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보조자료
+ 유교문화와 한국시조문학의 대표적 인물 고산
+ 불교문화의 큰 맥을 이루고 있는 대흥사
+ 국토의 최서남단 땅끝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온 호남지역은
유배문화(고산,추사,다산,우암등)의 본산지로
임란중 충무공은 약무호남 시무국라고 했다.
(이충무공전서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서간)
전라남도 해남군은 동쪽으로는 강진, 동북쪽은 영암과 연결돼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3면이 바다인 반도 행태로 돼있다. 해남읍 1개 읍과 삼산면 화산면 등 13개 면으로 주민은 7만 9,000여명.(2011년 2월말 현재)
** 고산윤선도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현종(顯宗) 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녹우당 사적 167호 - 고산윤선도 고택
고산윤선도 고택 녹우당의 역사는 고산 윤선도((1554~1619)의 4대조이자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시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백련동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윤씨를 이 지역 재지사족으로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당시 해남에서 가장 큰 기반을 가지고 있던 향족인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며 분가를 하게 되자 백련동에 터를 잡고 그 가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조선중기에 건립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그 규모도 크며 구조 및 양식의 구성요소도 풍부하여 한국 상류주택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고가이다. 당대의 문헌이나 기문이 없어 그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가 없다. 다만 고산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해남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C 중엽에 시창된 건축물로 여겨진다.
+ 처음에는 99칸 집 지금은 55칸 남아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대왕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이 82세 되던 1668년 이 사랑채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 사랑채는 효종이 고산에게 지어준 집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던 것을 현종 9년(1668)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녹우당은 덕음산(德陰山)을 배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에 하나다.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 玄武)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 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문필봉)이 원경(朝山)으로 펼쳐져 있어 수려한 형국임을 말해준다.
* 녹우당 현판 - 녹우당(綠雨堂) 정관(靜觀) 운업(芸業)
* 고산사당 * 어초은사당 * 추원당 * 은행나무
* 고산 유물전시관 - 윤두서화전
+ 녹우당의 풍수를 거스리지 않고 한옥과 옛건축의 조화를 이룬 고산유물전시관에는 해남윤씨 어처은공파의 약600여 년 간의 집안역사가 고스란히 전시 돼 있다. 해남윤씨어초은파의 종가 댁은 전란이 일어나면 선조들의 유물을 지키고 보관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유물관 안에는 고산윤선도의 시문학과 공재윤두서의 자화상 및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삼대화가그림, 집안을 지키기 위해 눈물겨운 싸움을 했던 종부들의 글 등 약 5천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 녹우당 현판 - 녹우당(綠雨堂)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됐다는 이야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옛 선비들의 절개와 기상을 담아 신록의 대지에 성장과 동력의 영양분을 갖게 해주는 푸른 비’를 뜻하는 ‘녹우’를 당호의 이름으로 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녹우는 절기상 4월 20일 경의 곡우에서 6월 20일경 내리는 비를 말하고 있어 녹우당의 원림을 옥동 이서의 철학적 사고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사당(죽은 사람의 공간)
집안에 선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상을 중히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없었다. 따라서 집안 안에 사당을 두어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가 되면 산으로 이장, 시제로 제사를 대신했다. 사당은 주로 집 맨 뒤쪽에 위치한다. 1년 뒤인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 안사당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 사당은 순종 21년(1821)에 세웠으며
안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집으로 측면 반간폭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그 안쪽으로는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두었다. 구조는 막돌허튼돌쌓기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정면 퇴주만은 원주를 세운 4양구조의 납도리집이다.
+ 고산사당
어초은 사당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고산 사당은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4대조를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
고산사당은 전면에 3개의 문이 있는 정면 3칸, 측면1칸의 맛배집 건물로, 매년 ?월 ?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 어초은사당
어초은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반간폭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로는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전면의 퇴주초석은 상부를 원형으로 가공하였음) 방주를 세웠으며 (퇴주는 원주임)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시켰다. 가구는 1고주 5양가이며 도리는 장설사이에는 같은 간격으로 소루를 배치하였으며 공포는 쇠서의 상면이 복잡하게 층된 2익공양식이다.
+ 추원당
추원당(追遠堂)은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고산선생의 고조부(4대조) 어초은윤효정의 재각으로 현 종손의 조부인 윤정현(1882~1950)이 1935년에 발의하여 추원당을 건립하였으며, 묘비를 조석(鳥石)으로 세웠다.
시향(時享)은 음력11월 15일 어초은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宿食)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추원당 역시 녹우당 사랑채 건물처럼 처마에 이어 설비한 겹처마의 양식이 특이하다
추원이라 먼 조상이나 부모를 추모하여 정중히 공경을 다함을 뜻 한다.
어초은은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중흥시킨 인물로 녹우당 뒤 묘와 함께 녹우당 공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녹우당의 북쪽 숲에 위치하고 있다.
