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죽음의 땅 동사군도(東沙群島)
①
중원의 최남단인 광동성(廣東省) 조양(潮陽)에서 범선을 타고 꼬박 칠주야를 가면 망망대해에 표표히 떠 있는 섬들을 만날 수 있다.
― 동사군도(東沙群島).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섬들이 고도(孤島)의 외로움을 의지하듯 모여 있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섬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 험난한 풍랑과 싸우면서 굳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앙의 섬이 가장 컸다. 섬 전체가 온통 짙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다른 네 개의 작은 섬이 호위를 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아 청도(靑島)라 불리는 중앙의 섬에는 작은 포구(浦口)가 있으나, 그곳에 정박되어 있는 것은 한 척의 나룻배가 전부였다.
포구에서 섬 중앙으로 들어가면 몇 채의 건물이 나온다. 건물 뒤쪽은 삼면이 병풍처럼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산봉우리는 의외로 험준했다. 산기슭에는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위로 오를수록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난립했다.
해안에는 백사장이 따가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이따금 밀려오는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뱉어내는 광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청도 주변의 작은 섬들은 암도(岩島), 송도(松島), 초도(草島),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는 고도(孤島)란 이름이 붙어있다.
이렇듯 아름다운 동사군도.
때묻지 않은 원시적인 풍경은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 했으나 실제로는 정반대였으니.......
사사도(死死島)!
동사군도의 다른 이름은 이처럼 죽음을 상징하는 사사도였던 것이다.
②
우기(雨期)가 끝났는지 천중(天中)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뜨거운 햇살을 동사군도에 쏟아붓고 있다. 연일 광란하던 파도도 지친 듯 정적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렇듯 적막한 동사군도의 한곳에서는 처절한 노역(奴役)이 계속되고 있었다.
슈― 우― 욱―!
짜― 악!
무더운 공기를 가르는 채찍 소리에 이어 섬뜩한 격타음이 검게 그을은 사내의 등에서 작렬했다.
중앙의 섬 청도에 있는 관사(官舍) 앞.
황색의 관복을 입은 차가운 인상의 중년 관리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선혈이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사지가 나무기둥에 결박된 채, 그것도 거꾸로 묶여 있는 수인의 등에는 백육(百六)이란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그의 수인복은 갈가리 찢겨 있었고, 시뻘겋게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짝! 쫘악!
채찍은 인정사정 없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으! 지독한 놈.... 오늘도 비명 한 번 안 내겠다 이거군?"
찌는 듯한 무더위다.
강편(剛鞭)을 휘두르느라 땀을 비오듯이 쏟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년인은 간수들 중 한 명인 동포락(童砲駱)이었다.
얄팍한 얼굴과 가느다란 수염, 날카로운 눈매의 동포락은 잔혹한 성격으로 인해 수인들에게 사신(死神)이란 별호로 불리우고 있었다.
"좋다! 백육호.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주마.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경고임을 명심해야 할게다. 다시 한 번 약초를 버렸다가는 그날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놈을 풀어줘라!"
먼 발치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던 거지 몰골을 한 수인들 몇명이 동포락의 눈치를 보며 다가와 백육호의 결박을 풀어냈다.
백육호는 바닥에 눕혀졌다. 살이 터지고 뼈마저 노출된 상태라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지 난감한 상태였다. 수인들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는데,
"제가 할테니 비켜 나세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 역시 수인복을 입고 있었는데 삼십대 정도로 보였다. 비록 허름한 차림에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타고난 미색만은 감출 수 없는 듯 여전히 매력이 흐르고 있었다.
수인번호 백삼(百三).
십 년 전 그녀에게 붙은 운명의 이름이었다.
실상 그녀의 나이는 사십줄에 접어 들고 있었다. 백삼호는 동사군도에서 유일한 여인이기도 했다.
백육호의 처참한 모습을 내려보며 한숨을 쉬던 백삼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터진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찢어진 수인복이 상처에 늘어붙어 있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떼어내야만 했다.
이때, 동포락은 음탕한 시선으로 백삼호의 뒷모습을 핥듯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움직였다.
