손수 가꾼 오곡을 백지에 한줌 씩 싸가지고 와서 조금씩 퍼놓고 “저승길 노수요” 하고 합장하며 삼배(三拜)를 올린 뒤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의 소망을 기원한다. 모양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에 따라 머리에 돌을 이고 세 바퀴를 도는 부녀자들의 풍속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창 모양성 답성놀이는 모양성과 서산고성의 성 쌓기 내기에서 부녀자들이 승리하였다는 성곽설화가 답성풍속과 조합된 것으로 본다. 손바닥만한 돌을 들고 도는 답성놀이는 돌을 머리에 이거나 치마폭으로 실어 날라 성 쌓기를 한 여성들의 노동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1678년에 읍성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오뉘힘내기형의 성 쌓기 전설을 차용하여 모양성 쌓기 설화의 주체인 부녀자들을 성곽 관리에 동원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모양성의 성곽 구조와 성 쌓기 성곽설화 그리고 윤달 속신이 어우러지면서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소원하는 부녀자들이 답성풍속의 주체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본다.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는 사회 혼란과 함께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이 성행하였는데 탑돌이하는 불교민속과 윤달 속신의 전통이 고창 지역의 나이든 부녀자들 사이에 윤달이 든 해에 모양성에 찾아가 극락왕생을 서원하고 무병장수를 비는 관습을 생기게 하였다. 이런 배경 위에서 이곳의 답성놀이가 1678년 윤3월과 1803년 윤3월에 모양성을 개축하면서 크게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고창 지역의 부녀자들은 윤달이 든 해에는 모양성을 찾아가 현실 사회에 극락정토를 구현하는 답성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정월 초 다리밟기를 하면서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탑돌이를 하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은 고창 모양성의 산성 형태와 성곽설화가 조합되면서 모양성 답성놀이로 계승되었다.
답성놀이-전북 고창군 고창읍-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사전1. 민족문화사, 1991
韓國의 歲時風俗Ⅱ, 1998
전라북도 세시풍속,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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