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Vietnam War)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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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반도의 코뮤니즘과 베트남전쟁의 배경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에서는 한반도에 이어 인도차이나가 냉전체제하에서 열전(熱戰)을 치르는 무대가 되었다.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미국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로부터 베트남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던 호치민(胡志明)이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강행했다.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도 급진주의적 내셔널리즘은 대체로 공산주의와 결합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은 민족해방의 에너지를 증폭시켜 운동의 통합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었으나 반면에 경제, 정치, 사회의 개발을 위한 기본 전략을 왜곡시켜 '독립'이나 '혁명'의 성과를 오히려 파괴하고 민족의 비극을 크게 증폭시키기도 했다.
대전 후 미국의 대부분 지도자는 미국의 독립선언 정신과 또한 미국식으로 이해한 자유와 민주주의 때문에 공산주의자임을 선언하고 있었던 정치 지도자의 운동을 두려워해서 그 운동이 그 나라의 체제뿐 아니라 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크게 변화시킬까 봐 과도한 간섭을 되풀이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 나라에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에 의해 혁명이 성공하면 그 영향으로 같은 현상이 이웃 나라에서도 발생한다는 '도미노 이론'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반면 소련이나 중국은 아시아 내셔널리즘을 이용해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아시아에서 그들의 세력권을 확장하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도자들은 아시아에서의 여러 세기에 걸친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가 낳은 경제적 침체가 바로 아시아의 내셔널리즘과 공산주의를 결합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참전 배경으로 '산군복합체(産軍複合體)'의 이익을 위한 군수산업의 압력으로 20세기 후반의 미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일부 학자가 있으나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단순한 경제결정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체제의 변화 없이는 정책을 변경할 수 없다는 '체제환원론'은 그 자체 19세기형 사고의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많은 민족이 혼재하여 정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어느 국가든 여러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다. 베트남도 90% 이상 '킨(京)'이라는 베트남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외에도 53(종)의 민족이 혼재하여 정주하고 있다. 킨족이 정주하고 있던 북부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고대로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베트남인들은 기원전 2세기 중국의 한(漢)제국 이래 중국역대왕조의 통치에 대항해서 되풀이하여 민족적 반란을 일으켰다.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점령당하기 전에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Indochina)'란 인도와 차이나의 중간에 있어 양방의 문명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는 뜻의 유럽인 조어(造語)였다. 벵골 만과 남중국해 사이의 거대한 반도인 인도차이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미얀마1) 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포함한 '영국령 인도차이나', 그리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열강의 이해에 끼여 간신히 독립을 유지한 태국으로 구성된다.
인도차이나는 1940년 이후 '남진(南進)'을 단행한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주장한 '대동아 공영권'의 중추 지역으로 부상했다. 일본이 호칭하는 '대동아전쟁'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했을 뿐 아니라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알류샨, 하와이에까지 전투를 확산했다. 일본이 점령한 인도차이나에서는 일본군의 무단정치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연합국과의 전투에 휩쓸려 다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30년 호치민에 의해 결성된 베트남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곧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그들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3국 전토에 코뮤니즘 운동을 확대하려 했다고 간주된다. 1945년 대전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3국으로 분립된 이후에는 각 민족의 독자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1951년에는 각국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내셔널리즘과 코뮤니즘이 결합한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에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2) 은 특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두드러져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치렀으며 '일본 파쇼의 타도'라는 목표를 위해 일본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1945년 3월 일본군은 베트남에 잔존해 있던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하고 쿠엔조의 파오 다이 왕을 옹립하여 베트남 왕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의 패배는 이미 확실해져 있었다. 이 틈을 타서 베트남 독립동맹은 총궐기를 계획했다. 8월에 일본군의 항복과 함께 베트민은 하노이, 사이공 등지에서 혁명 권력을 수립했으며, 9월에는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북부를 지배했던 호치민의 민주공화국에서는 1846년 1월 최초의 총선거가 거행되었다. 총선거에서는 호치민이 지도하는 베트민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정치적 배려에 따라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했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는 베트남 국민당이 베트민과 협력하여 연립 정권을 조직했다.