갑자기 그는 채찍을 휘둘렀다.
"이 우라질 놈들! 뭘 보고 있느냐?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일들이나 해라!"
"억!"
"아이쿠!"
수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백삼호는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료에 열중했다. 그러다 손길이 멈췄다. 백육호가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며 말했다.
"됐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군요."
말을 마치자 백육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더니 절뚝거리며 수인들을 따라 걸어갔다.
"......."
중년여인 백삼호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멋대로 흘러내린 장발과 수척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어깨에서 그녀는 젊음의 힘을 느꼈다.
'오십 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수인들 중에서 혹독한 고문과 강제노역에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백육호밖에 없어....'
백삼호는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자신과 함께 끌려와 참담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바람에 지금도 심약해 보이기만 하는 아들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백삼호!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자는 관사의 경비를 맡고 있는 봉두수(奉斗秀)란 관리였다.
"도주님께서 노발대발하고 계시다! 어서 가자!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다."
봉두수는 백삼호의 소매를 거칠게 잡고 끌고갔다. 백삼호는 치를 떨었다. 도주란 자가 그녀를 찾는 이유란 뻔했기 때문이다.
대낮에 관사에 별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사사도의 제왕(帝王)이나 다름없는 조탁(曺卓)이 그녀를 찾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동사군도에 사람의 발길이 처음으로 닿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대명(大明) 만력제(萬曆帝) 십일 년 유월 경이었다.
동사군도는 중원대륙과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섬 주위를 휘돌고 있는 험악한 와류(渦流)로 인해 인간이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십 년 전 죽음의 와류를 뚫고 두 척의 전선(戰船)이 동사군도에 들어왔다. 전선에서 내린 것은 백여 명의 관리와 이백 명에 달하는 수인들이었다.
그때부터 삼 개월 간격으로 수인들과 곡식, 가축, 의복, 술과 차(茶) 등의 물품을 실어왔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불변의 법칙으로 내려왔다.
사실 이곳까지 수인과 생활물품들을 보내는 것은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단순히 나라의 죄인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수인들은 수시로 보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섬 사사도에 남아있는 수인들은 오늘날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너무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중노역을 감당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목숨을 잃은 수인들은 천 명이 넘었다. 그들은 사사도에 발을 딛은 순간부터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뼈를 묻게 된 것이었다.
③
"다음!"
관리 팽삼산(彭三山)은 짜증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십 년 동안 반복된 일과에 그는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약관 이십 세에 상관(上官)인 스승인 곽초량(郭焦亮)과 함께 절해고도인 사사도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남다른 각오가 있었다.
그것은 황궁어의(皇宮御醫)로 봉직한 스승의 비전의학(秘傳醫學)도 전수받고 새로운 약재(藥材) 발굴에도 동참하여 공을 세워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어서 흘러 오 개월 남아있는 임기를 채우고 중원에 있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이즈음이었다.
석조가옥의 입구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있던 수인들 중 맨 앞쪽에 서 있던 한 명이 가옥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투박한 침상과 의자가 덜렁 놓여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짐승의 가죽을 씌운 커다란 의자에 의원인 듯한 노인이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서 앉아라!"
노인 옆에 서 있던 팽삼산의 호통에 막 들어선 칠순 가량의 수인은 황급히 의자에 앉았다. 노인의 수인복에는 칠오구(七五九)란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칠백오십구,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떤가?"
곽초량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칠오구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곽초량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미련한 놈!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 대답 하나 제대로 못한단 말이냐?"
칠백오십구호는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인! 아닙니다. 이제 막 말씀을 여쭐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말해봐라."
"예, 예.... 어제에 비해 통증이 가라앉기는 했으나 아직 귀가 울리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참... 숨도 찹니다요."
"나른하고 어지러운 것도 여전한가?"
"예, 바로 그렇습니다, 대인."
"크음......."
곽초량의 용모는 특이한 데가 있었다. 지나치게 마른 체구도 그렇거니와 독사를 빼닮은 눈매, 굴곡진 매부리코와 유난히 불거져 나온 광대뼈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곽초량이 안색을 찌푸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칠백오십구호는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옷벗고 침상에 누워라."
