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강북녹림맹(江北綠林盟)
여인은 눈부신 금의를 입은 궁장미녀(宮裝美女)였다.
아쉽게도 얼굴의 반을 망사로 가리고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허나 늘씬하게 뻗은 몸의 곡선과 망사위로 반짝거리는 두 눈만 보아도 절세의 미녀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방금 장력을 휘두르느라 한쪽 소맷자락이 걷어 올라가 살짝 드러난 팔뚝은 새하얗기 그지없고 매끄러워 마치 옥(玉)을 깎아 만든 것 같았다.
이토록 가녀린 손이 단단한 석벽에 한 자가 훨씬 넘는 손자국을 새겨 놓았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온통 궁장미녀의 전신에 집중되어 있었다.
궁장미녀는 중인들의 뜨거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간단하게 일차관문을 통과하여 두 번째 관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마치 홀린 듯이 그녀의 뒤를 따라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
좌혼지는 그 사람들 중에 곽지산과 곽소홍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형운비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곽지산과 곽소홍은 좌혼지가 그들을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온 신경을 궁장
미녀에게 쏟고 있었다.
이차관문은 신법을 시험하는 곳이었다.
길이가 이십여 장은 족히 됨직한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단번에 십장 이상을 날되, 모래사장에 두치 이상의 족인(足印)을 남기면 실격이 되는 것이다.
십장 이상을 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웬만한 고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에는 흔적도 없이 눈 위를 달려가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든지, 풀잎을 부러뜨리지 않고 그 위를 달리는 초상비(草上飛), 한조각 나뭇잎만으로 강위를 걸어가는 일위도강(一葦渡江) 등의 절정의 신법(身法)이 있다.
허나, 이런 신법을 사용해도 한번에 겨우 오륙 장을 날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거리를 날게 되면 아무래도 바닥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무림제일의 경공대가(輕功大家)로 알려진 대치도인(大痴道人)은 인간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허공을 날아갈 수 있는 한계는 이십장(二十丈)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이십 장 이상은 제아무리 천하의 고수라 할지라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든 남기지 않든 한번 도약으로 날 수 있는 한계로 오십장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대치도인 자신도 이 한계는 돌파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장 이상을 날아 모래바닥에 두 치 이상의 족적을 남기지 않고 내려설 수 있다면 무림의 초일류 고수라고 할 수 있으리라.
궁장미녀가 모래사장의 앞에 우뚝 서자 중인들의 관심이 온통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일반적으로 내공이 강한 고수는 신법면에서는 아무래도 뒤쳐지게 된다.
일차관문을 통과한 많은 고수들이 의외로 이차관문에서 대거 탈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궁장미녀는 중인들의 이목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여유 있는 시선으로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조금 전 그녀의 놀라운 공력을 보았는지라 그녀의 신법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헌데, 그녀는 꼼짝도 않고 앞만 바라본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의 눈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설마 이 궁장미녀는 내공에 비해 신법이 형편없는 것이 아닐까?)
중인들의 마음에 이런 의혹이 조금씩 생길 때였다.
스으으...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있던 궁장미녀의 몸이 저절로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몸은 풍선이 아닌데 어찌 저절로 떠오를 수가 있단 말인가?
허나, 분명 그녀는 한 치의 미동도 없었는데 그녀의 늘씬한 몸은 점점 허공으로 떠올라가고 있었다.
중인들은 이 기경(奇驚)할 광경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삼 장 정도 높이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다가 미끄러지듯 스윽 전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몸은 눈 깜박할 새 십여 장을 훨씬 넘어 저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더니 다시 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듯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내려섰을 때 바닥에는 커녕 흔적조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무려 이십 장에 육박하는 거리를 날아갔던 것이다.
이십 장이라면 대치도인이 말했던 인간의 한계에 거의 도달한 거리였다.
한낱 여인의 몸으로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중인들은 모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것은 전설의 경공(輕功)인 어기부영(御氣浮影)이다!"
그 말에 주위가 벼락을 맞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어기부영!