같은 해 3월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 정전협정을 위한 가(假)협정이 성립되었다. 1952년까지 군사기지를 제외하고 모든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것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로서는 북부 베트남을 무력으로 지배하기까지의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본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교섭이 계속되었으나 진척되지 않았다.
1946년 10월 프랑스군이 북부의 항구 하이퐁에 상륙했으며 11월에는 중국측 국경에 가까운 랑손에서도 프랑스군과 호치민의 공화국군이 충돌했다. 프랑스 함대가 하이퐁을 폭격하여 다수 시민이 살상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프랑스 측은 10만의 군대를 투입하여 군사적으로는 우위를 차지한 듯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군대의 장교와 하사관은 본토인이었으나 일반 병사는 현지에서 징집된 베트남인이었다. 민주공화국 측에서는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농민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했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은 민주공화국군을 배후로부터 공격하기 위해 라오스 국경 근처의 디엔비엔푸를 공격했다. 하지만 반대로 민주공화국군에 포위되어 격전을 치른 후 항복했다.
세계대전 중 독일과의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가 최근까지 독일에 지배되었던 형편에서 내셔널리즘에 따라 고양되어 있던 식민지 지배를 실력으로 부활시킨다는 것은 애초부터 시대착오적인 착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프랑스를 지원했다. 반공주의적이며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미국은 하노이 민주공화국이 아니고, 1949년 프랑스가 남베트남의 사이공에 옹립한 파오 다이 정부를 승인했다. 또한, 미국은 이 정부에 1950년 6월 이후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군사원조고문단을 사이공에 파견했다. 프랑스도 미국의 원조 없이는 베트남과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었다.
1954년 5월 8일 스위스의 쥬네브에서 인도차이나 4개국3) 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의 9개국에 의한 극동평화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함께 제의된 한반도 문제에는 별 성과가 없었으나 인도차이나 문제는 정전을 향한 협의가 진행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새 수상으로 취임한 망데스 프랑스는 '1개월 이내 정전'을 공약했다. 한국전쟁에서 물적, 인적으로 큰 손해를 입은 중국은 북베트남에 정전 실현을 위해 압력을 가했다. 7월 7일 미국이 지원하는 고딘디엠이 파오 다이 국왕 산하의 남베트남 수상으로 취임했다. 북베트남은 무력에 의한 통일을 단념하고 남베트남 내부로부터의 변혁을 통해 통일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타협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 베트남이 군사를 배치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1956년 7월 전국적 선거가 약속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과 미국은 최종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1954년 7월 쥬네브 협정에 따라 비록 남북 분단은 남아있었으나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의 프랑스로부터 독립은 승인되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정권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이 지역에 직접적 개입을 시작했다. 미국의 동기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제국주의(帝國主義)와는 다른 것이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지는 않았다. 베트남전쟁에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미국의 제국주의'라는 비난의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정당한 평가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끔찍한 우행(寓行)으로 평가된 베트남 참전의 기본적인 원인은 제국주의적 야심이 아니라 서방 지도국가로서의 정치적 영향력 및 군사적 통제력에 대한 지나친 과신과 천진한 민주주의적 열정이었으며, 그로 인한 급진적 공산주의 형태로 표출된 아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오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발발
1964년 8월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 연안에서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군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 미군은 반격하여 적 함정 2척을 격침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보복으로 미 해군의 항공기가 북베트남을 공격하여 초계함 25척을 파괴했다. 또한 4개 군대의 기지를 공격하여 석유 저장소를 파괴했다."라고 발표했다. 이것이 '제2차 인도지나전쟁', 즉 베트남전쟁의 개시 신호인 '통킹만 사건'이었다.
미국 대통령 존슨은 이 사건을 "북베트남에 의한 공해상의 공공연한 침략"이라고 비난하고, 의회에도 이 공격을 격퇴하기 위한 일체의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기를 요구했다. 1965년 2월부터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北爆)'이 시작되었고, 6월부터 남베트남에서 미군과 민족해방전선(NLF, 베트콩) 세력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더 많은 정규군을 남에 침투시켜 대항했다. 베트남의 미군은 1965년에는 2만 3,000명이었으나 1969년에는 최고 54만 3,000명에 달했다. 미국에 협력하여 한국군을 비롯하여 필리핀, 태국도 군대를 파견했다.
