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도지맥 마지막 구간 산행에 참여하는 마음 어느새 10월 31일이다. 세월은 총알을 타고 바삐도 흘러가고, 나는 휴일마다 산악회를 따라가서 이곳저곳 산길을 걷고 돌아온다. 삶이란 산길을 따라가듯 먼 길을 걷다가 어느 곳에선가 멈추어서 산에 묻히는 것인지. 나는 지금, 인생 어느 굽이진 산길을 걷고 있는가. 10월의 마지막 날, 수도지맥 마지막 구간의 산길을 걷기 위해 집을 떠난다. 10월의 마지막 날, 수도지맥 마지막 구간의 산길 - 묘하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반복된다. 마지막은 처음이 있어야 하듯이 끝남과 끝냄은 시작됨과 시작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어느 곳에선가 시작하여 어느 곳에서 끝막음한다. 그런데 의도한 어떤 일을 시작하여 끝맺기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여 마지막 끝까지 일관되게 이루어 내기란 강인한 의지와 끈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수도지맥 산행의 처음 시작에 참여하여 그 마지막을 끝내는 송백산악회 회원들의 의지와 끈기는 드높이 칭송받아 마땅하다. 악전고투 속에서 고통과 환희를 느끼고 그 마무리를 앞둔 완주자들이 자랑스럽다. 처음도 중간도 없는 초라한 이 몸은 꼬리 끝에 무임승차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들의 훌륭한 성취를 우러르며, 이 장엄한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 마지막 산행에 참여하면서, 수도지맥에 대하여 맹탕인 이 멍텅구리에게 몇 가지 의문점이랄까, 생각거리가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수도지맥이란 무엇인가?가 그 첫 번째 의문이다. 이 물음의 답은 산악회 안내문에서 찾을 수 있다. "수도지맥(황강 북지맥)은 백두대간 초점산(일명 삼도봉) 분기점에서 분기되어 황강 북쪽 유역과 감천 유역 일부와 회천 남쪽 유역을 가르면서 경남 합천군 성산 아래 낙동강 합수점까지 이어진 지맥으로...그 길이는 약 112km, 유역 면적은 약 1,345㎢이고, 남부 지방인데도 불구하고 고봉이 많은 게 수도지맥의 특징이다." (송백산악회 수도지맥 안내문) 이 설명에 따르면, 수도지맥이란 경북 김천·경남 거창·전북 무주가 함께 모이고 서로 나누어지는 백두대간 초점산에서 갈라져서 황강을 남쪽에 끼고 이어지다가 합천의 성산 아래서 황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이름이다. 수도지맥은 황강 북지맥이라 불러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군. 수도지맥 이해는 결국 황강의 이해가 필수적이며, 황강의 발원지와 합수점 확인이 중요한 사항이로군. 두 번째 의문, 왜 수도지맥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 답 또한 산악회 안내문 산행 구간을 보면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산행구간 : 초점산/삼도봉(1,180m), 봉산(901.6m), 수도산(1,317.1m), 단지봉(1,326.7m), 두리봉(1,135m), 남산(1,112.9m), 우두산(의상봉/1,046.3m), 비계산(1,130m), 두무산(1,036m), 오도산(1,120m), 토곡산(644m), 만대산(688.7m), 노태산(498m), 시리봉(408m), 솜등산(269m). 성산(250.7m)" (송백산악회 수도지맥 안내문) 곧 산줄기 가운데 최고봉이 1,317m의 수도산이므로 수도산 이름을 따서 수도산의 줄기라는 수도지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궁금증, 왜 수도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 이 답변은 산악회 안내문에서 찾을 수 없다. "가야산 북서쪽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의 경계에 우뚝 솟은 해발 1,317m의 준봉인 수도산(修道山)은 불령산(佛靈山), 선령산이라고도 한다. 참선 수도장으로 유명한 신라 말기의 수도암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천시 증산면사무소) "수도암은 수도산 상부에 위치한 도량이다. 옛날 도선국사가 이 도량을 보고 앞으로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백여 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이적이 많다 하여 사람들이 불영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수도암은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래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김천시 증산면사무소와 한국관광공사 사이트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 이 산봉 아래 수도암이 있기에 수도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대로 수도산이 불영산이라 불린다면, 수도지맥은 불영지맥으로 불려야 한다. 그렇지만 불영산은 아직도 수도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 지맥을 흘러내리는 곳에는 불교 문화가 융성하여 그것을 대표하는 곳이 수도지맥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가야산의 해인사이다. 네 번째 호기심, 산악회 안내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황강 북쪽 유역과 감천 유역 일부와 회천 남쪽 유역을 가르면서 경남 합천군 성산 아래 낙동강 합수점까지 이어진 지맥" 대목에서, 황강·감천·회천·낙동강의 발원지와 그 합수점과 그 흐름에 대한 것이다. 낙동강 줄기는 영남 지역을 관통하는 영남문화의 중핵이며 영남문화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 이해는 내 능력 밖에 있으며, 황강·감천·회천에 대한 깊은 이해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주 얄팍하게, 발원지와 낙동강에 흘러드는 합수점 정도를 이해하면, 산줄기를 이해하려는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것들에 대해 인터넷 글들을 뒤적이며 살펴보았다. 