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선(宋秉璿)
* 생몰년대 : 1836(헌종2)∼1905(광무9)
* 출생지 : 대전 동구 성남동
* 출처 : 《한밭인물지》(대전직할시, 1993)
* 배향 : 문충사(文忠祠, 동구 용운동)
구한말 학자, 순국지사. 생존연대는 1836년(헌종2년)에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본가에서 태어나 1905년(고종42년) 12월 30일에 성남동 석남촌(石南村) 구제(舊第)에서 순절(殉節)하기까지 70세를 재세하였다. 주거지는 역시 고향 대전시 본가이었다. 묘소는 전북 옥구군 임피면 전중리(沃溝郡 臨陂面 田中里)이다.
향배하는 사당은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龍雲洞)의 문충사(文忠祠)와 성암사(聖巖祠), 만주사(晩洲祠), 경양사(景陽祠) 등이다. 자(字)는 화옥(華玉)이며 호(號)는 연재(淵齋)이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이다.
은진공 천익(天翊)이 그 시조가 되며 고려의 판사(判事) 대원(大原)이 있었고, 조선조에 쌍청당(雙淸堂) 유(愉)가 연재의 중시조가 된다. 쌍청당으로부터 8세 후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드러난 학자요 정치가였고, 그 우암의 9대손이 연재이다.
고조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환실(煥實)이요, 증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된 직규(直圭)이며, 조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흠학(欽學)이며, 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면수(勉洙)이다.
가통(家統)과 학통(學統)이 완전히 우암(尤庵)에 일치되고 있다. 참의(參議)를 지낸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조카로서 그의 동생이요 역시 같은 순국(殉國)지사인 병순(秉珣)과 함께 백부 달수(達洙)에게서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다. 스승인 백부가 작고함에 가학(家學)이 기울어갈 것을 염려하여 더욱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종백부(從伯父) 근수(近洙)와 외조부의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독서하는 여가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兆祖), 퇴계(退溪) 이황(李晃), 율곡(栗谷) 이이(李珥),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등 오현(五賢)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1876년(고종13년)에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로 책을 편찬하였으니 이것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다. 1875년(고종15년)에 경학(經學)의 천(驚)으로 태릉(泰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뒤에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1880년(고종17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 痲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고종이 은사를 베풀고자 하여 높은 벼슬로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또 1883년(고종20년)과 1884년(고종21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에 선임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다만 그 후에 의제변개(依制變改), 즉 1895년(고종32년) 8월에 조신(朝臣)의 의관을 양복으로 바꾸는 것을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두문자정(杜門自靖)하였으며, 이듬해 옥주(沃州)의 산속 물가에 누벽정(樓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陞品)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고종41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상복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고종42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할 것과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그리고 계속하여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해 음력 12월 30일 국권피탈(國權被奪)에 분통하여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북쪽을 향해 네번 절하고 음독자살 하였다. 그의 순국절의 정신의 실천을 바로 그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연재는 옛부터 유학사상(儒學思想)의 줄기가 되어온 춘추 대의정신(春秋大義精神)에 연원을 둔 도통(道統) 전수이론을 특별히 강조하고 신봉했던 선조 우암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을 철저히 이어받았고 그 정신적 기반위에 학문적인 공적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근사속록(近思續錄)》의 편술은 바로 한국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은연중에 밝혀놓은 그 증좌이다. 이러한 도학정신은 그의 학문적 생애에 전반적으로 일관했던 것으로서, 그는 《근사속록》에 이어 46세때 한국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에 의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위시하여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영조39, 1763년∼순조33, 1833년)에 이르기까지의 그 역사적 정통성을 상세하게 직접적으로 밝힌 《동유연원록(東儒淵源錄)》을 편집하였다. 또 그 학문과 사상이 완숙기에 해당되는 65세시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삼국통일기로부터 조선조 말엽에 이르기까지의 천 수백여년간의 한국역사를 심판하는 입장에서 그 학문적 총결판으로서 《동감강목(東鑑綱目)》 총 27권을 저술하였다. 이는 역시 우암의 전 생애를 통해 내세웠던 춘추대의정신(春秋大義精神)을 근간으로 했으리라고 보아진다.
