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저자는 출간한 조선 기행문의 제목은『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 A Sketch of Korea』이다. 조선과 Korea가 동시에 들어 있다. 19 세기 말, 수많은 서양인들의 조선 관계 저술이 있지만, 제목에 조선이 들어간 저술은 이것이 유일하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썼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Korea는 그 당시 한반도라는 지리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단어이고, 조선은 그 당시 한반도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단어다. 따라서 Korea는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 통시적(通時的)인 단어다.
Korea라는 말의 연원이 되는 고려시대의 Korea는 고려이고, 이씨 조선시대의 Korea는 조선이고, 대한민국시대의 Korea는 한국이다. 따라서 이씨 조선이 존속한 기간의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구한말(舊韓未), 또는 한말(韓未), 또는 한국(韓國)이라는 말을 쓰는데 있어서 신중해야 된다. 한민족 역사에서 '한’(韓)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시기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뿐이므로 구한(舊韓)이라면 대한제국이고, 구한말은 대한제국의 말기가 된다.
한편,『조선상고사』나『한국통사』의 경우처럼 조선이나 한국이 한민족을 아우르는 통시적인 의미로 쓰이나, 이씨조선을 특정할 경우, 조선은 한국이 아니다.
저자는 타타르인이 적어도 알타이 지방의 어딘가 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해서 현재 한반도에 정착해 지금의 조선인이 되었고, 한반도로부터 동쪽으로 더 이동한 사람들은 일본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타타르 민족의 이동을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리고 언어학적인 면에서 큰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이 두 가지를 그가 좀 더 익숙한 일본과 비교하면서 일본문화의 원류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확신한다.
저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쇠락해가는 현장에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내적, 외적 요인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해석한다. 그러나 짧은 방문 기간 동안 철저하게 방관자로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화의 뿌리를 찾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찾으려, 일부러 책 제목에 조선 국호를 내세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저자는 종종 서양의 과학문명의 우월성과 적어도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종교적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조선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조선의 자연을, 조선의 문명을, 그리고 조선의 문화를 보았다. 다만, 조선의 민속까지 악귀숭배의 범주에 넣은 점은 그 당시 미국과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의 종교관의 한계를 보여 준다(제20장). 책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가마 타는 것을 무척 고통스러워 한 그는 한양 도성 밖으로 4번 밖에 안 나간다. 서대문 밖 한강의 복파정(제18장), 남대문밖(제28장), 세검정(제29장), 화계사(제33장)가 그것이다. 대신, 걸어서 서울을 많이 돌아다닌다. 따라서 그가 본 조선의 자연은 서울이라는 인공적인 도시가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으니, 그가 본 것은 결국 조선의 사람이었다.
저자가 조선에서 받은 첫 번째 충격은 길에 바퀴가 없다는 사실이다. 4,500년 전의 수메르인들도 사용한 바퀴의 중요성은 새삼스럽게 언급할 나위조차 없다. 물론, 바퀴가 없어도, 조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살 수는 있다. 하지만, 바퀴는 곧 길이고, 길은 그 나라의 부다. 바퀴가 없으니 길을 잘 관리할 필요가 없다. 겨울임에도 날이 따듯하면 진창이 되는 길을 보고, 저자는 조선 정부가 길을 한 번도 수선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적는다. 길이 엉망이니 모든 활동을 오로지 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생산성이 떨어지고, 결국, 국가의 부가 늘어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조선에 올 때 일본에서 가져온 인력거 2대가 조선에 나타난 최초의 인력거라고 생각한다.
민중의 생활에 서양의 과학문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틈을 안 주어서가 아니라, 없어도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은 듯했다. 그 당시, 서구문명을 앞서 받아들인 청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고위 관료들이 많았음에도, 그들은 서구문명을 차용하는데 절박하지 않았다. 소위 상류층의 사람들조차 시계가 제대로 없어 시간관념이 없는 상황도 기술 한다. 저자가 조선에 이동사진기를 최초로 들여 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조선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저자는 조선 당대의 수학자 김낙집과 마음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데, 주2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 본 김낙집이 절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적는다(제24장).