황강(黃江)은 경남 거창군 북상면 남덕유산 월성계곡 삿갓봉 아래 삿갓샘 근처에서 발원하여 합천군 청덕면 미곡리 말정마을 앞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며, 감천(甘川)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김천을 관통하여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 서쪽으로 흘러든다. 회천(會川)은 어떤가? 해발 1,430m의 가야산 북서쪽에서 내려오는 대가천(大伽川)과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소가천(小伽川)은 고령읍 본관리에서 합류하여 금천(錦川)이 된다. 이 금천은 가야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고령읍내를 관류하는 안림천(安林川)과 개진면에서 다시 합수하여 회천(會川, 모듬내)이 된다. 물줄기를 모아 큰 지류를 형성한다 하여 회천(會川)이란 이름을 얻은 모듬내(會川)는 합천군 덕곡면 밤마리(栗旨)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든다. 위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세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로서, 황강과 감천은 백두대간(남덕유산의 삿갓봉, 대덕산)에서 발원하며 회천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서 나오는 수도지맥에서 비껴나 있는 가야산에서 발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강(黃江)은 거창과 합천을, 감천(甘川)은 김천과 선산을, 회천(會川)은 고령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하천 유역은 옛 가야 지역에 해당된다. 위의 물흐름을 모두 받아들이는 낙동강 설명을 인용하면 이렇다. "낙동강은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긴 강이며, 길이 513.5㎞, 유역면적은 2만 3,860㎢이다.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천의봉(天衣峰:1,442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상북도 봉화군·안동시·예천군·상주시·구미시·칠곡군·고령군 그리고 경상남도 밀양시·김해시 등을 지난다. 강 하류지역인 김해시 대동면 남동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는데 서쪽은 대동수문(大東水門)을 지나 서낙동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고 본류는 계속 남쪽으로 흘러 부산광역시 서구 명호도(鳴湖島)와 사하구 하단동 사이에 놓여진 낙동강 하구둑 갑문을 지나서 남해로 흘러든다. 이 강에 합류하는 지류는 반변천(半邊川)·내성천(乃城川)·위천(渭川)·금호강(琴湖江)·밀양강(密陽江) 등 742개에 이른다. (중략) 본래 낙동이란 가락(駕洛)의 동쪽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산물·세미(稅米) 등의 운송로로 이용되었는데, 이때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 낙동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연려실기술〉지리전고(地理典故)편에도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했다." (브리태니커에서 인용) 위의 설명대로 낙동강(洛東江)은 가락국(駕洛國, 김해에 세워진 가야)의 동쪽에 있기에 낙동강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가락국은 경북 상주로부터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경남 김해와 부산을 포함하는,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위 세 번째와 네 번째 설명을 바탕으로 수도지맥의 의미를 더 구체화하면, 수도지맥이란 수도산 어름에 있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고령의 대가야(거창, 김천, 성주 포함)와 황강 북쪽 합천의 다라가야 (다라가야는 대가야에 통합었다가 신라에 562년에 멸망함. 절골봉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살피면 황강 북쪽 가에 있는 다라리 지역을 볼 수 있으며, 이 다라리가 다라가야의 중심지였으며 가야가 망한 뒤에는 현 합천읍으로 중심지가 바뀜)를 관통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산줄기가 흘러내리는 곳에는 가야의 역사와 문화가 흠뻑 배어 있다. 그러하니 이 지맥은 대가야지맥이라 불릴 수 있으며(김해의 가락국, 창녕의 비사벌가야 등이 빠지니까), 이 지맥을 줄기로 하고 이 강 유역을 바탕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이 지역 곧 가야에 대한 역사와 문화 이해가 필수적이다. 수도지맥을 타는 즐거움은 곧 가야 문화를 이해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다섯 번째 관심, 수도지맥 산행 시작이 언제였는데 왜 이제서야 마지막 구간을 산행하지? 산악회 안내문 종주 기간을 살피면 이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종주 기간 : 2009년 11월 1일 ~ 2010년 3월 21일(당일 10회)" 지난 해 11월 1일 처음 시작하여 올 3월 21일 마지막 끝맺음을 하였어야 할 이 지맥 산행이 늦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 산행 대열에 함께하지 못하였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다. 3월 21일 수도지맥 완주날에 산악회 경사가 있었기 때문 (산적님과 태진아님이 사돈을 맺는 날이 완주일과 겹쳐서 뒷날로 미룸)이 그 첫째 이유이고, 올 8월 15일 이 마지막 구간을 산행하려 했지만 참여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다시 미루게 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3월 21일 결혼식 행사에 참여하였고, 8월 15일 이 마지막 구간 산행에 참여하려다 취소되는 바람에, 대신 문경의 대미산을 산행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연유를 안고 있는 수도지맥 마지막 구간의 산행은 비록 처음 중간을 모른다고 하지만 내게도 의미가 충분히 있는 산행이라고 생각하였다. 