연재의 학문적 업적은 물론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순국절의정신(殉國節義精神)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역시 선조 우암이 주장하던 춘추대의정신(春秋大義精神)의 계승과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에 근거하였으며, 또 을사조약을 몸으로 막아보려는 항일순국정신(抗日殉國精神)의 실천으로 요약되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연재의 학문사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연재의 춘추대의정신의 계승적 측면을 그의 언론을 통해보면, 그는 공자와 주자와 우암이 도통의 매듭이라고 말한다.
우암이 그 큰 매듭에 해당되니 왕도(王都)가 북호(北胡)의 침략으로 함락됨에 존명(導明)의 대의(大義)를 지켜 만동묘(萬東廟)를 화양동(華陽洞)에 건립함으로써 주자(朱子)를 계승하여 공자의 춘추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밝혔으니 이것이 어찌 위대한 매듭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고금의 역사를 일관하여 훑어본다면 위 아래로 수천년에 걸쳐서 춘추대일통에 참여할 수 있는 인물은 겨우 3명뿐이라 하겠으니 바로 공자, 주자, 송자(宋子)가 도통에 있어 계왕개래(繼往開來)의 도(道)를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는 요순우탕문무(堯舜禹 文武)의 도(道)를 계승하여 후대의 주자의 학을 열었으니, 이는 가을 국화가 봄꽃의 절기를 이어받아 다시 봄꽃을 피워내는 절기를 여는 것에 비유 할 수 있으며, 주자는 다시 공자의 도(道)를 이어받아서 우암의 학을 열었던 것이니 이는 또한 매화가 국화의 향기를 이어 받아서 다시 봄꽃을 피워내는 절를 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볼 때에 선성(先聖)의 도(道)를 계승하여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주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천지의 기강이 무너지고 인물이 전혀 없어 어지러운 양상이 바다처럼 깊고 넓어 그 끝이 아득하므로 마침내 공자, 주자, 송자의 세 스승의 도(道)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는 커다란 변란의 국면에 처하였으니…… 여기에 만약 인물이 있어 도통연원(道統淵源)에 따라 위로는 과거의 세 스승의 도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미래의 무궁한 학문의 길을 열게 하므로써 천도(天道)의 순환(循環)하는 이치가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니 어찌 자신의 임무를 알지 못하겠는가?
이처럼 연재는 천도(天道)의 「순환지리(循環之理)」를 인간적으로 자각하므로써 「성인지도(聖人之道)」가 전승되었고 이의 역사적 전통성에 의해 전개된 것을 도통으로 보았으며, 이것의 전통인 도통(道統)으로 문화적 정통을 이은 것이 춘추대의정신으로 공·주·송(孔·朱·宋)세분의 성현을 최고의 봉우리로 생각하는「계왕개래(繼往開來)」의 매듭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교와 서세(西敎 西勢)의 침투로 인하여 춘추대통(春秋大統)이 위협받으며 대의정신(大義精神)이 없어져 가는 근래의 위기에 처해서는 다시금 춘추대의정신을 밝혀서 선조인 우암의 학통을 계승하고 후래의 학자들에게 무궁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 연재 자신에게 부여된 절대적 사명으로 스스로를 매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재의 이러한 춘추대의정신을 계승하여 결국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대의(大義)를 취하는 항일순국정신(抗日殉國精神)을 실천에 옮겨 계왕개래(繼往開來)의 결실을 보게한 그 사상적 근거는 역시 척사위정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로 그의 척사위정사상(斥邪衛正思想)에 대하여 살펴볼 순서가 된 것이다.
