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마을을 찿아서
21.청송 '내원동 마을'
주왕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내원동. 이곳을 가려면 청송읍을 지나 주왕산으로 가야 한다. 주왕산 입구를 지나면 매표소 부근에 대전사가 있고 절을 돌아 내원동 큰골에서 발원하는 내를 따라오른다.
◆ 전기없는 내원동 마을
이곳은 원래 큰 마을이었는데, 6.25를 전후해 인구가 점차 줄어들어 현재 8세대 15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기찻길 주변 집마다 자녀들이 많듯 이곳 역시 전기가 없어 밤이 길었던 탓에 몇년 전만해도 7~9남매를 두는 집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 지금은 여늬 시골처럼 젊은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2.청송 "계당리"
경북 청송군 안덕면 계당리.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 있을까? 이런 마을이 바로 청송의 오지마을 계당리다. 95년 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 마을은 무인지경으로 남아있다.
23.홍천 명개리 "아침가리"
강원 홍천군 내면 명개리 '아침가리' 아침에 밭을 간다는 뜻의 아침가리는 지도상으로는 "조경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마을이다.
몇 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첩첩산중의 산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내뿜으며 아름다운 능선미를 자랑하고 있다. 고갯마루에서 좌측으로 가면 구룡덕봉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정되어 있는 야생화 군락이다. 몇 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계절마다 야생화는 다른 분위기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봄과 여름에 특히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좋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곳의 주변은 원시림이 빽빽이 들어 차 있어 꽃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국내에는 이곳 명지거리와 같은 원시림이 두 군데 있다. 특히 이곳을 흐르는 계곡 물이 청정수라 한꺼번에 자연의 진수를 맛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이 청정 지역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곳을 가려면 반드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이다. 길이 나지 않는 한 이곳은 비경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생화 군락을 지나면 조경동 조경분교가 나오는데 이곳은 이미 폐교된지 오래된 곳이다. 학교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외롭게 서있다. 아이들의 웃음이 더 이상 없는 곳.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학교는 쓸쓸함만 느끼게 한다.
분교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 무인지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마을은 오지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을 주민 전부가 타지로 떠났다. 마을은 텅빈채로 아름다운 옛추억을 기억나게 할 뿐이다.
아침가리에는 가끔씩 사람의 소리를 들을수 있다. 그 주인공은 40대의 한 남자. 그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차마 잊지 못해 가끔씩 이곳을 찾는다. 버려진 밭이 마을 여기저기에 얼마든지 있어 그는 이 곳에 메일을 심어 농사을 짓는다. 진돗개와 한국 토종개 두 마리를 데리고 마을에 나타난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가을이면 그는 여지없이 이곳에 니타나 마을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곤 한다.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된 수달과 열목어가 빈 마을을 지키고 있다. 개울가를 마음대로 뛰노는 수달과 맑고 찬물만 찾아다니는 열목어는 냇가에서 유유자적하게 물길을 거슬러 오르내린다.
족제비, 하늘다람쥐 등도 가끔 얼굴을 내미는 동물들. 사람이 없는 곳이라 이곳은 동물들의 차지가 되어 가고 있다. 아침갈이에서 직진을 하여 고갯마루를 올라가면 방동 약수터가 나온다. 그 곳까지의 거리는 10Km. 방동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을 마시면 가슴 속까지 맑고 시원해진다.
*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홍천을 지나 현리로 간다. 현리에서 광원리행 버스를 타고 광원리 월둔교 앞에 하차한다. 월둔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아침가리를 가는 길목을 만나게 된다. 명지거리 고갯마루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마을의 초입에 이르게 된다.
24.3도의 경계 삼도봉 자락 - 피난지소의 은둔마을들(궁촌2리, 구백이, 점말 마을)
해발 1176m 의 삼도봉은 일찍이 고종 33년(1896년) 전국의 8도를 13도로 행정 개편할 때 충북 영동군, 전북 무주군, 경북 금릉군의 경계를 구분하는 분기점이 됐다.
또한 삼도봉 인근은 석기봉, 민주지산, 황학산, 각호산 등의 고봉이 에워싸 장엄한 심산유곡을 이루는 곳으로 예부터 피난지소로도 일컬어져 왔다.
실제로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그리고 6·25전쟁 등 병란이 있을 때마다 무수한 백성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그 후손들 중에는 아예 눌러앉아 은둔 아닌 은둔생활을 여태껏 해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삼도봉 자락에서도 가장 오지로 손꼽히는 마을은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2리와 용화면 자계리 구백이, 전북 무주군 설천면 미천리 점말 등을 꼽을 수 있다.
영동 최고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궁촌2리는 현재 삼황학광산의 사택마을이 있던 자리에 상수원 댐 공사가 한창이다. 얼마 전 부실공사로 인해 뉴스에 오르내리던 바로 그 댐이다. 댐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사방으로 펼쳐진 회백색 호두나무 군락을 만나게 된다.
호두는 궁촌2리의 자랑이자 특산물. 점마와 지통마, 새막골 등의 자연부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대체로 호두 수확은 추석을 전후해 이뤄지며 마을에서 거둬들인 호두는 해마다 황간에서 상인들이 들어와 싣고 나간다.
궁촌2리의 첫번째 마을인 점마에서 중심마을인 지통마까지는 약 1km 정도 되지만, 워낙 험하고 가파른 고갯길이라서 승용차가 오르기엔 힘에 벅차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비탈을 깎아 흙집이 다닥다닥 자리한 전형적인 산간마을의 모습이 나타난다. 막살이 형태의 흙벽집은 물론 돌과 진흙을 섞어 쌓은 흙돌집, 벽돌을 찍어내 차곡차곡 쌓아올린 흙벽돌집도 보인다. 마치 다양한 흙집 전시장을 보는 듯하다.
