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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해녀 이야기
“저승에서 벌엉, 이승에서 썸수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제주의 춤꾼, 제주 춤예술원의 김미숙 대표가 준비하고 진행하는 해녀를위한 진혼곡, “숨비는 해녀, 춤추는 바다” 를 보러 성산읍 온평리 여마진게불턱을 다녀오기까지 해녀에 대한 생각은 돈 잘버는 직업으로만 생각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매스컴의 해녀이야기들에도 기억 속에 남은 건 별로 없었던 나는 고생되지만 돈 잘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으니...사실..연 1700만원정도 수입은 그리 큰 벌이도 아닌데..
온평리 여마진 게불턱에서 해질 무렵 보았던 멋진 공연과 가슴지릿한 김미숙 대표의 해녀에 대한 이야기, 공연을보러 온 해녀분들과의 이야기를듣고 까페에 글과 사진을 올리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희미한 기억 속 이야기들을 꿰어 맞추어 여러분들께 전하고 싶었다.
사실, 음식에 관심 많은 제주인으로서 제주의 대부분 음식들이 해녀와 연관 지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기에 육지의 물회가 소개될 때마다 제주해녀와의 연관성을 주장해 온 나로서는 이 기회에 좀 더 깊이 알고 싶었던 제주의 스토리들이었다.
해녀에 대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인문학 강의등에서 간간히 소개되던 것들이 이제는 많은 분들이 책도 만들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면서 기록하기 시작한 것 같다. 막상 글을 쓰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지 막막했다.
역사속의 해녀..
제주의 해녀는 최근 자료에 의하면 4천여 명, 그중 4백여 명이 구좌읍 하도리에 모여 있단다. 하도리에 해녀 박물관이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맑은 날의 하도리 풍광.. 이제서야 빛을 본다. 하도리에 까페촌이 많아지는 이유도 풍광이 좋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연들을 담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잠녀, 해녀의 또 다른 한자식 이름인 잠녜, 잠녀에 대한 기록부터 찾아보았다. 비교적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사진을 남겨 놓았다.
우리나라 역사기록에는 6세기경 삼국유사의 진주를 캐서 진상하였다는기록이 남아 있고 중국의 진수((陳壽, 233년~297년)가 쓴 삼국지 기록에는 일본에서의 해산물 채취를 기록했다는 걸로 봐서는 그 이전부터 해녀란 직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503년(문자왕 13년) 제주의 진주 혹은 패류를 잠수하여 해물을 채취했던 기록이 있고, 고려사 1276년(충렬왕 2년)에 원나라에서 제주의 진주를 얻으려 했으나 얻지 못하여 제주민의 진주를 빼앗아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단다. 기록에 의하면 해녀, 해남의 직업은 2,000년이 넘는 시간을 지속해온 오래된 직업이다. 해녀는 기량에 따라서 해녀를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 으로 나눈다. 월등히 뛰어난 기량의 사람은 대상군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상군의 기량은 수심 10여미터를 내려가서 2분여 동안 해산물 5~6개를 채취하는 기량을 가진 분들로 구분한단다.
제주에는 해녀만 있고 해남은 없었다?
제주에 오시는 많은 분들은 바다에서 일하는 해녀를 보면서 왜 남자는 하지 않을까? 궁금해 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제주의 남자가 게으르고 여자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는 논리도 편다. 정말 그럴까?
기록에 보면 두 가지 대표적인 사유로 인하여 해남은 사라지고 해녀만 남게 된다.
