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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사 스크랩 <조선전기> 훈구파/사림파...<조선중기,후기> 당쟁의 인물들
혜명 추천 0 조회 66 12.09.01 15: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 훈구파 [勳舊派]:훈구공신

조선 전기의 양반관료층 내부에 형성된 하나의 정치세력.

 

 

관학파라고도 한다. 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1453(단종 1)~71년(성종 2)의 약 20년 동안 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뒤에도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신으로 거듭 책봉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군주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훈구파와 사족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양 세력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훈구파의 학문경향을 사장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초기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경술보다는 현실적으로 사장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이른 시기에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림파와 대립하여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에 깊숙이 참여했다.

 

청주한씨 한명회·안동권씨 권람· 회인홍씨 홍윤성· 하동정씨 정인지· 고령신씨 신숙주·창녕조씨 조석문· 동래정씨 정창손· 삭령최씨 최항· 광산김씨 김국광· 능성구씨 구치관 등이 이에 속한다.

 

 이 계열에 주축이 된 관료들은 대부분 집현전을 거쳐 성장한 이들로, 그중에는 〈경국대전〉·〈동국통감〉·〈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왕조의 통치이념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초의 집권인물들 모두가 훈구파는 아니고 대개 세조대 이래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정치세력이 훈구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이들은 1453년(단종 1)에 정난공신, 1455년(세조 1)에는 좌익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세조의 즉위가 선양(禪讓)이라는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이라는 기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역모사건 등이 일어났고 그결과 세조와 공신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토지를 강점하고 양인농민을 노비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러한 훈구파의 지위는 세조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1467년에 세조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청주한씨 한명회·고령신씨 신숙주· 광산김씨 김국광· 교하노씨 노사신 등 일부 훈구대신들이 연루되었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의령남씨 남이 등의 신진세력이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의령남씨 남이는 태조의 외손이라는 강력한 배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오위도총부총관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왕권강화책을 둘러싸고 의령남씨 남이 등의 세력과 종전의 훈구파 사이에 본격적인 갈등이 재연되어 남이옥사가 일어나게 됨으로써 정치세력의 변동이 일어났다.

 

남이의 옥은 남이가 한명회·노사신·김국광 등의 훈구대신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영광유씨 유자광의 고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옥사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이 등의 새로운 세력은 제거되고 종전의 훈구파가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이 사건 직후에 익대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훈구대신들은 더욱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471년(성종 2)의 좌리공신 책봉 때 종전의 공신으로 책봉 받았던 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들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됨으로써 훈구파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아울러 훈구파는 1467년(세조 13) 이래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다스리는 직책)이 되어 특정한 직사를 갖지 않고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 상호간에 통혼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습적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했다.

 

독점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은 15세기 후반 이후에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를 운용하기 어렵게 했다.

 

조선은 고려와 비교하여 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정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대단위 농장을 경제기반으로 한 훈구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이에 대해 이 시기 성장하고 있던 중소지주층인 사림파가 비판을 제기했다. 이러한 권력독점과 관료들의 사리사욕 추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논리로 나온 것이 성리학적인 공도론(公道論)을 제시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주장하면서, 훈구파의 권귀적(權貴的) 성향에 대해 비판을 한 정치공세 논리였다.

 

1476년(성종 7) 성종세조비 파평윤씨의 수렴청정을 철회하고 원상을 폐지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훈구대신들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선산김씨 김종직 사림파계열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정착시킴으로써 향촌민의 안정과 향촌지주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훈구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사림파는 이전에 혁파되었던 유향소(留鄕所)를 복립하고자 했으며 훈구파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은 1483년부터 계속되다가 1488년에 유향소가 다시 생겼으나 이때의 유향소는 중앙집권체제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복립된 유향소는 결국 이전과 같이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 없었다. 이에 사림파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훈구파를 더욱더 비판해갔다.

 

 이러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초래했다. 무오사화에서 사림파가, 1504년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가 각각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은 훈구파가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배출된 정국공신은 이후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1515년(중종 10)을 전후하여 서서히 사림파가 언관 진출 등을 통해 등장하여, 정국은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에 훈구파가 주도한 기묘사화 가 일어났고 이후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하다가 외척(중종의 사돈)인 연안김씨 김안로가 잠시 전횡했으며 김안로를 제지한 이후 다시 훈구파가 장악했다(→ 색인 : 기묘사화).

 

그런데 김안로일파의 제거에 외척들도 가세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훈구파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외척세력과도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갈등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로 인해 책봉된 위사공신 역시 외척에 의존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종 연간을 거쳐 덕수이씨 이기(소윤  윤원형(尹元衡)파)와 같은 인물이 잠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하더라도 점차 종전의 공신세력은 퇴조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중요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척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림파와 대립했던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어갔다 

 

사림파

조선시대 정치세력의 하나.

 

특히 조선 전기 집권세력인 훈구파에 대응하는 세력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학문배경으로 하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사족'(士族)·'사대부'(士大夫)·'사인'(士人)·'사류'(士流)와 같은 용어와 함께 사림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광범위한 독서인층, 곧 지식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종전의 지배계급은 사회체제 및 정치권력 구조의 재편성에 따라 조선사회 내부에서 분화되었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기존의 양반지배층은 물론 향촌사회의 향리까지도 조선의 관료제에 참여하거나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신진사대부가 관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문무양반으로 정권에 직접 참여했고,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은 관권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던 품관층, 일반사족, 그리고 향리세력으로 나뉘었다.

 

조선초에는 품관층이 사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 역시 신분으로 보아 사족이라 불렸다.

 

사림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통으로 보아 연일정씨 정몽주(鄭夢周)-해평길씨 길재(吉再)-선산김씨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가 15세기 후반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성종 연간에 선산김씨 김종직· 서흥김씨 김굉필(金宏弼)· 하동정씨 정여창(鄭汝昌)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들은 근거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영남사림파기호사림파로 나누기도 하는데 주로 비거족계(非鉅族系) 재지사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일부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사림파라 해도 시기에 따라 상이했으며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혹은 사림파에서 훈구파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훈구파에 비하여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하는 시기가 늦었던 영남사림파의 경우에 대체로 고려말 조선 초기에 이족으로부터 사족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시기는 크게 나누어 성종과 연산군대에 일어난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의하여 축출되는 때까지, 그리고 중종반정 이후 점차 세력을 형성했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또 그 활동은 각각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었다.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활동을 제기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근거지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언론활동과 유향소(留鄕所)의 복립 노력이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 군주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비롯한 훈구파들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강력한 인신적 지배예속을 매개로 농장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넓은 토지를 점유하고 양인농민에 압력을 가하여 전지노비(田地奴婢)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인구(人口)를 은점(隱占)하고 있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하천부지 등을 개간하여 자신의 농지를 확대하면서 소농(小農)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던 사림파로서는 그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경제적 기초를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종대에도 좌리공신(佐理功臣)이 정치세력의 중심이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부는 물론이고 이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대간(臺諫) 등 언관(言官) 계통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의 운용이 어려워지는 것을 뜻했다.

 

성종 친정이후 김종직이 경직(京職)에 복귀하면서 그의 문인 중에서 관리가 되어 대간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생겼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훈구파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기의 사림파의 정치활동은 주로 이러한 언론활동에 한정되었으며 한편으로 향촌질서의 안정을 위한 유향소 설치를 주장했다.

 

유향소는 조선초에 유향품관층을 중심으로 조직한 기구로서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던 태종에 의해 한차례 폐지되었다. 그뒤 세종대에 향풍교정(鄕風矯正)을 내세우면서 부활되었지만 유향소 세력이 수령과 결탁하여 농민을 수탈하거나 자체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세조 말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유향소 복립운동은 사림파에 의하여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질서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인식되어 추진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세조 말년에 혁파된 유향소라는 제도를 부활시킨다는 데 있지 않았으며, 〈주례 周禮〉의 향사례·향음주례를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두 의례는 덕행이 있는 자와 연로한 자를 각각 앞세우는 것으로서 유교윤리 기준에 의한 향촌질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향소의 복립운동은 훈구파의 맹렬한 반대로 1483년(성종 14)부터 5년간 논의되다가 1488년에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경재소(京在所)를 통한 유향소의 장악이 가능한 상태에서 유향소가 곧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는 없었다. 경재소는 본디 그 지방관련자에 의하여 구성·운영되는 것이었는데 훈구파는 경재소제도를 고쳐 중앙 고위관료의 지방연고권의 범위를 넓혀 그를 발판으로 수령을 통해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림파는 우세한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소가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시) 통과자라는 제한적인 인적 자원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강력한 세력 구축이 어려웠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는 강제 혁파당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타격을 받았지만 훈구파 역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양대 사화로 희생된 사림파 인물은 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김굉필·정여창 등의 문인은 크게 관련되지 않았다.

 

중종반정은 훈구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므로 중종 초기에는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림파의 본격적인 진출은 1515년(중종 10) 이후에 가능했다. 한양조씨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중종대의 사림파는 강력하게 삼대(三代:夏·殷·周)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도학정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와 같은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파를 비판하고, 천거제(薦擧制)를 통하여 과거제나 문음으로써 등용할 수 없는 유일(遺逸)과 학생(學生)을 선발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또한 여악(女樂)·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기신재(忌晨齋)·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책봉된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제거당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사림파는 중종의 제1계비 파평윤씨에게서 난 세자의 외숙인 대윤 윤임(尹任)과 제2계비 문정왕후 파평윤씨가 난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외숙인 소윤 윤원형(尹元衡) 외척 다툼 사이에서 위축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과 덕수이씨 이기(李?) 세력이 결탁하여 대윤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후에도 명종 연간에 잇달아 일어난 사화로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권신 덕수이씨 이기의 죽음과 척신의 배후였던 문정왕후 파평윤씨 소윤의 죽음을 계기로 더 이상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넓은 의미에서 사림의 재등장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훈구파와 대립하는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사림파는 훈구파가 정리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기 어렵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동일한 계급으로, 두 세력을 차별짓게 하는 것은 성리학 실천의 방법에 있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으나 양자는 서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향촌에서 주자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수양론(修養論)·도학론(道學論) 등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훈구파를 비판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사상은 수신(修身)에 두고 있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은 유교정치 사상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의 강조점은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사림파는 치인보다는 수기를 앞세웠고, 수신의 기본교재인 〈소학〉 공부를 강조했다. 〈소학〉은 생원·진사시나 잡과의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성균관의 학령(學令)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나 그에 대한 강조는 사림파의 수기강조라는 또다른 뜻이 있었다.

 

그외에도 수신을 강조한 것은 〈삼강행실〉·〈이강행실〉의 번역·배포라든가 향약·향음주례·향사례의 실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학의 정통을 세우고 이를 현실사회에서 급속히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기의 강조가 곧 치인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계에서의 활동 자체가 이미 치인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종대 사림파의 경우 치인에의 관심은 보다 확실했다. 사림파가 군주의 수기와 권한을 강조했다고 하여 곧 전제적 왕권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량과(賢良科)의 실시와 같이 관료제의 강화를 통하여 그들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는 추진하는 힘이 필요했던 것이고 현실적인 필요에서 군주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사림파의 사조 : 김종직 1431(세종 13) 경남 밀양~ 1492(성종 23).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출신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김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김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김종직은 해평길씨 길재와 연일정씨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영동김씨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창녕조씨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창녕조씨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관직생활

23세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29세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34세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40세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서흥김씨 김굉필(金宏弼)·하동정씨 정여창(鄭汝昌)·벽진이씨 이승언(李承彦)·남양홍씨 홍유손(洪裕孫)·김해김씨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52세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55세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59세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62세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조의제문>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해김씨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영광유씨 유자광(柳子光)·봉화정씨 정문형(鄭文炯, 정도전의 증손)·광주이씨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선산김씨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해김씨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하동정씨 정여창· 서흥김씨 김굉필· 경주이씨 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과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하동정씨 정여창 1450(세종 32)~ 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 호는 일두(一?).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정육을(六乙)이다. 서흥김씨 김굉필(金宏弼)· 김해김씨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41세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49세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서흥김씨 김굉필 [金宏弼]1454(단종 2)~ 1504(연산군 10).

 

〈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했으며, 그의 도학 실천 의지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성장배경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한승순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경기도의 성남(城南)·미원(迷原)과 야로(冶爐:처가)·가천(伽川:처외가)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소학〉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관직생활

27세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33세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41세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45세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51세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한양조씨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과연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정의 출사 전부터 사림의 영수로 인정받아

조광조는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기 전부터 명성이 있어, 29세 1510년(중종 5년) 11월 15일 진사의 신분으로 경복궁 사정전에서 행해진 테스트의 일종인 강경에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조광조는 [중용]을 강하여 약(略)이라는 성적을 받게 되었는데, 이 날 실록에서는 그를 사림의 영수로 칭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가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겪은 뒤부터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어릴 적에 서흥김씨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25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앞선 연산군 대 국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재창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때 사림들이 정치에 재진출하며 조정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사림이란 후일 율곡 이이가 말한 바와 같이 “마음속으로 옛날의 도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을 가지는 자”들을 말한다. 조광조는 바로 이런 성향의 사림세력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과 달리 당대까지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던 세력을 우리는 역사상 훈구 세력 또는 훈구파라 칭하고 있는데, 15세기 후반 이후 훈구 세력에 의한 권력형 비리가 여러 곳에서 문제화되었다. 사림세력은 이러한 훈구 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문제시하면서 새로운 조선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전대의 잘못을 청산하는 유신 정치를 꿈꾸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대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이른바 유신 정치를 추진하였다. 앞서 몇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연산군 대 폐지되었던 조선조 유학의 상징 성균관을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이는 유학을 진작시키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앞서 사화를 겪으며 귀양을 갔던 유숭조 같은 선비들을 소환하여 중용하였다. 다만 중종은 즉위한 초반에는 반정 공신들의 견제로 인해 정국을 주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8년 여가 지나면서 주요 반정 공신들이 사망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중종이 이때 주목한 인물이 사림의 영수로 있던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함경도 지방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으로 기회로, 마침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학군자(小學君子)’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서흥김씨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문인 가운데 한 명이다. 이로써 본다면 조광조는 김종직 이후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29세 1510년(중종 5년)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한 후, 34세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벼슬이 높아갈수록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음먹고 있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도학정치란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정치이며, 그 원류는 유학에서 이상시대로 알려진 요순시대의 정치 그것이었다.

 

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을 비롯해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대 시행되던 과거제가 주로 기예만 시험을 본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덕성에 바탕한 관인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성리학적 생활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못다 핀 개혁의 열망, 기묘사화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당대 사림세력은 대부분 젊은이로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너무도 그 수단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또 자기네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훈척 세력인 남곤이나 심정 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38세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운동으로 알려진 것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기묘사화와 관련해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술수가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지동(地動), 즉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를 국왕이 근심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조광조와 반대 측에 있던 의령남씨 남곤과 풍산심씨 심정 등은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중종에게 간언하였다. 여기서 권세 있는 신하가 다름 아닌 조광조였다.

 

그리고 남곤 등은 그 뒤 연거푸 말을 지어 퍼뜨리기를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또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천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走肖’는 즉 ‘趙’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 및 사림세력을 발탁했던 중종 역시 마음을 돌리게 되고, 이를 간파한 의령남씨 남곤? 풍산심씨 심정? 남양홍씨 홍경주 등은 밤중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을 일단 하옥되었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곤?심정 등의 주청으로 이들 조광조 이하 70여 명을 모두 사약으로 죽였다.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너무 날카롭고 급진적이었던 개혁가

 

기묘사화로 그동안 조정에 진출해 있던 많은 사림이 화를 당하게 되고, 결국 이 일로 조선 내 쇄신의 분위기는 일단 주춤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명종 초 척신세력의 대결 과정에서 발생한 을사사화로, 다시 한번 사림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법, 명종 대 후반부터 척신세력이 퇴조를 보이고 점차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선조 즉위와 동시에 정치를 주도하게 되면서 앞서 조광조가 주장했던 이른바 도학정치를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조광조는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점을, 조광조의 학문의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율곡의 이 같은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

 

조선중기 성리학자

 

당성(唐城)서씨 서경덕 : 1489(성종 20)~ 1546(명종 1).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가계 및 생애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30세인 1519년 한양조씨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42세에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51세에 1540년 의성김씨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55세에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坎離)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의 운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진보(眞寶)이씨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판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1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덕수이씨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진보(眞寶)이씨 이황 : 1501(연산군 7) 경북 안동~ 1570(선조 3).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27세인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33세인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울산김씨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34세인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43세인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46세인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48세인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상주주씨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52세인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68세인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창녕조씨 조식 : 1501(연산군 7)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 토동~ 1572(선조 5).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창녕성씨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여주이씨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북인 서산정씨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66세인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색인 : 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북인)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남인)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행주기씨 기대승 : 1527(중종 22)~ 1572(선조 5).

기대승의 글씨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관직생활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22세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기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소윤 파평윤씨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31세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40세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기일원론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황과 정지운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지나치게 〈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운봉호씨설(雲峰胡氏說)에만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자사(子思)와 맹자가 말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므로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삼는 것이니, 이는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사단이 기를 타지[乘] 않는다"는 것이다(→ 색인 : 이기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할 때에는 혹 이와 같은 설이 옳을지 모르나 사단·칠정은 이처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색인 : 인심도심설).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정치사상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에 제시된 거현론(擧賢論)·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은 왕도정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먼저 현자(賢者)의 등용을 중시하고, "현자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시비를 분명히 하여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연후에야 현자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여 윤원형 등 당시 집권층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창녕성씨 성혼 :1535(중종 30)~ 1598(선조 31).

성혼의 글씨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색인 : 성리학).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수침(守琛)이다.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7세 1551년(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 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50세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노론 연일정씨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1년 〈율곡집〉을 평정(評定)했다.

 

54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56세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덕수이씨 이이 : 1536(중종 31)~ 1584(선조 1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생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평산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9세인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29세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31세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48세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철학사상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 색인 : 성리학, 주기론).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이다.

 

즉 이는 이념적 존재이므로 시공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원리로서 만물에 공통적인 것이며, 기는 질료적(質料的)·작위적(作爲的) 존재로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적(形而下的) 기재로 국한적인 것이다.

 

이이는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차이로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설명하고, 유위와 무위의 차이로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설명했다(→ 색인 : 이통기국론). 이처럼 이이는 이존론(理尊論)을 주장하는 이황과 달리 이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기의 부잡(不雜)보다는 불리(不離)를 강조했다.

 

즉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서로 협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일물(一物)이 아닌 것이며, 이는 이이고 기는 기라고 하더라도 이와 기는 혼륜무간(渾淪無間)해서 선후와 이합이 없기 때문에 이물(二物)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형이상·형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색인 : 기발이승일도설).

