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YOUR ESSAYLIFE
언양에세이포럼
22기-16차시
일시: 2024년 6월 18일(화) 3시00분
목록
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춤을 추다 | 김연희 | 9 | 민창현 |
2 | 보리밥 | 김순향 | 6 | 박동조 |
3 | 자전거 하이킹 | 김선애 | 5 | 박희자 |
4 | 쇠부리축제 | 김인옥 | 5 | 배정순 |
5 | 칼갈기 | 민창현 | 8 | 예수백 |
합평순서/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춤을 추다 /김연희 9
1.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요양원에 입소하여 생활하는 어르신들과 어르신들의 가족을 초대하여 가족 한마당 잔치를 했다. 가족 한마당 행사는 우리 요양원의 대표적인 행사다. 코로나로 몇 년 동안 시행하지 못하다가 사 년 만에 열게 되었다.
2. 행사의 흥을 돋우기 위해 초대된 밴드가 신나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행사 초반부터 춤을 추면서 어르신과 그의 가족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인사를 했다. 어르신과 입소 어르신의 가족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인사했다.
3. 오프닝이 끝나고 노래자랑이 시작되면서 자발적으로 춤을 추는 어르신들도 계시고 억지로 끌려 나와 마지못해 춤을 추는 분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어르신이 무대 앞으로 나와 춤을 추었다. 휠체어를 탄 노인은 앉아서 손을 높이 들고 흔들고,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도 엉덩이를 실룩실룩했다. 보호자도, 직원도, 어르신도 모두 함께 춤을 추었다.
4. 춤은 마술사다. 한바탕 어울려 춤을 추고 나면 서먹한 보호자와도 한 가족이 된듯하다. 신나게 춤을 춘 어르신은 며칠 동안 밝은 얼굴을 유지한다. 춤의 여흥은 오래 남아 저녁 늦은 시간까지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운다. 한바탕 춤을 추고 난 날은 불면증 증상은 거짓말 같이 사라진다.
5. 나는 올해 신년부터 기회만 되면 춤을 추기로 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 좋아서 팔을 흔들어 보고, 좋지 않은 날은 기분 전환을 위해 엉덩이를 흔들어 보기로 했다. 집에서도 짬이 나는 잠깐 팔을 들고 덩실덩실해 본다. 근무 중에도 잠시 어깨를 들썩들썩 해본다.
6. 나는 타고난 음치다. 몸도 음률을 타지 못한다. 하여 노래를 한 곡도 부르지 못하고 몸을 흔들지도 못한다. 자타, 음치, 몸치라고 하면서 아예 몸을 흔들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몸치가 춤을 추는 모양새는 아무래도 우스꽝스러울 것 같아 몸을 사린 것이다.
7. 예전에는 모임을 하거나 직원들과 회식하면 식사를 하고 이차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식사를 한 후에는 주로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고 춤추고 했다. 나는 노래방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8. 이제 남의 시선과 생각 따위는 크게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누가 몸치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박상대 소한들 어떠하리.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건강과 나의 행복을 위해 살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9. 내가 요양원을 오랫동안 운영하면서 많은 어르신을 경험해 보니 순간순간 즐겁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양원 생활을 원해서 들어오신 분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자신의 판단보다는 친족의 권유나 판단으로 입소하게 된다.
10. 요양원에 입소한 이유야 각양각색이지만 주어진 요양원 생활을 수용하고 가족들을 이해하면서 잘 적응하는 분들이 있다. 반면에 끝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녀에게 분노하며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외톨이로 지내는 어르신이 있다.
11. 요양원에서는 체조하는 시간, 산책하는 시간, 춤추고 노래하는 노래방 시간, 그림을 그리고 색칠 하는 시간 등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어르신은 다양한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춤을 추는 것을 즐겨한다. 음악이 나오면 몸을 흔들고 엉덩이를 들썩들썩 한다.
12. 반면에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떠한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분이 있다. 함께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고 노래방 시간에 춤을 출 것을 권유하면 “나잇값을 해야지, 경망스럽게 춤을 추나?” 하면서 침실에서만 지내려고 하는 분도있다.
