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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가 자리 틀고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하여 계룡산(鷄龍山)이라 부른다고 한다.(2004. 3.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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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맺어준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다. 앞에 보이는 7층 석탑이 오라비 탑이며 뒤로 보이는 5층 석탑이 오누이 탑이다.(2003. 10) |
선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동학사는 명산 계룡산 동쪽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절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어 절 이름을 동학사라 했다는 설과, 고려말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의 원조인 정몽주를 제사 지내므로 동학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계룡산은 전국의 웬만한 도인들의 수도 경력엔 빠짐없이 등장하고 태조 이성계가 왕도의 진산으로 정했을 정도로 기혈 왕성한 명산이다.
계룡산은 논산과 공주의 영산(靈山)으로 한국의 오악 중 하나로 꼽힌다. 계룡산서 발기한 정기가 신도안으로 뻗었으니 신도안이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이성계가 왕도로 정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616년 전인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한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탐문한 끝에 지금의 신도안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고려 때부터 신도안이 도읍지로 더 없이 좋다는 이른바 '도참설'도 있었지만, 이성계 자신도 직접 둘러본 결과 적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도할 도읍지가 결정되자 대궐을 세우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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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볕에 드러난 동학사 전경이 아늑해 보이기만 하다. |
천하제일의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만사를 호령하던 절대적 왕권이 있었기에 모든 일은 거칠 것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읍을 천도하고 대궐을 짓는 일이란 게 원체 대사이기에 이성계는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제단을 차려놓고 국운왕성과 무탈천도를 천신께 빌고 있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사가 진행되어 터가 다듬어지고 주춧돌이 놓여질 즈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고 있던 이성계에게 백발의 할머니 한분이 현몽하여 다짜고짜 "나는 계룡산 신령인데 여기는 정도령의 도읍지니 공사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을 하였다.
계룡산 신령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언젠가 계룡산 정기를 타고 태어날 정도령이란 신인(神人)이 왕이 되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8백년간 태평성세를 펼칠 그의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갑작스레 나타난 백발 할머니상의 산신령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던 이성계였지만 할머니의 위풍당당함에 눌려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지금 주춧돌까지 놓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그냥 천도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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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앞에서면 계룡산 주봉인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
그러나 할머니는 일언지하에 "만약 공사를 계속하면 앞으로 큰 화가 미쳐 국위의 존립 여부는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울 것"이라 말하였다. 할머니의 태도가 워낙 냉랭하고 단호한지라 할 수 없이 이성계는 "이곳을 떠날 테니 어느 곳에 도읍을 정해야 할지 그 곳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할머니는 "여기서 5백리 북쪽으로 올라가 그곳에 가서 도읍을 정하라" 일러주니 그곳이 조선 5백년 도읍지인 현재의 서울, 한양이다.
기도 삼매에 빠졌던 이성계가 정신차려 주변을 살폈으나 계룡산 할머니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신도안으로 천도를 포기하며 "흙 한줌이라도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수많은 일꾼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한곳에 털어 대니 그 흙이 모여 지금의 신털봉이 되었다 한다.
입으로 전해지는 한낱 설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어쩌면 당시의 민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성계는 막강한 권력으로 추진하던 천도에 따른 민심 이반과 원성이 발생하자 산신령을 등장시켜 민심을 수습하는 기지를 발휘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런 명산의 길지에 자리잡고 있는 동학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일주문을 지나 동학사 직전, 계곡에 걸린 정자 앞에서 오른쪽 산길로 1시간쯤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남매탑부터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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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엘 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사진의 왼쪽이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이며 오른쪽이 동계사다. |
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 동쪽에 있는 동학사와 서쪽에 있는 갑사의 중간 지점인 삼불봉 아래, 옛 청량사 터에 세워진 두개의 탑이다. 오누이 탑인 5층탑과 오라비 탑인 7층 석탑은 각각 보물 제 1284호와 1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지쌍탑(淸凉寺地雙塔)이라고도 불린다.
남매탑에도 애틋한 전설이 유래한다. 통일신라시대 한 스님이 계룡산에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울부짖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입을 크게 벌리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런 맹수의 포효에 혼비백산했던 스님이 정신차려 호랑이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박혀있기에 이를 뽑아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호랑이는 아리따운 처녀 한명을 입에 물고 와 수도승 앞에 놓고 갔다. 목에 걸린 가시를 빼준 은혜를 보답하는 뜻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와 정신을 잃었던 처녀는 스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다음날 정신을 차렸다. 처녀는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초야의 신방도 차리기 전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눈도 너무 많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둘은 토굴에서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드디어 봄이 되어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둘이 함께 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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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에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다. 선방은 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불심 깊은 수도승은 남녀가 인연을 맺는 파계는 있을 수 없기에 고심 끝에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는다. 그렇게 맺어진 두 남매는 비구와 비구니로 불도에 힘쓰다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라 한다.