 

이러한 그의 이기관은 그대로 인간관에 반영된다. 먼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칠정은 사단을 포괄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본래 하나의 성으로 여기고, 이만을 지칭할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서로 관련시켜 파악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총괄하여 말하면 칠정이고 그중에서 특히 선일변(善一邊)만을 지칭하면 사단으로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단은 도심이라 할 수 있고,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심에는 천리(天理)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은 다만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했는가,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발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욕을 천리에 배치된다고 보는 기존의 천리인욕설과는 대비되며,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초보적인 욕구를 당연시함으로써 생산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긍정하는 견해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이는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고 여겼다. 그는 변화의 기초에 음양에 구비되어 있는 동(動)과 정(靜)의 속성과 그 음양을 동정하게 하는 법칙성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운동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의 속성 대신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변화에 대한 이해를 사회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변법사상의 기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회개혁사상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가 중쇠기(中衰期)로서, 오랫동안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아 시폐(時弊)가 쌓여 있으므로 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시폐는 공물납부와 진상의 폐해, 군역의 불균, 관리들의 부정 등이었다. 이에 그는 공물분정을 공평하게 하고 진상을 경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잡다한 일체의 공물을 폐기하고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수결수미법(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호조의 관리로 하여금 전국의 한정(閑丁)을 조사·색출하여 이들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한편 변장(邊將)들이 군졸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 지방의 창고곡식으로 보장해주는 방안과 군졸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병역교대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진전개간(陳田開墾)을 장려하기 위해 휴한지나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실제 경작면적에 따라 세를 부과할 것을 주장했으며, 파산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재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과 관료기구를 간소화하고 낭비를 근절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이는 이러한 제반 시폐의 개혁은 시세(時勢)가 마련되어야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실현여부는 군주의 개혁하려는 입지(立志)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신(賢臣)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고 여겼다. 특히 가장 이상적인 통치형태로서 도학이 행해지는 삼대지치(三代之治)의 회복은 군주 일인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때 도학이란 격치(格致)로써 선(善)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몸에 쌓이면 덕(德)이 되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면 왕도(王道)가 되는 학문이다. 이처럼 이이는 개인의 윤리도덕규범·가치규범이 그대로 확충되어 통치규범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이는 성학(聖學)의 이름으로 군주를 교도하여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인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그리고 시폐의 개혁은 단지 시폐의 혁거(革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양민(養民)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백성을 주자학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교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그의 개혁론은 시폐의 개혁, 양민, 그리고 백성의 교화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의 개혁안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는 개혁기구인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실정에서 향약은 그의 개혁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파주향약의 서문(序文)을 짓고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향약(社倉契鄕約)·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등을 만들었다. 이 향약의 사회적 기능은 지방사족의 주도로 농업생산층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의 개혁사상은 16세기 사회발전의 진전에 따라 동요하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이는 점진적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향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치운영론

이이는 붕당(朋黨)을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정치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주자의 붕당론에 근거한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 위주의 붕당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붕당긍정론에서 출발하여 군자당·소인당의 엄격한 분별과 진퇴를 강조함에 의해 군자당으로 자부하는 사림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사이의 시비로 인하여 분붕(分朋)의 조짐을 보이던 1575년 이후 이이는 그 해소에 진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붕당론을 수정하게 된다.

 

이이는 동인·서인이 모두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의견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입장인 군자소인변은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동서를 타파하는 방법으로 양시양비설(兩是兩非說)과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을 제시하게 된다.

 

먼저 동인·서인 명목 성립의 기초가 된 이른바 심의겸·김효원 시비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적용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마무리짓고, 함께 조정에 나와 보다 막중한 국사와 민생문제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83년 자신을 소인으로 공격하는 삼사의 언관에 대해서 엄정한 시비분별을 요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논쟁에서 양시양비론을 적용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동인과 서인에 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당론 위주의 인사정책에 반대하고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조용(調用)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청탁(淸濁)을 분별한 것이었고, 집권세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보합조제론은 수십 년에 걸친 훈척과의 투쟁에서 체득한, 집권당을 견제할 수 있는 상대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사류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이후 그의 문인들로 형성된 서인 노론계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의 정치사상·정국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격렬하게 진행되던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정치사회 운영론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임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한편, 이황이나 조식(曺植) 등의 사상을 계승한 학파·정파를 배제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17~18세기의 격변기에 광산김씨 김장생(金長生)-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청주한씨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이이학파는 이같은 작업에 토대를 놓음으로써 이후 정치·사상계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 小學集注改本〉·〈중용토석 中庸吐釋〉·〈경연일기 經筵日記〉 등이 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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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양천허씨 허엽 1517(중종 12)~ 1580(선조 13).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아버지는 군자감부봉사(軍資監副奉事) 허한(瀚)이다. 아들 허성(筬)·허봉(?)·허균(筠), 딸 허난설헌(蘭雪軒)이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서경덕(徐敬德)과 이황(李滉)에게서 수학했다.

 

30세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37세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장령으로 재직중 재물을 탐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사성·지제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46세 1562년 경연(經筵)에서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윤근수(尹根壽)·구수담(具壽聃)·허자(許磁)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다시 파직당했다
. 52세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59세 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본격화될 때 김효원(金孝元) 등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그후 병으로 인해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상주에서 객사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도산서원의 건립을 지원하고 향약(鄕約)의 실시를 건의하는 등 주자학의 보급에 힘썼고,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 警民篇〉의 보완과 〈삼강이륜행실도〉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청백리에 등록되었고,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초당집〉·〈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붕당의 시작> 서인: 청송심씨 심의겸/ 동인:선산김씨 김효원

 

<1> 서인 : 노론, 소론, 벽파,시파 계열

 

충주박씨 박순  1523(중종18)-1589(선조22)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아버지는 한성부 좌윤 우(祐)이다.

 

31세 1553년(명종 8)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전적·수찬·사인 등을 지냈다. 15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한산 군수·직제학·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거쳤다.

 

33세 1565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척신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대제학·우의정·좌의정을 거쳐 50세1572년(선조 5)부터 약 1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동서당쟁이 심할 때 이이·성혼 등을 편들어 상소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뒤 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천지(天地)의 생성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태허설(太虛說)을 주장했다. 또한 정치의 도(道)는 충과 효라면서, 자신으로 보면 집안이 먼저이고 나라는 뒤이지만 예(禮)로써 보면 나라가 존귀하고 집안은 낮다고 했다.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능했으며,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다. 저서인 〈사암집〉은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싹틀 선조 당시의 주변 실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 월봉서원(月峰書院),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영평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광산김씨 김계휘 1526(중종 21)~ 1582(선조 15).

 

본관은 광산.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현감 호(鎬)의 아들이며, 장생(長生)의 아버지이다.

24세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그뒤 여러 해 동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사관(史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32세 1557년 소윤(윤원형)파 의성김씨 김여부(金汝孚)와 안동김씨 김홍도(金弘度)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37세 1562년 이조정랑으로 복직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중이어서 나가지 않고, 3년상을 마치고 관직에 나가 사간·집의·응교·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41세 1566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50세 1575년(선조 8) 동인·서인이 나누어질 때 서인에 속했다가, 당쟁 완화를 위한 조정의 조정책으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581년 종계변무주청사로 중국에 갔다온 뒤,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이 되었다.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우리나라의 산천·마을·도로·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현황, 각 지명의 전통·연혁·씨족원류 등을 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능성구씨 구사맹 1531(중종 26)~ 1604(선조 37).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아버지는 영의정 순(淳)이며, 딸이 인헌왕후(仁獻王后; 조선 정원군 : 원종 (元宗:추존)의 비. 능성구씨(綾城具氏)로  인조의 어머니이다.)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의 문인이다.

 

28세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사간·정언 등을 거쳤다. 156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왔다.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39세 1569년(선조 2)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 있을 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76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좌부승지로 있다가 다시 대간의 탄핵으로 남양부사로 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자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왕자와 후궁을 따라 성천에 피난했다. 그뒤 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으나,

 

72세 1602년 아들 구굉(宏)이 유배되자 사직했다. 죽은 뒤 1632년 사위인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되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신진사류들의 뜻을 따르지 않아 자주 탄핵당했으나, 청렴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저서에 〈팔곡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동인>선산김씨 김효원 : 1532(중종 27)~ 1590(선조 23).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遇)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 등에게 배웠다.

 

33세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지내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41세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했다. 이조전랑은 비록 그 지위는 낮으나 관리의 임면(任免)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로 반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어 그 임명은 이조판서라도 참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명종 때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그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보고, 문명(文名)이 있는 자가 권문(權門)에 아첨한다고 멸시하고 있다가 이때 김효원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권신(權臣) 윤형원의 문객이었다 하여 거부했다.

 

그러나 43세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었다.

 

그후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충겸이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임을 들어, 전랑의 관직은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고 광산이씨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이에 심의겸은 "외척(外戚)이 원흉(윤원형)의 문객에게 지겠느냐"하여 더욱 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이조전랑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림파가 동인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駱山) 밑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하여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동인이라고 불렀으며, 심의겸의 집이 서울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으로 불렀다.

 

동인은 주로 신진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도 관계가 있었다. 이들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윤 우의정 광주노씨 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 덕수이씨 이이(李珥)가 사림의 분쟁을 우려하여 이를 완화시키고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내보내도록 상소했다.

 

그후 김효원은 경흥·부령·삼척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사간(司諫)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중앙의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계속 지방에 머물렀다. 당쟁이 심화되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나갔으며 당쟁에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뒤에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암집〉이 있다.

 

 

서인 해평윤씨 윤두수 1533(중종 28)~ 1601(선조 34).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변(?)이며, 동생이 우찬성 근수(根壽)이다.

성수침(成守琛)·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 등에게 배웠다.

 

26세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저작 등을 지냈다.

 

31세 1563년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청송심씨의 외삼촌으로 권세를 누리던 이조판서 전주이씨 이량(李樑)이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대사헌 우계이씨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같은 해 이량이 반대파 사림의 숙청을 꾀하다가 유배됨에 따라 다시 기용되어 수찬이 되었다. 그뒤 이조참의·장령·사복시정·부응교·우승지 등을 지냈고,

 

44세 1576년(선조 9) 대사간이 되었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도승지로 있다가 이종동생 이수(李銖)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1579년 연안부사로 복직되었다. 이때 구황(救荒)의 공으로 선조로부터 옷 1벌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을 거쳐 1587년 전라도관찰사, 1589년 평안감사를 지냈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해원군(海原君)으로 봉해졌다.

 

57세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지냈다.

 

59세 1591년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를 당할 때 함께 파직되어 회령·홍원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60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선조를 호종(扈從),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에 올랐다. 평양에 있을 때 명(明)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했으며, 함흥피난론을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함흥이 함락된 뒤에도 선조가 무사하게 했다. 의주에서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랴오둥[遼東] 피난을 막았다.

 

62세 1594년 세자를 따라 남하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왕비를 해주로 시종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67세1599년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문징명체(文徵明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梧陰遺稿〉·〈성인록 成仁錄〉, 편서로는 〈기자지 箕子志〉·〈평양지 平壤志〉·〈연안지 延安志〉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남인 경주김씨 김명원 1534(중종 29)~ 1602(선조 35).

김명원

본관은 경주.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아버지는 대사헌 김만균(萬鈞)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현감 안준의(遵義)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5세 1558년(명종 13) 사마시, 28세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헌납·지평·교리·수찬 등을 지냈다. 1569년(선조 2) 이래 종성부사·형조참의·평안병사·전라감사·병조참판·도총관 등을 두루 지냈다.

 

54세1587년 왜구가 녹도(鹿島)를 침범하자 도순찰사로 이를 격퇴시켰다. 이어 형조판서·경기감사를 거쳐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했다. 56세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수습의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어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59세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 한강 및 임진강 방어에 임했으나 막아내지 못했다. 평양 함락 후 순안(順安)에 주둔, 선조 거처를 경비했다. 명(明)의 원군이 오자 명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다. 임진왜란 후 호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시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했고, 좌찬성·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68세 1601년 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서인 청송심씨 심의겸 :1535(중종 30)~ 1587(선조 20).

심의겸의 글씨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이며,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이다.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인순왕후 청송심씨 (仁順王后 : 명종의 妃)의 동생이다.

 

28세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이 문정대비 파평윤씨 (文定大妃)를 배경으로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은 1563년 전주이씨 이량(李樑)을 이조판서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량이 횡렴을 일삼고 사림을 탄압하여 사림으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척신(戚臣)이기는 했으나 척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사림을 옹호했던 그는 국왕의 밀지(密旨)를 받고 대제학 기대항(奇大恒)으로 하여금 상소케 하여 외숙부인 이량 일파를 탄핵했다.

 

1564년 지평·검상, 1565년 사간·부응교, 1566년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어 1569년(선조 2)에 좌부승지·대사간, 38세 1572년에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전배(前輩) 사류와 교유가 많았다.

 

명종대 소윤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전배들은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등장한 김효원(金孝元) 등의 후배(後輩)들은 급진적으로 척신정치의 유제를 척결하고자 했으므로 전배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이조정랑 오건(吳健)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신진사류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던 김효원을 천거하자, 심의겸은 그가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 기거하면서 아부했다고 하여 임명을 반대했다.

 

결국 1574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1575년에 심의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김효원이 반대했다.

 

이같은 대립은 전·후배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사림은 2개의 당파로 나누어졌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던 까닭에 심의겸파를 서인으로 불렀으며, 김효원의 집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김효원파를 동인이라고 불렀다.

 

그해에 동서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김효원과 더불어 외직으로 밀려나, 개성유수·전라감사를 지냈다. 그뒤 사직하고 파산(破山)에 내려가 있다가 1580년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과 함경감사 등을 지냈다.

 

북인 서산정씨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았을 때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으나, 이이가 죽은 뒤 1584년 동인의 득세로 파직당했다. 청양군(靑陽君)에 봉해졌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북인(대북) 서산정씨 정인홍 1535(중종 30) 합천~ 1623(인조 1).

 

산림(山林)으로서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아버지는 윤(倫)이다.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 등과 함께 조식에게 수학하고 그의 수제자로서 학통을 이어받았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를 포기했다. 39세 1573년(선조 6) 김우옹의 천거로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 황간현감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고 1581년 장령이 되었으나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를 축으로 한 서인계에 밀려 50세1584년에 낙향했다.

 

55세1589년 기축옥사로 최영경·이발(李潑) 등 조식학파가 탄압을 받으면서 이황학파와 결별하고 북인을 형성했다.

 

58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문 수학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과 함께 성주·고령·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 경상우도를 방어했으며, 이를 계기로 조식학파는 경상우도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68세 1602년 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서인과 이를 방관했던 남인을 배제하고자 이들과 치열히 다투다가 수개월 후 낙향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으로서 영향력만 행사했다.

 

74세1608년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둘러싼 후사문제로 북인이 대북·소북으로 대립하게 되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유배가 풀린 후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조식과 조식학파의 학문적 위상 강화작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조식의 문묘종사를 추진하는 한편,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학문을 비판하고 이들의 문묘종사를 저지했다. 이 일로 8도의 유생들에게 탄핵을 받고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다.

 

79세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지원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84세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논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89세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서인에게로 넘어간 후 광해군 정권의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창녕성씨  성혼  : 1535(중종 30)~ 1598(선조 31)

덕수이씨 이율곡: 1536(중종 31)~ 1584(선조 17)

연일정씨  정철:   1536(중종 31)~ 1593(선조 26) 경기 강화.

 

 

국문학사에서 해남윤씨 윤선도· 밀양박씨 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이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연일정씨가 된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어 명종(明宗)과 친했다.

 

10세 때인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명종 6)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양응정·임석천·김인후·송순·기대승 등에게 수학하고, 이이·성혼·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27세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君)의 처벌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명종의 뜻을 거슬려 말직에 머무르다 32세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33세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36세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39세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부터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내려와 있다가  42세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44세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관동별곡〉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대사성을 지내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관찰사를 제수받아 1582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47세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기주실의'(嗜酒失儀)하고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가 올려지는 등 논핵을 당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받고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총마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49세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53세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55세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56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남양홍씨 홍성민 1536(중종 31)~ 1594(선조 2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아버지는 관찰사 춘경(春卿)이다.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에게 수학했다
.

 

26세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했고, 29세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교리를 지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대사간·호조참판·부제학·예조판서·대사헌을 역임했다. 1575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가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노력을 했고, 1588년 종계변무가 이루어지자 1590년 그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이해수(李海壽) 등과 함께 파직당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 대제학·호조판서를 역임하다가 전란중 병사했다.

 

저서로 〈졸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서인 해평윤씨 윤근수 1537(중종 32)~ 1616(광해군 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변(?)이며, 형은 영의정 두수(斗壽)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22세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에 뽑힌 뒤, 주서·봉상시주부·연천군수 등을 지냈다. 1562년 부수찬으로 있으면서 조광조(趙光祖)의 복권을 상소했다가 과천현감으로 밀려났다.

 

이듬해 형 두수소윤파 권신(權臣) 전주이씨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에 반대한 일로 함께 파직되었다.

 

1565년 부교리로 재기용되었고,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566년 교리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사인·집의·응교·동부승지·대사성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하고 돌아온 뒤, 부제학·대사헌·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42세 1578년 뇌물을 받았다는 동인(東人) 계열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강릉부사·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 지냈다. 1589년 공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제(明帝)로부터 종계(宗系)를 수정한 〈대명회전 大明會典〉을 받아왔다. 귀국한 뒤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55세 1591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되자 형 두수와 함께 파면되었다.

 

56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재기용되어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명나라를 왕래하며 명과의 외교를 맡았다. 1595년 좌찬성에 오르고, 1597년에는 왕비를 수안(遂安)으로 시종한 뒤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1604년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64세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廟號)를 조(祖)라고 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황·조식(曺植)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성혼(成渾)·이이(李珥) 등과 사귀면서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구했으며, 당시 명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양명학에 대해서 유해무익한 것으로 배척하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거장(巨匠)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그의 글씨는 영화체(永和體)라 하여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는 〈월정집〉·〈월정만필 月汀漫筆〉·〈사서토석 四書吐釋〉·〈마한사초 馬韓史抄〉·〈한문질의 漢文質疑〉·〈송도지 松都志〉·〈조천록 朝天錄〉·〈조경창수 朝京唱酬〉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양주의 〈이판서윤경묘비 李判書潤慶墓碑〉, 상주의 〈윤연령부인박씨갈 尹延齡夫人朴氏碣〉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인 의성김씨 김성일 1538(중종 33)~ 1593(선조 26).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김진(璡)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27세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31세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 등을 거쳤다.

그뒤 부수찬·정언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40세 157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다. 그뒤 함경도순무어사·사간·황해도순무어사를 지냈으며, 나주목사로 있을 때는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조광조·이황 등을 제향했다.

 

53세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때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했으나, 동인인 그는 일본의 침략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당시의 동인정권은 그의 견해를 채택했다.

 

55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동인인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학문적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저서에 〈상례고증 喪禮考證〉·〈해사록 海錄〉·〈학봉집〉이 있으며,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북 : 육북>한산이씨 이산해 1539(중종 34)~ 1609(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산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산해관(山海關)에서 그의 잉태를 꿈꾸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之?)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7세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보령으로 이주했다.

23세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경복궁 대액(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병조좌랑·수찬을 역임했으며, 27세 1565년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이조정랑·직제학·동부승지·대사성·도승지 등을 지냈다.

 

40세 1578년(선조 11) 대사간으로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어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지냈다.

 

50세 1588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무렵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했다. 일찍이 그는 남사고(南師古)와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이는 그가 실제로 동서분당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51세 158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이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3세 1591년 아들 이경전(慶全)을 시켜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고, 그밖의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시키거나 귀양 보내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다.

54세 1592년 왜적이 침입하도록 했다는 탄핵을 받아 평해에 유배되었다가

57세 1595년에 영돈녕부사로 복직되었다. 이후 대북파의 영수로서 61세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63세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문장에 능하여 선조대 문장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김시습(金時習)의 문집 서문을 썼으며, 평해 유배시절에는 수많은 시문을 지었다. 선조가 죽은 후에는 선조의 지문(誌文)을 지었다.

 

서화는 초서(草書)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으며, 산수묵도(山水墨圖)에도 뛰어났다. 안강의 이언적신도비명(李彦迪神道碑銘)과 영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를 썼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령김씨 김면 1541(중종 36)~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고령.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아버지는 경원부사 김세문(世文)이다. 일찍이 조식(曺植)에게 사사하고,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명종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선조 즉위초에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곽준(郭?)·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지례(知禮)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역습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고,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11월에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53세 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진주하여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07년 이조판서가 더해졌다. 고령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송암실기〉가 있다.

 

 

남인 풍산유씨 유성룡 1542(중종 37)~ 1607(선조 40).

