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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2장
개관, 영원한 복, 예정하시고 속량하심, 공중 권세 잡은자들과 구원의 은혜, 십자가로 화평을 이룸
저자와 제목
에베소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은 현대까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에베소서가 알려지지 않은 바울의 추종자 내지 모방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다고 주장하며 다음 두 가지 주요 이유를 제시한다.
(1) 이 편지의 문체와 사상이 누구에게나 바울 특유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2) 에베소서의 저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과 친밀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1:15, 3:2) 이는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장기간 체류한 사실(행 19:10)을 감안하면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서를 썼다고 단언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첫째, 이 편지는 명시적으로 바울의 편지라고 주장하는데(1:1, 3:1) 이 점은 그와 반대되는 압도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논쟁에서 비중 있게 취급해야 할 사실이다. 초대 교회는 다른 가짜 편지들은 거부했지만 에베소에서 보내준 이 편지는 바울이 쓴 것으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고 에베소에서는 거짓 사도의 주장에 대한 분별력으로 정평이 난 도시였다(계 2:2). 더구나 고대의 편지들은 보통 저자와 수신자가 모두 아는 사람을 통해 전달되었고 그 사람은 원본이 진짜임을 보증하고 그 내용을 상술했을 것이다(엡 6:21~22).
둘째, 저자의 문체에 대한 분석은 종종 주관적으로 불완전한 증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보다 정교한 컴퓨터 분석의 도움으로 에베소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바울의 문체와의 유사점이 이전에 인식된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이 주의 깊은 심층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게다가 최근 연구는 고대의 편지들의 작성 과정에서 서기의 역할을 과거보다 더 크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에베소서는 실제로 바울의 표현 및 사고의 방식과 긴밀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비평학자들은 이 증거를 바울의 영향을 받은 다른 누군가가 이 편지를 썼다고 주장하는데 이용해 왔지만 이런 바울의 사상과 문체의 특징들은 바울 자신이 에베소서를 썼다는 점을 확증할 가능성이 더 높다.
누군가가 스스로 기만적으로 위조한 편지에서 독자들에게 "참된 것"을 말하고 "거짓을" 버리라고(4:15, 25) 그토록 강력하게 썼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서를 썼다고 상당히 확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에베소인들에게" 라는 제목은 많은 초기 사본에서 발견된다(1:1). 이 제목은 이 편지가 에베소와 그 주변의 에베소에 종속된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음을 가리킨다.
저작 연대
바울은 자신의 투옥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므로(3:1, 4:1, 6:20) 이 편지는 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었던 주후 62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해야 한다(행 28장). 에베소서의 연대를 1세기보다 이후 시기로 추정하는 비평학자들은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하기 어려운 강력한 증거 때문이라기보다는 바울의 저작 사실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렇게 추정한다.
목적, 계기, 배경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는 하지만(6:21~22) 이 편지에 동기가 된 구체적인 계기나 문제는 없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속 사역의 진리, 다양한 민족들 사이에서의 교회의 통일성, 교회, 가정, 세상 속에서의 올바른 행동 등에 있어서 일반적인 교훈을 설명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구주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반응뿐만 아니라 구주의 사역의 특징을 이룬다. 고대의 에베소에서는 이 도시가 마술과 주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서의 적절한 배경을 형성한다(행 19:19).
이 점은 바울이 인간의 모든 권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현세와 내세에서 교회와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승리의 승천을 강조한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에베소 교인들이 세상과 그들의 삶 속에서 가장 높은 권세이신 그리스도께 확고히 충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이런 점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대 도시 에베소
소아시아 서부 해안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신전(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을 자랑했다. 바울이 불과 몇십 년 전에 스트라보는 에베소를 소아시아 속주에서 가장 큰 상업 중심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항구의 토사 퇴적과 지진 피해로 인해 이 항구도시는 몇 세기 뒤에 버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광범위한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몇 가지 핵심적인 구조물들은 실제 신약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들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행 19:29~40)라고 소리친 곳인 웅장한 극장은 바울이 이 도시에 있었던 시절 즈음에 클라우디우스의 치세 아래 확장되었다. 이 극장은 대략 2만 명 내지 그 이상의 관객을 수용했다. 극장은 서쪽 항구 쪽을 향하고 있었고 극장에서부터 행진용 도로가 아르테미스 신전을 향해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주전 4세기에 에베소 사람들은 화재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원조까지 거절해 가며 자신들의 자금으로 이 거대한 신전을 자랑스럽게 재건했다. 신전 주변 지역은 복수를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공식적인 피난처로 여겨졌고 때로는 은행 같은 역할까지 하며 이 도시의 경제적 번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전에서는 한 거세된 제사장이 처녀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겼다.