2. 합천을 바라보는 시각 산행은 합천군 쌍책면과 고령군 쌍림면의 경계인 기미재에서 시작하여 합천군 쌍책면과 덕곡면의 경계를 이어타다가 합천군 청덕면 미곡리 말정마을로 내려온다. 이번 산행은 합천의 동북쪽면 산줄기를 이어걷다가 동남쪽 - 황강 북쪽, 낙동강 서쪽 - 으로 내려온다. 합천군 중심을 관통하는 황강을 서남쪽으로 끼고 동남향하는 산행이 이 마지막 구간의 산행 방향이다. 합천에 대한 관심이 아니 생길 수 없다. 합천의 뜻이 무엇일까? 합천은 한자로 陜川(협천) 좁은 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합천이라고 읽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합천군청을 뒤적였다. "현재의 합천은 조선시대 이후부터 호칭된 지명이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행정구역 개편 시 주(州)가 군(郡)으로 강등되면서 협천(陜川)이라 하였으며 협천은 좁은 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산이 많고 들판이 없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이 많다는 뜻과 부합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1914년 3월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초계와 삼가가 합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좁은 계곡 또는 좁은 내라는 뜻에 맞지 않다하여 '세 개의 고을이 合하여 이루어진 곳'인 합천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한자식 표기방법은 그대로 존속하나(협천陜川), 말할 때와 읽을 때는 '합천'이라고 한다고 전한다." (합천군청) 세 개의 넓은 고을이 되었다. 그러니 좁을 陜(협)이라는 한자 의미는 어울리지 않아 한자는 그대로 두고 발음을 합(陜)이라고 읽는다는 설명이다. 합천군의 의미가 그러하군. 합천의 인물은 누가 있을까? 인물 평가를 감히 누가 내린다는 말인가? 다만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당대를 풍미한 인물과 시대를 뛰어넘어 스승이 되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황, 이율곡, 기대승, 조식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영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다. 경상 좌도(낙동강 동쪽, 옛 진한 지역으로 신라)에 이황이 있다면 경상 우도(낙동강 서쪽, 옛 변한 지역으로 가야)에는 남명 조식(1501 연산군 7년~1572 선조 5년)이 있다. 남명 조식은 합천 삼가현 토동 출신이다. 이곳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합천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고향 토동에서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천왕봉을 우러르며 강학(講學)에 정성을 쏟은 학자이다. 그는 철저한 산림학자이다. 공직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오직 학문 수양에 정진한 학자로 후학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 중에 남명 제자들이 많다. 그러한 의병장 가운데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1535 중종 30년~1623 인조 1년)이 이곳 합천 출신이다. (브리태니커를 참조하였음) 우리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긴 日海 전두환 前 대통령 또한 합천 출신이다.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여 실권을 장악한 뒤 대통령까지 역임하였다. 수천억 원의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그 추징금, 백담사에 유폐, 그 이후 그의 행적을 잘 알고 있다. 합천과 관련된 문제는 일해공원(日海工園) 명칭과 관련되어 있다. 일해공원은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황강변에 소재한 공원이다. 2004년 8월 준공되어 완공,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으나 2007년 1월 29일부터 일해공원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공원의 명칭인 일해(日海)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라는 데 논란의 중심이 있다. (위키백과를 참조하였음) 인물의 평가에는 장단점이 나열된 공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생존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공정성이 엄정하기 어렵다. 그 평가는 후대에 더욱 엄정한 잣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구국의 혁명자인지 역사의 죄인인지 그 평가는 산골 깊은 곳을 흐르는 물처럼 맑아야 한다. 그러한 엄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인데 -그 인물의 행위에 대하여는 법적 범죄자 판결이 내려졌는데- 누군가를 기리는 공원을 세우고 그의 아호를 따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약육강식의 논리와 경제 제일의 구호로만 그를 기려야만 할까. 역사의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라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추징금과 관련하여 보인 행동은 참으로 오만방자하고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합천이 일해를 얼마나 바르게 사랑하고 있을까. 