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재림교인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 함민호 목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둘째 날 저녁인데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참여해 주셨네요.
해외봉사대로 25분인가요? 가셨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는데도 산패동교회는 정말 이 저녁 집회에 많은 분들이 참석하는 것이 참 감동적입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심령 심령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고 또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게 임하는 귀한 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어제 읽었던 말씀 요한복음 3장 3절에 있는 말씀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저희 모두가 주 앞에 겸손한 심령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누구든지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주님을 반드시 만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 이 시간도
우리가 빈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하늘의 문을 여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한량없는 은혜와 또한 복들을 쏟아부어주셔서 우리가 이 성전을 떠날 때는 주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께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떠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오로지 주의 성령께서 각자의 심령마다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희는 계속해서 로마서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급적이면 개인 본인 성격을 가지고 보시면 정말 좋습니다.
물론 화면을 보시는 것도 유익하고 좋지만은 우리가 이 개인 성경으로 보면 더 좋은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 뇌가 이렇게 성경을 볼 때 사진을 찍습니다.
그래서 내가 본 말씀이 내 이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그림을 그려줘요.
근데 이 화면을 보면 이게 다 같은 페이지가 쭉 올라가기 때문에 이게 몇 페이지 어디에 있는지를 뇌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다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을 개인 성경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읽었던 그 말씀들이 어디에 있는지가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져요.
그래서 훨씬 더 마음속에 이렇게 오래 남고 깊이 박힙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여러분들 개인 성경을 가지시고 이렇게 딱 보시면 좋고요.
그다음에 그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에 집에서 볼 때 또 교회에서 볼 때 또 다른 곳에서 볼 때 항상 그 말씀의 위치는 거기에 있거든요.
그래서 성경으로 보면 훨씬 더 유익하니까요. 네 그렇게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제 우리가 살펴본 말씀에 주제를 단다면 뭐라고 좀 하면 좋을까요?
다 잊어버리셨죠?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사도바울이 중요하게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진리가 하나 있었죠.
그렇죠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요? 죄인이다 네 이게 지금 로마서를 시작한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거예요.
근데 로마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죄인 이 두 글자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굉장히 큰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생각을 잊으면 잊을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첫 출발점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훌륭한 사람일까요? 그 믿음이 훌륭하다라는 의미 안에 첫 번째로 들어가 있는 정신이 바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믿음을 칭찬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내가 이 이스라엘 땅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다라고 얘기했던 그 사람 누군지 아십니까?
기억나세요? 백부장 맞아요. 로마 백부장한테 너무 놀라셨어요.
예수님이 왜냐하면
로마인이잖아요. 유대인이 아니잖아요. 그죠?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누가 믿음이 더 좋대요?
유대인들이 믿음이 더 좋대요 아니면 백부장이 더 좋대요 백부장이 믿음이 더 좋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못 봤다고 했으니까.
근데 여러분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았을까요?
몰랐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조금 알아요.
근데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신앙에 대해서 잘 몰랐던지 유대인들이 신앙을 엉망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누구를 통해서 나아가고자 했냐 하면 유대인 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한테 나아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부탁해가지고 가서 예수님한테 우리 집에 종이 병들었으니까 좀 고쳐달라고 부탁을 한 거예요.
왜요?
이 사람들이 훨씬 더 훌륭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훨씬 더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가지고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이 사람을 이 사람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가합니다.
이 사람의 이 사람이 지금 그 종이 병들었다고 하는데 가셔서 이 사람의 그 병든 종을 고쳐주는 것이 가합니다.
왜 그렇게 얘기를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왜냐하면 이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회당도 지어주고 훌륭한 일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에 예수님 가셔서 이 사람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가합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유대인들은요.
지금 우리가 꽤 훌륭한 일을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자비와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백부장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도무지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두 사상이 지금 현저하게 보이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때요?
아니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의 집에 오신다고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종들을 친구들을 이번엔 친구들을 보내가지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오시지 말라고 절대로 오시지 말라고 나는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는 거 감당 못한다고 그런데도 계속 오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이번에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유대인 중에 어느 누가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태도와 마음을 가졌습니까?
어느 누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는 건 나는 감당할 수 제자들도 이런 태도 안 가졌어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이나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예수님이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근데 누구는 가지고 있었어요? 이방인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 거예요?
누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에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너무나도 부적절하고 부족하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깨닫고 있는 사람이 믿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거기서부터 믿음이 출발하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믿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나는 정말 죄인이 맞습니까?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나는 정말 죄인이다. 여러분 이거 맞습니까? 동의하십니까?
옆 사람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도 정말 죄인이다.
어 근데 이건 너무 행복해하세요. 옆 사람한테 죄인이라 그러는 거 우리는 우리는 정말 죄인이다.
이 생각을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에 대하여 훨씬 더 유한 태도를 가질 수가 있겠죠.
