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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옷 속의 보배'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옷 속의 보배(衣中寶) 입니까?”
“이 한 물음은 무엇을 꺼려 하느냐(者一問嫌什麽)?"
“이것은 질문입니다. 무엇이 보배입니까?”
“그렇다면 옷까지도 잃어버린다(與麽卽 衣也失卻)."
벽암록을 지은 원오극근(1063∼1135) 선사는 원오심요(园悟心要)에서 말하기를, "자리에 앉아 옷을 입은 다음 스스로 살펴보라."고 했다. 옷을 가져다 스스로 입히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라는 뜻이다. 그 옷이 바로 우리 마음이다.
한 스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옷 속의 보배(衣中寶)’가 무엇인지 물으니, 조주는 조금 황당한 대답을 한다. “이 한 물음은 무엇을 싫어하느냐?" 혐(嫌)은 싫어하고 꺼려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옷 속의 보배를 물었는데, 꺼릴게 무엇인가 라고 대답하니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게 중국말인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그 스님은 다시 묻는다. "금방 저는 질문을 했는데, 큰 스님은 동문서답식으로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다시 한번 묻습니다. 무엇이 옷 속의 보배입니까?"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면 그대 옷마저 잃어버리고 말겠구나."
자, 지금 우리는 일상적으로 입는 옷(衣)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깊은 뜻을 가진 어떤 것을 찾고 있는가? 말만 따라가다가는 수백 생을 살아도 도(道)는 꿈에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반복해서 묻지만 조주가 말한, '그대 옷마저 잃어버린다'는 그 옷과 위에서 원오선사가 말한, '자리에 앉아 옷을 입은 다음'의 옷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것을 바로 알아채야 한다.
“이 한 물음은 무엇을 꺼려하는가?" 이 반문 속에 분별심을 벗어나는 한 길이 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서 실마리를 찾기 바란다. 이 옷 속의 보배도 질문 속에 답이 있는데, 보지를 못할 뿐이다. 이처럼 뻔한 얘기를 재탕 삼탕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옷을 보라. 찬란한 이 옷을!' 억!
362. '만리에 아무것도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만리에 여관 하나 없을 때는 어찌합니까(萬里無店時如何)?”
“선원에서 자면 되지(禪院裡宿).”
도를 얻기 위해서 천리만리 떨어진 선지식을 찾아가더라도 도중 한밤중에 산길을 만나게 되면 여관 아니면 주막집에라도 들러 하룻밤 묵고 가야 한다. 그런데 만 리를 걸었는데도 길 도중에 반점(飯店) (중국에서는 지금도 호텔, 음식점 등을 반점이라고 한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묻고 있다.
이 수행자도 이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지 알아채는 사람이 있으면 눈을 뜬 사람이다. “(여관이 없으면) 선원에서 자면 되지.” 조주는 이 스님을 멀찍이서 바라 본다. 여관이 아니면 절에서 자라고?
길 가는 도중에 절이 나타나서 스님이 하룻밤 묵기를 부탁하면 어느 주지 스님이 거절하겠는가. 절도 없고, 하다못해 여인숙이라도 나타나지 않으니 하는 소리 아닙니까? 하고 투덜거릴 만하다. 하지만 나는 이 스님은 만리무점(萬里無店)이란 말을 어디선가 들어서 묻는 거라고 단정했다.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는가? 오늘 계속 퍼즐게임 해보고 싶다만 시간관계상 생략한다.
하나의 화두를 풀면 천 개의 화두가 풀린다. 천, 만 개의 조사, 선사들의 말 한 마디(話頭)가 모두 마음 하나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동산양개 선사가 안거기간 해제 후 떠나가는 수행자들에게 훈계한 말 한마디로 끝맺는다.
"첫가을 늦여름에 여러분이 혹 동으로, 혹 서로 왔다 갔다 하지만, 만 리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을 향해 곧장 가야 한다.”하고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이르되, “그런데 만 리에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을 어떻게 향해 갈꼬?”
363. '모두 서울로 통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집집마다 문 앞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家家門前 通長安)."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이 화두는 선종(禪宗)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주의 한 마디이다. 부처님은 길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 같은 미물이라도 모두 불성을 다 갖췄다고 하는데 조주는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이 한 의문을 가슴에 품고 의심을 뚫으려고 노력하는 수행자들이 지금도 우리의 산천을 누비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분투하시기 바란다.
오늘도 한 스님이 묻는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번에는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집집마다 문 앞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고 대답한다. 왜 이렇게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모두 다른 것인가. 세상의 가르침(學文)에는 한번 ‘A는 B이다’고 했으면, 이것이 틀리지 않으면 그 언제까지라도 A=B로서 달라지지 않는데, 선(禪) 세계에서는 똑같은 대답은 삿된 가르침이라고 질타를 받기도 한다.