일해공원을 조성해야 할 당위성이 무엇일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와 이창동의 영화 <밀양>, <시인>을 읽고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다가 찬란한 햇빛을 보았다. 사랑이었다. 사랑의 진실성 앞에서 일해는 태양의 바다, 태양과 바다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으로 대표되는 합천의 명인 班列에 일해 전두환氏가 오를 것인가. 일해공원과 새천년 생명의 숲 공원 사이에 무엇이 가로놓여 있는가. 남명을 가없이 우러르는 나는 남명의 탯줄인 합천을 또한 우러른다. 황강 맑은 물에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기를 바랄 뿐이다. 3. 이동 경로 07:05 잠실 너구리상 앞 출발, 07:37 만남의광장 도착, 07:40 만남의광장 출발 08:07 호법분기점,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09:10 문경휴게소 도착 09:35 문경휴게소 출발, 10:09 선산 감천교, 10:11 경부고속도로 김천분기점 10:27 야산, 성주 나들목, 10:40 88고속도로 12번 동고령분기점, 10:56 가야요 11:03 양전삼거리, 11:10 회천교, 11:15 고령나들목 11:16 안림천, 11:21 기미재 도착, 11:26 산행 시작 4. 산행 후기 마지막 구간 합천 산행을 하기 전에, 김해와 창녕을 답사한 기억을 더듬고 수도지맥 의문점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조금은 달떴다. 성주, 거창, 합천군을 경계로 하는 가야산 산행과 해인사 답사도 기억 속에서 가물거린다. 오늘 산행은 합천의 황강이 중심이 되고 황강 유역 다라리에서 한 시대를 구가했던 다라가야를 상상하는 산행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으로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깥 풍경을 안온하게 즐긴다. 가을 들녘의 풍경은 몇 십 년 전의 유럽 풍경처럼 벼수확을 끝내고 네모, 동그라미 모양으로 볏짚들을 꾸려서 들판에 늘어놓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한 풍경은 이미 우리나라 농촌에서 일반화되어 있지만 어린 시절에 경험한 낟가리 풍경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기에 그러한 인상으로 비치는 것이리라. 그 안온과 평온은 발견의 기쁨과 새로운 깨달음에 의해 흥분으로 바뀐다.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선산을 지나치며 건너는 감천의 물줄기와 모랫벌, 성주나들목 근처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풍경, 동고령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 12번으로 들어서서 만나는 가야도기의 전통을 이어 도자기를 굽는 가야요 건물, 회천과 회천에서 낚시질하는 강태공들,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과 우륵의 고향 - 고령의 대가야 홍보물, 가야산에서 발원하는 안림천과 갈대 풍경, 밭에서 마늘 농사에 열심인 아낙네들의 정겨운 모습, 이 모든 풍경들에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날씨는 투명하게 맑다. 엊그제까지 쌀쌀하던 날씨는 햇볕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날씨는 고추말리기에 제격이다. 어머니의 고추 말리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이제는 연로하셔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고 일은 손도 제대로 못대시니 고추 말리는 일 또한 어림도 없다. 휴일마다 산을 탄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하는 불효자는 먼 남쪽 나라 다라가야의 옛 땅 합천을 찾아와서 이러쿵저러쿵 풍경에 감탄하고 옛 흔적에 흥분하고 있으니 오, 천신이시여 산신이시여! 크게 혼내 주시옵소서. 기미재를 올라서니 가을꽃의 대명사 구절초가 하얗게 반짝인다. 이번 가을 산행을 몇 차례하면서 구절초꽃을 많이 보았지만, 이곳 구절초만큼 잎이 크고 튼실한 녀석을 만나지 못했다. 구절초꽃은 이번 산행의 끝지점인 성산을 지나 말정마을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눈길을 끌었다. 또 하나의 가을꽃 쑥부쟁이는 흐드러지게 피어 마음을 풀어놓는다. 쑥부쟁이꽃이 떼를 지어 절정으로 피어있는 곳은 율원고개에서 郡도로 1번을 따라 다남산 갈림지점에 이르는 곳까지이다. 구절초는 대체로 듬성듬성 피어서 고적감과 한적감을 주는 데 반하여 쑥부쟁이는 떼를 지어 피어서 흥청거리는 느낌을 준다. 보통 들국화라고 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묘하게도 내게는 이렇게 상반된 두 느낌을 준다. 그 외에도 산부추꽃들이 보였는데 특히 절골봉을 지나면서부터 이 꽃들이 많이 보였으며, 노란 산국은 필봉 오름길에서 만났다. 또 보랏빛 용담꽃은 여러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는데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 풀들 사이에서 여러 송이들이 흩어져서 유난히 빛을 뽐내었으며, 파산등을 지나 절골봉으로 꺾이는 쌍묘가 있는 곳에는 무수한 꽃향유 꽃들이 진분홍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가을 풍경의 2인자 억새꽃은 서낭당고개를 올라서서부터 군락으로 피어나 가을 투명한 햇빛에 은빛으로 빛나며 바람에 하늘거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황강 청덕교 근처 퇴적층 모래섬(사주沙洲)에 군락을 이룬 갈대와 물억새꽃의 장관을 견줄 수 없다. 서녘에 기우는 햇빛을 받아 은빛 물결로 반짝이는 이 풍경은 눈이 부셔서 바로 볼 수 없었다. 이번 산행에서도 수많은 산봉들을 넘고 또 넘었다. 산봉에 이름에 붙어있는 것은 솜등산, 부수봉,필봉, 성산이었다. 솜등산, 이름이 예쁘다. 솜등이 무엇일까? 궁금하지만 분명한 뜻을 알 수 없다. 