그렇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굉장히 좀 좀 그런 태도들이 있잖아요.
그죠? 그런 태도를 갖는 이유가 뭐예요? 1만 달란트 빚진 그 왕의 신화와 같은 그런 태도를 갖는 이유가 뭐예요?
뭘 망각한 거예요?
죄인이라는 걸 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인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만큼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설교를 잘하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어요.
그래서 집에 돌아가가지고 어제 저희 막내가 생일이래가지고 또 케이크을 하나 가지고 가서 케이크을 자르고 생일 축하를 하고 늦었지만 기쁨으로 했어요.
근데 갑자기 막 피곤이 막 몰려오는 거예요. 자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사람이 침대가 이 침대 위에 얇은 매트리스를 이렇게 하나 또 올려놨는데 그게 옆으로 많이 흘러내렸다고 이거를 저쪽 안에서 끄집어 달라는 거예요.
근데 그게 되게 무겁거든요. 집사님이 못해요. 근데 피곤한데 잤으면 좋겠는데 그걸 굳이 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다고 그래서 올라가서 이렇게 막 잡아당기는데 이게 안 올라오니까 막 짜증이 막 날라 그래요.
화가 나려 그래 근데 막 잡아당기는데 막 안 되는데 막 옆에 물건들이 이렇게 막 놓여져 있어가지고
짜증이 나니까 제가 옆에 뭐라고 얘기했냐면 여보 형이 좀 정리 좀 해 이렇게 이렇게 올려놓지 말고 그랬더니 집사람이 서운해가지고 저한테 뭐라 그러냐면 여보 난 하루 종일 집안일 하고 정리는 내가 다 하고 당신은 도와주지도 않는데 무슨 나한테 정리를 하라고 얘기를 하냐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순간 자존심이 확 상하더라고요. 근데 그 말이 맞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끄집어 놓고 이제 그냥 갔어요. 그냥 가서 자라고 방에 가려고 누웠는데 마음속에 야 너 잘못했잖아 지금 그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래 내가 죄인이지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힘이 됐대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나 가지고 집사람한테 가서 여보 내가 아까 쓸데없는 말해서 미안해 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근데 진짜 감사한 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니까 진짜 화낼 일이거든요.
진짜 기분이 상해야 될 일인데
그거를 그냥 그렇게 한마디 하고 그냥 마음을 딱 정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이렇게 있는 걸 보면서 목사보다 훨씬 훌륭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또 오늘 이렇게 운전해서 막 오는데 하페에서 출발해가지고 이렇게 오다 보면은 그 고속도로 타고 이렇게 쭉 오다가 한강 건너기 전에 우회전 해가지고 이쪽으로 오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우회전해가지고 쭉 들어가는데 이제 춘천 가는 고속도로 그 길로 이렇게 접어들려고 그러는데 차들이 쭉 있더라고요.
깜빡이를 켜고 앞차도 깜빡이로 들어가려고 하고 저도 들어가려고 하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데 앞 차는 잘 들어가는데 앞 차 뒤에 차가 하나 있으면 이제 제가 들어가잖아요.
보통 이제 한 대씩 한 대씩 이렇게 들어가는데 뒤차가 양보를 안 해주고 앞에다 갖다 차를 싹 붙이는 거예요.
근데 어차피 저는 여기 들어갔다가 다음 차선으로 옮겨가지고 저쪽으로 가야 되잖아요.
그렇죠 여러분 길 다 아시죠? 그죠?
근데 이쪽에 있는 차선이 밀리는 건 이쪽 빠지는 차들 때문에 밀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저는 기다렸다가 뒤로 들어가가지고 옆으로 가면은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길이에요.
근데 그 차가 양보를 안 해주니까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양보를 안 해줘 그리고 어떻게 했을까요? 왜냐하면 앞 차가 들어갔잖아요.
저는 이렇게 오자마자 들어가려고 했었던 거거든요.
근데 앞에 아직 한참 제가 갈 수 있는 길이 제 차선에 한참 있어야 한참 뭐 한 7~80m 더 가서 들어가도 얼마든지 갈 수 있거든요.
양보 안 해주니까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안 해줘 그럼 난 앞으로 가지 쭉 가가지고 저 앞에서 쏙 들어가가지고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제가 그렇게 딱 하고 그다음에 바로 좌측 차선으로 옮겨가지고 가면서 처음에는 약오르지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 마음속에 안 비켜줘도 난 너 앞으로 충분히 갈 수 있어 그런 마음이 제 마음속에 막 있는 거죠.
근데 그렇게 하면서 쭉 가면서 무슨 생각이 드냐 하면 야 너 꼭 그렇게 해야 되겠냐 누가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있나요?
그냥 앞차 보내고 뒤로 들어가가지고 그냥 빠져서 갔으면 되는데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거죠?
