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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10차시 합평작 (4월 10일 용)
1. 준비 없는 이별 / 손정희
해마다 겨울 방학엔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 이모 댁과 고모 댁으로 가서 한동안 머물다 왔다. 그해 중학교 2학년 방학에도 이모님 댁에 갔다. 어느 날 영등포 고모 댁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면 멀미가 심해 창밖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는 편이다. 그날은 왠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량진 주변이라고 차장이 안내하고 있을 때였다. 차 옆으로 장례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예사로 넘겼을 일인데 그날은 자꾸만 장례차가 머리에 떠올라 신경이 쓰였다. 서울엔 며칠 더 있을 예정이었지만 고집을 부려서 대구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내가 4학년 때 쓰러지셨다. 중풍이라고 했다. 지금은 빨리 병원에 가면 쉽게 치료될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에는 중풍으로 쓰러지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일로 여겼다. 민간요법과 한의원의 처방을 받고 굿을 해야 낫는다고 생각했다. 약을 써도 차도가 없자 굿을 여러 번 했다. 아버지는 증상이 완화되기도 했다가 심해졌다가 5년째 병석에 계셨다.
집으로 돌아온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점심 먹으러 온 엄마에게 안아 달라던 아버지가 엄마 품에 안겨서 엉엉 소리 내어 우셨다. 평소 모습과는 다른 아버지 행동에 걱정이 되었던 엄마는 아버지 잘 보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공장으로 돌아갔다. 방학이라 동생과 나는 그날도 아버지 옆에서 낮잠을 잤다. 저녁에 엄마가 오고 밥 먹자고 아버지를 깨웠는데 아버지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다. 너무 충격적인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정신이 나간 상태로 울 수도 없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은 어린아이답게 엉엉 우는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79세 되던 해였다. 직은 체구에도 단단하고 건강했던 엄마가 몇 년 전부터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자꾸 넘어지기 시작했다. 물에 들어가면 몸이 붕붕 떠서 혼자는 탕에도 못 들어갔다. 병원 진료를 받아도 이상이 없어서 바깥출입을 줄이고 집에서 생활했다. 집에서도 자주 넘어져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입원했다가 심한 코골이에 곧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맞벌이하는 오빠 부부, 직장을 다니던 나도 자주 시간을 내지 못해서 통원 치료도 문제였다. 재가 요양의 필요성을 느끼고 방문 요양 요청을 했다. 방문 요양 심사원이 집으로 와서 엄마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날 엄마는 심사 통과를 위해 상태가 심각한 것처럼 연기를 하였다. 그들이 나간 뒤 엄마와 나는 “심사는 확실히 통과할 수 있겠다”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다음날 출근길, 막 동대구역을 지날 때였다. 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엄마가 운명하셨다고,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려고 언니가 엄마에게 인사를 해도 기척이 없어 방에 들어가 보니 엄마가 운명해 있었다고 했다. 파티마 병원 영안실로 오라고 했다. 막 그 앞을 지나고 있었기에 금방 도착하였다. 오빠는 아직 연락이 안 되었다고 나에게 사망 확인을 하라고 하였다. 아직도 따뜻한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금방 깨어날 것 같이 평온히 눈을 감고 있는 엄마를 아무리 불러 보아도 소용없었다. 그 순간 내가 할 일은 사망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엄마도 우리 곁을 인사도 없이 가셨다. 전날까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의 운명은 정말 믿을 수 없었고 충격이었다. 장례 기간 내내 눈만 아프고 눈물이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이 나가서,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평소에 드라마를 보고는 쓸프게 울던 사람이 엄마와의 이별에는 이렇게 인색할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충격이 크면 그럴 수도 있는가, 인정머리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부모님 두 분 모두 인사도 없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때로는 엄마가 그리워 실컷 울고 싶을 때도 있었고 눈물 흘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슬픔은 통곡이라도 해야할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부모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이 또 있을까. 부모님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2. 기술력을 빛내주는 솜씨 /윤미선
나는 스물서너 살 되면서 면허증을 따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운전을 시작하였다. 해서 운전을 경력으로 따지면 30년이 넘는 세월이다. 비교적 일찍 면허증을 따고 내차를 가지고 다녔다.