이것은 절전(絶傳)된지 이미 백년이 넘은 초절정의 내가신법(內家身法)이었다.
내가신법이란 내가(內家)의 공력을 이용한 경공신법이라는 뜻이었다.
어기부영은 내가신법 중에서도 최고의 것으로, 말 그대로 몸의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몸을 깃털보다 가볍게 해서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상승의 경공이었다. 이것은 내공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익힐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무공이었다.
중인들은 새삼 경악과 탄성이 가득한 눈으로 궁장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그녀는 절세의 미녀라기보다는 엄청난 공력을 지닌 무서운 고수였다.
그녀는 모래바닥에 내리선 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돌려 삼차관문으로 향했다.
일이차 관문을 통과한 자는 대개 한차례 휴식을 취한 후 삼차관문에 도전하는 것이 상례였다. 헌데 그녀는 조금도 쉬지 않고 연거푸 세 관문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벌떼같이 그녀의 뒤를 따라 삼차 관문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는지 다른 관문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달려왔다. 그야말로 단목세가에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된 것 같았다.
좌혼지는 잠시 인파에 둘러싸여 삼차관문으로 향하고 있는 궁장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등을 툭 쳤다.
"좌형같은 사람도 여자에게 눈길을 줄 때가 있을 줄은 몰랐구려."
좌혼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서 웃고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일강이었다.
좌혼지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형이었구려. 나도 남자인데 여인에게 눈길을 좀 주면 안 되겠소?"
진일강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런 말을 다른 여자들이 들었다면 아마 그녀를 찢어 죽이려고 할거요."
좌혼지는 고소를 머금으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진일강은 금의궁장미녀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어떻소? 저 정도면 가히 여중제일고수(女中第一高手)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좌혼지는 동의했다.
"그렇구려. 진형은 그녀를 알고 있소?"
"하하... 내게 그런 복이 있을리 있겠소? 단지 요근래 강호에 무서운 여고수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녀가 아닌지 모르겠구려."
좌혼지는 그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진일강은 강호경험이 풍부한지 아는대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여인은 천하삼미(天下三美) 중의 으뜸이라는 철봉황(鐵鳳凰) 곽을릉(郭 陵)일 것 같구려. 그녀는 지난 삼년동안 무림에 나타난 여고수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소."
좌혼지는 눈을 반짝 빛냈다.
"천하삼미?"
진일강이 빙그레 웃으며 그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하... 천하삼미란 당금 무림에서 미모와 무공이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오. 그 중 한명은 좌형도 이미 만났지 않소?"
좌혼지는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물었다.
"그렇다면 병중화 단목소저도 천하삼미 중의 한사람이오?"
"그렇소. 그녀와 철봉황에 속하오."
좌혼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왜 말하지 않소?"
진일강은 멋쩍게 웃었다.
"눈치 하나는 빠르구려. 천하삼미의 마지막은 소생의 나이어린 사매(師妹)가 차지하고 있소."
좌혼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소문을 들었소. 듣자하니 현현교에는 약삭빠르기가 여우같고 아름답기가 서시(西施)를 뺨친다는 한 명의 기녀(奇女)가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녀가 아니오?"
"맞소. 그녀의 별호는 소호리(笑狐狸)라고 하오. 이름은..."
진일강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좌혼지를 바라보다가 짓궂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나중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직접 물어보시오. 아무리 사매가 콧대가 높더라도 좌형이 물어본다면 냉큼 알려줄 거요. 하하..."
좌혼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 하고 있다가 얼굴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진형도 장난이 너무 심하군. 내가 무엇때문에 진형의 사매를 만난단 말이오?"
"하하... 만나기 싫어도 만나게 될 거요."
좌혼지는 눈을 끄게 떴다.
"그건 무슨 말이오?"
"내가 이미 사매에게 좌형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놓았소."
"내 이야기를 하다니..."
"하하... 좌형이 난생 처음 보는 미남자이며 절세의 풍류아(風流兒)라고 말이오."
