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宗 4년
〈선종(宣宗)〉 (정묘) 4년(1087) 봄 정월 갑인.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을축. 요(遼)에 고주사(告奏使)로 비서감(秘書監) 임창개(林昌槩)를 보냈다.
기사. 유사(有司)에 명하여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신병(神兵)으로 전쟁을 도와달라고 빌었다.
갑술. 회경전(會慶殿)에서 〈왕이〉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인.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아노한(阿盧漢) 등 1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기묘. 소태보(邵台輔)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하였다.
경진. 요(遼)에 밀진사(密進使)로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김한충(金漢忠)을 보냈다.
2월 경인. 임개(林槩)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고경(高景)을 어사잡단(御史雜端)으로, 최사열(崔思說)을 시어사(侍御史)로 각각 임명하였다.
갑오. 〈왕이〉 개국사(開國寺)에 행차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완성을 경축하였다.
정유.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괴팔(恠八) 등 19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3월 병진. 〈왕이〉 귀산사(龜山寺)에 행차하여 반승(飯僧)을 베풀었다.
기미.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가서 대장전(大藏殿)이 완성된 것을 경축하였다.
신유.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소은두(所隱豆) 등 13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자, 관작(官爵)을 하사하였다.
계해. 최석(崔奭)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로 삼았다.
임신. 일본(日本)의 상인 중원(重元)과 친종(親宗) 등 32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갑술. 송(宋)의 상인 서전(徐戩) 등 20인이 와서 새로 주석한 화엄경판(華嚴經板)을 바쳤다.
병자. 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태일(太一)에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며 바람과 비가 순조롭기를 빌었다.
무인. 경범죄자[輕繫]들을 석방하였다.
경진.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정무를 보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최석(崔奭)과 김양감(金良鑑),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유홍(柳洪)이 당시 정세의 득실을 말하였다.
여름 4월 병술. 송(宋)의 상인 부고(傅高) 등 2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무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왕석(王錫)이 죽자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경자.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완성을 경축하였다.
을사. 건덕전(乾德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7일간 열고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무신. 또 보제사(普濟寺)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5월 정사.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
정묘. 왕이 흰 난삼[素襴]을 입고 태조(太祖)의 현릉(顯陵)을 참배하며 시호를 추존하는 죽책(竹冊)을 올렸다.
무진. 문덕전(文德殿)에서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었다.
경오. 〈왕이〉 문종의 경릉(景陵)을 참배하였다.
임신. 〈왕이〉 태조(太祖)의 아버지 세조(世祖)의 창릉(昌陵)을 참배하고 모두 죽책(竹冊)을 올렸는데, 책문에서 말하기를,
“조상에게 흠향하는 존엄함은 복희(伏羲)의 주역(周易)에서는 은천(殷薦)을 존중하는 의식이라 하였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이치는 『우서(虞書)』에 따르면 모두 지극한 정성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효를 생각하는 말이라면 마땅히 갖추어 정성껏 제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가 외람되이 어리석고 우매한데도 조상의 업적을 이어받아서, 시기에 감응하여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을 애통해 하며 날을 택하여 참배하는 예를 거행하였습니다. 백관이 일을 맡은 것에 따라 성대한 의식을 마련하게 하고, 온 나라[九州]의 알맞은 것을 다하여 향기로운 제물을 바쳤습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총명하신 보살핌으로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굽어 살피소서. 하늘에서 신령하신 위엄을 빛나게 하여서 순전한 복을 주시고, 후대까지 경화(景化)를 펼쳐 태평한 시대를 보존하도록 도와주소서.”
라고 하였다.
갑술. 최석(崔奭)을병진 내정(內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수국사(修國史)로, 김양감(金良鑑)을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로, 최사량(崔思諒)을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叅知政事 兼 西京留守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해. 김행경(金行瓊)을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平章事)로 삼았다.
기묘. 〈왕이〉 회경전(會慶殿)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며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6월 임오.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을유. 회경전(會慶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7일간 열었다.
병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신축. 경범죄자[輕繫]들을 석방하였다.
가을 7월 계축. 문황(文晃)을 서북로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西北路兵馬使 兼 知中軍兵馬事)로, 이자위(李子威)를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 兼 知行營兵馬事)로 삼았다.
