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개나루 4
정휴와 남궁두와 전우치는
토정을 폐쇄한다는 말에무척 아쉬워했다.
그러나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었다.
" 형님, 그렇다면 임꺽정이 하고자 했던 일과
우리가한 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중도에포기하면 임꺽정이나 한가지 아닙니까?"
전우치가 눈물을 글썽이며 토정에게 따지듯이물었다.
목숨까지 걸고
제 나름으로는임꺽정의 군사노릇까지 하면서
난에 참여했던 전우치였다.
그래서
그는 망나니의 칼에 날아가버린 임꺽정의 소망을
토정에게서 실현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임꺽정과 우리가 다른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네.
임꺽정은 백성을 위해서 오로지 주려고만 했지만
우리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려 했지않은가."
그러나 전우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임꺽정과 함께 처형당한 옛 동료들을 떠올리며
몸을떨었다.
그때 짐짓 모르는 척 남궁두가 나서서
다른말을 꺼내어 머쓱한 분위기를 돌려놓았다.
"그래도 제일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는이치를 진하게 맛보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멋진경험을 할 리가 없을 터,
오래도록 생각날 것입니다."
그제서야 전우치가 고개를 들어 토정에게 한마디
기분 풀어질 말을 건넸다.
"난리를 치른 뒤같이 허전합니다.
그러나 임꺽정과함께 의적질을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기쁩니다."
정휴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토정의 폐쇄는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직 돈이 여유가 있었고,
사람들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정휴는 토정 폐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자신이 <천기비전>을 밖으로 나돌게 한것이
주원인인 것 같았다.
그런 정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토정이담담하게 말했다.
"백성이 어디 마포 백성뿐이며 조선 백성뿐인가.
임꺽정이 어디 황해도 백성만을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바쳤던가.
그렇지 않다네.
나는 나를 위해 일했을뿐이네.
그리고 자네들이 그 무엇을 위해 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든지 간에
자네들 역시 자네들 자신의삶을 살았을 뿐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고는생각하지 말게.
이 세상에서 탐관오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제 마음속에 바로 탐관오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하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서생활했을 뿐이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 일이 아직끝나지 않았다는 것일세.
우리 모두 난리를 크게 치르긴 했으나 모두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않나.
그것으로 우리들의 일은앞으로도 계속되는 것이라네.
이 말을 궤변이라고생각해서는 안 되네."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수그렸다.
토정이 폐쇄되면 정휴, 전우치, 남궁두는
제각기 산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세 사람 다 속세에 묻혀 살사람들이 아니고
저마다 하던 일이 있기 때문에
한양에 눌러살 이유가 없었다.
"내겐 내 일이 따로 있으니 다른 생각들 말게.
일에는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는 법,
이 일도 시작이있었으니 끝도 있는 것일세."
이튿날 토정은 그가 선언한 대로 토정을 폐쇄했다.
문을 연 지 네 해 만이었다.
폐쇄라고 해봐야
토정을찾는 사람들을 맞지 않는 것뿐이었다.
산휘가 종과함께 문간에 서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돌려보냈다.
"토정은 이제 폐쇄합니다.
선생께서 더이상여러분의 상담을 받지 않으신답니다."
정휴, 남궁두, 전우치는 제각각 짐을 싸들었다.
갈곳도 정해놓지 못한 상태에서
망연히 짐을 꾸리고있는데
토정이 정휴를 불렀다.
"이보게, 내가 조정의 모함으로
이번에 포천 현감이되었네."
"현감이 되는 게 모함이라니요?"
"말로만 그런 것일세. 포천이 어떤 땅인가?
농사도잘 되지 않고,
물산도 넉넉하지 않아서 굶는 백성 투성이라네.
내가 팔도를 다니던 중에 그곳에 들른적이 있었네.
관아 창고는 명(明)을 드나드는사절들이
오갈 때마다 얻어가고 빼앗아가서 남은 것이없어,
창고에는 빈민 구휼은커녕 관리들 먹을 쌀조차없었네."
토정은 포천으로 떠났다.
처음으로 가족을 다이끌고
나들이가듯 단출한 짐을 들고 갔다.
토정과부인, 그리고 아들 산휘 등 세 식구가
단란하게 모여보기도 오랜만이었다.
정휴는 오랜만에 고향 보령을 찾아보기로 하였고,
남궁두는 원래 있던 계룡산으로 갔으며
전우치는 그가한때 산적의 군사로 있던
황해도 구월산으로들어갔다.
정휴는 보령으로 가는 길에 내내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계룡산까지는 남궁두와 함께 동행을해서
그런 대로 쓸쓸한 마음이 덜 했지만,
막상
남궁두와 헤어지면서부터는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들어
다리를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쑥 빠졌다.
들녘은 스산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
그렇지 않아도쓸쓸한 정휴의 가슴을 어지럽게 했다.
왜 이럴까?
정휴는 곰곰이 그 까닭을 짚어내보았다.