유성룡

 

임진왜란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출신과 관직생활

할아버지는 군수 유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유중영(仲?)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3세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25세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을 거쳐 28세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29세 1570년 부수찬·수찬을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오르고, 30세 1571년 병조좌랑, 34세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 36세 1577년 검상·사인·응교, 38세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40세 1581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42세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45세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49세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임진왜란기의 활동

51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明)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啓)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亂民)의 초무(招撫)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53세 1594년 〈청훈련군병계 請訓練軍兵啓〉·〈청광취인재계 請廣取人才啓〉·〈전수기의십조 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

 

그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56세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59세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63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사회·경제 시책과 국방대책

그의 사회·경제 시책은 대부분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과 전후수습에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되었다. 그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민심수습책으로 그는 임란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라 수관(授官)·면천(免賤)·면역(免役)·부과(赴科) 등 파격적인 포상제를 실시하고, 군사비 이외의 기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공물(貢物)·진상(進上) 등을 경감해주는 등 백성에게 실제 혜택이 있게 하여 파탄·와해된 민심을 수습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문벌에 관계없이 각 방면의 인재를 등용하며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병력을 확보하는 등 인적 자원을 동원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공물·둔전에서 나오는 양곡(糧穀), 노비의 신공(身貢) 등을 미곡으로 대납(代納)하게 하고, 파격적인 포상을 대가로 모속(募粟)을 행하며, 소금을 구워 곡물로 바꾸거나 중강개시(中江開市)를 통해 중국의 곡물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전시군량확보를 위한 응급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16세기 이래의 공물제(貢物制)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중 그가 제기한 국방대책은 민심수습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사회·경제 시책 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는 중앙군으로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이 구상은 난민·유민(流民)을 구제하기 위한 둔전론(屯田論)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즉 훈련도감의 경우 정병으로 양성하기 위한 군인 외에 서울에서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5영(五營)을 두고, 각 영에 2,000명을 배치하여 해마다 반수는 성중(城中)에 남아 연습하고 나머지는 성외에서 빈 땅을 골라 둔전을 만들고 윤번으로 교대시켜 군량공급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종전의 양민만이 아니라 양반과 천인(賤人)까지도 편입시키는 속오군도 둔전의 설치와 표리관계에 있었다. 그가 제시한 둔전책은 전란으로 동요하고 있는 농민을 안정시켜 무농경작(務農耕作)하게 하는 방안으로 유리민이나 일본군 점령하의 농민을 둔전 가능지역에 모아 정부에서 소·종자·농기구 등을 지급하고 둔전을 경작시켜 궁극적으로는 주민보호·군량확보·기민구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사상

그는 스승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또한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그는 이황처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이기로 분석하지 않았지만, 도심을 한결같이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일찍부터 양명학을 연구했으나 정통 성리학자로서 이를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양명학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지(知)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을 행(行)으로 병립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서애집〉·〈징비록 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운암잡기〉 등이 있으며, 편서로 〈대학연의초〉·〈포은집〉·〈퇴계선생연보〉·〈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 精忠錄〉·〈효경대의 孝經大義〉 등이 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군위 남계서원(南溪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의성 빙산서원(氷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인 단양우씨 우성전 1542(중종 37) 서울~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아버지는 현령 우언겸(彦謙)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김성일(金誠日)·이봉춘(李逢春)·정사성(鄭士誠) 등과 교유했다.

 

27세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봉교·수찬을 거쳐 35세1576년 수원현감을 지냈다. 40세 1581년 한때 파직되었다가 장령·사옹원정·응교·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했다.

 

동서분당(東西分黨) 때에는 김효원(金孝元)·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동인을 대표했으며, 그뒤 이발(李潑)과 사이가 벌어져 그는 남산(南山)에 살아서 남인으로,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50세 1591년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했다.

 

51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추의군(秋義軍)이라 칭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 등과 합세했다. 병선을 이끌고 적의 진로를 차단했으며, 행주에서는 권율(權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전공으로 대사성에 기용된 뒤 남하하는 왜적을 경상남도 의령까지 추격했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역상(易象)과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역설 易說〉·〈이기설 理氣說〉·〈계갑일록 癸甲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서인 배천조씨 조헌 1544(중종 39) 경기 김포~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의병장.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에게도 배웠다.

 

22세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했다. 24세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 28세 1571년(선조 4) 홍주목교수(洪州牧敎授)에 임명되었는데, 이 시절부터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1572년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궁중불사(宮中佛寺)의 봉향(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고, 이듬해 교서관저작이 되어 다시 같은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1574년 5월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1월 귀국하여 시무(時務)에 관한 '8조소'(八條疏)를 올렸다. 1575년 교서관박사에 오르고 이어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쳤다. 그뒤 통진현감이 되었으나, 내노(內奴)의 작폐를 다스리다 장살(杖殺)한 죄로 탄핵을 받아 34세 1577년 부평으로 귀양갔다. 1580년 풀려나 이듬해 공조좌랑·전라도도사에 임명되었고, 1582년 보은현감이 되었다.

 

41세 1584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옥천의 밤티(栗峙)에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1586년 다시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公州牧敎授兼提督官)에 임명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음을 주장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는 등 5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46세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11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방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9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車嶺)에서 문인 김절(金節) 등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색인 : 금산전투).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대체로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이(理)의 일차성을 인정하면서도 기(氣)의 존재를 중시했다.

 

한편 그는 국내외의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여러 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으로 불린다.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고,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옥천 표충사(表忠祠),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동인 광산이씨 이발(李潑, 1544년 ~ 1589년)

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광산이다. 동인 강경파의 영수였다.

 

윤의중의 사위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시켜 그의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사살하여 동인들의 서인에 대한 분노, 원한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동인의 남북 분당으로 이어진다.

[편집] 생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동인에 가담한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정랑에 오른 후 당상관이 되어 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었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자 대사간직을 스스로 사퇴, 대죄하다가 그가 관련이 있어서 사퇴한 것이라는 서인의 날조와 탄핵으로 의금부로 하옥되었다. 이때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이때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장살되어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악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인 중진 문신 윤의중의 사위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정여립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그의 처조카 윤선도는 서인에 대한 뿌리깊은 원한과 불신을 품게 되었다.

[편집] 기타

그와 동시대에 동명이인인 또다른 이발이라는 인물도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정여립의 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여산송씨 송익필이라는 설이 있다

 

 

전주이씨 이준 1545(인종 1)~ 1624(인조 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평숙(平叔), 호는 뇌진자(懶眞子)·서파(西坡). 아버지는 이유정(惟貞)이다.

 

24세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29세 1573년 주서로 있을 때 한어(漢語)의 해독에 능통했다. 그후 정언·헌납 등을 거쳐 43세 1587년 의주목사로 재직중 명의 사신을 영접할 때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45세 1589년 승지로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의 죄인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으로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48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로서 역참(驛站)과 군량의 조달 등을 담당했고, 50세 15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춘천부사·예조참판·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56세 1600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남양홍씨 홍여순(洪汝諄)의 당파라고 하여 파직되었다. 안동부사를 거쳐  60세 1604년 부경사신(赴京使臣)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경주부윤·공조판서·개성유수·좌참찬 등을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동래정씨 정여립 1546(명종 1)~ 1589(선조 22).

 

정치적 결사의 성격을 갖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모반을 꾀한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체포되기 직전 자결했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과 같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표방했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아버지는 첨정(僉正) 정희증(希曾)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22세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고, 25세1570년(선조 2)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38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면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44세 1589년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申砬)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고변(告變)으로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고 그도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했으나, 포위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제로 그가 대동계를 이용하여 반란을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작설과 역모설의 양설이 있다.

 

정철(鄭澈) 등 서인의 주도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 등 동인의 주요인물이 거의 연루·제거되었으며 이때 숙청된 인사는 1,000여 명에 달했다. 이 기축옥사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전하는 언동을 통해 볼 때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적지않은 차이를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이를 보여준다. 또한 민중군경(民重君輕)하기 때문에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 요(堯)·순(舜)·우(禹)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禪讓)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간주했다.

 

이는 봉건왕조의 기본적 가치관의 하나인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모반'이 조작된 것이라면 동인과 서인 사이의 정쟁뿐만 아니라 이처럼 '위험한' 사상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후대 실학자들의 민권사상에 계승되었다.

 

 

남인 전주이씨 이원익 1547(명종 2) 서울~ 1634(인조 12).

이원익 영정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6번제(六番制)와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공헌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치(?)의 4세손이며,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낸 이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세에 4학 중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수학했다. 18세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정자·저작 겸 봉상직장을 거쳐

28세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해감사이던 이이(李珥)의 천거로 30세 1575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그뒤 교리·수찬·지평·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38세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승정원이 탄핵을 받자 자신만이 파면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42세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47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48세 1593년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한 공으로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50세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와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55세 1600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돌아보았다. 59세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려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되었다.

 

78세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왕의 호위를, 82세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의 호위를 맡았으며, 서울로 와서는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사직하여 낙향한 후에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는 안주목사로 있을 때 농민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병졸들의 입번(入番)을 4번에서 6번으로 하여 1년에 2개월씩 근무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색인 : 6번제). 이 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또한 그때까지 누에를 칠 줄 모르던 안주지방에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장려해서 안주에서는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한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으로 있을 때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거두되 중앙에 선혜청을,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防納)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에 한하여 우선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 묘정,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 시흥 충현서원(忠賢書院),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북 : 골북계>남양홍씨 홍여순 1547(명종 2)~ 1609(광해군 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신(士信). 아버지는 홍은(誾)이다. 22세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며, 29세 1575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46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판서로 선조와 함께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조정의 무책임한 도피에 분노한 평양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전쟁중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와 밀착하여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을 몰아내고 북인세력이 정권을 잡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병조판서로서 무반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독자세력을 구축하여 대북을 영도하면서 남이공(南以恭) 등의 소북과 대립하다가 54세1600년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듬해 복관되어 유영경(柳永慶)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62세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대간의 탄핵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광산김씨 김장생 1548(명종 3) 서울~ 1631(인조 9).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이다. 그의 예학론은 양란(兩亂)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正統]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직생활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31세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44세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53세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55세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66세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서제 경손 慶孫)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78세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衛副司直)으로 옮겼다.

 

80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뒤  83세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국가재조의 예학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쟁으로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이 분당·대립하고, 한편으로는 이괄(李适)의 난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가체제가 위기에 빠져 토지제도·수취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때였다.

 

국가재조는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국가의 위기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했다.

 

예 실천의 방법으로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중요시했다.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發)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예 실천의 주체인 인간 내면의 심(心)을 개발하고, 천리(天理)의 법칙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 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근사록〉을 오랫 동안 연구하고 고금선유(古今先儒)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예와 효의 관계를 "예가 아닌 것은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면서 효를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여 "관혼상제는 가정에서의 일용(日用)의 체(體)이며 길흉(吉凶)의 수(需)에 통한다. 하나라도 폐(廢)하여 강습하지 않은 바 없다"고 하여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에 있었다.

 

가정·사회·국가에서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서야 하는 것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통(統)이며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예였다.

 

이러한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기능했다.

예학의 이론적 배경

그가 예론에서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율곡의 이기설(理氣說)이었다.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면서 율곡의 이기관(理氣觀)을 포괄적으로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기의 관계를 불상잡(不相雜)·불상리(不相離)로 파악하고, 기(氣)의 유위유형(有爲有形)한 부제성(不齊性)과 이(理)의 무위무형(無爲無形)한 제일성(齊一性)의 관계에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과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이해했다.

 

또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견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해석하여, 사단과 칠정이 이정(二情)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이 이심(二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심(心)이 발(發)한 때와 발하기 전의 존양성찰(存養省察)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칠정이 사단으로, 인심이 도심으로 보존되고 발양되기 위해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계구신독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서도 퇴계의 이자도설(理自到說)을 부정하고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다.

격물(格物)이란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이며 물리는 내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물리가 내 마음에 도래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물의 이(理)는 인간의 지(知)와 관계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를 통하여 인식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제는 다만 나의 지(知) 여하에 따라 인식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물아일리(物我一理), 주객합일(主客合一)인 내 마음의 인식 능력으로 물리를 체득하는 이론을 추구했다. 따라서 격물이라는 것도 사물의 이(理)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득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격물과 치지는 비록 구별하여 표현되지만, 물리가 일리(一理)이며 격물과 치지가 모두 활연관통의 양면이기 때문에 그 실질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誠思想)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理氣心學觀)을 계승하여 일원적(一元的)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박문(博文)의 공이 많지만 약례(約禮)에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하다"고 했듯이 예학에 더욱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예학의 계승

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상에 의문이 있으면 그에게 자문할 정도로 예학에 정통했다.

 

또한 학문을 아들 집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다.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이시직(李時稷)·최명길(崔鳴吉)·이덕수(李德洙)·최명룡(崔命龍)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道基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답 疑禮問答〉 등 예에 관한 것과,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 沙溪先生全書〉가 남아 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소북: 탁북, 유당>전주유씨 유영경 1550(명종 5)~ 1608(광해군 즉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아버지는 참봉 유의(儀)이다. 23세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43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의병을 모집했고, 다음해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공으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45세 159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48세 1597년 정유재란 때 지중추부사로서 가족을 먼저 피난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동서(東西)의 당론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했고,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나뉘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했다.

 

50세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나뉘자 남이공과 함께 소북파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53세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는데, 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 등과 세자문제로 심한 마찰을 빚었다.  55세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영의정이 되었다. 그뒤 남이공과 불화하여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했다.

 

선조 말엽 그의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는데 그 기반은 종척(宗戚) 관계에 있었으며, 사당적(私黨的) 성향이 강했다. 빈(嬪) 소생이나 이미 세자로 지명된 광해군 대신 선조가 총애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기반의 성격에서 연유했다.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59세로 사사(賜死)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남인 연안이씨 이광정1552(명종 7)~ 1627(인조 5).

이광정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눌옹(訥翁). 아버지는 정언 이주(澍)이다. 39세 1590년(선조 23)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시강원설서 등을 지냈다.

 

41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에 가서 정언·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병조정랑·동부승지·이조참의·좌승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46세 1597년 호조·공조 참판을 거쳐 이듬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울산에 다녀왔다. 48세 1599년 호조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50세1601년 청백리에 뽑혔다.  51세 1602년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53세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연원군(延原君)으로 봉해지고, 뒤이어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 때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대북(大北)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72세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공조·형조의 판서가 되었으나 사퇴했으며, 75세1626년(인조 4)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해직당했다. 76세 정묘호란 때 왕을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병사했다.

 

저서로 〈눌옹문집〉이 있다.

 

현풍곽씨 곽재우 1552(명종 7) 경남 의령~ 1617(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개요

의령·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越)이며, 조식(趙植)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대제학을 지낸 의성김씨 김우옹(金宇?)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활동

34세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41세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折衝將軍兼助防將)이 되었다.

 

42세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을 쌓았다. 44세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46세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石門)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전후활동

48세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喪中)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守城軍)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뒤에는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察理使)·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62세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인동장씨 장현광 1554(명종 9)~ 1637(인조 15).

장현광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을 주장했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장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이다. 23세1576년(선조 9) 재사(才士)로 천거되었고, 42세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은현감을 지냈다.

 

그뒤 형조좌랑·순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광해군 때 합천군수, 인조 때 지평·집의·이조참판·대사헌·지중추부사 등에 20여 차례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71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진압된 후 부름을 받아 인조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했고,

83세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84세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立?山)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죽었다.

 

경주이씨 이항복 1556(명종 11)~ 1618(광해군 10).

이항복 영정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오성대감(鰲城大監).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초년

경주이씨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고,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9세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25세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28세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그뒤 정자·저작·박사·봉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우승지를 거쳐

35세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활동

37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에 특진했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조정에서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으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광주(廣州)이씨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했고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조사 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군대를 파견했다.

 

38세 1593년 세자(뒤의 광해군)가 남쪽에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볼 때 대사마(大司馬)로 세자를 보필했다. 다음해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5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군을 정비했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유성룡(柳成龍)이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탄핵하자 자신도 휴전에 동조했다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했다.

 

45세 1600년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47세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고 살해하려 했다고 하며 성혼을 공격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했다.  53세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에도 북인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산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했다.

 

58세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겼다.

 

62세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해 관작이 환급되고 포천에 예장되었다.

 

 저서로는 〈사례훈몽 四禮訓蒙〉·〈주소계의 奏疏啓議〉·〈노사영언 魯史零言〉·〈백사집〉·〈북천일록 北遷日錄〉 등이 있다. 포천 화산서원(花山書院), 북청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연안이씨 이귀 1557(명종 12)~ 1633(인조 11).

이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게서 배웠다.

 

26세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 등 동인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스승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자 상소를 올려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뒤 강릉참봉으로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평양으로 피난한 선조를 찾아가 방어대책을 올렸다. 이어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임명되어 군사·군량·군마 등의 모집과 수송을 맡았다.

 

특히 도체찰사(都體察使) 풍산유씨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모집한 군졸과 양곡을 개성으로 운반하여 한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듬해 장성현감·군기시판관·김제군수 등을 거쳤다.

 

47세 1603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그뒤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배천군수·함흥판관 등을 두루 지냈다.

 

50세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 있을 때, 북인 광주이씨 이이첨(李爾瞻)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옥에 갇힌 최기(崔沂)를 만나보고 공초를 수정했다는 탄핵을 받고 이천으로 유배되었다.

 

1619년 풀려나 56세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1623년 순천김씨 김유(金?)· 전주최씨 최명길(崔鳴吉)· 안동김씨 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색인 : 인조반정).

 

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호위대장,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지내면서, 반정에 참여한 서인계열인 공서파(功西派)의 영수로 활동했다.

 

58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어영사(御營使)로 임명되었으나, 임진강에서 싸우지 않고 달아났다는 탄핵을 받아 백의호가(白衣扈駕)의 처분을 받았다.

 

60세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에 올랐으나 같은 해 광산김씨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元宗妃)의 상(喪)을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61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扈從)했으나, 최명길과 함께 강화(講和)를 주장하다가 다시 대간에게 탄핵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默齊日記〉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남인 청주한씨 한준겸 1557(명종 12)~ 1627(인조 5).

한준겸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한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23세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30세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33세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으로 재직하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전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36세1592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원주목사를 지냈으며, 39세 1595년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이 되었다. 41세 1597년에는 동부승지로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전란 수습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승지·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사도체찰부사(四道體察副使) 등 지방관과 군직(軍職)을 두루 역임하며 전후의 민생안정과 군무수습에 기여했다. 49세1605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함경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함경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소학〉·〈가례〉 등을 간행·보급했다. 선조 말년 후사문제를 둘러싸고 광해군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자 유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선조의 임종시 유영경·한응인(韓應仁)·신흠(申欽)·허잠(許箴) 등과 함께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이때문에 56세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 이후 대북정권이 계속되면서 60세 1617년에는 충주로 부처(付處)되고, 64세 1621년에는 여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해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크게 일어나 국경수비가 위태로워지자, 이를 방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에서 풀려나고 지중추부사 겸 5도도원수로 임명되었다. 이어 의주로 부임하여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등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다.

 

66세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그의 딸이 인렬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자, 호위대장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했다. 70세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따라 전주까지 갔다.

저서로 〈유천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부여서씨 서양갑  ?~ 1613(광해군 5).

조선 중기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 칠서사건, 계축옥사

 

 

본관은 부여. 목사 익(益)의 서자(庶子). 서얼차별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명문 출신 서출 6명과 어울려 강변칠우라 자처했다. 그들과 함께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이들은 광해군 즉위초 서자도 관리에 등용될 수 있게 해달라고 연명하여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했다가 이듬해 모두 잡혔다. 이때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려고 한 행동이라고 자백하면 살려주겠다는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의 꾐에 빠져 모두 거짓 자백을 했다(→ 색인 : 칠서사건).

 

이로 인해 계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서양갑 자신도 죽음을 당했다.

계축옥사 [ 癸丑獄事 ]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소북파를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 및 그 측근에 박해를 가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응서(應犀), 심전(沈銓)의 서자 우영(友英), 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양갑(洋甲),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치의(致毅),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경준(耕俊), 박유량(朴有良)의 서자 치인(致仁), 서얼 허홍인(許弘仁) 등이었다.

