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서원 玉溪書院
문화재 지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
소재지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370
요약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에 있는 조선시대 이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문화재자료.
조선시대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의 도덕과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그 뒤에 윤봉구(尹鳳九)·최남두(崔南斗)·위백규(魏伯珪)·박준흠(朴俊欽)·최유윤(崔惟允)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서원으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3칸의 강당, 3칸의 주소(厨所) 등이 있다.
묘우에는 이이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윤봉구·최남두·위백규·박준흠·최유윤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어왔다. 고자처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며, 제구(祭具) 등을 보관하기도 한다.
매년 3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옥계서원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3,000평, 임야 1정보, 대지 3,500평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전고대방(典故大方)』
・ 『옥계서원지(玉溪書院誌)』
・ 『경상남도지』(경상남도,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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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음성문화대전
박준흠朴俊欽 1719~1796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덕여(德汝),입암(立庵),소오헌
[가계]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덕여(德汝), 호는 입암(立庵). 박서(朴犀) 장군의 16세손이고, 아버지는 아산현감 박정규(朴廷珪)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 장령 이행민의 딸이다.
[활동사항]
박준흠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여 한번 읽은 글은 반드시 기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성장하면서 경학을 연구하였고, 의문점은 도암 이재와 여호 박필주에게 배웠다. 일찍이 구암 윤봉구의 문인으로 학문을 배울 때 공부하는 법도를 듣고는 이후부터 스스로 터득하는 바가 많았다. 이를 구암이 기뻐하여 “내가 우리 도의 사람을 얻었는데 이 사람을 대접하는데 어찌 사제의 예로 하겠느냐?”하며 ‘입암’이라 써서 호로 삼았다.
1742년(영조 18) 부친이 돌아가신 후로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을 전공, 사서를 연구하며 명리(名理)를 밝게 하고, 유교의 예를 수집하고, 예절을 정성껏 하여 사람들이 의심나는 것을 물었다. 감역(監役)에 추천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천거하는 자가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만년에 안성 덕곡(德谷) 산중에서 우거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준흠은 문장이 섬세하고 아담해서 스스로 궤범을 지켰고 더욱이 편지에 능했는데, 글과 편지 등은 화재로 없어졌다. 흩어지고 파손된 유고(遺稿)를 아들 박응한(朴應漢)이 편집하여 7권이 전하는데, 5대손 박대현(朴大鉉)이 『입암집(立庵集)』 8권을 간행하였다. 저서로 『목도서설(木圖書說)』, 『성학설(聖學說)』, 『만물조화설(萬物造化說)』이 있는데, 특히 『목도서설』은 세상 사람들의 많은 찬사를 받아 모두가 칭찬하였다.
[묘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상감천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55년(철종 6) 관찰사 한정교가 조정에 글을 올려 박준흠의 학문과 효행을 알렸고, 1884년(고종 21) 좌의정 김병국 또한 임금에게 알려 사헌부지평에 증직(贈職)하고 옥계서원에 추배하였다.