지통마의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반면 새막골의 집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산촌(독가촌)을 이루고 있다. 저녁나절 노을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떨어진 흙집들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궁촌2리보다는 떨어지지만 용화면에 있는 구백이도 영동에서는 엄청난 오지에 속한다. 구백이는 임진왜란 때 900명이 피난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전설에 따르면 이들 900명은 단순한 피난민이 아니라 의병들로서 비밀리에 말타기 훈련을 했다고 한다.
구백이에서 20리쯤 떨어진 말바탱이에는 학교 마당처럼 널찍한 공간이 있는데, 의병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말바탱이에 남아 있는 말 발자국도 그때 생겼다는 것.
한편 말바탱이 가는 길에는 「무정할매샘」이 있다. 옛날 한 나그네가 이곳을 지나면서 할매(할머니)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할매는 바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이 전부인 데다 자신도 먹을 물이 없는 터라 무정하게 물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샘을 무정할매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이 마을 왼편 골짜기를 따라 2시간쯤 가면 「할미성」이라 불리는 성이 하나 있다고 한다. 옛날 한 할머니가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다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이 성은 돌멩이 하나가 몇 명의 장정으로도 들지 못할 만큼 크단다. 이렇듯 무수한 전설이 골골이 들어박힌 것을 제외하면 별로 특별한 게 없는 마을이지만, 마을의 인심만큼은 아주 각별하다.
구백이의 아랫마을인 빗근뱅이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 이장댁을 찾았다. 39세인 젊은 이장님은 선뜻 방을 비워주고는 손수 방을 치우고 이불까지 깔아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보니, 빠끔히 열린 부엌문 사이로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었다. 먼길을 찾아온 손님을 위해 기꺼이 살림방을 내주고 자신은 부엌 바닥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동의 두 마을이 삼도봉 북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반해 전북 무주의 점말은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점말까지 차로 올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힘 좋은 4륜구동이라 해도 피하는 것이 좋다.
미천리 장자동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점말을 오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걷는 것. 30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데다 특히 가을 끝 무렵에는 길가에 온갖 산나무가 갖가지 빛깔의 열매를 달고 있어 오르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현재 점말에는 두 채의 샛집이 남아 있다. 한 집은 김용석씨(49)네가 외양간 삼아 헛간채로 쓰고 있고, 다른 한 집은 조종민 할아버지(80)와 김태화 할머니(74)가 살고 있다.
과거 샛집은 주로 벼농사를 짓지 않는 곳이나 비바람이 심한 곳, 산간지대 등에서 지어졌다. 지붕의 재료는 억새풀 종류. 샛집의 수명은 재료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20년은 간다. 띠풀로 이은 집을 띠집이라 하여 따로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띠집도 샛집에 포함시킨다. 굳이 띠집과 샛집을 구분하자면 우선 재료의 길이에서 차이가 난다. 띠풀은 줄기의 길이가 1m 남짓인데 반해 억새 줄기는 2m에 이른다. 또 억새는 띠에 비해 덜 부드럽고 잘 부러지는 성질이 있다. 하지만 샛집은 벌레가 잘 범접하지 못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곳 노부부가 사는 샛집의 벽체는 귀틀로 돼 있는데, 방안은 둘이 누워 발을 뻗으면 딱 맞을 정도로 아담하다. 두 분은 이 움막 같은 샛집에서 25년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이 집이 비좁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오히려 조종민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젤로 좋은 집』이라고 샛집을 자랑스러워했다.
찾아가는
길
궁촌2리를 가려면 영동에서 4번 국도를 타고 황간에서 상촌면 쪽으로 꺾어지거나, 경부고속도로에서 황간으로 빠져 상촌면까지 간 다음 579번 지방도를 타고 궁촌까지 와서 좌회전하여 황학산 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구백이는 영동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묵정에서 581번 지방도로 바꿔 탄 다음, 진삼령을 넘어 자계리가 나오면 개천을 따라 4km정도 들어간다.
무주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설천까지 와서 시장 부근에서 좌회전, 장자동까지 간 다음 걸어서 30분 정도 오르면 점말이 나온다.
세 마을 모두 시내버스가 들어가지 않는다. 점말은 두 집밖에 없어 잘 곳이 마땅치 않으며, 궁촌2리나 구백이에서는 찾아보면 잠잘 곳이 없지는 않다. 〈글·이용한/사진·심병우〉
25.경북 영양군 "오무마을"과 청송군 "내원동 마을"-‘우묵한 곳’과 ‘전기없는마을’
경북 영양에 있는 오무마을엔 두 번을 들렀다. 작년과 올해 모두 겨울이 막 시작되려는 때에 들렀는데, 여전히 변한 것은 없었다. 오무에 가려면 약 30리에 걸쳐 뻗어 있는 수하계곡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진 산굽이를 수없이 에돌아야 한다. 아스팔트 포장이 끝난 곳에서 조금만 달리면 송방마을이 나오는데 오무는 송방에서도 약 3km 거리에 있다. 그러나 일반 승용차로는 도저히 오무까지 들어갈 수 없다.
수하계곡을 흐르는 장수포천 굽이가 네댓 번이나 앞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걸어서 가려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찻길을 버리고 산굽이를 따라 난 오솔길을 택해야 한다. 걸어서 40분 남짓이면 마을에 닿을 수 있다.