곽초량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칠백오십구호는 수인복을 ㅉ듯이 벗어 던지고 침상에 올랐다. 칠백오십구호의 벗은 몸은 장작처럼 말라 있었다.
곽초량은 그의 몸 곳곳을 쿡쿡 눌러보고는 맥없이 늘어져 있는 남근(男根)을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물었다.
"계집 생각이 아직도 전혀 없는가?"
칠백오십구호는 큰 죄를 지은 양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그, 그것이.... 요상스럽게 방금 전 백육호를 치료하느라 쪼그려 앉아 있던 백삼호를 보노라니 그만... 흥분이 되어......."
"오호라! 지난 오 년 내내 죽어있던 뿌리가 되살아났단 말이냐?"
"예, 부끄럽게도......."
곽초량의 안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게 어디 부끄러운 일이냐?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지, 안그런가 삼산?"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던 팽삼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물론입지요, 고희를 넘긴 늙은이가 잃었던 성욕을 되찾았으니 경하할 일이지요."
조롱기가 다분한 어조였으나 곽초량은 개의치 않고 칠백오십구호를 주시하며 말했다.
"약이 효험을 발휘하는 것 같으니 앞으로 내 말대로 처신만 잘한다면 네놈은 틀림없이 무병장수할 것이다."
그러나 칠백오십구호의 얼굴에는 조금도 좋아하는 빛이 없었다.
"삼산, 이 늙은이의 약을 가져와라."
팽삼산이 들고온 두 개의 사발에는 각각 검붉은 색과 갈색의 탕약이 담겨 있었다.
곽초량은 먼저 갈색의 탕약을 칠오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약은 열두 가지 약재 외에도 산조인(=대추씨)과 만청(=순무우)를 갈아 지난 밤 삼산이 정성을 다해 달인 것이다. 이걸 열흘만 복용하면 토사광란으로 인한 빈혈(貧血)이 사라질 것이니 그리 알고 먹어라."
칠백오십구호는 약사발을 받아 단숨에 비워 버렸다. 곽초량은 이번에는 검붉은 색의 탕약이 든 사발을 건네주며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약은 네놈도 알고 있듯이 중원천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다. 너의 젊음을 되찾아준 것도 이 약재 덕이니 향후 삼 개월만 더 장복한다면 불로장수(不老長壽)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약사발을 건네 받은 칠백오십구호는 곽초량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뭐 하는 게냐? 어서 비우지 않고!"
곽초량의 냉엄한 독촉에 칠백오십구호는 울상을 한 채 사정했다.
"대인, 소, 소인은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약을 먹고나면 몇시진 안에 입으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가 계속되니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이 약만큼은 거두어 주십시요."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감히 항명하겠다는 거냐? 삼산! 가서 동포두를 불러와라."
칠백오십구호는 대경실색하여 들고 있던 탕약을 벌컥벌컥 들이켜 버렸다.
"대인, 다 먹었으니 사신(死神)... 아니 동포두 나리만은 부르지 말아 주십시요"
곽초량은 사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의자에 걸터앉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칠백오십구호, 왜 그리 내 진심을 몰라 주는가? 나는 의원으로서 이곳에서 가장 고령인 자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걸세. 무릇 질병이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네. 그러니 쓸데없는 잡념일랑 다 떨쳐 버리고 늘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하게."
"예, 예......."
"앞으론 자네를 노역에서 빼달라고 동포두에게 말해 두겠네. 그러니 돌아가 마음 편히 쉬도록 하게."
하지만 칠백오십구호는 조금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절을 한 후 힘없이 밖으로 나갔다.
곽초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삼산, 아무래도 저 늙은이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구나. 난 조도주와 상의 좀 해야겠다. 나머지 놈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그렇게 합죠."
팽삼산의 맥없는 대답을 뒤로 한 채 곽초량은 빠른 걸음을 밖으로 나갔다.
만해전(萬海殿).
