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金51] 처용무, 학무(鶴舞), 연화대(蓮花臺), 고려 처용가, 하여가, 그리고 Bon 교 성황당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
*시리즈로 게재되는 [天金]의 글은 자비(自費) 출판하여 대학도서관에 기증한 <훈민정음에 담긴 인류문화사(2017)>의 내용 중,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올린 글의 전후맥락의 정확한 이해와 내용 전체를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하여, 특수문자 때문에 출판 과정에 생략한 제3장이 포함된 책의 전문(全文)을 pdf로 변환하여 블로그 http://blog.daum.net/tiangold에 올려놓았으니 많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카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ᄒᆞᆫ글로 작성된 것인데, 훈민정음 고어글자와 특수문자, 도표 등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어 pdf로 변환한 것을 같이 실으니, 될 수 있으면 pdf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라도 카페와 블로그에 공개된 내용을 인용 내지 차용하시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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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金51] 처용무, 학무(鶴舞), 연화대(蓮花臺), 고려 처용가, 하여가, 그리고 Bon 교 성황당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pdf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은 879년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이 해 3월 개운포에서 동해 용과 아들 일곱을 만났는데, 그들은 춤과 노래로 왕의 덕을 찬양하였다. 아들 중 1인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정을 보좌하였는데, 처용 신을 모시는 사제, (처용)급간(處容級干)으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그는 처용랑(處容郞)이라 불렸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으로 행차하였을 때, 북악신(北岳神)이 왕에게 춤을 추어올리니, 옥도령(玉刀鈴)이라 명(名)하였다(, 직책을 주었다). 또한 동례전(同禮展) 연회 때 지신(地神)이 나타나 춤을 추니,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명(名)하였다(, 직책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 삼국유사 기록 중 춤(舞)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헌강왕 때이고, 처용급간은 아마도 당시 처용무를 추었을 것인데,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와 관련된 것으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궁중 나례(儺禮) 후에 행한 처용무가 있다. 고려 처용무는 혼자서 검은 옷에 검은 사모(黑布紗帽)를 하고 추는 춤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다섯 명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되었고, 나중에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규모가 커졌다. 보통 왕조가 바뀌면 전 왕조의 것이 부정되기 쉬운데, 처용무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더 보완되고 위상이 높아져 갔으니, 이는 ‘처용’의 문화사적 의미가 왕조의 번창, 왕권 강화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헌강왕의 아버지 경문왕 때 귀족과 호족들의 반란이 많았고, 왜의 침입도 있었다. 경문왕은 이를 극복하면서 황룡사를 개수하였는데, 이는 왕권강화를 의미한다. 황룡사는 삼국통일의 터전을 닦고 영토를 팽창하였던 진흥왕(553)이 569년에 완성하였고, 선덕여왕이 여기에 9층탑(643)을 세웠는데, 이 탑은 신라 성골 출신 왕대, 성대(聖代)의 최고 전성기 위엄을 잘 보여주는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다. 경문왕이 이를 개수하였고, 헌강왕이 여기서 백고좌(876)를 개설하였는데, 이는 진흥왕이 하였던 일을 재현한 것이다.
신라 하대 약해진 왕권을 경문왕이 겨우 안정되게 한 것을 물려받은 헌강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그것이 ‘처용’과 관련 있다는 것은 〈고려처용가〉의 형성시기를 “일연 사후인 충렬왕 16년에서 공민왕대 사이로 추정”한 박노준(1990)의 연구를 참고하면,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일연은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는데, 그가 남긴 기록 중 환웅에 관한 것은 중앙아시아에 널리 퍼져있었던 게세르 영웅 신화를 많이 반영한 것이다. 고려가 원(元)의 부마국으로 있었던 시절, 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부로, 일연은 환웅과 단군을 부각시켰고, 그의 사후 몽골의 게세르가 아닌 민족주의 역사적 존재 신라의 ‘처용’이 재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처용은 신라에 뿌리를 둔 ‘게세르’를 능가하는, “十二諸國이 모다 지어셰온 아으 處容아비” 대신(大神)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한다. 일단 처용은 몽골 인의 게세르에 맞설 수 있는 자주적 대신이었는데, 고려 말 왕 들 중에서 대신 처용으로 인정될 만한 이는 고려에서 몽골의 원(元)을 내보내고, 자주 고려의 터를 닦으면서 다음 시대를 위한 성리학 보급을 위하여 성균관을 세운 공민왕이다. 그는 왕권과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사후 그의 생활은 양주동에 의해 남녀 간의 사랑 쪽으로만 치우치게 번역된 신라 향가 처용가의 “네 다리”를 연상케 하는 점이 있다.
그런데 조선 초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사람들은 의리를 명분으로 삼는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왕조의 위엄을 노래하면서 그렇게 정숙하지 못한 내용의 가사를 궁중 정재에 포함시켜 불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데, 이를 이방원의 ‘하여가’와 결부시켜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리/우리도 이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는 한역되어 전한다(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한문으로 번역된 하여가의 핵심은 ”성황당 후원이 퇴락한들 엇더리. 우리도 이와 같이 얽혀서 불사(不死)하면 엇더리“ 이다. 성황당은 고려 종교문화의 중심 사원이었는데,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한 학문적 실력을 갖춘 이방원은, 이제 퇴락한 성황당을 버리고 성리학의 새로운 사당을 지어 새로운 시대에서 불사(不死)하자고, 성황당파 성리학자 정몽주를 설득한 것이다.
고려 말의 하여가에는 고려 말 역성혁명을 꿈꾸었던 ‘이 왕조면 어떻고 저 왕조면 어떤가하는’ 혁명파 지식인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이는 그들이 공부하였던 의리의 성리학과는 정면으로 부딪히는데, 맹자의 역성혁명을 공부한 그들은 결국 혁명을 선택하였다. 문제는 조선 건국의 이념인 성리학과 역성혁명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와 고려 말 상황에서 급부상한 이성계(李成桂)라는 낯선 게세르를 어떻게 고려 민심에 정착시킬 것인가이다. 이성계의 조부와 부친은 원(元)의 쌍성총관부 천호(千戶)로 집안이 적극적 친원(親元)세력이었는데, 중국에서의 원명(元明) 교체(交替) 정세를 보고, 공민왕을 도우면서 친고려로 넘어온, 쉽게 믿을 수 없는 집안이었다. 그가 우리 역사 속의 게세르라는 것을 널리 퍼뜨려야 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몽골의 게세르가 아닌, 우리의 게세르’라는 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몽골의 원과 싸운 고려의 처용대신 공민왕이 이용되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 공민왕을 연상케 하는 공양왕(恭讓王)으로 시호가 정해지고, 조선왕실의 종묘에 공민왕 신당이 있는 것은, 공민왕은 죽은 후 이성계 왕가로 환생(?)했다는 것이고, 이는 그들의 역성혁명은 역성혁명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변명의 증거이다.