「오무」라는 말은 우묵하다는 뜻으로, 골이 깊고 우묵한 곳을 일컫는다. 이름처럼 오무는 우묵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독산」이 마을을 고스란히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마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무가 오지마을로 옛 모습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구절양장(九折羊腸) 장수포천의 굽이가 길의 포장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행스러운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길이 불편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저마다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 마을에는 굴피로 된 헛간채가 아직 한 채 남아 있다. 화장실이 딸린 이 헛간채는 과거 주인인 김순금씨(65)네가 방앗간(아직도 내부에는 디딜방아가 그대로 있다)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작년에 찾았을 때만 해도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올해는 화장실 쪽이 완전히 내려앉은데다 벽체도 훨씬 더 기울어져 있어 위태롭기만 했다. 굴피를 새로 얹은 지는 30년이 훨씬 넘었다고 하는데, 굴피 수명을 20년으로 보았을 때, 지붕의 수명도 이미 끝난 지 오래된 셈이다.
눌림돌과 장대를 질러놓은 모습이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굴피지붕 형태와 별 차이가 없으나, 특이한 것은 애초 지붕에 삼대(겨릅)를 골고루 덮은 다음 굴피를 덧덮었다는 것이다. 벽체의 노후와 기울기로 보건대 앞으로 몇 년 안에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
오무에는 모두 8가구가 살고 있다. 이 중 한 가구만 박씨일 뿐, 나머지는 모두 배씨. 무려 300여 년간 오무는 배씨 집성촌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위, 아래, 옆집이 모두 친척인 셈이다. 유일한 외지인인 박영덕씨(63)도 외가가 이곳에 있어 들어오게 되었단다.
예부터 이 마을은 피난지로 일컬어져 왔다. 배재선씨(64)에 따르면, 마을에 남은 지금의 배씨 자손은 300여 년 전, 난리를 피해 들어온 조상의 30대 후손이라고 한다.
『옛날에 큰 난리가 났거덩. 입향 시조가 여게 멀구 다래밭 싹 치고 들어왔던 말이여. 그래, 구뎅이를 한 질 파개지고 흙을 파냈다가 도로 넣어보니 흘기 남았드래여. 흘기 남는 곳이래야 명당이라카데』
이곳에는 수십 년 전만 해도 40여 호 정도의 집들이 있었다. 물론 그 때는 모든 집들이 굴피집이었는데, 새마을운동 때 몽땅 함석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길이 불편하다 보니 오무에서는 아직도 디딜방아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가구만 해도 3가구. 작년에 박순옥씨(64)네 집에 갔을 때는 손수 방아로 찧어낸 쌀떡으로 손님 접대를 해 주었다. 방아로 찧어낸 떡이라 그런지 한결 찰지고 맛이 좋아 점심상에 내놓은 쌀떡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올해는 쌀떡 대신 맛깔스런 김치와 「영양고추」를 곁들인 점심으로 푸짐한 점심상을 대접받았다.
영양군에 인접한 청송군 내원동에 가려면 주왕산국립공원 매표소에서 4㎞ 이상을 걸어가야 한다. 차량은 전혀 다닐 수 없지만, 길은 그리 험한 편이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내원동에 닿을 수 있다. 내원동까지 가는 길은 연이어 펼쳐진 비경의 연속이다.
기암이 그 첫 번째이며, 계속해서 수달래가 피는 주왕천과 시루봉, 학소대, 제1폭포, 제3폭포가 이어진다. 제3폭포를 지나면 「전기 없는 마을」이라 소개한 내원동 이정표가 길안내를 한다.
현재 내원동에는 8가구가 산다. 마을에 이르러 처음 만나는 집이 이상해씨(40)가 운영하는 내원다원이고, 다원을 지나면 주왕산 사슴으로 유명한 권영도씨(64)가 운영하는 찻집이 나온다.
그가 운영하는 찻집의 자랑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내원동차」라는 아홉 가지 약재(천궁, 당귀, 계피, 박하, 진피, 건강, 산사육, 대추, 감초)로 만든 차일 것이다. 피를 맑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이 차는 판매용이 아니라 대접용이다. 오고 가는 등산객 누구나 이 곳에 들러 이 차맛을 공짜로 볼 수 있다.
내원동에서는 농사짓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매표소에서 마을까지 4㎞ 이상을 걸어야 하므로 비료며 농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져날라야 하는데, 주민들은 모두 노쇠해 그럴 여력이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텃밭에 옥수수며 콩, 채소 따위를 소일거리로 키우는 정도이며, 이래저래 등산객을 상대로 한 장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과거 내원동에 그렇게 많았다는 논들도 이제는 다 묵어 억새밭으로 변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는 모두들 호롱불을 켜고 살았으나, 지금은 촛불이 호롱불을 대신하고 있다. 촛불을 켜게 되자, 주민들은 저마다 촛불이 그렇게 밝은 줄 몰랐다고 기뻐했단다. 물론 찻집 등에선 현재 자가발전을 이용해 백열전구를 켜기도 하지만, 상용적인 수단은 아니다. 대부분의 집에선 아직도 촛불만 켜도 대낮처럼 밝다고 여긴다.
이렇듯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간 벽지지만 내원동은 주변의 관광 명소로 인해 관광마을의 모습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벌써 마을의 절반이 찻집이나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내원동이 급격히 변모한 데는 TV와 언론 매체도 한몫을 했다. 관광촌이 되어가는 내원동의 운명이 어쩐지 안타깝기만 하다.
★ 찾아가는 길
오무까지는 버스가 운행하지 못하며, 송방까지만 하루 4회 시내버스가 운행한다. 승용차는 영양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상행하여 칠성을 지나 삼거리에서 우회전, 수비에서 장수포천을 따라 올라간다. 수하리에서 계곡 쪽으로 계속 방향을 잡아가다 보면 송방이 나오고, 오무는 송방에서도 3㎞ 정도를 더 가야 한다. 숙박은 송방에 있는 민박집을 이용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수비면이나 영양까지 나가야 한다.