면허증을 따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1톤 트럭을 이용해서 아버지가 직접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시외로 운전 연습도 다녔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차는 2008년 생산된 수동기아변속 경차 등급의 작은 차이다. 처음 이차가 나에게 올 때는 2012년 정도였다. 수동기어만 운전하던 습관이어서 자동변속 기어를 무서워해서 어렵게 수동변속기어를 구해서 아끼고 사랑하며 지금껏 타고 있다.
그런데 이삼년 전부터 심각한 장애가 왔다. 기어변속을 할 때마다 운전석아래에서 쇠가 부서지는 것 같은 심각한 소음이 발생하였다. 여자가 타고 다니는 차이다 보니 거리를 달리다가 혹은 먼 거리에 가서 고장이 날까 자주 자주 점검을 하고 차 상태를 민감하게 관리하였다.
바로 정비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차량 생산업체 정비소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답변을 하였다. 정확한 정비를 하려면 차를 며칠 두면서 지켜봐야 한다는 말까지 하였다.
차를 일상처럼 가지고 다니다가 당장 차가 없으면 불편을 감수하기 힘들어서 집 가까이 자주 다니던 개인 카센터를 한 번 더 찾아갔다.
같이 시승을 해보던 사장님께서 ‘밋션이 깨진 것 같습니다.’라는 심각한 장애 진단을 해 주셨다.
대략 잡아도 비용이 60만원 내외는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다. 15만 킬로를 넘어가는 주행거리에 10년을 넘어가는 중고차 그것도 수동기어를 60만원 주고 고치기에는 너무 과하다는 부담감이 컸다.
집으로 돌아와 신랑에게 의논하였더니 ‘차 폐차하는 후배한테 연락해보지.’라고 폐차장에서 같은 차종의 밋션을 구해서 중고로 수리해 보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일도 쉽지는 않았다. 이제는 수동변속 기어 차종이 잘 안 나와서 구하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차저차 부품 구하기도 어렵고 비용도 너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서 쉽게 고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이 지나왔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우장창 철컹철껑’ 거리는 아픈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며칠 전 엔진오일도 갈아야 하고 집과 가까운 정비소를 찾았다. 이번에 찾은 정비소는 자주 다니던 정비소가 아니고 이사 온 지역에서 처음 가는 정비소였다. 왠지 차를 온전하게 고칠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정비복을 깔끔하게 입으신 정비기사님이 오셨다. ‘찰슨 브론슨’처럼 멋진 외모에 머리 스타일도 반 머리에 신식 상투스타일 이셨다. 첫인상은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신선하고 매력이 철철 넘쳤다. 나의 오래 아팠던 모닝이를 잘 고쳐주실 것 같은 믿음이 다가왔다.
“엔진오일 교환 좀 해주시고요. 1단2단 기어도 잘 안 들어갑니다. 운전석 밑에서 다 부서지는 소리가 납니다.”
“점검해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운전할 때 마다 느끼는 불편한 점과 심각한 소리가 나는 증세까지 처음 점검하는 것처럼 쪼끔 거짓행동을 하면서 기사님께 상세히 요청하였다.
차를 하늘로 들어 올려서 엔진오일을 먼저 갈고, 차량 하부의 부속들을 여기 저기 만지면서 심각하게 살펴주셨다. 더러 좀 더 연배가 높으신 기사님께도 조언을 구하면서 정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 드디어 기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엔진오일 갈아 드렸습니다. 차량하부의 소리는 쪼임 나사가 풀어져 있어서 소리가 요란한 것이었는데 그것도 안전하게 쪼였습니다. 기어는 클러치 페달도 많이 낡았고 클러치 케이블도 낡아서 그런 것 같은데 우선은 쪼여서 정비했습니다.