기사.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경오. 동남도도부서(東南道都部署)에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의 원평(元平) 등 40인이 와서 진주(眞珠), 수은(水銀), 보도(寶刀), 우마(牛馬) 등을 바쳤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신.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정무를 보자 최석(崔奭), 김양감(金良鑑), 유홍(柳洪), 최사양(崔思諒)이 당시 정세의 득실을 아뢰었다.
8월 계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사형(死刑) 집행을 결재하였다.
을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기해. 숭경궁(崇慶宮)을 고쳐 보녕궁(保寧宮)이라 하고, 경흥원(慶興院)을 고쳐 원희궁(元禧宮)으로 하였다.
병오.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정미. 어사대부(御史大夫) 임개(林槩)를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로, 사재경(司宰卿) 윤익상(尹翼商)을 지동북로병마사(知東北路兵馬事)로 임명하였다.
9월 경술. 초하루 왕이 회교역(懷蛟驛)에 머물렀는데, 밤에 호위하는 군영에서 화재가 났다.
신해. 〈왕이〉 대동강(大同江)의 누선(樓船)에서 측근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계축. 〈왕이〉 장락전(長樂殿)에 나아가 정무를 보았다.
무오. 요(遼)에서 고주관내관찰사(高州管內觀察使) 고혜(高惠)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갑자. 최석(崔奭)을 검교태보(爲檢校太保)로, 최사량(崔思諒)을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로, 문황(文晃)을 검교태자태부(檢校太子太傅)로, 이자위(李子威)를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계유. 〈왕이〉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하였다.
병자. 경범죄자[輕繫]를 석방하였다.
무인. 흥국사(興國寺)에서 연등도량(燃燈道場)을 열었으며, 또 궁성 안팎의 거리에는 등불을 켰다.
겨울 10월 기묘. 초하루 왕이 흥국사(興國寺)에 행차하였다.
계미. 〈왕이〉 중흥사(重興寺)에 행차하였다.
을유. 〈왕이〉 내전(內殿)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정해. 왕이 관풍정(觀風亭)과 구제궁(九梯宮)을 두루 돌아보고 그 길로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여 행향(行香)하였으며, 용선(龍船)을 타고 대동강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임진.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영봉루(靈鳳樓) 부계(浮堦)에 나아가 음악을 감상하였으며 그 길로 흥국사(興國寺)에 행차하였다.
요(遼)에 고주사(告奏使)로 예빈소경(禮賓少卿) 유신(柳伸)을 보냈다.
계사. 부계(浮堦)에서 친왕(親王)과 시신(侍臣)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을미. 〈왕이〉 흥복사(興福寺)와 금강사(金剛寺)에 행차하였다.
병신. 왕이 흥복사(弘福寺)와 인왕사(仁王寺)에 행차하였으며, 그 길로 제연(梯淵)에 행차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술자리를 베풀었으며, 배로 대동강(大同江)까지 이르러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개경(開京)의 회경전(會慶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구정(毬庭)에서 승려 3만 명을 반승(飯僧)하였다.
무술. 〈왕이〉 장락전(長樂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1월 을묘. 〈왕이〉 서경(西京)에서 궁궐로 돌아왔다.
병진. 요(遼)에 위위소경(衛尉少卿) 유석(庾晳)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한 것을 사례하였다.
임술.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기사. 요(遼)에 전중소감(殿中少監) 김덕균(金德均)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신미. 유단(維旦)을 분사병부상서 지서경유수사(分司兵部尙書 知西京留守事)로, 황종각(黃宗慤)을 위위경 서경부유수(衛尉卿 西京副留守)로 각각 임명하였다.
정축.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임희열(任禧悅)이 죽었으므로 1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12월 기묘. 초하루 시어사(侍御史) 최사열(崔思說)을 전주도(全州道)·진주도(晋州道)·나주도(羅州道)에,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이위(李瑋)를 경주도(慶州道)와 상주도(尙州道)에, 합문지후(閤門祗候) 윤관(尹瓘)을 광주도(廣州道)·충주도(忠州道)·청주도(淸州道)에 출추사(出推使)로 보냈다.
기축. 요(遼)에 형부시랑(刑部侍郞) 최저(崔翥)를 보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경인. 최석(崔奭)을 수태위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守太尉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로, 김양감(金良鑑)을 수태위(守太尉)로, 유홍(柳洪)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최사량(崔思諒)을 수국사(修國史)로, 문황(文晃)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이자위(李子威)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김충의(金忠義)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박인량(朴寅亮)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이예(李預)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각각 임명하였다.
갑오. 경범죄자[輕繫]를 석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