내원동에 가려면 청송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다 928번 지방도를 타고 상의리까지 간다. 차를 가져왔다면 주왕산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내원동까지는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숙박은 내원동에서 해결할 수 있다.
26.갈론마을 /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은리-신이
빚어낸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펼쳐지는 곳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은리 갈론마을. 높지 않되 기품있는 봉우리, 반석을 휘돌아 흐르는 아홉 굽이 계곡의 청류. 화양동, 선유동, 용추동 등 예부터 은둔지자들이 몰리던 내륙의 섬 속리산에 숨어있는 오지마을이다.
화양동 같은 곳은 길이 뚫리고 관광지가 됐지만 갈론은 번잡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한적한 강촌의 여유와 청림에 묻힌 산촌의 풋풋함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 강 화양구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를 밟다가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자그마한 댐을 만났다. 괴산 수력발전소. 시멘트 포장길도 딱 끊기고 댐 옆으로 비포장길이 꼬리를 감춘다. 지도상에는 없는 길. 막상 이 길로 들어서니 딴세상이다. 댐에 물길이 막힌 칠성호는 자그맣지만 산수화 속에나 나올 법하게 제법 운치가 있다. 강자락 가운데에는 모래톱이 길다랗게 뻗어있다. 모래밭은 성근 들풀로 파릇파릇하다. 마을 귀퉁이는 제법 날카로운 절벽이다.
댐이 생긴 것은 1957년.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수력발전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비석도 있다. 50~60년대만 해도 공무원과 학생들이 종종 찾았던 견학코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댐을 지나 강마을 비탈진 산골에서는 시골냄새가 뚝뚝 묻어나온다. 이제 밭갈이를 해놓았는지 가지런한 붉은 황토밭, 강기슭에 놓여있는 거룻배. 담배밭과 마늘밭도 한 무더기씩 몰려있다. 나룻배 옆으로 놓인 돌계단 끝머리에 있는 작은 정자는 조선 선조때 영의정까지 오른 노수신의 수월정이다.
마을 어귀에 들면 자그마한 나루터를 만난다. 농가 한채뿐인 강 건너 산마을 오가는 나루. 그늘막만 있는 나루터에는 전화기 하나가 달랑 놓여있다. 뱃시간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 전화를 해야 배를 몰고온다. ‘밭에서 일할 때는 전화가 안들리니 경적을 울려주세요’라는 안내판이 웃음을 자아낸다. 강줄기엔 제법 많은 낚시꾼들이 앉아있다. 향어가 유난히 많고 쏘가리와 잉어도 올라온다.
# 산 마을은 부둣가에서 산으로 파고들었다. 댐 입구에서 마을까지는 5.3㎞.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오지다. 옛날에는 아예 물길을 따라 뱃길로 다녔다고 한다. 산자락 사이에 끼여있는 마을은 계곡을 따라 길다랗게 뻗어 있다.
오른쪽에는 옥녀봉(599m)이 솟아있고, 왼쪽은 군자산(948m)이다. 마을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산이라지만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육산이다. 옥녀봉 바로 앞의 야트막한 수리봉은 옥녀의 도톰한 젖가슴을 나타내는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은 적막하다. 20여가구 40여명. 대부분 60줄에 접어든 노인들.
비탈과 골짜기마다 묵은 밭뙈기가 꽤 많다 . 버려진 밭고랑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촌로의 말로는 논이 2만1천여평, 밭이 10만여평이나 된다고 한다. 담배와 콩, 고추, 참깨농사를 짓는다. 마을 끝머리에서 초가집을 만났다. 퇴비를 만들 셈으로 볏짚을 쌓아 비닐로 덮어둔 모습이 어릴 적 고향의 모습 그대로다. 마을 가장자리 갈론 분교는 폐교된 지 10년. ‘다솜건강교실’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마을 뒤로는 청정계곡. 봄 가뭄으로 물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물은 맑다. 계곡 양쪽으로는 달래넝쿨이 떡갈나무를 친친 감고 있고 산딸기, 산복숭아도 보인다. 갈은동문, 갈천정, 강선대, 옥류벽, 금병, 구암, 고송유수제, 칠학동천, 선국암…. 제각각 바위마다 이름이 붙은 갈은구곡이 있다. 마지막 선국암은 바둑판이 새겨진 암반. 바둑을 두던 4명의 노인이 해가 기울어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찾아와보니 바둑알 알알이 다 꽃이 됐다는 시구도 내려온다.
# 사람 갈론의 원래 이름은 갈은(葛隱). 칡뿌리 양식 삼아 은둔하기 좋다는 뜻. 봄·가을이면 선비들이 모여들어 자연을 벗삼아 놀았던 풍류지였다. “마을이 생긴 지는 한 300년 됐다는디, 유명한 사람들이 꽤 많이 오간 모양유. 계곡에 들어가보믄 시가 새겨진 글귀가 많아유” 토박이 이은득씨(62)는 이제야 마을 역사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위마다 빼곡하게 파놓은 시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노송이 빼곡해서 ‘고송유수제’라는 이름이 붙은 7곡에는 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조부인 홍승목, 구한말 국어학자 이능화의 아버지인 이원극의 이름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둘 다 이조참판을 지낸 선비. 수월정의 노수신 역시 선조때 영의정까지 오른 문인이다. 퇴계와 함께 독서당에 뽑혀 학문을 논했으나 을사사화때 속리산에 유배됐다. 선비뿐 아니라 구한말에는 프랑스의 칼레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다. 한국전쟁때는 인민군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세월이 멈춰선 내륙의 오지 갈론. 산과 강과 인심도 옛날 그대로이다.
