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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
#1. 겨울, 산의 비극
북쪽으로 강이 흐르고 삼 면이 산으로 가로막힌 언덕에 무덤 봉분 두 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그 옆으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옆으로 난 가지에는 그네처럼 매달린 시신 하나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 아래 네 명이 웅성거리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증거물을 찾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두 사람이 받치고 한 사람이 줄을 끊고 시신을 수습했다. 죽은 자의 주머니를 뒤져 소지품을 내어놓았다. 지갑, 수첩, 편지 등이 나왔다. 지갑에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한 장, 현금 삼만 칠천 원 등이 들어있다. 성명 김진위, 나이 만 51세, 성별 남자, 주소 A시 B구 C동 134번지. 편지봉투 안에는 소장이 들어있다. 비대위가 L 호텔에서 2억여 원을 받아 횡령했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등 피고 김진위가 허위사실을 유포해 원고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는 내용이었다.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으로 피소된 걸 갖고 목메 자살하나? 그것도 자기 부모 산소에서. 살아있을 사람, 아무도 없겠네. 내, 참.”
“다른 사연이 더 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타살은 아닌 것 같은데.”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이, 의미 없는 자살이 있을까?”
“그래. 남긴 게 뭐 있는지 잘 조사해 봐야지.”
“그려, 메시지를 찾아 세상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해주는 것, 그게 죽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겠지.”
“메시지? 억울하다는 메시지야, 아니면 면목이 없다는 메시지야?”
“그러니까, 한 번 조사해 보자고.”
상석 위 종이컵엔 창백한 은빛이 서럽게 서걱거리고, 벼랑 아래 빈 소주병엔 슬픈 햇살이 하얗게 흩어졌다.
#2. 입주자대표회의
조은아파트는 분지의 서쪽 낮은 기슭에 둥지를 트고 있다. 그 뒤로 다른 아파트들이 빡빡하게 들어서서 원숭이두창에 걸린 사람처럼 징그럽고 끔찍했다. 조은아파트가 바람구멍의 나들목을 막아선 탓에 분지는 누런 기운에 휩싸인 분화구와 흡사했다.
조은아파트 회의실은 관리실 지하에 있다. 열 한 명의 각 동 대표가 탁자에 둘러앉았다. 개회 선언과 동시에 8동 대표인 강 이사가 벌떡 일어섰다. 깡마른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쓰고 빨간색 줄무늬 넥타이를 했다. 강 이사는 대뜸 현재의 관리비 부과방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것은 전체적으로 분양면적을 기준으로 배분하는 현 방법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각 동의 경비원 인건비는 동별로 분양면적을 기준으로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입주 시에 분양면적과 관계없이 각 세대에 똑같이 일정하게 배분하던 경비원 인건비를 인터넷으로 조직화된 젊은 사람들의 아파트 내 좌파 정치 모임 ‘삼팔육’이 단지 전체를 대상으로 분양면적 비례로 배분하도록 변경한 게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은 터다. ‘삼팔육’은 당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자들의 아파트 내 운동권 단체였다.
강 이사는 이것을 동별 면적별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이에 전 이사는 손사래를 치며 강 이사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려 시도했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강 이사는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며 현 부과방법의 개정을 강하게 어필했다. 10동 대표인 전 이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민법에 보면 그 지분의 비율로 관리비를 부담한다고 되어 있고,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항변했다. 강 이사는 전 이사가 말하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법, 법 좋아하는 모양인데, 난 그런 것 몰라요. 우리끼리 정하면 되지, 거기에 법은 왜 들이대나? 전 이사, 그럼, 동별로 가자는 게 위법이란 말이요?”
“참고로 법이 그렇단 말이지요. 그게 비록 임의법이라 하더라도 규약의 합리적인 길잡이는 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 법이 있다면 그게 잘못됐어. 우리 동의 경비원 임금을 우리가 주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요?”