부수봉은 한자가 富樹峰으로서, 330여 년 전에 수목이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 제일 큰 부자가 이 숲을 소유하고 관리하였다 하여 이 산을 부수봉(富樹峰)이라 하였다고 합천군청 문화관광 사이트에 적혀 있다. 그렇다면 필봉은? 성산은? 인터넷을 뒤적여 보니 필봉의 한자는 모두 반드시 必자를 쓰고 있다. 보통 필봉이라 하면 붓 筆자를 써서 끝이 붓 모양으로 생긴 산봉우리를 이야기하는데 必峰이라니, 그렇게 쓰는 이유가 더욱 궁금해지지만 합천군청 문화관광 사이트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으며 성산에 대한 한자는 아예 언급이 없다. 聖山이라기보다는 城山이 될 듯싶지만 확실한 믿음은 없다. 이번 마루금 산행에서 풍경을 인상 깊게 조망한 곳은 어디인가? 모든 산님들이 대체로 일치하리라 생각하지만 각자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솜등산을 오르며 왼쪽으로 무성한 칡넝쿨이 있는 곳에서 가야산 줄기를 조망하는 것은 기미재에서 올라서며 처음으로 답답함을 떨칠 수 있어서 좋았다. 272봉을 내려서며 무덤군이 있는 곳에서 다남산 줄기와 부수봉 줄기 그리고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를 조망하는 것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꼬질한 소나무와 솎아베기하여 내버려진 검게 말라빠진 소나무 줄기들만 보며 산행하느라 어두워진 마음을,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환하게 달래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221봉을 내려선 무덤군이 있는 곳(삼각점이 있는 176.8봉 직전 고개)에서 부수봉과 산불감시초소 옆 소나무 두 그루를 조망하는 것도 가슴을 부풀렸다. 율원고개 위 납골당이 있는 곳에서 햇빛 환하게 빛나는 율원고개 풍경과 소학산, 그리고 다남산 줄기를 바라보며 도취하기도 하였다. 율원고개로 내려서서 이정표(옥전고분군 유물전시관)와 길 이름(오광대로)을 보고서야 나는 다라가야의 중심부에 서 있음을 깨달았으며, 영남 탈놀음의 양대 산맥(하회탈춤과 오광대놀이) 중의 하나인 오광대놀이의 발상지가 이 길 아래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율원고개 1034번 도로 서북쪽 성산리에 있는 옥전고분군은 다라가야 지배층의 무덤군이며, 그 반대편 동남쪽 아래 밤마리나루터는 오광대놀이의 발상지이다. 나는 발견의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郡도로 1번을 따라 걷지 않고 흥분하여 율원고개 오른쪽 절개지에서 이어지는 마루금으로 올라서서 옥전고분군의 위치를 가늠하며 사라진 다라가야 생각에 취했다. 산행 계획을 하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오직 황강과 다라리 지역만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율원고개 이정표의 지명과 길 이름을 통하여 이 지역이 더 구체적으로 내 삶의 현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지만 쑥부쟁이 즐비한 보랏빛 꽃들은 나를 더 흥성거리게 하였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여 다남산 갈림길을 지나 오른쪽 산길로 들어서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산봉인 236봉에 서니 사방이 탁 트여서 조망지로서 최적지였다. 고령의 대가야와 합천의 다라가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가야산이 동북쪽에서 손짓하고, 황매산이 서북쪽에서 실루엣으로 비쳐들고 동쪽에서는 소학산이 학춤을 추고 있고, 남쪽에서는 다남산과 부수봉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북쪽을 항하여 옥전고분군의 위치를 가늠하며 푸른 산빛 속에 황톳빛 산등성이를 주목하였다. 저곳이겠지? 이제 저곳을 찾아올 날이 있으리라. 이곳 산불감시초소봉(236봉)에서는 수도지맥 마루금과 주변의 첩첩으로 이어진 산봉들의 조망지로서는 최적지였다. 서낭당고개 위 억새풀꽃 흐늘거리는 밭, 말라비틀어진 담배줄기들이 서 있는 밭에서 바라보는 다남산 줄기와 그 아래 증촌과 송정마을 그리고 부수봉 산줄기 조망도 가을 산행의 마른 마음을 적시는 풍경이었다. 그곳에서의 조망 또한 산행의 즐거움을 흠씬 새겨 주었다. 그러나 대가야지맥이라 이름할 수 있는 수도지맥 최종 구간에서의 조망은 누가 뭐라 해도 다라가야의 다라리를 중심으로 한 들녘과 황강 물줄기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한 풍경을 조망하는 능선은 절골봉을 오르면서부터 오른쪽에 펼쳐진다. 그 능선의 오른쪽 아래는 다라가야의 식량의 젖줄, 비옥한 토지가 펼쳐져 있다. 이 들녘 삼면이 산봉에 둘러싸여 있고 황강 쪽으로만 트여 있어서(황강 남쪽도 산줄기가 막고 있음) 천혜의 요충지요 곡식 생산지라는 판단이 든다. 합천의 야로면이 다라가야의 무기 생산지라면, 황강을 옆에 낀 다라리를 중심한 이곳 들녘은 식량 보급소라고 할 수 있다. 이 능선을 이어타면서 지도를 펼치고 저곳이 다라리, 왕궁이 어디? 신라 세력이 황강을 타고 이곳을 공격할 때 다라가야 병사들이 방어한 산성이 황강 남북의 산봉에 있을텐데 그 흔적은 없을까? 호사가의 낭만적 비애에 젖은 상상은 다라리 들녘의 눈부시게 빛나는 옥토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날아가 버린다. 드디어 낙동강이 보인다. 성산 이르기 직전 왼편으로 낙동강이다. 그리고 황강 합수점도 보인다. 수도지맥은 황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이므로 황강과 낙동강 물을 어루만져야 할텐데. 촉각으로 어루만지지 못하면 시각으로라도 어루만져야 한다. 그 조망 지점의 최적지는 성산을 내려서서 오른쪽에 철조망이 있는 언덕, 산행 끄트머리여서 그 흥분이 가라앉을 법도 한데 오히려 가슴이 달떠온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물결, 황강 퇴적층 모래섬의 갈대와 물억새의 반짝거림, 청덕교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황강 물 그리고 강 건너 상적포를 휘돌아 낙동강에 흘러드는 물과 물의 다정한 만남의 풍경, 서녘에서 비쳐오는 가을의 투명한 햇빛, 나는 넋을 놓았다. 