13.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얌전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체면을 차리는 것이 나잇값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얼굴이 밝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기회만 되면 스스럼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기회를 만들어 팔을 흔들고 엉덩이를 흔드는 사람이다.
14. 나도 이제부터 몸을 흔들기로 했다. 누가 우스꽝스럽다 흉을 볼지라도 엉덩이를 씰룩씰룩, 팔을 위아래로 흔들기로 한다. 음악이 없어도 몸을 흔들어 본다. 내 노년이 축제같은 하루 하루가 되길바라며, 나이 들수록 경망스럽게 춤을 추기로 한다. (11.9)
2. 보리밥 / 김순향6
1. 나는 요즘 보리밥을 즐겨 먹는다. 드문드문 쌀알이 보이는 보리밥에 골고루 준비한 나물을 푸짐하게 넣는다. 이어 빡빡 된장을 함께 넣어 비벼 먹으면 별미다. 시원한 열무김치와 함께 보리알을 꼭꼭 씹다 보면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2. 유년 시절엔 꺼끌거리는 보리밥이 너무 싫었다. 쌀밥을 실컷 먹어보았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논이 많아야 쌀이 흔한데 고향 주변엔 높고 깊은 산으로 널리 알려진 지리산이 내리뻗어 들이 그리 넓지 않았다. 낮은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어 그곳에 밭보리를 피종했다.
3. 우리 집은 소득보다 지출이 많았다. 물론 윗대에서 하던 일을 그만둘 수 없었겠지만, 부모님은 세상이 변했는데도 소작료로 받은 쌀과 농사지은 쌀로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과객과 이웃들을 도왔다. 정작 본 식구들은 남자들의 밥그릇에만 흰쌀밥을 담았고, 안식구의 밥그릇엔 대부분 꽁보리밥을 담았다. 제 식구 배를 쌀밥으로 다 채우지도 못하면서 긍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요즘 사람들이 봤으면, 아마도 정신 나간 집이라고 했을 것이다.
4. 지금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결핍 시대의 먹거리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껄끄러운 보리밥이 참 싫었다’고 말하는 내게
“참 행복한 소리 한다. 우린 너희 집이 부러웠고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라고 했다.
그들은 춘궁기에 산과 들로 다니며 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 주린 배를 달랬단다.
5. 나는 학교를 시오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반절은 뛰다시피 해도 한 시간 반은 걸린다. 올케언니가 지어 준 새벽밥을 두어 수저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새벽 등굣길을 나선다. 읍내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차가 다니는 신작로이고, 하나는 작은 산자락 밑으로 난 좁고 협소한 구길이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구길을 택했다. 이른 아침 햇살도 나기 전 오솔길을 뜀박질했다. 아침이슬에 젖어 온통 축축해진 운동화와 교복치마 무게까지도 무겁게 느끼곤 했다.
6. 오후 수업을 마치고 시오리 길을 걸어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배가 너무 고파 삐삐와 찔래꽃을 따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요즈음 급식소의 음식을 타박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끔 그때의 허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힘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산그늘이 진다. 다행히 서녘 하늘에 드리워진 붉은 노을이 너무 곱고 황홀해 허기를 잊기도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릴 즈음 집에 도착해서, 보리밥에 반찬을 이것저것 넣어서 비벼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아침에 먹는 맛하고는 딴 판이었다.
7. 보리밥을 생각하면 울컥울컥 서러움이 가슴 밑바닥을 내려칠 때가 있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이다. 학자를 남편으로 모신 어머니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남들이 아는 부잣집이 아니라 그냥 어중간한 양반에 제 먹을 것 줄여가면서 베푼 덕에 인심 안 잃고 그만그만 사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학문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붓글씨를 열심히 쓰셨고, 서원과 향교 출입이 잦았다. 사랑방에서는 항상 글 읽는 소리가 창호지 문살을 통해 흘러나왔다.
