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시선과 그 반향 속 문장들
-임혜주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김두례 《드라이 플라워》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사람마다 바라보는 지점도 다를뿐더러 이입된 풍경은 사유의 밀도를 통해 또 다른 형용으로 문장 속 형상을 이룬다. 흔히 사물의 파동으로 혼재된 경험들이 또 다른 변용과 상상력을 통해 시적 완성으로 표현된다는 의미다. 언어의 창조성에 대한 시의성을 정의해 볼 때 쉽지 않은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은 사유를 상상력으로 전환해 가는 시인의 집요한 열정이 넘친다 해도 시도 때도 없이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결정적인 순간을 위한 평소 세심한 관심과 지속적인 탐색으로 얻어낸 고통의 결정체는 노력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마다 추구하는 시의 방향성이 다를뿐더러 그 지향하는 목적의식도 같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동일한 계절에 발행된 시집이라 쳐도 시집 속에 상재된 시 세계는 개별적 사회의식을 문학으로 구체화한 표징이다.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진 시공간에서 체험도 각기 달라 대상과 사유는 독특한 개연성으로 나타난다. 그만의 남다른 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임혜주 시인의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와 김두례 시인의 《드라이 플라워》를 통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회 제 현상과 관심에 대한 가치가 사유로 포집되어 어떻게 문학적으로 환기하고 반영되는가를 살펴보려 했다. 시인의 시선적인 고뇌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보편적 유의미를 세계에 부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따뜻한 삶에 대한 지점의 진전과 심층에서 발현한 진의와 외연까지 포함해 살펴 보았다.
먼저 임혜주 시인의 첫 시집 《옆》에 이어 두 번째 시집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에서 시집 속 언어의 표상들이 각박해진 사회관계의 범주보다 인간의 본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담론이 경지에 든 듯 은근하게 문장의 중력을 세계로 말아 올리고 있다. 소소한 일상의 천착을 통해 살아온 시간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러 수긍하는 전언으로 번져온다. 그윽하게 바라본 삶의 풍경들이 문장 안으로 들어와 몽근 세계를 형성한다. 일상을 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가슴 한 켠을 차지했을 생각들이 내면화되면서 웅숭깊은 형상을 이룬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 습한 논이 벼 수확을 끝낸 뒤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가며 본성을 회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밑간이란 말은 왠지 조금 아픈 말// 밑이 되어 아프다거나/ 밑에 뭐가 생겼다거나 하는 말처럼/ 생채기에 말씀이 들어가는 것처럼// 조금은 짭조름하고/ 어쩌면 달짝지근한// 배추나 무나 도라지 뭐 그런 것들이/ 숨을 죽이고// 각진 소금 알갱이// 설렁설렁 안아 보다가// 마침내 몸에 들여놓는/ 가장 겸허할 간기
-<밑간> 전문
사물의 근원적인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도 ‘밑간’이 갖는 자의성을 생각하고 있다. 그 말속에 깃든 의미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 속뜻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밑간’이란 스스로 변할 수 없는 모양이나 형태에 첨가를 통해 제 모습과 다른 성질이나 형태 변화를 유도하는 데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투여된 분량에 따라 부분만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래의 물성 자체와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지혜로 터득한 상황은 체험에 의한 것들이다. 화자는 “밑간이란 말은 왠지 조금 아픈 말”이라 하지만, 은근하게 변화를 강요하는 성질을 오래 유지 강제한다면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이 만약 사람에게 작용하는 것이라면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인 것이다. 화자도 “배추나 무나 도라지 뭐 그런 것들이/ 숨을 죽이고”라며 싱싱한 채소가 짭조름한 소금 간을 맞춰 김치를 담그는 과정에서 연유한 발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밑간’의 의미를 삶의 지혜로 치환하고 있다. 생각이 닿는 대로 사유의 천정은 자꾸만 높아가고 때론 낮아져 항상 그만큼의 세계를 운신 공간으로 유지하면서 호흡하는 그만의 비법인 셈이다. 그 대상은 좌우와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표면을 확장해간다.