조금 더 타보시고 불편하시면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그리고 앞 브레이크 디스크가 마모가 많이 되었습니다.“
브레이크는 안전과 밀접한 부속이어서 바로 교환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친절하고 미남이신 정비기사님을 만나 오래 고민하던 차량의 아픈 곳을 속 시원히 고칠 수 있었다.
친절하고 솜씨 좋은 기사님을 행운처럼 만나 60만원이라는 비용을 걱정하던 고장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정비하여 한시간만에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히 들른 곳에서 솜씨 좋은 숨인 장인을 만날 때가 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솜씨 좋은 정비기사님을 만나서 지금도 새 차처럼 정비된 오래된 차를 안전하고 기분 좋게 신나는 운전을 하고 다닌다.
내가 영천으로 이사 오면서 뜻하지 않았던 만남은 또 있었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가족과 같이 멀리 볼일을 보고 저녁도 제때 먹지 못해서 요기꺼리를 살 겸 해서 파란 간판이 빛나는 파리○○○에 들려서 빵 몇 종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정리를 하고 빵을 꺼내 간단한 요기 꺼리를 차렸다.
빵을 한입 먹고 깜짝 놀랐다. 이제껏 내가 먹어본 빵중 제일 맛있는 빵집이었다.
같은 종류의 다른 파리○○○에서 사 먹었던 빵 보다 더 부드럽고 쫀득하면서 감칠맛까지 느끼면서 빵에 입맛이 매혹 당하였다.
‘이 집 사장님은 프렌차이즈 본사 에서 주는 생지와 레시피에 자신의 오랜 노하우를 같이 더해서 정성을 다해서 빵을 만드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면서 맛있는 빵을 먹는 것은 완전 감동이었다.
그 후 몇 번 더 그 집에서 빵을 사 먹었는데 역시나 똑 같은 감칠맛과 감동을 선물 받았다.
며칠 전 빵집을 다시 갔는데 사장님께서 계산대에 계셨다. 사장님은 제빵가의 경력을 인정하는 낡고 버터에 찌든 앞치마를 입고 든든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서 계셨다. 먹고 싶은 빵을 골라 계산대로 갔다.
“사장님 제가 파리○○○빵을 오래 먹어서 이 인근에 빵집은 자주 먹어봐서 대체로 그 맛을 압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오래 제과점 하시다가 프렌차이즈 하시는 것이죠?”
“어 어떻게 아세요?”
“제가 경산에 살다가 1년 점쯤 이쪽으로 이사 와서 우연히 이집 빵을 사먹었는데 이 인근에서 이 집 빵이 제일 맛있었습니다. 제가 빵에 대해서는 먹을 줄만 알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장님은 회사에서 주는 레시피에 사장님 나름의 레시피를 더해서 발효시간을 다르게 하시지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세요?이런 말 해주시는 분 처음 인데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빵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나의 찬사에 깜짝 놀란 사장님은 나처럼 얘기하는 손님은 처음 보신다면서 사장님과 나는 의기투합해서 한참을 신나게 얘기를 나누었다.
“아닙니다. 저는 빵에 대해서 일도 모르지만 맛있는 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 한 번 드리고 싶었습니다.”
맛있는 빵에 대한 진심어린 인사로 사장님은 쿠키까지 선물로 주셨다. 이제 영천시장 입구에 있는 파리빵집은 나의 단골집이 되고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이 세워지고 기술이 발단 되면서 수공업은 많이 사라지고 프렌차이즈로 인해 많은 맛있는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내가 사용하던 기계들이 고장 나면 생산 회사의 써비스 센터를 들고 가거나 수리기사님들이 집으로 방문해 주신다.
이리저리 기계를 만져보고 작동과 수리 메뉴얼 따라 조작해 보시고 매뉴얼을 벗어나는 수리나 고장들은 해결 해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 것이 정해진 순서처럼 획일적이다.
