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관 김지남’ 핍진성 높은 하치경 인기소설
주인공 역관은 오늘날 직책으론 외교관이다. 글로벌 시대 국가 간의 교류에 앞장서서 다양한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국가의 중요한 역할임에 틀림없다. 동창 중에 외교관 가족이 있는데 한국에서 3년 근무하면 외국으로 발령을 받아 가는데, 선진국과 후진국을 번갈아 다녀 세계 곳곳을 누비는 그의 가족이 부러웠다.
그 친구네가 아프리카 대사로 발령받아 짐을 싸게 되자. 기르던 화분을 우리 집에 가져와 아직도 예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외국에서 살다 돌아오면 아이들 국어실력 보충을 부탁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그런 중차대한 역할을 역관이 담당했다. 오늘날 선망 받는 직업이 그 당시는 중인 취급을 받아서 현명한 김지남의 맹활약에도 제약이 많아 읽는 내내 안타까웠다.
역관에 대해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다 작년에 방영된 ‘연인’을 보며 세인의 관심이 늘었고 하치경 소설가가 역관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해서 기대가 많았다. 독서량이 많고 한학 수준과 사회적 지위도 높은 그가 ‘소년과 영웅’이란 이순신 영웅에 대한 글을 발표하고 평자가 평을 써서 발표하며 그의 작풍에 매료되었다.
이 3권짜리 다큐멘터리 소설을 쓰면서 전문서적을 끝없이 사들여 읽고 고증하며 몇 년에 걸쳐 써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빈 공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우다보니 신뢰할 만하지만 개연성이 있다. 그럴듯하고 있음직한 핍진성 이야기로 독자를 열광하게 하여 한 달도 안 되어 2쇄가 출판되는 기염을 토한다.
격동의 세월에 국력을 키워가는 과정에 감사원에서 혼신의 힘을 쏟으며 형성된 국가관은 이 소설 바탕을 이루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상화되어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경남상업고등학교와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감사원에서 부이사관으로 명예퇴직하였으며, 현재 학교법인 동아학숙 이사와 D 해운의 상임감사로 일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역사 속 인물 중 김지남에게 끌려 그의 여정 속으로 들어가 씨름하며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화두를 들고 그들의 삶을 조명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는데 안내자가 되고 싶었다.
그의 문학 활동으로는 사단법인 새한국문학회에서 수필과 소설로 등단하였으며, 작품으로는 「사랑이 길을 잃을 때」, 「어구」 등이 있고, 콩트 「깨방정과 호들갑」, 「틀니소리」, 「소나기」, 「선배」 등이 있으며, 그 외 수필로는 「인연」, 「소록도의 노을」, 「중앙강의록」 등 다수가 있다.
1권에는 역관으로 숙종 때 일본의 요청으로 조선통신사의 역관이 되어 다녀오는 과정이 흥미롭게 쓰여 졌다. 당시의 일본이나 조선의 실정에 대해 알던 단편적인 지식들이 순서대로 엮이며,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아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만든다.
조선 통신사 김지남의 일대기에 담긴 진솔하고 심지 굳은 마음은 작가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 가졌던 심정을 투영한 것이었을까. 일본에 국서를 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던 조선의 실상과 메이지 유신으로 급변한 일본과의 문화 차이를 실감한다.
목숨 걸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관백에게 국서를 전하는 실제 여행길, 그 글 사이에 양념으로 감칠맛을 더하는 무극패와 이총을 참배하던 모습과 우리나라 화약을 일본처럼 강한 화력을 갖추기 위해 수입 금지 품목인 유황을 구하는 모습이 눈물겹다.