이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은 본시 한말(韓末)의 후기 성리학이 다시 일어서면서 대체로 율곡·우암의 학통과 관련이 깊은 기호(畿湖)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정조16, 1792년 고종5, 1868년)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문화적 정통성을 중시하는 춘추대의정신에 입각하여 처음으로 주장한 이론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한말(韓末)에 화서(華西)를 연원으로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창의호국(倡義護國)운동을 전개하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연재도 역사적인 연원은 우암에 두었다고 할 것이나 사회적인 횡적 영향은 화서(華西)의 문인들과 교류가 많은 까닭에 없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그의 위정척사의 사상은 역시 그런 위정척사의 논리와 학적이론체계와 관련되어 성립되었던 것이다.
연재의 위정척사사상도 춘추대의정신으로서의 성인(聖人)의 도(道)와 이적(夷狄)의 도(道)를 구분하는 화·이(華·夷)의 구별(華夷之辨) 논리를 이어받아 인간과 금수(禽獸)로 엄격히 구별하는 인수지판(人獸之判)의 논리로 심화시킨 논리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이론체계였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역사적 상황변화에 있는 것으로 종래의 원(元)나라와 청(淸)나라에서 주어졌던 충격은 국가적 민족적 자주성까지도 완전히 부정되는 침략이 아닌 동시에 같은 동양문화권 안에 같이 생존하면서 오직 그 문화적 정통성의 차이만이 존재하였던 까닭에 화이지변(華夷之辨)에서 느껴지는 자주성의 위기의식이 유교문화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문화적 자위의식(自衛意識)의 근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반해 그 당시 서구열강으로부터 주어지는 서학(西學)과 서세(西勢)의 충격은 일본 제국주의를 통한 제국주의 침략세력으로 변하여 국가적 민족적자주성과 자존의식까지 완전히 말살되는 문화권(異質文化圈)을 근거로 하여 그 침략세력이 세계로 팽창되는 까닭에 인수지판(人獸之判)에서 느껴지는 위기의식은 국가적 민족적 자주성과 자존의식에 아울러 유교문화적 도덕적 전통성까지도 지키려는 자기방어의식이 기본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연재는 이러한 한말의 역사적 상황변화에 따라 우선 선조인 우암의 논리방식을 이어받아 심화시킨 인수지판(人獸之制)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그 학문적 바탕을 견고히 하는 동시에 이론적 측면에서는 우암의 존화양이(導華壞夷)이론에 의거한 존명대의(導明大義)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위정척사(衛正斥邪) 이론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냈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연재는 화이·인수(華夷人獸)의 의식판별에 의거 중화문화(中華文化)와 이적문화(夷狄文化), 그리고 사람의 도리와 금수의 도를 분류하는 동시에 중화문화의 이적화(夷狄化), 이적이 다시 금수(禽獸)로 변환 되어가는 시대적 타락상을 통탄함을 그의 여러 저술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오늘날의 학문하는 사람은 오직 의리와 사리를 판별하고(義理學私利之判別), 성인의 도와 금수의 도를 분변 할 수 있는(聖人道與禽獸道之分辨) 논리를 밝히는 데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때의 인수지변(人獸之辨)의 논리를 근거로하여 성립된 사람과 동물의 개념에 있어서 사람은 성인(聖人)의 도리로서의 문화적 전통과 도덕적 가치를 가진 현실적 역사적 인격주체 인 우리 민족국가자체라면, 동물이란 금수(禽獸)의 도로서의 문화적 전통에 근거한 완력적 힘으로서의 서교(西敎)와 서세(西勢)의 침략성 그 자체만을 뜻하는 것이며 서학(西學)의 과학적인 서양개념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인수(人獸) 판별 논리이므로 우리 한민족의 국가의 실체는 「정(正)」이요, 서양열강의 힘에 의한 침략세력은 「사(邪)」라는 상황규정에 따라 정(正)의 도(道)는 보호되고 사(邪)의 세는 항쟁배척(抗爭排斥)되어야 한다는 위정척사이론의 사상체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에 있어서 위정척사이론은 70생애에 불후의 업적으로 남을 만하고 또 일제의 침탈을 예견한 시기에 있어서 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고종에 게 「선조인 우암은 화·이(華夷)를 분별하는 존양대의(導壞大義)를 위하여 죽었듯이 후손인 자신은 인수(人獸)를 판별(判別)하는 항일순국(抗日殉國)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죽을 것」이라고 상소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벽사설(闢邪說)」이란 논설을 쓰고 여기서 서학(西學)을 배척하며 혹은 선비정신을 진작시켜 서구열강과 일본등과의 통상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다. 이리한 일련의 위정척사사상의 이론체계에 바탕하여 그의 일생은 실천의 생애였다고 할 것이다.