이 남매탑의 주인공은 동학사를 창건한 회의의 은사스님이 되는, 신라 성덕왕 15년(716)에 당나라에서 입국한 상원화상이라고도 하니 동학사의 뿌리는 이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32번 국도를 따르다 박정자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넓은 진입로는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동학사 관문이다. 멀리 닭 벼슬을 닮은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이 후련하도록 넓고 반듯하게 만들어진 길에는 속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훨씬 넘었을 노령의 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온몸 벌려 길손을 맞아들인다.
마을이 나오고 삼거리가 나오니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개를 넘으면 그곳이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였던 신도안이며 육군본부가 들어선 계룡대가 있다. 벚나무 터널을 지나 주차를 하면 그곳부터 계곡에 늘어트린 산 그림자가 절 찾는 발길을 안내한다. 호객하는 상인들의 애교 섞인 부름이 속세의 끈끈한 연 만큼이나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매표소를 지나 오리쯤 걷게되는 진입로는 한마디로 혼자 걷기엔 너무 아까운 그럴싸한 데이트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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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을 맞은 비구니 학승들이 울력으로 경내를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봄빛에 드러난 빡빡 머리에 고깔모자라도 씌워주고 싶다. |
물길 따라 산 그림자 따라 뚜벅뚜벅 걷다보면 계곡에 걸린 육모정인 세진정을 지나게 된다. 세진이란 '마음속에 있는 번뇌의 티끌과 온갖 더러움을 맑은 계곡에 씻어 내듯 깨끗이 씻어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육모정에 올라 마음만 펼치면 일부러 염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속세의 온갖 번뇌와 오욕칠정이 씻길 듯하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은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고 졸졸거리는 청아한 물소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설법으로 목탁소리로 다가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을 따르면 남매탑으로 가게 된다.
세진정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절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풍광이 일품이어서 언뜻 동학사가 아닌가 싶지만 그곳은 동학사 산내 암자인 관음암과 길상암이다. 두 암자를 오른쪽에 두고 계곡을 따라 몇 발자국 더 들어가야 비로소 동학사에 이르게 된다.
동학사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동계사,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키 위해 초혼제를 지내는 숙모전으로 이런 전각은 어느 절에서도 보기 힘든 전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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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동학사에 봄은 이렇게 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을 배경으로 한 단색의 목련 몽우리가 잘 어울린다. |
고려말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음에도 동학사엔 그들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세워져있으니 바로 삼은각이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조선 500년 동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배불의 근간이 되었다. 자신을 핍박하고 곤경에 일조한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지금껏 제를 지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와 보시를 실행으로 옮긴 실천불교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웅전에서는 계룡산의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재잘대듯 흐르는 물소리는 무료함을 달래주고 간간이 스치듯 불어주는 바람은 흩어진 마음을 모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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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물오른 나무에만 오는 게 아니고 양지쪽 빨랫줄에도 와 있었다. 봄볕에 드러낸 빨래들이 해바라기를 하고있다. |
*대전 뿌리공원 | |
유등천 물결이 은비늘처럼 반짝이며 봄을 재촉한다. 그러고보니 벌써 입춘이 다 됐다. 물결은 느린 걸음으로 흐르다 고무로 만든 장수보에서 잠시 휴식 을 취한다. 장수보는 말 그대로 오래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부 모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었다. 장수보를 따라 상단으로 길게 뻗은 것은 만성교다. 현수교 양식의 만성교는 길이 110m.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뿌리공원 에 이른다. 만성교라는 이름도 꽤 흥미롭다.
'만 가지의 성을 모 아놓은 뿌리공원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전한다. 하지만 실제 모셔진 성씨는 72개. 그것도 본관을 기준으로 한다. 같은 김씨라도 본관이 다르면 다른 성씨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2000년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성씨는 2 86성 4천179본관. 뿌리공원에 입주할 성씨가 그만큼 많다. 뿌리공원이 건립된 것은 지난 97년 11월. 대전 중구 침산동 일대 6만2천여평의 부지 위에 첫 조성됐다.