사사도의 제왕 행세를 하고 있는 조탁이 기거하고 있는 만해각은 관사의 뒤쪽으로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울창한 해송림(海松林)을 뒤에 두르고 수인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만해전은 조탁의 집무실 외에도 넓직한 대전이 있고 안쪽으로는 호화롭게 꾸며진 침실이 있었다.
그밖에도 몇 개의 방이 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 섬의 유일한 여인인 백삼호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말단 간수인 봉두수도 이곳에서 살았다.
"흠! 칠백오십구호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이오?"
집무실.
조탁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있다 곽초량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거구의 중년인으로 온몸이 살덩이로 뭉쳐진 듯했다.
"물론입니다. 이미 많은 수인들이 부작용으로 죽어버렸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칠십이 넘게 산 것은 칠백오십구호가 유일합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결실을 보게 될텐데 만일 그자가 덜컥 목숨을 끊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는 것입니다."
조탁은 살덩이로 파묻히다시피한 눈을 꿈벅거리며 물었다.
"지난번 곽의원의 말인즉 백육호와 백사호가 가장 중요한 관찰대상이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렇습니다. 그 두 놈은 육십구호와 백삼호 계집과 함께 십 년 세월을 버텨낸 자들입니다. 물론 육십구호와 백삼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나 그 두 놈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각종 약재를 밥먹듯이 소화해 내고 있을 뿐더러 다른 자들과 달리 체격도 당당합니다. 이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따라서 그 두 놈을 연구하면 머지않아 이유를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급한 것은 칠백오십구호입니다. 그 늙은이는 근자 들어 부쩍 말수가 줄고 매사에 부정적인 것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그자가 과거의 팔백이십칠호 늙은이처럼 스스로 목이라도 맨다면 그 책임은 도주께서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조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곳의 죄수들 관리는 도주의 책임이 아닙니까? 게다가 오 개월 후면 본인이나 조도주나 모두 후임자와 교대하여 중원으로 돌아갈테니 당연히 왕야(王爺)께서 그동안의 일들을 물을 터인즉 그때 가서 책임추궁 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조탁의 가느다란 눈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왕야께 미주알고주알 다 고해 바치겠다는 얘기구만!'
그는 곽초량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럼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인가? 칠백오십구호의 주리를 틀고 사지를 결박해 놓으면 되겠는가?"
"그건 역효과만 초래할 것입니다. 가뜩이나 삶에 미련이 없는 늙은이를 묶어 놓으면 아마도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탕!
마침내 조탁은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것 보게, 곽의원!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내가 그 늙은이를 하루종일 업고 다니며 구슬리기라도 하란 말인가?"
곽초량은 얄밉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도주께서 그 늙은이를 좀 구슬러 주어야 합니다."
"이런 젠장할!"
육중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조탁은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머리 끝까지 솟아오른 노기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곽초량은 경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쯧쯧! 개 같은 성질 하고는. 하긴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절해고도의 수장으로는 저런 흉폭한 작자가 제격이기는 하지.'
그는 비로소 부드럽게 말했다.
"도주, 그만 진정하십시오. 사실 도주께서 직접 수고하실 일은 없습니다."
조탁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곽초량을 노려보았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칠백오십구호로 하여금 삶에 애착을 느끼도록 만들면 됩니다."
조탁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곽초량은 은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늙은이에게 몸 보시를 시켜주는 겁니다."
"몸 보시라?"
"이 동사군도에 계집이라면 백삼호밖에 더 있습니까?"
"뭐라고?"
조탁의 분노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자네는 나와 그 계집의 관계를 몰라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건가?"
곽초량은 조금도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조도주! 공사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 계집은 조도주의 정실도 무엇도 아닙니다. 기껏 무료를 달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요긴하게 쓰자는데 어찌 그리 노여워 하십니까?"
"......!"
조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속이 타는 듯 술병째로 벌컥벌컥 술을 마신 후 침을 퉤! 뱉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치자. 그런데 그 늙은이가 계집을 품을 수나 있단 말인가?"
"물론이오."
곽초량의 대답은 간단했다.
"못 믿겠네. 이미 칠십이 넘은 늙은인데 고목나무에 꽃이라도 폈단 말인가?"