8. 어머니를 생각하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속담을 떠올린다. 입구가 좁은 뒤웅박 속에 갇힌 팔자로 일단 신세를 망치면 거기서 헤어 나오기 어려움을 비유한 속담 말이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전담하는 침모와 반찬을 전담하던 찬모를 둔 유복한 집에서 컸다. 독선생에게 한문과 언문, 그림까지 배우며 당시에는 매우 포시랍게 유년 시절을 보낸 분이다.
9. 그런 어머니를 외할아버지는 일 많고 실속 없이 소문만 무성한 집으로 출가시켰다. 얼마나 사윗감이 욕심났으면 겨우 열네 살, 철도 채 들지 않은 소녀를 서둘러 시집 보냈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가 시집와서 일을 배워 큰 살림을 맡기까지, 뒤웅박 속에서 그 지난한 세월을 보내며 겪었을 고통과, 남모르게 흘렸을 눈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9. 농촌에서는 자기 손으로 일을 하지 않고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은 무척 속을 태우고 살아야 한다. 밭농사를 많이 짓는 우리 집이 그랬다. 어머니는 겨울 한 철만 빼고 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신이 시집올 때 가져오신 뒷산을 밭으로 일구어서 수만 평이 되었다. 밭 다랭이가 아흔 개라고 해서 아흔다랭이라 불렀다.
10. 그 많은 일을 어머니께서 머슴들과 일꾼들을 데리고 앞장서서 주선했다. 김을 매고 돌아서면 또 잡초가 무성해지면 어머니는 밭에서 살았다. 아침에 가지고 간 깡보리밥 한 그릇과 반찬이라고는 된장과 고추장에 묻어 둔 장아찌 무침이 식사의 전부였다. 점심때나 되어서야 보리밥을 물에 말아 한술 뜨시고는 별이 나올 때까지 호미자루를 부지런히 놀리시던 어머니셨다.
11. 밭농사 중에는 보리농사가 가장 많았다. 나는 휴일이나 여름 방학에는 곧 잘 밭일을 거들었다. 한나절만 해도 덥고 힘들어서 질식할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나날이 그렇게 힘들게 보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농사를 지으며 흘린 땀을 생각하면 알곡 한 톨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을 텐데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지은 농사를 식량이 없는 이웃에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면서 행복해하셨다.
12, 어머니 가시고 서너 해가 지난겨울, 어머니의 혼이 담겨 있던 아흔다랭이를 빚에 헐값으로 넘긴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그 밭둑 넘어 자드락길 가에 나란히 묻힌 부모님 산소를 찾을 때마다 눈 아래 펼쳐지는 밭둑 여기저기에 아직도 어머니의 고달픈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아 콧마루가 시큰거린다.
13. 힘든 일을 한평생 하셨는데도 짜증 한 번 내지 않던 어머니. 누구든지 글을 배우고 싶어서 사랑채로 찾아오면 조금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아무 대가도 없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두 분의 교훈적인 삶은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던 내가 잘 참아 낼 수 있었던 것은 두 분의 딸이기에 가능했으리라.
14. 보리밥을 앉힌다. 구수한 냄새가 집안 가득 번져온다. 그 냄새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보리밭에서 날아오르던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3. 자전거 하이킹/김선애 5
1. 며칠 전 아파트 복도에 있던 자전거 두 대를 처분했다. 그동안 집안에 두려니 놓을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복도에 두었다. 아파트 관리소에서 소방법에 위배된다고 수시로 방송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당근마켓에 내 놓았더니 빛의 속도로 사가지고 갔다.
2. 자전거는 차를 사기전에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어중간한 거리는 버스를 타기도 그렇고 택시를 타려니 비용이 아깝기도 해서 나에게 자전거는 필 수였다. 예전에는 신문을 구독만 해도 자전거를 선물로 받는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 받은 자전거는 언제나 이동할 때마다 함께해서 정이 듬뿍 들었지만 낡아서 처분했다. 두 번째로 받은 자전거는 몇 년 동안 타다가 차를 사게 되자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딸이 타던 MTB 자전거는 처분하려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짐만 될 것 같아 싼값에 팔았다.