저자가 조선에서 받은 첫 번째 충격이 과학의 부재, 즉 문명적 충격이라면, 두 번째 충격은 개성의 부재, 즉 문화적 충격이다. 본인을 당황하게 한 충격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저자는 머뭇거림 없이 이것을 제시했을 것이 틀림없을 정도로, 눈에 띄어서 받은 충격이다. 사실, 이 몰개성(沒個性, impersonality)은 아주 큰 충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조선에 오기 전에 이미 일본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의 많은 문제점이 이것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거기서 더 나마가, 몰개성이 조선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타타르인의 특징이라고 역사성을 부여한다. 몰개성이 사회가 진화하는데 큰 걸림돌이 됨을 서구는 중세 암흑시대에 경험했고, 르네상스를 통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온 역사가 있다. 조선이 개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그 당시, 저자는 조선이 개성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몰개성은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보았다. 일본은 아직도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또한, 저자는 조선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여러 면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함께 살핀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가부장제를 꼽는다. 가부장제는 몰개성과 여성의 지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가부장제와 몰개성은 서로가 원인이고, 서로가 결과다. 저자는 조선 사회의 경직성의 원인을 유교와 중국으로 돌린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계급이 그렇게 되도록 자초했다고 질타한다. 그가 머무는 동안, 서울 시내에서 청나라 군인이 민간인에 총을 쏴 사망하게 할 정도로(제28장), 조선의 자주권이 중국의 손아귀에 있음을 목격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건국 이래 마치 조선의 정치 이념처럼 자리 잡아, 문화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느낀다. 그 당시, 조선사회는 머리만 있고 몸은 없는 사회다. 일본으로 돌아갈 때, 홍영식과의 이별연이 열린 제물포의 일본 식당과 거기서 시중드는 일본 아가씨를 통해, 무섭게 파고드는 일본 세력을 감지한 저자는 은밀하게 조선의 미래를 예견한다.
저자가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 말은 전혀 시적(詩的)이 아니다. 저자의 조선 방문 시기는 한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뜬다. 불이 없으니 사람들이 늦게 일어난다. 밖에 나갈 일이 있는 사람이 아침 식사하고, 옷매무새를 만지고、걸어서 일보러 가면, 족히 이른 점심때쯤 되지 않을까? 저자도 자기 거처에 방문객이 오면 대충 그 시간쯤 된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 상인들도 서두를 필요가 없고, 거리는 북적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서울의 아침은 누구의 느낌으로도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옛날, 단군시대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런 의미에서 지었는지 의심스럽지만, 저자는 조선을 한자 그대로의 의미인 ‘고은아침’이라고 알고 있기는 하다. 저자의 말대로, 곱기는 고운데 적막한 아침이다.
저자는 자기가 겪은 조선인은 모두 일을 느리게 느리게 한다고 답답해한다. 어디론가 길을 떠날 때에도, 하릴없이 오전을 보내고 꼭 오후에 떠난다. 늦게 떠나면 낭패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대체 급할 것이 없다. 만약, 저자가 살아 돌아와, 세계적으로 ‘빨리 빨리’ 문화를 알린 지금의 한국인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렇게 느린 조선인이 제 시간을 지키려고, 아니, 제 때가아니어도 챙기려고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밥이다. 열일 제쳐 두고 밥이 우선이다. 식사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는 때가 식사시간이다. '앞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자’라는 자세가 삶의 원칙인 양 보이는 이유를 저자가 조선에 상륙해 서울로 올라 가는 날부터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제6장).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해하지 못할 점이 여러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조선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문화를 가슴 속으로 사랑한다.