참 마음이 이렇게 죄되고 지저분해요. 전혀 예수님과 같지 않은 마음이 우리 마음 그냥 이 속에서부터 끊임없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조금만 자세하게 유심히 우리의 마음을 살피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죄된지를 우리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진도 나가야 되는데 우리 제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장을 건너뛰고 갈까 어떻게 할까 했는데 빨리라도 제가 좀 읽겠습니다.
2장 1절부터 여러분 집에 가서 좀 읽어보셨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내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내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계속 정죄하고 비난하는 정신이 우리 마음속에서 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라고 그랬죠.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여러분 이 2장에서는요. 2장 1절부터 16절까지는 바울이 계속 뭐에 대해서 얘기를 하냐면 심판에 대해서 얘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여기 동그라미를 쳐보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번 심판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와요.
16절까지. 그런데 심판과 비슷한 단어 여기 보면 보응하시되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환란과 권고가 있을 것이다. 망할 것이다. 이런 단어들이 심판이라는 뜻과 동일하게 사용되는데 그걸 다 합치면 11번 16절 동안 11번이나 심판에 대한 내용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죄의 싹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어제 모의 재판 해보셨죠? 여러분 어제 그 모의재판 한 걸 토대로 마지막 날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텐데 그렇게 심판대 앞에 서면
여러분 우리가 무죄 선고를 받겠습니까? 유죄 선고를 받겠습니까?
네 왜 무죄입니까? 아니 어제 우리 모의재판했는데 거짓말쟁이 도둑에다가 살인자에다가 그리고 뭐였습니까?
가늠하는 자였는데 이걸 토대로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면 우리가 하늘나라 갈 수 있다고요 재판관이 무슨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당연히 유죄 판결을 내리죠. 그랬더니 어떤 분이 제가 이렇게 얘기했더니 어떤 분이 저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아니 목사님 제가 예전에는 뭐 그렇게 했었지만은 거짓말도 하고 뭐 훔쳐본 적도 있고 그랬지만은 지금은 제가 안 그럽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사형 판결을 받을 만큼 큰 죄를 지었는데 판사한테 사형 꽝꽝꽝 했는데 아니 판사님 제가 옛날에는 그렇게 좀 죄를 졌지만은 이제는 제가 죄를 안 짓고 삽니다.
그리고 정말 잘못했고 전 더 이상 그렇게 죄를 안 짓고 살겠습니다.
그럼 저기 뭐야? 판사가 뭐라고 얘기할까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죗값은 치러야 돼 맞습니까? 맞죠?
판사는 우리가 잘한 것을 심사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선고를 받을 만한 그 어떤 조건도 갖추고 있지 않은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영원한 죽음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리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내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내게 뭐 하고 있다고요?
쌓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 마지막 날에 당할 이 진노를 우리는 피할 수가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기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아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공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광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함이시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물은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는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여러분 사도바울은 지금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이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율법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율법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심령 가운데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양심에 비추어진 빛에 따라서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거예요.
그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1.1획이라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두가 완벽하게 지킨 사람만이 의인으로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무죄 판결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신가요?
있으십니까? 아직까지 없다고 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3장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래서 분명하게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복음을 누리고 싶다면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분명히 그 은혜 안에 거하고 싶다면은 먼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돼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야 너 이제 진짜 됐다.
너 이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준비가 됐다.
너 이제 진짜 제자로 살아갈 준비가 됐다. 이 이야기를 하신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마지막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셨잖아요.
뭐라고 질문했죠?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근데 그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실 때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세 가지 헬라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그렇죠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그죠? 그래서 아가페는 엄마가 자녀에게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그다음에 필레오는 형제 간에 할 수 있는 그냥 일반적인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고, 아가페는 육체적인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에로스가 에로스가 그렇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뭔 사랑을 물으셨을까요?
아가페 하느냐고 물으셨어요. 아가페 너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근데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필레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의미에요.
너 나를 아가페 하느냐 그랬더니 베드로가 아니요.
저는 주님을 필레어밖에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베드로가 뭘 인식하기 시작한 거예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내가 죽을지언정 누구를 떠나지 않겠다고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내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어요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지금 뭐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죄인입니다. 내 안에는 아가페가 없어요. 그걸 고백한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니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베드로가 고민이 돼요.
아니요. 저는 주님을 필레어 받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세 번째 니가 나를 휠레어밖에 못한다고 이렇게 물으셨어요.
세 번째는 니가 나를 휠레어밖에 못한다고 베드로가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대답은 뭘로 하고 싶은데 아가페로 하고 싶지만은 베드로는 이제 분명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은 거예요.
뭐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요? 악 아이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준비가 된 거예요. 여러분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철저하게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깨닫는 것.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이에요.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우리 다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얘기합니다.
다시 한번 제가 또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내가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여 어두움에 있는 자에 비추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범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누구에게 하는 얘기예요?