3. 초등학교 다닐 때 오빠들이 학교 등·하교용으로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타고 싶었다. 자전거를 만지면 오빠들은 ‘무슨 여자애가 자전거를 타려고 하냐.’면서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하지만, 점점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욕망은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4.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돌아 와보니 자전거가 떡하니 내 눈에 보였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자전거를 끌고 골목으로 나갔다. 키가 작은 나로서는 자전거에 올라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이리 저리 넘어지고 하다가 요령을 터득했다. 오른쪽으로 넘어지려하면 오른쪽 담장을 짚고, 왼쪽으로 넘어지려하면 왼쪽 담장을 짚어 가면서 균형감각을 익혔다. 오랜 연습 끝에 넘어지지 않고 안장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해냈다는 것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5. 좁은 골목길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제법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자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자전거에 사뿐히 올라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은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수시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달리면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느덧 자전거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6.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 중에 자전거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은 짜장면을 사주시면서 일요일에 몇 명이 하이킹을 가기로 했는데 자전거를 탈줄 알면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갈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요즘처럼 자전거 전용도로도 없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안전에 대한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7. 일요일 아침, 부푼 가슴을 안고 하이킹을 하려고 학교로 모였다. 나를 비롯해서 학생들이 끌고 온 자전거를 보니 아버지나 오빠들이 타는 커다란 자전거를 가지고 왔다.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힘들었다. 모두 5명으로 전부 체육복을 입고 배낭을 짊어 메고 있었다. 선생님을 선두로 한 줄로 차례로 하이킹을 시작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도열해 있는 시외로 나가자 우리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면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주변풍경을 감상하면서 하이킹은 절정에 다다랐다.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즐거운 하이킹을 만끽했다.
8. 점심 먹을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맛있는 짜장면과 만두를 사주셨다. 그때 선생님은 미혼이어서 돈을 마음대로 쓰실 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 발령받은 초임교사여서 우리들은 선생님을 어려워하지 않고 어울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하이킹은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결혼을 하자 하이킹은 중단되어 버렸다. 우리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9. 얼마 전, 강둑길을 열심히 걷고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때 취미생활을 같이 하던 사람인데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인데도 자전거를 잘 타는 것을 보고 부러웠다. 그런데 복장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몸매가 너무 많이 들어나 보여 민망해 보였다. 아무리 대세라지만 그냥 편한 복장을 하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현은 안했다. 아무래도 꼰대라고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이다.
10. 지금은 하이킹보다는 ‘라이딩’이라고 하고 건강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다. 자전거 전용도로도 곳곳마다 있어서 출퇴근을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도 제법 많은 것 같다. 자전거를 볼 때마다 옛날의 추억이 떠올라서 다시 자전거를 타볼까 생각도 했지만 타다가 넘어지면 다칠까봐 몸을 사리게 되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자전거와 이별은 했지만 10대 시절에 기분 좋게 즐겼던 하이킹은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했다. 그때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이라고 풋풋한 젊음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4. 쇠부리축제/김인옥5
1. 쇠부리, 원시의 힘과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축제가 열리는 달천철장으로 달려갔다. 이곳은 이천년을 이어 온 토철 채광 유적지다. 이를 기념한 울산쇠부리축제가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2. 기념관에 들어서니 채굴과 제련의 전 과정이 그림과 모형으로 자세히 안내되어 있었다. 갱도를 수직으로 지하 315m까지 파고들어갔다니 채광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힘든 작업이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3. 처음 채광을 하기 시작한 때가 삼한시대라 하니, 그 당시 철장의 발견은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석기나 청동기를 사용하던 시절에, 단단한 철로 된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어냈으니, 영토의 확장이나 삶의 질에 있어서 혁명과도 같은 대 혁신을 가져왔을 것이다.
4.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는데도 크게 기여했다고 하니, 철의 생산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울산이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고 우리나라 제일의 공업도시가 된 것 또한 달천철장의 에너지가 이천년을 면면히 이어오며 자라고 벋어 나온 결과가 아닐까.