“아파트 전체를 하나로 보고 생각해야지, 자기 동만 보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다른 아파트도 경비 인건비만큼은 다 동별로 면적비례로 뿜빠이 한답디다. 나도 다 알아볼 만큼 알아봤어요”
“그렇다면 그 다른 아파트가 잘못하는 거지. 잘못하는 것을 보고 굳이 따라갈 필요야 없잖소. 어린이가 없는 집도 놀이터 관리비는 당연히 부담하고, 노인이 없는 집도 노인정 관리비는 당연히 부담하듯이, 공동주택에 사는 한, 어느 정도의 공적인 부담은 감수해야지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어쨌든 투표로 주민 여론을 물어봅시다. 주민 여론에 따라 합시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냥 넘어갑시다.”
“그냥 넘어가자니? 잘못된 건 고쳐야지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요.”
“뭐야?”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급기야 몸싸움을 벌일 기세로 상황이 나빠지자, 다른 동의 대표들은 싸움을 말리는 척하다가 꽁무니를 빼며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강 이사는 8동 대표이고, 전 이사는 10동 대표다. 두 사람의 주장은 나름대로 각각 일리는 있었다. 문제는 선택과 합의에 달렸다. 하나의 선택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논쟁은 불가피했다. 두 사람의 소란으로 회의 안건도 제대로 의논하지 못한 채 회의는 그렇게 파했다.
‘조은아파트’는 총 950세대로 30년이 지난 중앙집중식 보일러가 설치된 노후 아파트다. 재건축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1동, 2동, 3동 총 250세대가 디귿 자로 배치되어 있고, 세 동 모두 출입구가 중앙으로 나 있으며, 마당도 같이 쓰고, 정문 쪽에 있는 경비실도 공동으로 쓴다. 나머지 여덟 개 동들은 동별로 제각기 경비실이 하나씩 있다. 여섯 개 동은 세대수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여건이 대체로 비슷해 큰 문제가 없다. 9동, 10동 두 개 동은 각 50세대로 다른 동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문제의 불씨가 되고 있다. 평형별로 살펴보면, 1동, 2동, 3동 세 개 동이 25평, 8동이 65평이고, 나머지 동은 35평과 50평이 3 대 1 정도의 비율로 섞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1동, 2동, 3동과 8동은 경비원 인건비의 동별 면적별 부과를 주장한다. 관리비 부담액이 적어지니까. 9동, 10동은 현재의 부과방법, 전체에 대해 면적별로 부과하는 방법을 지지한다. 관리비 부담액이 적어지니까. 나머지 동은 35평과 50평의 혼합비율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부과방법의 변경에 크게 이해관계가 없는 편이다. 관리비 부담액에 별 차이가 없으니까.
#3. 관리사무소
조은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아파트 정문 오른쪽에 경비실과 붙어있다. 세로로 선 목재 현판이 아파트 건설 당시의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서 있다. 사무실 좌측에 벽을 등지고 앉아 PC 뒤에 숨은 중년의 소장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받친 채 생각에 잠겨있다. 짙은 남색 재킷을 입은지라, 흰 얼굴이 차라리 창백했다. 현관문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노트북을 보며 마우스를 연신 클릭하고 있는 경리 아가씨는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노란 털옷을 입고 있다.
김 소장은 낡은 캐비넷을 열고 서류를 뒤적였다. 아파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의록을 읽어내려갔다. 시끄러운 회의와는 달리 깨알 같은 글씨로 간단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용도 대체로 간명했다. 그것이 오히려 순탄하지 않은 회의의 단면을 나타내주는 듯했다. 캐비넷 최하단 좌측에 노란 노끈으로 꽁꽁 묶인 서류 다발을 찾아냈다. ‘L관광호텔관련철’이라고 쓰여 있다. 노끈을 가위로 자르고 서류를 펼쳤다. 주민들이 호텔 건축 현장에서 농성하는 사진, 모금 장부, 소장, 준비서면, 답변서 등이 정리되어 있다.