이렇게 이성계를 내세운 역성혁명파는 ‘공민왕-공양왕-새로운 태조’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한 해답을 ‘공민왕과 처용’에서 찾았는데,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신돈/반야’ 에 얽힌 사연은 ‘헌강왕/처용/역신’과 겹쳐지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두 왕의 사후 왕위 계승에 있어서도, 두 왕의 적자가 모두 왕이 되지 못한 점도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처용가의 ‘네 다리’ 중 두 다리는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 다른 두 다리는 역신(疫神)으로 표현된 반 왕실 세력을 의미하고, 역신파 세력은 처용의 아내로 알려진 ᄎᆞᄅᆞん(處容 아바大神)을 모시는 신녀(神女)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보장받으려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 처용가는 적절치 못한 왕위계승을 신의 뜻으로 정당화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당시의 상황은 “그때 산신이 춤을 헌정하고, 노래하였는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등자(等者)가 그것이다.”는 어려운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일연은 이를 “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라 했는데, 智理國者의 의미는 <유리니사금조>에, “니사금(尼師今)은 "치리(齒理)"라는 뜻으로 ⌜이[齒]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는 말⌟이라는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智理國者는 성지인(聖智人)으로 표현되는 국가 최고의 정신적 스승이고, 智理多는 그러한 집단/지리떼를 뜻한다. 이들을 쉽게 이해하자면,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동조하지 않은 고려 말 조선 초 두문동(杜門洞) 태학생(太學生) 72인을 예로 들 수 있다.
헌강왕 때 이미 나라가 기울어 망하는 징조가 보이자, 신라의 智理多는 도파도파(都波都波)하였다. ”都 도읍 도, 못 지//波 물결 파, 방죽 피, 물 따라갈 피“ 한자 풀이를 참고하면, 智理多都波都波는 ”왕도의 최고 성지인(聖智人) 집단이 바람 부는 못의 물결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물 흘러가는 대로 따라갔다“로 해석된다. 좀 더 현실적으로 그들은 왕당파와 반왕당파로 나뉘어 몰려 흔들렸고, 일부는 처용가를 부르면서 반왕당파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결국 헌강왕은 재위 12년 만에 죽고, 두 살 난 아들 대신 왕의 동생 김황이 50대 왕(정강왕)이 되었는데, 그 다음 해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었다. 난을 진압한 정강왕 또한 그 해 5월 병으로 죽고,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유학을 공부한 6두품 지식인을 포함한 많은 성지인(聖智人) 집단은 대개 왕건에게로 가서, 결국 고려 건국의 주체 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신라의 <처용가>는 청춘남녀간에 일어난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고, 신의 사랑을 차지하는 자가 왕이 된다는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신가(神歌)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처용가를 좀 더 보완한 고려처용가는 공민왕의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던 고려 말 지식인들에게 ‘하여가’라는 혁명가로 윤색 번안되어 불리었고,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사랑을 위한 적과의 동침’이라는 선화공주의 사연이 담긴 <서동요>도 전해져 왔었기 때문이다. <하여가>는 새로운 연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자하는, 고려 판 <서동요>와 <처용가>이면서,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들의 마음이 좀 더 현실적으로 내비쳐진 혁명가였다. 그렇게 해서 고려 말 <처용가>와 <하여가>가 불리어 퍼지면서 이성계는 자연스럽게 고려의 처용 아바 공민왕을 계승한 조선의 처용 아바로 자리 잡게 되었고, 공민왕을 상징하는 고려의 처용무는 이성계와 그를 이은 조선 왕조의 왕들을 위한 처용무로 된 것이다.
그러면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혁명파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게 장살(杖殺)된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의 시제(詩題) 〈11월 17일 밤에 공익이 부르는 신라의 처용가를 들었는데, 성조가 비장해서 사람을 감격시키는 바가 있었다(十一月十七日夜聽功益新羅處容歌聲調悲壯令人有感)〉” 는 성조비장(新羅處容歌聲調悲壯)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고려 왕실이 쓰러지기 직전 새로운 왕조를 꿈꾸는 이들의 하여가가 불리던 시기, 고려 왕조의 운명을 예감한 이들은 헌강왕의 사연이 담긴 처용가를 비장(悲壯)하게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들 또한 결의를 다지는 비장한 마음으로 부르고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헌강왕 시대는 왕권이 조금 안정되었지만, 그 이후 신라의 왕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갔고, 마침내 고려로의 왕조 교체가 일어났는데, 그 일을 추진한 주도세력은 유학을 공부한 6두품이었다. 그들은 왕건을 내세워 고려를 건국하고, 문벌귀족으로 군림하였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어 성황당을 고집하는 고려 왕실을 버리고 새로운 조선 왕조를 세우고자 하였던 이들은 성리학이라는 신유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신라 말, 고려 말 상황이 비슷하게 되풀이 되었고, 여기서 밤에 남모르게 부른 것이 ‘이 왕조면 어떻고 저 왕조면 어떤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불사(不死)하세’라는 ‘하여가’이고, 낮에 모두 들으라고 목청껏 불렀던 것이 ‘네 다리’의 처용가이다. 이는 정권 교체, 왕조 교체를 꿈꾸는 지식인들이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신라 처용의 아내를 슬쩍 끄집어내어, 역성혁명을 비유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즉 고려 말~ 조선 초의 처용가는 왕조 교체의 정당성과 이성계가 (고)조선을 계승한 자주적 처용이라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처용무는 조선 왕조의 궁중 정재에 당당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조선 처용무는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유교에 맞게 오방무로 개조되었고, 역의 원리를 차용하여 우주의 탄생과 운행, 순환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그 속에 진행되는 왕조의 번창, 그것을 주도하는 ‘대신(大神) 대왕(大王)’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일이 처음 제대로 진행된 것은 세종 때이고, 완성된 것은 성종 때 였다. 그리고 조선 말 기울어가는 왕조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새로운 강력한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던 고종 때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가 종합편찬된 것은, 고종을 ‘처용’으로 삼고 싶었던 당시 지식인들의 이상을 정리한 것이다.
언락(言樂) 가락에 얹어 부르는 <처용무 창사 처용가(1)>: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大平 羅候德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三災八難이 一時消滅샷다
봉황음중기의 가사를 가곡 중 편(編) 곡조에 얹어 부르는
<처용무 창사 처용가(2)>:세종 때 개작
山河千里國에
佳氣鬱葱葱허샷다
金殿九重에
明日月허시니
群臣千載에 會雲龍)이샷다
熙熙庶俗은
春臺上이어늘
濟濟群生은
壽域中이샸다
”로 시작되는 원래의 봉황음중기의 가사를 가곡 중 편(編) 곡조에 얹어 부른다.