나는 풍경 속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때 다라가야 병사들이 황강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강력한 철기 갑주들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라가야 여인이 눈물 짓고 서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굽다리접시가 반짝 빛나다 풍덩 물에 빠진다. 다라가야는 없다. 서녘 햇빛에 반사되는 은빛 갈대와 물억새꽃에 눈이 부셔서 나는 눈을 부볐다. 나는 말정마을로 내려섰다. 4대강 사업이 펼쳐지는 황강변, 낙동강 살리기 20공구 현장, 낙동강으로 나아가는 방죽이다. 이곳에서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풍경의 수평적 조망도 좋다. 몸에 힘이 빠진다. '행복 4江' 깃발은 펄럭이고 작업 현장의 기계 소리는 우렁찬데 나는 흐늘흐늘 몸이 풀어진다. 이번 산행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은 칡넝쿨이었다. 이상스럽게도 이 구간에 칡넝쿨이 엄청나게 많았다. 특히 솜등산에서도, 절골봉에서도 그리고 산행내내 칡넝쿨과 칡잎이 무성하였다. 그리고 시든 칡잎들이 누렇게 말라있는 풍경은 마음을 메마르게 하였다. 나는 산행내내 이 칡넝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불효자 막놈을 천신과 산신께서 혼내주시려는지 칡넝쿨은 끊임없이 내 발을 걸어 휘청거리게 하고 자빠지게 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삐끗한 허리와 왼쪽 엉치뼈는 지금도 시큰거린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방죽길을 걸어 합수점까지 가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체력이 부족하여 제한 시간을 산행하는 데 다 써버렸기에 미실길에 있는 미곡리 말정 경로당에 도착해서는 그곳에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3-40분의 여유만 있었더라면, 산행 시간을 3-40분만 단축시켰더라면, 황강 물이 낙동강 물에 포근히 안기는 두물머리에 가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하여 가장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일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모든 일은 아쉬움이 남을 때 더 인상적인 것이라고 위안한다. 대가야지맥이라 이름할 수 있는 수도지맥 마지막 구간 산행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마음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지만 내 발길은 자꾸 뒤뚱거렸다. 가야의 넋들이 자꾸 나를 잡아챈 탓일까. 가야의 융성기는 낙동강 중하류를 지배하며, 낙동강을 따라 황강, 회천, 감천을 오르내리며 물산을 교역하고 강력한 철기를 생산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타지역에서도 철기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가야의 철제 무기는 더 이상 강점이 되지 못한다. 가야 세력 전체를 통제하는 강력한 권력을 지니지 못한 가야는 신라에 권력을 넘겨주고 632년에 망하게 된다. 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는 합천 야로면에 월광사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송백산악회 회장님 이하 산악대장님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산행한 분들께 행복함과 감사함을 전합니다. 수도지맥 영광스러운 완주자님들께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그렇구나.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인 협천(陜川)이 초계현과 삼가현을 합하고 나니
5. 영상 구성
06:49 잠실사거리 롯데백화점 앞 질스튜어트, 서울 G20 정상회의
패션 디자이너 질 스튜어트의 상품 광고,
그리고 그 옆에 세계 선진 20국 정상들이 세계 경제 문제에 대하여 11월 11-12일 서울에서 논의하는,
서울 G20 정상회의 개최 홍보물이 붙어 있다.
한국 경제는 세계 선진 20개국에 포함되며 20개국 정상회의의 의장 자격으로 이 회의를 개최한다.
그곳에서 바라본 미명속의 삼각산
서울의 鎭山인 삼각산은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럽고 든든하다.
09:10 중부내륙고속도로 창원방향 문경휴게소
10:09 선산의 감천(甘川)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김천을 관통하여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 서쪽으로 흘러든다.
감천은 김천을 대표하는 하천이다.
10:25 성주나들목 부근에서 바라본 가야산
합천, 성주, 거창, 고령에 걸쳐 있는 가야산 줄기는 불교 문화의 중심지이며,
가야국 건국신화인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와 천신 이비가 신화가 깃들어 있다.
10:56 동고령 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 함양광주 방향으로 들어서서 바라본
가야도자를 굽는 업체인 '가야요' 건물
경북 고령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인 고령토 생산지역으로,
옛 가야시대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를 보면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그중 대표적인 가야토기는 굽다리접시(高杯)로서,
신라의 굽다리접시와 다른 점은 목이 길고 굽다리에 뚫린 구멍이 어긋나 있는 것이다.
위의 가야요 업체는 가야도자의 전통을 잇는 도자를 생산하는 업체로 국내외에 판매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11:03 양전삼거리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유명한 고령 양전리 암각화(岩刻畵)를 만날 수 있다.