첫째 사유는 과도한 전복 진상이 그 이유인데 기록에 보면 전복을 따던 사람을 가리키는 건 ‘포작인’으로 어부이면서 전복을 따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로써 1694년경 제주목사 이익태의 ‘지영록’에는 미역을 캐는 잠녀가 많게는 8백여 명에 이른다. 깊은 물속 미역채취는 채복녀나 다름없다. 익숙하지 못하다고 핑게대며 위험을 피한다. 장차 전복을 잡는 사람이 없을까 우려하여 전복잡이를 권장, 잠녀에게 추인복(말린전복)을 일정량 나누어 주었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보면 17세기경까지 전복을 잡는 일은 남자들이 전담했었고 여자들은 미역을 채취하거나 해초 등을 채취하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여성들은 깊은 물속에서 전복을 잡는 것을 꺼려했다는 이야기임을 알게 한다. 물론 깊은 물속에 들어 갈 수 있음에도 전복진상이 힘들고 생활을 어렵게 하는 일이어서 꺼려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상세한 이야기는1601년 초 제주의 반란사건 후 민심이 흉흉하여 목사로 6개월여 내려와 있던 김상헌(1570~1652)이 쓴 『남사록』에 나오는데
“제주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많은데다, 관리들이 사욕을 채우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포작인들은 그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는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다. 때문에 제주 여자들은 포작인들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작인(浦作人)은 말그대로 전복을 따던 남자해잠를 가리키는 말인데 복작우(鰒作于)라고도 불렀단다. 이 시기 이후로 남자해잠들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사라진 이유도 살펴보면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다 한다. 지금도 제주해녀들에게는 포작인의 제주 말인 ‘보재기’라는 말이 남아 있어 어부이면서 전복을 따는 사람이란 뜻 이라고 한다.
전복을 따서 공납하는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1443년(세종 25)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기건(奇虔) 목사는 포작인과 잠녀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여 밥상에 전복을 올리지 못하게 하여 도민들의 칭송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1738년(영조 14)에 평역미를 설치하여 포작인의 역을 경감시키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헌종 9년에 포작의 부역을 맡기던 부역을 다른 곳에서 대행하는 조치가 마련되었지만, 포작인들은 관아 선박의 사공으로 차출되는 등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오랜 시간을 나라에 바치는 전복채취에 매달리고 한겨울에도 전복을 바치게 하는 등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다 도망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포작우는 사라지고 지금의 해녀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사유는 정부의 지나친 간섭이다.
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 구당사(勾當使)., 윤응균 “해녀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다. 물속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상어나 물고기의 공격을 피하려면 알몸 일 때가 가장 편안하다고 한다.
조선 인조(1623년~1649년) 때 제주목사는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나잠(裸潛) 조업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 남자의 잠업이 금지되어 해남은 없어지고 해녀 만 남게 되었단다. 실질적인 전복채취를 전문적으로 하던 해남, 해녀들의 입장에서 헤아리지 못하고 미관상, 도의상 좋지 않다는 생각에 나잠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는데 나잠의 풍습은 최근까지 일본에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나잠뿐만 아니라 남자 포작인이 사라진 시기는 1679년 정의현감이 작성한 ‘남천록(南遷錄)’에서 볼 수 있는데 “포작인 수가 대단히 많아 족히 진상에 응할 수 있었고 경신년(1620년) 이후로는 거의 사라졌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런 역사를 모르는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년 “섬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으므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 “관에 잠녀안(潛女案)이 진상하는 전복은 모두 잠녀에게 책임을 지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1843년(헌종 9)부터는 포작인이 부담한 진상부역은 예리처(禮吏處)가 대행하게 되고, 관아용은 민간에서 구입하게 되면서 제주해녀의 전복 진상은 모두 사라졌다.
헌종때까지 제주의 전복 진상은 생활을 할 수 없이 진상에만 매달리는 어렵고 힘들고 죽을 고생 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유 때문에 제주에는 해녀만 남아있고 보재기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해남이 등장하면 안되나 싶지만 체질적으로 해녀인 여자분들의 체지방이 많아서 물질을 견디는데 남자보다 더 유리하다고 한다.
해녀는 제주에만 있을까?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알 물새알 해녀대합실”
정광태씨가 부른 ‘독도는 우리땅’ 가사의 일부이다. 1982년에 발표한 이 노래가 벌써 40년이 훌쩍 넘었으니 아마도 작사를 한 분이 독도를 여러 번 방문하고 만들었을 것 같다. 독도에 해녀라니..가보지 않고는 알지 못했을법한 일이니까.. 정말로 독도에 해녀가 있었을까? 그분들은 주소지인 경상북도 출신들일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많은 기록이 나온다..