<고려 처용가>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大平 羅候德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三災八難이 一時消滅샷다
어와 아븨즈이여 處容아븨 즈이여
滿頭揷花 계우샤 기울어신 머리예
아으 壽命長遠샤 넙거신 니마해
山象이슷 깅어신 눈섭에
愛人相見샤 오어신 누네
風入盈庭샤 우글어신 긔예
紅挑花티 붉거신 모야해
五香 마타샤 웅긔어신 고해
아으 千金 머그샤 어위어신 이베
白玉琉璃티 어신 닛바래
人讚福盛샤 미나거신 애
七寶 계우샤 숙거신 엇게예
吉慶 계우샤 늘의어신 맷길혜
설믜 모도와 有德신 가매
福智俱足샤 브르거신 예
紅鞓 계우샤 굽거신 허리예
同樂大平샤 길어신 허리예
아으 界面 도샤 넙거신 바래
누고 지어셰니오 누고 지어셰니오
바늘도 실도 업시 바늘도 실도 업시
處容아비 누고 지어 셰니오
마아만 마아마니여
十二諸國이 모다 지어셰온
아으 處容아비 마아만 마아만니여
머자 외야자 綠李야
리나 내신고 야라
아니옷 시면 나리어다 머즌말
東京 래 새도록 노니다가
드러 내자리 보니 가리 네히로섀라
아으 둘흔 내해어니와 둘흔 뉘해어니오
이런저긔 處容아비옷 보시면
熱病神이아 膾ㅅ가시로다
千金을 주리여 處容아바
七寶를 주리여 處容아바
千金 七寶도 말오
熱病神을 날자바 주쇼셔
山이여 히여 千里外예
處容아비 어여려거져
아으 熱病大神의 發願이샷다
그러면 현재 추어지고 있는 조선시대 오방처용무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는 티베트Bon 교에 고려와 조선 처용무의 원본에 해당하는 춤
(Youtube 영상 :Bon Religion, Mask Dance 2010, Old Tibet Culture still alive .//Mask Dance #Bon Religion. Old ritual. 2010, Dholanji Menri Monastery . //Magyud Mask Dance, #Bon Religion, Old rituals . //Mask Dance 2010, Bon religion.(이 영상의 춤이 현재 한국에서 시연되는 오방처용무와 춤의 구성, 춤사위가 가장 비슷하다. 이를 참고하면 고려 말에 오방처용무의 기본 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Bon 교와 관련된 영상은 Dharane TenNyima 이 올린 것이 많다.)
이 있다는 것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는데, 고려에 티베트 문화가 소개된 것은 충렬왕~공민왕 시대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권력 싸움에 휘말려 티베트에서 1년 7개월 간 살았던 충선왕과 관련 있다. 그는 베이징에 만권당을 지어 고려 학자들을 위한 문화 활동을 하였었지만, 끝내 귀국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처용무와 관련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충혜왕과 우왕이 처용희를 즐겼다는 <고려사> 기록을 보면, 충선왕을 전후하여 티베트 처용무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어떤 형태의 춤이 전해졌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용재총화>에 검은 옷, 검은 모자, 적면유광(赤面油光)의 가면을 착용한 독무(獨舞)였다는 기록은 어쩌면 Youtube 영상 :The 17th Gyalwang Karmapa Performed the Lama Dance for the First Time in India 와 His Holiness Karmapa performs the "Go-Ma" sacred Dance. 에 보이는, Karmapa의 독무와 관련이 있을 듯도 하다. 그리고 조선 궁중에서 나례(儺禮)를 행한 뒤에 전도(前度)와 후도(後度) 두 차례에 걸쳐 오방처용무를 추었는데, 후도의 춤은 오방무를 추고, 몸을 흔들고 환희의 극한 모습을 보인다(搖身極歡)는 <악학궤범>의 기록을 참고하면, 후도의 춤은 Bon 교에서 추었던 오방무가 연출되지 않았을까 한다.
고려 성황당이 티베트 Bon 교 사원의 연장이라는 것은, 본교 사제의 의상은 한국의 앵삼(鶯衫)과 형태가 비슷하고, 춤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의 모자에 주로 빨강색, 파랑색, 노랑색, 간혹 녹색의 여러 긴 천을 매어 달고 의식을 진행하는 Bon 교 사제의 모습과 영(靈)과의 소통을 하는 무(巫)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사제의 복장은 긴 천이 내리 걸려 있는 고려-조선의 성황당 신수를 연상케 하는데, 본교에서는 신수가 매우 중요시되고, 이는 세습 사제에게 그대로 상속 전승된다. 이러한 몇 사실을 통해 성황당이 고려-조선의 Bon 교 사원이었다는 것은 확인되는데, 어쩌면 신라 헌강왕 때도 Bon 교 사원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당시 동해 용은 일곱 아들과 함께 춤을 추었는데, 모두 8인의 무용수가 등장한 것이다. Youtube 영상: Mask Dance #Bon Religion. Old ritual. 2010, Dholanji Menri Monastery 에 보이는 무용수의 숫자와 거의 일치한다. 티베트 승려들의 학습토론 정원을 최라chṏra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Bon 교 의식 춤이 추어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헌강왕이 보았을 춤은 최라chṏra와 관계있는 처용무였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사원 못지않게 고려 왕실에 영향을 주었던 성황당(서낭당)의 기원을 고려 문종 때에서 찾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다만 문종의 아들 의천이 중국에서 불교 천태종을 공부한 후 돌아와 흥왕사(興王寺), 국청사(國淸寺)를 중심으로 해동천태종을 창립하여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는 것과 문종 때 성황사가 처음 설치되었다는 것은, 서로 관련이 있다. 문종은 불교와 성황당을 이용하여 문벌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하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다.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진다. 국행서낭은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괴산·현풍·양산·신성(新城)·밀양·전주·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하려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낭당, 성황당>> ⟶그래서 고려 성황당을 계승한 조선 왕조의 궁중에서 Bon 교 오방무,(티베트 처용무)가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고려 처용가>에서 Bon 교 성황당 문화와 관련된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티베트 원시부족사회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영웅 서사시 ‘게싸르 대왕전기’에서는 ‘아니(阿尼)’ ‘업목(業木)’ ‘막마(莫瑪)’ 등 고대 본교 무사의 정식명칭을 확인 할 수 있다. <Daum. 카페, 지장신행회>“. 여기서 막마(莫瑪[mò][mǎ])는 ‘ᄆᆞᄆᆞ’이고, 이는 ”處容아비 마아만 마아만니여“와 역신(疫神)을 ‘마마’로 부르는 것에 보인다. 그리고 고대 본교의 주술사들이 행하였던 ‘롤랑(rolang, 일어선 시체)’이라는 ‘시체의 부활’ 의식의 명칭은 ”머자 외야자 綠李[lǜ,lù][lǐ]”의 존어 표현 ᄅᆞᄅᆞんrolang에서 볼 수 있다.