좌혼지는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 짓궂은 사람이군.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했소?"
"하하...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제와서 탓해서 무엇하겠소? 아무튼 내 말을 듣자 내 사매는 좌형에게 잔뜩 흥미를 느껴 한번 만나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소. 그녀는 꾀가 많고 장난이 심하니 좌형은 항상 조심하구려."
좌혼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일강은 미소띈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옆에 뚱뚱하고 시커먼 소년이 서서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저 아이는 누구요?"
좌혼지는 그가 형운비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자요."
진일강은 의하한 듯 눈을 치켜떴다.
"제자?"
"그렇소. 운비야 이리와서 진대협에게 인사드려라."
형운비는 앞으로 다가와서 넙죽 허리를 수그렸다.
"안녕하세요. 진대협? 저는 형운비라고 합니다."
진일강은 그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아주 튼튼하게 생긴 아이로군. 올해 몇 살이냐?"
형운비는 그가 자신을 흉보면 어쩌나 하고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어 있다가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어보자 활짝 웃었다.
"열다섯 살이에요."
"원래부터 그렇게 뚱뚱하냐?"
형운비는 그의 격의 없는 질문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열세 살 때는 저도 남들처럼 비쩍 마르고 키만 컸어요. 그런데..."
"그런데...?"
진일강이 궁금한 듯 되묻자 형운비의 검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키는 안자라고 옆으로만 살이 쪘어요..."
진일강은 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그것 참 곤란한 일이로군 그래... 그렇게 계속 옆으로만 자라다가는 삼사년이 지나면 키보다 허리가 더 크겠는걸..."
형운비는 생각만해도 끔찍한지 질색인 표정이 되었다.
허나 잠시 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진일강은 그가 웃자 궁금해져서 물었다.
"왜 웃느냐?"
형운비는 계속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헤헤..."
진일강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형운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운비가 웃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몸이 남보다 뚱뚱한 것을 굉장히 고민해왔다.
그것은 남들처럼 잘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절박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뚱뚱해서 아무도 자신을 제자로 삼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어엿한 사부가 있으니 아무리 뚱뚱해져도 좌혼지만은 자신을 흉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좌혼지는 그의 이런 내심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웃고 서 있었다.
그때였다.
"와와... 이십팔숙도 꺾었다!"
"과연 여중제일고수다!"
삼차관문이 있는 곳에서 중인들의 요란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철봉황 곽채릉이 이십팔숙의 두 사람을 단 이초만에 간단히 격파하고 삼차관문마저 돌파한 것이다.
"정말 굉장한 여자로군."
진일강은 중인들에 둘러싸인 채 오연히 서 있는 곽채릉을 응시하며 나직이 감탄사를 발했다.
단목세가의 이십팔숙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무서운 검수들이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의 합공(合攻)을 이초만에 깨뜨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목세가에서 설치한 삼대관문은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어 통과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그 세 관문을 모두 통과하려면 비단 내공과 신법이 뛰어나야만 할 뿐 아니라 실전경험도 풍부해야 한다. 헌데 그녀는 단 일각도 되지 않아 삼대관문을 간단히 돌파했으니 경동(驚動)할 일이 아닌가?
중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서 있는 곽채릉의 곁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고모! 과연 대단해요!"
함성을 지르며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고 있는 인영은 다름 아닌 곽소홍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곽지산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곽채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곽채릉은 망사 너머로 나직하게 웃었다.
"요런 개구장이... 그동안 말썽은 부리지 않았느냐?"
그녀의 음성은 아주 영롱하면서도 그윽했다.
곽소홍은 곽지산을 힐끔 보다가 두 갈래로 딴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 아주 얌전하게 있었어요."
곽채릉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거짓말 하지마라. 할아버지께서 저렇게 보고 계신데 나를 속이려 하느냐?"
곽지산이 웃으며 다가왔다.
"허허... 그 말이 맞다. 소홍은 벌써 말썽을 부렸지.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게다."
곽채릉의 눈이 아름답게 빛났다.