비록 부근의 박물관에는 에베소에서의 다른 곳에서 발견된 두 개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상이 전시되어 있지만 오늘날에는 신전의 터와 상당히 큰 제단 외에는 한때 거대했던 신전의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른 고고학적으로 현존하는 종교적 건물로는 신약시대 이후의 세라피스 신전과 몇 개의 중요한 황제 숭배의 신전이 있다. 바울 시대 이전에 에베소는 신격 율리우스[카이사르]와 여신 로마의 신전을 유치할 수 있는 권리를 당당히 획득했다.
이 도시는 훗날 트라야누스(주후 98~117년)와 하드리아누스(주후 117~138) 황제에게 바치는 기념비를 수용했다. 또한 이 도시는 거대한 도미티아누스(주후 81~90년) 신전도 소유했는데 이 신전은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 서부에 있었던 시기 동안 건축되었을 것이다. 누가는 에베소에 유대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며(행 18:19, 24, 19:1~10, 13~17) 이 사실은 비문과 문헌 자료들을 통해 확증된다 (예컨대 <유대 고대사> 14.262~264).
바울 시대의 공공 건물들로는 주랑이 있는 국영 시장(장터) 바실리카, 공회당이 있었다. 이런 풍경은 폴리오나 멤미우스 같은 중요한 시민들에게 헌정된 몇 개의 기념물들을 포함하는 쿠레테스 거리까지 이어졌다. 쿠레테스 거리는 극장과 이웃한 상업 시장으로 이어졌다. 이 큰 시장 광장은 (후원자인 아우구스투수 황제와 마르쿠스 아그리파를 기념하여 세워진) 마자이우스 문과 미트라다테스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극장에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가는 길에는 네로(주후 54~68년)가 개축하거나 지은 거대한 경기장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에베소의 일부 거주민들의 부요함은 쿠레테스 거리 바로 옆의 호화로운 테라스 하우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후대의 비문들은 은세공인 동업 조합을 언급하고 있고 심지어 구체적인 은세공인의 이름까지 제시한다(참조, 행 19장:24에 언급된 은장색 데메드리오).
그러나 대부분의 로마 도시들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노예였을 것이고 그 밖의 사람들도 많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약시대 이후) 2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몇몇 중요한 체육관과 유명한 켈수스 도서관을 포함한 다른 많은 기념비적인 건물이 더해졌다. 거대한 비잔틴 시대의 마리아 교회 유적은 한때는 이교도의 동네였던 이곳이 훗날 중요한 교회 회의(에베소 공의회, 주후 431년)를 개최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핵심 주제
(1) 모든 사람은 본질상 영적으로 죽어 있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으며 사탄의 통치 아래 있다(1:7, 2:1~3, 5, 11~12).
(2)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뜻의 결정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의 구속과 거룩함을 이루도록 예정하였다(1:3~14, 2:4, 8~9).
(3)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은 죄인들을 구원했다. 이 값없는 선물은 은혜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찾아온다(1:7~8, 2:4~14).
(4)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구속 사역은 현세와 내세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화해와 높아지심의 일부다(1:15~23, 3:1~13).
(5) 그리스도의 화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속으로 하나 되게 하는 일을 수반한다(123, 2:10~22, 3:1~21, 4:1~6).
(6)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새로운 거룩한 삶으로 새로워지며 악한 옛 생활방식을 거부해야 한다(4:1~3, 17~32, 5:1~20).
(7) 삶의 거룩함은 올바른 권위에 대한 복종과 복종하는 이들에 대한 자비롭고 사려 깊은 배려를 수반한다(5:21~6:9).
(8) 그리스도는 교회의 통일, 성숙, 마귀와 그의 동맹 세력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교회에 강력한 은사들을 주셨다(4:7~16, 6:10~19).
문예적 특징
에베소서는 (발신자, 수신자, 안부 인사를 포함한) 인사, 감사, 설명, 권면, (마지막 인사와 축도를 포함한) 맺음말을 지닌 신약 서신서 장르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 편지의 주된 논증 사이에는 몇 개의 기도와, 교리적 단어에서 실제적 권면으로의 전환을 표시하는 내적 축복 기도(3:20~21)가 삽입되어 있다.
2장은 영적인 전기 형태를 띠며 거기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히 현재 하나님의 새로운 한 백성 안에 포함된 이방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이야기한다.
3장에서 사도는 자신의 이방인을 향한 부르심과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에 대해 증언하면서 자선적인 내용으로 선회한다. 파라에네시스(일련의 도덕적 권면)는 주로 가정 내의 품행에 대한 지침, 즉 믿음의 식구로서의 교회에 대한 지침과 가족관계 안에서 개인 신자에 대한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전신갑주에 대한 유명한 묘사는 하나의 확대된 은유다. 바울은 또한 고결하고 활기찬 운문적인 문체로 구원의 복들을 나열한다.