조은아파트 바로 옆에 L 호텔 건축허가가 나고 공사가 시작되자 6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자들의 아파트 내 친목회 모임인 ‘육팔육’이 중심이 되어 이른바 ‘러브호텔(L 관광호텔) 건립저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육팔육’은 30여 년 전 입주 시 활약한 역전의 용사 ‘삼팔육’ 멤버 일부가 다시 뭉쳐 확대 개편한 좌파 성향 조직이었다. 비대위는 주민들을 선동해 건축 현장, 구청, 교육청, 시청 및 방송·언론사 등을 찾아가 데모를 하였다. 아파트 정문에서 50미터 이내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유로 러브호텔 건립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후 ‘육팔육’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농성과 실력 저지라는 원시적인 방식보다는 세련된 방식인 소송으로 대응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논리였다. 그들은 아파트 구내방송을 이용해 주민들을 설득했다. 결국, 행정소송이라는 법적인 불복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소송은 행정법원에서 당사자부적격으로 각하되었고, 대법원에서 제소기간의 도과로 기각되었다. 대략 그런 내용이다.
대충 훑어보면서 사건의 윤곽을 잡았다. 그리고 난 후, 다시 복잡한 소송 관련 서류를 차근차근 정독하는 중에 전임 입주자대표회의 감사를 했다는 작자가 관리실로 들어왔다. ‘L관광호텔관련철’이 소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곤 빙그레 웃었다.
“호텔에서 2억을 주었다는데, 어느 놈이 받아 처먹었는지, 한번 잘 찾아보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단지 업무파악을 하느라고 훑어복 있는 중입니다.”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맥을 짚다니, 역시 김 소장은 소문대로 대단합니다.”
“별말씀을요…….”
“잘 읽어보시고, 잘 판단하세요. 잘못했다간 큰코 다칩니다. 나는 갑니다.”
전임 감사는 커피도 마시지 않은 채 난로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묘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기전과장 윤태영이 결재서류를 들고 관리실로 들어왔다. 유조차가 기름 넣으러 왔다고 보고하며 결재판을 내밀었다. 드라이버에서 조명등, 차단기 등 무려 열다섯 가지에 대한 구매품의서였다.
“내가 아직 업무파악이 잘 안 돼서 결재할 수 없어요. 입고량, 출고량, 재고와 같은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덮어놓고 싸인부터 하라고 하면, 당신은 하겠어요?”
“전부터 그렇게 해 왔어요. 내가 거짓 보고한다는 말같이 들리네요. 정말 기분 나쁘네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윤 과장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결재판을 들고 유리문을 박차고 나갔다. 김 소장은 머리를 싸안고 눈을 감았고, 경리 아가씨는 토끼 눈을 뜨고 김 소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인터폰이 울었고 경리 아가씨가 재빨리 받았다.
“소장님, 기름 넣는 거, 안 보셔도 되겠어요?”
경리 아가씨가 말을 전했다.
“지금, 머리가 아파서…다음에 보지.”
뒷골에서 악마가 기지개를 켜자, 뭉근한 마비가 밀려왔다.
#4. 기전실
동과 동 사이의 지상 주차장 한 귀퉁이엔 놀이터가 근사하게 서 있지만, 아이들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없다. 그 안쪽으로 놀이터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바람이 지나다가 부딪는 구조물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괜스레 볼썽사납다. 그 구조물 안쪽에 붉은 괘선을 친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시를 한 철문이 굳게 닫혀있어 왠지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 철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한 층을 내려가면 또다시 붉은 괘선을 친‘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시를 한 방화문이 닫혀있다. 그 방화문을 열고 한층 더 내려가면 왼쪽으로 기계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반 층 아래에 전기실이 있다. 보일러는 한 층 더 아래다. 보일러실엔 8톤 보일러 3대와 22대의 열 교환기, 11대의 온수 탱크와 주변기기들이 거미줄처럼 각양각색의 배관으로 연결돼 있다. 배관은 분홍색, 빨간색, 파란색 그리고 흰색으로 구분되어 이중, 삼중으로 천장을 가로지르고 지나갔다.