미군은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남베트남군을 대신하여 전쟁의 주역을 담당했다. 게릴라전에 대항하기 위해 살상력이 높은 신무기, 나팜탄, 볼폭탄 등이 개발되어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의 병사들뿐 아니라 많은 비전투원,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숲을 파괴하는 고엽제가 넓은 범위로 살포되어 전후에도 장애아 출생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미군은 민간인 속에 숨은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촌락을 태우고 때로는 여성과 어린애를 비롯한 촌민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미군은 남베트남을 제압할 수 없었다.
다수 미군이 전쟁의 목적에 의문을 품고 징병을 거부하여 국외로 탈출하거나 전선에서 탈주하는 등 전쟁 반대 운동에 가담했다. 민족해방전선의 병사들은 밀림 속에 땅굴을 파 거점을 마련하고 지상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군 등을 은밀히 사살하는 등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괴롭혔다. 북베트남 정규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산악지대와 밀림 속을 통해 남베트남에 도달하는 병참 보급로4) 를 개발하여 병력과 무기를 계속 수송하여 때로는 도시 지역과 미군의 거점을 총공격하곤 했다. 한편 남베트남 내부에서는 지배세력과 군부 사이에 내부대립이 심각해져 정변이 계속되었다. 1967년 9월에는 군부의 쿠엔 반 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군사정부를 열었다.
미국 내에서도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각지에서 격렬한 대학 분쟁이 일어났으며, 많은 수의 지식인도 이에 호응하여 정부를 비판했다. 의문과 비판이 고조됨에 따라 베트남전선에서 귀환한 병사들을 보는 눈도 냉담해졌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전선에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병사들 사이에는 마리화나나 헤로인 등의 마약 상습자가 격증했다. 미국의 경제 상태도 악화되었다. 재정적자가 증가하고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제 경쟁력이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베트남전쟁에 의한 미국의 대외 지출이 늘어나자 국제수지의 적자가 격증했다. 존슨 대통령은 현지에서의 전쟁의 정체 상태와 국내에서 전쟁 반대 운동의 고조, 그리고 미국의 국제 여론의 악화를 무시할 수 없어 베트남 문제의 '군사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회담과 전쟁의 종결
1968년 5월 파리에서 미국과 북베트남과의 평화회담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남으로의 침략을 포기하면 미군도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미국이야말로 침략자이며, 베트남으로부터 조건 없이 철수함이 마땅하다고 반론했다. 교섭이 난항에 처하자 오히려 미군의 병력은 더욱 증강되었다. 같은 해 10월 존슨은 북위 17도선 이남의 지역을 포함한 미국의 '북폭'을 전면적으로 정지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표와 해방전선의 베트콩 대표도 파리회담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확대 파리회담'은 1969년부터 시작되었다.
1968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이 당선되었다. 닉슨은 외교에 관해서는 이념을 떠나 유력한 국가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국가의 안전보장을 취한다는 전통적 현실주의의 '파워폴리틱'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닉슨은 같은 생각을 가진 하버드대학 교수 키신저를 안전보장 담당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기용하고 베트남전쟁을 막후에서 교섭하게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라는 일대 사건을 정지시키는 일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닉슨 정권의 목표는 '명예로운 철수'이었다. 닉슨은 남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전투를 확대하여, 군사력으로 북베트남을 위협함으로써 교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미국의 '명예'를 위해 일시적으로 전쟁을 격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닉슨은 북베트남군의 거점과 보급로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미군의 폭격을 강화하고 이 지역에 대한 남베트남군의 침공을 지시하고 정치적 간섭을 강화했다.
한편 '명예 있는 철수'를 위한 국제관계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중국에 접근을 시도했다. 닉슨은 1973년 2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주은래와 회담했다. 그 결과로 닉슨은 상해에서 미국과 중국의 공동 성명에 서명했다. '상해 코뮈니케'는 중국의 공식 외교정책이었던 '평화 5원칙'5) 을 미국과의 관계에도 적용하며, 양국이 함께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다른 제3국에 의한 패권 확립에 반대할 것을 그 내용으로 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공산 측 진영의 분열을 간파하고, 소련과 대항하기 위해 중국에 접근하려 했으며, 또한 중국과 접근하면서 동시에 소련과의 대화를 진전시킴으로써 양국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의 철수를 유도하려고 했다. 닉슨은 중국을 방문한 뒤 3개월 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브레즈네프 서기장과도 회담하여 SALT I6) 에 서명했다.