책의 많은 부분이 이에 할애되어 있다. 호기심이 너무 많은 저자는 조선 사람이 행동하는 것, 조선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은 결코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알아보고, 해석하고, 적는다. 개중에는 우리조차 모르는 민화(民話)도 들어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보다 더 넓고, 더 깊이 조선의 문화를 섭렵한다. 옆에서 방대한 자료 수집을 도와준 것으로 짐작되는 이시렴의 노고를 알 만하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저자가 화계사에 놀러 갔을 때, 광대극을 보고 엄청 재미있어 했다는 점이다. 기록을 보면, 다 알아들은 듯, 일부 대사까지 적어 놓고 있다. 하도 재미있어서 다음 날에도 숙소 밖에서 사진도 찍을 겸 개인적으로 다시 청해 즐긴다(제34장).
한편,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전반적으로 웃음이 은근짜로 나오지만, 저자의 일부 경험담은 소리 내어 웃게 만든다. 특히, 다리가 긴 서양인이 가마를(저자는 차라리 상자라고 불렀다) 타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은 애교일 정도로 웃기는 장면도 나온다. 그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 모두가 틀림없이 동병상련일 것 같은 온돌의 위력을 경험하는 장면은 압권이다(제6장). 또, 통행이 금지된 야간에 서울 거리를 걷다가, 밤에 돌아다니는 개에게 얼마나 놀랐으면, 개는 사악하고 비겁하다고 말했을까?(제22장)
저자는 예정보다 오래 조선에 머무른다. 이는 저자가 일본으로 출발하는 것을 늦추려고 애를 쓴 홍영식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때쯤이면, 갑신정변을 모의하고 있었을 홍영식이 민간인인 저자를 곁에 오래 두고 싶을 정도로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상주하면서 거처를 관리하는 무관 최홍석과 매일 출퇴근하면서 자신을 보살펴 주는 비서 이시렴의 사람 됨됨이에 반한다. 그리고 본인이 수학에 익숙한 이유도 있지만, 수학자 김낙집에게는 아예 한 장(章)을 할애한다(제24장). 어느 날, 김낙집은 그 전 방문에서 감기 걸린 저자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보약인지, 그를 위해 정성스럽게 포장한 금환(金丸) 두 알을 선물한다. 저자는 정성에 감격해 그리고 환약이 너무 아름다워, 차마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옆으로 슬쩍 밀어 둔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짧은 기간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떠나갈 때에 자기는 거의 조선인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의 사람에 빠지고, 조선의 문화에 빠진다.
저자는 부산을 떠나가는 배 갑판에서, 지나간 것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다시는 오지 않을 것에 대한 먹먹한 안타까움에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 보다가, 마침 피어 오른 부산의 봉화를 쳐다보며, 아래와 같이 적는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하루 밤만 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만 있다면 조선에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너무나 애절한 이별이다. 소설로 치면, 이 책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말이다. 저자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거기서 몇 달 머물다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 후, 10년에 걸쳐 일본을 두 번 더 방문하지만, 조선에 다시 오지는 않는다.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해 홍영식이 살아 있었다면, 홍영식은 분명히 저자를 다시 조선으로 초청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의 진심 어린 조선 사랑은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 그것들은 부산 위로 피운 봉화였다. 나는 그 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바로 이 순간, 해안에서 출발한 소식이 내륙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남산의 봉화는 서울 사람들에게 내 주변에 대해 말해 줄 것이다. 그것들이 그들에게 이 방랑자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말하지 않을까?
사람이 만들어서인지 봉화는 사람처럼 보였고, 마치 어둠속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커다란 두 눈처럼 느꼈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조용히 말하고 있지만, 내게는 작별을 고하기 위해 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불덩어리들을 올려다보았고, 그것들도 나를 보고 있다고 느꼈다.
거기서 오랫동안 기대어 내 눈이 그것들의 영혼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밤새 나를 보살펴 줄 물의 영혼이었고, 그 영혼이 나의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꼼짝 않고 그것들을 지켜보았고, 그것들도 꼼짝 않고 대답했다.