위의 예는 극히 일부의 것이지만, 티베트 본교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사실이고, 불교와 Bon 교 중에, 왕족이나 일반인들에게 좀 더 자극적으로 다가와 자리 잡은 것은 하늘의 현현이 왕이라 하고, 부활 의식을 치르는 Bon 교이다. 고대 본교 주술사는 사람이 죽고 난 뒤 시체 위에 사흘 동안 엎드려 입맞춤 상태로 있으면서, 시체에 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러면 시체의 혀가 밖으로 흘러나오는데, 이 혀를 잘라버리는 것이 ‘롤랑’이라는 부활 의식의 일부이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 처용가의 가사 중 일부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는 처용아바 대신이 혀가 잘린 죽은 사람의 속으로 들어와 살아있는 사람으로 부활한 것(人生) 이고, 그는 혀가 없어 말은 하지 못한다(相不語). 그렇지만 그의 위력은 “三災八難이 一時消滅샷다”로 표현될 만큼 엄청나다. 그렇게 죽었다가 부활하여 환생하는 문화는 서아프리카 폰 족(The Fon people, also called Fon nu, Agadja or Dahomey, are a major African ethnic and linguistic group)의 부두 교(Vodoun, Vodzu or Vodu, which is etymologically linked to Vodun – a term that refers to their theological concept of "numerous immortal spirits and deities".)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창조주 신은 Mawu or Mahu 로 불리는 여신인데, 달의 여신이다. 여신의 남편은 Lisa로 태양의 신이다. 여신의 이름 Mawu or Mahu와 처용가에 나오는 “處容아비 마아만 마아만니여”는 서로 관계있을 것이다. 이 문화는 티베트 라싸 포탈라 궁에 본부를 둔 라마교에도 수용되었고, 달라이라마는 대를 이어 환생한 대스승이자, 대신이다.
고려 말 사람들은 원의 라마교 문화와 본교 성황당 문화를 통하여, 환생하는 문화에 익숙하였었기에, 권문세족이라는 거대한 현실의 벽에 막힌 공민왕이 시도한 마지막 의식은 자신의 죽음을, 현생으로 끝내지 않고 처용아바로 다시 부활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공민왕은 본교 성황당 롤랑 의식을 통해, 자신이 강력한 대신 ‘처용’이 되어 현실 속의 왕으로 부활하기를 꿈꾸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배척하였고,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이러한 것들은, 합리주의 성리학을 공부한 고려 말 혁명파들이 남긴 역사서에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겨질 수 없는 것이었지만, 고려 종교문화에 익숙하였던 고려 말-조선 초 사람들은 이성계를 롤랑의식을 통해 환생하고자 하였던 공민왕의 또 다른 인생(人生)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 종묘에 있는 공민왕 신당과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다는 것은, 조선 건국 세력들이 부활의식을 행하는 Bon 교를 정치에 이용하여, 공민왕~공양왕 당시의 고려민심을 이성계에게 자연스럽게 모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용무 창사를 통해 ‘처용(處容)’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太平 羅候德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以是人生애 相不語시란
三災八難이 一時消滅샷다
처용아바가 삼재팔난을 일시에 소멸하였으니, 이는 엄청난 위력의 대신(大神)인데, ‘처용아바’의 ‘아바’는 ᅘᆞ에서 비롯된 말이고, 초기 기독교 그리스 어 문서에 Ιαβε(ᅘᆞ>ᄋᆞᄇᆞ>[jave]), 라틴 어로는 Jehovah /dʒɨˈhoʊvə/로 , 히브리 성경에는 "Yehowah" 또는 "Yahweh"로 번역되어 있는 천둥 번개를 마음대로 부리는 대신(大神)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야의 이비가(夷毗訶[yí][pí][hē]), 신라 지마 니사금의 태자였던 이칠 갈문왕(伊柒葛文王)의 휘 이비(伊非[yī][fēi]), 한국어 ‘에비’(명사:어린아이에게 하는 말로, 무서운 가상의 존재/감탄사:어린아이가 위험한 것이나 더러운 것 따위를 만지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말리려고 하는 말) 등에 보이는 ‘ᄋᆞᄇᆞ’ 정도로 보면 된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역신(疫神)을 막는 부적으로 활용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처용 아바의 모습은 고려가요 처용가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고려가요 처용가에는 열병신(熱病神) 정도는 회(膾)의 가시 정도로 가볍게 처리하는 위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단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처용은 질병, 특히 역병(疫病), 열병(熱病)을 막는 대신(大神)이다.
이러한 대신의 본모습을 잘못 오해하게 것이 “東京 래 새도록 노니다가
드러 내자리 보니 가리 네히로섀라 아으 둘흔 내해어니와 둘흔 뉘해어니오”이다. 이를 자유부인의 사랑행각과 연관 짓는다면, “신라의 처용가를 들었는데, 성조가 비장해서 사람을 감격시키는 바가 있었다(十一月十七日夜聽功益新羅處容歌聲調悲壯令人有感)〉”는 기록과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 궁중 정재에 이런 노래가 불리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삼국유사>의 기록과 향가의 현대어 풀이는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대신(大神) 처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해 처용무 창사를 다시 보면,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太平 羅候德
신라 성스러운 시대 밝게 빛나는 성스러운 시대는 라후의 덕(德)이다.
이 노래가 헌강왕 때 처음 불리었다면, ‘신라 성대’는 성골 출신 왕의 통치시대, 대체로 지증왕/법흥왕~선덕/진덕여왕 때까지의 발전되어가는 신라를 찬양한 것이고, ‘소성대’는 신라 중대(태종 무열왕~혜공왕) 진골 출신 왕들이 불국사를 창건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태평성국 불국토를 이루었던 시대다. 다음 신라 하대(선덕왕~경순왕)에는, 대체적으로 귀족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다투었고, 반란이 많았다. 49대 헌강왕 때는 사회가 안정되고 왕권도 안정되었지만, 나라가 기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시기에 헌강왕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성대한 신라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고 싶어 하였고, 그런 분위기를 띠우기 위해, 879년 3월 용의 아들을 대신(大神) 처용의 화현(?)으로 삼고,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이에 그 해 6월 왕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고 죽였다. 헌강왕의 변혁 시도에 기존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인데, 기록상으로는 헌강왕이 天下太平 시대를 이룬 것으로 되어 있고, 창사에는 그것이 라후(羅候)의 덕(德)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라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신라 역대 왕들의 덕택이다’로 보려면, ‘라(羅) 후(侯)’로 기록되어야 정상인데, 후(候[hòu,hóu]묻다, 시중들다, 기다리다)로 표기하였으니, ‘ᄅᆞ(羅[luó])’가 핵심어이고,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太平는 ‘라(羅)[luó]’를 모신 덕이다”로 이해된다.