몇 년을 이곳저곳 정비소를 거치면서도 못 고치고 고민하던 차량을 한순간에 솜씨 좋은 정비도사님을 만나 해결하면서 안전한 주행길이 열렸다.
맛있는 음식점 사장님의 솜씨와 비법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단골집이 프레차이즈로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똑같은 맛이 나는 집이 되었다. 프렌차이즈로 정해진 똑같은 레시피로 하는 음식인데 완전 맛없는 가게를 만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의 정성이 의심 될 때도 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맛있는 집이 똑 같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 일수도 있지만, 손맛 좋은 주인장의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행복은 없어졌다.
내가 만난 영천 파리○○○의 사장님처럼 시류에 밀려 프렌차이즈를 택하셨지만, 빵에 대한 소신은 지키시면서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장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참 행복하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모양도 똑같고 색깔도 똑같은 공산품 들 속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빛나는 장인을 만난다는 것은 요즘처럼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사회에서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어려도 자신의 직업에 철학을 가지고 철저함으로 빛나는 정비사님과 그런 정비사를 가지고 있는 정비소는 오래도록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똑같이 획일화된 빵이 아닌 소신과 정성으로 사장님 가게만의 유일한 빵맛을 지키시는 멋진 분을 만나게 된 것은 빵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정도의 행운과 같았다.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던 골목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추억을 만나듯이 그 시간의 소중한 인연과 빛나는 만남은 나만의 소중함으로 오래 기억되는 행복을 간직하게 되었다.
기계가 만들어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편리한 장비들이 만들어지고 신기술은 창조되지만 똑같은 신기술 똑같은 물건들처럼 개별의 차별성은 떨어진다. 같은 이름의 다른 상표 다른 디자인 이 존재할 뿐이다.
심지어 미인대회의 얼굴도 똑같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같은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해서 나오니까 얼굴도 같다는 얘기들을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이즈음이다.
부모라면 한번쯤 경험이 있는 일이 있다.
아이들 유치원 운동회를 가면 똑같은 유니폼에 머리 정수리만 보이게 앉아있는 아이들 중에서 자신의 자녀를 찾는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내 아이는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내 새끼는 내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하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은 나만의 철학과 소신이 깃들어야 진정한 나의 직업이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장인을 만나게 되는 날은 매일이 그렇고 그런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에 보석처럼 행복한 날이다.
3. 맏이의 출생과 책임 /김도형
1. 대개 어느 집이든 맏이의 출생은 다른 형제들보다 더 큰 축복 속에 맞이한다.
집안의 맏이인 형(1959년 9월생)은 동네 다른 집보다 더 큰 축복 속에 태어났다. 고조부, 증조부, 조부 독자로 내려왔고, 아버지 대는 다행히 3형제분이었지만, 대대로 자손이 귀한 집이었다. 부지런한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를 이루었는데다, 숙부이후 10년이 지나서 천금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였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싯골 할배의 나뭇짐이 하늘을 덮니더~” 동네 이장의 말마따나 할아버지(당시 51세)는 신이 나서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나뭇짐을 한가득 해 오셔서 안방을 후끈후끈하게 만들었다. 귀한 손자의 안녕을 위해선 못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형의 출생은 그야말로 온 집안의 기쁨이었고, 형에겐 큰 축복이었다.
자손이 귀한 집에서 둘째로 태어난 나(1961년 5월생)도 큰 축복 속에서 태어났지만, 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크면서도 형에겐 언제나 후순위였다. 어릴 때 암탉이 크게 울면 나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따끈따끈한 달걀을 손에 넣지만, 그 차지는 언제나 형의 몫이었다.
“억일아~ 형아 줘라” 할머니에겐 무엇이든 맏손자 우선이었던 것이다.
2. 가장 큰 축복 속에 태어난 형이지만, 책임감 또한 그만큼 컸다. 일찍이 장자인 아버지를 따라 문중 대소사에 같이 참석해야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5남매의 다른 형제와 달리 몸수고와 부조를 도맡아 하고 있다.