왜 그렇겠는가. 도(道)란 정(定)해진 법(法)이 없어 '그래야만 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만약에 해답이 똑같다면 그 누구나 수많은 화두의 답을 외어서 여기저기 도인입네 하고 떠들고 다닐 텐데 그래서는 안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이건, 개에게 불성의 존재 유무건 이것들은 정의할 수도 없고, 친히 만날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대답해도 다 맞지 않느냐 하고 생각한다면 인도를 수천 번 왕복하더라도 불(佛)의 ㅂ 자도 알지 못한다.
참 쉽지 않은 문제이다만 우리 집 문 앞의 길은 모두 서울로 통한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사는 집 앞의 길도 어느 쪽으로 가든 결국 서울로 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곧은 것, 굽은 것, 이리저리 빙 둘러 가는 길 등 천차만별이지만 목적지에 도달할 일념만 있으면 언젠가는 도착한다. 세상 모든 것이 도(道)로 들어가는 문이다. 운문의 똥막대기, 호떡도 다 그 문이다. 그 도(道)는 바로 우리 마음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빨리 도착하기 위하여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이 선(禪) 공부도 이전부터 불교에서는 최상의 근기를 갖춘 사람들을 위한 깨달음의 지름길이라고 한다. 옛날보다 훨씬 더 머리가 깬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알맞은 마음공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당나라 시절부터 지금까지 깨닫는 기간이 평균 20년 걸렸다면 현시대는 그 1/10 시간이면 충분해야 한다. 그만큼 시대가 발달했으니 선의 시대도 단축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당나라 사람들의 집 앞길은 모두 장안으로 통하듯이, 백길, 천 길 다른 인간의 마음도 모두 선(禪), 도(道)로 통해야 한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그 지름길을 빨리 찾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여기 조주록 강해 곳곳에 그 방법을 제시해 놓았으니 일대사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 지름길을 찾아 노력하면 원오선사의 말대로, '오래도록 길러 성취하면 자연히 마음에 사무치고 골수에 배는 공덕이 있게 될' 것이다.
364. '말소리 낮추는데 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얼굴을 마주하여 서로가 건네주면 큰 뜻을 다 합니까(覿面相呈 還盡大意也無)?"
“말소리를 낮추어라(低口).”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곳은 어떻습니까(收不得處如何)?"
“말소리를 낮추라고 했는데."
질문에 어려운 한자로 볼 적(覿), 증정할 때의 드릴 정(呈)도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가 드리면 큰 뜻(意)을 다 합니까?’ 무슨 의미인지 잘 다가오는가. 이 말을 곧바로 이해할 정도가 되면 고지(高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제가 감히 보증한다.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니 고깝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지식과 수행자가 서로 만나 대화를 통해서 알아채게 만들면 좋은 인연이 아니겠는가?
조주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면서,“쉬! 말소리를 낮추게."라고 한다. 왜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을까? 그래봤자 내 귀에도 다 들리는데 말이다. 그 스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질문만 계속한다.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곳은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조주는 더 목소리를 낮춘다. "어허! 말소리 낮추라니까!" 계속 말만 따라 왔는데, 갈 길을 잃어버렸다. 말로, 생각으로 따라 가려고 하면 백전필패인 것이다. 이제는 벗어나야 하겠다.
조주는 그 스님에게 '낮은 소리로 말하게'하면서 선(禪)의 큰 뜻을 건네주고 있다. 바로 스님의 얼굴을 마주보고, 마음으로 소곤소곤 말하는 것으로 도를 드러낸 것이다. 아무 말이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도(道)란 아무 말 없이 통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눈짓으로만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스님은 다시“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곳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는데,이 스님에게서 당나귀를 받고는 조주는 말(馬)을 주고 있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니 딱한 건 그쪽이다. 엉뚱하게 거두지 못하는 곳을 찾고 있지만 그것은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헐!
365. '눈앞의 한 마디'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눈앞의 한 마디(目前一句)입니까?”
“나는 그대만 못하다(老僧不如你)."
'눈앞의 한 마디 말(目前一句)'은 어떤 일구(一句)인가?
모두 도(道)를 일깨워 주기 위한 한 구절이지 다른 무엇이 있겠는지. 선문답은 거의 질문의 뜻만 알아채면 그만이다. 이 질문이란 게 선사들의 한 마디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지만 어디서 들은 화두를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큰 선지식들에게 다시 물어보는 형태의 반복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그대만 못하다(老僧不如你)." '그대가 나보다 낫다'는 조주의 이 한마디는 마음을 콕 찌르는 말씀이다. 이것을 듣고 깨달으면 조주도 없고 부처도없게 되는 것이다.여기에 또 무슨 토를 달겠는가? 눈을 뜨면 그대가 부처고 조사가 될 터이다.
366.'출현해 온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출현하여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出來底是什麽人)?”
“불보살님이다(佛菩薩).”
‘출래저시십마인(出來底是什麽人)’이라, 세상에 출현을 하긴 했는데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은? 여러분 붓다님!
367. '신령스런 풀'
한 스님이 물었다.
“신령스런 풀(靈草)이 아직 나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깨진다.”
“냄새를 맡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선 채로 죽은 놈과 같다.”
“제가 어울려도 됩니까?”