눈에 띄지 않게 시간은 흘렀고, 그 육중한 불길은 여전히 내 위로 빛났다. 시간이 꽤 지났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바다 바람은 싸늘하게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내가 머뭇머뭇 돌아섰을 때, 그 두 눈은 여전히 멀리서 사람의 시선처럼 나를 따라왔고, 은은하게 빛난 채,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이국으로부터 밤 인사를 하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조선 : 고요한 아침의 나라
퍼시벌로웰
1886
지은이 서문
1883년 8월 어느 날 저녁, 나는 일본 내륙을 여행한 후, 도쿄에 도착했다. 인력거를 타고 수 마일을 가는 동안, 거대한 도시의 수많은 불빛과 등불이 그렇게 빛나 보이거나 반가운적이 없었다. 마치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 당시, 내가 도쿄를 떠나 미국으로 항해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훌륭한 독자 여러분이 내일 캄차카로 떠나는 것에 대한 생각에 비견되었을 것이다.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밤같이 온통 깜깜할 뿐이다. 그로부터 나흘 후에, 나는 미국으로 가는 조선 특사단과 함께 태평양 위에 있었고, 2주 약간 넘은 후에 마치 외국인처럼 내 나라에 입국했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로 다시 출항한 것은 10월 마지막 날이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긴 항해와 일본에서 불가피한 지연으로 12월 중순에서야 조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도 서울에서 왕의 손님으로 그 해 겨울을 보냈다.
여러분이나 내가 누군가와 수천 마일을 함께 여행했다면, 우리는 분명히 서로에 대해 알게 된다. 혼인만 안 했다 뿐이지, 주고받는 것은 없어도 서로 받아들이고, 성격이 어떠한지도 다 드러낸다.
여기서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조선어 단어의 정확한 발음에 관한 것이다. 나는 조선어 단어를 번역할 때 이 주제의 선구자들인 Aston, Satow; 그리고 Chamberlain이 제안한 방식을 따랐다. 간단한 모음 a, i, o, u는 이탈리아어와 같이 발음된다. 매우 흥미로운 모음인 6는 프랑스어 e 묵음, 짧은 u, 퇴보한 o까지 다양한 소리를 가진다. 전체적으로 그것을 대표하는 최고의 소리는 독일어 6(o umlaut)다. e, e; e는 원래 조선어 이중모음이며, 지금도 ai, ai, oi로 표기되지만, 지금은 프랑스어와 비숫하게 단모음 소리로 발음된다.
번역된 자음은 대부분 영어에서처럼 발음되며, 도드라진 예외는 r이며, 일반적으로 어려움 없이 소리 나는 유음(流音)이다(즉, 위치에 따라!; 1, 또는n). 황(Whang), 정(Chlmng)처럼 중간에 끼인 h의 경우, 앞글자를 길게 발음한다. 마지막으로 중복된 글자는 된소리로 발음된다. 다른 외래어들은 관련분야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안한 철자로 표기되어 왔으며, 이러한 이유로 Corea를 Korea로 대체하였다. 만주지방에서는 모든 모음들이 이탈리아어 소리를 가진다.
둘째로,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책 한 권에 담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 많아서 특별히 누구에게 헌정하는 형태로 책을 발행할 수 없었다. William Sturgis Bigelow, Gustavus Goward; Basil Hall Chamberlain; Ernest F. Fenollosa의 친절과 도움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고맙다. 그 대신, 이 여행기(旅行記)를 바친다. 미야오카 츠네지로, 유길준, 최경석, 이시렴, 김낙집, 민영익, 서광범의 큰 은혜에 정말 감사하다. Lucius H. Foote 공사, C.L. Scudder씨, P. G. von Monlendorff씨, T. Kobayashi씨, 그리고 Y. S. Yoshida씨와 생각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지낸 나날들에 감사하며, 최근 Foote 공사 부인의 죽음에 대해 기억하자니 슬프기도 하다. 나의 충실한 친구이자 진정한 애국자, 그리고 급기야 정치적 순교자가 된 홍영식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사진 원판을 인화해 준 Forbes Alber-type Comply에게 감사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훌륭한 제안을 많이 해주신 대학 출판사의 Stevens씨에 감사한다.