중국과 소련과의 현실주의 외교의 성과를 배경으로 하여 1973년 1월 미국은 파리에서 베트남과의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월 23일 키신저 대통령보좌관과 북베트남 대표 스안 토이가 협정에 서명하고, 27일에는 남북 양 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의 해방전선(베트콩)과 미국 등 4개국의 외상이 정식 서명했다. 그리하여 미군은 같은 해 3월까지 수천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긴 채 베트남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맹방인 중국이 미국에 접근하게 된 국제 정세의 압력하에 할 수 없이 평화협정에 서명했으나 통일의 열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평화협정이란 철수하는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에 불과했다. 북베트남 당국은 미군이 철수한 후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해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파리교섭에서는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을 대신하여 민족민주연합 정권을 수립하자는 북베트남의 주장을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거부했다. 그 때문에 남북 베트남을 나란히 병존시킬 수 있는 형태의 정치적 해결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나 남베트남은 단독으로 북베트남에 대항할 힘은 없었던 것이다. 1975년 4월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시를 점령했다. 미국 대사관은 서둘러 헬리콥터 편으로 사이공 시를 탈출했다. 남북 베트남 통일 과정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아무런 독자적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이 남을 병합하게 된 것이다. 1976년 4월 남북의 통일선거가 시행되었다. 국명도 '민주공화국'에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칭되었으며, 베트남 노동당은 공산당으로 개칭되어 급진주의적 사회주의화 노선을 채용했다.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억압을 피하고자 남베트남의 많은 국민이 작은 어선을 타고 국외 탈출을 시도했다.7) 요행으로 이웃 나라에 표착하기도 했으나 난파하거나 해적을 만나 조난한 사람도 많았다. 소련에서의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시작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1989년 11월 9일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동남아시아의 공산독재체제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69년 호치민이 사망한 후 노동당의 레주언이 제1서기로 집권하게 되었는데, 집권 초에 그는 계급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강조하는 경직화된 독재 정책을 채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체제는 베트남 국민, 특히 중국계를 중심으로 반발을 사게 되어 1980년대 들어서는 성급한 사회주의화를 수정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식량 생산의 증가를 위해 국영농장과 협동농장의 토지를 개인에게 빌려주는 '청부경작제도'를 도입했다.
1986년 레주언이 사망한 후 응우옌반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새 서기장 응우옌반린은 개혁파에 한 사람이었고, 과거에 남부 당의 서기를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때마침 사회주의 대변혁이라는 시대적 대세에 영향을 받아 '도이모이(刷新)'라고 칭하는 새로운 정책을 공식으로 채용했다. 시장원리를 대담하게 활용하고, 외국기업의 투자를 적극 받아들였다.
베트남 공산당 제6회 대회에서 '도이모이' 정책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시장경제화를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여하튼 생산력을 높여 빈곤을 타파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강조했다. 농업을 개선함으로써 식량과 식품을 증산하는 것이 긴급과제였다. 경제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국영기업이나 공영기업 이외에 '자본주의'적 경영과 개인경영을 인정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국제분업과 국제협력에의 적극적인 참가도 결정되었다. 재정지출의 억제와 통화 및 물가의 안정화, 취업 기회의 보장8) 등도 중시되었다. 관료주의와 중앙의존 체질 극복의 필요가 강조되었다.
베트남에서는 경제제도 개선과 함께 언론과 문화 활동의 분야에서의 자유도 어느 정도 확장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경제면에서 최대의 공여자이기도 했던 소련의 소멸이라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서 더욱더 서측 여러 나라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시킬 필요에 몰리게 되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적(敵)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도 1993년 이후 급속히 개선되어 미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도 늘어났다.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싸웠던 한국과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베트남에서 복수정당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당은 아직은 베트남의 민주화에는 신중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