강원도, 경상도에 가면 제주해녀, 제주 바닷가에서 흔히 먹는 물회와 제주식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조금은 변형된 제주식이 아닌 현지화된 음식들과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도 만날 수 있는데 이 해녀는 언제부터 이곳에서 물질을 하게 된 것일까?
제주대학교 김영돈 교수의 논문에 보면 해녀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는 직업이라 한다., 제주의 해녀들이 육지로 퍼져 나갔고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어민들이 우리나라로의 조업이 늘었고 1880년대에는 일본 잠수기 어선 137척이 전복을 채취하는 사례가 있었고 잠수기 어업은 해녀의 채취량에 비해 월등히 높은 채취를 하게되어 곧 어장은 황폐화되었단다. 1895년부터 제주해녀들은 일본인의 돈벌이 목적으로 경상남도로 물질원정을 떠났고 이후에는 강원도,남해안, 함경도등 악조건을 견디는 출어를 떠나게 된다. 제주바다에 비해 육지바다-강원도는 차가운 물살을 견디는 고행의 연속이었단다.
곧 해외로의 원정도 늘게 되었고 제주해녀들은 일본의 해녀보다 월등한 기량으로 채취량이 많아 오사카, 칭따오, 대련, 블라디보스톡등지로 떠나게 되었고 일본으로의 물질은 해마다 1,500명 가량씩 떠나게 되었단다. 이후 일본은 유럽에서 수입하던 화약의 재료가 러일전쟁으로 막히게 되자 감태를 채취하는데 제주해녀를 동원하게되고 돈벌이를 위해 제주해녀의 절반이상이 출어를 하게된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인솔자는 제주의 해녀들이 일본으로 많이 진출하게된 이유로 돈벌이를 들기도 하지만 제주에 있었다면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위안부로 끌려갔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고 감태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정광태씨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해녀대합실은 한겨레신문 기사를 참고했다.
한겨례신문에는 독도에 진출했던 제주해녀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기록했다.
19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독도는 제주해녀들에게 ‘엘도라도’ 였다고 한다. 한림읍의 홍순옥씨는 ‘지금도 독도바다가 눈에 훤하다고 한다.
“올해로 꼭 50년 됐어요. 스물 되던 1964년에 처음으로 독도 물질을 다녔어요. 보통 3월 초에 들어가 4월 초 정도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눈 감아도 언뜻언뜻 독도 바다가 떠오릅니다.”
해녀들의 말을 들어보면, 해방 이후 제주해녀들의 독도 물질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주로 제주 서쪽인 한림읍 지역 해녀들이 독도 물질을 갔다. 한림읍 협재리 마을회관에는 1956년 건립된 ‘울릉도 출어 부인 기념비’가 있을 정도로 이곳 해녀들의 울릉도와 독도 물질이 잦았다. 나중에는 동쪽인 구좌읍 해녀들도 같이 나서게 되고 남쪽인 서귀포시 보목 해녀들도 독도에 들어갔다.
19살이던 1959년 김씨는 울릉도에서 제주해녀들과 함께 저녁에 배를 타고 출발해 이튿날 아침 독도 땅을 밟았다. “서도의 물골이라는 굴속에 물통이 있는데 사람 수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물이 나와~봐야 알아~ 해녀 36명과 남자 사공 10명 등 46명이 독도로 들어갔는데, 물통에 있는 물이 넘치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았어. 가자마자 물통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다음날 일어나보니까 물이 콸콸 넘치더라고. 안 보면 거짓말이라고 할 거야.” 동도에서 경비를 서던 경찰들은 빗물을 받아서 먹는 물로 사용하던 물탱크의 물이 바닥나면 배를 타고 건너와 물을 길어 가기도 했다.
독도의 강치와 해녀..한겨레신문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노래 전수생인 강경자(69·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씨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독도 물질을 했다. 동복리 해녀 10명과 한림 해녀 20명 등 30명의 해녀와 남자 사공 4명이 독도에 들어갔다. 강씨는 전복과 문어가 엄청 많았지만 잡지 않았다고 한다. 강씨는 “그때는 먹을 걸로 생각하지 않았다. 돈 되는 미역만 채취했다”고 말했다. 물질이 끝날 때 받은 돈은 당시 돈으로 2만원이었다. 강씨는 물질로 돈을 모아 오빠 학교 다니는 데 보태고, 옷도 사 입고, 반지도 만들었다.