▲ 여행길잡이 중부고속도로 일죽IC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있지만 초보자들은 증평IC에서 빠지는 것이 가장 쉽다. 증평 IC에서 510번 지방도~34번 국도~증평~괴산. 괴산 읍내 탑이 있는 4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문경 방면. 괴강교를 지나서 칠성면으로 5~10분쯤 가면 오른쪽에 농기계 수리센터가 있다. 50m쯤 떨어진 건너편은 칠성파출소. 바로 앞 3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칠성초등학교를 지나 수력발전소 가는 길(525번 지방도)이다. 계속 직진하면 수력발전소 앞 다리.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 길로 오르면 비포장 길과 만난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가다보면 갈론마을이다.
갈론마을은 민박집이 단 2곳. 갈론분교 바로 앞에 있는 가게를 겸한 ‘민박집’과 그 앞에 있는 이원득씨 집이다. 2만5천원으로 3~4명이 잘 수 있다. 민박집에서는 집에서 만든 된장과 산에서 뜯어온 산나물로 시골백반을 차려준다. 4,000원. 강을 건너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어른은 2,500원, 아이들은 1,500원.
괴산 괴강가에 나가면 얼큰한 매운탕을 맛볼 수 있다. 괴산읍내쪽 괴강다리 옆에는 매운탕집이 3~4개 몰려 있다. 쏘가리와 송어, 향어, 빙어, 메기, 잡어, 자가사리 매운탕을 내놓고 판다. 미나리와 잡고기를 한꺼번에 넣고 끓인 잡어매운탕이 별미. 간판에 가게 이름 대신 방송에 6차례나 소개됐다고 써놓은 원조 할머니집과 괴강 팔도강산이 있다.
소로 밭을 가는 농부, 장작으로 불을 때고 시냇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빨래를 하는 아낙네, 십리 길을 걸어서
장터에 가는 꼬부랑 할머니... 몇 십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흑백사진 속의 모습일 것 같지만, 21 세기를 함께 살아가는 갈론마을 사람들의
요즘 생활이기도 하다.
깊은 산 속, 시간이 멈춰버린 마을 교통도 불편한데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 왔냐며 "마을 앞에 난 길도 80 년에야 생겼어~ 예전에는 사람한명 겨우 지나
다닐만한 쪼마난 길 밖에 없었지. 다들 십리도 넘는 길을 걸어 다녔어~"라며 마을 이곳 저곳을 설명하던 이장님.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마을 뒤
계곡에 가서 마당바위, 형제바위, 바둑판 바위도 꼭 구경하고 가란다. 27.함바위골 / 강원 정선군 동면 북동리-'가장 외딴 두메, 북동리 함바위골' 동면 화암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물 좋기로 소문난 화암약수로 속을 달랜 뒤, 아침 일찍 무치재를 넘는다. 무치재는 화암동굴이 있는 천팔십삼 미터의 각희산을 오른편에 낀 높고 험한 고개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트럭 한 대 정도 다닐 만한 똬리 같은 비포장길이 산 너머 북동리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얼마 전부터 도로확장 공사에 들어가 포장길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길인 데다 고개 꼭대기부터는 공사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옛길의 정취를 한껏 맛볼 수 있다. 구불구불 무치재를 넘어서면 북동리. 과거(일제시대)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무치재에는 금광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창 금광이 잘 나갈 때 이 마을에는 마치 도회지처럼 빼곡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비가 와도 무치재에서 아랫마을까지 비를 안 맞고 내려왔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무치재부터 집이 다닥다닥 들어차 비를 피할 추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북동리는 그 많던 집들이 하나 둘 사라져 지금은 서른 가구가 조금 넘는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마을로 들어서 얼마쯤 내려가자 태극기가 내걸린 작은 분교가 나왔다. 사백이십사 번 지방도로를 벗어나 비포장길로 오 킬로미터를 달려서 만난 화동초등학교 북동분교. 학교 운동장에는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아이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왁자하게 뛰어놀고 있다. 이곳의 학생은 모두 열 명. 세 명의 미취학 어린이가 언니 오빠와 함께 학교에 오는 것까지 치면 열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 셈이다. 북동분교에서는 모두 두 개의 학급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저학년은 밝은달반, 사학년부터 육학년까지 고학년은 푸른솔반이다. 이곳의 선생은 두 분. 스물 아홉 살의 유 재학 씨와 스물 여섯 살의 윤 은환 씨. 둘은 영화에나 있을 법한 작은 분교의 부부 교사이다. "두메산골 분교 생활이 어떻습니까?" 흔한 물음에 유 재학 씨는 한마디로 "재미있죠 뭐"라고 대답했다.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강원도 산골로 오려고 옛날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북동분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 아이들이 순수하고 착해서 좋아요." 사실 이곳의 아이들은 오락실에 가 본 적도 학원에 다녀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다. 도시의 아이들이 문화의 혜택을 한껏 받고 자랄 때, 이 아이들은 부모를 도와 모판을 나르고 비탈밭의 잡초를 뽑으며 소중한 땀의 가치를 스스로 체험하고 있다. 또한 여름에는 개울가에서 겨울에는 산비탈의 눈밭에서 뒹굴며 자연이 가져다 주는 혜택에 고마워하는 법도 배운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지식보다 훨씬 값진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둘러보는 동안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땡땡땡땡. 아직도 종을 쳐서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학교가 이곳에 있다니! 학교 운동장을 나와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함바위골을 물어 보니, 아?반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오 킬로미터 넘게 더 가야 한다는 얘기. 마을을 거의 빠져 나갈 때쯤 계곡을 따라 난 길은 두 갈래로 갈렸다. 여기서 함바위골은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가야 한다. 여름에 물이 흘렀음직한 계곡은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다. 이곳의 계곡은 이른바 "건천"으로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른다. 하지만 여름 장마철이 되면 이 계곡은 물난리가 날 정도로 수량이 많아진다고 한다. 해서 여름 장마철에 함바위골에 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다. 