무엇 때문인가?
토정 때문이었다.
나에게 토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도(佛道)를 닦는중으로 자처해온 내가
고승 대덕도 아니요,
불문(佛門)에 귀의하지도 않은 토정을
그토록따라다닌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유림이라면
누구나 도가 잡술(道家雜術)이라고 얕보는 것을
탐구하고 있는 토정을
무슨 대학자나 대선승인 양
우러르며 따라다닌 까닭은 무엇인가?
정휴는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정휴는 지금 토정의 곁을 멀리 떠나왔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정휴는 그 한 가지때문에 이리도 심약해진 것이었다.
"네 부처는 계룡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양에있구나."
정휴의 귀에 용화사 방장 명초가 준엄하게 꾸짖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맞았다.
정휴는 불법에귀의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토정에게 가 있었다.
그런데 오직 하나인 그 귀의처를 떠나왔으니
정휴가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일이었다.
정휴는 계룡산을 지나가면서도
고청봉 용화사에는 들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는불전(佛前)에 서고 싶지 않았다.
부처도 그랬다지 않은가.
깨달음' 그 엄청난산봉우리를 올라서자
갑자기 허무해지더라고
훗날실토했다는 것이었다.
깨달음'이라는 그 목표가이루어지는 순간
갑자기 밀려드는 허무에 눌려,
부처는 그가 그동안 느꼈던 그 어떤 때보다
감내해내기 어려운 고뇌에 빠졌다.
그동안 그는'깨달음'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향하여
아름다운 아내
야수다라비와 이별할 수 있었고,
모든 권력과 영화가보장되는 궁을 버릴 수 있었고,
배고프고 춥고 쓰린6년 고행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목표를 잃고 좌절에 빠졌다.
부처의 좌절, 부처의 고뇌. 부처도 좌절하고
고뇌하는가.
정휴는 그의 목표 토정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찌 좌절이라고 할 수 있고,
고뇌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정휴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가슴 속으로 밀려들던 그 허무함이
부처의 허무함과 차원이 다른
허무감임을 정휴는 알고 있었다.
정휴가 보령에 당도한 것은
토정을 포천으로떠나보내고 한 달 뒤였다.
정휴는 심 대감 댁을 먼저찾아갔다.
집이 예전 같지 않았다.
사람 소리도들리지 않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대문을 두드리자 옛 하인이 나왔다.
"자네, 오랜만이군. 어째서 그렇게 발길을
끊었었나?"
"돌아다니다보니…"
"어서 들어오게. 기다리고 있는 분이 계시네."
"아니, 누가?"
"명이 아가씨일세. 벌써 몇 년째
자네를 애타게기다리고 계시다네."
"왜 나를…?"
"시치미 떼지 말게. 다 아는 이야기일세."
"그러면?"
"자네 동생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네.
"어서들어가보게."
정휴는 얼른 내당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느새 동생명이가 마루까지 나와 있었다.
"오라버니…"
"명이야…"
두 사람 모두 제대로 입을 떼지 못했다.
명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면서 정휴의 품으로
쓰러졌다.
명이는 정휴가 보낸 서찰을 받고 반신반의하다가
그뒤 친정어머니에게 사실을 확인하였다.
명이는 곧 현감인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스스로 친정으로돌아와 있었다.
명이가 보령으로 돌아가 있는 동안
심 대감 부인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뒤로는 형제들도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다만 옛정으로 명이가보령집에서 사는 것을 묵인했다.
그래서 명이는 정휴를 따라서 출가를 하기로결심하고
몇 해 동안 정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있었던 것이다.
"밝히지 않았으면 될 것을…"
"그럴 수 없었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제 머리를 깎아주세요."
"왜 하필 종만도 못한 중이 되겠다고 하는 건가?"
"이대로는 저도 살 수 없어요, 오라버니.
다 무너뜨리고 싶어요, 흑흑흑."
정휴는 동생 명이와 함께 보령을 떠나 계룡산으로갔다.
그리고 고청봉을 넘어 동학사 쪽으로 갔다.
계곡에 비구니만 모여 수도하는 암자가 있었던것이다.
남매탑을 지나면서 명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암자가 보였다.
정휴는 명이가 암자로 걸어가는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끔 들르마."
명이가 고개를 돌려 정휴를 한번 보고는
그대로내달았다.
정휴는 그 길로 용화사로 돌아갔다.
하안거와 동안거를 마치고 나자
다시 토정이그리워졌다.
정휴는 용화사 생활을 정리하고 중이 된 명이를 본다음
한양으로 올라갔다.
토정에 대한 그리움이 부처를 향한 마음보다 컸던 것이다.
그래서가회동으로 가면
토정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해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토정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이 아니라 토정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토정은 벌써 포천 현감을 그만두고 돌아와 있었다.
"내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토정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랑에 앉아 있었다.
정휴의 인사를 받은 토정은
현감 시절을 회고했다.
첫댓글 오늘도 즐독 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
좋은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