"아니 왜요. 아버님?"
곽지산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하... 그 애는 한 사람에게 단단히 혼이 났거든.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까불지 못할 게다."
곽채릉은 봉목(鳳目)을 크게 뜨고 곽지산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예요?"
"미심쩍으면 그 애에게 직접 물어보렴."
곽채릉의 눈이 곽소홍을 향했다.
"소홍. 할아버지 말씀이 사실이냐?"
곽소홍은 귀여운 입을 삐죽거기고 있다가 갑자기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고모... 혼내줄 사람이 있어요..."
곽채릉은 잠시 그녀를 내려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네가 누구에게 당하긴 당한 모양이구나. 대체 어떤 담큰 사람이 우리 소홍이를 건드렸을까? 보고 싶어지는구나."
곽소홍은 울상이 되어 코끝이 빨개졌다.
"잉잉... 고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다 고모 때문이란 말이에요."
곽채릉의 아름다운 눈이 커다래졌다.
"나때문이라고?"
"그래요..."
곽소홍은 울까말까 망설이다가 이때쯤에서 그녀에게 고자질하는 게 낫다 싶었는지 곽채릉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곽지산은 이런 모습을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한쪽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좌혼지는 그들에게 다가오려다 곽지산과 곽소홍이 곽채릉과 담소를 나누고 있자 눈을 번쩍 빛냈다.
(이제보니 그녀는 곽노인의 딸인 모양이군.)
좌혼지는 그들이 서로 정답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가려는 생각을 바꿨다.
그는 진일강을 돌아보았다.
"진형은 이번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오?"
진일강의 입가에 언뜻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조금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를 못하오. 본교(本敎)에서는 이번에 대사형(大師兄)이 나오기로 되어 있소."
좌혼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대사형이라면..."
"좌형도 일전에 잠깐 보았을 거요.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좌혼지는 어제 진일강과 함게 이야기를 나누던 검은 수염의 중년인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그가 왜 떠나기 직전에 자신을 살기어린 눈초리로 노려보았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의 이름은 탈혼수사(奪魂秀士) 심대붕(沈大鵬)이라고 하오. 좌형은 그의 탈혼이라는 외호에 주의하시오. 그는... 내 사형이지만 이름 그대로 무서운 인물이오."
갑자기, 그는 좌혼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는 좌형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 같소. 그는 마음이 잔인하고 수단이 악랄하니 좌형은 그를 만나게 되면 조심하는게 좋을 거요."
좌혼지는 마침 그 점이 궁금했던지라 물었다.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하는데 그가 왜 내게 적개심을 품는단 말이오?"
진일강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어제 좌형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소. 그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사람인데..."
말을 하는 도중에 그들은 단목세가의 중앙으로 길게 뻗은 대로에 닿게 되었다.
그곳은 이번 품검대회 동안 임시로 시장(市場)이 서 있어 많은 상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형운비는 이곳에서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는지라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웬만한 도시의 시장을 뺨칠 정도로 온갖 종류의 장사꾼들이 버글대고 있었다.
엿장수, 떡파는 할머니, 꽃을 사라고 외치는 소녀, 옷파는 상인...
한쪽에서는 야바위꾼들이 주사위노름을 벌이고 있고, 심지어는 주막까지 있었다.
주막이래야 대나무 몇 개를 듬성듬성 꽂아서 차일을 두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손님들이 따가운 햇살을 피해서 그 안에 모여들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벽이 없으니 주막 안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것이 또 이상한 정취를 불러 일으켜 지나가는 사람들도 잠깐 들러 목을 축이고 가는 것이었다. 진일강도 사람들이 시원한 그늘 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자 목이 마른지 좌혼지를 돌아보았다.
"날씨도 제법 더운데 저곳에 가서 한 잔 하는 게 어떻겠소?"
좌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운비와 함께 주막으로 향했다.
주막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욱 붐비고 있었다.