<안간힘>도 그런 속말의 시의성을 드러낸다. 정황을 관조하는 눈빛이 위태로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곤두세운다. 생명에 대한 위중함은 차이를 둘 수 없다. 타고난 본성이 곱고 선함에 마침이 없을 때 트럭에 실려 가는 소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고 차가 신호등에 설 때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광경을 목격한다. 화자의 눈빛에 비친 “비틀린 다리를 곧추세우는/ 저 처연한 동작”의 모습이 몹시 애처롭다. 그 몸부림은 ‘안간힘’으로 혼신을 다한 생의 중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밀려나고 싶지 않은 투혼으로 보았다.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안타까움과 측은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언제 본 듯한// 아랫배 깊숙한 그 어디/ 은밀하게 쥐고 있던 자존심// 마지막이라 여겼던 그 언제쯤이던가”를 상기한다. 그 전조는 슬픔이고 전이된 고통이 뇌리를 맴돌며 생에 대한 절실함을 헤아리게 한다.
처음 맞닥뜨릴 때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대상을 통해 무언가를 골똘하게 하는 때가 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고요 속에 있는 것>에 대한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고 무턱대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형상이 있지만, 형상이 없는 것을 실재와 실재하지 않음으로 규정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런 상황은 분별하려는 의식의 겹을 둘러 싸고 있는 현상이 분명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막상 살펴보니 없었다는 것의 모호한 실체를 통해 허상이 던지고 있는 무형의 전언을 생각하며 가끔 비현실적인 현상에서 자연의 신비한 존재 반응을 감지하게 된다. 그 시구를 같이 공감해 보자. “무슨 큰벌레가 들었나 해서 가만히 다가서 보니/ 수풀이 저 혼자 그러고 있는 거였다/ 저희끼리 덤부렁듬쑥에 잘 보이지 않았는데/ 톱니 같은 잎과 잎/ 코끝 시큰해진/ 그의 옆구리를/ 가장자리 까슬한 끝까지/ 몸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거였다/ 그때 살짝 일렁이던/ 달리야 꽃 진 자리/ 가운데서 좀 비켜난/ 바람 한 점”을 통해 적요처럼 미동하는 세계를 본 것이다. 우리가 접한 대상의 관조에서 얻을 수 있는 미세한 깨달음이라 해도 파동을 거쳐 기시감처럼 현실에서 투사된다.
그런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천착한 시 <사마귀 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투명한 형광 눈”으로 세상을 신중하게 경계하는 사마귀를 보았다. 하찮은 미물인 사마귀의 행동은 의외로 가볍지 않은 것이며, 그 모습은 흠결 있는 자세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몇 걸음 걷다 멈추고 또 멈추곤” 하는 삼감이 태산을 옮긴 듯하다. 사마귀가 행하는 행동은 단순히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순간의 엄중함을 알고 있어 그리 행한 것이다. 언제 닥칠 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사마귀를 통해 인간의 삶도 허투루 행할 것이 아니다. 그렇게 신중한 경계의 눈빛을 한시도 놓지 않는 “초록빛 처세”에 능한 사마귀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을 떠 올린다. “저 명징한 두 눈을 히말라야 새벽 산등성에서 본 적”이 있는 화자의 기억은 멀리 있지 않다. 그때도 가다 서다를 거듭하며 목적지에 도달하고야 말겠다는 신념에 찬 모습들이 딱 저러했다.