5. 밖으로 나오니 드넓은 터에 철을 주제로 한 체험 부스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부스마다 어린이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 전통대장간 체험, 캔 자동차 만들기, 쇠 녹여 기념품 만드는 모형 체험 등이 특히 흥미로워보였다.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여 미래의 과학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 축제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어 울산의 산업을 계속 이끌어갈 역군이 되게 할 것이다.
6. 가장 관심을 끈 것은 고대 쇠부리기술 복원실험터였다. 돌과 진흙을 으깨고 뭉쳐 만든 반구 모양이었다. 매년 이 가마를 전통방식으로 가열하여 쇳물을 뽑아내는 실험을 한다고 했다. 쇳물을 굳혀서 판장쇠로 만들고, 이 판장쇠를 가공하여 무기나 농기구를 만들게 된다.
7. 올해도 축제 하루 전날부터 불을 넣어 사흘 동안 가열한 뒤, 축제 이튿날인 바로 어제 가마에서 쇳물을 빼냈다고 했다. 가마에서 불덩이 같은 붉은 쇳물이 흘러나오는 광경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8. “쇳물난다 불매야. 디뎌봐라 불매야. 어절시구 불매야.”
가마의 온도를 섭씨 1,300도로 유지하기 위해 수십 시간의 고된 풀무질을 쉬지 않고 하며 불렀던 노동요 ‘불매소리’와, 함께, 쇳물 같은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철기를 만드는 망치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쇠부리축제야말로 가장 울산다운 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9.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쇠로 만든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촌스럽지만 귀여워 어릴 적 친구 모습 같은 과도를 하나 샀다. 손에 잡아보니 작지만 듬직하고 잘 익은 알밤처럼 옹골찬 느낌이 들었다. 등은 두꺼운데 날은 종잇장처럼 얇아 무엇이든 문제없이 벨 듯했다. 과도를 쓰다듬으며 칼날이 걸어온 여정을 생각해보았다.
10. 뜨거운 용광로에서 온몸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고, 틀 속에서 식은 뒤, 또다시 불구덩이에서 시뻘겋게 달구어졌을 것이다. 그 다음엔 수백, 수천 번의 망치질로 다듬어지고, 차가운 물속에서의 담금질로 성분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단단한 칼로 재탄생했으리라.
11. 물에 물 탄 듯 밍밍하기만 한 나는 무엇인가. 불구덩이에 뛰어들 용기도, 수천 번의 망치질을 견뎌낼 인내심도 없으면서 나는 무엇이 되려하는가. 욕심만 가득한 내 모습이 칼날에 어둡게 비쳤다. 과도를 자주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담금질해야겠다. 쇠부리 축제가 내게 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철장을 나섰다.
5. 칼 갈기 / 민창현 8
1. 퇴직 후 집안일 일부를 아내로부터 물려받았다. 설거지, 청소, 빨래, 분리수거, 칼 갈기, 생수 구입 등이다. 아내가 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주로 내 몫이다.
2. 어느 것 하나도 집안 살림살이에 빠져서는 안 될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굳이 따지자면, 요리하기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칼 갈기가 제일 우선일 테다.
3. 칼을 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숫돌이 좋아야 한다. 이전부터 사용해 오던 숫돌이 오래 쓰다 보니 가운데가 제법 움푹 파였다. 숫돌 면이 평평하지 않으면 칼이 고르게 갈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용 후 면 잡이 숫돌이나 사포로 숫돌 면을 평평하게 갈아서 사용해야 하나 그렇지 못했다. 나의 무관심 탓이다.
4. 손 때가 묻고 정이 들어서인지 허리가 홀쭉해진 숫돌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해진 만큼 아내의 시간도 알알이 박혀 있기 때문일까. 아내가 가족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칼질을 해 왔고 거기에는 이 숫돌이 늘 함께 해 왔다.
