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3/9) 아들녀석의 생일과 주말이 겹쳤고.....
마침 딸아이도 요즘 대학원 졸업과 취직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한듯하여 마음 먹고 수원 나들이에 나섰다
학교 기숙사 앞
화단의 복수초가 따스한 봄날에 화사하기 그지없지만
아무래도 복수초의 노란꽃은 위 사진처럼 雪中이 제격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8시까지 외출을 나온 아들과 하루를 보내려는 스케줄이
자칫하면 따분하기 그지없을수 있는 일이건만
아들의 제안은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영화 한편 때리고 일찍들어가 푹~~쉬고 싶다"
헉~~그러고 보니 어느덧
제대를 4개월 남짓 남긴 고참이 되어 버렸고 일단 여기가 수원이니.....수원갈비의 역사 "화춘옥"
원래 계획은 영통동에 위치한 화춘옥 본점을 향하려 했으나
수원지리에 아둔함으로 적지않은 시간을 허비하고 찿은곳은 매탄동의 분점
하지만....본점이 아닌 분점을 찿은 실수는
항상 서글픈 주머니의 나에게는 그야말로 전화위복
아들한테는 쇠붙이를 먹어도 소화시킬 나이여서 질 보다는 양 일테고
나의 세대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군에서 제대하고 잠시 형수에게 얹어 살때
외항선을 타던 형이 휴가차 귀국했을때 처음으로 불고기를 얻어 먹었지만
형수의 눈치가 보여 그것도 실컷 먹지도 못했던 기역이 새롭다 ㅠㅠ
당시 형님의 수입이 대단했던 시기였건만 형수의 한마디.....
"이집 갈비는 정말 맛있는데 아직 우리한테는 갈비는 사치다!!!
이곳 매탄동 분점에는 모든갈비가 수입산의 보급형으로 가격이 저렴하여
마치 포천 이동갈비처럼 포식하고도 만족스런 계산서에 마누라의 얼굴이 활짝 펴졌고
딸아이는 "취직해서 돈 벌면 제대로된 화춘옥 왕 한우갈비 제대로 쏠께용 ㅛㅛ!!!"
수원에는 "수원갈비"라는 고유명사가 통할많큼 유명한 갈비집이 많다
왕조시대의 마지막 신도시인 수원(화성)은 정조가
수원성을 완성한후 도시경제의 활성화릉 위해
농민들에게 송아지를 무상 분양한후 3년후 분양한 송아지가 새끼를 낳으면 변제하게 하였는데
반납할 송아지를 거래하려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전라도의 소들이 몰릴 정도로 우시장이 활성화 되었다
이렇게 수원으로 소들이 몰려들자 전국 최대의 안성 우시장이 위축될 정도였으며
한때 활황의 수원 우시장에는 소를 매매하기 위해 매어 두는 말뚝이 10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소고기는 일반 서민들의 접할수있는 음식은 아니였다
소고기는 궁중에서나 너붓너붓 썰어서 육질을 부드럽게 구운 "너비아니 구이"정도
이후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후
조선소의 사육을 적극 권장하여 소의 사육수가 급격히 늘어나
1930년대에는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값이 싸지면서
불고기,냉면,설렁탕,갈비등 소고기 음식이 번창하는데
강릉에서는 국밥,딱국,비빔밥이 15전인 반면 갈비는 5전이였다고 동아일보는 기록하고 있다
허지만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소가죽을 군수물자로 사용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의 사육기반은 완전히 무너진다
이렇게 기반여건이 좋지 않을때
1945년 수원문 밖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왜과자를 만들어 팔던 화춘제과의 이귀성씨가
갈비우거지탕을 민들어 해장국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1956년부터 갈비도 구워 팔아
귀한 갈비를 먹을수 있는 부자들이 많은 수원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화춘옥
당진에서도 우리 세대들은 기역하고 있다
구시장에 위했던 커다란 초가집 "금풍옥"과
지금 국민은행 자리에 있었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 "신선각"에서 갈비를 구으면
그냄새에 지나가던 배고픈 서민들은 뱃속의 회가 요동치는것이 좋은건지 어떻건지? 애매모호했던 60년대말 그 시절을.....
"박정희 대통령은 4일 하오 진해에서 휴가를 마치고 귀경도중 박경호실장을 대동하고
대전에서 수원에 도착 영동시장네에 있는 화춘옥에서 박지사를 비롯 기관장들과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부지릉 헬리콥터와 자동차로 답사하는 도중에 예고없이 이곳을 들렀었다"
라는 기사가 1968년 1월5일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화춘옥의 명성은 절정에 달한다
지금과 달리 먹거리가 다양하지도 풍부하지도 않을 당시
절대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찿은집은 지역을 불문하고 유명세를 타게 된다
특히 박대통령은 국물이 특별한 국밥 종류에 달인급 마니아였는데.......
예산의 "소복식당", 국포의 "군포식당" 전주의"삼백집"
의령의"종로식당" 대구의 "국일따로국밥" 과 "상주식당"
해운대의 "금수복국"과 서울의 곰탕"하동관"이 대표적이다
(전주,삼백집 콩나물국밥)
특히 전주에서 경호원을 따돌리고 오전에 후딱 300그릇만 팔고 문닫는
욕쟁이 이봉순 할머니의 "삼백집"에 새벽에 들렸을때
"네놈은 어찌그리 박정희를 쏙 빼닮았냐느냐? 누가 보면 대통령일줄 알겠다!!"며
콩나물국밥에 올려주는 "수란 한개 더 먹어라!!는 소리를 들은 에페소드는 유명하다
화춘옥이 승승장구 하면서 수원에는 많은 갈비집이 문을 열지만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에 올라오는 길목에 위한 수원의 지리적 경제력의 경쟁력이 퇴색되는 반면
서울의 강남은 개발 바람이 불면서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수원 갈비집 요리사들이 강남의 '가든'으로 이직을 하면서
갈비는 한국의 대표 외식 메뉴로 발전 되지만 경쟁력을 잃은 화춘옥은 1980년 문을 닫는다
화춘옥의 갈비는 왕갈비(17cm)였지만
경제논리를 앞세운 강남의 갈비는 절반 이상으로 줄어 들었고
소금 양념법이 사라지고 간장 양념법이 일반화 되었고
식당 앞의 큰 화덕이 사라지고 손님 식탁 위에 숯불 또는 가스불이 식탁에 올려지는 변화를 맞는다
80년 화춘옥은 문을 닫았지만
화춘옥의 톡특한 맛과 비법과 급냉동과 급해동을 반복하여 육질을 부드럽게 한후
갖은 양념하는 삼부자갈비나 본수원갈비등 많은 갈비집이 원조논쟁을 일으키며 대형화를 거듭하고
여기에 "수원갈비"라는 대명사로 향토음식으로 정착시키려는 수원시의 노력이 더해져 오늘에 이른다
이렇게 수원갈비가 발전을 거듭하자
이를 지켜보던 이귀성씨의 후손들은 2000년 다시 화춘옥을 부활시켰지만 곧 문을 닫았고
재작년 2011년 다시 문을 열면서 3대 수원갈비 명성의 원조"新 화춘옥"이란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딸내미 아무래도 갈비는 반주가 곁들여져야 제맛이란다
약속대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편히 펴져 앉아 다시 한번 제대로 수원갈비 음미해 보잠!!!"
첫댓글 수원갈비의 역사가 깊네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되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