"바로 그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도주께서 협조를 해 주셔야 합니다."
"난 절대 믿을 수가 없네."
곽초량은 차가운 시선으로 조탁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을 다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바랍니다. 어쩌면 칠백오십구호에게 도주와 내 목숨이 걸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잘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십 년의 세월을 모두 보상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탁은 곽초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네놈이 걸핏하면 왕야를 내세워 날 협박하고 있다만 두고 보자, 언젠가 네놈을 설설 기게 만들테니!'
조탁은 다시 술병을 움켜 잡았다.
④
동사군도에 밤이 찾아 들었다.
황홀할 정도로 붉은 노을이 온통 서쪽 수평선을 물들이다가 암갈색으로 그 색조가 바뀐 후, 급격히 어둠이 밀려 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수인들은 모두 옥사로 들어갔다.
옥사의 내부는 단순했다. 중앙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앙쪽으로 한 자 높이의 낮은 나무 침상이 길게 열을 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은 유시(酉時)였으나 대부분의 수인들은 침상에 쓰러져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한낮의 무더위와 노역에 지칠 대로 지친 탓이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그들로서는 잠을 자는 것만이 가장 행복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크고 작은 병을 한 두 가지씩은 앓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모두 퀭한 눈에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외인 자도 있었다.
좌측의 침상 열 맨 끝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젊은 사내였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고 음성을 죽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봉두난발(蓬頭難髮)의 노인.
그는 작은 키에 뚱뚱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배는 공처럼 둥그렇게 불러 있었다. 나이는 육순 가량 되어 보였는데 혈색이 불그레하여 정력적으로 보였다.
노인의 왼쪽 침상에는 역시 장발의 젊은 수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동포락에게 채찍질을 받았던 백육호였다. 오른쪽 침상에는 냉막한 표정의 수인번호 백사번(百四番)이 누워 있었다.
이들 삼 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백삼호 여인과 함께 십 년 전 사사도에 온 이래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홍안의 뚱보노인이 괴소를 흘렸다.
"크흐흐, 백육호. 네놈은 천운(天運)을 타고난 놈이야."
백육호는 풀즙을 자신의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기실 그는 수도 없이 상처를 입었었다. 그때마다 하찮아 보이는 풀뿌리나 풀 으깬 즙을 상처에 바르면 말끔히 치유되곤 했다. 그것은 지난 십 년 동안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었다.
"육노야(六老爺),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런 미련한 놈이 있나? 수백 번도 넘게 겪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오늘 네놈이 쏟아낸 피 속에는 어제 처먹은 독물(毒物)이 담겨 있단 말이다."
백육호는 노인이 준 목통(=으름덩굴 말린 것)과 인동초(忍冬草)를 으깨어 만든 즙을 상처 부위에 발라나갔다. 그는 이번 상처도 며칠 안으로 말끔해지리라 믿으며 말했다.
"또, 그 말이오? 아무때고 한칼에 죽일 수 있는 벌레만도 못한 우리들에게 뭣 때문에 번거롭게 독물을 먹인단 말이오? 제발 쓸데 없는 말은 그만 두시오."
"끌끌! 석두가 따로 없군!"
"육노야가 도주와 무슨 앙심이 있는지 몰라도 근거 없는 헛소문으로 분규를 일으키지 마시오. 안 그래도 이곳 수인들은 하루하루를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지 않소?"
백육호의 말에는 힐난하는 어조가 들어 있었다.
뚱보노인, 즉 수인번호 육십구호는 겉으로는 화가 난 척 했으나 내심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녀석의 무심한 눈빛에 매료된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구나. 그러고보니 이놈도 벌써 스물이 다 되었구나. 바깥 세상이라면 천하를 질타할 놈인데 이곳에서 썩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란 말야.'
노인 육십구호는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내 그만 하마. 네 녀석 말대로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느냐? 자, 그럼 누워봐라."
백육호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백사호를 향해서였다. 백사호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백사호, 오늘은 네가 먼저 육노야와 놀아주는 게 어떠냐?"