 

이들은 허균(許筠)·이사호(李士浩) 및 김장생(金長生)의 서제 경손(慶孫)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컬었다. 이들은 일찍이 1608년에 서얼금고(庶孼禁錮)의 폐지를 주장하며 연명으로 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이 거부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강변에서 당여(黨與)를 맺었다. 그리고는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인(奴婢推刷人)을 가탁(假託)해 전국에 출몰, 화적질을 하였다.

 

그러던 중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저질렀다. 결국 이들은 피살자의 노복 춘상(春祥)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하여 일망타진되었다.

 

이 때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과 그 심복 김개(金?)·김창후(金昌後) 등이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 등과 모의,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는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 이에 박응서가 비밀소를 올려 옥사가 시작되었다.

 

박응서는 이들이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저격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군자금을 비축,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살인했다고 거짓 고변하였다.

 

호걸의 기개가 있어 괴수로 지목된 서양갑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제들이 심한 국문을 받다가 죽자, 수창자(首倡者)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며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 모의에 가담했다고 거짓 자복하였다. 그 밖에 사건에 연좌된 서얼 대다수는 불복한 채 죽었고, 박치의는 도망하였다.

 

이로써, 이 사건에 연좌된 종성판관(鐘城判官) 정협(鄭浹),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등 7대신 및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황신(黃愼) 등 서인의 수십 명이 지정자(知情者)로 몰려 수금되었다.

 

또, 연안김씨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하게 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 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서인·남인들은 유배 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이 옥사를 빌미로 1618년 인목대비마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후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 역모를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되었다.

 

해주오씨 오윤겸 1559(명종 14)~ 1636(인조 14).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토당(土塘). 아버지는 선공감역(繕工監役) 오희문(希文)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24세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1589년 전강(殿講)에서 장원한 뒤 영릉(英陵)과 봉선전(奉先殿)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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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시직(侍直)·평강현감을 지냈다. 38세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후 세자시강원문학·홍문관수찬·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43세 1602년 스승 성혼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자 사직했다가 다시 직강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1607년 안주목사, 1609년(광해군 1) 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거친 후 중앙으로 올라와 51세 1610년부터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에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해 그 제례절차를 정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54세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했다.

 

58세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正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이끌고 돌아왔는데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관계가 이때부터 정상화되었다.

 

59세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북인들이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토당(土塘)에 은거했다. 1622년 명나라 희종(熙宗)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우참찬에 올랐다.

 

64세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사헌에 임명되어 경연관·원자보양관을 겸했고,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小西)로 분열되자 김유(金?)·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를 이끌었다.

 

67세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扈從)했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와 지돈녕부사를 거쳐 69세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후 좌의정을 거쳐 71세 1628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고 부묘(?廟)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대원군을 예묘(?廟 : 아버지의 사당)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고 반대해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631년 판중추부사가 되고,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79세1636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에 총호사(摠護使) 임무를 수행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그는 성리학의 원리에 따라 정치가 행해져야 한다고 보고 이를 정치에 적극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인조반정 후에는 광해군대의 정치가 성리학적 질서체계를 무시한 패륜정치(悖倫政治)였다고 인식하고, 왕의 성리학적 수양을 강조했다.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으면서 임금에게 성학(聖學)을 권하여, 성왕(聖王)의 사업을 이루려면 지력(智力)과 공리(功利)를 빌려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성인(聖人)의 학문에 근본을 두어야 하는데, 그것은 특히 〈대학〉에 요약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이와 함께 군주에게 성학을 권한 주희(朱熹)의 차자(箚子)와 이황의 상소문을 직접 써서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국방문제에 대해서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주장하는 한편 오윤겸은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서얼의 등용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추탄문집〉·〈동사일록 東?日錄〉·〈해사조천일록 海?朝天日錄〉 등이 있다.

광주 구암서원(龜巖書院), 평강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대북 : 중북>유몽인 1559(명종 14) 서울~ 1623(인조 1).

어우야담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야담집 〈어우야담〉의 지은이로 유명하다. 본관은 고흥.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사간(司諫) 충관(忠寬)의 손자이며 진사 유당(?)의 아들이다. 31세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34세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평양까지 선조를 모시고 따라갔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명나라 관원을 상대하는 외교적인 임무를 맡아 일했다. 광해군 시절에는 북인(北人)에 가담했으나 인목대비 유폐(幽閉)에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배척되었다. 그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던 중 대제학에 추천되었으나, 거절했다.

 

이로 인해 65세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해 7월 현령 유응경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아들 약(?)과 함께 사형되었다. 그의 깨끗한 이름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양했다. 신원(伸寃)된 뒤 나라에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저서로는 야담집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북인정권>

광주(廣州)이씨 이이첨 1560(명종 15)~ 1623(인조 1).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 등과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성종·연산군대의 권신(權臣)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던 좌찬성 이극돈(克墩)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우선(友善)이다.

 

23세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 34세 1593년 광릉참봉을 지내고 35세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40세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49세 1608년 문과 중시에 장원했다
.

 

선조 말년에 세자인 광해군과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둘러싸고 후사(後嗣) 문제가 대두되자,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영창대군을 받드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을 논박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49세1608년 갑산으로 유배당했다. 이해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 도중 돌아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때부터 서산정씨 정인홍과의 관계를 밀접히 하여 그의 수제자임을 자처하며 그를 통해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자부했다. 이와 함께 조식의 추숭사업에도 열성을 기울여 조식을 제향한 사액서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광해군 즉위 직후 유희분(柳希奮)을 정점으로 재결속한 소북에 패배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3월 사직했다.

 

51세 1610년(광해군 2) 이이첨 당은 군자(君子)의 당이라는 정인홍의 상소에 힘입어 대사간으로 재기용되어 중앙정계로 복귀, 대북과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역론(討逆論)이라는 명분을 내걸며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강경책을 시행했다. 53세 1612년에 임자옥사를 일으켜 유영경을 처벌하여 소북의 기세를 꺾었다.

 

54세 1613년에는 계축옥사를 일으켜 연안김씨 김제남(金悌南:영창대군의 외조부) 등 영창대군의 지원세력을 축출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폐했다. 이듬해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은 후 광해군과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여론이 팽배해지자 폐모론(廢母論)을 일으켜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59세 1618년 정인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 서궁(西宮)으로 유폐시켰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라는 여론의 지탄을 받고, 마침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빌미를 주게 되었다.

 

64세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도망가다가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남인>광주(廣州)이씨 이덕형 1561(명종 16)~ 1613(광해군 5).

이덕형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民聖)이다. 영의정 대북 한산이씨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학에 통달했다. 특히 이항복(李恒福)과는 죽마고우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20세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이(李珥)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23세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다음해 서총대(瑞蔥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28세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31세 1591년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32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이르자 단독으로 일본의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했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파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33세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했다. 35세 1595년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37세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해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41세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42세 영의정이 되었다.

 

46세 1606년 영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48세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왕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53세 1613년 박응서(朴應犀)의 상변(上變)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께 이에 적극 반대했다. 그뒤 광해군이 그의 주청에 따라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자 삼사가 모두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했다.

 

그뒤 용진(龍津)으로 돌아가 53세 병으로 죽자 광해군이 애도하여 복관을 명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안동김씨 김상용 1561(명종 16)~ 1637(인조 15).

 

노서(老西)의 영수로, 병자호란 때 순국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克孝)이고,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좌의정 김상헌(尙憲)이 그의 동생이다
. 정유길에게 고문(古文)과 시를, 박수(朴受)에게 〈주역 周易〉을, 윤기(尹箕)에게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을 배웠으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황신(黃愼)·정협(鄭曄)·이춘영(李春英) 등과 사귀었다.

 

22세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30세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1598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에 다녀온 뒤 도승지·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켰다. 서인으로서 한때 북인의 견제를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기도 했으나,

 

43세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나누어지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1630년(인조 8) 기로사(嗜老社)에 들어가고  52세1632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초문에 쌓아놓은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朴東善)·강석기(姜碩期) 등의 변호로 순국을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서인>연안김씨 김제남 1562(명종 17)~ 1613(광해군 5).

선조의 장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증조부는 영의정 김전(詮)이며, 아버지는 증(贈)영의정 김오(
)이다.

 

24세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33세 1594년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35세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36세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40세 1601년 정언·헌납·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41세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繼妃:인목왕후)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고 52세 처형되었다.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그 죄가 재론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복권되었으며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대북: 중북>행주기씨 기자헌 1562(명종 17)~ 1624(인조 2).

 

본관은 행주(幸州
). 처음 이름은 자정(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증조부는 기묘사화 때 죽은 응교(應敎) 기준(遵)이며,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기대항(大恒)이고, 아버지는 기응세(應世)이다.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했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검열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문관봉교 겸 설서(藝文館奉敎兼說書)로 선조의 피난길을 따라갔다. 이어 이조좌랑·정언·성균관직강·홍문관부교리·사간·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호조참판 등을 거쳤다.

 

1597년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강원도관찰사·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601년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1589)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신원(伸寃)하게 하고, 정철(鄭澈)을 비롯해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이때 정철의 죄를 둘러싸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는데, 그는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북인에 속했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광해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맹자〉를 강의했으며, 병조판서·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선조가 광해군 대신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小北派)가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1611년 대북파의 독재가 지나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곧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던 정온(鄭蘊)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하여 안치(安置)에 그치게 했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다. 1617년 허균(許筠) 등이 인목대비를 폐할 것을 주장했을 때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홍원(洪原)·길주(吉州) 등지로 귀양갔다. 그뒤 풀려나 강릉에 은거했다.

 

1620년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사양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유(金?)·이귀(李貴) 등이 인조반정에 가담할 것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했으며, 반정 뒤에도 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中途付處:어느 장소를 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것)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내응하리라는 혐의를 받고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가족도 몰살당했다. 1627년(인조 5) 이원익(李元翼)·이귀의 상소로 관직이 복관되었다.

 

 

남인 진주정씨 정경세 1563(명종 18)~ 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정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검열·봉교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고, 정언·교리·정랑·사간 등을 지냈다.

1598년 경상감사로 재임할 때 임진왜란 이후 피폐한 도민들에게 양곡을 적시에 잘 공급해주었고, 풍속 교화에 힘썼다. 그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었고,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세워 정몽주(鄭夢周)·이황(李滉)·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 5현(五賢)을 종사(從祀)했다.

 

1609년(광해군 1)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나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삭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부제학·전라도관찰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30년 겸지춘추관사로 〈광해군일기〉 편찬을 담당했다.

 

그는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주리적(主理的) 입장에서 '이(理)에 동정(動靜)이 있는 까닭에 기(氣)에 동정이 있다'라고 하여 기의 동정의 원인이 이에 있다고 했다(→ 색인 : 주리론).

 

또한 '이 없는 기도 없으며 기 없는 이도 없다. 진실로 선후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근본으로부터 말하자면 이가 먼저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여 현실적으로는 이기가 공존하지만,

 

본체론적으로 그 온 바(所從來)를 보면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면서, 이가 본(本)이고 기는 용(用)이라는 '이본기용설'(理本氣用說)을 주장했다.

 

문인으로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 喪禮參考〉·〈주문작해 朱文酌解〉가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 고산서원(孤山書院), 강릉 퇴곡서원(退谷書院), 개령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평산신씨 신흠 1566(명종 21)~ 1628(인조 6).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송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신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소북: 청북/남당>의령남씨 남이공 1565(명종 20)~ 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초명은 이경(以敬).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 북인·소북의 중심인물이었다.

 

아버지는 호(琥)이며 참판 남이신(以信)의 아우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593년 사서(司書)가 되고 평안도 암행어사를 거쳐 지평·정언·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북인(北人)의 우두머리였으며, 1599년 북인이 분열될 때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소북(小北)을 이끌면서 세자이던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다음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파면당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형조참의·홍문관부제학 등을 지낸 뒤 1614년(광해군 6)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잠시 관직에 기용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그뒤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황해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1639년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청(淸)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제(王弟)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죽은 뒤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에 〈설사집 雪蓑集〉이 있다.

 

북인 양천허씨 허균 1569(선조 2)~ 1618(광해군 10).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허엽(曄), 두 형인 허성(筬)과 허봉(?), 그리고 누이인 허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초계정씨 정온(鄭蘊, 1569~1641)

조선 중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

  • [가계]
  •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정유명(鄭惟明)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 [활동사항]
  •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李元翼)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유배형)하였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이 서재용으로 지어준 두 칸의 집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쳤고, 지방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고 애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유배된 송상인(宋象仁)·이익(李瀷)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을 때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비리와 병권 장악을 공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당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 [학문과 사상]
  •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높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이었다.

  • [저술 및 작품]
  • 중국 은대로부터 남송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곤란과 우환을 당하여도 정도를 잃지 않았던 59인의 행적을 모은『덕변록(德辨錄)』『동계집(桐溪集)』이 있다. 덕유산에 은거하며 『속근사록(續近思錄)』을 찬집하려 하였으나 끝마치지 못했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자경담」을 지었고, 「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통해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을 토로하였다.

  • [상훈과 추모]
  •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668년(현종 9)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으며, 이외에도 광주(廣州)현절사(顯節祠),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정온이 해배된 후 약 200년 뒤인 1842년(헌종 8) 대정현에 유배를 왔던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에게 청하여 대정현 막은골, 지금의 안성리송죽사(松竹祠)와 유허비를 세웠다.

    1963년 대정 지역 칠성계가 중심이 되어 정온의 비석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에 있는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77년에는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정온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 50-1번지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동김씨 김상헌 1570(선조 3)~ 1652(효종 3).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김상용(尙容)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27세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지내고, 35세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42세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51세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63세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66세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 썼다. 저서에 〈청음집〉·〈야인담록 野人談錄〉·〈풍악문답 豊岳問答〉 등이 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61년 효종 묘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순천김씨 김유 1571(선조 4)~ 1648(인조 26).

     

    서인 계열로 인조의 즉위와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다. 본관은 순천.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임진왜란 때 충주(忠州)에서 전사한 목사 김여물(汝?)의 아들이다. 송익필(宋翼弼)에게서 배웠. 순절자(殉節者)의 아들이라 하여 참봉에 기용되었다가,

     

    26세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복수사(復讐使)로 호서지방에 내려가기도 했고, 승문원의 벼슬을 거쳐 1601년 검열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강계부사가 되고, 1616년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47세 1617년 정조(鄭造)·윤인(尹訊)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廢母)를 주장하고 백관이 모여 회의하는 데 참석치 않아 대간의 탄핵을 받고 향리로 물러났다. 인목대비 유폐사건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들에게 대북정권 타도의 좋은 구실을 주게 되었다.

     

    52세 1623년(인조 1)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정권을 타도하고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이괄(李适)·신경진(愼景) 등과 함께 창의문 밖에서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하여 강화도로 내쫓고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왕으로 추대했다(→ 색인 : 인조반정). 이때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鄭仁弘)·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을 죽이고 200여 명을 귀양보냈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조판서로서 왕의 남행을 호위했다. 그뒤 우찬성을 지내고,

    54세162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56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인조를 따라 강화로 피했으며, 돌아온 뒤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했다. 60세 1631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면직되었으나, 2년 뒤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고

     

    65세 1636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했는데, 이때 최명길·홍서봉(洪瑞鳳)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여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게 했다. 환도 뒤 화의를 주장한 진소(陳疏)가 잘못되었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73세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이 되었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시문집인 〈북저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소북>청풍김씨 김신국1572(선조 5)~ 1657(효종 8).

    소북(小北)의 영수로서 대북(大北)과 대립했으며,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본관은 청풍.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급(汲)이다. 20세1591년(선조 24)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에서 의병 천여 명을 모집하여 적에게 타격을 준 공으로 참봉이 되었다. 22세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 검열을 거쳐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28세 1599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어사로서 관서지방을 순시했다. 북인이 대(大)·소(小)로 갈라지자 소북(小北)의 영수로 대북을 공격하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충주에 은거했다. 이때 〈경현록 景賢錄〉을 편찬했다.

     

    37세1608년 보덕(輔德)으로 기용되고, 광해군 때 사간을 거쳐 익사공신(翼社功臣)이 되어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관찰사·우참찬·호조판서를 지냈다. 52세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의 훈작(勳爵)을 박탈당했으나 곧 평안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이때 후금(後金)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지(城池)의 수축, 군량의 비축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연좌되어 국문(鞠問)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56세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로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후금의 사신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65세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듬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선양[瀋陽]에 갔다가, 69세1640년 귀국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75세1646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광산김씨 김집 1574(선조 7)~ 1656(효종 7).

     

    아버지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했으며, 그의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케 했다.

    관직생활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는 장생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아버지 김장생과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예학을 배웠다.

     

    18세 1591년에 진사에 합격했다. 27세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으로 있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한때 벼슬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 뒤 다시 등용되어 부여현감·임피현령·지평·집의·공조참의 등을 두루 지냈다. 이후 인조반정에 가담했던 김자점(金自點) 등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다시 벼슬을 그만 두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예조참판·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내면서 북벌계획에 참여했다.

     

    김자점이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여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했으나, 곧 대사헌과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예학과 이기론

    그는 아버지 김장생의 계구근독(戒懼謹獨)의 공부를 계승하고, 특히 예학에 힘써 "예(禮)라는 것은 인욕(人慾)을 억제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이다"라고 할 정도로 예를 숭상했다.

     

    따라서 그의 문도(門徒)들은 모두 관혼상제의 예에 통달했고, 그의 예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상례비요 喪禮備要〉 등도 김장생의 구본(舊本)을 하나하나 검토 수정했다. 성리설(性理說)에서도 장생의 설을 계승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했는데 "발하는 것은 기(氣)요, 발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다. 만일 이기가 분리되고 합하는 것이 있다면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서로 동(動)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할 수 없다면 이와 기가 발한다는 것이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닌가"라고 이기설을 설명했다.

     

    그의 문하에서 송시열·윤선거(尹宣擧)·유계(兪啓)·이유태(李惟泰)·윤문거(尹文擧)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 돈암서원(巖書院), 임피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 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신독재유고〉가 있고, 편서에 〈의례문해속 疑禮問解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능성구씨 구굉 1577(선조 10)~ 1642(인조 20).

     

    1623년 순천김씨 김유(金?)·연안이씨 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군산(群山). 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思孟)이며 인헌왕후(仁獻王后)능성구씨가 동생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22세 1598년(선조 31) 감목관(監牧官)이 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고창현감 등을 지냈다. 32세 1608년 무과에 급제하여 다시 선전관, 43세 1619년(광해군 11) 장연현감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서(李曙)·신경진(申景?), 조카 인후(仁?)와 함께 광해군을 폐할 것을 모의한 뒤,

     

    47세 1623년 김유·이귀 등에 합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48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했다.

     

    60세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공조판서로서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경기도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지켰다
    . 전쟁 후 병조판서·포도대장·총융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청풍김씨 김육 1580(선조 13)~ 1658(효종 9).

    김육

    국가재정과 농민생활 안정을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건의하는 등 제도개혁을 추진했다.

    본관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증조부는 식(湜)이며, 아버지는 참봉 흥우(興宇)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26세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 성균관의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의 문묘배향을 건의하는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렸다. 이때 이를 반대한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을 태학생들이 청금록(靑衿錄:성균관 儒籍)에서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 조정에서는 그를 포함한 삭제주동자들의 대과 응시자격을 빼앗았다. 이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 10년 동안 낙향했다.

     

    44세 1623년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금오랑(金五郞)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음성현감으로 민생고의 원인과 이의 타개책을 파악·연구한 음성현 진폐소(陳弊疏)를 인조에게 올렸다.

     

    45세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이듬해 9월에 안변도호부사로 나가 청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어 동지성절추진하사(冬至聖節秋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지냈다.