[참고문헌]
『입암집(立庵集)』
이병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보문사, 1937)
『음성군지』 (음성군지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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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惟允 : 1809년(순조 9)∼1877년(고종 14)
夢關集 2책
◈ 판 종 : 木活字本
◈ 권차 및 발행사항 : 권1~4, 2책 완질. 崔惟允 : 1809년(순조 9)∼1877년(고종 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진(誠進), 호는 몽관(夢關). 부친은 최경태(崔擎泰)이다. 일찍부터 과거를 준비했으나, 30세가 지나면서 이에 뜻을 버리고 10여 년 간 성리학을 독학(獨學)하였다. 그 뒤 송내희(宋來熙)‧송달수(宋達洙)‧기정진(奇正鎭)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중년에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갔다가 만년에 임곡(林谷)에 돌아와 후학(後學) 양성에 힘썼다. 그는 항상 무본실천(務本實踐)을 강조했으며, 일상생활에 정규(定規)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기울어져 가는 유교의 풍토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배불(排佛)에도 힘써 이단(異端)을 배척하였다. 저서로 《몽관집(夢關集)》이 전하는데, 구한말(舊韓末) 척사(斥邪) 계열의 유학관(儒學觀)을 연구하는 데 한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아들 최장한(崔鏘翰)은 그가 죽은 지 4년만인 1880년(고종 17)에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유고(遺稿) 정리 및 서문(序文)을 부탁했으며, 1902년(고종 35)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1902년 목활자본 최유윤(崔惟允) 몽관집(夢關集)권1,2 1책(1902년) 21*30.4센치 완질은 7권2책임 보55-2 **序: 崇禎後五甲上章執徐(?)...崔益鉉 跋: 上之三十九年著雍攝提格(1880)...權鳳熙 刊記: 歲壬寅(1902)仲春新刊 **최유윤(崔惟允) 1809년(순조 9)∼1877년(고종 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진(誠進), 호는 몽관(夢關). 아버지는 최경태(崔擎泰)이다. 일찍부터 과거를 준비했으나, 30세가 지나면서 이에 뜻을 버리고 10여 년 간 성리학을 독학(獨學)하였다. 그 뒤 송내희(宋來熙)·송달수(宋達洙)·기정진(奇正鎭)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중년에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갔다가 만년에 임곡(林谷)에 돌아와 후학(後學) 양성에 힘썼다. 그는 항상 무본실천(務本實踐)을 강조했으며, 일상생활에 정규(定規)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기울어져 가는 유교의 풍토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배불(排佛)에도 힘써 이단(異端)을 배척하였다. 저서로 《몽관집(夢關集)》이 전하는데, 구한말(舊韓末) 척사(斥邪) 계열의 유학관(儒學觀)을 연구하는 데 한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아들 최장한(崔鏘翰)은 그가 죽은 지 4년만인 1880년(고종 17)에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유고(遺稿) 정리 및 서문(序文)을 부탁했으며, 1902년(고종 35)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정재규(鄭載圭)가 남긴 《노백헌문집(老柏軒文集)》의 〈서(書)〉에는 그의 스승인 기정진(奇正鎭)을 비롯해 최유윤(崔惟允)·이진상(李震相)·최익현(崔益鉉) 등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주로 성리(性理)에 관계된 것, 경전(經傳)의 뜻을 풀이한 것, 예설(禮說)에 관한 것들이다.
합천 쌍백 묵동의 정재규( 老栢軒 鄭載圭) 선생은 22세 때에(1864) 그가 다니는 서당 최유윤(崔惟允)훈장의 권유에 따라 400리 길인 전남 장성까지 걸어서 노사(蘆沙)선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1879년 노사선생이 별세할 때까지 수학하여 수제자로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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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9일 오전 09:05 친구공개 나만보기 필독 0명 편한친구공개
玉溪書院옥계서원 遡源祠소원사 향례에서 장흥 방촌의
存齋존재 魏伯珪위백규(1727~1798)선생의 후손들과 함께 기록을 남기다
存齋 선생은
茅廬모려 崔南斗최남두(1720~1777)
족선조와 함께 기호의 충청도 덕산 가야산 옥병계에서 강학하던
屛溪 尹鳳九의 문하에 출입한 동문이다
소원사에는 文成公문성공
栗谷율곡 李珥이이(1536~1584)
屛溪병계 尹鳳九윤봉구(1681~1766)
茅廬 崔南斗(1720~1777)
存齋 魏伯珪(1727~1798)
立菴입암 朴俊欽박준흠(1719~1796)
夢關몽관 崔惟允최유윤(1809~1877)을 제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위대량 최영섭 위계후 최인석 위 등 최효충 ♥♥♥ ♥♥♥
2014.3.27(음 2.末丁日) 촬영 최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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