길은 이 건천을 여러 차례 가로질러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한참을 달려도 집이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리라곤 까마귀 소리가 전부다. 만일 나무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의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쯤 달렸을까. 눈앞에 집이 한 채 보였다. 처음 출발한 곳으로부터 비포장길로만 십이 킬로미터. 그러니까 삼십 리를 달려서 함바위골에 닿은 것이다. 함바위골에서 처음으로 만난 집은 조 용선 씨네 집. 그이는 오십 년째 이 마을에 산다고 했다. 그이에 따르면, 함바위골에 있는 집은 모두 다섯 채. 하지만 세 가구는 농사철에 들어왔다가 겨울이면 빠져 나가 빈집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함바위골을 꾸준히 지키고 있는 집은 단 두 집인 셈이다. 조 용선 씨네와 더불어 함바위골을 지키는 또 다른 집은 최 재규 씨네 집. 역시 최씨도 오십 년 넘게 이 골을 떠나지 않고 있다. "삼척에 살다가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려고 여기 들어와 삽니다." 최씨네 집에는 특이한 물건이 두 가지 있다. 멧돼지 사냥에 쓰던 투창과 새나 동물을 쫓을 때 쓰던 파대라는 것이다. 그이가 젊었을 때만 해도 멧돼지 투창은 흔하게 쓰던 것이었다. "삼십 년 전까지는 저거 마카 썼어요. 겨울에 눈이 오면 살피(설피) 신고 창 가지고 멧돼지 마이 잡으러 대녔어요." 그때 이 함바위골에만 백여 명에 서른일곱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화전정리사업을 펼치면서 이 골은 적막한 골이 되고 말았다. 우리 귀에는 낯선 "파대"라는 것도 그이가 어린 시절에 흔하게 보고 썼던 것을 다시 만들어 쓰는 것이다. 본래 파대는 지게 멜빵을 만들듯 짚을 길게 엮어서 만드는데, 그 길이가 삼 미터가 넘는다. 지금은 짚 대신 나일론 끈을 쓰기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 파대는 새나 동물을 쫓을 때 쓰는 것인데, 파대를 칠 때 나는 "땅" 하는 소리의 위력이 실로 대단해서 총소리 저리 가라다. 원리는 손으로 파대를 돌리다가 갑자기 반대로 손을 꺾어 파대를 내리치면 파대줄이 꼬이면서 바람과 충돌해 소리가 나는 것이다. "까마구가 와서 옥수수 막 파잽히고, 멧돼지가 감자 같은 거 막 파잽히면 이걸 한 번 시게 쳐요. 그럼 이 놈들이 기겁을 하고 쫓겨가요. 소리가 음청 커요. 이게 총소리만 하니까. 쬐끄만 해서 옛날 노인네들이 하는 거 보고 내가 맨들어서 하는 거요." 실제로 그이가 밭으로 나가 파대를 한 번 치자, 귀가 먹먹할 정도의 "땅"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골짜기에 울려퍼지더니 근처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씨는 파대를 쳐서 새를 쫓을 만큼 많은 농사는 짓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강냉이와 "무꾸(무)" 농사가 전부. "떠나고 싶지 않으세요?" 어리석은 물음에 그이는 단호하게 "좋아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여기가 조용하지, 공기 좋고, 물 좋지. 안 좋은데 억지로 살겠소? 요 우에 가면 옻샘이 있어요. 피부병 있는 사람이 먹고 씻으면 병원에 가 못 고치는 병도 다 고쳐요. 이런 좋은 데가 어디 있소." 이곳이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바깥에 사는 우리의 생각일 뿐, 그네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 태백산맥 깊숙이 숨어있는 끝마을인 정선군 동면 북동리 함바위골은 정선군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이다. 정선군 동면 화암약수터에서 자동차로 까마득한 고개를 넘는 데 1시간30분, 그 고개를 넘자마자 차에서 내려 2시간을 더 걸어들어가야 함바위골에 닿는다. 겨울이면 유난히 눈이 많아서 한겨울 두세달은 꼼짝없이 산 안에 갇혀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겨울나기는 마을사람들이 더욱 끈끈한 인정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눈에 순응하며 쉬지 않고 자연을 캐는 것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함바위골엔 30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5가구 8명의 주민이 산다. -문의: 함바위골 주민 최재규씨 (0398)62-2856. 북동리
마을 끝과 끝의 거리가 20 km로 광활하다. 일제시대때에는 금, 은이 많이 생산됐으나 지금은 고랭지채소, 목재, 약초가 많이 난다. 오지마을로 교통이 불편한 것이 흠이다.
28.벌한(伐寒)마을 / 전북 무주군-居七峯과 四仙岩의 열한 신선이 감싸안은 伐寒마을
벌한마을 전경, 멀리 거칠봉 봉우리가
보인다 이 계곡 물에 발 한번 담궈보지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주 따로 구천동따로가 아닌 늘 함께인 무주구천동은 호남 땅의 오지인 무주를 빛낸 얼굴마담으로 덕유산 향적봉에서 나제통문까지 장장 36km을 굽이굽이 흐르며 수많은 폭포와 소(沼)를 만들고 구천동 33경이라는 절경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제 구천동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묻혀 화려한 조명과 거대한 구조물을 앞세운 초현대식 레져단지에 뒷일을 맡기고 들어앉아 버렸다. 약간은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구천동 입구의 먹거리 촌과 그 정반대의 무주리조트를 보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그리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오랜만에 찾은 무주에서 새삼스레 조상들의 자연관을 떠올려 본다.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무주는 세속에 물이 덜 들어 보이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없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기에 굳이 건드려 부스럼을 만들 이유야 없지 않은가. 가만가만 발 뒤꿈치를 세우고 걷듯이 자연과의 교감은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깥세상과의 적당한 거리감으로 빗장을 걸고 살아가는 무주군 설천면의 居七峯(1,178m) 일곱 봉우리와 마주한 伐寒마을을 찾아가 보자. 나제통문-신라와 백제의 국경 나제통문
개똥벌레로 불리는 이 반디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갖고 있는데,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말이 있다. '고생하면서도 꾸준히 학문을 닦은 보람'이란 뜻으로 螢은 '반디'이고, 雪은 '눈'으로 옛날 중국 진나라 시대 손강(孫康)과 차윤(車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유래하는데,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기름을 살 수 없었던 두사람은 반디와 눈(雪)의 빛으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어릴 적 반디의 불빛을 비춰가며 놀던 기억은 시골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있을 것이다.