그러면 처용무를 추면서 부르는 노래에 등장하는 ‘ᄅᆞ(羅[luó])’는 신라의 주신(主神)이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신라(新羅)’는 “새로운 ‘라’ 신의 나라”로 해석할 수 있다. ᄅᆞ 신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하고, 먼저 처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처용(處容[chù,chǔ][róng])은 용왕의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용(容[róng])과 용(龍[lóng])의 사성음은 ‘ᄅᆞᆼ’으로 같다. ‘ᄎᆞᄅᆞᆼ([chù,chǔ][róng])/ᄎᆞᄅᆞん’은 ᄎᆞᄅᆞ의 존어 표현이다. 기본어 ‘ᄎᆞᄅᆞ’는 신라 이외의 지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불가리아와 러시아 통치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차르(Tsar[zaːr], Tzar,Czar [zaːr](Old Church Slavonic: ц︢рь (usually written thus with a tilde) or цар, цaрь; also Czar or Tzar in Latin alphabet languages)는 불가리아의 Simeon I 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러시아 초원지대에서 생활하던 아리안이 남하하여 인도 지역으로 가서 남긴 산스크리트 어 acharya (IAST: ācārya; Tamil: āsāri; Pali: acariya)를 통해, ‘ᄎᆞᄅᆞ’의 최초 사용 연대는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charya(=a+charya)’는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 교조(敎祖) 또는 그 정도 수준의 최고 지도자를 칭하는 용어인데, 힌두교에서는 베다의 스승(a teacher or guru), 불교에서는 장로(長老 a senior teacher), 자이나교에서는 교단의 최고지도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아리안 사회의 크샤트리아 계층을 한자어로 찰제리 또는 찰리(刹利[chà,shā][lì])로 번역하였는데, 이들이 인도 사회의 ‘acharya(=a+charya)’ 였던 것이다.
그리고 크샤트리아를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찰(제)리’로 한 것은, 중국 지역에서 이미‘ᄎᆞᄅᆞ’ 문화를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 있는 것이 신라의 ‘치리(齒理)’이다. 《삼국사기》<유리니사금조>에, “니사금(尼師今)은 "치리(齒理)"라는 뜻으로 ⌜이[齒]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김대문(金大問)도 치리의 방언이라고 설명했다”고 실려 있다.
《삼국사기》의 ‘치리’ 뜻풀이는 이른바 원시 사회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밀림지대 사람들의 지도자들은 동물(,주로 멧돼지) 이빨로 만든 장식 목걸이를 신분의 상징으로 착용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목걸이의 이빨 수가 많다는 것은, 그가 멧돼지를 많이 사냥하였다는 것이고, 그만큼 용맹하고 힘 있는 자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를 ᄎᆞᄅᆞ(齒理)라고 불렀던 것인데, 그것의 뿌리는 남아프리카의 Chilub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 잠비아의 2대 대통령이었던 Frederick Jacob Titus Chiluba (1943−2011)와 잠비아의 5대 대통령 Michael Chilufya Sata (1937 −)의 이름에 보이는 Chiluba(=chi+lu+ba)는, 이들이 인도의 크샤트리아에 해당하는 남아프리카 지배층 ᄎᆞᄅᆞ 집단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처용(處容[chù,chǔ][róng])은 ᄎᆞᄅᆞ=ᄎᆞ+ᄅᆞ(chi+lu)로 분석되고, ‘ᄎᆞ’에 인칭어미 ᄅᆞ(리(吏)가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처용의 핵심어는 ‘ᄎᆞ’이다.
신라 ᄅᆞ 신의 나라에 처용의 ᄎᆞ 신이 처음 보이는 것은 신라 2대 국왕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AD 4−24)의 칭호에 보이는 ‘ᄎᆞᄎᆞ((次次[cì][cì])’이다.
차차웅(次次雄[cì][cì][xióng])의 차차(次次[cì][cì])는 ‘ᄎᆞ[cì]’를 중첩하여 그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낸 것인데, 이러한 어법은 아프리카 반투 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차차웅을 한문으로 의미 번역한 것이 자충(慈充[cí][chōng])이고, 이를 통해 ‘ᄎᆞᄎᆞ’의 종교적 의미는 ‘자(慈[cí])가 충만한 것’임과 신라에는 건국 초기부터 ᄅᆞ 신과 ᄎᆞ 신의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처용은 ‘ᄎᆞᄅᆞ’로 불리는 용왕의 아들, 왕족을 칭하였던 칭호, 크샤트리아와 같은 지배자 집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용이 어디 출신이었는지는 인도의 체라(Chera) 왕조, 촐라(Chola,"Cholan") 왕조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고, 이 지역의 사람들이 말레이시아로 진출하여 세운 것이 Cheras이다. 베트남 중앙 고지대 Lâm Đồng 주에 살고 있는 Churu (or Chru; called Chu Ru or người Chu Ru in Vietnamese, người meaning "people") 인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어(Malayo-Polynesian language)인 Chru 어를 사용한다. Churu (or Chru)를 통해, ᄎᆞᄅᆞ 문화는 폴리네시아 지역으로도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회 별신굿, 고성과 마산의 오광대놀이에 등장하는 ‘초라니’는, 원래 삼한 지역의 찰리(刹利)/치리(齒理) 족으로 인도 남부 지역에서 말레이시아 Cheras 지역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방으로 이주해왔을 것이다. 삼한 지역의 초리국(楚離國[chǔ][lí][guó]), 치리국국(致利鞠[zhì][lì][jū]國), 첩로국(捷盧[jié][lú]국)은 이들과 관계있을 것이다.
당시의 ᄎᆞᄅᆞ 문화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하였던 곳은, 섬진강 유역에 있었다는 ‘상치리(上哆唎)ㆍ하치리(下哆唎)’일 것이다. 이곳 지명 ‘치리(哆唎)’의 ‘치(哆[duō]크다, 큰 모양, 너그러운 모양, 관대한 모양, 입을 벌리다, 크게 벌린 입)의 음훈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니사금/치리(齒理)’의 해설과 일치한다. ‘치리(哆唎)’는 동물이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을 드러내고 크르렁 거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의 ᄎᆞᄅᆞ는 치리(齒理)로 기록되었었고, 이는 헌강왕 때 지리(智理), ‘처용(處容ᄎᆞᄅᆞん)’으로 사용된 것이다. 치리와 처용의 한자로 번역된 의미는 법흥왕의 휘에서 볼 수 있다.
