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 따라 흐르는 것들 / 이연희
아버지는 무시로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앉히곤 비포장도로를 덜컹덜컹 달려 남대천으로 갔다. 강변의 자갈밭에 꼬맹이 나를 내려 주시고, 아버지는 긴 낚싯대를 들고 첨벙첨벙 물속으로 걸어갔다. 아버지의 정강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물살을 바라보던 나도 슬그머니 물속에 몸을 담그고 놀았다.
대패와 끌, 망치로 문이며 가구를 짜는 아버지의 유일한 휴식은 저물녘에 잠깐 물가를 찾는 일이었다. 통발이나 족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낚시를 즐겼다. 아버지의 낚시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은 어린 나에게 인내심을 길러 주는 일이었지 싶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초고추장을 마련했다. 아버지는 금방 잡은 물고기를 손질한 후 새콤달콤하면서 매콤한 초고추장에 찍어 맛있게 드셨다. 그런 아버지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내게 피리나 모래무지 따위를 입에 넣어 주시곤 했다. 비릿하고 미끈거리긴 했어도 먹을 만했던지 사양 않고 덥썩덥썩 받아먹었다.
재수가 좋아 물고기가 솔찮이 잡히는 날에는 어머니가 물고기조림을 했다. 피라미, 쏘가리, 빠가사리, 메기 등에 고추장, 간장, 설탕 그리고 갖은 양념을 하여 졸여내면 훌륭한 반찬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맛이 밴 물고기조림을 유난히 좋아했다. 친정에 달려가 어리광처럼 말씀드리면 무더운 여름날에 잃었던 입맛도 되살려주던 그 맛! 이제는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아버지의 허리를 꽉 잡고 달리던 즐거움과 그 바람에 실려 오던 시큼한 땀내마저도 아련히 그립다.
나의 성장지는 순박한 사람들이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촌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장롱이며 가구를 만들고 더러는 집짓는 일도 맡아 하시던 아버지는 목수였다. 망치와 톱, 기계 돌아가는 소음과 뿌옇게 톱밥이 날리는 연기 속에 아버지는 허리 펼 날 없으셨다.
그러나 일 년에 한두 번은 어김없이 천렵을 나가셨다. 이 날에는 지척에 살고 있는 친인척과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는 식솔들까지 이십여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피로와 회포를 풀며 즐겁게 지냈다.
벽지 같은 농촌에 자동차가 귀했던 터라 손수레에 수북이 짐을 실었다. 커다란 솥단지며 과일, 술 등을 실었는데 이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장작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선대나 앞섬, 뒷섬의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어쩌다 작은 트럭이라도 마련하면 아이들은 트럭의 짐칸에 올라 온갖 노래를 아는 대로 신나게 불러댔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여자들은 준비해간 먹거리를 손질하고 돌멩이를 모아 아궁이를 지어 솥단지를 걸고 불을 지폈다. 남자들은 윗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굵은 팔뚝의 힘을 과시하며 저 만치 훌떡 훌떡 그물을 던졌다. 족대나 낚시로도 물고기를 잡아 수확물을 늘렸다. 어느 짬엔지 피로와 회포를 푼 어른들의 표정도 환해졌다.
아이들은 너나없이 물싸움을 하고 물장구를 쳤다. 물수제비를 뜨며 누가 멀리 나가는지 내기도 했다. 오랜 시간 물속에 몸을 담근 탓에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오슬오슬 한기가 몰려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놀았다.
어느새 잡아온 물고기로 어죽을 끓여 놓고 “얘들아, 밥 먹고 놀아라.” 목청껏 외쳤다. 그 소리가 앞산 뒷산에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평소에 먹기 드문 닭고기와 닭죽이 있는가 하면 금방 잡은 싱싱한 물고기로 만든 어죽은 어린 입에도 천렵 중에 먹는 최고의 맛이었다. 민물고기로 끓이는 어죽은 여름날의 피서도 즐기고 보양식으로 건강도 챙기는 지혜가 담겨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무주의 어죽은 정말 별미음식이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과 함께 돌려 마시던 막걸리로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렇게 어울어 생활의 고단함을 떨쳐버렸다. 천렵은 농촌사람들에게 동지애가 되는 즐거운 놀이요, 축제였다.