둘째인 나는 형 핑계 삼아, 나와 인연이 깊은 경우를 제외하곤 집안 행사에는 늘 뒷전이었다. 그 결과,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말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큰일을 치루면서 체감하게 되었다. 형은 문상 오는 문중사람들을 대부분 아는지 일일이 인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맏이인 형은 집안일의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는 주저하고 두려워했다. 최종적인 책임이 있어서인지 바로바로 결정하지 못하곤 했다.
아버지께서 곡기를 끊으시고 10여일이 지나 위독하여 대학병원에 갔을 때, 연명치료 여부를 의사가 묻는데 결정하지 못하고 전화로 나의 의사를 물어왔다. 아버지 병간호하는 자리에서 연명치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같이 나누었는데…….
“형, 제가 갈 때까지 절대로 연명치료 동의하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소방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셨는데, 재직하실 때 화재진압의 영향으로 퇴직 후 5년경과 시점에 ‘폐섬유증’(폐가 점차로 굳어오는 증상) 진단을 받고 76세에 돌아가셨다. 평소 운동으로 다져진 강골로 75세까지는 잘 견디셨는데, 1년여 전부터 기침이 너무 심해 체중이 20kg 이상 빠지고, “매일 아침 눈뜨는 게 제일 고통스럽다” 면서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당신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다. 마지막에 병원으로 모신 것도 장기기증 절차를 밟기 위함이었지 치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연명치료하지 않는 결정은 둘째인 내가 했다. 어머니 항암치료, 혈액투석 같은 중요한 결정도 언제나 둘째인 내 몫이었다.
맏이의 무게가 집안일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일까?
4. 맏이인 형은 집안에서의 그 무게 때문인지 보수적인 편이었고 신중한 반면에, 둘째인 나는 늘 도전적· 직선적이고 장난기 많으면서도 낙천적이었다. 집안에서의 삶의 무게는 맏이인 형보다 많이 덜했다.
맏이인 형은 태어났을 때 누구보다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살아가면서는 다른 형제들 보다는 삶의 무게가 더 커 보였다.
이 또한 신의 섭리인가?
요즈음 장손자의 재롱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앞으로의 삶의 무게를 생각해서라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더 놀아주고 사랑해 줄까나?
4. 모든 것은 통하게 되어 있다/신은선
1. 기다림은 너무 싫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을 싫어 할 것이다.
배고플 때 음식을 주문 해 놓고 기다리는 것. 차례로 줄을 서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특히 화장실이 급할 때는 더더욱 싫을 것이다..
2. 몇 해 전 혼자서 태국을 여행할 때였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는 아이들과 함께 가려고 예약을 끝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간호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딸들만 여행을 가게 되었다. 딸들의 여행담을 듣고 으니 부러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일어났다. 아버님의 건강은 다행히 예전처럼 회복되셨고 드디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3.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으로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관광지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한사람이었다.망설임없이 태국으로 여행지를 정하게 되었다. 딸들과 함께가 아닌 혼자만의 여행이 걱정 반,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가슴을 뛰게 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올 것은 온다는 진실을 믿으며 현실을 즐기고 싶었다. 걱정한다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실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시작된 태국여행은 불교신자가 전 국민의 90%가 넘는 국가답게 사원과 승려들이 많았다. 자연환경, 특히 파타야 바다는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서인지 유럽인들이 휴양을 즐기고 있었다. 썬탠을 하는 사람들, 수영을 하고 다양한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썬배드에 누워 책을 보고,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정말 여기가 TV에 나오는 천국이구나! 싶었다. 나도 몇 달러의 돈을 지불하고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는 썬배드에 누워 다양한 인종들을 구경하며 시원한 음료수를 마셨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것을 좋아 한다. 여기가 바로 물멍, 사람멍 하기에 최적지었다.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파타야 해변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저런 환한 표정과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이국에서 느끼는 감성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표정과 오버랩 되면서 왠지 모르게 나의 주변사람들, 아니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가 “빨리 빨리”라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제까지 나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도 아침 눈 뜰 때부터 잠자기 전까지 빨리 빨리를 외쳤던 생각에 나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4. 