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템플스테이
정현수
받아들이는 것에 한계가 있는 내가 가끔 마음 졸이며 어떤 현실에 부딪치거나 그 상황 속에서 헤맬 때가 있다. 또 일상에서 누군가와 만날 때 그게 정도인 듯 당당하게 행동하거나 말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독선이다. 그릇이 큰지 작은지 도 모르고 내 모든 삶의 상황에서 경험했던 가지가지가 잘못, 혹은 편협 그릇된 판단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수용은 무한일 수 있고 넓은 바다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마땅치 않은 경험이나 생각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모습을 보일 때는 허위, 허영은 배제돼야 하고 최소한 별말 없는 중용이나 내면 깊숙이 가감 없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틱낫한 스님의 짧은 단락을 이용해 본다.
"가르침의 공덕은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정신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법화경'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감각에 큰 변화, 우리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참 모습으로 깊이 통찰하는 법의 눈을 가질 수 있다. 노랗게 시들어 버린 낙엽을 보면서 그 안의 본성인 초록의 싱그러움을 읽어낼 수가 있다."
그리고 성경 '지혜서'에서는 삶이 확연해질 수 있는 이런 구절도 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아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내 버킷 리스트에 있는 템플스테이는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지만 작년 9 월 이곳 해남에 이주해 온 후부터 구체화됐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불덕(佛德)은 늘 심취할 만한 오묘한 철학이었고 배움의 대상이었다. 가끔 여행 中 전국에 소재한 유명 사찰에 들러 경내의 고즈넉함과 오래된 아름다움을 접할 때,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는 매번 나를 돌아보게 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였다. 이번 템플스테이 역시 불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마침 설날을 전후로 조계종 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에서 2 박 3 일 디디고 템플스테이가 있었다. 불교의 실천 수행 가르침으로 조금이나마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더불어 사는 체험과 소기의 참가 목적을 위해 우린 내내 행복한 사흘이 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접어든다. 길 옆 계곡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한적한 분위기가 아늑하다. 조용한 그 길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고 모든(욕심 등) 걸 버리고 싶어 하는 부드러움으로 감싸 한없이 포근하다. 도랑 다릿돌과 작은 바위 밑 말라버린 풀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었 듯 나에겐 너무나 감상적이다. 동백나무는 곧 오는 봄을 위해 채비를 하고 삼나무 숲은 늘씬하게 뻗어 환한 빛을 향하여 곧은 정진을 하는 것 같다. 숲길을 허리가 불편한 내 걸음으로 족히 25여 분 이상을 걸은 것 같다. 곧 유선관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에 다다랐다. 그곳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피신 온 광주 사람들의 숙식을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이어 석조로 만들어진 피안교(彼岸橋) 다리가 나오고 이곳이 정진과 쉼이 있는 사찰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특이한 건 사천왕문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문수 동자와 보현 동자가 코끼리 등에 앉아 지혜와 실천을 위해 중생을 이끈다. 그리고 바로 밖에는 석장승으로 만들어진 금귀 대장과 수조 대장이 잡귀의 범접을 금하고 소원(所願)을 받아서 전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해탈문(불이문)을 지나 경내 뜰에 들어섰고 마당에서 대흥사 전경을 바라본 경관은 과히 장관이었다. 먼 듯 가깝게 막힘없이 탁 트인 두륜산을 병풍 삼아 전각(殿閣)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홀홀히 그 자리에 있다. 멀리 여덟 봉우리 아래 초의 선사께서 말년에 칩거한 일지암 암자 지붕이 어렴풋하고, 낙엽이 진 한 겨울의 산 중턱 오래된 나목이 덩그렇고 고독한 정취를 띄운다.