제 1 장 하루가 시작되는 곳
지금 그 자리에 동경 180도 날짜선이 그어진 것은 행운이다. 시베리아에서 남극대륙까지 이 상상의 선이 지나가는 곳은 물 밖에 없다. 이 선 근처에 있는 유일한 육지는 남태평양 군도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 군도는 화산과 산호초 몇 개로 주요 군도로부터도 떨어져 있다. 이 섬들은 크기가 미미할뿐더러 그 중요성도 떨어진다. 그 곳에 사는 사람 수도 적지만, 방문객 수는 더욱 적다.
이 선은 상상일 뿐만 아니라, 적도처럼 천문학적인 존재 이유조차 없다. 그것은 순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있으나 마나 정도다. 없어도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치를 잊기 쉽지만, 그 위치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선은 한날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시간의 한 점이 아니라, 하루 그 자체다. 두 날이 만나는 선이다. 그 곳에서의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부자연스러워도 피할 수도 없는 24시간이라는 차이가 생긴다. 아무도 그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없고, 같은 시간이지만 날짜가 다른 어색함에 익숙해지려고 애쓰거나 당황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이 안사는 바다밖에 없으니 당연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날짜선이 사람이 사는 어떤 대륙을 지나갔다면, 그래서 10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두 마을 사이를 지나갔다면, 시간은 같고 날짜는 달랐을 것이다. "새로울 것 없는 같은 태양 아래!” 왜, 해가 뜰 때마다 날짜가 다를까? 마음만 먹으면 장사나 다른 이유로 날짜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 주의 어떤 요일을 두 번 맞이할 수도 있고, 또는 그 요일을 지워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날짜선을 서쪽으로 지날 때, 속절없이 하루가 지워진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현실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만약 무인 바다가 아니었다면, 세계를 불가분의 혼란에 빠트렸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날짜는 다르더라도 같은 하루라는 사실이다.
둥그런 지구가 돌아가면, 자연적으로 지역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해가 뜨고 져서 지구가 한 바퀴 돌면 하루가 지나간다. 지구 상 한 지점을 놓고 보면 하루가 어둠에 의해 구별되지만, 지구 입장에서는 늘 빛이 비친다. 그러므로 빛에 의지해 어제와 오늘을 결정하는 선은 없는 셈이다. 지구의 대칭은 그런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하루를 구별하는 것은 사람이다.
이제 문명국가들이, 혹은 적어도 서로에 대해 알고 관심을 두는 모든 국가들이 서로 가까우면, 하루의 시작점이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척점에 위치 한 나라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각자 자기만의 날짜를 가졌든지, 아니면 사당에 모여 참배를 하기로 했든지, 문제는 똑같이 난처했을 것이다. 사실, 현재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사람이 이주하기 전에, 세계가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발전해, 그가 있는 곳에 대해 전부 알 필요성이 있었다면, 그가 어디에 있든 골칫거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그를 중심으로, 그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 날짜선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돌든 저쪽으로 돌든, 대척점은 180도만큼 떨어져 있다. 0도 선이 유럽이 아니라 인도에 있었다면, 날짜선은 아메리카대륙을 지나게 될 것이고, 그 곳 주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날짜선 사이에 지리적인 공백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수요일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목요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불가능한 지리적인 공백이 시간의 연속성이 필요 없는 곳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끝과 시작이라는 두 끝을 잇기 위한 시도는 태평양에 의해 불필요하게 되었다. 실제로, 가장 운이 좋았던 것은, 있었다면 가장 많이 고민할 운명을 가졌을 반대편 지점에 대해 고민할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이득이라고 여기지만, 한편으로 손해인 것이 있다. 바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쪽 세계에서 하루 밤 자고 아침에 깨었는데, 저쪽 세계에서는 모레 아침이 된다. 이쪽 세계에서 내일이 저쪽 세계에서는 어제가 된다.