     

    59세1638년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공물법을 폐지하고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는 한편, 〈구황촬요 救荒撮要〉와 〈벽온방 ?瘟方〉 등을 편찬했다. 동부승지·대사성·부제학 등을 거쳐

    64세 1643년 한성부우윤·도승지가 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고 귀국하여 우부빈객이 되었다. 1645년 관상감제조가 되고, 이해 12월 사은사로 청의 연경에 다녀왔다.

     

    70세 1649년(효종 즉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사은 겸 동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71세 1650년에는 대동법 실시 문제로 광산김씨 김집(金集)과 논쟁하여 이듬해 영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나이를 이유로 사직했다가 72세 1651년 영의정에 임명되어 대동법을 충청도에까지 확장시행하였고, 실록청총재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을 맡아보았다.

    73세1652년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75세1654년 6월 다시 영의정이 되어〈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는 등 대동법 확대에 힘썼으나, 시행을 앞두고 79세1658년 9월 죽었다.

     

     

    연안이씨 이시백 1581(선조 14)~ 1660(현종 1).

    이시백

     

    본관은 연안.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貴)이며, 동생이 호조판서를 지낸 이시방(時昉)이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43세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로 군사를 모집하여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안현(鞍峴)에서 반란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수원부사가 되었는데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깃대에 방색기(方色旗)를 달고 자호포(子號砲)를 쏘는 것을 신호로 모이도록 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다.

     

    49세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품계가 깎였으나, 이듬해 양주목사를 거쳐 163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56세1636년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호위대장·특진관을 겸했다. 이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다. 공조판서·지의금부사를 지내고 1638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하여 아들 이유(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는데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뒤 탄로가 나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시 총융사로 등용된 뒤 한성판윤, 형조·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65세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70세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75세1655년 영의정이 되었다.

    78세1658년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다.

    80세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지지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전주이씨 이성구 1584(선조 17)~ 1644(인조 2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 아버지는 〈지봉유설 芝峯類說〉을 지은 이수광(?光)이다. 20세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었고, 25세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검열·감찰·예조좌랑·부교리·헌납·병조정랑 등을 거쳤다. 지평으로 재직중 이항복(李恒福)이 대북(大北)의 탄핵을 받자 그를 옹호했으며, 35세1618년 영평판관(永平判官)으로 있을 때 이항복이 죽자, 사우(祠宇)를 세웠다 하여 대북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40세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에 복귀하여 사간·대사간·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44세1627년 정묘호란 때 이조참의로 세자의 전주 피난길에 호종했다.

     

    53세 1636년 병자호란 때 병조판서로서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에 호종했다. 주화론(主和論)과 주전론(主戰論)이 대립하자 최명길(崔鳴吉)에 동조하여 주화론을 주장했다.

     

    54세 1637년 우의정·좌의정으로 재직중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게 되자 수행했다. 55세 1638년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58세164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다음해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이어 영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 선천부사 이계(李?)가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에 발각되어 조정에서 이계를 죽였는데, 이때 신중히 처리할 것을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시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 젊어서 헌납으로 재직할 때는 아버지가 대사헌으로 있고, 동생 이민구(敏求)는 홍문관에 있어, 3부자가 3사(三司)를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아내 권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자 며느리 및 두 딸과 함께 목을 매고 자결했다. 저서로 〈분사집〉이 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

     

     

     

    전주최씨 최명길 1586(선조 19)~ 1647(인조 25).

    최명길의 글씨

     

    실질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청(淸)나라의 침입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강화를 담당했으며,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담당하면서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지낸 기남(起南)이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17세 1602년(선조 35)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20세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29세1614년(광해군 6)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파직당했다.

     

    그뒤 가평으로 내려가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 등과 교유하며 양명학 연구에 힘썼다. 38세 1623년 김유(金?)·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그뒤 이조참의·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620년대 중반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해 척화론(斥和論)이 조정의 다수세력을 차지했는데 그는 이에 반대하여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는 군대를 양성하여 명(明)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주화론을 주장했다.

     

    42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강화를 주장하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도록 했다.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우참찬·판의금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했다.

     

    51세 1636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남양홍씨 홍익한(洪翼漢) 등의 척화론·주전론에 대해 다시금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와 강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영의정을 지내며 포로석방과 척화신(斥和臣)의 귀환을 교섭했으며 명나라 공격을 위한 청나라의 원병 요구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한 조선의 처지를 변명했다.

     

    57세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앞서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그 관련자로 선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60세 1645년 풀려나 귀국하여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뒤 현직에서 물러나 저술에 몰두하다가 죽었다.

     

    그는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주도하면서 양난으로 피폐해진 농촌경제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하기 위해 양전(量田)의 실시와 부세제도 및 군제의 개혁을 주장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는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를 주장하고 호패청당상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한편 당시 붕당정치의 폐단이 이조낭관(吏曹郎官)의 자천권(自薦權)과 삼사(三司)의 서사법(署事法) 및 피혐(避嫌)에서 온다고 인식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낭관의 권한을 제한하며 양사에서의 쟁단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지천집〉·〈지천주차 遲川奏箚〉 등이 있다. 박천의 지천사우(遲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덕수장씨 장유 1587(선조 20)~ 1638(인조 16).

    장유 영정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덕수장씨의 아버지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9세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23세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이듬해 겸설서(兼說書)를 거쳐 주서(注書)·검열 등을 지냈다. 26세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37세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후 대사간·대사헌·대사성을 지내고

     38세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다음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다.

    41세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했고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다.

    43세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었으며,

    45세1631년 딸을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에게 출가시켰고, 50세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공조판서로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했다.

    51세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母親喪)으로 끝내 사직했으며 장례 후 과로로 죽었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에 능통했고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다.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정묘호란 때 거의 분실되고 〈계곡만필 谿谷漫筆〉·〈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청송심씨 심명세 1587(선조 20)~ 1632(인조 1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용(德用). 할아버지는 참판 심의겸(義謙)이고, 아버지는 현감 심엄이다. 서인 집안 출신으로 광해군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37세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공조참판 겸 호위대장이 되었다. 그뒤 세자빈의 가례(嘉禮)를 중지시키려다 충주로 유배되었는데, 1년 만에 석방되었다

     

    41세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위대장으로 왕을 강화도로 호위했고, 환도한 후 내섬시제조·원주목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해남윤씨 윤선도 1587(선조 20)~ 1671(현종 12).

    윤선도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부정공(副正公) 윤유심(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윤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30세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37세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42세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49세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50세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52세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73세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85세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안동김씨 김자점 1588(선조 21)~ 1651(효종 2).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억령(億齡)이며, 아버지는 함()이다. 성혼(成渾)이 그의 스승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35세 1622년(광해군 14)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이괄(李适) 등과 함께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했다. 곧 동부승지가 되었고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이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서(功西)가담하지 않은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집권 공서파의 영수로서 청서파의 영수 안동김씨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를 탄압했다.

     

    46세 1633년 도원수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토산(兎山)싸움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53세 1640년에 풀려나 강화부유수가 되고,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인조의 庶女)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55세 1642년 병조판서,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고, 1644년에는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59세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60세1645년에는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를 죽게 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몰아냈다.

     

    인조 말년에 공서(功西)가 분열하자 낙당(洛黨)의 영수가 되어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과 대립했다.

     

    64세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청서파 안동김씨 김상헌(金尙憲)· 은진송씨 송준길(宋浚吉) 등이 정권을 잡은 뒤, 탄핵을 받아 홍천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실패했고 66세1651년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안정나씨 나만갑 1592(선조 25)~ 1642(인조 20).

     

    병자호란 때 군량공급에 공을 세웠다. 본관은 안정.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아버지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지낸 나급(級)이다. 장인인 정엽(鄭曄)에게 배웠다.

     

    22세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인목대비 유폐사건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32세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순릉참봉이 되고,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 되었다.

     

    35세 1625년 교리로 있을 때 서인(西人)인 김유(金?)가 북인인 남이공(南以恭)을 등용하자 이에 반대하다 강동현감으로 쫓겨났다. 37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이 되어 왕을 따라 강화도에 갔다. 병조정랑·수찬·지평·홍주목사·형조참의를 거쳐, 46세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참의·병조참지로서 관향사(管餉使)가 되어 남한산성에 군량을 공급했다.

     

    무고를 받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49세1639년 풀려나와 영천(榮川:지금의 경북 영주)에 칩거했다. 저서에 〈병자록 丙子錄〉·〈구포집〉이 있다.

     

     

    원주원씨 원두표 1593(선조 26)~ 1664(현종 5).

     

    원당(原黨)의 영수로 군비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효종대 북벌정책의 핵심 인물이었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 아버지는 원계군(原溪君) 원유남(裕男)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다.

     

    유생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가해 귀양가 있던 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만나 잠꼬대로써 반정 의사를 밝혀 동의를 얻어내는 등 공로가 컸으므로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원평군(原平君)에 봉해졌다

     

    31세 1623년(인조 1)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등을 거쳐 영광군수로 재직하던 중,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인조의 남행(南幸)을 도왔으나, 피난행차 때 병조판서 순천김씨김유(金?)에게 불손한 말을 하는 등 명분을 무너뜨렸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33세1625년 전주부윤이 되었고, 35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분조(分朝)하여 남하한 세자를 모셨다. 전쟁이 끝난 후 오랑캐는 명조(明朝)의 적이므로 의리상 사귈 수 없다며 강화(講和)를 파기하고 군사를 육성하여 싸우자고 주장했다.

     

    42세1634년 전라감사로서 인조의 명을 받아 〈주자전서〉를 간행했다. 44세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어영대장으로 남한산성의 북쪽 성문을 방어했다.

     

    50세 1642년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임경업(林慶業)이 독보(獨步)를 명(明)에 보낸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청사(淸使)의 지적을 받고 물러났다. 그뒤 강화유수·경상감사 등을 역임했다.

     

    인조연간(1623~49)에 서인의 공서(功西)에 속하여 청서(淸西)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인
    김자점(金自點)과 정권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의 영수가 되었다.

     

    58세 1650년(효종 1) 공조판서로 섭정왕(攝政王)에게 시집보낼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사(護行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59세1651년 호조판서로서 호서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반대했다가 사직한 후 대동청 당상이 되었다. 이어 좌찬성을 거쳐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 김자점의 역모사건을 처리했고, 이듬해 개성유수 등을 거쳐 1653~56년에 병조판서로 군비강화를 적극 추진했다.

     

    65세1657년 우의정으로 세자의 스승이 되었고, 66세1658년 교생고강(校生考講)과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실시하여 피역(避役)을 방지할 것을 주장했다. 1659년 유계(兪啓)가 제의한 사족들에 대한 수포(收布)를, 인심이 소란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70세 1662년(현종 3) 좌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청남> 양천허씨 허목 1595(선조 28)~ 1682(숙종 8).

    허목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허교(喬)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21세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글을 배우고, 23세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30세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36세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46세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50세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7세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60세 1660년(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만 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74세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만 9개월)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75세 1675년(숙종 1)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76세 1676년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79세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안동김씨 김수홍(金壽弘, 1601년 ~ 1681년)

     

    자는 하보(夏甫), 본관은 안동이다. 서인 소속이었으나 복제논쟁서인의 당론을 따르지 않고 남인의 당론에 동조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에 대해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는 입장을 취하였다. 돈녕부도정 김광환(金光煥)의 아들이며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손자이다.

     

    34세 1634년 생원시에 입격, 생원이 되었으며 곧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6세 1636년 성균관 유생으로 후금의 사신 용골대(龍骨大)를 참살하고 그 국서(國書)를 소각할 것을 상소하였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승지·참판 등을 거쳐, 81세 1681년 지돈령부사가 되었다.

     

    효종 사후 60세  1660년 제1차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당론을 따르지 않고 같은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제(朞年制) 주장을 비난하고, 남인의 복제 주장에 동조하여 논란이 되었다.

     

    74세 1674년(현종 15) 제2차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 때, 역시 1660년의 제1차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와 마찬가지로 당론을 따르지 않고 같은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제(朞年制) 주장을 비난하고, 남인의 복제 주장에 동조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명청 교체기의 중국 연호 사용에서도, 명나라 숭정(崇禎) 연호 사용을 주장하자는 송시열과 영력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청나라 강희(康熙) 연호를 쓰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가족 관계

    • (5대조) 평양부서윤 증이조판서 김번
    • (고조)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金生海
    • (증조) 돈녕부도정 증영의정김극효金克孝
    • (조고) 우의정 증영의정 선원 김상용金尙容
    • (종조부) 좌의정 증영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
    • (부) 돈녕부도정 김광환(金光煥)
    • (모)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 (삼촌) 이조참판 부제학 수북 김광현(金光炫)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가문과 일생

    송시열은 은진(恩津) 송씨로 그의 가문은 역대로 충남 회덕이 세거지였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현재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사회에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8-1446)부터이다.

     

    1432년(세종 14년)에 송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살았는데, 뜻을 받든 후손들이 쌍청당을 정성껏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벼슬길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은진 송씨 가문은 송규연, 송규렴, 송상기, 송준길, 송구수, 송시열 등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옥천 적등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선산 곽씨 집안은 옥천에 세거지가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병장 곽자방이다.

    우암을 낳을 때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부친은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성뢰(聖賚)는 부친이 꾼 태몽에 따른 것이다.

     

    송시열이 친가가 있는 회덕으로 간 것은 여덟 살 되는 1614년이다. 이 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청당의 7대손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함께 수학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아버지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송갑조는 광해군 시절,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율곡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은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했고,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製)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에게 북벌을 당부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선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제자 윤증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분쟁도 일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북벌계획을 구상하며 강학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가 여러 차례 불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인조의 계속적인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모양새로는 그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경세(經世)에 뜻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친명배청)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 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바쳐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에서 송시열은 ‘대일통(大一通)’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節哀以保身)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修政事以禦外侮)’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캐란 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친명배청)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왕이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사관이나 승지마저 멀리한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였다. 효종의 총애를 받은 송시열이지만, 인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조정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끊임없는 구애는 계속되었다.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화양동 생활과 제자 윤증과의 불화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건국된 상황은 송(宋)과 똑같기 때문에 그 말류(末流)의 폐단 또한 서로 비슷합니다. 국력의 강하고 약함도 비슷하고 지방 관리들의 부패도 비슷하며, 호강(豪强)한 자가 제맘대로 난폭하게 구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자는 당시에 눈으로 이런 것들을 보았으므로, 말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정성스러워 그 병에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이 약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숙종실록] 권 14, 숙종 9년 6월 경자일)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과 불화하는 이른바 회니시비라는 노소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던 윤증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생전에 율곡의 연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피난해 있었는데, 강화가 함락되려 하자 부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부친 윤황을 만나기 위해 강화도를 탈출하였고, 부득불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긴 윤선거는 폐인을 자처하며 벼슬길을 사양하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했다.

     

    윤선거가 1669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그의 아들 윤증은 박세채가 써준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은 마지못해 박세채가 윤선거를 칭송하는데 나는 박세채를 믿으니 그의 말을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고 했다. 박세채의 말을 인용하되(述而), 윤선거를 칭송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不作)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묘갈명을 지어 윤선거를 칭송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윤증의 간곡한 부탁에도 송시열은 글자 몇 자만 고칠 뿐이었다. 윤선거의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영욕의 삶

    효종의 스승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송시열이지만, 효종의 죽음과 함께 영욕의 삶도 저물어갔다.

     

    1660년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를 즐겼고,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년 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지 석방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76세 되던 1682년에 청푼김씨 김석주 등 훈척들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 하려는 작업을 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동자 중의 한명인 광산김씨 김익훈을 두둔했는데, 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였다.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을 비난했고, 제자인 윤증과도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이 일로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다시 은거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노론의 영수, 신화가 되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과 관련한 대표적인 지역을 꼽으라면 ‘화양동’일 것이다.

     

    1803년 가을 음성현감이 된 성해응이 부친 성대중과 화양동을 답사하고 지은 [화양도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송시열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우암 송시열은 태어날 때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나 하루는 세자가 그의 안광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 매년 봄이 되면 활짝 만개하던 홍매(紅梅) 한그루가 있었는데 1689년 사약을 받은 해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러다가 갑술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 피웠다고 전한다.

     

    그는 『조선왕족실록』에 3천 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기에, ‘정계의 대로(大老)’, ‘동방의 주자’ 등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 신봉자’ 등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의하면 그의 제자는 총 82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암이 평생 존경해 마지 않은 주자(朱子)의 제자도 44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에 우암이 누렸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알게 하는 일면이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에 간행된 『우암집(尤庵集)』 167권과 1787년에 출간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송시열 유적과 만동묘

     

     

     

     송시열 유적 안내도와 안내문

     

     

     

    * 만동묘 소개

     

      1703년(숙종 29)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운 사당.

     

    만동이란 물이 만 구비를 꺾어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만주족인 청(淸)은 명(明)을 정복하기 이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사당은 명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이민족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숙종대 문인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자를 얻어 송시열에게 주었는데, 송시열은 1674년(현종 15) 이것을 화양리의 석벽에 새긴 뒤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기 전에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면으로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부탁했다. 만동이란 이름은 권상하가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것이다.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天九曲)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북향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주었다.

     

    즉 묘우(廟宇)의 수호와 제향(祭享)에 관심을 표명했고, 수직사(守直使)를 임명하거나 전결(田結)을 급여해주기도 했다. 봄과 가을의 제향에는 큰 성황을 이루어 유생을 비롯한 촌민·수령 등 각계 각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반면에 만동묘의 위세가 날로 증대해 그 폐해가 막심했다. 제사 지낼 때 자성지폐(?盛之弊)는 물론이고 면세전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컸고, 면역이 인정되는 수직사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 군역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대원군 집정기에 철폐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은진송씨 송준길 1606(선조 39)~ 1672(현종 13).

    송준길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서인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爾昌)이다. 어려서부터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면서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어나갔으며,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29세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35세 1630년 세마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38세 1633년 잠시 동몽교관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세력)에 속했으며, 54세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광산김씨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는 한편, 인조말 이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의 핵심인물인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안동김씨 김자점 일파가 효종의 북벌정책을 청(淸)에 밀고하여 그와 은진송씨 송시열 등 산당(山黨)은 청의 압력으로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뒤 집의, 이조참의 겸 찬선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다.

     

    63세 1658년(효종 9)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64세 1659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그는 송시열의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지지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남인의 윤휴(尹?)·윤선도(尹善道)·허목(許穆) 등의 3년설(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어 이조판서·우참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를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1665년 원자(元子)의 보양을 건의하여 보양관(輔養官)으로 잠시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발을 끊고 회덕에 머물러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

     

    기계유씨 유계 1607(선조 40)~ 1664(현종 5).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학통을 잇는 서인(西人) 학자로서, 성리학에 밝았고 특히 예론에 정통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아버지는 참봉 유양증(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병조참판을 지낸 남이신(以信)의 딸이다.

     

    안돈김씨 김상헌(金尙憲)·광산김씨 김장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파평윤씨 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경주이씨 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27세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30세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시강원설서로서 예조판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척화죄로 임천(林川)에 유배되었다. 1639년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이때 송시열·송준길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고, 주자의 〈가례 家禮〉에 대한 여러 경전과 예서(禮書)를 바탕으로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지었다.