<아침 숲에 들다>에서 화자가 보는 인식의 전환점은 언제나 밤이었다. 그 밤이 영원한 듯 잠들면 새 아침이 다가와 있다. 밤의 끝은 그저 여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견딤’의 고통이 선 지불된 것이다. 화자가 잠든 사이 세상 만물은 온전한 아침을 맞기 위한 “너도 어제/ 밤을 견뎠구나/ 너도 오늘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느냐/ 잿빛 새 허름한/ 밑창을 드러내며/ 퍼덕이다 사라진” 것들이 있어 새벽을 건너 아침에 이른 것을 깨달았다. “누런 잎 하나 뚝 떨어지는 소리/ 검불 아래 거미줄에 걸렸다”라고 말한 절창은 득도의 경지와 같다. 마치 불가에서 깨달음에 이른 화두처럼 간밤의 모습을 명징하게 알아버렸다. 아침은 매번 밤의 처절함과 교환되어 찾아왔던 것이다.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에서 하루라는 시간 동안 낮과 밤이 밝음과 어둠으로 구분되는 현상은 지구의 자전에 의한 것이다. 지구의 자전은 하루 24시간을 주기에 따라 낮과 밤이 번갈아 오게 된다. 반면, 공전을 통해 하루 365일을 주기로 하여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바뀌게 된다. 계절의 변화보다 빈번히 반복되는 낮과 밤의 주기에 화자가 민감해졌다. 날마다 변화를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또 다른 시간의 모습들로 변주되는 순간을 발견한다. 자신도 모르게 시간의 경계가 어떻게 허물어져 또 다른 모습으로 전환되는가를 알게 된다. 깊은 어둠에 묻히면 꼼짝할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이 아무도 모르게 어둠을 물리고 조금씩 환해져 가는 모습에 민감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았다/ 어둠이 어떻게 물러나는가를 찬찬히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애벌레가 우화를 통해 나비가 된 것과 같이 생명 탄생의 순간처럼 신비한 정경을 봐 버린 것이다. 그런 화자도 보지 못한 것이 있다. “아무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훨훨/ 그가 물러나는 처음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국 자신이 본 것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심정적인 어둠이었고, 궁금증이 해소된 것처럼 의식한 새벽이었을 뿐이다. 이미 깊은 어둠 속에 새벽 또한 공존해 있었던 것으로 초자연적인 우주의 비밀을 읽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화자가 바라본 찰나인 모습도 그렇거니와 어둠을 물리고 조금씩 밝아지는 새벽의 모습이 현재로 보였을 뿐이지 진실한 실체는 아니다. 단지 그렇다고 믿으며 살아갈 뿐이고, 그 실체에 다가가기 위한 구도적인 수행은 더 지극해질 것이다.
수십 개의 은 종을 달고 있어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거목 밑에 한참을 귀 기울여도// 다디단 그의 득음을 얻을 수 없다// 먼 데서 달려온 바람 한 점// 타종처럼 두드릴 때// 몸 구석구석 묻었던 향기를 풀어// 마침내 문 바깥// 천 리까지 내놓는다
-<은목서 향> 전문
자연의 비밀한 기운으로 생성한 향기를 맡았다. 그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어디를 향해 가는가? 가장 궁금한 것은 매혹적인 향기를 잉태한 순간이다. 이후 소란하지 않으면서 고요까지 닮은 은밀한 향기의 생성도 그렇고 발향發香하는 순간도 몹시 궁금한 것이다. 그것의 고고한 품격은 “수십 개의 은 종을 달고 있어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라며 과한 것 같아도 마냥 헤프지 않은 데 있다. 그 호기심이 궁금해 ‘은목서’에 다가갔지만, 알 수 없는 비밀은 더 깊어졌다. 화자가 놓쳤던 것에 답을 주듯 순간 바람이 일면서 시침만 떼던 은목서가 방향芳香을 풀어낸 것이다. 은은하게 퍼진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은목서다. 그 향기에 매혹된 시심 속에 화자가 있다. 향기는 은목서가 품었지만, 제 몸에 든 것을 스스로 풀어내지 못하고 바람의 힘을 빌려야 가능한 것을 보며 인간의 삶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성한 것의 절정 같은 꽃의 향기도 천리까지 닿으면 소멸하고 만다. 그런 걸 보면 죽음만이 소멸이라 할 수 없다. 모든 과정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생성과 소멸은 분절이나 단절이 아닌 자연법칙 속에서 우주의 영원성을 환형적으로 구조하는 데 있어 필연적인 과정인지 모른다. <니르바나>에서 보여주는 사물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 실체에 다가가는 쏘크라테스의 문답법처럼 대화를 통해 진실을 찾아간다. 