유대인들에게. 근데 사실 이거 지금 누구에게 하는 얘기일까요?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일이에요. 앞에 부분들은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이 구절은 우리게 하고 있는 거예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교사, 그 사람들을 가르쳐야 될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우리가 스스로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내가 내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내가 도둑질하느냐 우리 다 뭐 했어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도 역시 똑같은 죄인이다.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가늠하지 말라 하는 말을 하는 내가 가늠을 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내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내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도다.
여러분 이건 진짜 부끄러운 말이죠. 밖에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아니면 밖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하나님을 욕합니까?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신앙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인가요?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신앙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내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유대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를 가지고 있었죠 그게 뭐였죠?
할례였어요 할례
할례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맞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떤 표를 가지고 있죠?
침례받았잖아요. 그죠? 우리는 침례의 표를 가지고 있어요.
근데 여기 보면 지금 사도바울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할례 그거 의미 없다고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해주는 거 아니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한례에 아무런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100번 받았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으면 우리 침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침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표정인데 하나님의 뜻은 전혀 우리 삶이 실현되지 않고 있으면서 우리는 침례받았다고 우리가 자랑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자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물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의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오.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끊임없이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 더럽고 추악한 이 죄된 본성들을 바라볼 수 있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 죄의 문제를 올바로 알려면 율법을 명확하게 알아야 돼요.
율법은 누구라 그랬죠? 예수님 예수님의 삶이 율법이라 그랬죠 여러분도 그러신지 모르겠는데 저는 가끔씩 이렇게 샤워를 하고 욕실에서 이제 머리를 쫙 말리면서 거울을 이렇게 탁 보면은
무슨 생각이 드냐면은 그래도 나이가 조금씩은 들어가는데 뭐 이 정도면 뭐 제가 내가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정말 그래도 이 정도면 뭐 여러분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세요?
솔직히 없으십니까? 욕실에서 목욕 탁 하고 머리 막 말리면서 거울 보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해보신 적 있다.
손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네 아 이분들은 정말 솔직하신 분들이에요.
안 드신 분들은 다 지금 거짓말하는 죄인들입니다.
근데 근데 그 기쁨이 얼마 못 가요. 문을 열고 화장대 앞에 앉아가지고 얼굴을 보면 얼굴이 달라져 있어요.
왜 달라져 있을까요? 이 욕실에는 빛이 어두워요.
그래서 내 본모습을 못 보는 거예요. 내 여기 흉터와 잡티와 이 모든 것들이 잘 안 보여요.
욕실에서는 그래서 피부도 좀 괜찮아 보이고 물기도 막 묻어 있으면서 좀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나름. 그런데 화장을 하려고 화장대 앞에 딱 앉는 순간 밖에서 들어온 창문에서 들어온 그 빛이 환하게 비추면
안 보였던 모든 잡티와 기미와 주름 주름 이런 것들이 다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닌데 빛이 들어오니까 바뀌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율법을 분명히 우리의 삶 가운데 비추게 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깊이 깨달아가는 거예요.
근데 그 율법의 빛을 우리의 삶 가운데 비추지 않으면은 우리가 꽤나 괜찮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꾸만 착각하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요. 율법을 경시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었으면 밭했지 뭐 율법을 자꾸만 이렇게 갖다 비추냐고 율법 안 지켜도 된다고 율법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라고 여러분 율법을 경시하면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뭐가 필요 없다 그랬어요.
복음이 필요 없어져요.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의 은혜가 은혜가 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은혜가 뭐죠? 은혜가 왜 만약에 제가 5천억 빚을 졌는데 우리 장로님께서 저한테 5천억을 갚아주셨어요.
그럼 제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자나깨나 장로님 생각밖에 안 날 거예요. 그렇죠 너무 감사하게 앉아도 감사하고 서도 감사하고 그냥 계속 마음속에 막 감사가 막 이렇게 막 흘러넘칠 거예요.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 가지고 그런 마음의 상태를 뭐라고 부르는 거예요?
은혜 그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가 있으세요?
지금 은혜 충만하십니까? 은혜 받으셨어요? 어떻게 받으셨어요?
저는 예수님이 얘기는 한 번도 안 했는데 아직 그렇죠 맞습니다.
내 마음속에 은혜가 있는지 안 있는지는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 마음에 은혜가 있다면 콧노래가 나와야 되잖아요.
기분이 좋아야 되잖아요. 행복해야 되잖아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막 올라와야 되잖아요.
우리 은혜 있을 때는 저도 오면서 막 이렇게 운전 막 하고 오면서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막 노래 부르면서 왔거든요.
노래 부르면서 오다가 그렇게 막 그 뒤에 들어간 거예요.
저때 본성이 그렇게 막 나오는 거예요. 근데 그때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금방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께 다시 하나님 저 진짜 죄인이에요.
진짜 저 같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오면서도 그냥 순식간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정말 쓰레기 중에 쓰레기 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 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2천 년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저의 죄를 이렇게 다 용서해 주시고 저를 구원해 주셨어요.