법흥왕(法興王) 휘(諱) 원종(原宗)은 ‘ᄎᆞᆯᄆᆞᄅᆞ’, 《일본서기》의 ‘좌리지(佐利遲[zuǒ][lì][chí])(ᄎᆞᆯ치)는 곧 이 왕에 해당한다. ‘원(源)’의 고훈(古訓) ‘ᄎᆞᆯ’. 新羅王 佐利遲, 遣久遲布禮 <일본서기 권17 繼體天皇世3년> 《증정 고가연구》(,양주동, p70) ᄎᆞᆯ은 차르(Tsar[zaːr], Tzar,Czar [zaːr](Old Church Slavonic: ц︢рь (usually written thus with a tilde) or цар, цaрь; also Czar or Tzar in Latin alphabet languages)에서 볼 수 있고, ᄆᆞᄅᆞ는 마립간의 마립(麻立[má,mā][lì])에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처용무 창사의 신라 성대(聖代)는 법흥왕 원종 ᄎᆞᆯᄆᆞᄅᆞ 부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치리는 삼한 시절 또는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문화이고, 법흥왕 시대까지는 확실하게 유지되었으며, 헌강왕이 동해 용의 아들을 처용으로 명(名)했다는 것은 그가 성대(聖代)의 치리, ᄎᆞᄅᆞ/처용 대신을 간절히 원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ᄅᆞ 신과 ᄎᆞ 신의 문화는 조선 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는데, 그 흔적은 처용무 창사의 라후(羅候/羅侯[luó][hóu,hòu]), 후도처용무에 이어 「학무(鶴舞)」·「연화대(蓮花臺)」 정재를 시연하였다는 <악학궤범>의 기록과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하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ᄅᆞ 신, ᄎᆞ 신, 처용무, 학무, 연화대는 서로 관계있는데, 이에 관해서 제대로 이해하자면, 필자의 저서 <훈민정음에 담긴 인류문화사>와 블로그(tiangold)에 게재된 [天金10] 난생신화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를 읽어보는 것이 좋다.
먼저 ᄅᆞ 신과 학무, 연화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일부만 소개한다.
이집트 고왕국 제3 – 6왕조(2686−2134 BC) 때에 Hermopolis에는 그리스 인이 Ogdoad(八重, the eightfold)로 불렀던 팔신우주개벽설(八神宇宙開闢說)이 성행하였고, 당시 우주의 신은 Ra 이었다. 그는 보통 태양신으로 대변되었지만, 우주의 근원자이다. Ra를 중심으로 하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집트 신화는 지역에 따라 ‘알’과 ‘연꽃’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가 있다.
‘알’ : 물로 범벅이 된 진흙 덩어리(mound) 위로 우주교합의 흔들림이 있은 후에 태초의 물에서 ‘알 모양의 존재’가 나타났다. 신화에는 우주의 새가 이 봉분 위에 알을 두었다고 한다. 알에는 Ra가 들어 있었다. 어떤 신화 이야기에는 우주의 거위가 알을 두었다고 하고, 따오기 머리를 한 이집트 달의 신 Thoth가 준 선물이라고 말해지기도 하고, 따오기(ibis)가 두었다고도 한다. 이것에서 우주 삼라만상이 창조되었다.
이에 대하여 팔신우주개벽설의 내용을 참고하여 부연하면, 음과 양으로 된 4쌍의 요소(태초의 물:Naunet and Nu, 공기 또는 보이지 않는 것:Amunet and Amun, 암흑:kauket and Kuk, 그리고 영원 또는 무궁의 공간:Hauhet and Huh)는 우주의 원천적 구성 요소로 항상 있었던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우주의 흔들림으로) 이들의 교합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게 되었다. 새 존재(,새로운 우주)가 열리게 되었을 때, 그 속에서 불타는 태양 Ra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동안의 휴식을 취한 후에 Ra는 다른 요소(deities)와 결합하여 삼라만상을 창조하였다.
‘연꽃’ : 팔신우주개벽설 ‘알’시대가 지나자, 구신우주개벽설(九神宇宙開闢說,Ennead cosmogony)이 헬리오폴리스에서 숭배되었으며, 신왕국 시대(1549−1069 BC)가 전개되면서 Atum이 (푸른)연꽃 봉오리에서 출현하였다는 ‘연꽃’문화가 성행하였다.
구신우주개벽설의 중심지인 헬리오폴리스는 나일 강 델타의 꼭대기 지점의 북쪽 나일 강의 동쪽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왕조 시절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중요한 도시이다. ‘태양의 도시, 태양의 눈’으로 불리었고, 이집트 어로는 ỉwnw로 불린다. 이곳은 나일 강 델타 지역의 특징인 연꽃이 피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연꽃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연꽃은 기온이 내려가는 밤이 되면 꽃잎이 봉오리 상태로 되고, 아침 햇빛을 받아 기온이 상승하면 꽃잎이 벌어져 한 낮에 활짝 핀 상태가 되는 것을 반복한다. 태양이 지하세계로 내려가면, 연꽃은 꽃잎을 닫고 죽은 상태로 되었다가, 다음 날 아침 연꽃에 맺힌 이슬이 떨어지면서 꽃잎은 피어나고, 새로운 연꽃은 태양과 함께 부활한다.
