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dmU5OZPBjk?si=FmThVJezbk4jiq1B
<용어 정리>
실크로드: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 루트, 또는 이러한 교역 루트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역망을 이른다. 이 루트를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비단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
센양: 산시성의 제 3대 도시 중의 하나로 한 고조를 비롯한 고대 제왕, 귀족이 능묘 등 많은 사적들이 있는 고도이다.
시 소개
한 고조 유방은 최초의 서민 출신 왕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고향에 돌아가 거한 잔치를 치르며 지은 시가 바로 <대풍가>이다.
<대풍가>
大風起兮雲飛揚(대풍기혜운비양): 큰 바람 부니 구름이 날아 오른다.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위엄을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네.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어디서 용맹한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나.
-> 유방(劉邦)의 호쾌한 포부를 표현한 시이자 노래이다.
중국 문학에는 여러 대표적인 장르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한문, 당시, 송사, 원곡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 중에서도 당나라 시대는 시가 특히 번성했던 시기이다. 당나라 시기의 시들을 모은 책으로 '전당시'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는 청나라 강희제의 명령으로 1705년에 편찬을 시작해 40년에 걸쳐 그 손자인 건륭제 치하 1745년에 완성된 시집이다. '전당시'에는 당나라 시절 2,200명의 시인이 남긴 48,900수의 시가 900권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1763년, 건륭제 28년에 '형당퇴사'라는 사람이 '당시삼백수'라는 책을 편찬했다. 후대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형당퇴사는 손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삼백수'는 '전당시'에서 320수를 엄선한 책으로, 핵심적인 시들만 모아놓았다. 이 시는 '송원이사안서'로도 불리는데, 이는 '원이(원씨 집안의 둘째)를 안서로 보내며' 라는 뜻입니다. 이 시는 '양관곡'이라고도 불린다. 당나라 시절 사람들은 이별을 할 때 이 시를 '양관삼첩'의 창법으로 노래했다고 합니다. '양관삼첩'이란 이 시의 후렴구인 '서출양관무고인'을 세 번 반복하며 노래하는 방식이다.
왕유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시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는 그가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시를 썼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시성' 두보, '시선' 이백, '시귀' 이하와 함께 4대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왕유의 자는 '마힐'인데, 그의 이름과 자를 합하면 불경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힐 거사'를 가리킨다. 이는 왕유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왕유의 시는 약 400여 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림처럼 표현하는 자연시로 유명하다. 이는 도연명의 전원시와 사령운의 산수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왕유는 그림 그리기에도 뛰어나 남종 문인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남종 문인화는 수묵 산수화가 중심을 이룬다. 송나라 때의 소식은 왕유의 작품을 두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했는데, 이는 왕유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를 정도이다.
왕유의 그림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따라 그린 것들이나 사본을 통해 그의 그림을 유추할 수 있다. 왕유는 상서우승이라는 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린다. 말년에 그는 장안 근교의 종남산 기슭에 망천장을 짓고 은거하면서 시와 그림에 매진했다.
<위성곡>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 아침비가 길에 먼지를 적시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객사 앞 버들가지는 푸릇푸릇 새롭구나.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에게 다시 한 잔 술 권하노니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서쪽 양관 나서면 아는 친구 없으리라
<느낀 점>
왕유와 당나라 시인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중국 문학의 깊이와 풍부함에 대해 새삼 놀라게 되었다. 중국 문학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그 중에서도 당나라 시기에는 시가 황금기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이 시기의 시인들은 단순한 문학적 창작을 넘어, 철학과 자연, 인간의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왕유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로, '시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불교적 색채가 짙고, 자연을 그림처럼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철학적 사유와 인간의 내면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감동을 준다. 그의 자 '마힐'이 불경 '유마경'의 '유마힐 거사'를 가리키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왕유의 시는 도연명의 전원시와 사령운의 산수시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표현한다. 이는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예를 들어, 소식이 왕유의 작품을 두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한 것은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듯, 그의 그림을 보면 시 한 구절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한 왕유는 그림 그리기에도 뛰어나 남종 문인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남종 문인화는 수묵 산수화를 중심으로 한 그림으로, 이는 그의 시와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그림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따라 그린 것들이나 사본을 통해 그의 그림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그의 벼슬이 상서우승이었기 때문에 '왕우승'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말년에 장안 근교의 종남산 기슭에 망천장을 짓고 은거하면서 시와 그림에 매진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추구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왕유와 같은 시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나는 중국 문학의 깊은 풍미와 그 속에 담긴 철학적 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당나라 시인들의 시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인간의 내면과 자연, 철학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작품들이다. 이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과 감동을 준다. 이러한 점에서, 왕유와 당나라 시인들의 작품을 더 깊이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시와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도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문학은 단순한 옛날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큰 의미와 가르침을 주는 소중한 유산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