대상은 화자와 또 다른 화자의 대화를 통해 이뤄진다. 묻기를 반복하며 “저 새가 후루티라고 일러 주는 남자 곁에서/ 매화나무를 들락거리는 새를 본다/ 참새 같은데?”라며 모호한 실체에 조금씩 근접해간다. 온통 눈 덮인 풍경을 보며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화자다. 시적인 충동이 어느 순간에 감각을 자극하여 생성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이미지를 그려가듯 햇살이 가뭇해지는 어스름 내린 대숲에서 방금까지만 해도 소복하게 쌓인 눈덩이가 바람에 한 무더기 쏟아지더니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형태의 소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눈 위를 “오랜 진화처럼 시커먼 고양이가/ 느린 걸음으로 마당을 지난다/ 천천히 눈을 끌고 가는 자리가/ 포물선으로 휘어지고 중간중간/ 발톱 자국이 규칙적으로 찍힌” 상태를 보여준다. 그렇게 지나간 흔적은 찰나여서 내린 눈에 덮여 사라질 것이고, 누군가는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할 것이다. 그런 풍경을 보며 화자는 생성과 소멸을 떠올렸다. 지극한 운동의 정점은 “눈 그늘 만들었다 지운다/ 어느새 매화나무 끝이 빨개졌다”라며 충만한 기운을 열반nirvana의 모습으로 환기한다. 열반은 죽음에 이른 소멸처럼 또 따른 생명체로 태어난다. 모든 인연은 인연 되지 않은 것이 없다 했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인연이다. 엄마에게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 천형처럼 발작이란 병을 앓고 있는 오빠를 둔 엄마다. 사는 것이 일상이듯 긴장하며 불안했을 엄마였다. 앓고 있는 질병 자체가 정신적인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곤혹스러운 것이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쓰러져 온몸과 얼굴에 상처투성이가 된 오빠를 “엄마는 가슴속에 있는 것을 죄다 훑어 내리듯 오빠의 바짓가랑이며 팔뚝을 번갈아 훑어 내었다 그럴 때는 마당 껍질이 벗겨질 것만 같았다”는 간절한 주문呪文이자 회복을 기원하는 비원이다. 그 고통이란 것도 알고 보면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매번 아들의 고통을 끊기 위해 속죄하듯 선행善行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엄마가 낮은 소리로 늘 하던 말, 아픈 사람의 손 같은 말, 아픈 자리에 가 닿는 붉어진 꽃물 같은 말,”을 간곡함으로 발원했을 것이다. 그 말에 더한 “쓰다듬고 달래듯 자꾸 안의 것을 퍼내는 그건, 전생과 후생을 오갔을, 그 사이에 한 점 놓아 보는 얼마나 아팠을 얼룩진 말”로 화자는 단장斷腸같은 고통이 한恨이 된 어머니의 절절함을 더했다. <엄마 이름은 한정희>에서 가슴 아픈 세월을 견디지 못한 “엄마는 왜 딸을 기억 못 하고 이모의 이름은 기억하는 걸까 이모 이름은 정숙, 나를 정숙이라 부른다 엄마는 점점 종이처럼 얇아진다”는 요즘 부쩍 정신이 혼미해진 엄마를 본다. 당신이 그토록 평생 갈구한 아들의 삶을 바꾸지 못했고, 소중한 것들 훌훌 털어 가벼워진 “서랍은 비워진 지 오래다 몇 해 전엔 휴지, 보청기, 틀니, 팬티 두어 개가 들어 있”는 것이 전부인 어머니는 또 다른 세계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럴 때 가슴으로 울컥 치밀어 오는 감정에 목이 메이고 만다. <동지> 팥죽에 넣을 둥근 새알심 속에 소원한 삶이 있다. 험한 세상 둥글고 끈기지게 해달라고 빚은 새알심 속을 “파헤친 의미라야 고작 이렇게 부드럽고 가벼운 것일지라도 몰라 둥둥 거친 목구멍 지나가는 뜨거운 어둠 한 알” 같은 생의 순간임을 알았다. <아버지의 독서>를 보면 가슴 짠한 말들이 가득하다. 당신이 그토록 읽어낸 책에서 알게 된 좋은 말들은 발설하지도 못한 채 동굴에 갇혀버린 어머니를 위한 전언은 “문 잠가, 병원에 약 타러 가” 정도로 짧은 몇 마디로 충분했다. 하루해가 지고 다시 다음날 해가 솟구치듯 아버지는 구십이 되어서도 여전하셨다. 변하지 않은 것들은 항상 같은 것인지 또 묻길 반복한다. <꽃>을 통해 말하고자 한 ‘슬픔’ 같은 것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궁극에서 ‘슬픔’으로 환기하는 화자의 필설은 다른 시에서도 눈에 띈다. 임혜주 시인만의 변별적인 문장들은 공감을 파동하는 끌림과 유연한 안타까움이 몽근하게 깃들어 먹먹한 것들이다. 그것의 진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심성 속 발화 언으로 묵음같은 소요를 오래토록 진동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지면상 많은 시를 살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컸다.