어쨌거나, 다소 기쁜 면도 있다. 날짜선을 지난다는 것은 우리의 여정이 안전하게 끝나간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거의 없다. 또한, 우리가 향하는 땅에 곧 닿을 것이라는 상상도, 그리고 극동 지방의 미신에 대한 공상과 서구 과학의 진부한 격언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라는 상상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인간이 날짜선 같은 것을 생각하기 훨씬 전에, 즉 인간이 일찍이 가졌던 신념이 나중에 과학적인 지지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하기 훨씬 전에, 아시아대륙의 종족들은 하루의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왔고, 오늘날 우리가 정한 곳이 바로 그곳이라 여겼다. 그들의 신화와 신화 속의 이름들을 보면, 나중에 엄격한 잣대로 밝혀질 사실들을 아름답고 서사적으로 예견한 듯하다. 현대에는 하루의 시작점을 과학적으로 정의한다. 한편, 고대에는 늘 해가 뜨는 때가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하지만, 고대에서는 사실이었다. 해가 바다에서 떠오르니 극동 지방 사람들에게는 해가 바다에서 잠자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들에게 해의 집은 상상 속 궁전이었고 우리에게 그것은 기하학적인 선이었다. 따라서 슬프게도 과학적 필요성은 환상이 설자리를 좁히고 결국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 초기 종족들이 살던 대륙은 지구를 둘러 죽 이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아마도 원 안에서 끝없이 서로를 쫓고 파괴했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대륙의 양끝은 바다다. 종족의 발생은 그들이 나아간 방향과 많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해가 뜨는 방향으로 향하든, 지는 방향으로 향하든, 방향 그 자체는 종족의 발생과 거의 혹은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하다. 느낌이 생각을 앞섰다. 그들은 아마도 뒤에 있는 적들이 아니라 내부의 불안감 때문에 이동했다. 아리아종족이 서쪽으로 가는 동안, 어떤 투란족은 동쪽으로 갔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거리가 아니라, 사고, 관습, 사물을 보는 선천적 방식에 의해 일단 갈라진 후부터는 영원히 갈라졌다. 그들은 출발할 때 조금만 달랐다. 긴 여정을 마치기 전에, 서쪽으로 가든 동쪽으로 가든, 공통적인 감정의 세계가 있었다. 무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섰으리라. 그후, 많은 방랑자처럼, 그들은 매력적인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그 공통의 감정을 잊었다.
해안에 도착한 후에야 그들의 이동은 중단되었다. 그들은 무한히 넓은 바다를 모험할 수단도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은 인간의 친구다. 반면, 바다는 기껏해야 중립이다. 사람이 바다 건너 육지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마음가짐이 매우 희망적이어야 하고, 전에 없이 아주 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물 너머의 지상 낙원, 즉 재물이 줄어들지 않을뿐더러 모든 것이 새롭고 공평한 세상에 대한 꿈은 빠르게 사라진다. 그들이 남기고 간 이름들은 그들의 소중한 신념을 증명한다. 그들이 살던 땅의 이름들도 그들을 그곳으로 데려온 여정에 대한증거다.