썬배드 가까이서 머리에 수건을 둘러맨 아저씨의 양쪽 어깨에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열대열매가 보였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두리안”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과일이라 냄새는 고약했지만 호기심에서 먹어 보고 싶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보기 힘든 과일이었다. 한통에 가격이 꽤 비쌌지만 한통을 사니 잘라서 도시락 통에 담아 줬는데 두통이나 되었다. 혼자 먹기에 너무 많아 이것을 어쩌지 속으로 생각하면 썬배드로 왔다. 그런데 옆 썬배드에 누워 있던 잘 생긴 유럽인이 자꾸만 쳐다 보길래 “먹을래요? "하고 물어보니 먹겠다고 해서 한통을 주었다. 연신“땡큐, 땡큐”를 외쳤다. 생각해보니 내가 혼자 온 동양여자이라서 호기심으로 쳐다본 것을 두리안 때문이라 생각하고 착각을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온 이상한 여자가 베푼 과잉친절에 그 유럽인도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니 어의가 없어 실없는 미소를 짓게된다.
5. 태국까지 왔는데 호핑투어를 하지 않으면 태국을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고 하길래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호핑투어를 하게 되었다. 내 나이 50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에서 하는 수상레저를 즐기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수영장 근처도 못 가봤고 초등6학년 수학여행 때 경주 대왕암 앞 바다를 처음 보았던 시골뜨기다. 수영을 할 줄도 모르고 물을 무서워했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스노우쿨링 장비를 장착하고 바다위에 떠서 바닷속을 들어다 보기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가 숨을 쉴 수 가 없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드디어 바닷속이 보였다. 신천지였다. 알록달록 열대어와 온갖 종류의 산호초 등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바닷속에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스노우쿨링을 하고난 후 다음은 바다낚시를 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물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곳에서의 낚시는 또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태어나 처음하는 낚시라서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고기가 물지 않았다. 한참 후 새끼열대어 한 마리로 손맛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다음은 패어글라이딩을 했다. 물도 무섭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무서웠지만 더 나이들기 전에 도전을 해 보고 싶었다.엄청 무서울 줄 알았는데 막상 바다 위를 날아 오르니 짜릿짜릿한 기분이 들면서 창공을 나른다는 해방감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분에 젊은이들이 호핑투어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넓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시대에 난 뒤처지지는 않은지 단지 어른이라고 꼰대짓이나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도 해 보았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면 세대 간의 갈등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6. 태국의 5일동안 여행은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마지막 출국할 때 일이 터졌다.
출국수속을 하고 짐을 부치고 이미그레이션(immigration)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섰다. 관광 성수기라서인지 줄이 얼마나 긴지...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배가 아파와서 등줄기와 얼굴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 한명도 없고 언어도 능통하지 않고 정말 하늘이 노랗다는 표현을 이해하게 되었다. 재빨리 짧은 영어로 몸짓과 발짓으로 배탈이 났음을 표현하고 검색대 앞으로 가니 직원인지 경찰인지 알 수 없는 여자분이 나를 데리고 자기들이 사용하는 화장실로 데려가 사용하게 해주어 큰일을 면 할 수 있었다.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뻔한 그 순간을 생각하니 지금도 등줄기가 싸하다.
여행을 하는 동안은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 일은 이미 벌어진 상태라면 그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대처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는 평정심과 대처능력이 필요하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과 몸으로 체득된 기억은 오래가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가다보면 길 위에서 배우고 살아 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게 될 것이다.