어죽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주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음식 중의 하나이다. 맑디맑은 무주의 냇물에서 잡은 민물고기에 양념과 함께 쌀을 넣고 끓여 서로 나눠먹던 정겨운 음식이다. 불현듯 어머니가 끓여주던 어죽이 먹고 싶다.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어머니는 어죽의 솜씨쟁이셨다. 민물고기를 푹 고아 뼈를 발라낸 후, 약간의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쌀을 넣어 푹 끓인다. 쌀이 웬만큼 퍼지면 숭덩숭덩 파를 썰고 마늘을 다져 함께 넣고 한소큼 끓였다. 물속에서 금방 빠져나온 우리들은 물기 좔좔 흐르는 몸을 햇볕에 말리며 그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죽그릇을 비워냈다. 그리곤 강가에서 잔돌밭에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누워 뒤적대다보면, 몸도 마음도 어죽처럼 따끈따끈해지고 포근해졌다.
무주에서 금강으로 흘러드는 남대천과 적성천이 민물고기를 다양하게 길러낸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민물고기탕이나 어죽이 발달했다. 먹을거리도 신토불이다. 근래의 어죽은 민물고기탕에 국수나 수제비로 요리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어죽을 제대로 맛보려면 무주로 가야 한다. 얼큰하면서도 비린 맛이 전혀 나지 않는 무주의 어죽은 참으로 담백하고 맛있다. 무주 사람들의 순박한 인정의 맛이라면 과찬일까.
무주의 별미 음식으로는 빠가매운탕, 쏘가리매운탕, 도리뱅뱅이, 다슬기탕, 표고버섯요리와 산채정식이 사철 내내 요리된다.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고, 아버지의 푸근한 품이 그리워 지금 나는 강선대降仙臺의 한 귀퉁이에 서 있다. 어린 시절에는 강물이 흐르는 강가에 반질반질한 자갈들이 가득했었다. 둥글납작한 돌멩이로 돌탑을 쌓아 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오면 친구들끼리 어울려 천렵을 했다. 웃음소리가 끊일 줄 몰랐던 그 시절의 추억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이제는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밥 먹고 놀라시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픔인지 아픔인지 모를 울컥함이 가슴에 통증을 일으킨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풍성하게 흐르던 예전의 그 강물이 아니다. 귀에 들어간 물을 빼내느라 마른 돌멩이를 귀에 대고 통통 뛰었던 그 자갈밭이 아님을 어찌하랴. 그 많던 돌멩이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릴 적 친구들처럼 어디로 갔을까. 강물은 여전히 흘러가고 들풀은 무성하나 웬일인지 나는 헛헛하고 쓸쓸하다.
강선대는 신선이 내려온다는 곳. 조선 중기 이전에 지어진 누정이었단다. 무주 반딧불 시장에서 아래쪽으로 남대천을 따라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강 주변을, 나는 강선대라 부르며 자랐다. 물길을 따라 걷다보면 차산마을이고 더 걸어가면 서면마을이다. 이곳에는 주욱 벚나무길이 이어져있어 봄날 4월에는 벚꽃의 꽃비가 내리는 곳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 달맞이꽃 한 송이, 자잘한 돌멩이 하나에도 담뿍 정이 가는 것은 아마도, 내 안에 숨어있는 회귀본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아갈 고향이 있고 추억할 사람이 있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오늘밤 꿈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네 소꿉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천렵 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연희] 수필가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전북문협 부회장, 전북예총 사무처장, 문예가족 회장 등 역임.
김환태기념사업회, 전북문협, 전주문협 이사. 전북예총 진흥자문위원.
* 수필집 『인도人道 가는 길』, 『스며들다』
* 산문집 『풀꽃들과 만나다』
* 전북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전주문협 문맥상
천렵의 계절, 매운탕의 계절 여름입니다. 치열한 신록의 향일성, 성장하고 도모하며 맹렬하게 세포분열을 일으키는 생명의 환희가 모두 여름에 있죠. 돌아보니 어느덧 그 옛날 부모님 연배에 닿았네요.
글을 읽다보니 청정 무주의 강물 소리, 바람 소리가 들려와 '중복' 무더위를 잠재우네요. 추억이 깃든 젊음의 계절 여름, 이제 장마가 걷히면 치열한 여름의 노래, 말매미가 환희의 여름을 여름답게 노래하겠네요. 여름은 참 아름답습니다.
첫댓글 그리운 유년의 추억 속으로 내닫는 아름답고 찬란한 여름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
저는 어릴 적에 지낸 고향을 잘 갑니다
고무신 벗어두고 건너던 냇가
삐비 뽑으러 다니던 산야
그렇게 넓어 보이던 다리
이런 곳에다 행운을 숨겨두었군요
행운도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인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