비슷한 시기 김두례 시인의 시집 《드라이 플라워》가 출간되었다. 어차피 시집 속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시들의 성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시인이 바라본 세상과 교차한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적 정서로 부여하는 이미지도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도시적인 감각을 지향하는 듯 시집 표제인 ‘드라이 플라워’도 모던한 이미지의 차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유년기 체험하고 자란 바닷가의 정서가 깊어 도시 사람처럼 의식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성장기인 유년을 전남 광양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바탕색처럼 깔린 바닷가의 정서가 슬핏슬핏 내비친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 가족이란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존재한다. 그중 아버지와의 추억을 통해 회상하는 혈연적 사유는 길지만, 아픈 여운을 담고 있다.
<겨울 일기>에서 여러 생각들로 연상되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슬픔 같은 애잔함으로 발화했다. ‘겨울 일기’ 란 말에는 화자가 살아온 고통까지 함축하고 있다. “반지하 방의 깨진 계단은 모서리가 불안하여 햇살을 찾아다닌다 어제의 시간이 덮친다 나는 나니아 연대기를 자꾸 떠올린다”라며 자신의 추억에 잔존해 있는 불안감을 비유적 문장으로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겨울은 고통스러운 것처럼, 그곳은 온통 삭막해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음지의 세계다. 뉴스에 나온 마곡사도 어디에 있는 마곡사인지 불확실하다. 화자는 이내 추측을 통해 다녀온 적이 있던 곳이라고 확신한다. 마치 현실처럼 음침한 지하 계단을 터전 삼아 숫자를 불리는 바퀴벌레를 본 듯 도진 트라우마처럼 불안해한다. 화자는 “역 앞 광장에서 아버지를 만난 날 답답하고 어지럽다며 진땀을 흘리고 계셨다”며 공황장애를 호소하던 그때를 떠올린다. 당시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를 알지 못한,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던 때였음을 말해준다. 살기 위해 생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없었던 절박한 심정도 그와 연관이 없지 않다.
그런 환경은 데자뷔처럼 <줄에 눈이 간다>에서 재현된다. 살펴보니 줄을 선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삶의 한 방식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아파트 외벽에 얹어진 에어컨 실외기도, 주차장의 차들도, 나란히 피어있는 메리골드 화초도 온통 줄서기인 반복이다. 현대인은 매사에 줄서기에 익숙해지며 건조한 삶을 살아간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는 그렇지 않다며 “길바닥에 내려앉은 까치는 꼬리를 까딱까딱하면서 줄 서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다 놓친 줄을 다시 따라잡기 위해 마음이 급해졌다. 이것 또한 치열해진 경쟁 사회가 낳은 강박임을 화자는 알고 있다. 스스로 그런 ‘줄서기’를 거부하지 못하고 답습하는 것이니 말이다.
지나간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장의차가// 천식 앓던 외할머니 기침 소리 지나간다// 도수 높은 돋보기 끼고 노인회관 드나들던 큰아버지 지나간다// ‘소리 지르지 마라’ 입 모양 찬찬히 보던 큰어머니 주름진 얼굴 지나간다// 육이오 때 경찰이었던 외삼촌 낙동강 지나간다// 씨앗 품은 봉선화 같은 숙모 지나간다// 객사 직전 고모를 찾았다는 외사촌 오빠 다급한 목소리 지나간다// 이발사였던 둘째 큰아버지 가위 소리 지나간다// 급체로 돌아가신 둘째 큰어머니 창백한 얼굴 지나간다// 손님처럼 하룻밤 주무시고 순천으로 떠난 아득한 할머니 흰 무명치마 지나간다// 마루에 앉아 앞산 하염없이 바라보던 반백의 아버지 지나간다// 어린 자목련처럼 입술 파리한 큰언니 지나간다// 먼 하늘 달린다 푸른 산이 달린다 깊은 강이 달린다 고속도로가 달린다
-<진안 간다> 전문
언어적인 소리가 발음되면서 모호성을 더해 재미있는 시라고 보았다. ‘지나 간다’를 시골 사람들이 강하게 발음하면 ‘진안 간다’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우연히 고속도로를 지날 때 장의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지나 간다’고 누군가가 말을 했을 것이다. 유족과 무관해 슬픔도 따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장의차를 보며 무심하게 던진 말이 가슴에 여운을 파동한 것이다. 저렇게 세상을 정리하고 갔을 사람들이 주변에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호명된 사람은 다들 친인척 관계로 화자의 삶에 영향을 끼친 분들이다. 그분들도 누군가를 스치며 저렇게 지나간 것이었음을 생각한다. 언젠가는 우리 또한 그런 길목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것은 필연이다. 결국 운명 만큼 감당하다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이다. 생을 영위하는 동안 여한 없이 잘 살지 못한 것이 인생살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생을 떠난 사람이나 뒤에 남아 그렇게 훌쩍 가버린 사람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지만, 다를 바가 없다.