암각화는 주로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 면에 새긴 그림이다.
이 암각화는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 '알터마을'에 있으며,
청동기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경북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암각화이다.
11:10 고령의 회천(會川),
가야산에서 발원한 대가천과 소가천을 아우른 금천이 다시 안림천을 합수하여 회천이 된다.
회천은 여러 하천을 모았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 회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덕곡면 율지리 밤마리 마을은
오광대 가면극의 발상지로서 영남 오광대놀이는 이곳에서 퍼져갔다.
회천의 낙동강 합류점인 밤마리 마을은
북쪽으로는 고령군과 동쪽으로 창녕군에 자리잡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물산의 교류지여서 큰 시장이 섰다고 한다.
고령군의 홍보물 - 가야금의 고장, 대가야국 고령
대가야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고,
고령 출신의 우륵이 가야금 연주의 명인임을 자랑하고 있다.
대가야의 우륵은 가야가 망하기 전에 신라에 투항하여
충주의 탄금대에서 가야금 12곡을 창작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맨 뒤쪽에 보이는 가야산,
가야의 건국신화 정견모주와 이비가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산이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을 지닌 법보 해인사가 자리한 한국 불교의 성지이다.
11:16 고령의 안림천(安林川)
가야산에서 발원한 대가천과 소가천을 합류한 錦川이
가야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한 안림천을 합수하여 모듬내(會川)라는 이름을 얻는다.
11:17 밭에서 마늘 농사에 열중인 아낙네들 모습
11:21 907번 도로 경북 고령군 쌍림면과 경남 합천군 쌍책면의 경계인 기미재,
고령군 쌍림면 방향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방향
11:26 산행 들머리에서 산행 시작
11:45 솜등산을 오르며 왼쪽으로 바라본 가야산 능선
11:56 270.5m 솜등산
12:11 272봉을 내려서며 무덤군에서 바라본 다남산(왼쪽)과 필봉과 부수봉(오른편 뒤쪽 산줄기)
왼편 저수지는 아곡못이고 마을은 율원동 마을인 듯
무덤군에서 조금 내려서며 바라본 성산, 필봉, 부수봉 그리고 그 앞 오른쪽으로 산불감시초소
12:14 221봉 갈림길
12:29 221봉을 내려서며 바라본 산불감시초소(가운데 오른쪽 봉우리에 소나무 두 그루)와 부수봉
12:34 삼각점이 있는 176.8봉
12:42 율원재 위의 납골당
납골당에서 내려다 본 율원고개 모습, 합천군 덕곡면(왼쪽)과 합천군 쌍책면(오른쪽)의 경계
율원재에 세워져 있는 목장승 한 쌍과 돌탑
납골당에서 바라본 왼쪽 덕곡면의 소학산-학이 둥지를 짓고 앉아 있는 모양의 산이라
소학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이 도로가 오광대(五廣大)길로서 이 길을 따라가면 합천군 덕곡면 율지동 밤마리에 이른다.
밤마리마을은 회천(會川)이 낙동강(태백의 천의봉에서 발원함)과 합수하는 낙동강변의 포구마을로
수로교통의 주축을 이루었다.
밤마리나루터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로(要路)였으며, 7
0년 전만 해도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로 창녕, 합천, 고령의 교역중심지로
하루에 수없이 많은 배들이 낙동강을 따라 드나들던 곳이다.
그래서 경상남도는 물론 전라도의 상인들까지 밤마리(율지栗旨)나루터에 모여
1일과 6일에 큰 장을 열어 성시(盛市)를 이루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큰 장이 열리니 광대들이 모였고 장터에서는 자연스레 오광대의 연희가 펼쳐졌다.
그리하여 밤마리나루터는 오광대 가면극의 발상지로서,
낙동강 서쪽인 경상우도의 탈놀음인 오광대탈춤이 이곳에서 생겨나서 영남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의 탈놀음은 안동 하회탈춤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이 길에 오광대로(五廣大路)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경남여성신문, 강창원 기자의 "낙동강 회천(會川), 오광대 발상지 밤마리(栗旨)" 참조)
율원재에 내려서서 바라본 율원재 삼거리
이곳 이정표에서 옥전고분군유물전시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옥전고분군은 가야의 지배층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덕곡으로 이어지는 길 이름이 오광대로라고 이정표에 있다.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산23에 있는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은
합천지역 가야국(伽耶國)의 지배세력이 남긴 고분군(古墳群)이다.
이 고분군은 합천과 거창지역을 유역권으로 하는 황강이 낙동강 본류와 합쳐지기 직전의
하류의 관문지역에 위치하며 본류와는 약 6k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의 지세는 남쪽으로는 황강과 해발 200m의 단봉산을 사이에 두고 초계분지와 접해 있으며
양 지역은 단봉산과 옥두봉 사이의 협곡을 통해 내왕이 가능하다.
북쪽으로는 해발 200m 정도의 고개를 넘으면 협곡을 통해 고령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있다.