+ 은행나무
녹우당 집 앞과 전시관 뒤편에 3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아들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여 심은 것이라고 하며,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는 1982년에 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고 수령은 500년, 수고 20m, 둘레는 48m가량이다. 나머지 2그루 중 한 그루는 나무세가 아직도 고목이 되지 않은 채 크고 우람하며 한그루는 고목이 되어 몸통이 없어지고 가지부분만 약간 남아있다. 녹우당의 당호가 이 은행나무의 잎이 비처럼 쏟아진다 하여 ‘녹우당’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 천년고찰 - 대흥사(大興寺)
*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
* 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창건설
* 가장 한국적인 미소 - 대흥사 석가모니불
+ 두륜산이 와불의 형상
+ 대흥사 일원이 사적명승 제9호
+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표충사,대광명전,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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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한 호국도량이다.
+풍담 의심(1592-1665) 화엄종중흥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대웅보전 삼존불(보물 제1863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 대흥사의 창건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죽미기(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북암기(北菴記)』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23) 간행된『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역사를 총정리해놓은 중요 자료이다.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 일주문 옆 13강사비
* 부도전
+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 해탈문[解脫門] - 천왕문 대신 해탈문
2002년 건립.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
+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으며,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이다.
*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 심진교
금당천을 건너 침계루로 들어가는 다리로 금당천을 중심으로 남원 북원으로 나누어 진다
*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梁文)’과 ‘대웅전중건기(大雄殿重建記)’를 통해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 가장 한국적인 미소 - 대흥사 석가모니불
대흥사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은 가장 한국적인 미소로 깨달음을 얻는 그 순간의 감동과 희열을 너무도 완벽하게 표현해 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모든 이들을 껴안을 만큼 풍부한 감정이 묻어나는 미소, 그 미소 앞에서 우린 한없는 자유를 얻는다.
대흥사 석가모니 불상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조선 영조 때 작품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 때는 사상과 학문, 문화가 왕성하게 꽃이 피던 시대이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은 그 대표적인 경우로 당시의 자신감과 풍부한 예술성을 미소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 대흥사 대웅보전 석가모니부처님은 미소 때문에 가장 잘생긴 부처라고도 부른다. 이 잘생긴 부처는 영험하기로도 유명하다. 영험하면서도 어찌나 잘생겼는지 지금도 이 부처님의 영험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흥사를 찾고 있다.
*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다.
+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명부전(冥府殿) ++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
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 의 화재 뒤 20세기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화로는 1901년에 조성된 지장후불탱화가 있다. 그 밖에 1906년(광무 10)에 쓴 <두륜산대흥사명부전헌답기> 현판이 걸려 있다
+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구한말 미불체의 대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일 때 대흥사와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 응진당· 산신각(應眞堂·山神閣)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 1917년 헌괘되어 있음을 살필 때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진것은 아닌 듯하다.
+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ㆍ판관ㆍ사자ㆍ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ㆍ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 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 백설당(白雪堂)
북원 일곽의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 원래 북원에는 여러 채의 승방과 선당, 중료(衆寮)들이 있었음을 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현재 백설당의 규모를 보아 여러 채의 승방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 연리목 - 뿌리에서 두 나무로 자란 수령 500년.
* 천불전 보물 제1807호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께서 千佛殿을 중건하시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대흥사)스님들께서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분의 부처님 입니다.
千佛殿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으며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
+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에 표착 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 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 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千佛殿에 봉안된 옥 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경상도 신도님 꿈에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 줄 것을 현몽 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
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 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어 그 이후 유명한 기도처로 널리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며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에 표착 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 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 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알려진 千佛 기도 도량입니다.
이글을 접하시는 여러분들께서도 千佛殿 기도를 통한 영험을 성취 하시 바랍니다.
千佛殿 懸板 (천불전 현판, 조선후기 원교 이광사 친필)
千佛殿 柱聯 (1917年 오인당 안규동 전서 古 예서체 친필)
(世尊坐道場) 세존이 앉으신 이 도량에
(淸淨大光明) 청정한 대광명 빛나니
(比如千日出) 마치 천개의 해가 떠서
(照耀大千界)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이듯 하네
千佛殿 으로 들어서는 門인 가허루(駕虛樓, 懸板 글씨는 全州出身 蒼岩 李三晩先生 親筆 )문지방은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으며, 千佛殿 앞산의 悟道재 능선과 千佛殿 뒷산의 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하며, 또한 인간세상(此岸)과 부처님의 세계(彼岸)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르는 뜻이다.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낮은 기단(基壇)에 세운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기초(基礎) 위에 일부 괴목(槐木)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견고하게 보이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내4출목(內四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작(多包作)을 꾸몄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하였고 정교(精巧)한 국화무늬(菊花紋)·연화무늬(蓮華紋)의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左右夾間)은2짝이다.
내부 중앙에 목조(木造)의 본존불(本尊佛)을 봉안(奉安)하였으며 주위에 옥석(玉石)으로 조각한 천(千)의 작은 불상을배열(配列)한 것이 특이(特異)하다. 기록에는 순조(純祖) 11년(1811) 불탄 것을 동(同) 13년(1813)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순조 11년(1811)에 불에 탄 뒤 2년 뒤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 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 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 가허루(駕虛褸)
남원(南院)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
* 용화당(龍華堂)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에 준공하였다.