일본인들이 첫 번째 이주민에 속했고, 가장 멀리 갔다. 그들은 십중팔구 지금의 조선반도를 통해 왔다. 아시아대륙을 건너 유럽으로 진출한 선조들과 같은 열망에 이끌려 마침내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 모험을 감행했다. 우리는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반도와 그들의 섬 사이의 해협을 건넜음을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산이 많은 해안의 고지에서 바라보면 수평선에 거뭇거뭇하게 보이는 쓰시마로, 그러고 나서 이키섬. 거기에 이르러서 일본열도는 벽과 같았을 것이다. 열도 너머에는 출렁이는 파란색의 바다만이 있었다. 깊은 바다 너머로 바라보매, 무언가 찾으려 하는 그들의 간절한 시선에도 물위에 떠 있는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태양이 불처럼 화려하게 바다에서 떠올랐다. 하루가 시작된 것은 분명 여기서 였다. 축복받은자들이 사는 곳 외에 저 멀리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주민들에게 매일 아침이 새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땅을 아주 먼 옛날아침에 "하루의 시작“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항해를 하기 전에도, 돌아오지 않는 방랑자들 그리고 그들의 방랑에 대한 기억조차 뒤에 남은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진 후에도, 그런 믿음이 있었다. 역사 시대 이전부터 동아시아 분수령을 따라 달리던 종족들은, 우리가 해 지는 쪽을 향해 그러하듯이, 시선과 시선 너머로 관통하는 상상력을 해 뜨는 쪽으로 돌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곤 했다. 태양이 깊은 곳으로부터 떠오를 때, 사람들은 어제 안식하기 위해 지는 해와 함께 묻어두었던 모든 갈망, 모든 허황된 꿈, 이루어질 것 같은, 또 안 이루어질 것 같은 꿈도 함께 떠올렸다.
그래서 우연히 일본인들의 통로가 되었고, 나중에 그들의 동료를 넘어 영구적인 거주지가 될 운명이었던 조선반도가 초문명적 행복의 신화적 지역으로 우리 눈길을 끈다. 그 땅은 ”신의 나라”라고 불렸다. 그 속에서 자라는 것은 헤스페리데스의 사과가 아니라, 모든 병을 치료하고 질병을 정복하고 영생을 가져오는 상상 속의 선인장이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불로초”라고 불렀고, 오늘날 조선인들은 산삼이라 했다.
하지만 북쪽에서 새로운 무리가 쏟아져 나왔고, 신들은 그들 앞으로 날아왔다. 선조보다 모험심이 덜한 그들은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 그들은 육지에서 떠돌다가 그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된 전통을 잊지 않았다. 해가 지나고 세기가 지날수록, 우리는 그들이 거의 과거 신화들의 계승자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좌우간, 해는 오늘도 아침 시간을 감싸는 평화로운 화려함 속에서 그들을 위해 떠올랐고, 햇살은 산 사이의 계곡으로 떨어져 땅 위에 등지를 틀었다. 그들은 그 땅을 ”고요한 아침”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더 이상본질적일 수 없는 듯 보였다. 나른한 조용함이 그들을 쉬게 했고, 그들은 잠이 들었다. 그들은 세상에 있었지만, 그 세상은 그들에게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은 오랫동안 잠을 잤다.
동화 속 궁전처럼 모든 것이 수 세기 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변화는 그들을 몰랐고, 시간은 정지되었다. 개인은 세상을 떠났고 잊혔지만, 종족은 불멸의 존재로 보였다. 어떤 외계인도그곳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북쪽과 서쪽의 이웃들은 기꺼이 그들의 은둔을 존중하고, 그들이 혼자 남겨지는 것을 즐기는 특권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신성한 지역으로 가져갔던 것들을 잘 보존했다. 가져간 물건의 대부분이 이웃의 관습에서 빌린 것이지만, 마치 자기 생각의 결실인 것처럼 집착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되었다. 즉 살아있는 화석으로 수 세기 전의 삶, 생각, 관습, 옷차림 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오늘날의 조선인들을 보면, 지난 날 이 땅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 그들 선조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잠깐 드러났던 옛 에트루리아 왕처럼, 그들은 매장당한 모습 그대로 오늘날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왕과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의 모습도 바깥 세계와 접촉하면 모두 무너져 먼지로 흩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도 지난 시절 행복한 지역으로 반도를 선택했다. 긴 여름이 끝나가고, 겨울의 얼음 같은 손이 아시아의 북쪽을 스쳐가 현재 우리가 그것들의 유골을 발견한 장소에 긴털 코끼리들을 파묻었을 때, 한파가 지금의 조선과 그 주위의 나라들에 몰아쳤다. 한동안 주변의 바다가 동물들을 따뜻하게 유지시켰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연의 궁지에 몰려서 목숨을 건 싸움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동물들은 살아남았다. 어떤 변화가 있었든, 그들은 그것에 적응했다. 호랑이는 밀림에서 어슬렁거렸고, 너새들은 계속해서 평원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악어는 서식지의 온도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 동안 서식지였던 하구의 진흙 둑까지 기어올랐다.