그의 주요 사상과 행적의 세번째 주제는 항일순국정신의 실천이라 할 것이다.
그가 예견한대로 1905년에 이르러 일찍부터 팽창되던 서교(西敎)와 서세(西勢)의 물리적 힘을 배경으로 子체화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우리 한민족의 문화적 정통성과 국가적 자주성을 박탈하는 참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망국의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로 밤을 새우기도하고 수일간을 절식(絶食)하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항쟁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천하에, 고금에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멸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왜적앞에 머리를 숙여 생존의 요행을 도모하기보다는 차라리 군신, 상하가 합심하여 힘을 길러 항쟁하다가 다같이 종사(宗社)를 위해서 죽는 것이 도리어 왜적이 강요하는 조약을 수락하는 것보다는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이왕에 나라가 망할 바에는 차라리 항쟁 순국하여 대의정신만이라도 지켜야 됨을 강조하고 을사오조약을 파기해 버리고, 매국오적신의 처단을 통하여 대의(大義)를 천하에 밝힐 것을 주상(奏上)하였다. 고종은 물론 내심으로는 연재의 주상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결단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사세의 흐름이 종국으로 치닫게 됨을 알고 항일 순국을 실천함으로써 대의정신을 천하후세에 천명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우암의 사당과 묘소에 참배 고유(告由)한 다음, 직접 알현 상소하여 말하였다.
나라가 보존되면 성인(聖人)의 도(道)도 더불어 함께 보존되며 나라가 망하면 성인의 도도 더불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망하였다고 말하는 것인즉, 저는 생각컨대 한갓 왕국이 망했을 뿐만 아니라 유구하게 전승되어 온 성인의 도(道)도 더불어 같이 망하였으니 나라와 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신(臣)이 무슨 낯으로 살겠습니까?
라고 상주(上奏)하였다. 이 의미는 그의 주장대로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국가적 정통과 도의 문화적 정통이 모두 멸망됨이 불보듯 뻔한 일임을 역설한 것이며, 나아가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직접 순국절의(殉國節義)를 몸소 실천할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국가와 문화의 정통성을 회생시키는 정신적 씨앗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상소의 목적을 달성치 못한채 도리어 일헌(日憲)에 강제 납치되듯이 향리로 이송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대전에 내려오게 되자 사저로 가지 않고 우암과 백부 수종재(守宗齋)의 강학소(講學所)였던 석촌구저(石村舊第)로 직행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도(道)가 멸한 오늘에 이르러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한발자국을 더 걷는다면 한 발에 해당하는 욕이 있을 것이며, 두 발자국을 더 걷는다면 두 발에 해당하는 욕이 있을 것이니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더 옮기지 않을 것이다」하고 얼마 안 가서 그 아우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殉)과 여러 자질(子姪)을 차례로 불러 유서를 전하였다.