보물인 삼 층 석탑을 시작으로 대웅보전, 신중단, 천불전, 임진란 때 승병을 일으킨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서산대사 사당이 모셔진 표충사, 초의선사 동상, 목조 건물의 아름다움을 망라한 가허루 등과, 사랑의 연리(連理) 근인 느티나무를 간단하게 안내받은 후, 소히 절 밥인 저녁 공양을 했다. 나물, 김치 등 5 찬과 담백한 미역국과 함께 먹는 공양은 처음 접하는 원초적 인간 본질에서의 색다른 경험 같았다. 먹고산다는 것, 꼭 어떤 의미를 둔다는 것보다 문명이 없었던 고대 인류가 처절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투쟁 속에서 단순한 배고픔과 어떻게든 낳아서 번식해야 한다는 깨어있는(?) 사고(思考)에서 출발한 본능이 아닌가 싶다. 고로, 첫 끼의 공양은 나에겐 거처 가야 할 수행이었다. 식사 후 잠깐 숙소에서 쉴 때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내 아웃이 된 '노 길수'씨와 한 시간여를 대화를 했다. 그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대단했다. 불가(佛家)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에게 주로 업을 씻고 덕을 쌓는 금강경에 대해 자세한 설명으로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나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와 나는 템플스테이가 끝날 때까지 서로 소홀이 하지 않는 친교를 이어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차분한 저녁 예불은 '붓다'에게 세 번 절하는 것으로 시작으로 문수, 약수 보살에게도 세 번 절한다. 이어 종소리와 함께 노전스님이 게송(偈頌)을 읊조리는데 그 소리가 가히 낭랑하기도 하며 우렁찬 호소 같기도 하다.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께 게송으로 드리는 그레고리오 성가 미사 의식과 엇비슷하다. 내가 뜻을 알 수 없는 스님의 염불과 진언(산스크리트어)을 계속 독경하며 간간이 절을 하는 의식은 계속된다. 밖에서는 서른세 번의 범종이 웅장하게 울려 퍼져 내 분심을 바로잡는 듯하다. 여기까지는 내가 가끔 접해보고 대충 아는 의식이다. 부처님 왼쪽 벽면에 탱화가 한 장 있다. 그 탱화에는 제석천신, 사천왕신 등 여러 산신이 그려져 있다. 일반 신도들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이 신들을 위해 절을 하고 스님들은 '갑시다 갑시다 저 언덕으로 갑시다(아제 아제 바라아제)' 하는 '반야심경' 일구(一句) 법문을 해주는 것이라 한다. 일종의 해탈하고 성불하시라는 뜻일 게다. 내가 알지 못했던 이 부분을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등 그 당시 젊은 스님들이 일제 강점기에 무분별하게 흐트러졌던 것을 한국 불교의 선(禪) 중심의 내적 승화와 종파적 정체성을 위해 해방 후 신중단 의식이 반야심경 독송으로 바뀌었다고 한다.(1947 년 봉암사 결사의 일부분)
예불이 끝난 후 우린 강당에 모여 만두 빚기를 했다. 죽 둘러앉아 친근한 느낌으로 덕담을 나누며 우리의 우정의 친교를 기리기 위해 첫 만남을 가졌다. 서울, 수원, 부산, 인천, 전주, 진주, 광주등 전국 곳곳에서 온 열댓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님과 함께 연(緣)을 화두로 만두 만들기 솜씨를 뽐낸다. 스님은 적당한 농으로 움츠린 우리 마음을 이완시키고 만두는 참석한 아가씨들의 장래 태어날 이쁜 딸을 위하여 예쁘게 모양을 잡아간다.
지금까지 뭇사람들과 나의 만남은 어떠했을까? 아무 열의도 없는 미지근한 삶은 자연히 누군가와 만남이 꺼려진다. 나일 먹고 이젠 열정의 흥분도, 그렇다고 감동도 없는 하루하루가 아무 변화나 요동 없이 이어간다. 그런 일상이 조금은 아니 아주 많이 답답하다. 그러한 내가 문제점이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남 탓만 하거나 안일 무사주의에 빠져 나 자신에게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새삼 '내 안에 있는 나를 꾸준히 새롭게 하라'는 중국의 상나라 '탕왕' 말이 기억난다. 내 인생에서 그저 편안히 안주하려는 꿈을 버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죽을 때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그들과의 소통과 만남은 서로 무언가 전해주고 추억을 남겨야 된다는 또 하나의 텃밭인 연(만남) 같은 것이다.
나는 항상 두 세시에 잠자리에 들곤 하지만 잠자리가 바뀌거나 다음날 중요 행사가 있을 때는 전날 잠을 잘 못 잔다. 10 시 즈음 잠자리에 들었지만 어둠 속에서 잡생각만 맴돈다. 지나간 나날들이 회의가 되고 자국으로 남아 무너져 내린 오래된 성벽처럼 아스라하다. 결국 눈을 감은 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4 시쯤 새벽 예불은 어제저녁 예불과 별 차이는 없었지만 예불 후 음력 정초라 그런지 동안거 중인 동국선원장이신 정찬 스님과 주지스님, 선방 스님, 대중 스님 등 여러 스님들이 새로운 새해를 시작한다는 의미로 통알(通謁 불교의 신년 하례식) 의식을 지냈다. 스님들과 일반 신도들은 부처의 자비를 구하며 존경의 예로 어른 스님들에게 삼 배 절을 올리고 덕담을 듣는 순서로 이어졌다. 그러나 내 맘은 거기에 있는 그들 모두의 행복 속에서 사순시기에 '예수님'의 고통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고난, 시련을 겪으시면서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에 들지 않으시고 참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신 기간이다. 우린 어려움 속에서 모든 걸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주신 그분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 행복했던 시절이 떠올려지듯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에 떠 올려야 할 기독교인의 흔한 믿음이 아닐까?
숙소로 돌아와 3 시간여를 잔 것 같다.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졌다. 잠깐 경내를 산책하고 점심 식사 후 노선생과 함께 일지암에 올라갔다. 내심 달콤 쌉쌀한 녹차 한 잔을 얻어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약 1. 5km 거리인데 역시 허리가 문제다. 예불 시간에 앉았다 일어났다 절하면서도 참아 냈는데 여간 고통이 아니다. 그 완만하고 짧은 거리를 세 번은 쉰 것 같다. 일지암에는 초의선사께서 거처하신 초가(복원)도 있고 암자도 있다. 기웃기웃하다가 그런 내가 답답해 소리 내 청했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다. 분명 밖에 차(車)도 많고 댓돌 위에 신발도 많은데 대답이 없다. 나중에 템플스테이 김 팀장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너무 많은 사람이 와 차(茶)를 달라고 하니 전부 응할 수가 없어서 그리한단다.