폐교된 두길초등학교 빈 집이 더 많은 방재마을
접시꽃이 핀 벌한마을 골목 할머니 마을 뒤로 감싸 안은 듯 산 병풍을 둘러 친 居七峯은 마을을 향해 일곱 봉우리가 차례로 키를 낮추며 정면으로 트인 골바람을 막아준다 한다.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 온 배재우(76) 할아버지는 또한 '四仙岩의 네 신선이 더해 伐寒마을을 지켜주고 있어 수백년 평안하게 살아왔지.'라며 마을 자랑을 한다. 그도 그렇 것이 협소해 보이기만 한 골짜기지만 비교적 농토가 많다. 지금은 묵밭으로 버려져 있지만 배재우 할아버지 집 맞은편에는 '큰들'이라 불리는 넓은 운동장 만한 수천평 둔덕이 있다. 하나둘 떠난 빈자리가 커 보임을 느낄 수 있었는데, 두길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아이들 교육문제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버려 지금은 9가구만이 남은 작은 마을이 되버렸다.
내 집 찾아온 손님인데, 뭐라도 대접을 해야 한다며 극구 사양해보지만 커피를 내 오시고,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신다. 잠시 도회지 생활을 했지만 노부모 봉양을 위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부부는 당신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고향 땅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
29.베르미 마을 / 경북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이나리강변
태백산맥과 일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황우산에서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낙동강과 운곡천이 합치는 곳으로 산수가 수려하고 매화꽃이 떨어지는 "매화낙지(梅花落地)" 형국이라 하여 매호(梅湖)라 했으나 일제시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본래의 이름인 매호(梅湖)가 명호(明湖)로 바뀌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는 곳이다.
이나리 강변은 운곡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두(이) 강(나리)이만나고 옛부터 두 개의 나루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지명.그 이나리 강변 민박집에서 묶으며 우연히 전기가 없다는 "베르미"란 곳에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쏘주 한잔 하이소."예의상 거절은 못하는 성미라 한잔, 두잔 ... 딱 석잔을 마시고
일어섰다. 좀 더 자세한 정보와 함께... 4륜구동은 다닌다는 길이라 걷기에는 좋아 보인다. 빈집 한 채만이 있는 보릿골을 지나며 길은 골 안을 파고든다. 처음부터 오르막, 경사가 너무 급하다. 가벼운 차림이지만 채 10분도 안 돼 온 몸이 땀에 젖는다.
저기가 베르미? 그런데 빈집으로 보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다.
"아- 들 다 객지 보내뿔고 신간 편하게 여서 살아요."전화도 없기에 부모님 걱정하는 아들이 핸드폰을 사주었다고.산꼭대기라 핸드폰은 터진다. 그럼 밧데리 충전은? "아랫동네 내려가 꼽아두고 왔다 갔다 합니데이." 그래서 아침저녁으로만 잠시 핸드폰을 켜 놓으신 단다. (다 사는 방법이 있구나.....)
아무리 봐도 길은 안보이고,강을 따라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절벽의 연속이라 불가능하게 보인다.
1시간을 걸어서출발지점이었던 잠수교로 되돌아 나왔다. 낙동강의 수면 위로 바람이
나뒹군다.
두메산골 '베르미 마을'의 가을풍경
<sbs 8뉴스><앵커> 우리 주변에는 세월에 밀려서 사라져가는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김윤수 기자입니다.
30.승부마을/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기차로 가 닿을 수 있는 최고의 오지마을' 승부역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 승부역은 열차로 닿는마을 ..... 우리나라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간이역이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에 위치해 있어 겨울에는 오후 3∼4시만 되어도 해가 지기 시작하고, 승부역사 앞에 어느 역무원이 적어 놓은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 마당도 세평..." 이라는 글귀 때문에 세평하늘 간이역으로 더 유명하다. 철도청에서 '98년부터 관광열차, 환상선 눈꽃열차를 운행하면서 관광명소로 부각되어 10만여명 이상이 다녀간 이곳은 특히 가을철 단풍과 겨울철 설경이 장관이다. 또 이승만 대통령 친필의 영암선 개통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역사 앞으로 70m나 되는 출렁다리와 1.5km의 계곡 오솔길과 용관바위, 투구봉약수 등 전설과 함께하는 볼거리가 있고,겨울엔 역사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썰매타기를 즐겨 볼 수 있다. 관광열차가 운행되는 10월∼3월은 승부역사 앞에 지역토속음식과 농특산물을 승부마을 주민들이 직접 판매하고 있어 산골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사진/암기동과 승부마을 중간쯤에서 바라본 풍경. 기차가 승역으로 향하고 있다. 승부역은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지에 속하는 역이다.)