     

    그후
    다시 기용되어 40세1646년 무안현감이 되고, 43세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르도록 했다. 이어서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46세 1652년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송준길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이 되었고, 53세 1659년 병조참지·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효종이 죽은 뒤 일어난 예송(禮訟)에서, 서인의 입장에 서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고 남인의 3년설을 논박했다.  56세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 57세 1663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1715년(숙종 41) 손자인 상기(相基)가 〈가례원류〉를 간행했는데,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에 이 책의 저자와 간행의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인 윤증(尹拯)을 비방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후 노론·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남집〉·〈가례원류〉·〈여사제강 麗史提綱〉·〈강거문답 江居問答〉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임천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파평윤씨 윤선거 1610(광해군 2)~ 1669(현종 10).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渾)의 딸이다. 형이 문거(文擧)이며, 아들이 소론윤증(拯)이다. 광산김씨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24세 1633년(인조 1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청을 섬길 것을 요구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기 위해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상소했다. 이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가서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謙) 등과 함께 성문을 지켰다.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안동권씨 권순장·광산김씨 김익겸과 처 이씨(李氏)는 자살했으나, 그는 평민의 복장으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이 사건을 비웃은 노론 송시열과 아들 소론 윤증의 사이가 벌어진다). 이해 3월 아버지 윤황이 척화(斥和)를 주장한 죄로 영동으로 유배될 때 따라갔으며, 이듬해 금산으로 옮겨 노론 송시열(宋時烈)·권시(權?)·남인 윤휴(尹?)·윤선도(尹善道)·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하면서 평생 예학과 역학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42세 1651년(효종 2) 이래 장령·집의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강화도에서 홀로 살아나온 데 대한 자책으로 관직을 맡지 않았다.

     

    44세 1653년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송시열·유계(兪棨)·권성원(權聖源) 등과 함께
    윤휴의 주자경전주해(朱子經傳註解) 변개(變改) 문제에 대하여 격론을 벌였다.

     

    이 논쟁은 남인 윤휴가 주자의 경전주해에 얽매이지 않고 북송(北宋) 이전의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전주해를 하자, 노론 송시열이 이를 주자학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윤선거는 윤휴를 변호하여
    송시열과 대립된 견해를 표명했다.

     

    56세 1665년(현종 6) 동학사(東鶴寺)에서 이이(李珥)의 연보를 간행하기 위하여 송시열과 다시 만나,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사문난적론과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문제로 비롯된 송시열과 윤휴의 예송(禮訟) 시비를 놓고 재차 논쟁을 벌였다.

     

    60세 1669년 송시열에게 보내는 서신인 〈기유의서 己酉擬書〉를 작성하여, 남인과 서인간의 당쟁을 지양하는 정견을 제시하면서 윤휴와 허목(許穆)의 등용을 주장했다. 윤휴 등 남인의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태도에 대한 서인 내부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한 송시열과의 갈등은, 뒷날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져
    노소분당의 한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1710년(숙종 36)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유계와 함께 찬술한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을 둘러싸고 1715년 노론·소론의 싸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관작을 박탈당했다가 1722년(경종 2) 부자가 함께 관작을 회복했다.

     

    영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 용암사(龍巖祠),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서유고 魯西遺稿〉·〈계갑록 癸甲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남인>양천허씨 허적 1610(광해군 2)~ 1680(숙종 6).

     

    허적

     

    남인으로 제1·2차 예송에서 서인과 대결했으며,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뒤 탁남(濁南)의 영수가 되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 아버지는 부사 허한(?)이다.

     

    24세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28세 163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32세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했다. 36세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38세 1647년 일본의 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44세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46세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50세165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을 둘러싸고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에 맞서, 허목(許穆)·윤휴(尹?) 등과 함께 3년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뒤 호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53세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55세 1664년 우의정이 되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59세1668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62세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송시열의 논척(論斥)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63세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이 득세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수립했다.

     

    그뒤 남인 서인 송시열 등의 처벌문제로 청남(淸南)과 탁남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어 허목 등의 청남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65세 1676년(숙종 2)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가 되었다.

     

    67세 1678년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사용하도록 했으며, 궤장(?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69세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幄)을 함부로 사용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같은해 서인인 청풍김씨 김석주(金錫胄)·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 등이 그의 서자 허견(堅)이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형제와 함께 역모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윤휴 등과 함께 사사(賜死)되었으며,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했다(경신대출척).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 등을 죽이고(김익훈은 후에 노론이 집권하자 관작이 회복된다), 그의 관작을 추복했다.

     

    <남인>남원윤씨 윤휴  1617(광해군 9)~ 1680(숙종 6).

     

    주자학이 지배하던 17세기 사상계에서 주자의 학설·사상을 비판·반성하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세웠다. 예송(禮訟) 때 남인으로 활동하며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계와 맞섰으며, 숙종 즉위 후부터 경신대출척 때까지 많은 개혁안을 제기하고 실행하려 했다. 서인계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초명은 정(?)이었으나 25세 때 휴로 고쳤다.

     

    아버지는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윤효전(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1세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략이 있자 보은 삼산(三山)에 있는 외가로 피난하여 외할아버지 김덕민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익히고,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했다. 이때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를 접했다. 이후 전주이씨 이수광(李?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와 이원익(李元翼)에게서 배웠다.

     

    20세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욕을 씻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 준비를 포기했다.

     

    23세1639년 공주 유천(柳川)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논어〉·〈맹자〉 등 사서(四書)와 시·서·삼례(三禮)·역(易) 등 경서 학습에 몰두했다. 이때 권시(權?)·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과 막역한 관계를 맺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1656년(효종 7) 세자시강원자의로부터 1659년 사헌부지평까지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44세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색인 : 기해예송).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卑主二宗)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59세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헌·성균관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

     

    64세 1680년 탁남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여했다고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처형당했다.

     

    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되어 개혁의 뜻이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편 도체찰부(都體察府) 설치와 무과인 만과(萬科)의 시행을 주장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주도했다.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간관(諫官)과 과거제, 그리고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보고, 〈주례 周禮〉를 원용한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그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서인>광산김씨 김익훈  1619(광해군 11)~ 1689(숙종 15).

     

    김익훈(金益勳 1619~1689: 광산김씨 29世)은  청품김씨 김석주의 매형/숙종의 외삼촌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27世의 손자이며 ,

    아버지 이조참판 김반(槃)28世의 네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중추(僉中樞) 김진려(金進礪)의 딸이다 

     

    30세 1648( 26) 음보(蔭補)로 처음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고 승진하여 사복시(司僕寺)에 오래 내사복(內司僕)으로 있었다.

     

    조카 김만기(萬基)의 딸이 숙종의 비(=정비 인경왕후)였으므로 숙종이 즉위하자 군권(軍權)을 장악하였고

    56세 1674년(현종15) 예송에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62세 1680년 청풍김씨 김석주의 주도로 경신대출척[경신환국]을 일으켜 남인들을 숙청하는데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사공신 2등 광남군(光南君 정2품)을 봉작 받았다.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특히 청풍김씨 김석주 등과 함께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71세 1689년 어영대장 재직 중 기사환국(남인 기사회생)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문정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로 유배되었으며,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다.

     

    1682년 남인의 모역사건 당시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서인내부 소장파의 반감을 부채질하여, 훈척과 서인 노장파의 협력소장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결국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 등의 노장파(노론)는 두둔하고, 윤증의 소장파(소론)는 대립하여 분당하게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비문에는 처음부터 1682년(숙종 8년) 허새(許璽)의 모반사건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되어 있고 기사환국 당시 억울하게 절명한 사실과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신원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 
     

    8 () 1716 .

     

     

     

    청풍김씨 김우명(1619∼1675) 현종의 장인

     자는 이정(以定).

     

    본관은 청풍(淸風). 대동법의 실시로 유명한 김육(金堉)의 아들이며

    형은 병조판서 김좌명(=아들 : 김석주)

    현종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이다.

     

    서기 1642(인조 20)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江陵參奉)과 세마(洗馬) 등을 지냈다.

    그의 딸이 태자빈이 되었는데, 서기 1659(효종 10)년 현종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1661년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서인(西人)에 속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代父服喪) 문제를 계기로 남인 허적(許積)에 동조하여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졌다.

    숙종 초에는 복창군(福昌君)·복평군(福平君) 형제의 행패를 탄핵하였다.

    그 뒤 반대파들의 질투가 더욱 심해지자 두문불출하였다.

    당시 그를 가리켜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겉으로는 서인에 속하지만 속으로는 남인이라는 뜻이다

     

     

    <서인> 여흥민씨 민정중 1628(인조 6)~ 1692(숙종 18).

    민정중

     

    본관은 여흥.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아버지는 관찰사 민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21세1649년(효종 즉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뒤 동래부사·전라어사·충청어사 등을 지내고,

     

    31세1659년 현종 즉위 뒤에는 대사헌·이조판서·한성부윤·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했다.

    47세 1675년(숙종 1) 숙종이 허적(許積)·윤휴(尹?) 등 남인을 중용하자 이조판서로 있던 중 이들의 배척을 받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52세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귀양에서 풀려난 뒤 우의정·좌의정 등을 지냈다.

    61세 1689년 희빈장씨 소생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에서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되자 벽동(碧潼)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노봉집〉·〈노봉연중설화 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 壬辰遺聞〉 등이 있고, 글씨에도 뛰어나 〈우상이완비 右相李浣碑〉·〈개심사대웅전편액 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소론>파평윤씨 윤증 1629(인조 7)~ 1714(숙종 40).

    소론의 영수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활동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출신 및 학통

    할아버지는 유황(煌)이고, 아버지는 유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광산김씨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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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론과 소론의 분열

    1680년(숙종 6)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 여흥민씨 민정중(閔鼎重)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숙종 초반 3대 외척 : 청풍김씨/ 광산김씨/ 여흥민씨>인

     청풍김씨 김석주(金錫胄)·광산김씨 김만기(金萬基)· 여흥민씨 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崔愼)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윤증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尹?)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諫官)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가례원류시말).

    1722년(경종 2) 소론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배사(背師)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 등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경제적 지향도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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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의령남씨 남구만 1629(인조 7)~ 1711(숙종 37).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널리 알려져 있는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지은이이다.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개국공신 남재(在)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지방 현령이었던 남일성(一星)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었던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 28세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정언·이조정랑·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 등을 거쳐서 40세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관찰사를, 56세1674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숙종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51세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판서가 되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이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56세1684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66세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78세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73세1701년 희빈장씨를 가볍게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장씨를 사사(賜死)하기로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뒤 유배·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나 79세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 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노론>안동김씨 김수항 1629(인조 7)~ 1689(숙종 15).

    조선 현종 때의 문신.

     

     

    서인으로서 2차례의 예송(禮訟) 때 남인과 대립했으며,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본관은 안동.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상헌(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光燦)이다. 영의정 김수흥(壽興)의 아우이다.

     

    23세 1651년(효종 8)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28세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정언·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대사간에 오르고 31세 1659년(현종 즉위) 승지가 되었다.

     

    32세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朞年說:1년)을 주장해 남인의 3년설을 누르고, 3년설을 주장한 윤선도(尹善道)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제1차 예송). 그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46세 1674년 효종비가 죽은 뒤 일어난 제2차 예송 때는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47세 1675년(숙종 1) 남인인 윤휴(尹?)·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의 공격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원주와 영암 등으로 쫓겨났다.

     

    52세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53세 1681년 〈현종실록〉 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릴 때 노론의 영수로서 강력한 처벌을 주도했다. 61세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저서로 〈문곡집〉과 〈송강행장 松江行狀〉이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평 옥병서원(玉屛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영암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여흥 민씨 민유중[閔維重, 인조 8년(1630)∼숙종 13년(1687)],

    숙종의 두번째 장인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여흥,

     

    증조부는 민여건(閔汝健), 조부는 경주부윤 민기(閔機),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따님 연안이씨,

     

    정배는  좌참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따님 은진송씨 

    계배는 이조판서 이경증(李景曾)의 따님 덕수이씨이고,  

    딸이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여흥민씨이며

     

    위로 형님이 대사헌 민기중(閔蓍重)·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다.

     

     송시열·송준길의 문인으로 효종 즉위년(1649) 20세 진사가 되고, 효종 3년(1651, 25세)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을 시작으로 30세 1656년 병조정랑,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의정부사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39세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이후 장례원판결사·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이조참의·충청도관찰사·성균관대사성·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대사헌·의정부우참찬·한성부판윤·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 끝내 흥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정권을 주도하였다.

     

    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령부영사가 되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 벽동 구봉서원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 閔文貞遺集》 10권 10책이 전한다.

     

    <소론>반남박씨 박세채1631(인조 9)~ 1695(숙종 21). 소론의 영수  박세채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반남.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박의(?)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9세 1649년(인조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20세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21세 1651년 안동김씨 김상헌(金尙憲)· 광산김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29세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에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1년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을 지지했다

     

    44세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들이 축출당할 때 삭탈관직당하고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50세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다시 기용되어 집의·이조참의·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무렵 서인들 가운데에는 훈척파(勳戚派)와 청의파(淸議派)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생겨 서로 반목했다. 이른바 노론·소론의 분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훈척파는 안동김씨 김수항·여흥민씨 민정중·민유중, 청풍김씨 김석주 등 남인을 내쫓는 데 공이 많고 나이가 많은 고관들이었고,

    청의파는 조지겸·오도일·박태보·박태유·한태동 등 연소한 관료들로 남인들의 완전 제거와 훈척파의 전권(專權)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52세 1682년 광산김씨 김익훈·청풍김씨 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이 훈척파를 옹호하여 청의파와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1683년 송시열이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존주대의(尊周大義)라 하여 시호를 높일 것을 주청한 것을 계기로 송시열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조지겸·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59세 1689년 소의 인동장씨(昭儀張氏)의 희빈 책봉문제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했으나, 64세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광산김씨 김만기 1633(인조 11)~ 1687(숙종 13). 숙종의 장인

    김만기

     

    본관은 광산.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정관재(靜觀齋). 증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낸 김장생(長生)이며, 아버지는 생원 김익겸(益兼)이다. 숙부 김익희(益熙)에게 수학하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다.

     

    20세 1652년(효종 3)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정언·교리 등을 지냈다.

     

     27세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으며, 3년설을 제기한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했다(→ 색인 : 기해예송).

     

    39세 1671년(현종 12) 딸이 세자빈=>인경왕후 광산김씨이 되었고, 41세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그뒤 병조판서를 지냈다.

     

    42세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왕의 장인으로서 영돈녕부사에 승진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총융사를 겸하여 병권을 장악했고,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48세 1680년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허적(許積)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이 되었다(→ 색인 : 삼복의 옥).

     

    57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석집〉 18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만기(金萬基 1633~1687(숙종 13): 광산김씨 30世)는  김익훈(광산김씨 29世)의 조카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27世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인 이조참판 김반(槃)28世의 세째아들 생원 김익겸(29世)이다

    호는 서석(瑞石) 또는 정관재(靜觀齋)이다.

    다섯 살 때 병자호란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둘째 큰아버지인 김익희(29世)에게 수학하다가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수찬?정언?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 인경왕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령부사에 승진되었다.


    안동김씨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으며, 강만철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공을 세워 보사1등공신이 되었다. 노론의 과격파로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삭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사후에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이다

    김만기

    김만기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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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김씨 김석주(金錫?, 1634년 ~ 1684년)

     

     조선시대의 외척, 권신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청풍.

     

    1657년 진사를 거쳐 6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 이조좌랑을 지냈다.

     

    당시 한당(漢黨)으로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되지 못하다가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상복을 입는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서인이었음에도 남인(南人)의 온건파 청남 허적(許積)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宋時烈)·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 등의 산당 훈신들을 숙청하고 특진되어 수어사(守禦使), 도승지 등을 지냈다.

     

    그 뒤 허적과 등을 돌리고 다시 송시열과 결탁하여 남인을 역모로 몰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으로 진급했다. 1682년 우의정이 되었고, 그해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했으며,

     

    이어 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김환, 전익대 등을 사주하여 허영, 허새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이로써 서인 청류파의 비난을 샀다.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심한 반감을 사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축출되고 공신의 호를 박탈당하였으나 후에 복관되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식암집》, 《해동사부(海東辭賦)》 등이 있다.

    [가계]

     

     

    조부 : 영의정 잠곡 김육

      • 숙부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 증 영의정

                김우명(=현종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

    • 계실 : 창원황씨 - 황일호의 딸

     

    노론 청풍김씨 김석주 1634(인조 12)~ 1684(숙종 10).

     

    서인으로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일으켜 남인을 숙청했다. 그뒤에도 남인의 철저한 숙청을 주장하면서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청풍.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육(堉)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좌명(佐明)이다.

     

    25세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었으며, 30세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된 뒤, 이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특히 홍문관에 들어가 오랫동안 교리·부교리·수찬 등을 맡았다.

    제2차 예송 및 경신대출척

    당시 서인 가운데 한당(漢黨)에 가담해 집권당인 산당(山黨)에게 중용(重用)되지 못했다.

     

    42세1674년(숙종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許積) 등과 함께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 등 산당을 몰아내고 수어사(守禦使)·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남인 집권층이 송시열을 죽이려는 것을 좌절시켜 송시열과의 관계를 긴밀히 했다.

     

    48세 1680년 왕이 쓰는 장막(帳幕)을 사사로이 사용한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이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남인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허적의 아들 허견(許堅)의 모역사건을 고변(告變)했다. 경신대출척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과 윤휴(尹?)를 죽이는 등 남인의 인물들을 숙청하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뒤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항, 좌의정 여흥민씨 민정중(閔鼎重), 우의정 이상진(李相鎭) 등 서인정권이 굳어지자 이조판서가 되었다(→ 색인 : 삼복의 옥).

    노론·소론의 분열

    50세 1682년 우의정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했다. 이어 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과 함께 남인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전익대(全翊戴)를 사주하여 확실한 증거도 없이 허새(許璽)·허영(許瑛)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케 하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남인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서인 내부의 소장파들이 광산김씨 김익훈의 무고혐의를 주장하면서 소론을 형성하자, 김익훈을 두둔한 송시열과 함께 노론을 이끌며 이들과 대립했다.

     

    1675년(숙종 1) 9월 향촌의 재편성을 도모한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의 제정에 참가했으며, 호패(戶牌)와 호포(戶布) 논의에 적극 참여하여 이의 실시를 주장했다.

     

    죽은 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광산김씨 김익훈·김만중과 함께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이후 다시 복구되었다.

     

    저서에는 〈식암집〉·〈해동사부 海東辭賦〉가 있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청풍김씨 김석주 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 서인과 남인을 넘나든 최고의 실세였으나 남인 제거를 위한 정치공작을 주도하면서 명성이 급격히 퇴락했다. 무덤의 무성한 풀이 후세 사람들에게 권력무상을 경계하는 듯하다. 사진가 권태균

     

    광산김씨 김만중 1637(인조 15) 한성~ 1692(숙종 18) 남해.

    김만중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김익겸(益謙)은 병자호란 당시 경주김씨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이때 소론의 영수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는 홀로 살아 도망 감으로서 노론 송시열의 비방을 받는다)

     

     

    29세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43세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51세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그는 많은 시문과 잡록, 〈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남기고 있다.

    〈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소식의 〈동파지림 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다.

     

    이규경의 〈소설변증설〉에 전하는 바로는〈구운몽〉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며,〈사씨남정기〉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창작동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썼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서포집〉,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등이 있으며, 행장(行狀)에 의하면〈채상행 採桑行〉·〈비파행 琵琶行〉·〈두견제 杜鵑啼〉등의 작품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안동김씨 김창집 1648(인조 26)~ 1722(경종 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안동.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김상헌(尙憲)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김창협(昌協)과 김창흡(昌翕)의 형이다.

     

    => 김창집의 4대손이 김조순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25세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공조좌랑을 거친 뒤, 37세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정언·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42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이었던 아버지가 남인의 명사를 마구 죽였다는 탄핵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둔했다.

     

    47세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축출된 뒤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했다. 그뒤 철원부사로 있을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이어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71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70세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신임사화

    숙종 말년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세자인 윤(?:경종)을 지지하자, 그는 노론으로서 연잉군(延?君:영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했으나 경종이 자식이 없고 병이 많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으로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경종의 비 어씨(魚氏)와 아버지 어유구(魚有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4세 1721년(경종 1) 8월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10월에는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다.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날카로워져 갔다. 해에 사직(司直) 광산김씨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에게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꾸몄다고 탄핵을 받았다. 신임사화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노론의 권력기반은 무너지고, 그는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성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77세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형제가 모두 성리학의 대가로 유명했고, 형제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가학의 계통으로 보아 이이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에 가까웠다.