백사호의 눈이 떠졌다. 가늘었던 눈이 커지자 섬뜩하도록 찬 안광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것은 야수의 눈빛이었다.
"백육호, 오늘은 저 영감과 놀 기분이 아니다. 난 그만 두겠다."
"뭐, 뭐라고? 놀아줄 기분이 아니라고? 이런 썩어빠질 놈들! 너희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냐?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이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진정하시오, 육노야. 오늘은 백사호의 기분이 안 좋은 듯하니 소생이나 두들기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게 좋겠소."
육십구호는 침을 퉤 뱉었다.
"육시를 할 놈, 좋다. 그럼 네놈을 피곤죽으로 만들어 주마."
백육호는 벌렁 드러누웠다.
그의 표정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그에게 다가간 육노인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방금 전 장난기가 가득했던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쏘아나오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육십구호 노인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두 손으로 백육호의 온몸을 주물러 나갔다. 근육을 세게 누르는가 하면 수족을 들어 올리고, 때로는 사지관절을 멋대로 비트는가 하면 손바닥으로 근육을 밀기도 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한 동작이었으나 어느덧 육노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장난스런 행위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한 시진이 지나갔다.
육노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겉옷이 찰싹 달라 붙어버렸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눈 속으로 파고드는 땀방울을 떨구어 내며 쉴새 없이 백육호의 사지를 주물렀다.
한편 백육호는 자신의 좌측 견갑골(肩胛骨) 부위를 강하게 누르는 육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육노야, 십 년을 하루같이 매일밤 이 고생을 하는 까닭이 뭐요?"
"이놈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사람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늙은이가 이러는 걸 몰랐단 말이냐?"
백육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노인은 자세를 바꾸며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네놈은 무엇때문에 매일밤 노부 앞에 자빠지는 것이냐?"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오? 노망난 늙은이가 하도 졸라대 고통을 참아가면서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오?"
육노인은 키득거렸다.
"클클! 장군 멍군이로구나. 오냐, 네놈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그래, 나때문에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단 말이지? 에라, 이 썩을 놈아!"
퍼억!
"우― 욱!"
느닷없이 복부에 작렬하는 육노인의 발길질에 백육호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았다. 그 모습이 저으기나 만족스러웠는지 육노인은 빈정거렸다.
"웬일이냐? 채찍질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던 놈이? 약을 주랴?"
발끈한 백육호의 고함소리가 막 터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르륵!
굳게 닫혀 있던 옥사의 석문이 열렸다.
밖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둠을 등진 채 네 명의 인물이 들어섰다. 옥사 안은 밤새도록 침침한 유등(油燈)이 켜져있으므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곽초량과 팽삼산이 두 명의 옥졸과 함께 육노인에게로 다가왔다. 유등에 반사된 곽초량의 독사눈과 돌출된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감상 잘 했소이다. 이미 천 년 전에 맥이 끊겼다는 전설의 추나요법(推拿療法)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소.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육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아뿔싸! 이 생쥐 같은 놈이 창틈으로 엿보는 것도 모르고 추나요법을 시전했으니.... 이제 나도 갈 때가 됐구나. 귀가 이렇게 어두워져서야.'
내심 이렇게 자책했으나 육노인은 겉으로는 느물스럽게 대꾸했다.
"역시 황제 폐하를 모시던 어의라 제법 줏어 들은 것은 있구만."
"아니? 이 늙은이가 감히 뉘 앞이라고!"
옥졸이 눈알을 까뒤집고 나섰다. 곽초량은 손을 들어 옥졸을 제지하며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다른 수인들 상태를 확인해 보도록 해라."
옥졸들이 돌아서자 그는 다시 육노인에게 말을 던졌다.
"어쨌든 이것으로 백육호에게 남아있던 의문 중 하나는 풀렸지만 한 가지 더 묻겠소. 대체 저놈을 어떻게 돌봤길래 저리 완벽한 신체로 만들었소?"
육노인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다만 오늘같이 잠 안오는 밤 서로 안마나 해주곤 했지."
"흐흐흐, 추나요법이 안마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오."
