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윤태근
한 동안 소식 끊겼던 동생이 겨울바다 사진과 함께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울릉도의 망망대해입니다. 지금은 어느 회장의 별장을 짓는 건축현장에서 꿈속과 현실을 오가며 뒤늦은 인생 공부 다시 하고 있습니다. 이곳 일도 오늘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거무스름 그을린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여름이다. 잠깐 집에 다니러 온 동생과 술잔을 마주했다. 이러저러 이야기 끝에 동생은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삼십여 년 몸 담았던 회사가 파산을 했다. 퇴직금 한 푼 없는 백수가 되고 보니 손에 쥔 것이라곤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 한 채가 전부. 아직 대학에 다니는 막내를 생각하며 미친 듯 사방을 두드려야 했단다.
“회사 밖 세상을 너무 몰랐던 죄였던가요? 어디고 단단한 벽이었지요. 기술 자격증 하나 준비하지 못한 자책 속에, 밤마다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으니까요.”
끝내는 새벽 인력시장을 찾았다. 공사장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종일 삽질, 망치질을 하거나 벽돌 짐 지기를 두어 달. 도배하듯 파스를 붙이며 온몸으로 버텼으나 공치는 날이 다반사였다.
우연의 필연이었을까. 농촌체험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평생 농사를 짓던 부모님과 고향이 떠올랐다. 농협과 협약된 프로그램이라고 했으나 단순 인력시장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편안했다.
경북 청송의 한 과수원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머잖은 곳에 주왕산이 마주 보이는 산골로 담배 한 갑, 라면 하나 구하려 해도 이십여 리 나가야 했다.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팀을 이루었다. 익어가는 사과에 햇살을 가리는 나뭇잎도 따내고 과수 아래 검정 비닐을 덮는 작업을 했다. 저녁식사는 합숙소에서 손수 지어야 했다. 산골의 밤은 쓰나미 같이 몰려왔으나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숭숭한 도시의 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시간이었다. 몸을 눕히자마자 어느 새 아침이었으니까.
일을 따라 전국으로 옮기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충청도의 인삼밭, 제주도 귤밭, 강원도의 고랭지 채소밭. 남해안의 팬션 건축현장. 어디에서고 스치고 만나고 헤어졌다. 모두 과거가 없는 것처럼 현재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렇다고 미래를 말하지도 않았다. 어디에 가야 일자리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이럴 때만 내일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더란다.
신혼 초, D시로 발령을 받았을 때다. 젖먹이를 들쳐 업은 아내와 단칸 셋방에서 살았다. 방문을 열면 연탄아궁이 하나인 허름한 부엌. 아무리 조심을 해도 연탄가스에 시달렸다. 두통을 달고 살았다. 밤새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어느 날인가 끝내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P읍으로 자리를 옮기며 식구도 늘었다. 방 두 개짜리 아담한 단독주택을 마련했다. 문패를 달면서 남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두 애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학급 수석을 하는 큰애를 위해서라도 도시로 옮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어렵게 서울 변두리 낡은 빌라 삼 층에 둥지를 틀었다. 비로소 아이들에게 공부방 하나씩 줄 수 있었고 백 여 리 출근 버스 안에서 세상을 다 얻은 듯 가슴을 폈다. 이러구러 지금의 아파트를 마련할 때까지 몇 번 더 이삿짐을 싸야 했다. 이삿짐을 싸는 일엔 자신이 있다고 아내는 지금도 장담을 한다.
얼마 전이다. 모임장소에 한 친구가 굳이 자가용을 몰고 왔다. 이틀 전에 뽑았다는 고급 승용차가 번쩍거렸다. 대중교통이 편한 식당인데 아무래도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중고 소형차를 시작으로 몇 차례 차 바꿈을 하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 초원을 이동하는 몽골사람들이 떠올랐다. 좋은 목초지를 따라 옮겨 다녀야 하는 그들의 삶. 혹여 우리 모두 그들을 닮아 있는 것 아닐까? 하나같이 자기만의 새로운 풀밭을 좆아 이리저리 바쁜 현대인들….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제 갈 길로 분주하기만 한데 길 건너 3층 건물의 작은 간판 하나, 허기진 이들이 드나들었을 <개미 인력>이 거기 있었다.
내일은 또 어느 목초지를 찾아 동생은 서성이고 있을까?
첫댓글 선생님의 주옥 같은 작품을 읽고나니 '눈물은 왜 짠가?'가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