     

    관직에 있으면서 복제(服制)·과거·포폄(褒貶) 등에 관한 정책을 많이 건의하여 시행했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 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몽와집〉·〈오륜전비언해 五倫全備諺解〉·〈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노론 연일정씨 정호 1648(인조 26)~ 1736(영조 12).

     

     

    정호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정철의 4대손으로 아버지는 감찰 정경연(慶演)이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35세 1682년(숙종 8) 생원이 되었으며 37세168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검열과 정언을 지냈으나,

     

    42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鏡城)에 유배되었다.

     

    47세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해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했다. 52세1699년 동래부사를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승지·부제학·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63세 1710년 대사간·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나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興海)·갑산(甲山) 등지에 유배되었다.

     

    66세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廟庭配享)을 건의했다.

    68세 1715년 그가 부제학이 되었을 때,

    기계유씨 유계(兪棨)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조부의 유저(遺著)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간행했다. 이때 권상하(權尙夏)가 서문을 쓰고 그가 발문(跋文)을 쓰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문과 발문에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했다고 비방하는 내용을 썼다(→ 색인 : 가례원류시말).

     

    숙종은 평소에 소론 윤증을 후대해 우의정에까지 임명했으며, '유상'(儒相)이라 칭하며 가까이 했었다. 그해 윤증이 죽어 숙종은 매우 애석해 하고 있었는데, 정호가 그를 공격하자 유현(儒賢)을 배척했다 하여 파직시키고 발문을 없애버렸다. 이에 조정의 노론들이 일시에 상소하여 그를 구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론도 권상하를 공격하여 〈가례원류〉의 서문마저 삭제하도록 청했다.

     

    이 사건으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어 노론·소론의 대신과 성균관 유생들까지 서로 상소하여 몇 개월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결국 69세 1716년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정호는 대사헌이 되고 그가 쓴 발문도 회복되었다.

     

    이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노서유고 魯西遺稿〉가 간행되자 노론 계통의 재야유생들이 이 문집에 효종에 대한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훼판(毁板)할 것을 상소하자, 그도 여기에 적극 가담해 결국 문집의 각판(刻板)을 깨뜨려 없애고, 윤선거 부자(아들 윤증)의 관직도 추탈(追奪)하게 했다.

     

    70세 1717년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자(뒤의 경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행하게 했다.

    72세 171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75세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으로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79세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 우의정에 특진, 신임사화로 처형된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을 여러 차례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81세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83세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었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고, 시문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저서로 〈장암집 丈巖集〉, 편서로 〈문의통고 文義通攷〉가 있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소론> 전주최씨 최석항 1654(효종 5)~ 1724(경종 4).

    최석항

    최석항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 할아버지는 영의정 최명길(鳴吉)이며, 아버지는 최후원(後遠)이다. 최후량(後亮)에게 입양되었다. 형은 소론의 거두 최석정(錫鼎)이다.

     

    27세 1680년(숙종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41세1694년 갑술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선 후 부수찬·경상도관찰사·개성유수·형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68세 1721년(경종 1)과 그 이듬해에 걸쳐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좌참찬으로서 경종으로 하여금 세제(世弟:후에 영조)의 대리청정을 철회하게 하여 소론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재임중에 죽었다.

     

    72세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몰려 관작이 추탈되었고, 그후 여러 번 복관과 추탈이 반복되다가 노론정권이 안정된 정조 때 최종적으로 추탈되었다.

     

    몸집이 작았으나 관찰사 재직시 뛰어난 판단으로 전국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고, 1723년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손와유고〉는 노론에 대해 소론의 정당성을 주장한 중요한 정치사 자료이다

     

    노론 전주이씨 이이명 1658(효종 9)~ 1722(경종 2).

    이이명

     

    숙종·경종대에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한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했으며, 서양 학술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敬輿)이며, 아버지는 대사헌 이민적(敏迪)이다.

     

    23세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 홍문관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수찬·응교·헌납·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29세 16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청풍김씨 김석주(金錫胄) 등 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32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파직, 영해·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37세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그후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이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가 풀렸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44세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49세 170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51세 1708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세자(뒤의 경종)가 아닌 연령군(延齡君)·연잉군(延?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고 이들의 후원을 자임했다.

     

    64세 1721년(경종 1) 안동김씨 김창집(金昌集)·양주조씨 조태채(趙泰采)·전주이씨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노론4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세제(世弟:뒤의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실현하려다가 실패했다. 이 일 때문에 소론의 격렬한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죽음을 당했다(→ 색인 : 신임사화).

     

    1740년(영조 16) 노론·소론 간의 치열한 투쟁이 노론의 승리로 결말지어지는 경신처분(庚申處分) 때 복관되었다.

     

    그는 주자도통주의적 이념에 철저하면서도 변화하는 현실에는 유연히 대처했다. 몇 번의 북행사절(北行使節)을 통해 접한 서양의 발달된 문물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천주교·역산(曆算)·천문·지리에 관한 저술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이러한 학풍에 영향을 받아 지리·전산(田算)에도 관심을 가져 지도 및 강역사(疆域史), 전산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들과 달리,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이들 새로운 사조들을 접했던 까닭으로, 이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그 실용성은 인정했다.

     

     한편 국내의 현실 문제는 수취체제, 특히 군역의 문제가 근본적인 것이라 보고 이의 개선 방안으로 정포론(丁布論)을 제시했다. 종래의 양인(良人)을 대상으로 역을 부과하던 방식을 벗어나 양반 자제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15~60세의 장정이면 누구나 일정액의 포(布)나 전(錢)을 부담한다는 안이었다.

     

    토지공유제론(土地公有制論)에 의한 농민·농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일각에서 모색되던 당시 상황에서의 이러한 개선 방안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으나, 이 시기 노론의 정치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저서로는 〈소재집〉·〈동국강역도설 東國疆域圖說〉·〈전산촬요 田算撮要〉·〈강도삼충전 江都三忠傳〉 등이 있다.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소론>문화유씨 유봉휘 1659(효종 10)~ 1727(영조 3).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창(季昌), 호는 만암(晩菴). 아버지는 영의정 유상운(尙運)이다.

     

    26세 1684년(숙종 10) 진사가 되고, 41세 1699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문학·지평·정언·수찬·이조정랑·헌납·부교리 등을 거쳤다.

     

    52세 1710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진휼(賑恤)을 위해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곡식의 다소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주었기 때문에 당상관이 범람하게 되었다며 납속수직(納粟授職) 폐지를 주장했다. 부제학·이조참의·승지·동의금 등을 역임한 후,

     

    63세 1721년 행사직(行司直)이었을 때 노론 4대신이 중심이 되어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한 것에 대해 시임대신(時任大臣) 소론 조태구(趙泰耉)가 참여하지 않는 등의 절차상의 문제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연잉군은 세제책봉을 사퇴하려 했고, 노론들은 유봉휘를 국문하자고 주장하여 세제책봉을 둘러싼 노소론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해 10월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12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후 세자빈객·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에 66세 1724년(영조 즉위) 영조의 탕평책 실시에 의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67세 1725년 노론 측에 의해 세제책봉 때의 상소와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경원에 유배되었다. 노론은 그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에도 역율(逆律)에 따라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을 것을 요구했을 정도로 유봉휘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1727년 7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소론명문이 거의 몰락하는 가운데 다시 역율로써 추형(追刑)되었다.

     

    <소론> 양주조씨 조태구 1660(현종 1)~ 1723(경종 3).

    조태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수(德), 호는 소헌(素軒)·하곡(霞谷). 아버지는 우의정 조사석(師錫)이다.

     

    노론 조태채(泰采)·소론 조태억(泰億)의 종형이다. 27세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형조참의·대사성·부제학·호조판서를 지냈다.

     

    1710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58세 1717년 우참찬,  61세 1720년(경종 즉위) 우의정이 되었다.

     

    62세 1721년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을 비롯해 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시키고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하자,

     

    소론의 영수로서 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환수(還收)시켰다. 이어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金一鏡) 등으로 하여금 노론 4대신을 역모죄(逆謀罪)로 몰아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뒤, 소론 정권을 수립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66세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탄핵을 받아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68세 1727년 영조의 탕평책으로 소론을 다시 등용할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편서로 〈주서관견 籌書管見〉이 있고, 글씨를 잘 써서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李忠武公高下島遺墟碑)·왕자연령군명비(王子延齡君明碑) 등을 남겼다

     

     

     

     

    노론 양주조씨 조태채 1660(현종 1)~ 1722(경종 2).

    조태채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命)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啓遠)이며, 아버지는 괴산군수 조희석(禧錫)이다. 소론 조태구(泰耉)의 종제이며, 조태억(泰億)의 종형이다.

     

    27세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수찬·교리·공주목사·정언·동지경연사·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713년 지중추부사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5년 공조판서가 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717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전직했으며, 1720년(경종 즉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62세 1721년 영의정 김창집, 판부사 이이명, 좌의정 이건명,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등과 함께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의 세제 책봉을 건의하여 실현시켰으며,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이르게 했다.

     

    그러나 소론인 우의정 양주조씨 종형 조태구의 지휘를 받은 유봉휘(柳鳳輝)의 건저반대소(建儲反對疏)와 최석항(崔錫恒)의 대리청정 환수(還收)를 청하는 상소 등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고 건저를 주장했던 노론세력이 대거 정계에서 제거되었다.

     

    이때 그도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김일경(金一鏡)이 올린 노론 4대신 축출의 소로 진도에 유배되어 다음해 사사(賜死)되었다(→ 색인 : 신임사화).

     

    1725년(영조 1) 정호(鄭澔)의 청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는 집안이 대부분 소론에 기운 데 반해, 유독 노론에 머물렀다.

     

    노론내에서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고 이어 그를 배향하던 서원까지 없애려는 논의가 있다, 임금이 내린 은액(恩額)만 빼앗으면 일반 향사(鄕祠)와 다를 바 없고 또 향사는 조정에서 간섭할 바가 아니라 하여 이를 말리기도 했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듯이, 대립의 일선에서 활동했지만 비교적 중립을 지키려 했으므로 일부 소론들이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문집으로 〈이우당집〉이 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전주이씨 이관명 1661(현종 2)~ 1733(영조 9).

     

    본관은 전주.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敬與)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서(敏敍)이고, 어머니는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27세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었고, 38세1698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교리·이조참판·부제학·도승지·대사헌·예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41세 1721년(경종 1) 세제(世弟)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추진했던
    노론4대신 등이 소론의 공격을 받고 파출(罷黜)되자 공조판서였던 그도 삭출(削黜)되었다. 이듬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시작된 신임사화에서 노론4대신이 죽음을 당하자 그도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44세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었으며, 45세1725년(영조 1) 우의정으로 재직할 때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동생 건명(健命)이 억울하게 죄를 받은 것과 유봉휘(柳鳳輝)와 김일경(金一鏡)이 영조를 모해한 것 등을 언급하면서 소론의 완전한 토벌을 주장했다.

     

    47세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기용되자 판중추부사의 직을 박탈당했다. 48세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중추부사로서 성중(城中)의 한산무사(閑散武士)들을 군대로 편성하여 궁성을 호위하게 하자고 제의했다. 그뒤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파직당했다.

     

    문장이 뛰어나 응제문(應製文) 등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 〈병산집〉이 있다.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 1662(현종 3)~ 1724(영조 즉위).

    조선 후기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의 거두.본관은 광산. 자는 인감(人鑑), 호는 아계(?溪). 아버지는 생원 김여중(呂重)이다.

     

    41세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감찰 등을 지냈고, 46세 1707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판결사로 특진했다

     

    49세 1710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곧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한직인 부사과(副司果)로 전직되었다. 59세1720년 경종이 소론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자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60세1721년 노론정권은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연잉군(延?君: 뒤의 영조)을 세제에 책봉하게 한 뒤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했다.

     

    이때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소론의 영수인 좌의정 조태구(趙泰耉) 등과 함께 반대하여 취소하게 하고, 노론 4대신들이 세제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일은 나라를 망칠 죄과라고 탄핵하여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 등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했다.

     

    소론 정권을 수립한 뒤 노론을 극심하게 탄압하고,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해에 노론의 한 사람인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여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을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변하게 하여, 유배중이던 노론 4대신을 모두 사사(賜死)시키고 노론 수백 명을 살해 또는 추방했다. 그가 2년에 걸쳐 주도한 노론에 대한 숙청이 신임사화(辛壬士禍)이다.

     

    그뒤 우참찬에 올랐으나, 63세 1724년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재집권하자 유배된 뒤, 신임사화가 무고로 조작된 것이라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투옥되어 친국(親鞫)(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을 자처하였다)을 받은 뒤 참형당했다.

     

     저서에 〈아계집〉이 있다.

     

     

    전주이씨 이건명 1663(현종 4)~ 1722(경종 2).

    이건명

     

    경종대의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敬輿)이며,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이민서(敏?)이다. 24세1686년(숙종 12) 춘당대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수찬·교리·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35세1697년 응교로 있을 때 시폐(時弊)를 지적하고 제왕이 취해야 할 도리 및 경세(經世)·이민(理民) 방책과 병제(兵制)·양역(良役)·전정(田政) 등에 대해 건의한 〈진계소 陳戒疏〉를 올렸다.

     

    36세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이조·형조·호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55세 1717년 숙종이 그의 사촌형인 이이명(李?命)을 불러 세자교체문제를 논의한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있은 후 우의정에 올랐다.

     

    58세 1720년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한 후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의 영수들과 함께 경종이 병이 많고 자식이 없으니 하루 속히 왕위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59세 1721년(경종 1) 8월 연잉군(延?君 : 영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갔다.

     

    그러나 그가 청에 간 사이 경종이 소론을 비호하는 태도를 취하자 광산김씨 김일경(金一鏡)을 중심으로 한 소론 과격파는,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趙聖復)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4대신이 모역한다고 소를 올렸다. 이 일로 소론이 정권을 잡았고,

     

    60세1722년 귀국한 그는 청나라에서 세제책봉의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있는 것처럼 발설했다는 죄로 나로도(那老島)에 유배된 후,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색인 : 신임사화).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신원(伸寃)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저서에 〈한포재집〉이 있다.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소론> 청송심씨 심수현 1663(현종 4)~ 1736(영조 12).

     

    본관은 청송. 자는 기숙(耆叔), 호는 지산(止山). 아버지는 응교(應敎) 심유(濡)이다.

     

    42세1704년(숙종 30) 춘당대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지평을 지냈다. 46세 1708년 강원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철원부사 이원명(李元命) 등을 징계하고, 영월부사 박중규(朴重圭) 등에게 상을 내렸다. 47세 1709년 부교리, 48세 1710년 의주부윤, 52세1714년에는 양양부사가 되었다
    .

     

    양양부사로 재직할 때 선정을 베풀어 포상을 받고 충청도관찰사로 승진되었으며, 54세 1716년 승지·형조참의를 지냈다.

     

    57세 1719년 경상좌도균전사가 되었을 때 상소를 올려 종래대로 양전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58세1720년 승지를 지내고 이어 강화유수·대사헌·이조참판·공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65세 1727년 지경연사·판의금부사를 지낸 후 우의정이 되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66세 1728년 사신으로서 나라를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71세 1733년 영의정을 거쳐, 74세 1736년에는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노론 여흥민씨 민진원 1664(현종 5)~ 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노론의 영수.

    본관은 여흥.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28세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나, 1689년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는 문제로 발생한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이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했다.

     

    31세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론이 집권하자, 다음해 검열로 등용되었다. 그뒤 병조좌랑·지평·부수찬·사복시정·집의 등을 지냈다. 40세 1703년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재정을 어렵게 하고 당쟁의 원인이 되는 서원의 건립을 억제하고 그 수를 줄일 것을 상소했다.

     

    42세1705년 공조참의로 남구만(南九萬)의 감형을 상소해 이를 실현시켰다.

     

    52세1715년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간행문제로 노론·소론이 대결하자 노론 정호(鄭澔)를 옹호했다가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된 뒤 예조판서·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이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했다.

     

    58세 1721년(경종1) 실록청총재관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세제(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하도록 했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다시 성주에 유배되었으나,

     

    61세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자 우의정에 오르고 〈경종실록〉 편찬을 관장했다.

    62세 1725년 소론의 영수인 유봉휘(柳鳳輝)를 탄핵해 유배시켰고,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했다. 그뒤 좌의정·중추부영사 등을 지냈으나,

     

    64세 1727년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조정의 인사를 개편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난 뒤에도 소론을 배격하는 데 앞장섰다.

     

    67세 17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저서에 〈단암주의 丹巖奏議〉·〈단암만록 丹巖漫錄〉·〈연행록 燕行錄〉·〈민문충공주의 閔文忠公奏議〉 등이 있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노론 남양홍씨 홍치중 1667(현종 8)~ 1732(영조 8).

    홍치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능(士能), 호는 북곡(北谷).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홍득우(得禹)이다.

     

    33세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하고, 40세 170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숙종대에 검열·지평·교리·대사간·전라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대사성·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는 46세 1712년 북평사(北評事)로서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국경을 정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참여했으며, 51세 1717년에는 통신사로서 일본에 다녀오는 등 외교관계 업무에 능했다.

     

    그러나 경종초인 1721~22년에 왕제인 연잉군(延?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던 노론이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반격으로 실권·사사(賜死)된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고 홍주목사로 좌천되었다.

     

    58세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이 재집권하자 지돈녕부사로 복귀했다. 이어 형조판서·지의금부사·우의정·좌의정을 차례로 역임하고, 63세 1729년(영조 5)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원만한 성격으로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와도 친교가 있었으며, 노론의 온건파를 이끌면서 탕평론에 근거하여 노·소론의 연합을 통한 정국안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소론> 경주이씨 이광좌 1674(현종 15)~ 1740(영조 16).

    이광좌

     

    본관은 경주.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 이항복(恒福)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이시현(時顯)이고, 아버지는 장령 이세구(世龜)이며, 어머니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21세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26세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이후 수찬·교리·헌납·이조좌랑·전라도관찰사·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41세 1712년 부제학·평안도관찰사를 지냈고, 44세 1715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45세 1716년 숙종이 죽은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고, 윤선거의 문집 목판을 부수게 하는 등 소론을 배척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세자(뒤의 경종)의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인 47세1718년 다시 예조참판으로 등용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뒤에는 연잉군(延?君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노론에 맞서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50세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사직(司直)을 지냈다. 그해 광산김씨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로 노론4대신(老論四大臣)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다음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 계열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다. 이로써 소론정권이 성립하고 이광좌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뒤 평안도관찰사·좌부빈객(左副賓客)·병조판서를 거쳐 52세 1723년 우의정에 올랐다.

     

    영조가 즉위한 뒤인 54세 1725년(영조 1)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신임사화의 잘못을 논하는 노론 계열의 잇달은 상소로 파직되었다.

     

    57세 1728년 영조가 당쟁의 조정을 꾀하여 소론을 재등용한 정미환국 때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숙종실록〉 보유편을 편찬했다.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를 재론해, 노론 4대신을 다시 반역죄인으로 규정하게 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지고,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했다.

     

    59세 1730년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의 뜻에 호응, 노론의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론·소론의 연립정권을 세우고 격심한 당쟁의 폐해를 막고자 노력했다. 62세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66세173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69세 1740년 박동준(朴東俊) 등이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하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소론 계열이 숙청될 때 관작이 추탈되었다.   

     

     

       <소론>양주조씨 조태억 1675(숙종 1)~ 1728(영조 4).

     

     

    조태억

    조태억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태록당(胎祿堂).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啓遠)이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조가석(嘉錫)이다. 소론 조태구(泰耉)· 노론 조태채(泰采)의 종제이다.