고분군은 몇 개의 능선에 나뉘어져 분포하고 있으며 전체로는 千여 基에 달한다.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1986년부터 91년까지 5차에 걸쳐 발굴하여 6권의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합천문화원)
13:03 도로에서 오른편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 능선으로 들어섬
13:15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236봉
이곳에서 사방을 조망하며 여유를 즐김
그곳에서 살핀 기미재(맨 왼족), 솜등산(왼편 봉긋한 산봉), 272봉, 율원재
학이 둥지를 짓고 앉아 있는 모양의 488.8m 소학산
기미재, 솜등산, 272봉, 그리고 맨 뒤편의 가야산 줄기
당겨서 바라본 가야산 줄기, 바로 앞 무덤군이 혹 옥전동고분군일까?
옥전동 고분군은 옛 가야의 지배세력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산으로부터 시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맥 마루금
수도지맥은 옛 대가야지역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산줄기이므로 대가야지맥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왼편으로 황매산 방향 조망
쌍묘가 있는 봉우리에서 왼쪽 절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더 왼편으로 보면 부수봉(움푹 들어간 왼편 봉우리)으로 부터 필봉, 성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330여 년 전에 수목이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 제일 큰 부자가 이 숲을 소유하고 관리하였다 하여
이 산을 부수봉(富樹峰)이라 하였다고 한다.
13:42 다남산(왼편)과 부수봉(오른쪽 움푹 들어간 왼편 봉우리)
옛 전설에 의하면 이 산에 와서 정성을 들이면 아들을 얻었다 하여
다남산(多男山)이라 칭하였다고 하며,
산 줄기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데서 多南山이라 칭한다고도 한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이 봉우리에서 점심을 먹고 사방의 풍경을 조망하며 출발함
13:56 서낭당고개를 올라선 곳, 가장자리에 억새가 무성한 밭 위에서 바라본 다남산과 증촌마을
14:01 무덤4기가 있는 곳
14:03 파산등
14:11 쌍묘가 있는 갈림길, 마루금은 왼쪽으로 이어짐
14:21 절골봉을 오르며 내려본 풍경, 절골 소류지와 증촌마을인 듯
14:23 절골봉 오름길의 칡넝쿨
이번 산행내내 칡넝쿨이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다.
14:22 절골봉에서 내려본 절골 소류지와 진정리 그리고 왼편 산기슭 너머의 다라리
14:26 다남산 아래 평촌마을인 듯
14:31 쌍묘가 있는 갈림길에서 절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14:38 앞으로 바라본 모습, 왼편에 산판길과 287.8봉(무덤3기가 있는 봉) 능선길이 보임
햇골과 다라리 들녘 그리고 끝에 황강변
합천은 옛 가야 지역으로 다라가야라 불렸다. 다라가야의 중심지가 저곳 다라리가 아니겠는가.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멸망한 뒤 이 지역의 중심지는 다라리에서 현 합천읍으로 바뀐다.
14:42 삼각점이 있는 326.7봉
14:48 필봉을 향하며 바라본 풍경
마루금에서 오른쪽으로 비켜난 311.6봉, 화동저수지 그리고 모리들을 굽이도는 황강
14:50 진행할 마루금의 산판길과 무덤 3기가 있는 바로 앞의 287.8봉(뒷봉)
14:52 필봉에서 바라본, 마루금에서 서쪽으로 비켜나 있는 311.6봉
15:00 산판길을 오르며 뒤돌아 본 모습
필봉(왼편), 그 오른쪽 삼각점이 있는 326.7봉, 그 뒤쪽이 380.6봉, 그 오른편 산봉이 부수봉인 듯?
15:02 돌무지가 있고 무덤3기가 있는 287.8봉
15:38 성산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바라본 화동저수지와 성태리
그리고 앞에 보이는 낮은 산줄기 밑으로 흐르는 황강
당겨서 본 화동저수지, 성태리, 아랫담과 모리, 황강변 풍경
15:57 성산 직전에서 내려다 본 조망 - 모리들과 질매나루를 휘돌아 흘러내려오는 황강
16:01 250.7m 성산 정상
16:14 성산을 내려서며 동쪽으로 바라본 낙동강
황강이 청덕교 아래를 흘러 왼쪽으로 굽이돌아 낙동강으로 합수하는 지점이 보인다.
16:38 말정으로 내려서기 전 언덕에서 내려다본 황강 물줄기
황강 저 위쪽으로 성태리와 다라리가 보이고, 강 모랫벌엔 갈대와 물억새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같은 곳에서 바라본 황강과 청덕교(靑德橋)
합천군 청덕면의 남북을 잇는 다리, 푸른 덕의 다리라는 의미가 좋다.
푸른 덕은 남명 조식의 덕과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6:41 미곡리(尾谷里) 말정마을 그리고 황강과 낙동강 합수점(오른쪽 끝)
말정마을은 말이 쉬어가는 마정(馬亭)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으며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이자 청덕면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관문이다.
예전에는 나루터로서 주민을 실어나르는 나룻배가 있었으나
철교가 가설되고 2003년 청덕교가 완공된 이후부터 나룻배가 사라졌다.
16:42 4대강 살리기 사업 현장 모습
4대강 사업의 논란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흐릿한 판단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4대강 살리기 깃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