이젠 어지간히 단련된 저녁 공양과 예불을 마치고 우리 모두는 다실에 모였다. 스님께 삼 배를 올리고 우리는 정중히 차를 청하였다. 어제 만두를 같이 빚은 일아 스님이었다. 동안거 中인 주지스님 대신 나오셨다. 속세에서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는(참석자 중 홍익대 동문인 한 아가씨가 있어서 알게 됨) 스님은 동안거 중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뉴월 피죽도 못 얻어 자신 듯 그야말로 깡마른(겨우 지탱할 만한) 체구에 키만 훤칠하다. 눈은 움푹 패고 볼살은 쑥 들어가 덕분에 나온 광대뼈와 슬픈 사슴 같은 긴 목이 조화돼 자그마한 얼굴이 앙증맞다. 그만큼 동안거 수행이 어렵다는 증거다. 스님이 준비한 차는 무려 30 년 묵은 보이차다. 왠지 우리들에게 좋은 차를 대접하고 싶었다 한다. 첫맛은 쌉쌀했으며 이어 여운이 잠깐 남겨지는 단 맛과 목구멍 끝에 걸쳐지는 신맛인 듯 은은한 박하 향이 정신을 깨운다. 차 욕심이 많은 나는 꽤 많은 여러 잔의 차를 마셨다. 아직 나를 내려놓지 않은 어설픈 짓이다. 이어 스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차 한 잔과의 화두는 '너를 안아 주어라'였다. 따뜻한 손길로 찻잔을 감싸 듯 서로의 온기로 기(氣)를 나눈다는 것은 연과 업의 반응을 알아본다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웅다웅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고 인생사 새옹지마가 아닌가 하는 말씀이라고 감히 해석하고 싶다. 내 안에 나를 두지 말아야 한다. 내 안에 내가 머물면 그건 욕심(利己的)이 되고 나 밖으로 나오면 이타적(利他的)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인 것 같다. 스님들의 예불 시간 때문에 아쉽게 스님은 가시고 우린 늦은 시간까지 계속 담소를 나눴다.
다음날 새벽 예불 시간 전 3 시부터 눈은 말똥말똥한데 숲으로부터 윙윙거리는 제법 세찬 바람이 분다. 숙소 옆 목재 더미를 덮은 비닐 포장이 심하게 바스락 거린다. 계곡의 바람 소리가 거세다.
산사의 바람은 절도 있는 냉정으로 거세게 나를 몰아친다
밤 하늘 어둠이 바람에 날린다
이기와 편협의 한가운데에 있는 나를 바람이 질타한다
그 바람이 내 귀를 스치고 곧 번뇌로 마음을 훔친다
삼라만상의 모든 희로애락이 노래하듯 쉼 없이 속삭인다
연과 업이 속성으로 바스락 소리를 낸다
바람은 삶과 죽음도,
자비와 용서도,
분노와 타협도 모든 걸 아우른다
지나간 바람이 고통과 참회로 다가온다
다가올 바람이 금강문 앞에서 덜덜 떤다
바람은 회오리가 되고 갈팡질팡한다
어디로 갈 거나
어디로 갈 거나
절념을 할 거나
안 차게 맞닥뜨려야 하나
어찌 하나, 에라 모르겠다
하여 아침 예불은 포기하고 나를 더욱 정진케하는 부처님 마냥 옆으로 누워 열반으로 통하는 상념에 젖다가 다시 잠에 빠진다.
아침 공양 후 거처를 청소하고 우린 다시 강당에 모였다. 마지막 행사인 요가명상을 하기 위해서다. 김 팀장이 지도하는 요가명상은 허리가 불편한 내가 따라 하기엔 힘들었다. 동작이 얄궂고 난해하다. 요가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이라는 걸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요가에 접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가 아닌가 한다. 내 상식이 틀렸다. 마음을 움직이는 수련인데 막연히 동작이 큰 신체 활동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요가는 호흡을 같이 하면서 움직임 하나하나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 둘이면서 둘이 아닌 그걸 일체로 보는 것이다. 불가에서 3 계의 하나인 색(色)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하나가 되어 생명 본질의 원인인 일체, 일념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요가도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기 정진을 위한 수련이다. 마음도 어지럽고 허리가 안 좋은 날 위해서도 틈나면 해볼 참이다. 마지막 점심 공양 후 노선생과 나는 함께 땅끝 마을 전망대와 달마산 미황사를 둘러보기 위해 일주문을 빠져나왔다.
"오! 고귀하신 하느님, 제가 어디든 머물 수 있게 하는 당신 사랑에 늘 고맙고 행복합니다."
2018.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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