대여섯 개 놓인 탁자마다 손님들로 메워져 맨바닥에 그냥 앉아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안으로 들어선 좌혼지 일행은 빈 자리가 없는 것을 알고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아! 저기 자리가 났어요."
형운비가 한쪽에서 사람들이 일어나는 거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달려갔다.
좌혼지와 진일강도 그를 따라 그곳으로 걸어갔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은 모두 네 명인데 하나같이 장사꾼차림이었다.
주막이 워낙 비좁아서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면 천상 진일강과 좌혼지가 있는 곳을 지나쳐야 했다. 좌혼지와 진일강은 탁자로 다가가다 그들과 마주치자 길을 터주기 위해 한편으로 비켜섰다.
네 명의 장사꾼들은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채 서로 히히덕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휘청!
그들 중 한 사람이 취기를 이기지 못하는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지려는 쪽이 좌혼지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좌혼지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했다.
바로 그 순간,
번쩍!
좌혼지의 품속으로 쓰러지던 장사꾼의 손에서 예리한 섬광이 번개같이 폭사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빛이 눈앞에서 번쩍거린다 싶은 순간 섬광은 이미 좌혼지의 목덜미에 거의 육박해 있었다.
동시에,
휘리릭...!
좌혼지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 있던 나머지 세 명의 장사꾼들도 두 눈을 악독하게 빛내며 일제히 쌍수를 휘둘렀다.
쐐쐐쐐쐐!
파파파파파파!
그들의 손에서 우박 같은 암기들이 자욱하게 뿜어나와 순식간에 좌혼지의 전신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찰나적인 일인지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입만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스으으...
꼼짝도 않고 서 있던 좌혼지의 신형이 갑자기 기이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바람 앞에 선 촛불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며 피보라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털썩!
수많은 암기가 격증되어 전신이 고슴도치처럼 변해버린 인영 하나가 바닥에 힘없이 나뒹굴었다. 중인들은 바닥에 쓰러진 인영을 바라보다가 모두 눈을 부릅떴다.
놀랍게도 전신에 빽빽이 암기가 꽂인 채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인영은 처음에 좌혼지를 암습했던 장사꾼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해서 좌혼지 대신 그가 암기세례를 받았단 말인가?
암기를 날렸던 세 명의 인물들은 이 광경이 믿어지지 않는지 멍하니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때 문득 진일강은 그들의 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을 느끼고 그들 중 한 명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쿵!
그 자의 몸은 짚단처럼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진일강은 깜짝 놀라 다른 두 인물들도 황급히 살펴보았다.
"으음..."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가득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채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귀와 콧구멍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막강한 압력에 심맥(心脈)이 터져 즉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일강은 한동안 멍하니 네 구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좌혼지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좌혼지는 원래의 위치에서 한 치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빛이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게다가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여유 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진일강은 자신이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 천하태평인 모습으로 서 있는 준수한 청삼문사가 방금 전에 실로 살인적(殺人的)이라 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암습을 받았던 사람이라곤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전의 암습은 진일강 자신도 제대로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만큼 뜻밖이면서도 날카롭고 완벽했다. 대체 좌혼지는 어떻게 해서 그토록 치명적이고 무시무시한 살수(殺手)를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살수를 피한 것 뿐만 아니고 어떻게 그들을 쓰러뜨렸단 말인가?
좌혼지는 진일강을 비롯한 중인들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한 안색으로 네 구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진일강은 퍼뜩 정신이 들어 황급히 좌혼지의 곁으로 왔다.
"다친 곳은 없소?"
좌혼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진일강은 걱정스런 눈으로 그의 전신을 훑어보다가 그의 말대로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좌형은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절학(絶學)을 숨기고 있는 기인(奇人)이었구려."
좌혼지는 가볍게 웃었다.
"기인이라니 당치않소. 운이 좋았을 뿐이오. 헌데 이 자들이 왜 나를 암습했는지 궁금하군."
그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살펴보았다.
진일강은 그의 뒤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좌형은 이들이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오?"
"그렇소."
진일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속을 보아하니 평범한 고수들 같지 않던데... 좌형은 혹시 남에게 원한을 사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소?"