오지마을 여행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이다. 보듬고 껴안고 어루만지며 끝내 지켜야 할 우리네 삶의 원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질박한 서민문화의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오지여행의 참맛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도시에 익숙한 몸과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십리 먼지길을 걸어낼 자신이 있다면 길을 떠나보자. 설악산이나 해운대 등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도저히 느끼지 못할 질박한 삶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승 부 마 을 : '승부(承富-이을승/부자부)'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이 다른 마을 보다 잘 살았고 부자 마을 이라고 해서 승부라고 붙여진 이름이다.그러나 이곳을 승부라고 부른후 부터는 더 이상 발전이 없고 지금도 옛날 그 상태로이다. 왜그럴까 생각 해보니 한문으로 이을승(承) 부자부(富) 하니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 부자가 안된다는 철학 이기도 한것같다.자연부락으로는 결둔과 마문이, 암기동, 하승부, 학교마을, 역마을 등이 있으며 전체 가구수는 40가구가 조금 넘는다.
승부리는 갇힌 마을이다. 마을 뒤는 태백산 준령이 길을 가리고 마을 앞은 반야계곡과 백천계곡, 태백산 황지에서 내려오는 황지천과 천암천이 어우러진 낙동강 상류가 길을 막는다. 오직 열린 길이라곤 마을 앞을 지나는 철도뿐이다. 이런 오지지만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은 다른 곳과 별다를 바 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상류쪽 공장에서 흘려보내는 폐수 탓이다. 마을 안쪽에는 10m 높이의 폭포가 있는 중미골과 일제시대 화전민들이 불밭을 일궈 살던 오미골, 예전에 턱바위라고 불리던 태미네골, 조선 말 봉화를 올려 인근에 연락을 취했다는 농우골 등 이름난 골이 많고, 자연경관 또한 빼어나다.
승부리의 초입은 학바위라는 커다란 바위절벽의 절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학바위를 지나 왼편으로 꺾어들어가 만나는 곳이 결둔이다. 옛날 모든 전쟁이 이곳에서 승부가 갈렸다 해서 승부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 현재 여섯 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에는 대추나무가 빼곡이 들어서 있다. 승부리 일대는 어딜 가나 대추나무 투성이다. 등록금 나무라고 할 정도로 대추는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주산물이자 소득원이다.
승부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은 하승부와 학교마을을 포함한 승부마을. 과거에는 낙동강 줄기를 기준으로 현재의 학교마을을 울진승부, 하승부쪽을 봉화승부라 불렀다. 학교마을은 원래 울진군 서면에 속해 있었으나, 83년 봉화군 석포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에 승부분교가 있어서 학교마을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승부분교는 93년 폐교되어 지금은 그 터에 대추나무 묘목을 잔뜩 심어놓았다. 학교마을과 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하승부에는 현재 13가구가 살고 있다. 과거에는 대추농사만으로 자식공부 다 시키고도 남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점차 먼 옛날 이야기가 돼 가고 있다. 하지만 인심만은 여전해 어느 집을 들르든 따뜻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승부리다. *승부리는 경북 최고의 오지마을로 승부마을 10여가구,학교마을 10여가구,역마을 5가구,기타 몇가구 합쳐서 총 30여가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40세 이하는 한명도 없고 대부분이 60~80세 노인들로 구성된 마을입니다. 그래서 아직 전문적인 민박집은 없으나 미리 연락하고 오시면 하루밤 묵을수는 있으니 꼭 연락 주시고 방문해 주세요... 참고로 승부마을에는 식당이나,여인숙은 물론 구멍가게도 하나 없으니 미리 모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가는길 봉화에서 36번 국도를 타고 가다 소천에서 31번 국도로 바꿔 탄다. 대현을 지나면 석포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며, 석포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계속 들어가면 승부리다. 열차는 영주와 강릉에서 각각 세번씩 승부역을 지난다. 숙박은 석포면의 여인숙을 이용해도 좋지만, 말만 잘하면 마을에서 묵을 수도 있다. 승부리까지 공영버스 하루 2회 운행. 문의: 0573-672-6288(이장). 영암선 개통 기념비 : 지금의 영동선(영주-강릉)은 처음 개통당시는 영주에서 철암까지로서 영암선이라 불렸으며 영암선은 순수 우리나라기술로 건설한 최초의 철도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가장 어려웠던 구간인 이곳 승부에 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친필로 그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출 렁 다 리 : 승부마을과 승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출렁다리는 02년 태풍 루사로 끊어졌다가 03년에 새롭게 그 모습을 보인 길이 약 70m인 철교로 걸어보시면 재미가 남다를듯..... 용 관 바 위 : 승부역 계곡 맞은편에 우뚝솟은 바위로서 일명 족두리바위라고 부르며 옛날 조선시대때 절충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높이 약 50m의 장엄한 위용을 자랑하고있음.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함. 승 부 계 곡 : 승부역 맞은편 산골짜기로 이어지는 계곡은 외부인의 발길이 거의 닿지않은 곳으로 깨끗하고 시원하여 특히 한여름에도 이곳은 여름을 잊게할정도로 시원한곳이다. 이 계곡을 따라계속 올라가면 비룡산으로 이어져 등산코스로도 이용된다. 투 구 봉 약 수 터 : 임진왜란때 전투를 하던 병사들이 피부병에 걸려 패전하여퇴각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투구를 옆에 벗어놓고 이 우물에 씻으니 병이 깨끗이 나아 승전을 이루었다하여 이곳을 투구봉 약수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 늘 도 세 평 .... : 승부역을 대표하는 이 말은 60년대 이곳 승부역에 근무하던한 역무원이 승부역사 옆 바위에 적어놓은 싯귀로서 승부역의 작고 아담하지만 영동선에 없어서는 안될 승부역에대한자부심을 잘 표현하였다고 하겠다.지금은 비석으로 홈에..."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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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간에 사진이 나오지 않아서 아쉽네요.^^ 예쁜 책으로 엮어서 나와도 좋을듯 합니다. 잘 구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