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一枝庵)가는 길
금번 여행의 목표는 진도의 「운림산방」과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인 「세연정」, 해남의 「녹우당」, 그리고 대륜사(지금은 대흥사)의 「일지암」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이에 더하여 「다산」과 「혜장」선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백련사의 동백 숲과 산책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광주·송정역에서 동생과 친구부부를 만나 나주로 이동하여 나주곰탕으로 유명한 「노안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육이 두툼하고 맛이 있어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지 알만하였다. 식후에 인근에 있는 나주목(羅州牧) 관아의 대표적 건물인 「금성관(錦城館)」일대를 구경하였다. 과거 천년 동안 지방을 다스리는 왕권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객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고 한다. 「금성관」 편액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초서(草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의병장 「김천일(金千鎰,1537~1593)」선생이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장남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애국충절의 고향이기도 하다.
목포를 경유하여 ‘울돌목’이 있는 진도대교를 건너 첨찰산(尖察山) 자락에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아갔다. 이곳은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이 그림을 그렸던 화실이다. 주변의 봉우리에 아침과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극심한 가난을 이겨낸 손자 「남농(南農) 허건(許楗)」이 복원, 국가에 기증하였다. 「남농」은 한 집안 사람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 함께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일구며 남도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진도에서 태어난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28세 때인 1835년에 해남 대둔사(오늘의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만난 것은 일생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안내와 보증으로 해남에 있는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에 가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화첩을 빌려 공부하였다. 1839년에 「초의」는 「허련」을 자신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인 「완당 김정희」에게 소개하였다. 원래 「초의」와 「완당」은 1815년에 「다산(茶山)」의 아들인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의 소개로 만났다. 혹은 「초의」가 수락산에서 「해붕(海鵬)」대사를 모시고 있을 때 「완당」이 「해붕」을 찾아와 만났다고도 한다. 여하튼 이 둘은 동갑내기로서 금란지교를 맺어 「초의」는 종종 좋은 차를 「완당」에게 보내 주었고, 「완당」은 이에 답하는 글씨를 써서 보내주었다.
「초의」의 편지에 동봉된 「허련」의 그림을 본 「김정희」는 그림솜씨를 칭찬하며 빨리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아낌없는 가르침을 받았던 수제자가 되었는데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를 가 있는 동안에 세 차례 방문하여 글과 글씨, 그림 등을 배웠다.
한마디로 남종화는 글을 읽는 선비 즉 문인에 의해 그려진 문인화요, 북종화는 직업화가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남종화의 대표적인 화론은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인데 이는 시(詩) 서(書) 화(畵)가 한데 어우러진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를 주도했던 「김정희」로 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났다.”는 극찬을 들을 만큼 「소치」는 빼어난 화가였다.
「운림산방」은 「소치」의 화맥(畵脈)이 2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걸출한 화가를 배출한 이 나라 문화예술의 산실이다. 「소치」의 원래의 거처였던 초가집과 영정실, 작품이 전시된 1관과 후손들의 작품이 있는 2관 등을 둘러보았다. 「소치」가 말한 도서이정(圖書怡情 :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니 마음이 즐겁다)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곳이다.
바로 인근에 있는 쌍계사(雙溪寺)를 둘러보고 다시 해남으로 나와 미황사(美黃寺)에 들렸다. 미황사는 해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자리한 사찰이다. 구도적으로 산과 전각들의 배치가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면서 사찰 뒤편에 보이는 달마능선의 바위산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광인데 오늘따라 날씨가 흐려 아쉬웠다. 산 정상에는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여기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일몰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라 한다.
다음 날에는 완도의 「화흥포항」에서 배를 타고 40분을 항해하여 노화도의 「동천항」에 도착하였다. 가는 동안에 바다에 펼쳐진 전복과 김 양식장의 빼곡한 각 종 시설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다가 주는 천연의 선물을 가꾸어 이 나라 양식의 거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현장이었다. 잔잔한 파도에 비치는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은 마치 통영에서 욕지도로 가면서 느꼈던 바로 그 풍광이었다.
배에서 내려 처음으로 간 곳은 「세연정(洗然亭)」이었다. 1637년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에 지은 정자의 명칭이다.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자연스럽게 바위와 나무 그리고 물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한 폭의 정원을 연출하는 곳이다. 「고산」이 종종 휴식과 활쏘기 등을 하러 온 곳으로 사람과 자연이 한 몸이 되기에 충분한 곳 이었다.
이 곳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 가면 「고산」이 살았던 「낙서재(洛書齋)」가 있다. 「고산」이 입도(入島)하여 사망할 때 까지 살았던 집이다. 바로 인근에는 그의 5번 째 아들인 「학관」이 살았던 「곡수당(曲水堂)」이 있다. 하루에 세 번씩 아버지에게 문안을 하러 건너다니던 「일삼교(日三橋)」가 바로 옆에 있으며, 맞은편의 산 중턱에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절벽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로 이곳에서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곳에 올라가자니 상당히 가파르고 험한 돌길이라 제법 힘든 길 이었다. 그 옛날에 이곳을 오르내리던 「고산」의 체력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석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은 가히 천하일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였다. 교통도 불편하고 정보도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이곳을 찾아 거주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였다.