연꽃은 봉오리 상태로 폭발적인 상호작용교합 후에 태초의 물로부터 출현하였다고 말해지는데, 봉오리는 물위에 떠서 천천히 꽃잎을 열어 속에 든 딱정벌레(Khepri)를 내보였다. Khepri는 창조와 재생을 의미하는 아침 해, Ra는 한 낮의 태양, Atum은 저녁 해와 새벽에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땅으로 되돌아온 뒤의 태양을 상징한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Khepri는 곧 바로 울고 있는 소년 Nefertum으로 변신하였고, 그의 눈물로부터 대지의 생명체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울고 있는 소년(Nefertum)’은 부활한 태양을 상징하고, 이슬 같은 그의 눈물을 통해 삼라만상은 매일 소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왕국 시대에 ‘부활과 재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화는 인도를 거쳐 주로 해안을 따라 동쪽 지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거의 같은 구조의 이야기가 동북아시아 어느 곳에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개벽설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의 대리자인‘왕이나 왕비’의 출생 신화에 응용되었다. 일영(日影)을 쬐고 옆구리로 낳은 알에서 태어난 주몽, 하늘에서 내려온 금란(金卵)에서 태어난 김수로, 그리고 임당수에 빠져 죽었다가 연꽃 봉우리에서 다시 태어나 왕비가 된 심청을 통해, 한반도에는 아프리카 이집트 ‘알’과 ‘연꽃’ 두 문화가 전래되었고, 신라의 ᄅᆞ(羅) 신을 통해, 이집트의 Ra 신의 문화도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궁중 정재 학무의 학은 우주 삼라만상이 창조된 알을 낳은 근원자이다. 쉽게 말해 하느님이 새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학무는 우주의 원천적 존재를 찬양하는 춤이다. 이것에는 태양신 ᄅᆞ Ra를 찬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고, 라후(羅候)의 ‘라’는 이를 나타내고, Ra의 정확한 고대 이집트 발음은 ‘ᄅᆞᅘᆞ>ᄅᆞᄋᆞ’ 이다. 라후는 ᄅᆞᅘᆞ를 음역한 것이고, ᄅᆞᅘᆞ는 ‘ᄅᆞᄒᆞ, ᄅᆞᄏᆞ, ᄅᆞᄉᆞ’로 발음되는데, 앞에서 언급된 Fon 족의 태양신 Lisa는 ᄅᆞᅘᆞ가 ᄅᆞᄉᆞ로 발음된 것이다.
Ra (/rɑː/;[1] Ancient Egyptian: rꜥ or rˤ; also transliterated rˤw; cuneiform: 𒊑𒀀 ri-a or 𒊑𒅀ri-ia)[2] or Re (/reɪ/; Coptic: ⲣⲏ, Rē)
신라의 라후(羅候)가 이집트와 관련 있다는 점에서, 이집트에서 라후(羅候)의 음이 보이는 것을 찾아보면, ‘(,+)’는 의 존칭어이면서, 그를 신으로 모시는 무리들을 나타내는데 로 표기된다. Rahab는 원시의 심연(abyss), 암흑과 혼돈의 수룡(水龍)을 나타내고, Leviathan and Tiamat에 비교된다. Rahab는 이집트를 상징하는 말이었고, 인근의 히브리 어로 ‘호령하는 사람("blusterer")’이란 의미이고, 히브리 성경에는 ‘분노, 사나움, 오만 무례함, 자만심’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중세 히브리 민담에는 바다(,특히 홍해)의 악마의 천사, 수룡, 신비한 바다의 괴물로 등장하는데, 이는 이것을 믿는 (이집트)사람들이 히브리 지역과 바다를 장악하고 지배하였으며, 나중에는 해적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 처용무 창사에 라후가 등장한다는 것은, 라후가 동해 용의 아들, 처용랑과 관계있다는 것인데, 위의 내용을 통해 동해 용이 바로 Rahab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Rahab 무리 중 일부는 바다를 따라 이동하여, 신라 지역 울주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헌강왕이 만난 용과 일곱 아들은 그 중의 일부였을 것이다. 즉 헌강왕이 학성(鶴城)에 갔다가 처용을 만났다는 것은, 이들이 학성에서 ᄅᆞᅘᆞ 신을 모셔왔다는 것이고, 이것이 처용무 창사의 ‘라후 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신라를 바로 연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중간 지역을 보면, Raha는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쿠르드 족 소년의 이름으로 사용되는데, ‘절대적임, 무한함, 절대적 권력과 권위’를 의미한다. 이 문화는 인도 지역으로 전해졌고, 인도 아셈 주, 인도네시아, 네팔의 지명에 보인다. 인도 힌두교에서 Rahu는 asura의 절단된 머리를 뜻하는데, 일식을 야기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여덟 마리의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는 뱀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가 문화시절 우주의 주재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Raha의 뜻과 일치한다. 이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Dusadh 또는 Paswan으로 불리는 힌두 신자들인데, 인도 북부(Uttar Pradesh, Rajasthan, Bihar, Uttarakhand and Delhi)와 동부 일부 지역((Jharkhand, West Bengal)과 국경 지역, 네팔 등지에 있다.
이를 통해 이집트의 ᄅᆞᅘᆞ 신 문화가 어떻게 신라와 연결되는지 알 수 있는데, 진흥왕은 인도 서축(西竺)의 왕이 보낸 금속으로 황룡사 장육존장을 만들었고, 울산광역시 동구 마골산(摩骨山)에 있는 동축사(東竺寺)를 지었다. 헌강왕의 망해사(望海寺)를 신방사(新房寺)로도 부르는 것은, 아마도 진흥왕을 흠모했던 헌강왕이 동축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성과 라후, 학무’가 이집트 문화와 관련 있다는 것은 연화대와 심청이 연화(蓮花) 왕비로 부활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심청전의 가장 극적인 대전환은 심청이 임당수에 빠졌는데, 연꽃 속에서 부활하여 왕비가 된 후, 맹인 잔치를 하여 아버지를 만나고, 많은 봉사들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이는 이집트 ‘울고 있는 소년(Nefertum)’의 조선 문화적 표현방식이다. 송에서 수입된 고려 궁중 정재 연화대(蓮花臺)에 등장하는 연꽃 술이 변한 두 동녀(童女)는 ‘울고 있는 소년(Nefertum)’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인데, 연꽃을 볼 수 없는 티베트 Mask Dance 2010, Bon religion...에는 승려가 두 동자를 데리고 나오는 것으로 변형되어 있다.