그리고 문인들에게는 「시서사동지서(示書社同志書)」라는 제복으로 글을 남겼다. 그 핵심적인 의미를 일부를 소개하므로서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재덕(才德)이 부족한 내가 선조(先祖)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성현의 글을 읽어 거칠게나마 춘추의 대의를 들어서 깨달았더니, 이에 화하(華夏)가 이적(夷狄)으로, 이적이 다시 금수(禽獸)로 타락하여 인류의 도리가 멸망된 오늘에 이르러서는 춘추대의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들을 곳이 없으니 재앙의 액운이 한결같이 어제 이렇듯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는가?…… 우리 유학(儒學)의 씨앗이 내 몸에 이르러서 멸망되었으니 나는 다만 한번 죽음으로서 여러분 앞에서 물러가노라……그러나 무릇 박괘(剝卦)의 음기(陰氣)가 극성하면 복패(復卦)의 일양(一陽)이 다시 생겨나니 비운(否運)이다 가면 태운(泰運)이 도래하는 것은 천리(天理)의 상도(常道)니 오직 여러분에게 바라기는 오늘의 비운(否運)을 보고 영원히 재기(再起) 회생(回生)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금만큼이라도 의지와 기개를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바라며……우리의 도(道)를 거의 끓어진 데서부터 다시 붙들어 세우며 국가의 맥을 이미 멸망한 데서부터 다시 계속하여 이어 나간다면 반드시 엄동의 설한풍(雪寒風)은 문득 물러가고 만물이 회생하는 봄이 오리라……
그리고 그는 국왕에게 유소(遺疏)를 남겼던 것이니 여기에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슬픕니다. 친일의 제적(諸賊)을 처형하지 못하고 강제조약을 파기하지 못한다면, 500년 종사(宗社)가 오늘에 망해버리고 삼천리 강토가 오늘에 없어지며 수백만의 백성이 오늘에 멸망하고 오천년의 도맥(道脈)이 오늘에 끊겼으니 신(臣)이 오늘날에 있어 또한 살아서 무엇하오리까? 차라리 죽어서 역대의 선왕(先王)과 선성현(先聖賢)을 지하에서 모심으로써 춘추대의를 저버리지 않으려 하나이다. 그러하오니 업드려 빌건대 성상(聖上)께서는 국사(國事)를 통찰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죽음으로써 종사(宗社)를 지키겠다는 정대(正大)한 의리를 확립시키고 모든 간적(奸賊)을 처형하여 왕정의 권위를 펴시며, 강제조약을 폐기하여 국가주권을 회복하시고, 인재를 가려 직무를 맡기시어 우리백성을 잘 보호함으로써 종사를 영원히 지키시고 도맥(道脈)을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다시 붙들어 이으신다면 신이 죽은 오늘이 바로 신이 다시 태어나는 생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몸으로써 도리(道理)를 따라 바침은 선비의 직분이다. 내가 이제 왜적의 괴수에게 굴욕을 당하였으니 의리상 구차스럽게 삶을 구할 수 없다. 내가 죽은 뒤에라도 마땅히 집을 보존할 도리를 강구할 것이며 몸가짐을 삼가하고 처세를 겸손하게 하며 책을 읽어 의지를 지켜서 선세(先世)의 덕을 더럽히지 말고 내가 황천에서 바라는 바를 위로하여 주는 것이 지극히 옳을 것이니라.
또 유훈(遺訓)으로 자손에게 주기를 「초식(草食)을 하고 산간물을 마시면서라도 몸을 닦아서 천명(天命)을 기다리며 선세(先世)의 교훈을 삼가 지켜서 집단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성인의 도통(道統)의 의식과, 춘추대의정신을 죽음으로써 천하에 천명함으로써,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 죽음의 씨를 묻음으로써, 또 후손들에게 유훈을 남김으로써 역사속에 거의항쟁운동(擧義抗爭連動)과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의 정신적 기반을 세웠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侍婢)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는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순국한 후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1914년 충북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향배하였으며, 1970년 대전시 용운동에 이건된 용동서원(龍洞書院)에 향배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 輯)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자료 : 淵齋集》
《南明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