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7년 하반기부터 2018년 여름까지 거의 일년여를 힘들게 버텼다.
여기저기 물어뜯긴 채 너덜너덜한 상태로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모습으로 살았다.
단체를 이끌어가는 일도 힘에 겨웠고, 무엇보다 아무 의욕이 없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의 점검이 아닌 내가 하는 일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모든 게 능력부족인 내 탓인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답사 다니는 것도 시들해졌고, 사람 만나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인미혜선생님이 옆에 없었다면, 오덕만대표님이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린 나로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참 잘도 살아가는데 나는 작아지는 것 같았다.
남들은 참 쉽게 자신을 설명하고, 목소리 드높이는데
나는 굳건한 신념을 펼치거나 단체의 비전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붙잡는 일이 어렵다.
연해주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들의 삶중에도 나같은 분이 있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계획적으로 움직인 분도 있겠지만
나처럼 매일매일 방황하며, 그러면서도 다시 추스려 일을 도모했을 분도 계시지 않을까..
당장 눈 앞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다면, 내 가족이 조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잠깐 방황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옳은 길이 아니기에,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기에 편함과 따뜻함을 포기하고
다시 환한 모습으로 일어섰을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둘째날, 연해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크라스키노포럼 연해주지부 이황휘지부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의 지속적인 교류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지막날에는 지부장님의 안내로 신한촌을 걸으며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우리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곰새우와 킹새우를 대접해주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 문화재지킴이로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우리 자신에 의해 변화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 만남을 주선해주신 남상만대표님, 만남의 의미를 구체화시켜주신 오덕만대표님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로 최재형선생님을 들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을 반복해서 읊어보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분을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 표토르 세메노비치.
그 이름으로 불리며 독립운동가들의 재정을 지원하고, 한인학교 설립에 투자했을 것이다.
어릴때 배고픔 때문에 가출했다가 우연히 만난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으로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익혔다.
그 계기로 풍부한 학식과 폭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 되었고 군수업으로 부를 쌓았다.
그 돈은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데 쓰였고 총기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람의 만남과 영향력을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수원지기학교 청소년들처럼 성장하는 시기에 만나는 교사들은 더 그런 부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이 늘 필요하겠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사의 배후인물이 바로 최재형선생님이었다.
안중근의사가 사형당하고 난 뒤 안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해주었다.
누군가는 움직이고 누군가는 움직이도록 돕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제안을 하고 제안을 토대로 정책을 만들어가며, 누군가는 또 몸을 움직여 실행한다.
어느 한 부분이 빠지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두 소중하고 중요하다.
내가 하는 문화재지킴이 교육도 그렇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기에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거리
왜 서울거리인가?
신한촌의 사람들이 많아 모여 살던 곳이라는 의미이다.
우물터도 있다.
길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들고, 걸어가고, 웃고, 사람들의 숨소리가 모이는 곳이기도 할 터이다.
아, 그렇구나. 길에서 숨, 호흡, 생명을 떠올린다.
새삼 생명이란 것에 숙연해진다.
그 뒤로 아무르강과 바다가 합류하는 물길이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크라스키노이다.
이상설선생 후학을 자처하는 박평선박사와 문화살림 오덕만대표의 열띤 토론이 이어진다.
책의 내용을 믿는 것을 주자학이라 할 수 있고 나의 양심과 본성을 믿는 것을 양명학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다 믿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도 오고갔다.
도로표지판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은 주자학이고 자신의 감각을 믿는 것은 양명학이라고 한다.
참..저렇게도 비유가 가능한 두 분의 식견에 감탄한 뿐이다.
나는 내 감각과 본성을 믿을 만큼 삶의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기에 책을 믿는다. 다만 오류가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터이다.
문요한작가에 의하면 게으름은 삶의 방향을 좌우한다고 한다.
게으름은 그저 부지런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산다고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란다. 그저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며 분주하게 보내놓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때문에 바쁜지의 방향성을 정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으름은 방향성이 없는 삶을 말하는 단어이다.
소크라테스도 사람들에게 훌륭한 일보다는 올바른 일을 하라고 했다. 거창하게 성인의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싶은 욕구로 살아간다. 잘 살고 싶은. 의 관점과 해석이 다른 뿐이다.
나는 연해주에서 과거의 시간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 현재의 시간과 연결시켜 보았다.
내 삶의 방향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선택에 책임을 가지고 나의 길을 간다.
이번 여행이 문화재지킴이 활동 영역을 해외로까지 전파하는 첫 걸음을 다지는 시간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모니터링하고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내 안에 잠들어있던 뜨거움을 다시 건드려 내 삶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음에 감사하다.
문화살림에서 기획하고, 서경문화유산포럼 단체들이 함께 한 여행이기에 가능했음을 더욱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