제주의 해녀들이 육지로 출가물질을 나섰다는 기록과 동해안,서해안, 남해안을 두루 진출한 이야기 속에는 해녀들의 음식얘기도 포함된 걸로 많은 분들이 추측한다. 제주의 음식이 지금은 포항물회 , 해산물 물회로 널리 퍼지게 된 것..
다음 블로그 ‘내남없이’ 에 나오는 청산도 해녀들의 이야기이다. 제주에서 온 해녀들이 완도, 청산도의 해녀 일을 시작했음을 증언하는 말이다.
“제주도에서 이쪽으로 건너와 물질하다 70명 정도가 이쪽 남자들과 결혼했어요.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원래 고향이 전라도 사람들이지라우. 옛날엔 다들 어려웠응께. 그 때 애기 봐주러 가고 식모살이 갔다가 되돌아 온 해녀들은 제주 사람이 아니제.”
사진은 포항식 고추장을 넣은 물회
울산저널의 기사를 살펴봐도 울산지역 해녀는 분명 제주에서 이주한 해녀출신이라고 나온다.
“울산의 1세대 해녀들은 대부분 제주도 출신으로, 울산으로 시집을 오거나 출가 물질을 위해 삶의 터전을울산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역사기록에 따르면, 울산에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해녀가 존재했다.”
“1900년초부터 제주 해녀들이 한 둘씩 거제를 찾아 뿌리를 내리고 일가를 이룬다. 거제에 정착한 제주 해녀들이 다시 고향의 사람들을 불러낸다. 이렇게 모이기 시작한 거제 해녀가 250여명이다. 이들은 거제에서 그 특유의 강인한 삶의 궤적을 당당히 그려가고 있다. 거제 해녀 100년이 넘는 역사다.”
이렇게 대한민국 바다와 러시아 중국 일본까지 진출한 제주해녀들은 가는 곳마다 제주를 알리고 제주의 음식들을 퍼뜨리게 되었다. 가히 제주 해녀는 해산물 채취의 전도사였고 바다음식전도사였던 것이다.
지금은 흔히 맛볼 수 있는 ‘포항물회’는 이렇게 아프고 가슴 시린 제주 해녀사의 증거로 남아 뭍사람들의 여름철 별미가 되었다.
해녀의 노래
나는 몇 년 전 가을, 쌀쌀한 바람이 불던 ‘돌 문화공원’에서 지켜보았던 ‘양방언의 제주환타지’ 공연을 잊지 못한다. 일본에서 제일교포 2세로 태어나 아버지의 소원대로 의사가 되었으나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로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제일 거류민. 그가 만든 해녀의 노래는 제주해녀들의 요구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항일운동을 하던 시기에 제주민이 만든 가사에 일본노래의 곡을 붙여 불러오다 일본사람이 만든 곡조가 아닌 제대로 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차가운 바람에도 옛날 해녀복장을 하고 무대 위에서 양방언씨와 같이 공연하며 열심히 노래 부르던 해녀들의 모습을 또 잊지 못한다.
해녀의 노래 - 양방언 작곡, 현기영 작사
‘나는 해녀, 바당(바다)의 딸 / 만경창파 이 한 몸 내던졍
바당 밧듸 농사짓젠 / 열 길 물속을 드나들엄쪄
우리집 대들보, 나는 해녀 / 가슴엔 테왁 손에는 미역낫
밀물과 썰물, 해녀 인생 / 어서 가자 이어싸 물때가 뒈엇쪄…’ 중략
과거 해녀의 노래는 우도전흘동의 강관순씨가 부당한 일본의 해산물 횡포에 맞서 싸우다 옥중에서 만든 해녀의 노래이다.
비바리? 빗바리
‘일본해녀의 원조’인 제주해녀.