다리를 건너 커다란 바윗돌 의 '뿌리공원 비'에 이르니 세계 최초로 성씨 테마공원이 조성된 이유가 아로새겨져 있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여 경로효친 사 상을 함양시키고…'.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고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 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이뤄지며 한 집안의 뿌리는 족보에 담 겨진다는 글귀도 눈길을 끈다. 부르기 편하게 짓는 요즘의 작명과 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가문'이라는 단어가 꽤 중압감을 준다. 바윗돌 뒷면은 우리나라 전체 성씨를 가지런히 새겨 놓았다.
기념비에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각 성씨의 개별 기념비와 조각 품을 하나씩 만난다. 각각의 조각은 예술품에 다름아니다. 공원 측이 일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각 성씨의 종중이 개성을 살 려 제작한 뒤 기증했기 때문이라고 공원 측은 설명한다. 어떤 것은 태양을 본뜨고,또 어떤 것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날개를 닮았다. 뿌리처럼 굳고 넓게 번창하라며 나무 뿌리를 형상화한 것도 눈에 띈다.
조각 아래의 표지석은 해당 성씨의 유래와 역사 를 담고 있다. 시조와 가문을 빛낸 인물에 대한 설명이 꽤 상세하다. 비석은 한글로 새겨져 있어 읽는데 큰 불편이 없다. 해당 성씨를 좀 더 쉽게 찾고 싶다면 공원 입구와 수변무대 주변에서 위치도를 살펴보자. 걸음을 옮겨 멧부리에 오르면 영·호남과 충청의 화합 과 상부상조를 기원한 삼남기념탑도 만난다. 뿌리공원만으로 대전을 찾기가 쉽지 않다면 과학 여행을 겸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엑스포과학공원과 화폐박물관,국립중앙과학 관,지질박물관 등 자녀와 함께 찾을만한 과학 명승지가 대전에는 수두룩하다. 여유가 있다면 뿌리공원 근처의 대전동물원도 둘러볼 일이다.
대 전시가 지난 2002년 설립한 대전동물원은 규모 면에서 전국 두 번 째로 132종 600여마리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사자와 곰 을 주제로 한 아프리카 사파리와 산양,사슴,몽고 야생말을 중심으 로 조성한 마운틴 사파리가 특히 이채롭다. 엑스포과학공원은 지난 93년 대전세계박람회를 개최할 때 조성한 테마공원이다. 최근 1/3 가량의 부지를 다른 용도로 바꿨지만 여 전히 볼거리가 많다.
자연생명관과 아이맥스영상관,돔영상관,입체 영상관 등의 체험관을 모두 구경하는데만도 반나절이 걸린다. 한국조폐공사의 화폐박물관은 엑스포과학공원 근처다. 실물 화폐 만도 무려 12만여점을 보유한 테마 전시관으로 국내·외 화폐 문 화의 변천사를 전해준다. 그리스·로마시대 주화와 대한제국 화폐 ,그리고 훈장과 우표,크리스마스 실이 눈길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가족이 함께 찾기에 좋은 과학 명소다. 기초과 학과 자연과학,산업기술,천체관 등 주제별 배치가 짜임새있고 볼 거리와 즐길거리도 다양하다.
이 중 지난 2003년 러시아에서 직접 가져온 실물 매머드 골격과 길이 15m의 보리새우 뼈는 특히 볼만 하다. 과학도구를 직접 만지고 조작할 수 있는 상설관은 호기심 많은 어린이 고객들이 즐겨 찾는다. 각 테마관의 시설과 도구에 대한 사용법을 알고 싶다면 3층 입구에서 PDA를 주문(무료)해 가 지고 다니는 것이 유용하다. |
[뿌리공원 여행수첩] | |
대전은 시내를 중심으로 여행하는 만큼 먹거리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대전만의 음식 맛을 보고 싶다면 구즉 묵마을을 찾아보자. 마을 전체가 묵 천지나 다름없을 만큼 묵집이 즐비한데 이 중 원조는 할머니묵집(042-935-5842)이라고 한다. 무려 50년의 전통을 가진 묵 전문집으로 도토리묵과 메밀묵이 제대로 맛을 전해준다. 보리밥과 순두부도 추천 메뉴다.
대덕연구단지에서 북쪽 으로 신탄진·조치원 방향으로 나서면 자동차로 20여분만에 묵마을에 닿는다. 뿌리공원에서는 멀다. 엑스포과학공원 주변에서 점심을 겸한 이색 맛집을 찾는다면 퓨전 중국음식점인 원태조(042-862-8887)도 괜찮다. 중국집 답지않게 깔끔한 인테리어와 이색 메뉴가 시선을 끈다. 가격은 3천원대부터 다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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