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서평 / 이성혁
서로를 물들이며 무늬들을 만들어내는 ‘우리’ 모나드들
- 안희연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이성혁 (문학평론가)
작년에 출간된 그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읽으면서, 마침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과 19세기 말에 활동한 프랑스 사회학자인 가브리엘 타르드의 ‘신모나드론’(『모나돌로지와 사회학』)도 같이 읽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안희연의 시들이 모나드론과 겹쳐져 읽히는 것이었다. 이 또한 어떤 마주침의 작은 사건인지도 모른다. 비록 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진 마주침이지만 말이다. 모나드의 존재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추상적인 보편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모나드로서 존재한다. 모나드는 가장 작은 분할할 수 없는 실체다. 그래서 모나드는 연장이 아니며, 그렇기에 물질적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신을 제외한 모나드는 육체를 포함한 물질과 분리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다. 모든 육체와 사물들은 모나드와 결합되어 있다. 저 돌 역시 돌의 모나드와 부착되어 있으며, 내 몸 속의 부분들, 간이나 장 같은 부분들 역시 모나드와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 간이나 장의 모나드가 있는 것이다.(라이프니츠는 정자 역시 모나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이 모나드를 ‘나’라는 분할할 수 없는 개인(individual)과 혼동하면 안 된다. 개인인 ‘나’는 여러 모나드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모나드론에 따르면 ‘나’는 다양체다. 아니 모든 존재자들이 다양체이다. 자신 안에 모나드들이 있고 그 모나드들 속에는 또 더 작은 모나드들이 있다. 모나드가 구축되면서 개체가 존재하게 되는데, 그래서 세계는 프랙털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모나드들 간의 결합이 이루어져서 프랙털 구조를 만드는 것일까? 라이프니츠는 각 모나드들은 특이하게 세계를 비추고 있지만 모나드에는 창문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나드들 간의 직접적 상호 작용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에 의하면, 신에 의해서 모나드들 간의 조정이 이루어진다. 그와는 달리 타르드의 ‘신모나돌로지’에서는 모나드에 창문이 있으며 신비의 존재인 신을 괄호치고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세계가 형성되어간다고 한다. 그 상호작용은 상호소유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소유’를 재화의 사적 소유와 같은 것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와 결합하여 변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너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하여 나는 너라는 모나드와 결합-소유-하여 상호작용하고, 나는 변용된다. 나는 또 다른 존재로 생성되는 것이다. (이 신모나돌로지론은 들뢰즈의 생성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 자신이 여러 곳에서 타르드의 논의를 인용하고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하여, 안희연 시인이 「프랙털」이라는 시에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삶에서 ‘프랙털’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 저 모나드론과 무관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삶은 모나드들과의 결합 속에서 형성되고, ‘나’는 타자들을 통해 구성된다. 그래서 삶은 여러 모나드들의 중첩이 이루어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를 찾아 숲으로 간 아이들이 이미 새를/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백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의 “호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새 한 마리’로서 존재하기도 한다.(「프랙털」) 나를 구성하고 있는, 즉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나드들은 각각 다른 욕망과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활동하며, 그래서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서 변용된다. 이 시인이 소유하는 있는 모나드들 중 하나는,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에 따르면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나는 ‘누군가’이다. 그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된다. “나는 사자 한 마리를 기른다”(「너의 명랑」)라고 할 때, 그 사자는 ‘나’를 구성하는 모나드 중의 하나다. 그렇게 나는 다양체이기에 “나는 나에게서 불시에 떨어”(「입체 안경」)지기도 하며,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파트너」)기도 한다. 또한 시인은 다른 모나드들이 ‘나’를 소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을 “누군가 헬멧처럼 내 얼굴을 뒤집어쓰고 손목 안으로/손목을 밀어넣었다”(「하나 그리고 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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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나는 타자다.”라는 말은 이제 문인들에겐 상식적인 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시인들이 타자로서의 ‘나’를 탐구해가고 있다. 안희연 시인 역시 그 중의 한 명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타자인가가 또한 문제인 것이다. 안희연 시인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나드들은 어떤 모나드들인가? ‘신모나돌로지’는 ‘옆’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초월적인 권력에 의해 질서 지워진 ‘위-아래’의 존재론이 아니라 ‘옆’의 모나드들끼리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를 구축해가는 존재론인 것이다. 김수이 평론가는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의 해설에서, 안희연 시인의 시에서 바로 이 ‘옆’의 존재론을 포착해냈다. 그 포착은 시집 맨 앞에 실린 시 「백색 공간」의 마지막 연인 “일초에 하나씩/새로운 옆을 만든다”라는 구절에서 착안한 것이다. 김수이의 그러한 독해는 안희연 시에서 ‘모나돌로지’적인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는 위의 논의를 뒷받침해준다고도 생각해본다. 그런데 안희연 시인이 소유하는 옆의 모나드는 죽음의 그림자를 띠고 있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의 시는 죽음의 색감을 띠고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은 시인 특유의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용산-쌍용차-세월호’로 이어지는 사회적 타살의 현실에 외면하지 못하는 시인으로서의 윤리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죽은 이들에 미메시스되면서 그들을 소유하고 그들과 결합하는 것, 이것이 이 무참한 세상에서 시인으로서 행할 수 있는 윤리 중 하나일 것이다. 시를 쓰는 자에게는 “모든 사물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하기 시작”(「피아노의 병」)하기 때문에, 어쩌면 죽은 자에 대한 윤리는 시 쓰는 자에게 운명과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시적 윤리는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짓밟힌 눈빛은 나와 상관없다”고 “등을 돌리고 있어도/나의 하루가 일그러”(「거짓말을 하고 있어」)지기에, 죽음은 시인의 “목덜미를 끌고”(「필라멘트」)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은 자의 모나드가 시인을 소유한다. 시인은 그 모나드에 이끌려 죽은 자와 결합된다.