5. 북경공항의 기억 /이원규
1) 김해 공항이 붐볐다. 약 삼십년 전에 시작한 모임에서 네 부부가 태국 치앙마이로 패키지 여행을 가기 위해 왔는데 공항의 수화물 등 일 처리가 너무 늦다. 통상 두 시간 전에 오는데 이번에는 세 시간 전까지 오라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코로나로 공항 직원의 감원이 많았나 보다. 수화물을 맡기는 줄이 한없이 길었다. 한참을 걸려 슈트케이스(캐리어)를 부치고 들어간 식당에서도 긴 줄로 인해 한참을 대기하고 나서야 자리가 났다. 문 닫은 식당이 더러 보였다. 출국장에 들어가면서도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2) 오래 전에 겪었던 중국 북경공항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문화적 차이를 실감한 공항이었다. 15년 전 직장 동료 5명이 동유럽에 가면서 북경공항을 경유하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가기 위해 경유하는 편을 택한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그 큰 공항을 두 번이나 돌아보아도 흡연실이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공항에 흡연실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없었지 싶다. 나와는 반대 편으로 두바퀴를 돈 여행사 가이드가 제안을 했다. “공항 밖에 나가서 피우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나갑시다.” 우리는 그날 입국신고서를 넉장이나 공항에 제출했었다. 그리고 공항 밖에서 북경의 대기오염을 제대로 감상하고 담배 연기라는 오염물질을 더 보태 주었다.
3) 그리고 한참 동안 환승을 위해 대기하였다가 출국장에 들어가는데 줄이 너무나도 길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는 팀도 있어 북새통을 이루는 상황이었다. 마침 공항 안내인이 단체는 저리로 가라면서 가르키는 곳은 줄이 짧아서 우리는 단체라고 생각하고 우루루 이동했다. 여권을 제시하니 단체가 아니라면서 다시 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단체가 맞고 저기 저 양반이 가라고 했다.”며 우겼다. 안내인은 꾸중을 듣고 우리는 그대로 출국을 했었다. 오랜 뒤에 친구들과 중국 장가계 관광을 가면서 중국에서 말하는 단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단체는 이름과 여권번호 및 비행기 편명 등 같이 가는 사람의 내역이 기재된 한 장의 용지가 있는 공인된 단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4) 동유럽에서 귀국할 때도 북경공항을 경유했다. 가이드가 “여행사에서 이코노미석 예약을 못해 비즈니스석을 타게되었다”면서 비행기표를 나눠 주며 비즈니스 라운지를 이용해도 된다고 말해줬다. 공항의 비즈니스 라운지를 처음으로 가봤다. 양주, 와인, 맥주, 빵, 과자와 다양한 음식을 무료로 먹을 수 있어 너무나 놀라웠다. 게다가 라운지에는 흡연실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복이 있나 싶으며 아주 좋아했었다.
5) 다음에 북경공항을 경유할 일이 있으면 비즈니스석으로 예약하고 라운지가 여전히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다. 품격있게 분위기 만끽하면서 먹고 즐기면 비즈니스석을 구매하는 추가 금액 이상의 만족을 얻고, 그 또한 소소한 여행의 즐거움일 터.
6) 치앙마이에서 잘 먹고 여유롭고 편하게 여행을 다녔다. 공기가 좋다고 소문난 치앙마이에 미세먼지가 있어 물어보니 현지 가이드가 “밀림을 불태워서 하는 화전농이 많아 지금 시기는 늘 그렇다”고 대답했다. 중국은 산업 발달로 인한 화석연료, 태국은 화전농, 뉴질랜드는 소가 뀌는 방귀 등 다양한 대기오염원이 나라마다 특이하다.
7) 여행을 마치고 다시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도 긴 줄에 한없이 늦어진다. 짐 찾는 곳에 가서 한참 기다려도 슈트케이스가 나오지 않는다. 나오는 가방이 몇 개 없다. 가방이 계속 돌고 있어야 할 만큼 시간이 걸렸는데 이상하다 싶어 주변을 둘러 보니 가방이 벌써 나와서 누군가가 바닥에 내려 놓았다. 고마운 분이네.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은 같지만 김해공항은 북경공항보다 질서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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