좌혼지는 시체를 뒤적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강호에 나온지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소. 그런데 남에게 원한을 살리가 있겠소?"
말을 하다가 좌혼지는 문득 눈을 반짝 빛냈다.
진일강은 그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
"무엇을 알아냈소?"
좌혼지는 아무 말 없이 시체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었다.
시체의 팔뚝에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그린 그림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온통 초록객만을 사용하여, 제법 정교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섬칫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초록색의 문신은 네 사람의 팔뚝에 모두 새겨져 있었다.
좌혼지는 그 문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진일강에게 물었다.
"이 자들이 누구인지 알겠소?"
진일강은 그 문신을 보자 안색이 굳게 경직되었다.
"이제 알겠군. 이들은 강북녹림맹(江北綠林盟)이 문하(門下)들이오."
"강북녹림맹?"
좌혼지가 금시초문인 듯 되묻자,
"그렇소. 저 문신은 강북녹림맹의 인물임을 나타내는 녹림문(綠林紋)이오."
진일강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북녹림맹은 요즘 혜성처럼 나타난 신흥방파(新興幇派)요. 그들의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는 바람에 요즘 본교와도 여러차례 충돌을 일으키고 있소."
강북녹림맹!
그들이 결성된 시기는 확실치 않다.
허나, 오래전부터 강북에는 녹림(綠林)의 무리들로 이루어진 녹림맹이 존재하고 있었거니와 그 세력이 강북녹림맹처럼 거대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들은 일년전부터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얼마되지 않아 강북의 패자인 현현교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의 문하가 몇명인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만 천하의 방방곡곡에 그들의 힘이 미치는 것으로 보아 그 수가 천문학적 수준에 도달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머지않아 그들이 강북의 패권을 놓고 현현교와 일대격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무림전체에 자자하게 퍼지고 있었다.
허나, 맹주가 누구인지, 또 그들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는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현현교와 영웅회와 함께 당금 무림을 삼분(三分)하고 있는 초강세력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강북은 이미 둘로 갈라진 상태요. 본교 그리고 강북녹림맹, 하지만 그들이 강남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진일강은 아무래도 강북에서만 활동하던 강북녹림맹의 인물들이 강남인 이곳 단목세가에까지 내려와 암습한 것이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강북과 강남을 구분하는 것은 장강(長江)이라고 불리우는 양자강(楊子江)이다.
즉, 양자강 이북을 통칭 강북이라고 부르고, 그 이남을 강남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까마득히 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그에 따라 무림계(武林界)도 크게 강북무림계와 강남무림계로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도 정한 적은 없지만 강북에서 활동하는 무림인들은 웬만해서는 강남으로 내려오지 않고 또 강남의 무림인들도 강북에는 잘 가지 않는 것이 통례(通例)였다.
문파(門派)들은 더욱 그러했다.
만약, 강남에 있는 문파가 강북으로 진출한다든지,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 때에는 무림제패(武林制覇)의 야욕이 있다고 보고 전 무림인들이 배척을 했던 것이다.
현현교와 영웅회가 서로 강북과 강남을 지배하면서도 격돌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헌데 돌연히 나타난 신흥방파인 강북녹림맹이 강북에 이어 강남에까지 고수를 파견하여 살인을 하려고 했다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강북녹림맹이 언제든지 강남에 진출할 의사가 있음을 묵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대체 그들은 무엇때문에 좌혼지를 암습한 것일까?
그리고 암습은 계속될 것인가?
좌혼지는 한동안 시체를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일강은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북녹림맹은 한번 목표로 정한 상대는 절대로 살려두는 법이 없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제거해 버리는 독종(毒種)들이오. 좌형은 앞으로 조심해야 할게요."
좌혼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진형은 아까부터 나에게 계속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군요.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보기보다는 운(運)이 강한 사람이니... 하하..."
좌혼지는 낭랑하게 웃으며 형운비를 데리고 주막을 벗어났다.
진일강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