주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까 그 사람한테는 정말 좀 미안합니다.
제 마음속에 뭐가 있는 거예요? 은혜가 있는 거예요 왜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지금 알고 있으니까 근데 율법을 경시하면 과거에 구원받았다고 내가 경험했던 그 기억 하나만 남아요.
근데 그 기억이 오늘 나에게 그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해주지 못해요.
왜냐하면 그때는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없어져버렸거든요.
율법을 멀리하면
빛이 어둡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지금 몇 장을 할애합니까?
1장 전반부 2장 그리고 3장의 절반을 할애해서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런 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지금 유대인들도 다 죄인이라고 얘기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그러면 유대인들이 도대체 뭐 어떤 유익이 있는 거야?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이 가진 유익이 뭐냐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많은이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여러분 이건 엄청난 특권이에요. 사도바울이 9장에 가서도 이걸 설명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왜 유대인을 선택하셨죠?
사도바울의 논리에는 명확해요.
그냥 그냥이라는 거예요. 그냥 유대인들이 훌륭하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선택한 게 아니고 누군가는 세상에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 복음을 보존해야 돼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이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부르신 거잖아요.
출애굽할 때 그 내용 여기 다 기록하게 하고 왕들의 역사와 모세부터 시작해갖고 모든 그들의 역사를 여기다가 그대로 담아가지고 훗날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선택한 거예요.
꼭 유대인이어야 되는가 아니요. 다른 민족이었어도 괜찮아요.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으면 될 테니까요.
유대인들을 선택한 것은 사실은 유대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제치를 아시고 예수 이름길을 선택하신 것은 이 민족이 다른 개신교인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통해서 전해야 될 기별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선택을 댄 거예요.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가 마지막 기교를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주자로 선택받은 것이 여러분 너무나 감사하지 않습니까?
저는 제 7의 안식일 예수지름 교인 된 것도 감사하지만 이 교단의 목회자로 된 건 진짜 로또 맞은 것 같아요.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근데 여러분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을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렇죠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특별한 우리가 특별해서는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런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3월 2일날 학교 가면은 선생님이 저기 너 너 가서 책 가지고 와 어디 가서 책 가지러 오라는 거래요.
교무실에 가가지고 책 들고 오라는 거잖아요. 선택받은 거예요.
책을 나눠줄 수 있는 선택
괜히 기분이 좋잖아요. 선생님께 내가 이런 어떤 봉사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가지고 특별해서 선택받은 거예요.
아니에요. 누군가는 선택을 해서 가서 가지고 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부름을 받은 거예요. 특별해서가 아니라 근데 유대인들은 착각을 했어요.
우리가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그 착각에 빠져가지고 멸망을 당한 거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그 선택은 그들에게 특권이라는 거예요.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을 믿으시게 하나님의 믿쁘심을 패하겠느냐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믿게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믿지 않으면 그럼 그거 하나님 잘못입니까?
하나님 잘못 아니라는 거예요. 그럴 수 없느니라 4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기 이 구절이 아마 여러분 이해가 잘 안 되실 텐데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하심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라 이게 어디에서 인용한 거냐면 이사야 52장 5절에서 인용한 거예요.
잠깐 가보겠습니다. 이 구절이 많은 경우에 굉장히 좀 애매하게 이해 하기에 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이 시편 52편은 어떤 구절이냐면 다윗이 범죄한 다음에 자신의 심정을 기록해 놓은 그 시편이 바로 시편 52편입니다.
그런데 시편 52편 5절에 보면 죄송합니다. 시편 51편이죠.
시편 51편 몇 절이냐? 4절 4절입니다. 1절부터 쭉 읽어볼게요.
하나님이요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극률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재하소서 물은 나는 내 죗가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러니까
바세바도 범하고 우리아도 죽였던 그 죄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 순전하시다 하리다.
지금 다윗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내가 주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런데 주 앞에는 주님은 정말 의로우신 분이고 주님은 정말 순결하신 분입니다라고 다윗이 했던 그 고백을 그대로 가져다가 사도바울이 뭐라고 얘기하는 거냐면 하나님은 정말 순결하시고 하나님은 정말 의로우신 분이야라고 하는 자신의 주장을 지금 뒷받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이해가 되셨죠?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아니 어떤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는데 그거 하나님이
훌륭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이 거룩하시지 않기 때문이 하나님 잘못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그런 거 아니고 하나님은 훌륭하신 분이야라고 지금 계속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이렇게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을 하리오 이건 또 무슨 말이냐면 만약에 내가 불의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한 거 아니냐 이렇게 지금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만약 그렇다면은 왜 그 사람을 왜 벌을 줘야 되겠느냐 그 사람은 그 사람 벌 주지 말고 그 사람 훌륭하다고 칭찬해줘야 되지 않느냐라고 지금 얘기를 한 거예요.