"곽가야! 네가 알고 있는 추나요법이란 게 대체 무엇이냐? 그 본류가 이미 천 년 전 실전됐다고는 하나 평범한 세인들도 쉽게 해내는 안마나 접골 같은 것이 다 일맥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냐?"
답변이 궁색해진 곽초량은 헛기침을 했다.
"험! 스스로도 억지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아무튼 좋소. 오늘 내가 온 건 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오."
"그럼 야심한 밤에 이 더러운 곳엔 어인 행차시오?"
"음, 신경 쓰이는 환자가 있어서 왔소."
"칠백오십구호 말인가?"
곽초량은 놀라 반문했다.
"어떻게... 아시오?"
육노인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그 늙은이는 삼 일을 넘기기 힘들걸?"
곽초량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게... 정말이오? 어째서......."
"대체 뭘 처먹였길래 그리 위(胃)가 썩어 뭉개졌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그럴 리가."
곽초량은 혀를 내밀어 타는 입술을 축였다.
'이 늙은이가 그리 보았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이자는 황궁어의들 중에서도 신의(神醫)로 추앙받던 당대제일의 의성(醫聖)이 아니던가?'
곽초량은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사정조로 말했다.
"칠백오십구호는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오. 제발... 도와주시오."
한편, 옆에서 팽삼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어의 중에서도 거만하기로 소문난 곽사부가 이따위 수인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이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는 오늘밤처럼 곽초량이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다섯 달만 지나면 꼭 십 년이 되는구나, 이 아름다운 동사군도가 사사도로 불린 지가."
"그렇소.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이제 오 개월 뿐이오."
곽초량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살리자는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지. 칠백오십구호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오 년이 넘었으니 나 하고도 쌓인 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육노인이 이렇듯 쉽게 승낙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곽초량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정말 잘 생각하셨소이다."
곽초량은 내친 김에 십 년을 끌어온 숙원(宿願)도 결말을 지어보자는 욕심이 들었다.
"기왕지사 도와주시기로 한 바에야 본격적으로 제 일을......."
"닥쳐라! 이놈."
육노인의 호통이 터졌다. 그러나 곽초량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만 하시겠다면 황제폐하께 간청을 하여 수인의 신분을 벗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놈이 귀가 먹었나? 그 더러운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닥치지 못할까!"
길길이 뛰며 욕설을 퍼부어대는 육노인을 보자 곽초량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 옥졸이 달려와 곽초량에게 보고했다.
"대인! 아무래도 구백이십팔호가 죽은 것 같습니다."
곽초량은 여전히 육노인을 주시한 채 물었다.
"삼산, 구백이십팔호는 어떤 놈이냐?"
팽삼산은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펼쳤다.
"구이팔이라. 아, 여기 있군. 이놈은 백일해(百日咳)와 이명(耳鳴)의 증세가 심각한 자로 최근에는 정신까지 혼미하여 착란(錯亂)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래, 나도 생각 났다. 그 쓸모없던 약골 말이군. 그놈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옥졸들은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구백이십팔호의 다리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잔악한 놈들!"
육노인은 이를 갈았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오. 앞으로 오 개월 동안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대단한 협박이로군."
"지켜보면 알 것이오, 내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내 대답은 십 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설사 목숨을 잃는다 해도 악마들의 유희(遊戱)에는 동참하지 않을테니 내 목이 필요하거든 언제라도 가져가거라!"
육노인은 비장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좋소이다. 어찌됐든 칠백오십구호는 부탁하겠소."
"물론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말씀해 보시오. 칠백오십구호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소."
"첫째는 약재를 달일 수 있는 도구를 옥사 가까운 곳에 준비해 줄 것. 두번째는 필요한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 백육호와 백사호를 당분간 내가 부릴 수 있도록 할 것. 두 가지다."
"알겠소이다. 날이 밝는 대로 도주를 만나 조치하도록 하겠소이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씩 내게 들러 약을 복용하는 것은 제외시킬 수 없소."
"알았으니 이만 꺼져라."
육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벌러덩 누워버렸다.
곽초량은 매서운 눈빛으로 육노인을 잠시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