* 일로향실(一爐香室)
일로향실(一爐香室)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도 한 이 곳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데, 전면 좌측에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의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이곳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 특히 이곳의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지며, 추사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대흥사는 그 진본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 는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은 헌종 7년(1841)에 초의선사가 건립한 전각으로 보수과정중 1841년초에 초의스님이 짓고 단청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당시 전라수군절도사였던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와 소치 허유가 초의스님과 합심하여 당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의 방면과 축수를 위해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천장의 반자 단청문양과 공포 사이에 예스러운 벽화들이 은은한 고풍을 보여주고 있다. 본 전각에 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중앙부분이 위로 굽은 동형의 대들보 2개로 그 형상이 몹시 자연스러우면서도 특이하다.
여기 대광명전 일원에서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다선 일매의 선생활을 하며 쇠미해 가던 대흥사를 다시 한번 중흥케 하였다고 전한다.
보수과정중 1841년초에 초의스님이 짓고 단청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 동국선원(東國禪院)’
선방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으로서,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이 쓴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는 편액은 선원(禪院)에 걸맞는 편액으로 백지에 흑서로 반양각하여 추사의 꾸밈없는 필체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 표충사 (表忠詞)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끌씨까지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받았다.
한편, 서산대사의 유품인 금란가사, 발우와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금병풍 등이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ㆍ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ㆍ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다.
건물은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ㆍ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 성보박물관 -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국보308호) - 50%축소모형
❍경주에는 석굴암 본존불 - 대흥사에는 북암마애여래좌상
+천녀가 새긴 마애여래 좌상
얼굴이나 각 부위의 조각된 고부조(高浮彫)되어 있는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불상의 전체높이가 5.2m나 되는 거대한 불상으로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마애여래좌상은 4구의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연꽃위에 앉아있고 수인(손모양)은 항마촉지인(악마를 굴복시키는 수인)으로 석가여래가 모든 망상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자태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의 육계(肉髻)와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나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며 굵고 짧아진 목에는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손(手印)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 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등 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하는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대좌(臺座)는 11엽의 앙련(仰蓮)과 12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한 연화대좌로 불신(佛身)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頭光)와 몸 광배(身光)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三重圓)으로 꾸밈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火焰紋)가 장식되어 있다,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龕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북안마애여래좌상은(국보308호) 고려불교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사찰미륵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 미륵이란
미륵이라는 말은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로서 자씨(慈氏)보살이라고 불린다. 무승(無勝) 또는 막승(莫勝)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뒤를 이어 오실 부처님으로 현재에는 도솔천 내원궁에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시다가 56억 7천만년 후에 화림원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시고 3회에 걸쳐서 설법을 하시어 300억의 중생을 제도 하신다고 한다.
이 때 이 용화삼회에 참석하여 깨우침을 얻으려는 모임이 미륵하생 사상이며, 이 시간이 너무 긴 것을 알고 미리 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에 올라가 모시고 있다가 미륵부처님으로 내려오실 때 따라 내려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상이 도솔상생 신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미륵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서산마애삼존불중 좌우협시보살이 유명하다.
** 달마산 미황사
명승 59호로 풍광이 뻐어난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489m) 은 호남의 금강이라 일컬으며,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달마산은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현재 경내에는 해남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해남 미황사 응진당(보물 제1183호), 미황사 괘불탱(보물 제1342호)등 국가지전문화재 3점 있다.
+ 미황사 삼존불
대웅보전 중앙 불단에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이미타불, 약사여래불의 삼세불을 모셨다.
중앙석가모니불의 크기는 136cm이고 좌우 협시불은 이보다 조금 작다. 본존불은 볼이통통한 계란형의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낮은 육계와 반달형의 계주를 갖추었다. 이마에는 백호가 묘사되었고 작은 눈은 반개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명상에 잠긴 표정이다.
코와 입은 반듯하며 귀는 길게 목까지 늘어 뜨렸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 식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흐른 옷자락은 가슴아래서 U자형을 이룬다.
좌우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취한점만 본존불과 다를 뿐 얼굴의 생김새나 법의 착의 형식은 동일하다. 삼세불의 대좌는 3단의 중앙 불단위에 3개의 연화대좌가 올려진 팔각대좌이며 대좌의 문양은 화려하진 않지만 연화대좌에는 채색을 했으며 팔각대좌에는 금채를 하였다.
삼세불의 각각 앞에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약사여래불의 화려한 불패를 봉안하였고 후불탱화로는 1993년에 조성한 것으로 삼세불과 그 권속들을 묘사한 삼세불탱화를 모시고 있다.
❍달마산 금 샘 - 「동국여지승람」
+ 달마산은 기기묘묘한 산의 모습처럼 신비스러운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누른빛의 금가루가 떠있는 듯한 금 샘이다. 금 샘은 문바위 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쯤 내려가면 큰 바위틈에 있다. 마치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하나 떠보면 물만 떠올라 그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한다. 이 금 샘에 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전라도 낭주(郎主)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 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앉을 만 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 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