결코 그러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리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라면은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고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얘기한 이런 부분들이 사도바울의 오해를 받고 있는 부분이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지금 얘기한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롭지 못한 그런 태도나 모습들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그건 칭찬받아야 될 일 아니냐라고 사도바울이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있다고 사도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좀 어렵죠. 그죠 그러나 어쨌든 사도바울은 지금 얘기를 하면서 그렇지 않다.
결국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고 하나님만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이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다 뭐 아래에 있다고요?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였느라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0절에 기록된 바 시작 기록된 바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죄되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이제 분명하게 모든 사람에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데라고 생각했던 분 혹시 계십니까?
그 생각은 빨리 이제 버리자고요. 우리는 정말 부끄러운 사람들이에요.
너무나도 죄가 많은 사람들이에요. 근데
우리가 교회에 올 때는 다 어떻게 오죠? 죄인의 모습으로 옵니까?
아니면 꽤나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옵니까? 괜찮은 사람인 척 하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자신을 포장하는 거예요. 제 차가 중고차를 샀는데요.
게스인데 살 때는 정말 괜찮은 차인 줄 알고 샀어요.
근데 사고 보니까 잘 몰라 차에 대해서 잘 몰라가지고 이 차가 사고가 났던 차인 거예요.
그래가지고 사고 얼마 안 있을 때부터 시작해가지고 막 그 페인트가 막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그 녹이 막 해가지고 너무 지저분해가지고 제가 앞에 휜다를 얼마 전에 비싼 돈을 주고 갈았습니다.
근데 그거 휜다만 그런 게 아니고 가만히 보니까 페인트 안에 녹이 막 지금 올라오고 있어요.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흰색인 찬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드는데 문쪽 옆에도 막 녹이 막 다 지금 이렇게 막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지나면 녹이 그냥 온 사방에 다 퍼지겠다. 심지어는 본내 때도 이렇게 갈라졌는데 거기 막 녹이 막 이렇게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누구의 모습 같아요?
겉에는 멀쩡한 거예요. 겉에는 그냥 깨끗해 보여요.
근데 속에는 뭐가 가득한 거예요? 더러움과 죄가 너무나 가득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뭐라고 부르셨죠?
잘하시네요. 회칠한 무덤 그쵸? 속에는 뭐가 가득한데요?
썩은 내가 나는 시체로 가득 차 있는데 겉은 하얗게 칠해가지고 꽤나 괜찮은 것처럼 그런 척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만 읽고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의 역할이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요 모든 사람의 입을 어떻게 한다고요? 틀어막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을 올바로 알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내가 죄인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있겠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느라 율법의 역할이 뭐라고요?
깨닫는 거 이것 이상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요.
율법은 우리를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율법은 왜 지키죠? 그렇죠 그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삶에서 율법을 지키는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믿음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원은 믿음 플러스 율법이 아니에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거기에 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걸 분명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비춰봤을 때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이야기만 좀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2008년에 목회를 나왔는데요. 2008년에 목회를 나와서 이제 말씀을 보면서 제가 그때 발견했던 단어가 뭐였냐면 자아희생이라는 단어였어요.
자아희생 시대의 소망에 보면 자아 희생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왜 이 단어가 자꾸만 등장할까 이게 도대체 뭘 의미할까 계속 보다 보니까 자아 희생적 사랑이 하나님의 품성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리고 그것이 곧 시데소방 1장에 보면 율법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아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율법이구나.
그러면 전 그때 그 당시에 그 말씀이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와가지고 저의 모든 설교의 주제는 자아 희생에 맞춰져 있었어요.
자아 희생을 해야 되는구나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가 자아 희생을 하는 것이구나.
하늘에 가는 사람들은 자아 희생을 하는 사람들이 가는구나 깨닫고 제가 끊임없이 끊임없이 자아 희생을 노래하면서 설교를 했어요.
근데 2년을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저는 제가 그 당시에 이렇게 설교하고 이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근데 2년이 지났는데 더 제가 그 삶과 멀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 저희 아이가 이렇게 막 태어났을 때였는데 저는 밤에 진짜 잠을 잘 자거든요.
그래서 딱 누우면 일어날 때까지 안 뺍니다. 그리고 코를 걸어도 그냥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렇게 잘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목회자협의회 가도 꼭 저랑 코를 가장 많이 고는 그 형님이랑 방을 같이 쓰게 해줘요.
그럼 이제
자의생을 설교하고 자회생을 노래하면서 밤에 잠을 자는데 아기가 막 우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벌떡 일어나가지고 아이를 달래줘야 되잖아요.
그죠? 근데 잘 자는 거예요. 그냥 들리긴 해요 소리가 근데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 잘 잘 수 있거든요.
그럼 제가 자는 이유는 뭐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당신이 알아서 일어나서 애도 달래고 분위도 주고 하라고 지금 자기 희생을 한 겁니까?