그토록 아쉬움만 남긴 채 떠나가신 어머니를 <바닥>을 통해 생전 모습 그대로인 사진첩에서 발견한다. 어머니의 기억을 촉발케 한 철조망 아래 죽어있는 새에 눈길이 간 것이다. 생의 길인 줄 알았다가 죽음에 이르러 “바닥에 등을 대고 있는 새”가 날기를 멈추고서야 자유를 찾았다. 새처럼 바삐 사셨던 어머니가 어느 때인가 허리가 구부정해졌고, 이어 굽은 허리 한번 곧게 펴보지 못한 채 그만 “담장 너머의 말이 쌓이고/ 눈 뜨지 못하고서/ 바닥에 등을 댈 수 있었다”는 마지막 기억이 또렸해졌다. 모든 생명체가 죽어서야 고통에 찬 생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연법칙으로 모두가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애써 쫓았던 ‘길’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불현듯이 귀가 닿도록 사랑했던 <지지>란 시에서 “책장에 할머니가 준 먼지 묻은 인형/ 가만히 들여다보고 토끼라 부른다” 했는 데 보는 사람마다 달라 “꼬리가 사슴 꼬리 같아요/ 귀가 햄스터 귀 같아요/ 지지가 지워져 갈 때 토끼만 남았다”며 본래 ‘지지’란 깜찍한 이름이 있었는데 이름은 사라지고 결국 토끼가 된 것이다. 디자이너가 고안한 멋진 인형에 붙여준 ‘지지’란 이름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자기중심적인 세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자는 ‘지지’란 인형을 손에서 놓질 않는다. 그것은 유년기 추억처럼 “쫑긋거리는 귀/ 안으려 하니 빠져나가는/ 발자국 남겨지는 누런 토끼/ 놓아주어야 할까// 비 오는 날 만지작 거리다가/ 촉촉해진 토끼 지워지는 날이 있었다”며 더 애틋한 마음에 ‘지지’란 이름을 가진 인형에 집착했을 것이다. 상대에게 고유한 이름을 존중하며 호칭해 줄 때 친밀감이 깊어진다. 화자가 말하고 싶은 속내는 시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욕망에 대한 자아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봐야 한다. 그런 상징적인 문장으로 익명화한 대상을 등장시켜 의식의 정체성의 주체인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구상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생활 습관이다.
그렇지만 색다르다 해서 실현 가능한 계획이 아닌 뻔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토로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와는 말이 통할 것 같아/ 오래 걸으며 말을 섞고 싶네/ 다리가 긴 그는 코도 높고/ 그의 주위에는 발걸음들이 언제나 잦지”라며 시작한 <오늘의 계획>도 그런 맥락을 벗어난 심리적 반사로 스토리가 탄탄해진 시다. 그것은 대상 속 타자를 통한 자아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자신과 항상 동행하는 ‘타자’이면서 ‘나’로 존재하는 대상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 같은 ‘그림자’란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화자와 동행하는 ‘그림자’에 주목하면서 실존하는 또 다른 존재로 인식하려 한다. 아무 때나 훌쩍 커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지만, 존재하지 않는 허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 타자에게 이름을 붙여 ‘매일’이라는 의미로 ‘데이’라 할 때 비로소 사회적인 관계가 대등해진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있어 만지거나 긴밀한 대화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매번 동행하며 무슨 일이 든 똑같이 따라 하는 습성을 보여준 ‘데이’다. 그날도 “철학 책을 끼고 가는 그를 본 적 있네/ 그림도 늘 옆에 두는 듯/ 최근엔 우유를 따르는 사람이랑 함께”라서 말 붙일 여지조차 없었다. 화자는 ‘데이’를 통해 현재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평소 소심한 성격을 탓하면서 활달하게 전면에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심기일전의 각오로 이해된다.