에베소의 핵심적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연합된 사람들(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속에서 발견된다. 서두에 나오는 강력한 찬양의 표현과 신학적 논쟁의 부재는 에베소서의 어조를 매우 긍정적으로 만든다. 이 서신이 거의 똑같은 길이로 절반씩(즉, 1~3장의 교리적 단락과 4~6장의 실제적 단락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것도 체계적으로 매우 통일된 느낌을 준다.
에베소서 1장, 2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복','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복, 원문의 헬라어에서 이 단락은 하나님의 길고 우아한 문장입니다. 바울은 삼위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우주적 화해와 구속을 시작하시고 성취하셨음을 보여줍니다.
1~14절을 볼께요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정하시고 속량하심>
'찬송하리로다', 바울의 기도를 여는 이 송축은 보통 하루 종일 암송한 1세기 유대인의 기도를 시작하는 송축과 유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찬양은 이런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또는 "그 안에서" 우리의 것이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복에 대한 그리스도의 매개를 강조합니다. '신령한' 이 말은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성령을 통해 전달된다는 점을 알리며 이 시대 전체에 걸친 성령의 인격적 임재는 미래의 천상의 복에 대한 보증입니다(3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는 성부가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택하셨음을 뜻하며 이 일은 영원 전, '창세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신성과 속성 안에서 동등하시지만 성부가 영원토록 삼위일체의 세 위격 가운데 이끄시고 지휘하시는 역할을 맡고 계심을 가리킵니다. 신자를 죄와 사랑에서 구속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지도권은 자의적이거나 변덕스런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내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셨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어떤 공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없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목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택하심을 받은 목적 그 자체입니다(4절).
'예정 하사', 어떤 지위에 이르도록 미리 명하거나 정하셔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을 무언가로 이 경우에는 자기의 아들들에 대해 예정 하는 일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선택과 예정은 누군가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을 가리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남자든 여자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복을 상속받을 후사라는 의미에서 아들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개입과 구속의 시작을 여기서의 이 구절을 다른 곳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라는 표현으로 수식하며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외부의 힘에도 제한받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신자들에 대한 확고한 뜻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은혜와 선을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5절).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속 그 자체가 아니라 구속을 통해 자신의 영광스런 이름이 찬양을 받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논증의 핵심적인 대목들에서 반복됩니다(6절).
'속량'이란 누군가를 포로 상태나 노예 상태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에 나오는 최고의 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의 종살이에서의 구속하신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죄 사함'은 속량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죄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의 회생 제사임을 뜻합니다(7절).
성경에서 말하는 비밀(헬, '뮈스테리온')이란 전에는 감춰졌거나 모호하게만 알려졌지만 이제는 보다 충분히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한 계시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때가 찬', '때', 즉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 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9절).
'통일되게', 이는 이 구절의 핵심적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을 막론한 모든 피조물의 역사의 핵심 축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속량하셨고 모든 적대적인 세력을 잠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10절).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보통 ('몫을') 활당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에 대한 가장 좋은 번역으로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을 자신의 분깃으로 요구하셨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라고 만드는 것은 임시변통에 의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정의상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모든 일을 자유롭게 지휘하시는 주권적인 분입니다.
이 점은 보통 변덕스러우며 불가해하고 자의적인 운명에 속박된 존재로 이해된 당시의 이방 신들과 구별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엄청난 위로를 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오는 모든 사람은 그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통해 그렇게 나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 말은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11절).
'인치심'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기업을 상속받을 때까지 성령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심을 뜻할 수도 있고 성령께서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이 사실임을 보증하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왕의 인'을 지니고 있습니다(요 3:33, 행 10:44, 47). (13절).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자녀에게 자신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들이 '받을 몫을 보증'하시기 위해 또는 그에 대한 보증금을 주시기 위해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강력한 역사를 적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이는 구약의 레위인들처럼 신자들도 주님의 특별히 귀한 소유물임을 뜻합니다(14절).
15~23절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영광의 아버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적 인성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중보자이신 주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지혜...의 영'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하나님에 대한 구원 얻는 지식을 주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가리킵니다(17절).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것이 된 복들, 즉 (1) 그들의 미래의 '소망' (2) 하나님의 '성도 안에서의 기업' (3)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능력'을 이해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그리스도인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영원히 향유하기를 고대하시는 대상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힘, 역사하심,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표현하기 위해 능력에 대한 어휘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마술과 주술을 통해 초자연적인 힘을 제어하는 능력은 고대 에베소에서 큰 관심거리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경쟁하는 권세들을 능가합니다(18~19절).
'만물을....복종하게 하시고', 바울은 시 8장6절을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높아지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서 성취된 것으로 인용합니다. '머리', 오늘날의 정부 수반과 마찬가지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주님으로서의 탁월하심을 가리킵니다(22절).