옛날부터 제주 여성은 밭에서 김을 매지 않으면 바다에서 물질을 해야 하는 운명에 순종하여 왔다. 제주 소녀들은 7∼8세 때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 12∼13세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두렁박을 받아 얕은 데서 깊은 데로 헤엄쳐 들어가는 연습을 했고, 15∼16세가 되면 바닷속에서 물질을 시작하여 비로소 잠녀, 즉 해녀가 되었다 17∼18세에는 한몫잡이 해녀. 40세 전후까지 왕성한 전성기. ‘옷을 입지 않고 맨몸으로 물질한다.’ 하여, “비바리”. 해녀들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뿜는 날숨이,‘숨비소리’. 휘파람 소리 같지만 이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삶의 소리.
‘비바리’는 원래 전복을 따는 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말 물질은 주로 여인들이 하므로, ‘해녀를 얕보아 이르는 말 그 의미가 축소되어 애기상군 ‘소녀’까지 낮보아 이르는 말. ‘계집애’나 ‘가시내’, 혹은 ‘조금 성숙하나 아직 미혼 처녀를 상스럽게 일컫는, “비바리” ‘조선시대 해도인’ 제주해녀를 없수이 여기는 말. ‘옷을 입지 않고 일한다고, 없수이, 여긴걸까?’ 원래, ‘비바리’ 어원은 ‘비+ 바리’로 분석된다. ‘비’는 12세기 계림유사 문헌에서 ‘복왈필(鰒曰必)’ ‘복왈필’의 ‘필(必)’을 ‘빗’ 또는 ‘비’로 읽을 수도 있다.
‘비’ 또는 ‘빗’은 제주방언 ‘전복’이란 뜻말. ‘빗창’은 전복을 따는데 사용되는 쇠갈고리. ‘암핏’은 전복 암컷이고 ‘수핏’은 전복 수컷. ‘수핏여’는 ‘수핏’이 많이 서식하는,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바다 이름. 빗여(전복이 많이 서식하는 물속 섬), 도두동. ‘바리’는 ‘꼬바리(꼴찌), 꾀바리(꾀가 많은 사람), 악바리(성미가 깔깔하고 영악스러운 사람), 하바리(품위나 지위가 낮은 사람)’ 등을 가리킨다.
불턱, 해녀들의 사랑방
불쬐는 장소를 ‘불턱’이라 하는데, 여기서 화제가 만발하게 된다. 요즘은 불턱이 거의 사라지고 현대식 탈의장이 해녀들의 휴식장소이다. 아직도 불턱은 바닷가 마을 여기 저기에 남아서 그시절 도란도란 이야꽃을 나누고 온 동네 뉴스를 전하던 해녀 사랑방시절을 그리워 한다. 불턱에도 상군, 어른을 모시는 자리가 따로 있다고 한다. 그 시절 해녀들에게도 불턱은 마을의 어른, 선배, 아이구분하며 더불어 살아가던 장소이다.
여마진 게불턱의 50~70년대 복장의 아리따운 제주춤예술원 해녀들..
세종 때 제주목사 기건(奇虔)이 초도순시하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거의 벌거벗은 여인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놀라 수행원에게 물었다. “이것 참 큰일이구나. 이 엄동설한인데도 발가벗고 바닷물 속으로 떼를 지어 들다니 세상에 이런 변고가 다 있는가? 제주에는 왜 이리 미친 여자들이 흔한고.”
수행원들이 해녀의 삶을 자세히 알렸다. 목사의 상에 올려지는 전복, 소라, 미역 등은 해녀들이 목숨걸고 채취한 사실을 알게 된 제주목사. 그후부터 기연은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해녀들이 목숨걸고 캐낸 해산물은 먹지 않았다.
정조도 수라상에 색다른 반찬이 눈에 띄어 물었다. 제주 해녀들이 목숨걸고 캔 진상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귀한 식품을 차마 먹을 수 있느냐?” 했다 한다.
조선시대 해녀의 물질 기량이나 의지는 초인간적 특별한 장비도 없이 바다속으로 20미터까지 들어가서 2분이나 견뎌내며 추운 겨울에도 각종 해산물을 캤다. 얇은 무명 천 하나로 몸을 감싼, 잠녀 깊은 물속에 들어 가는 것은 어려운 일. 잠녀들이 물 에 오래 깊이 가라 앉기 위해서는 물의 저항을 줄이려 천조각 하나도 생략해야 했다.