“누가 오더라도 그에게 말을 걸지 말라.”
'신령스런 풀', 영초(靈草)라고 했다. 여러분의 마음, 깨달음이다. 이 신령스런 풀(草)이 아직 돋아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떠한가?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깨진다.” 처음에 선(禪), 도(道)라는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지글지글 아파오지 않는가. 머리가 진짜로 깨지면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다.
“냄새를 맡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에라! 나에게 도(道)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비웃으며 팽개쳐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선 채로 죽은 놈과 마찬가지다.” 조주는 '선 채로 죽은 것'과 같다고 했지만, 점 하나를 달리 찍으면, '산 채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평생 송장 끌고 다니는 사람이다.
“제가 어울려도 됩니까?” 이 스님은 선 채로 죽은 놈과 마찬가지인 사람과 서로 어울려 사귀려 한다. 이런 뒤바뀐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오더라도 그에게 말을 걸지 마라.” 시인 앞에서는 시를 꺼내지 말고, 검객 앞에서는 칼을 숨겨야 할 것이다. 말 따라 왔는데도 그 길은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368. '조사의 뜻, 경전의 가르침'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의 뜻과 경전의 가르침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갓 출가하여 계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묻는구나.”
이번 스님은 조사의 뜻(祖意)과 경전(敎)의 가르침이 같은지 다른지 묻고 있다. 불경에서 말하는 모든 가르침은 부처님의 뜻이다. 하라는 마음공부는 하지도 않고, 쓸데없는 질문만 늘어 놓으니 주주는 '갓출가하여 계를 받지도 않고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묻는구나'하고 꾸짖고 있다.
이 스님이 이제 막 불문(佛門)에 들어와 아직 수계(受戒)도 치르지 않은 사미인 모양인데,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조주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새파란 햇병아리가 계속 쫑알쫑알 대는 것이 매우 귀여웠을 것이다. 귀여운 자식에게 매 하나 더 들 듯이 '사람들에게 묻기만 하는구나!'하고 마음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충격이 크면 클수록 사지가 봄눈 녹듯이 풀리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소위 통 밑이 쑥 빠지면 더욱 좋다.
붓다의 가르침과 선종의 조사, 선사들의 뜻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냐 하고 혹시라도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 깨침의 경지는 설혹 차이가 날지 몰라도 그 뜻은 매한가지이다. 절대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최상승선이든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철저한 깨달음, 마음 하나 통달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체험을 해봐야 알지 남에게 물어봤자 하세월이다. 언구를 의심하라! 항상 기억해야 할 선의 지름길이다.
369. '평범하지도 성스럽지도 않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성스러움(聖)입니까?”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평범함(凡)입니까?”
“성스럽지 않은 것이다.”
“평범하지도 성스럽지도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훌륭한 선승이로다(好箇禪僧).”
성스러움과 평범함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道)는 성(聖), 범(凡) 모두를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깨달음(覺)과 깨닫지 못함(不覺) 조차 가리지 않는데, 하물며 성(聖), 범(凡)이겠는가. 사량 분별을 버리는 것이 최우선이다.
헤아려 생각하고 가려서 구분, 분별하는 것을 여의는, 이것을 깡그리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을 가장 그만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평범하지도 성스럽지도 않을 때' 이 때에 바로 매우 훌륭한 선승(禪僧)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옛날 달마대사가 처음 중국으로 건너와서 양나라 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가'무엇이 가장 성스럽고 으뜸가는 진리(第一義聖際)입니까?'하고 물으니, 달마가 말하기를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입니까?' '모릅니다(不識).'라고 하니 양무제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여 달마는 위나라로 가버렸다.
여러분은 양무제보다 더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평범과 성스러움을 모두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알려고 하지만 조금씩 알게 될수록 더욱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370. '수미산을 덮는 눈꺼풀'
한 스님이 물었다.
“두 거울이 서로 마주하면 어느 것이 더 밝습니까(兩鏡相向 那箇最明)?"
“그대의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다(闍黎眼皮 蓋須彌山)."
“두 개의 거울이 서로 마주하면 어느 쪽이 더 밝습니까?" 이 두 개의 거울은 바로 우리 마음이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마주 보면 어느 쪽이 더 밝겠는가? 이 스님은 홍두깨처럼 대낮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질문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관점에서 봐야 할까? 두 마음이 서로 보는데 더 밝고 어둡고가 어디에 있는지. 이 스님은 아마도 조주를 한번 곤경에 빠뜨리려고 노리고 있는 모양이다.
조주의 대답은, '그대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을 때가 되면 그때 알려 주리라!' 이 말인가? 그런 질문을 하는걸 보니 그대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많이 끼어 있구만! 그 티끌을 모두 벗겨내야 모든 것을 비추는 밝은 거울을 갖출 것이여!
그러나 이 스님이 이해할지 모르지만, 정말로 그 어느 거울보다 밝은 마음을 깨치면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 것은 식은 죽먹기이다. 조주는 양날의 칼을 동시에 쓰고 있다. 직지인심이 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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