5. 언양 장날 두께가 좀 더 두꺼운 숫돌을 새로 사 왔다. 전에는 숫돌을 행주나 걸레에 그냥 얹어놓고 갈았는데, 숫돌을 고정하는 틀도 같이 샀다. 경사가 져있어 숫돌을 올리면 앞으로 기울어져 갈기가 훨씬 편해진다.
6. 오늘이 칼 가는 날이다. 부엌의 모든 칼을 꺼냈다. 숫돌을 틀에 고정하면 준비가 끝난다. 숫돌 작업에 앞서 금속 칼갈이인 샤프너로 무뎌진 날을 가볍게 먼저 세운다. 갈기 쉬운 작은 칼부터 시작해서 한 면만 날이 서 있는 것을 먼저 한 후 큰 것으로 옮겨간다. 칼은 숫돌에 갈리면서 녹이 사라지고 때가 씻겨 나간다.
7. 처음에는 칼의 한 면 당 스무 번 정도 갈다가 부족한 것 같아 요즘은 배로 간다. 다시 숫돌을 뒤집어 부드러운 면으로 한번 더 반복한다. 다 벼려진 칼은 종이나 야채로 잘 드는지 시험해 보고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다시 한다. 숫돌에다 쌓인 일상의 때도 같이 벗겨내고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도 함께 씻어낸다.
8. 칼 갈기는 평화로운 마음 다스리기에 좋다. 숫돌은 칼을 갈고, 나는 마음을 간다. 갈고 갈고 또 갈다 보면 무아의 경지에 들어 칼날도, 내 마음도 잘 벼린 빛처럼 맑고 가지런해진다.
9. 예전에는 집에서 칼을 못 갈 형편의 집이나 날을 다시 세워야 하는 무딘 칼은 연장 통을 메고 다니는 칼갈이에게 맡겼다.
'칼 가세요~ 칼!'
돌아가는 둥근 연마석 휠에 칼을 갖다 대면 불꽃이 튄다. 현란하게 춤추는 불꽃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아마도 요즘의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10. 숫돌은 자기 몸을 갈아내며 상대의 때를 벗겨 빛나게 해주는 존재다. 세상에는 그런 존재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우리 부모님들이 제일 먼저다. 당신 몸 다 닳아 허리가 홀쭉해진 줄도 모르고 오로지 자식 위해 평생 동안 몸을 마냥 내어주셨다. 자식을 키워보니 그 희생과 봉사의 깊이를 비로소 알겠다. 느낀 만큼 행동으로 부모님께 보답하기에는 여러 가지 핑곗거리가 많다. 머뭇거리다 보면 어느샌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11. 주민센터에 갔다가 걸려있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주민의 편의를 위한 찾아가는 봉사 서비스에 대한 것이었다. 구청에서 매달 일자와 장소를 정해서 선풍기, TV 등 각종 전자제품 수리며, 자전거 수리, 이발 등 여러 가지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되어있었다. 거기에는 칼 갈이도 들어있어 관심 있게 보았다.
12. 나는 나이가 들면 남을 위한 봉사를 하고 싶었다. 봉사는 가족을 위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제 한 몸과 가족만 건사하고 가기는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크지 않는가. 주위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봉사라도 좋을 것 같았다.
13. 칼갈이 봉사는 내가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다. 적당한 때에 언양장 장날이면 늘 와 있는 칼갈이 트럭에 가서 기술을 어느 정도 배운 후 필요한 장비를 구입한다. 아파트들을 찾아 칼갈이 재능 나눔 의사를 전한다. 정해진 날짜에 가 즐거운 마음으로 칼을 갈아준다. 멋진 그림이다.
14. 그런데,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보람되고 참 좋긴 한데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몇 안 되는 우리 집 칼 가는 것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은데 남을 위한 좋은 일이지만 전문적인 칼 갈기가 과연 가능할까 싶다.
15. 좀 무리하게 움직이고 나면 온몸이 쑤시는 나이지 않는가. 아내의 말도 귓가에 쟁쟁거린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좋지만 가족에게 먼저 봉사하세요"
16. 정신이 번뜩 돌아온다. 지금 갈고 있는 우리 집 칼이나 더 잘 갈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