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봉건 수탈과 외세 겁탈에 처절하게 맞서서 싸운 민족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1894 년 ~ ) 이 그것입니다..
반봉건, 반제국의 기치하에 총포에 맞서서.. 죽창, 농기구 들고 싸워서 30 ~ 40 만이 희생 되었습니다..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그 때에 조정에서 뭐했는지 아십니까?..
농민 운동을 막을 수가 없게 되자.. 농민 때려 잡아 달라고 청군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럴 치세의 개념도 없었겠지만,, 당연히 백성, 농민군하고 타협, 개혁을 하던지 왕관을 내려놔야지 청군은 왜 불러드립니까..
그렇게 청군이 들어오자 일군은 텐진 조약을 내세워서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게 청일 전쟁입니다..
일군이 이기고 나서 뭐 했겠습니까?..
일군하고 관군하고 합동으로 농민군을 때려 잡았습니다.. 그 희생이 1 년 동안 30 ~ 40 만입니다..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최대의 투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야 백성이 다 죽으니 뭐가지고 외세 침략에 저항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한국 전쟁은.. 어디서 코쟁이 우파니 좌파니 기어들어 와가지고.. 희생이 200 여 만 아닙니까..
제국 양대 냉전 체제.. 남의 것이 들어와서 쌈질했고 희생된 겁니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사실 동족의 뿌리를 내다버려서 그리 되었다고도 하겠습니다,,
동학 운동과 이어진 일제의 침략.. 갈갈이 찟긴 35 년 세월에서 민족 정기의 희생이 너무 컷고..
우파, 좌파는 쌩쌩 달리는데.. 이제는 머리에 뭐가 든게 있어야.. 무슨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있어야 막아낼 것인데..
그 이념과 체제의 패악을 막을 기운이 없는 지경에 뭘로 막아내겠습니까.. 깡통이 되어서 빌미를 준 것이고..
동족이고 형제고 뭐고 총질한 겁니다.. 지금도 깡통 현실이 다를게 없습니다.. 방아쇠 당기면 총질하게 되어있습니다..
무슨 기운으로 막아낼 겁니까?.. 참 딱하지요?
도도한 흐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이 하늘에 꽉찬 흰 구름은 선조의 영령이라고 합니다..
선조의 영령이 깨어나는 민초를 기뻐하며 보살피시니 두번 다시 깨어난 민초의 희생은 없습니다,,
좋은 휴일 여기 까지만 하겠습니다,, .
아래는 동학 운동 자료입니다.. 친일이 득세하니 동학 운동의 의의를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거지요..
숨기고 싶은 민중 역사일 겁니다..
동학 운동..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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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
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부보상대(負褓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