2권에서는 청의 황제에게 가는 삼절연공행 사신의 실제 노정과 당시 요양, 심양, 연경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화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 청의 비서 『자초신방』을 구하고자 하는 역관들의 노력과 병자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을 만나 향수 어린 따뜻한 민족애가 생생하고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 당시 궁궐은 서인들이 숙종에게 첫 왕비인 인경왕후가 후사 없이 10년 만에 승하하고, 인현왕후를 천거하였으나 8년이 지나도 후사가 없었다. 그때 남인 계열의 장옥정이 왕자를 탄생시켰으니 서인들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장희빈은 중전에 오르게 되고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며 남인이 득세하자 온 나라가 당파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장옥정의 오빠인 금군별장 장희재가 인삼을 팔아오라는 영을 내려 거역하다 눈에 난 지남은 예조판서 민취도가 청나라 정세 파악임무를 부여하며 사행 길에 합류한다. 개경에 도착하여 후배 민 역관의 도움을 받으며 화약 상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벽란도에 숙소를 정한다. 그곳은 황진이로 유명한 곳이다. 평양에서는 연광정과 부벽루 등을 두루 구경하고 평양명기 계월향의 붉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의주에 도착한 지남은 통군정에 올라 임진왜란 때 백척간두에 선 선조의 심사를 더듬어 본다. 그리고 주점에서 한 여자아이로부터 조선인이 청에서 도망치다 붙잡히면 무조건 발뒤꿈치를 잘린다는 도환인의 비참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 민족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코와 귀를 잘리고 청으로부터 발뒤꿈치를 잘리는 이야기를 듣고 약소민족의 아픔에 괴로워한다.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하면 그 때부터는 중국에서의 사행(使行)길이 시작된다. 사신을 따라나서는 아랫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길이다. 엄동설한에 한데서 자고, 주먹 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하루걸러 죽을 주는 사행 길의 참상이 전개된다. 지남은 책문에서 조선인 어머니를 둔 수레꾼 기현을 만난다. 그의 집에서 된장국과 김치를 먹으며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고, 구걸하던 조선 모자를 구해 기현 모가 사람답게 살게 한다. 영실이라는 기녀 얘기도 재미를 더한다. 물심양면으로 지남의 화약을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혼탁한 당쟁과 환국의 정세 속에서 만들어낸 포탄이 진포대전을 승리로 이끌자 중인(中人) 한 사람이 열 양반보다 낫고, 유능한 장군 한 사람이 백 중신보다 낫다며 눈만 뜨면 싸움만 하는 그대들은 진실로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 임금은 일갈한다.
3권에서는 조선 후기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러 청에서 온 총관은 조선의 대표를 강제로 배제시키는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고조선, 고구려 땅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하기 위해 ‘동위토문’을 이끌어 낸 당시 역관들의 투철한 나라 사랑 정신과 기지를 알리며 오늘에야 그들의 일기 『북정록』을 통해 세상에 빛을 발한다. 기록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소설도 역사 속에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묻히지 않고 후손에게 전해지길 빌며 힘들게 써내려간 것이다.
1710년 10월, 위원에 사는 이만지 등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사람 5명을 죽이고 인삼 등을 약탈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청에서 관원이 파견되지만 험한 지형 때문에 조사를 못 하고 돌아간다. 이듬해 2월 청의 예부에서 황제의 흠차 목극 등이 장백산 일대에서 변경조사를 하려고 온다.
접반사 박권이 되넘이(미아리) 고개를 넘어 간다. 이 고개는 옛날부터 여인들이 되놈들에게 끌려가다 도망치면 죽이는 한 많은 곳이어 비가 오면 낮에도 귀신이 자주 나타났다. 그날도 고개를 넘던 접반사가 귀신에게 급살을 맞아 낙마를 하는데 『주역』을 할 줄 아는 병이가 글씨를 써서 액막이하고 고개를 무사히 넘어간다.
지남의 일행은 철원, 김화, 철령을 지나 설봉산 설왕사에서 이성계가 남의 집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온 꿈을 꾸고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니, 그 절에 천일기도를 올리라 하여 정성을 다한 후 왕이 되었다는 유래를 듣는다.
3권의 긴 역사소설은 지루할 틈이 없다. 지남에게 아들 김경문이 『초야』라는 소설 을 주는데 고려시대 몽골 총관들이 처녀가 시집가기 전날, 정조를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청년 이성계가 총관을 죽이고 처녀를 구출하는 함경도 지방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었다.
“어제도 총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국경은 산과 강을 기준으로 삼고, 강은 산에서 발원하는데, 어제 다섯 사람이 하루 종일 찾아도 백두산에서 두만강의 발원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발원지도 발견하지 못한 두만강을 운운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부의 자문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황명거역(皇命拒逆)이 될 것입니다.”
부자(父子) 역관은 어려움이 많지만 임금과 총관의 신뢰로 백두산정계비를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에 세운다. 양반들은 당파 싸움 하느라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을 때 역관으로 최선을 다했다. 청의 총관은 황명에 따라 조선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하며 발원지 토문에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것도 멋졌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영롱하게 묘사하는 등 소설 속 숱한 배경과 인물들과 직접 현장에 있는 듯 현실감 넘치는 표현과 갈등을 통한 심리묘사가 형상화 되어 재미와 감동을 다 잡은 문장력도 대단했다. 긴 호흡의 서사를 이끌어 다큐멘터리 대하소설의 완성도를 높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모쪼록 많은 사람이 읽으며 국가관을 확립하고 김지남이라는 역관의 이야기가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굳건히 일어설 수 있는 소설이 되길 바란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