안 한 겁니까? 그때는 막 자고 싶으니까 그냥 그렇게 해요.
근데 아침에 일어나고 나면 절망이 막 몰려오는 거예요.
야 나 이렇게 죄떼구나 내가 이렇게 정말 막 너무 막 내 자신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루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진짜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이 이 자아 존대의 정신 그때 제가 확실했어요.
자아 희생적 사랑은 하나님의 정신이고 자아 존대의 정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 정신은 사단의 정신이라는 걸 제가 아주 확실하게 깨닫고 이 두 축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분명하게 이해하고 내가 하늘에 가려면 이 정신을 내가 소유하지 않고는 내가 갈 수 없다 아주 결심을 하고 제가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안식일날 설교를 6시까지 준비를 하고 6시 넘어서야 집으로 갔어요.
보통 훌륭한 남편들은 안식일이 되면 오후 3시쯤은 적어도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이제 집 청소를 좀 도와주고 저희 집사람이 그때 이제 저희 아이가 돌이 막 지났었고 둘째를 임신하고 있어서 입덧이 한창 심했거든요.
그러면 정상적인 남편은 이제 오후 3시 정도에는 이제 가서 집도 정리하고 안식일 준비도 같이 도와주고 이러고 교회를 가야 정상적이죠.
그렇죠 근데 저는 율법이 뭔지를 잘 모르니까 제가 그러면서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집에 가서 이제 아내를 데리고 교회를 가야 되겠다.
6시까지 설교 준비를 하고 그리고 집으로 간 거예요.
근데 집에 문을 열고 딱 들어가는데 집사람은 너무 힘들어 가지고 지금 입덧을 누워가지고 하고 있고 첫째는 신경도 못 쓰고 그러고 있는데 저희 첫째가 이제 막 일어나서 막 이렇게 책상을 자꾸 걷기 시작할 때인데 책이라는 책은 책 꽂에서 다 꺼내 집어넣는 거예요.
바닥에 책이랑 막 한 가닥 어질러 있는데 문을 열고 딱 들어가는데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들어가야 정상이에요?
진짜 내가 좀 일찍 와야지 너무 미안하다 이렇게 들어가면서 여보 미안해 이렇게 해야 정상이잖아요.
그죠? 근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짜증이 확 나는 거 아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지금 설교 준비하고 집도 좀 정리해놓고 안식일 준비도 좀 해놓고 교회 갈 준비 다 해놓고 해야지 애도 씻기고 그 마음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제가 마음속으로 하나님 내가 이렇게 짜증이 확 올라옵니다.
절대로 제가 그러니까 그니까 그것 자체가 제가 죄인이라는 걸 그 당시에는 생각조차도 못했어요.
그냥 내가 화내는 게 죄구나 그 생각까지만 하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하나님 저 화내기 싫어요. 내 입에서 그 어떤 태도나 말도 예수님과 같지 않은 그런 모습이 나가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하고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나는 내 입에서 예수님과 같지 않은 말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을 거야.
굳게 결심을 하고 제가 방으로 들어가서 여보 나왔어.
이렇게 들어가서 유 집이 많이 어지러워졌네 하고 책걸이 막 꺼지면서 마음에 이 열이 막 올라오는데 저거나 빨리 씻자 하면서 막 이렇게 씻겨 가지고 빨리 갑시다 하고 준비하고 나오는데 한 7시 8분 정도가 됐어요.
7시 반에 예배인데 교회에 가려면 한 10분 이상 가야 되는데 이미 30분 전에는 그래도 부목사가 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죠.
근데 뭐 30분이 넘어서야 집에서 출발하니까 마음도 너무 불편한 거예요.
그게 다 오늘 설교인데 그래갖고 막 분주한 마음으로 막 가는데 하나님 제가 예수님과 같은 그런 모습 아닌 것이 제 안에서 나가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하면서 겉으로 엄청 편한 척을 하면서 운전을 하면서 막 가고 있었어요.
중간쯤 가서 좌회전을 하려고 차를 딱 섰는데 갑자기 뒤에서 집사람이 아 참 여보 영진이네 줄 거를 깜빡하고 왔어요.
그러는 거야. 지금 나는 늦어가지고 지금 막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지금 화가 나는데 내 속도 모르고 지금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아니 그러면 지금 이렇게 늦었는데 집에 갔다 가자는 거야 뭐야 도대체 이 말이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할아 제가 예수님과 같지 않은 모습이 제 안에 결코 나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래 여보 그럼 갔다 가지 뭐 늦으면 어때?
차를 유턴을 딱 했어요.
그래갖고 마음이 너무 막 불편하고 화가 나는데 막 푹 참으면서 집 앞에 주차를 딱 하고 여보 키 좀 줘 하고 손을 딱 내밀었는데 집사람이 막 그제서야 막 주섬주섬 키를 찾고 있는 거예요.