'몸', 아담이 화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자신을 자신의 몸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신의 교회와 동일시하셨습니다. '충만함',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해지는 교회는 그리스도로 대표하는 존재로서 모든 피조물을 충만케 합니다(23절).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구원의 은혜>
1~10절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었던 너희를', 아담의 아들 딸들인 인간들은 세상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어떤 성향이나 민감성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 문구로 문장을 시작했다가 오절에서 다시 문구로 되돌아올 때까지 다른 개념들을 가지고 문장을 이어 나갑니다. '허물',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는 일. '죄',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하나님께 지은 범죄를 말합니다(1절).
'권세 잡은 자....영', 이는 여기서 빛의 아들들과 대조되는 이 세대의 아들들과 같은 히브리어에서 영향을 받은 표현인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을 지배하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참되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이들의 가족에 속합니다(2절). '본질상', 아담의 아들딸이 된다는 것은 곧 타락한 상태에서 태어나며 '진노의 자녀'로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 없는 가치 상태에서 탈출하는 데는 다름 아닌 거듭남 내지 새 창조가 필요합니다(3절).
'하나님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파멸의 길로 행진하는 인류의 비참한 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보다 더 암울해 보이는 소망 없는 운명은 없습니다. 상황이 가장 암울해 보이는 바로 그때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인간의 말의 역사에서 짧지만 가장 위대한 문구를 토해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소망 없는 원수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은 그들이 그 긍휼을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행한 어떤 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마음에서 나옵니다(4절).
'또 함께 일으키사',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이 시대에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중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새로워진 육체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가 지닌 권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 함께 누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온갖 주술적 관행들이 난무하던 에베소에서 특별히 중요한 진리였을 것입니다(6~7절).
'은혜에 의하여', 이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은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 구절들에서 능력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구원을 보증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마지막 심판대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롬 5:9). "은혜에 의하여....구원을 받았으니"라는 말은 엡 2:5에서 강조를 위해 반복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에 해당되는 동사 형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보증되어 있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확신 있는 신뢰이자 의존이며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8절).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았다면 구원받는 이들이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구원이 행위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의 결과이자 귀결입니다(9~10절).
<십자가로 하나되고 화평을 이룸>
11~22절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실체인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유대인 아니면 이방인으로 분류하는 과거의 구분을 초월했습니다. '가까워졌느니라', 가까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만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양들 심지어 멀리있던 이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13절).
'화평', 이는 하나님과 교회 안에서 서로가 조화롭게 교제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즉 유대인과 이방인, 화평의 반대는 그리스도가 종식시키신 원수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적대적인 옛 진영들 가운데서 하나의 통일된 새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자기 육체로',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중간에 막힌 담',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뜰 벽에는 이방인들에게 바깥뜰을 넘어 안 뜰로 들어오면 죽더라도 그 책임은 오직 자신에게 있다는 경고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 벽을 암시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로운 인류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14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은 성도와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그에 알맞게 살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며 철저히 확신해야 합니다. '외인' ("나라")에서와 같이 바울은 에베소와 같은 고대 도시들에서의 정치적 삶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한 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외인은 권리나 특권이 없는 완전한 외국인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그 도시에 거주하며 이웃과 같은 관습적인 특권을 부여받은 시민이 아닌 이들이었습니다. 오직 시민만이 도시 안에서 완전한 보호를 받고 권력을 소유했습니다(19절).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여기 언급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어떤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선포했고 그들의 말들 가운데 일부는 신약의 책들이 되었기 때문에 '터'를 닦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터'는 단 한 번(교회가 시작될 때)만 놓임으로 오늘날에는 사도나 선지자가 더 이상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그들의 역할은 기록된 성경으로 대체되었고 이 성경이 오늘날의 '터'입니다.
(2) 어떤 이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에서 이 "선지자들"이 사도들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 선지자들은 초대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가진 모든 이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도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작은 집단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방인이 교회 안에 포함되는 신비를 계시하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똑같은 문구가 등장하는 앱 3장5절, 이 경우에 에베소와 다른 교회들에서 예언의 은사가 있었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터'의 일부가 아니라 지어지고 있는 건물(즉, 교회)의 일부였으며 교회 시대 내내 그럴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여기서의 "선지자들"이, 비록 3장5절에 나오는 같은 단어는 신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키지만, 구약 시대 선지자 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잇돌', 석조 건물을 정방형으로 안정되게 만드는, 터의 모서리에 있는 핵심적인 돌을 가리킵니다(20절).
'서로 연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가시적인 교회에 속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성전', 하나님이 기쁨에 찬 예배와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과 만나시는 곳입니다. 신자들은 스스로가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예배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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