탈출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동물들에게 처음에는 불리한 상황이었더라도, 이주하는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이 더 쉬웠다. 그랬어야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습하고 더운 밀림 하면 습관적으로 연상되는 짐승인 벵골 호랑이가 조선과 만주의 건조하고 추운 기후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벵골 호랑이는 그곳에 있다. 그 모습은 인도의 정글에서와 똑같다. 단지 조금 더 작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따뜻한 계곡이 아니라 산기슭의 숲을 선호한다. 주변 조건에 맞게 털도 길어지고 더 멋있어졌다. 호랑이가 그 곳에 남은 용기는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 호랑이는 가장 명예로운 이름이며, 혹 이주해서 더 편하게 살았을 지도모르는 땅에서 보다 훨씬 더 큰 명예를 누린다.
사실, 호랑이는 조선반도와 만주지방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북쪽에서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경탄의 대상이다. 호랑이는 힘과 용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호랑이 그림은 군대에서 위대함의 상징이며, 조선 군인들이 전쟁에 임할 때 군대 앞에 내거는 깃발이었다.
호랑이만 혼자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의 예전 동료들도 그대로였다. 표범은 자기 선조들이 살았던 곳에서 계속 살았다. 수 세기 동안 살해된 지금도그 가죽이 가장 흔한 관직의 휘장으로 쓰일 만큼 많이 산다. 이웃한 만주는 조선과 달리 외부 세계로부터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산품으로 취급되는 조선반도의 표범 가죽보다 월등히 많이 생산한다.
식물의 경우, 사정은 달랐다. 초기 온화한 시기에 조선을 뒤덮었던 종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은 남쪽으로 옮겨 갔지만, 식물들은 옮겨갈 수 없었고, 태양 없이는 살수 없었기에 모두 죽었다.
아마도 생물의 등급을 매길 때 역경을 견뎌낼 수 있는 힘, 쉽게 말해 적응력보다 더 좋은 기준은 없다. 주변의 모든 것이 순조롭고 호의적일 때 번창하는 것은 가장 하등급 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파괴될 때 견디는 것은 ”힘들지니,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인내가 사람들의 인격에 반영 될 때 그것을 찬양한다. 그러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생물의 인내는 인격의 찬양보다 더 심오하다. 그것은 자연의 기본법칙 중 하나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하등생물이나 고등생물 모두 그것들이 원하는 것이 주어지 면 번창한 다. 하지만 주어진 것을 원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후자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가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정으로 종족불멸의 암호라고 불릴 수 있다.
어떤 생물의 능력이 확장되는 것에 비례하여, 그 영향력의 범위가 증가하므로, 그 생물은 견딜 것이다. 그 증가란 신체 구조의 복잡성에서 먼저 비롯되고, 그 다음 등급에 이르면, 정신의 복잡성에서 비롯된다. 정신의 복잡성은 물질의 단순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무한한 정신이 어떻게 물질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하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적응할 수 없었다.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의 흔적은 조선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여타 비슷한 위도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과 유사하다. 사람이 이런 변화에 일조했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토종 초목을 남기지 않았고, 남부 지역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완전한 경작지로 만들었다. 실제로, 원래 가축에게 풀이나 먹이면서 살았어야 하는 삶이 얼마나 완벽하게 전환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매우 놀랍다. 한 자리에 정착해 농업을 경위하는 것이 이 종족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한때 유목민 부족이었던 종족이 특이하게도 방랑 본능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수 세기 전, 신화의 땅으로 유랑해 왔고 그 땅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은 신들의 땅에 정착했고 만족했다. 불멸의 후광은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