지금 아니 키를 미리 준비해야지 막 이 말이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꼭 누르고 하나님 저는 예수님과 같지 않은 그 어떤 품성도 내 마음속에 나오는 거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좀 이 마음이 좀 가라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가라앉기는 점점 더 올라오는 거예요. 지금 한마디 하고 나면 괜찮은데 너무 막 화가 나는 거야.
그래 키를 받아가지고 아 근데 제가 뭐라고 얘기했냐면 아 여보 천천히 해 괜찮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키를 받아가지고 들어가가지고 영진이는 한복을 챙기고 그다음에 냉동되어 있는 거 그걸 챙기고 그리고 이제 나와가지고 집사람한테 딱 갖다 줬는데 집사람이 하는 말 여보 이거 아닌데 와 정말 이게 막 열릴랑 말랑 열릴랑 말랑 하나님
여러분 그 왜 그 백조가 호수 위에 평화롭게 떠 있지만 발은 막 이렇게 젓고 있다고 그러잖아요.
제 마음속은 수없이 하나님을 막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럼 뭐 다시 갔다 오면 되지 하고 받아가지고 들어와서 바꿔가지고 갖다 주고 이러고 또 출발해가지고 막 오는데 7시 25분이 넘어서 교회 앞에 도착을 했어요.
근데 차 댈 데가 없어갖고 차들이 막 다 대고 있어가지고 저 위에다 차를 주차하고 아이를 데리고 팍 내리고 오고 있는데 막 마음속에 야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일찍 좀 준비하고 있으라고 요거 한마디만 해라 여기 막 여기까지 막 올라오는 거예요.
아니 화내지 말고 아주 선하고 아주 부드럽게 그래도 그런 얘기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누가 주로 생각이에요?
사단이 주는 생각이에요 하고 싶은 마음이 몇까지 올라오는데 꾹 참으세요?
지금 얘기하면 분명히 터진다 이거 그래서 꾹 참고 계속 하나님을 불렀어요.
하나님 도대체 그 약속된 평화는 도대체 언제 오는 것입니까?
난 도무지 못 살겠습니다 하고 교회 거의 30분 거의 다 돼가지고 교회를 들어가는데 목사님을 볼 면목이 없어요.
너무 죄송해가지고 집사님 작업반에 올려보내고 저는 제 목회실로 이렇게 목회실에서 이렇게 본당으로 들어갈 수 있거든요.
제 목회실로 들어가자마자 제가 땅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무릎을 꿇었어요.
제가 도무지 설교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거예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막 냉랭하고 차갑고 막 짜증과 화와 막 모든 것이 그냥 정말 제 마음을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냥 도망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막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정말 그 짜증나는 그 화나는 상황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역사들을 그렇게 많이 보여주시면서 나는 목사인데 왜 내게는 그런 평안을 도대체 안 주시는 거냐고 난 도무지 지금 이런 마음으로 설교단에 올라갈 수가 없다고 뭐 기적이라도 좀 베풀어보라고 막 제가 막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갑자기 제 마음속에서 촛불이 하나가 탁 켜지더라고요.
촛불이 하나가 탁 떠오르는 그 생각이 딱 떠오르면서 갑자기 여기서 그 온기가 아래 위로 순식간에 확 퍼지는데 순식간에 하나님의 평안이 제 마음에 임하는 거예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이 제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거예요.
0점 몇 초 만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거예요.
너무 놀랐어요. 그날 제가 아마 세상에서 제가 했던 설교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설교를 하지 않았을까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여러분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저의 여정길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기 시작하셨어요.
예수님과 같지 않은 그 어떤 태도와 모습과 말투와 이 모든 것들이 다 죄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그런 것들을 말씀해 주세요.
근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때때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도 그 당시에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몰랐습니다.
십자가가 뭔지는 더더욱이나 몰랐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요. 그냥 그분이 병을 고치신다더라라는 이야기만 듣고 그걸 믿고 나오면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라도 병 고침을 받아요.
못 받아요. 받아요. 기적이 일어나요. 그 당시에 저는 하나님을 잘 몰랐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도움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맛보기로 어떤 기적들을 베풀어주시는 경험들을 했던 것이죠.
여러분 그런데 그때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을 이제 이끌어가시기 시작하시더라고요.
근데 그때로부터 제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더 그 밑바닥까지 계속해서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나 절망적이고 힘든 그런 시간들을 제가 통과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더 이상 내 자신에 대해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게 너무나 명확해졌어요. 그런데도 또 속아요.
언제든지 내가 또 꽤나 훌륭하고 또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또 그렇게 생각할 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시작 어제 했죠.
우리가 공부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거 한 절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절입니다.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와 같은 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이 모든 죄를 갑없이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로마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그 은혜가 무엇인지, 사도바울은 그 은혜를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따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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