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의 애지문학회 카페에서
―정영선, 「빨래」
―조옥엽, 「침묵으로 가는 계단」
―박주용, 「부여씨의 이력」
빨래
정영선
슬픔이 탈수된 난닝은
시들시들 마른다 방안 건조대에서
햇빛 없이
바람 없이
꿈 없이
홍콩 뒷골목 아파트
수건, 팬티가 창밖 내민 긴 막대에 매달려
아슬아슬 곡예한다
바람이 흔들고
햇빛이 잡아주고
먼지가 매만지고
에너지가 넘친다
키르키스탄 벌판, 유르트에
둘러진 밧줄에
꽁꽁 찡겨 있는
헌 내복
눈발에 적셔지다
낡은 햇살에 꾸들꾸들 말려지다
문명의 강풍이 데려가지 못하는
문명 무풍지대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 같은 거
---애지 가을호에서
침묵으로 가는 계단
조옥엽
철문을 열자 여행을 마무리한
고인이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반듯이 누워있다
갑작스러운 여행길에
할 말을 다 못하셨는가
붉은 입술이 삐죽이 열렸다
재출항이 불가능한 폐선 한 척
엔진은 작동을 멈추고 연료도 바닥을 쳐
고요의 극점을 달리고 있다
장례지도사는 가난해진 몸피 채우듯
혼자 견딘 수십 년의 공허를 메우듯
몸을 꽁꽁 묶은 뒤 포장을 한다
목에 단추 하나 채우는 것도
답답해하시던 고인이 미동도 없다
누군가의 환심을 사려 밤낮없이
끌어모으던 풋풋한 향기도
마음 씀도 깡그리 삭제한 고인
누구 하나 여행기를 쓴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주검을 앞에 두고
일제히 숨을 죽인 영안실
영원 속으로 침잠한 사자의 모습에
자신들의 내일을 포개보던 창백한 얼굴들
살아온 시간의 질량만큼 무거워지는
침묵의 계단을 내려가는 중인가
고개 들 줄 모른다
----애지 여름호에서
부여씨의 이력
박주용
황산벌에서 온 비보는 수신인을 적지 않았다 오만 대군으로 밀고 들어오는 덤프트럭에 오십cc 스쿠터는 속수무책이었다 거드는 말에 기가 산 트럭 운전수는 부여씨를 몰아세웠으나 노을 너머 별빛만 헛바퀴에 얹힐 뿐이었다 결국 경찰은 씨의 과실로 결론지었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씨는 수천 마리의 마력 뽐내며 세상 폼 나게 누볐다 일본국 나라현과 중국 남조까지 영역 넓히기도 하였으나 세파에 휩쓸려 소읍인 사비로 되돌아와야 했다 파산한 집안에서 불알 한쪽만 남은 씨에게는 단 몇 마력의 스쿠터 한 대가 유일한 살붙이였다 그래도 그놈 데리고 산성 주위 왕왕거릴 때면 왠지 모를 힘 불끈 솟기도 하였다
씨를 배웅하러 가는 병동의 복도는 으스스했다 염을 하는 내내 부러진 목뼈까지 은핫물이 차올라 지켜보는 속눈썹이 더욱 음습했다 별빛이 영안실 가득 채워지자 씨가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였다 먼 친척인 낙화가 시린 발목을 주검 안쪽으로 슬며시 밀어 넣어 주었다 순간 유품이 바깥쪽으로 툭, 떨어졌다 천년 넘게 밀린 백제국의 납세 고지서였다
씨의 흰 발목 데리고 가는 백마강도 유난히 절뚝였다.
박주용시집 『 복숭아뼈는 늘 붉을 줄만 알았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