보이는 사물의 실체는 의외로 다른 모습일 수 있다며, <문밖의 새>를 주시하며 그 새가 자신이란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항상 안에 들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맴돌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왔고 실존에 대한 고뇌로 밤을 지새우다 피로처럼 후회만 남겼던 지난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는 ‘새’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본다. 이제 좀 더 당당한 모습으로 고유한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름을 지울 수 없는/ 부푼 새가 나를 붙잡아요/ 굴절하기 좋은 밤/ 그림자는 점점 자라서 커다래집니다.”라며 기대한 모습을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의식의 변주로 실체화된 <오늘의 새>도 그런 시의성詩意性을 전제하고 있다. 새는 하늘을 날고 사람은 걸어간다. 거리를 이동하는 데 있어 걷거나 난다는 것에서 결과는 같다. 굳이 구분한다면 체형으로 발달된 구조의 활용이 다르다는 속성에 의해 전개했을 뿐이다. 날개가 발에서의 진화라면 새는 날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사람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새는 바로 인간의 전형으로 치환되면서 동일시된다. ‘붉은오목눈이’가 숲으로 사라졌는가 싶었는데 그들이 향한 처소는 안온한 밤을 맞을 수 있는 안식처였다. 숲을 향하여 날아간 새들처럼 화자도 당연히 집을 향해 걷고 있다. 품새만 다르지 목적은 똑같다는 것으로 낮의 분주했던 기억처럼 “노을은 저만치 멀어지고/ 오가는 소리 붙들고 느리게 날갯짓하는 새는/ 가끔 안양천에 내려앉았다 가는 새는/ 울음을 남긴다”며 하루의 노곤한 피로를 거두지 못한 흔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저녁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야근하는 날이라”며 “속이 쓰리다고 겔포스를 빠는/ 얼굴이 노랗게 부어 있”는 그 사람을 보며 짠한 마음을 토로한다. 남들이 자는 밤의 ‘철야’는 뜬 눈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의 동일시는 서로를 가슴으로 바라본 시간 만큼의 심화된 사랑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껏 전해온 말들은 쉬운 일일지 모른다. 더 모호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장총>에서 논하고자 한 말들은 시적인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장총에 몸을 다칠 수도 있다. ‘장총’은 사람 간의 보증수표 같은 신뢰를 매개로 한 전형으로 문서가 존재하지않는 거래로 보면 무방할 것이다. 한 사람은 ‘장총’을 줬다 하고 받은 사람은 반신반의한다. 그런 오해의 소지는 둘만의 거래가 애매한 정황 속에서 두루뭉술하게 이뤄졌단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장총은’ 진짜 ‘장총’이 아니라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불확실한 거래 목록임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거래는 상당히 진척되어 화자가 받았다는 실물(장총)이 확실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 놓길 반복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제대로 당한 셈이다. 결국 ‘장총’은 실사격으로 총구에서 탄환이 빠져나가야 진짜 총이 되는 것처럼 “장총을 보관만 하지는 마세요”라는 경고대로 실행하기 위해 “그가 말한 장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과 시기에 대한 결정은 타자가 아닌 자신 곧 행동의 주체다. ‘장총’으로 상징된 욕망을 실현해야 할 사람은 각성한 자아이며 즉 ‘나’란 것으로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주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반듯한 것보다 더 멋진 것은 ‘기울다’ 일 것이다. 모든 사물이 반듯하게 서 있지만, 간혹 의도적으로 기울기를 가해 미학적인 집중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은 경우를 본다. 안정된 구도를 허물어 형이상학적인 미적구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 쓰러져야 하는 경쟁 사회에서 결국 <기울다>란 시를 통해 결코 패배로 귀결되지 않으면서 살아남는 것의 아름다움을 말해 준다. 누구보다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도 ‘기울다’의 한 모습이다. 알고 보면 아름다운 것 일수록 반듯하지 않아 형상 미학적인 감각을 도발하는 경우가 많다. 울타리의 장미꽃도 그렇거니와 하늘에 뜬 둥근달도 한쪽으로 삭아져 기울면서 무궁한 감정 속 상상을 증폭해준다. 사람과 사람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사랑의 감정선이 깊어지는 법이다. 일상적인 관계가 어느 순간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그윽했을 때 “잠을 든 너에게서 땀 냄새가 나/ 그 땀을 견디고 닦아줄 마음이/ 너에게로 가까이 기울어 있다는 것”이라며 “나에게 기울어 올 때/ 너에게 기울어 갈 때/ 서로 기울이며/ 또 우리는 시작하는 것이지”라며 가파진 감정선을 시적 둔감으로 차폐했다.