그러므로., 겨울 바다에서도 속곳 하나 만 입어야 했다. 물 속에서 나오면 몸이 퍼렇게 얼었고, 모두 떨며 불가로 모여 몸을 쬐야만 했다. “예전에는 참 고생들 많이 했어. 겨울에도 맨 몸으로 물질 했으니...”
제주해녀의 생활
마을에서 정한 금채기(禁採期)를 지나면 해산날이 가까워도 바다를 외면할수 없었다. 물질하다가 아기를 낳기도 하는데, 그렇게 얻은 자식을 ‘배선이’ (배에서), ‘길동이’(길에서), ‘축항동이’(갯가에서)라고 별명을 붙인다. 이렇게 해녀의 삶은 모질고도 치열하다.해녀의 생활은 바다에서 일하면서 내뱉는 ‘숨비기 소리’에 잘 표현되어 있다.깊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다가 숨이 가쁘면 빨리 수면으로 올라와 짧은 시간에 많은 산소량을 받아들이기 위해 ‘호오이 호오이’ 소리를 내면서 호흡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생명의 소리, 이 섬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소리이다.
그들은 마을 단위로 해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오랜 관습과 전통에 따른 불문율이 있다. 여자들은 여남은 살이 넘으면 바다로 나가 테왁과 망사리를 갖고 얕은 바다에서 물놀이처럼 조개를 캐고 미역을 딴다. 이렇게 시작하다가 더 나이가 들면 하급 해녀가 되어 갯가에서 가까운 얕은 바다에서 일한다. 상군(上軍) 해녀들은 이들에게 작업하기 쉬운 구역을 물려주고는 더 깊은 바다로 나가 작업한다. 그들도 예전에 선배 해녀들에게 이러한 배려를 받았다. 이렇게 해녀들은 능력에 따라 작업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것은 해녀 공동체의 관례이다.
해녀 사회에도 일종의 계급이 있다. 연륜과 능력에 따라 하군·중군·상군·대상군 해녀로 구분되고, 그에 따라 그 공동체 안에서 대우를 받는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위계질서이다. 하군 해녀에 대한 상군 해녀의 배려, 상군 해녀에대한 하군 해녀의 존경이 그 사회의 질서를 아름답고 탄탄하게 유지시킨다.이것은 엄격한 규범이어서 해녀의 작업을 규제하면서 해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해녀 수입은 집안 살림에 크게 도움이 된다. 밭농사만으로는 자급자족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집안에 큰돈이 필요한 경우에 해녀는 집을 떠나 타지에 가서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일해서 돈을 벌어오기도 한다. 이렇게 번 돈은 미혼자에게는 결혼 비용이 되고,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비나 결혼 비용, 또는 집안의 대소사를 위해 매우 요긴하게 쓴다.
일본의 해녀
일본의 지바현 미나미보소에 사는 박건치씨는 제주에서 넘어간 아버지의 기억을 살려 제주해녀가 일본에 진출해 물질을 알렸다고 전한다. –한겨레 신문.
조선시대 일본 해녀도 알몸 조업은 제주해녀와 다를바 없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제주해녀가 일본으로 출가하여 진출한 탓일까?’‘한일 양국이 비슷한 자연환경 탓일까?’
조선시대 유교관에 비해 개방적인, 일본 성풍속. 일본해녀는 일할때 전통적으로 웃옷을 입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해녀에 비해 일본해녀는 나이가 젊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시대까지는 여성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던, 일본. 1930년대까지 성풍습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 일본해녀는 카메라 앞에서도 꺼리낌없이 포즈를 취할 만큼 비교적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1930년대∼1960년대까지의 일본해녀(海女)는 장비 없이 팬티와 수경 만으로 바다속으로 들어가 제주해녀와 다를 바 없이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일본해녀의 조선 출가’ 진출은 제주해녀들이 일본으로 출가하여 물질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1932년 일본에 출가한 제주해녀 수는 1천 6백 명. 일본 지바현 보소반도는 아마 어업활동으로 유명. ‘아마’는 바다에 잠수하여 소라와 전복을 잡는 해녀. 일본해녀 어원은 “보자기” “챠무케”라는 고유어가 있다. 옛부터 해녀의 어업이 성행하였던 제주. 그 제주해녀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였던 것. 돈벌이를 위한 일본에 출가한 제주해녀가 57%.에 이르렀다고 한다.