     

    최석정(崔錫鼎)에게 배웠다.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지평·정언·북평사(北評事)·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170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학·교리를 지낸 후 이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1710년 대사성에 올라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712년 왜인의 국서(國書)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1714년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예조의 참의를 거쳐 1719년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소론조태구·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의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으며,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과격파들과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대사성·세제우부빈객 등을 지냈다.

     

    이어 부제학·형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 등을 거쳐 1722년 대제학이 되었고, 1724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해 영조가 즉위하자 즉위의 반교문(頒敎文)을 지었고,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 날 호위대장(扈衛大將)을 제수받았으며 대제학을 겸했다.

     

    1725년(영조 1) 좌의정이 되었으나 노론 민진원(閔鎭遠) 등의 논척(論斥)으로 삭직(削職)되었다.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에 복직,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옮겼다. 그는 소론의 과격파가 주도한 신임사화 이후 소론이 정권을 잡을 때 이에 참여하여 중용되었으나 온건파에 속했다.

     

    영조 즉위 후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의 국문 때 책임을 맡게 되자, 위관(委官)의 직책을 어려워하여 왕의 친국(親鞫)을 청하기도 했다.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저서로 〈겸재집〉이 있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소론>청주한씨 한배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하경(夏卿), 호는 지곡(芝谷). 증조부는 한덕급(韓德及), 할아버지는 한수원(韓壽遠), 아버지는 판관 한성익(韓聖翼)이다. 청원군(淸原君) 한성보(韓聖輔)에 입양되었다.

  • [활동사항]
  • 한배하는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서 태어났으며 윤증(尹拯) 문하에서 수학했다. 1693년(숙종 19) 통덕랑으로 알성시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에 제수되었고, 1700년 옥중의 죄수와 통교(通交)한 강화유수 민진후(閔鎭厚)를 탄핵했다. 1706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필선(弼善)을 지냈다.

    1708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임지에 부임하자 극심한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지고 백성들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만 짓자 한배하는 객사 앞에 장작을 쌓게 하고 “이곳에 와서 참상을 보게 되니 나의 부덕이 원인이므로 스스로 목숨을 버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내가 죽은 뒤 부디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되길 바란다.”라고 말하며 장작더미에 불을 붙일 것을 명했다.

    그러나 감히 불을 지필 사람이 없자 그는 엄한 어조로 하인들을 꾸짖자 한 하인이 눈물을 흘리며 불을 지폈다. 장작더미에 태연히 앉아 있는 그의 옷깃에 불길이 붙으려는 순간 별안간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굵은 빗줄기가 2일 간이나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동래부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지평 이정억(李禎億)의 탄핵을 받고 무주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719년 한응인(韓應寅)의 작위를 이어 청원군(淸原君)을 습봉하여 5대(五代)에 걸친 봉군(封君)이 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뒤 지의금부사, 내의원제조를 거쳐 1722년(경종 2) 공조판서로서 알성시의 독권관(讀券官) 등을 역임했다.

    1725년(영조 1) 충훈부당상으로 재임 중 화원 진병해(秦丙奚)에게 목호룡(睦虎龍)의 초상을 그리도록 강요했다는 혐의를 받고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죽은 지 3년 뒤에 사실이 제대로 판명되어 추복(追復)되었다. 당파에 있어 양부 한성보송시열(宋時烈)의 가르침에 따라 노론의 적극적 지지자였으나 한배하송시열을 극렬 비판하며 소론으로 돌아섰다.

  • [묘소]
  •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18-6번지에 있다가 뒤에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광생리로 이장되었다.

  • [상훈과 추모]
  • 좌찬성겸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남인 광주(廣州)이씨. 이인좌  ?~ 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역신(逆臣).

     

    본관은 광주(廣州). 본명은 현좌(玄佐). 관찰사 이운징(雲徵)의 손자이며, 윤휴(尹?)의 손서(孫壻)이다. 남인의 명가출신이었으나 남인이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소외되었으므로, 그 역시 관직 진출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24년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즉위를 계기로 점점 정계에서 밀리게 된 소론은 남인과 공모하여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는 정변을 계획, 지방에서 먼저 거병하면 경중(京中)에서 내응한다는 전략을 짰다. 이때 이인좌는 남인 명가의 후광을 업고 영남의 유망사족과 접촉해 그들의 정치행동을 촉구하며 외방기병의 지휘를 맡았다(→ 색인 : 이인좌의 난).

     

    그러나 1727년 정미환국을 계기로 청남(淸南)과 온건소론이 조정에 기용됨으로써 반란군의 조직이 약화되어 경중의 내응을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고, 반남인·반소론적인 영조와 노론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도 약화되어 정변은 거의 실패한 듯했다.

     

    그러자 그는 정권에서 소외된 토족·토호층과 합세하여 1728년 3월 15일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병마(兵馬)를 모으는 한편 환상곡(還上穀)을 분급하고 관노비에게 상급(賞給)을 주기도 했다. 반란군을 이끌고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에 이르렀으나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했다.

     

    반란군을 이끌고 죽산으로 피신했으나, 마을사람에게 생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당한 뒤 능지처참되었다.

     

    <벽파>풍산홍씨  홍봉한 1713(숙종 39)~ 1778(정조 2).

    홍봉한

    홍봉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현보(鉉輔)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다. 1743년 딸이 세자빈(혜경궁 홍씨)이 되었다.

     

    174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된 이후 어영대장·광주부윤(廣州府尹)·예조참판·동지경연사를 역임했다. 1753년 비변사당상으로서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陽柵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뒤 평안도관찰사·좌참찬을 거쳐 1761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판돈녕부사·영의정을 역임했다. 1763년 박세채(朴世采)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적극 추진했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재임중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恩信君)·은언군(恩彦君)의 관작이 삭탈되고 세손(뒤의 정조)까지 그 지위를 위협당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해 청명당(淸名黨) 사건을 계기로 김귀주(金龜柱) 세력에게 탄핵을 당했으나, 영조가 〈영수백세록 永垂百世錄〉을 간행하여 이들을 당론으로서 처단함으로써 무사했다.

     

     정조 즉위 후에 은퇴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는 영조대 중반 이후 탕평당계(蕩平黨系) 척신들이 남당(南黨)으로 결집하면서 청류적(淸流的) 정치관을 가진 장헌세자와 반목했다. 그결과 1762년 장헌세자가 죽음을 당할 때 이를 방관하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색인 : 사도세자사건). 그후 영조에게 세손 보호를 부탁받고 자파 세력을 결집하여 북당(北黨:洪黨)을 이루면서 남당과 대립했다.

     

    영조의 탕평책에 부합하는 입장에서 전권을 행사하여 탕평당으로 불렸으나, 의리(義理)·명절(名節)에 투철하지 못한 권귀(權貴)로 비난받기도 했다. 정조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시파(時派)·벽파(僻派) 대립의 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무6조(時務六條)의 건의와 백골징포(白骨徵布)·환곡작폐(還穀作幣)의 금지, 은결(隱結) 재조사 등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서로는 국정운영에 대한 주장을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홍익정공주고 御定洪翼靖公奏藁〉와 〈정사휘감 正史彙鑑〉·〈익익재만록 翼翼齋漫錄〉 등이 있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남인>평강채씨 채제공 1720(숙종 46)~ 1799(정조 23).

    채제공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膺一)이다.

     

    영조연간 남인청류(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과 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이황(李滉)·정구(鄭逑)·허목(許穆)·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적통으로 여겨 경기감사로 있을 때 이익을 찾아가기도 했다.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했다.

     

    1735년(영조 11)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747년 익릉별검(翼陵別檢)을 거쳐, 이듬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가주서(假注書)로 한림회권(翰林會圈)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영조의 특명으로 이권(二圈)을 더하여 예문관검열이 될 수 있었다.

     

    1753년 호서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이를 보고했으며, 이후 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이천부사(伊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1758년 승정원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이를 극력 막아 철회시켰다. 이후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해 윤5월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

     

    1764년부터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769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770년 병조판서가 되어 군마의 관리에 노력했고, 같은 해 호조판서가 되어 국가재정 확충과 국제교역에 필요한 은과 삼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이 되어 세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했다. 이에 겸하여 공시당상(貢市堂上)·지경연사·홍문관제학이 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손(뒤의 정조)과의 관계는 이때 깊어졌다.

     

    1774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상소로 서얼 출신자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병조판서와 내국제조(內局提調)를 지냈으며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했다.

     

    1776년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의 책임자가 되어 국장사무를 주관하다가 곧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당시의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등을 추주(追誅)했고, 그 공로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자되었다.

     

    이해 가을 홍계희(洪啓禧) 등이 호위군관(扈衛軍官)과 공모하여 정조를 살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궁성을 지키는 수궁대장(守宮大將)에 임명되었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정사(謝恩兼陳奏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 서류로서 학식이 있던 이들을 동반했다.

     

    1779년 당시의 권세가 홍국영(洪國榮)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이듬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다.

     

    1781년에는 소론계 서명선(徐命善) 정권의 공격을 받고 낙향했다. 1786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88년 우의정, 1790년 좌의정이 되어 정사를 좌우했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폐지, 신해통공책 등을 실시했다. 1793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색인 : 남인).

     

    그는 자신이 사는 시기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했다. 따라서 중간수탈과 부가세를 없애고 간리(奸吏)들의 폐를 제거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했다. 재정문제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만부후시(灣府後市)의 복설(復設)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쟁에 대해서는 그것이 오로지 부귀를 누리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귀들의 사익추구에 기인하는 것이라 보고 붕당의 결과로 나타나는 세경(世卿)의 폐를 지적했다.

     

    한편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을 모두 이단으로 비판했으며, 서학(천주교)에 대해서도 그것이 비문화적·비윤리적·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즉 서학이 무부무군(無父無君)한 논리이고 그 내세관이 불교와 비슷하며, 이적(異跡)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학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교화와 형위(刑威)·주륙(誅戮) 중에서 교화를 우선시했다.

    따라서 그가 재상에 있는 동안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저서로는 〈번암집〉이 전하며, 〈경종수정실록〉·〈영조실록〉·〈국조보감〉의 편찬에 참여했다. 1801년(순조 1) 황사영백서사건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벽파 경주김씨 김한구(金漢耉, 1723년~1769년) 영조의 장인

     

     조선 후기의 외척으로 김선경(金選慶)의 아들이자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였다. 호조참판을 지낸 김한기(金漢耆)의 동생.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시호는 충헌(忠憲).

     

    유학으로 있다가 영조 35년인 1759년 딸이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이 되고 자헌대부 지돈령부사로 승진했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 돈령부영사로 특진하고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영조는 그에 대한 특별 배려로 자신의 명으로 철훼했던 성암서원을 복설시키기도 했다.[1] 그해 금위대장, 1763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홍계희·홍인한·김상로 등과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1764년 아들 김귀주가 왕과 친분이 있는 신하로서 당론에 관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자,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하여 함께 파직되었다.

     

     1766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복직되고, 1767년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벽파> 청송심씨 심환지 1730(영조 6)~ 1802(순조 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 할아버지는 교리 심태현(泰賢)이고 아버지는 심진(鎭)이며, 어머니는 부사 김이복(金履福)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문과에 급제,
    이후 교리·대사간·대사성 등을 거치면서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의리(義理)와 공의(公議)를 강조하는 격렬한 언론을 펼쳐 몇 차례의 유배생활을 겪었다.

     

    1793년(정조 17)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 대사성으로 비변사제조를 겸했다. 예문관제학·능주목사·규장각제학과 이조·병조·형조의 판서를 거쳤다. 그는 벽파의 선봉으로 남인계열의 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 소론계열의 서명선(徐命善) 등에 대한 비판과 공격에 앞장섰다.

     

    1798년 우의정에 올랐고 1799년 무본억말(務本抑末)을 내세워 금광의 채굴을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계열의 시파를 제거한 신유사옥을 일으켰으며,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자 시파세력인 김조순(金祖淳)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했다.

     

    또한 김관주(金觀柱)·정일환(鄭日煥) 등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탄압에 앞장서게 했으며, 권유(權裕)를 대사헌에 임명해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유도했다.

     

    그가 죽은 뒤인 1806년(순조 6)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대혼(大婚)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벽파>경주김씨 김귀주 1740(영조 16)~ 1786(정조 10).

     

    사도세자를 탄핵해 죽게 한 벽파의 영수.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영조의 장인인 오흥부원군 김한구(漢耉)이다. 여동생이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홍양해(洪量海)의 문인이며, 심낙수(沈樂洙)와는 동문 사이이지만 나중에 심낙수는 홍문관수찬의 자격으로 김귀주를 탄핵하다가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다.

    시파·벽파의 분립

    여동생이 영조의 계비가 되자 이를 계기로 20여 세에 음보로 벼슬에 올랐다. 1762년(영조 38) 아버지 김한구·홍계희(洪啓禧) 등과 함께 당시 왕세자였던 사도세자를 탄핵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도세자를 동정하던 시파(時派)와, 사도세자를 공격하고 영조를 두둔하던 벽파(僻派)가 생기게 되었다. 시파는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소론 측에 많았고,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이 중심이 되었다. 벽파는 주로 노론 계통인데 김귀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17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가 된 뒤, 여러 청환직을 거쳐 1767년 강원도관찰사·좌승지 등을 지냈다.

     

     1772년 공조참판으로 있을 때 청명류(淸名流)라는 정치적 결사가 발각되었는데, 이 결사가 영조의 탕평책에 역행하는 것이라 하여 유배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촌동생 관주(觀株)와 함께 이 일을 영의정 홍봉한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홍봉한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으나,

     

    영조가 죽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의 양자로서 그와 함께 홍봉한을 공격했던 정후겸(鄭厚謙)이 시파로 돌아섬에 따라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전날의 상소가 당시 왕세손의 외가였던 홍봉한을 공격하는 것이어서, 이는 곧 왕세손의 지위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홍인환(洪麟煥)·정이환(鄭履煥) 등과 결탁하여 정조를 해치려 했다 하여 흑산도에 유배되고, 1779년(정조 3)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84년 왕세자의 책봉 때 특사령으로 감등되어 나주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785년에 병으로 죽었다.

     

    <남인>여흥이씨 이가환 1742(영조 18)~ 1801(순조 1).

     

    본관은 여흥.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아버지는 진사 이용휴(用休)이다. 이익(李瀷)의 종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 천주교도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비인현감 등을 지냈다.

     

    그는 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 천주교도들과 교유했으며, 1784년 생질인 이승훈이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뒤에는 이들과 천주교 교리에 관해 토론을 하고 감화를 받아 천주교 교리서를 국문으로 번역하는 등 교회 일에 앞장서 반대파로부터 사교(邪敎)의 교주라는 말까지 들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도로 몰려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광주부윤이 된 뒤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개성유수·형조판서를 지내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사건 때 충주목사로 좌천되어 이곳에서도 천주교도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다시 천주교를 연구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학의 괴수라는 혐의로 투옥되어 옥사했다
    .

     

    천문학과 수학에 능통했으며, 저서로 〈금대유고〉가 있다.

     

     

    <벽파> 경주김씨 김관주 1743(영조 19)~ 1806(순조 6).

     

    홍봉한
    (洪鳳漢)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시벽(時僻) 분당을 초래했으며, 1802년에는 신유사옥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색인 : 노론). 본관은 경주. 자는 경일(景日).

     

    아버지는 김한록(漢祿)이다.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이후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772년 수찬으로 있을 때, 시파(時派)의 영수인 영의정 홍봉한의 척신정치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갑산에 유배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그의 상소는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해치려는 음모로 비판되어 시벽당쟁(時僻黨爭)의 원인이 되었다. 그뒤 복권되어 1793년(정조 17) 용궁현감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시파의 집권하에 말직을 전전했다.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僻派)가 득세하자, 승진을 거듭했다. 첨지중추부사·이조참판·이조판서·양주목사·광주유수를 거쳐,

     

     1802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김달순(金達淳)·심환지(沈煥之) 등과 함께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1804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철회한 뒤, 다시 실시하려 하자 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함께 반대하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1806년 시파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는 데 반대하자 사당(私黨)을 꾸려 정조의 뜻을 배신했다는 죄명으로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의 탄핵을 받고 경흥으로 유배가던 중, 이원(利原)에서 병으로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남인> 평창이씨 이승훈 1756(영조 32)~ 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창(平昌). 교명은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參判) 이동욱(東郁)으로 남인(南人)이다. 외조부 이용휴(李用休)와 외삼촌 이가환(李家煥)의 영향을 받았고, 기호남인(畿湖南人)의 젊은 재사인 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이기경(李基慶)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성호좌파(星湖左派)의 학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갈 때, 천주교에 몸담고 있던 친척 이벽(李檗)의 부탁을 받고 서학(西學) 서적을 구하기 위해 베이징[北京] 북천주당(北天主堂)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교리를 연구한 후 입교할 것을 결심, 이듬해 예수회의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1784년 3월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성화·묵주 등을 갖고 귀국하여 이벽·최인길(崔仁吉)과 함께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면서 영세를 집전했다. 다음해 명례동(明禮洞)의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이들은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비밀리에 복교하여 자치적인 교회활동을 개시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스스로는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다.

     

    1789년 10월 윤유일(尹有一)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자치적 교회의 존재를 알리게 하고 조상 제사에 대한 교리 해석과 성직자 파견을 부탁하게 했다. 그러나 베이징 교구장 알렉상드르 구베아(湯士選) 신부로부터 조상 제사의 불가 통보와 자치교회의 부정 회답을 받고 다시 배교를 했다.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재직중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제사 거부로 비롯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기경을 비롯한 유생들의 상소로 관직을 빼앗기고 투옥, 옥중에서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에서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입국하여 전도활동을 하자 교회와 다시 접촉했으나, 다음해 윤유일·최인길·지황(池璜) 등이 체포·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예산(禮山)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중 〈유혹문 ?惑文〉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 朱子白鹿洞衍義〉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793년 이후 기호남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한 채당(蔡黨)과 그에 반대하는 홍당(洪黨)으로, 천주교에 대한 입장에서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누어졌다. 채당 신서파에 속한 그는 반대파에 속한 홍낙안(洪樂安)·이기경 등에게 계속 공격을 받았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심환지(沈煥之) 등 벽파세력 및 최헌중(崔獻重) 등 남인의 일부 세력은 남인 시파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탄압(邪學彈壓)을 내세우면서 신유사옥를 일으켰다.

     

    이에 이가환·정약용·권철신·정약종·정약전 등과 함께 연루되어 같은 해 2월 26일 정약종·최창현(崔昌賢)·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과 함께 '구서전법'(購書傳法)·'밀통양인'(密通洋人)·'잠모가환'(潛謀家煥)의 죄목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되었다.

     

    이후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1866년에, 증손 연구(蓮龜)·균구(筠龜)는 1871년에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벽파>안동김씨 김달손 1760(영조 36)~ 1806(순조 6).

     

    본관은 안동. 자는 도이(道爾), 호는 일청(一靑). 아버지는 군수 김이현(履鉉)이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었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803년 이조·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이듬해 순조와 정순왕후의 총애를 받던 서용보(徐龍輔)를 제거하려던 유생들의 상소사건에 연루되어, 서용보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순조의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갈 때 불참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뒤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서구(李書九)의 뒤를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1805년 이서구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확립되면서 그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선조보감 先祖寶鑑〉의 편찬을 청했다.

     

    그는 벽파(僻派)로서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박치원(朴致遠) 등 시파(時派)를 공격했다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등 시파의 탄핵을 받고 홍주목을 거쳐 남해안에 유배되었다. 그뒤 강진현으로 옮겨졌다가 죽임을 당했다. 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시파> 안동김씨 김조순 1765(영조 41)~ 1832(순조 32).

              순조의 장인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초를 다진 인물.

    본관은 안동.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영의정 김창집(昌集)의 4대손으로, 부사 김이중(履中)의 아들이고,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대교를 지냈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서, 이조참의·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을 거쳤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금위대장 등을 거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1826년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에 〈풍고집〉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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