나는 당신의 생각 속에서 죽은 사람
타다 남은 몸으로 숲을 떠돌아요
- 「토끼가 살지 않는 숲」 중에서
그래서인지 안희연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들에서 세월호 참사에서 죽어야 했던 죄 없는 아이들을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를 열고” 찾아와서 “소매를 끌며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돌의 정원」) 하는 아이 역시 ‘나’와 결합되어 나를 구성하는 모나드일 터, ‘세월호 시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월요일에 죽은 아이들」에서 시인은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아이들에 대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죽음들”, “새파랗게 익어가는 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세월호 시편에서는 “양으로 돌아”온 아이들 중 “어떤 양은 돛대에 꽃혀 바람의 난폭함을 증명하고//어떤 양은 창 속에 갇혀 그 방의 수심을 모르게 한다”(「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세상의 폭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세상의 수심에 대해 의문에 부친다. 시인은 죽은 아이들의 모나드들이 비추어내는 이 명징한 폭력과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마주한다. 그래서 시인 안에는 “좁은 다락에 갇혀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가”(「라파엘」)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나드들과 결합하면서 변용되어가는 ‘나’의 안에서 “날마다 아이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며 “어느 밤 꿈엔 낯선 이가 머리를 들이밀”면서 “당신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당분간 영원」)라고 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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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는 ‘나’를 구성하는 모나드들이다. 모나드들 각각을 이루는 모나드들을 비추어내고자 한다면 ‘나’의 안으로 한없이 들어가야 한다. 안희연 시인은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매일 변화하면서 나를 구성해나가는 모나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작업이 그의 시 쓰기다. 앞에서 인용한 시와는 다른 「백색 공간」이라는 시에서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글자의 내부로 들어간다”고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내 것이자 내 것 아닌 슬픔들”(「시인의 말」)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작업으로 인해 시인은 “생각보다 아늑”한 “바다 밑바닥”에 도달하여 “영원히 마르지 않는” “신이 떨군 커다란 눈물방울”(「슬리핑 백」)에 젖어들게 될 터이다. 그래서 안희연의 시는 ‘옆의 존재론’을 보여주는 데 더해 ‘안의 존재론’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은 곧 바깥이기도 하다. 그 안에 있는 존재자들이란 밖의 타자들-다른 모나드들-이기 때문이다. 이 ‘안의 존재론’은 ‘안/밖’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후에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론이다.
그런데 시인이 비관주의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밤낮없이 바다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같은 시) 빌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신의 “아름다운 실수”이자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과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훗날 신은 휴지통에 처박힌 그 “오래된 실패”를 꺼냈을 때 “스스로 번져가던 무늬들/빛을 머금은 노래를”(「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억울한 죽음, 이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노래할 입이 있”는 우리는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같은 시)다는 것이다. 신의 예정조화가 없더라도, ‘우리’ 모나드들은 스스로 시를 통해 서로를 물들이며 무늬들을 만들어낸다. 안희연의 삶에 대한 이러한 강한 긍정은 그의 시가 우울증이나 허무주의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삶의 비참에서 도망치지 않으면서 삶이 내장하고 있는 힘-서로를 물들이는 노래의 힘을 포함한-을 강하게 긍정한다. 그렇다고 그가 희망을 노래하는 낙관주의에 빠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는 슬픔은 슬픔대로 다 겪어내면서 삶의 역량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슬픈 모나드들과 결합하면서 그 슬픔을 같이 살아내는 것이 삶의 역량인 것이다.
* 이 글은 《현대시학》 2016년 3월호에 실린 「여행자, 시인, 어떤 모나드」의 전반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작성일 : 2016.04.04
저자 소개
이성혁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문화 다》 (상임) 편집동인.
1999년 《문학과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으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redland21@hanmail.net
출처 : 웹진 《문화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