“1943년 제주해녀는 일본에 왔지만 1944년부터는 감태 채취에 강제동원. 전복을 잡거나 하면 처벌된다”고 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에도, 제주해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4.3 항쟁으로 많은 제주민들이 일본으로 탈출해 왔기 때문이란다.
당시 일본해녀는 제주해녀로부터 잠수 기량을 배우게된다. 제주해녀는 “보소해녀”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인과 공존한다. 한 남편에 아내 몇명이라는 제주도의 전통은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에 출가한 제주해녀들은 나이를 먹고 이윽고 죽게 되면 일본 땅에 무덤을 만들어야 하였다.
일본 카모가와시 장흥원(쵸코우잉)란 절에는 1970년대 세워진 많은 ‘제주해녀의 묘’가 있다. 비석에는, “한국 제주도 출신” 등이라고 새겨있다. 고향이 제주도 임을 뭔가 남기려 하는 문자를 읽을수 있다. 이곳으로 이주한 전복업 종사 해녀들과 인솔 책임자의 무덤.제주 해녀들의 무덤 건립을 받아들인 사원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들은 일본에서 합법적인 체류 생활이 어려웠기에 일본 내에서 그들의 무덤 건립이 불허된 시대였던 때문. 주지 스님 - “죽으면 일본인도 한국인도 모두 부처입니다.” 가족 계보를 소중히 하는 일본인 후손에 의해 일본 출가 후 그곳에 묻힌 그들의 성묘는 행해진다. 제주인 출신 일본 수산업 개척 선각자를 기리고 있는 것.
해녀의 출가 물질은 1895년을 기점으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1895~1945년 동안 해녀들은 뛰어난 물질 역량을 바탕으로 한반도 전역, 일본, 중국,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대만 등지로 진출하였다.
살얼음이 채 걷히지 않은 바다에서 무명천 한조각 속옷으로 몸을 가리고 그 추운 겨울 바당밭으로 뛰어든 제주해녀. “숨비우는 소리는 살멍 죽는 소리여~” “물소곱에 사는 소리.칠성판을 짊어진 소리여~”
해녀들의 신앙과 영등굿
해녀들은 목숨 걸고 물질 하기 때문에 그녀들의 민간 신앙은 진지하고도 강렬하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제주 해녀들의 공동의례로서 절대 의례는, 영등굿. 대부분 어촌에서는 어촌계 중심으로 영등굿을 한다. ‘음 2월 1일~2월 15일’ 어부와 해녀들이 함께 참여하다.
영등굿은 그해의 풍어를 기원 관(官)과 주민이 모두 어우러져 축제의 향연을 베푸는 잔치이다.
“영등할망”영등신
영등굿의 주된 신은 영등신으로 ‘영등할망’ 여신이다. 강남 천자국 또는 외눈배기섬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신물질이나 어로 활동의 안전, 해산물 풍요를 관장하는 신. 개인 의례로는 음력 정초 ‘할망당’에 가서 빌거나 바다에서 용왕에게 비는 ‘지드림’을 행하기도 한다. 영등굿이 끝난 때이거나 새해가 되어 물질을 시작할 때 밥이나 쌀을 종이로 싼 후 실로 묶어서 바다에 던지는 것을 일컬어 ‘지드림’ ‘요왕신 & 바다에서 죽은 영혼’에게 바치는 조그마한 정성이외에도 구좌읍 동김녕리와 안덕면 사계리는 ‘잠수굿’ 의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제주 해녀 수천명이 비창을 들고 투쟁했다. 비창은 전복을 채취 할 때 사용하는 쇠갈고리.
1932년 약 3개월에 걸쳐 궐기한 연인원 17.000 여명. 권익을 위한 여성 어민들의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규모였다.