와온의 해는 몸을 낮추느라/ 산봉우리 사이에서 그림자를 느리게 끌고 간다// 걸음 걸음 피어나는/ 안녕의 발자국들/ 돌아보는 갯벌에 해거름이 묻어 있다// 내려다보는 바다/ 돋보기안경을 낀 할머니의 무릎 자장가가 들린다// 바다는 해를 위로하느라 새를 부르고/ 저녁의 노래를 들려준다// 해의 뒷모습이 사그라지자/ 울음을 품은 새는/ 밤이 오는 집으로 날아간다// 어둠을 들러야 하는 바다/ 밀려드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인다// 와온 바다 어둠 속을 오래 걸으면/ 해를 보낸 바다의 기도를 오래 들을 수 있다
-<와온의 저녁> 전문
해가 이동하는 자오선을 따라가면 ‘와온’에 당도하고 가물거리는 수평선이 노을에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가 그곳으로 뉘엿뉘엿 파고든다. 누구나 태초의 신비와 장엄을 더해 가는 일몰 앞에 서면 느슨해진 신앙심을 다잡게 되어 경건해지는 법이다. 화자 앞에 펼쳐진 와온 바다는 소란한 세상을 어둠에 내준 채 숨을 고르는 저녁을 맞는다. 시선을 압도했다기보다 사위四圍로 잦아들어 주변을 아우르는 와온에 가슴 벅차 자신도 모르게 감동한 것이다. 검은 등을 편 채 일몰처럼 따라 눕는 수평선과 갈대밭은 오래전부터 한 혈족이어서 “돋보기안경을 낀 할머니의 무릎 자장가가 들린다”는 서정이 어둠처럼 포근해졌다. 이명처럼 들려오는 소리에 귀마저 솔깃해진 애 저녁은 또 하루를 안도하며 가슴을 다독인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해의 뒷모습이 사그라지자/ 울음을 품은 새는/ 밤이 오는 집으로 날아간다”며 와온 바다가 품어준 어둠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처소가 된다. 고요한 단잠에 든 와온은 욕망과는 먼 갯내 가득한 태초를 아득한 기억으로 되돌려 준다. 그곳에 달이 차고 야위어 가는 시간들을 죄다 기록하고 있는 바다가 ‘들물’ 드는 물때를 잊지 않고 찾아와 긴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한 곳이 어디 와온뿐이겠는가? <산자고 필 때>에서 그 시기는 사방이 꽃 천지인 4월 경이다. 한국 지형이면 어느 곳에서든 서식하는 야생화다. 마침 고향인 전남 광양 언저리께 있는 선산을 찾았을 것이다. 봄기운에 어우러지며 곱게 피어있는 산자고가 눈에 들어와 못 다 핀 꽃잎을 펼쳐 보였을 것이다. 그 꽃잎처럼 여리기만 했던 유년기의 추억에 젖어 든 화자가 새록새록 그 기억 속으로 빠져들며 “아이들의 엉덩이가 하늘을 치켜드는 절/ 가랑이 사이로 까르르 눈이 마주치고” 놀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들이 봄꽃처럼 가슴속에서 재현한 것이다. 김두례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에서 환기된 상상력으로 보여준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의 지점은 삶을 관통해온 첫 시집 《바그다드 카페》에서 보여준 시력을 바탕으로 한 과거의 경험과 시공간을 아우른다. 사유를 통한 삶의 진전은 곧 시적인 영감을 통한 직관으로 추상하여 현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재까지이다. 그런 경향에서 시적 개연성으로 지층을 심화해 가는 문학적 열정으로 본다면 무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