서둘러 시간을 아껴서 다음 행선지인 백련사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강진만과 막 무르익어가는 보리밭을 바라보면서 「만경루(萬景樓)」에 올라 한층 새싹을 키워내는 배롱나무를 감상하였다. 루(樓)의 창문을 통해 본 주변은 그야말로 비교할 데 없는 선경이다. 인근의 동백 숲을 지나 오랜 차 밭을 끼고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다산」과 「혜장」선사가 이 길을 거닐면서 『주역』을 논하고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구하던 길이었다.
항상 이곳에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마치 스스로가 두 분의 현자가 되어 문답을 나누는 곳이다. 각박한 세속에서 벗어나 선경을 거닐며 또 다른 구도의 길을 걷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면서 어찌 닮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다산」이 멀리 귀양을 간 형을 그리워하며 올랐던 곳에 후대가 세운 「천일각(天一閣)」에 잠시 올랐다가 「다산초당」일대를 들러보았다. 복원을 하면서 당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건물을 지어 억지로 현판을 붙여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도 원래의 장소를 찾아 남아있는 유적이나마 관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숙소로 복귀하면서 강진만을 끼고 「민속박물관」과 「청자박물관」 길을 따라 마량까지 내려가 장보고 다리를 건너 고금도로 들어갔다. 계속하여 완도의 숙소까지 연결된 다리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전복으로 안주를 삼아 어제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래와 시와 악기연주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특히 매제가 준비한 『어부사시사』를 윤독하는 시간은 뜻 깊은 덤이었다. 다음 여행 시에는 국악 창(唱)을 각자 준비하고, 진즉에 묘향산의 보현사 등을 다녀온 친구는 경험담을 들려주기로 하였다. 언젠가 생전에 금강산 구경의 기회가 오길 바란다.
마지막 날에 대흥사의 「일지암(一枝庵)」에서 「법강」 스님과 반갑게 해후하였다. 먼저 일행은 「일지암」의 유래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일지암」의 현판 글씨가 「추사」의 필체를 닮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고 하였다. 글씨를 쓴 「강암」 선생은 친구의 선친이고 그 역시 명필이니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하였다.
그 유명한 ‘초의차’를 마시면서 『주역(周易)』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 다양한 담론을 나누었다. 다암(茶盦)이란 글씨의 유래와 ‘초의차’의 제작 방법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더불어 「초의」가 지은 『동다송(東茶頌)』과 중국의 ‘보이차’나 일본의 차보다 더 유명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금년 들어 처음으로 따낸 잎으로 만든 ‘초의차’는 그야말로 향이 좋고 뒤끝이 깨끗한 느낌이었다. 이 차는 순전히 스님들의 노력으로 가꾸고 제조한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최고의 명품으로 판매용이 아니라고 한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본 사찰로 내려와 느티나무 한 뿌리에서 뻗은 연리지를 보았다. 이어서 대웅보전, 무량수각, 가허루, 천불전 등을 구경하였다. 잠시 「성보박물관」에도 들려서 진귀한 유물을 살펴보았는데 「서산대사」의 유물은 공사로 볼 수 없었다. 이곳에 오면 당대의 최고 명필이었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와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글씨를 한 번에 볼 수가 있다.
이어 「무위사(無爲寺)」로 가는 길에 「녹우당」을 찾아 갔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아직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수령이 5백년이 넘는 은행나무와 3백년 된 소나무 등은 유학과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듯 전통을 계승하는 후손들의 정성 역시 가득하다. 더구나 이 집안은 화가들이 즐비하고 무엇보다도 「다산」의 외가이기도 하다. 「다산」의 어머니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손녀였다. 휴관이라 전시실은 갈 수 없었다.
이어서 월출산 아래에 자리한 「무위사」를 찾아갔다. 조선 시대 초기의 건축물인 맞배지붕 형식의 극락보전 건물이 유명한 곳이다. 법당 안 『아미타불』 뒤로 파랑새가 그렸다는 『아미타삼존도』가 있는데 조선 초기 불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법당 뒷벽에 그려져 있는 『백의관음도』도 관음도 중에서 오래된 수작으로 손꼽힌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역시 기차로 귀가하였다. 여행 중에 이 나라 지성사(知性史)의 아름다운 단면을 보았다. 「완당」은 생전에 「다산」의 아들들과 교류했고, 「다산」과는 『주역』에 대해 논의한 편지를 보냈다. 「완당」은 「혜장」선사와는 만나지 못했으나 「혜장」이 『주역』을 읽는 초상화에 이를 찬미하는 글을 써서 초상화위에 붙이고 가까이 두고 지냈다. 여하튼 「초의」선사를 중심 고리로 하는 남도 예맥의 빼어난 진수를 보고 배웠다. 「초의」와 「완당」, 「소치」, 「윤선도」의 후손, 「다산」과 「혜장」선사 등의 따뜻한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시와 학문과 차를 통해 위대한 유학자와 선사가 만나고 헤어졌다. 그 과정에 남은 문화예술은 어쩌면 거목이 남긴 한 줌의 여남은 앙금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날이 갈수록 우리 전통 화풍의 맥이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절감하였다. 동시에 세상은 서로 서로가 인정하고 가르치면서 이끌고 밀어주어야 큰 인물이 성장함을 재인식하였다. 물론 거대한 준봉이 있어야 작은 봉우리와 골짜기도 생기는 법이니 누군가는 앞장서서 고봉(高峰)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깊은 학식과 더불어 재능도 구비해야 하니 참으로 기대난망의 어려운 과제이다. (2024.4.24.작성/5.1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