조선시대 제주해녀 조합사건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백명이 세화리 장터에서 시위행진 면장 강홍칠이 신임 도사 ‘다구치’와 면담약속 후 오후 5시 해산 다구치가 세화리를 방문·시찰하는 날이자 해녀조합이 패류의 지정판매를 실시한다고 공고한 1월 12일, 640명 해녀들이 모여 시위.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연설을 통해 조합에 대한 불만을 성토 동시에 20명 해녀 대표는 세화리 주재소 안에서 다구치와 교섭. 해녀들이 주재소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분위기에서 다구치는 해녀들이 요구한 ‘일체의 지정판매 절대 반대’ 등 12개의 요구조건을 5일 이내에 실현시킬 것을 약속했다.
‘한미 연합’ 남한정부 수립과정에서 벌어진 사태. 사태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제주도민에게는 비극이었다.
4.3 비극은 제주도민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 유족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4.3 비극은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제주도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농민항쟁 진원지였다.
제주도민은 자신들이 직접 제주도를 만들어 가길 원했다. 그러나, 미국과 우익은 물리력을 사용해 진압하려 했던 것.
제주도 4.3 항쟁은 여순 반란사건을 불러 일으켰고 여순 반란사건은 지리산까지 그 후유증이 확산된다. 1950년대 전후 지리산 ‘반란의 역사 진원지’는 제주도.
제주해녀들은 19세기 말부터 전국 여러 해안으로 출가. 또 객주(客主)의 인솔에 따라, 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랴오둥 반도’의 다롄[大連],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 1920년대부터 8·15해방까지 일본 각지에 약 1,500명,한국 본토 연안에 약 2,500명이 출가한 것으로 전한다. 그 옛날 앳띤 소녀들이 지금은 주름꽃 80노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할망바당을 향해 힘이 솟는한, 바당 밭으로 뛰어든다. 그것은 삶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최고 9,000명까지 이르렀던 해녀는 최근 급격히 줄어 몇백 명에 지나지 않고 있다. 마을마다 영등굿, 잠수굿을 벌여 풍어를 비는 해녀들. 제주도 해녀들 사이에서는 노를 저으며 부르는 민요 ‘해녀노래’가 전해져 오며 민속놀이 해녀놀이가 있다.
일본해녀의 반라 모습에서 찾아본 조선의 여인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난한 평민집안들의 옷차림이 특히 심하였단다. 또다른 자료에서는 과거의 해녀들이 일본의 아마처럼 반라로 물질을 하지는 않았던걸로 보아서 다른 이유로 가슴을 드러내었다는이야기도 있다. 결국 일본의 반라는 문화적인 차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 후 관헌 측에서는 해녀들의 배후로 ‘민중운동협의회’라는 비밀결사의 구성원을 검거 이에 해녀들은 호송중인 차량이나 주재소를 습격했다. 그 이후에도 청년들의 연행은 계속 이어져 남자 43명, 여자 35명 총78명이 검거되었다.
제주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농민항쟁의 진원지. 물론 사회불의에 맞서 싸우는 항쟁정신으로 이어져왔다.
1800년대 임술년 농민항쟁, 방성칠의 난, 1901년 이재수 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 그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난 4.3 항쟁. 1948년 4.3 비극은 제주도민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 유족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4.3 비극은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1949년 봄까지, 제주도 유격대는 정부의 골칫거리 반란을 종식시키려 정부는 일련의 조치를 결정했다. 유재홍 대령이 지휘하는 특전사를 제주도로 파견한 것 이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회복을 과시하기 위해 이승만이 방문했고 5월 10일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날. 유권자 96%가 선거에 참여하였지만, 투표자 수는 적었다.
제주도 두 개 선거구 중 을 선거구에서 기표한 자는 5,766명 선거인 수가 줄어든 것은 아마도 폭동으로 인한 섬 인구 감소, 투옥된 게릴라 용의자 및 공산주의 동조자에 대한 공민권 정지때문이다.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가 출간되었다.
‘통사로 살피는 제주해녀’ 출간을 위해 유철인(제주대 철학과)교수, 정광중 (제주대 교육대) 교수, 좌혜경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원,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책임연구원, 고미 제민일보 ‘제주잠녀’ 기획팀장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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