연화대는 고려에서 붙인 이름이고, 중국에서는 <자지무 柘枝舞>로 불렸는데, 연꽃에서 두 동녀가 나온다는 것은, 이집트 연꽃-부활 문화의 표현이다. 이는 현재 한국의 불교 사월초파일 연등 행사에서 어린 아이 모습으로 서 있는 석가모니 머리에 정관수를 들이 부어주는 붇다 아비세까 의식(세욕식 및 꽃 공양)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 불교문화의 부활절 표현인데, 초파일 즈음에 교회문화권에서는 계란과 결부된 부활절 행사를 행한다. 이는 두 문화가 이집트의 ‘알과 연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용무 또한 아프리카와 관련 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아프리카 처용의 모습은 Fon 족의 주술사와 신상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신라 처용(ᄎᆞᄅᆞᆼ)/ᄎᆞᄅᆞ/치리의 원조로 보았던 아프리카 Chiluba(=chi+lu+ba)는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조선 학무와 연화대가 아프리카 이집트와 관련 있다는 점에서, 이것의 원천적 뿌리를 아프리카에서 찾는다면,
Fon 족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나이지리아 동남부 지역에 주로 살고 있는 Igbo(,Ibo,The Igbo people, also "Heebo" or "Eboe") 족의 신 Chuku는 ‘Chi Ukwu or Chukwu, Chukouuee’로도 불리는데, 방언으로 Guio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이들 부족의 이름 "Heebo" or "Eboe"는 처용아바의 ᅘᆞᄇᆞ("Heebo"), ᄋᆞᄇᆞ("Eboe")와 같다. 이들의 신 Chuku/Chi Ukwu 의 "Chi"는 초자연적 존재(Arushi)인데, 지상에서 인간을 돌보아주는 수호령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들의 모든 것에 관여한다고 보면 된다. 더 나아가서는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삼라만상 모든 것들을 직접적으로 돌본다. 그래서 Chi Ukwu 또는 Chukwu는 최고 존재(最高[zuì][gāo],"the Supreme Being")로 불린다. {"Chukwu"="Chi" (,"spiritual being") + "Ukwu" (,"great in size")}
Igbo 족은 Chineke가 비/수목과 함께 세상과 삼라만상을 창조하였고, Chukwu는 태양이면서 최고신 God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Chukwu는 비를 내리게 하고 삼라만상 모든 것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전지전능의 최고신 God이라고 믿어진다. "Chukwu"="Chi" (,"spiritual being") + "Ukwu" (,"great in size")로 풀이되는데, 간단히는 ‘+:존칭접미사’이고, (,"Chi, Chu")가 핵심어다. ‘+’의 다른 표현이 ‘+ᄅᆞ(吏)’이다.
(,"Chi, Chu")의 중첩어 ᄎᆞᄎᆞ cheich(, 또는 cheche, Chéché, Ché Ché)는 바로 이 신(‘ᅘᆞ’>ᄒᆞ,ᄏᆞ,ᄉᆞ>ᄌᆞ,ᄎᆞ> "Chi")의 위력을 경외하여 부르는 말이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한국어 ‘째째하다, 칙칙하다’와 같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남아 있지만, 이는 모든 종교에 나타나는 말기적 현상에 불과하고, cheche는 후기구석기 시대부터 내려온 생명과 우주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를 차자표기로 기록한 것이 신라 2대 국왕 남해 차차웅의 차차([cì][cì])이다. 차차웅의 다른 표기 자충(慈充[cí][chōng])은 ᄎᆞᄎᆞ([cì][cì])의 존어표현 ᄎᆞᄎᆞᆼ/ᄎᆞᄎᆞん을 나타낸다.
차차웅을 통해 신라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cheich 문화, "Chukwu"="Chi" (,"spiritual being") + "Ukwu" (,"great in size")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신라에서는 치리(齒理), 처용([ᄎᆞᄅᆞん])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하늘(天)이란 뜻의 흉노어 치렌(기련(祁連[qí][lián])은 이 문화가 초원지대에도 전파되었다는 것인데, 남미의 칠레 Chile 는 ᄎᆞᄅᆞ 문화인의 남미 이주 흔적이다. 이와 관계되는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tiangold) ᄎᆞ 문화 시대를 참조하면 된다.
그러면 신라 처용무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는 기록을 통해 알기는 힘들지만, 일본은 신라 문화를 많이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고대 문화가 많이 보전되어 있는 일본 bugaku, 특히 일본 춘앵전은 많은 참고가 된다. 이들의 춤 동작 중 다리 품세는 한국 처용무의 것과 매우 닮아 있고, 위로 올렸다 내리는 독특한 다리 품세에는 마오리 족의 독특한 의식춤 동작도 보인다. 이를 참고하면 가장 고전적인 신라 처용무는 일본 춘앵전이나 2015 熱田神宮 雅楽 舞楽神事 蘭陵王, 2017宮島厳島神社・元始祭 「 陵 王 」 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오방처용무와 함께 조선 궁중 무용을 가장 대표하는 것은 춘앵전과 무산향인데, 이 두 춤을 보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연상된다. 일본 춘앵전의 무용수가 두 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신라 전성기 처용무는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대표되는 석가탑을 상징하는 춘앵전과 연꽃을 새긴 다보탑을 상징하는 무산향을 추던 두 명의 무용수가 추었을 것이고, 그 춤이 조선 말기 까지 이어져 오다가 김창하의 손길을 통해, 지금 보는 춘앵전과 무산향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즉 신라 처용무는 춘앵전과 무산향을 통해, 조금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 하늘의 대리자를 나타내는, “처용탈은 저포(苧布) 혹은 칠포(漆布)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처용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덕(有德)한 모습으로 만들어지며, 탈에 씌운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발라 만들고 모란꽃을 그린다.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鑞珠)를 걸고 복숭아열매와 가지를 단다.”는 것을 통해, 처용은 현묘(玄妙)한 하늘의 태양을 상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숙종 45년 기로연 기사계첩의 처용무 무용수들의 가슴과 등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는 태양왕이 되어야 왕조의 번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학무, 연화대와 같이 시연된 것은, 태양이 매일 매일, 해 마다 부활하듯이, 왕조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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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와 아븨즈이여 處容아븨 즈이여 滿頭揷花 계우샤 기울어신 머리예 아으 壽命長遠샤 넙거신 니마해 山象이슷 깅어신 눈섭에 愛人相見샤 오어신 누네 風入盈庭샤 우글어신 긔예 紅挑花티 붉거신 모야해 五香 마타샤 웅긔어신 고해 아으 千金 머그샤 어위어신 이베 白玉琉璃티 어신 닛바래 人讚福盛샤 미나거신 애 七寶 계우샤 숙거신 엇게예 吉慶 계우샤 늘의어신 맷길혜 설믜 모도와 有德신 가매 福智俱足샤 브르거신 예 紅鞓 계우샤 굽거신 허리예 同樂大平샤 길어신 허리예 (A) 아으 界面 도샤 넙거신 바래 누고 지어셰니오 누고 지어셰니오 바늘도 실도 업시 바늘도 실도 업시 (B) 處容아비 누고 지어 셰니오 마아만 마아마니여 (고려가요에 전하는 처용의 모습 중 줄 친 부분 (A)는 이집트 신화 딱정벌레, (B)는 Fon 족 voodoo 교 신상에서 볼 수 있다. 적면유광(赤面油光) 색 얼굴의 현재 처용탈의 두 귀에는 주석 고리와 납주(鑞珠)가 달려 있고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이 문화가 이집트와 중국 당을 거쳐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적면유광 처용 얼굴색은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모란은 당 황실의 상징 꽃이었다. 그리고 티베트 Bon 교와 같은 발음의 Fon은 카메룬 지역의 추장이나, 왕을 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Fon is a chieftain or king of a region of Cameroon, especially among the Widikum, Tikar, and Bamiléké peoples of the Bamenda grass fields (the Northwest, West Region) and the Lebialem of the South West Reg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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