매일 듣는 보일러 소리지만 웅웅거리는 굉음에 기가 죽었다. 온수를 데우기 위해 보일러 1호기와 2호기가 가동 중이었다. 권 기사가 보일러 2호기 앞에 놓인 책상에 앉아 윤 과장이 오는 줄도 모르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보일러의 굉음이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다. 윤 과장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돌아섰다. 변전실로 들어가 발전기의 스위치를 넣었다. 발전기가 천둥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전기실에서 이 주임이 헐레벌떡 뛰어왔다가 윤 과장을 보곤 발걸음을 돌렸다. 발전기를 5분쯤 돌리자 스트레스가 조금 날아가는 듯하다. 대리 화풀이라 할까.
윤 과장은 기계실로 들어와서도 감정의 앙금이 남은 듯 결재판을 책상 위로 집어 던지고 평상에 드러누웠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기계실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개새끼, 소장이면 다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구인지 모르겠지만, 며칠이나 버티나 보자. 야, 너희들 소장한테 절대 협조하지 마. 내 명령 없이는 꼼짝도 하지 마.”
“과장님, 왜 그러세요? 뭔 일이 있었습니까?”
“구매품의서에 결재를 안 해주잖아! 우릴 모두 도둑놈으로 여기는 모양이야.”
“과장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렇겠죠. 그래도 그렇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명색이 소장인데…”
정 주임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대답을 했다.
“내가 책임질 게.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내 도움 없이는 누구도 여기서 자리 못 잡을 걸. 이 대단지에 전기, 보일러, 설비, 소방, 모두 다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지가 어디다 대놓고 큰소리야?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초뺑이가.”
"과장님이야 그렇다 쳐도 우리 쫄다구들이야 소장의 말을 안 들을 수 없잖아요?“
“적당히 납작 엎드리고 있으란 말이야, 이 맹추야. 적당히!”
“새 소장도 우리 과장님한테 찍혔으니 얼마 못 가겠네.”
“야, 정 주임, 내일 새벽에 일단 온수 끊어.”
“그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고 하니 그렇지. 나도, 그렇게 모진 놈은 아니야. 지 모가지 죄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도 무는 법이야. 싸움은 분명히 소장이 먼저 건 거야. 그리고 말이야,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치는 거야. 그게 정글의 법칙 아니겠니? 우리 기전실, 아홉 명이 똘똘 뭉치면 소장 아니라 우 소장도 쫓아낼 수 있다고.”
윤 과장은 담배를 빼 물고 박 기사에게 소주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약속이나 한 듯 네 사람 모두 담배를 빼 물고 한솥밥 먹는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 라이터를 돌려가며 불을 댕겼다. 담배 연기가 게으름을 피우며 허공을 빙글빙글 맴돌다가 천장을 기어 다녔다. 연기가 실내를 가득 채우는 동안 그 누구도 먼저 침묵을 깨지 않았다.
#5. 불장난
겨울의 산은 비록 앙상하지만, 그 기운은 맹렬하다. 겨울 산의 차가운 기세가 내려와 머리통을 때리는 탓에 차가운 산의 옅은 향기가 청결이나 청량으로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찬 공기가 누런 먼지를 내리누르고 파란 하늘을 살짝 보여주었다. 분지 중의 분지라서 공기가 나쁘다는 말이 무색하다.
관리실에 연신 전화벨이 울었다. 경리는 전화를 받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둥, 불을 아예 넣지 않았다는 둥, 온수가 안 나온다는 둥, 그나마 녹물이 나온다는 둥 아파트가 온통 난리 통이었다. 몇몇 주민은 소장에게 전화를 바꾸게 하곤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곧 주민들이 관리실로 들이닥칠 게 뻔했다.
회장은 일찍부터 관리실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김 소장, 도대체 부하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주민들이 감기 들면 소장이 다 책임질 거야? 나이 들어 감기 들면 바로 가는 수도 있어. 나도 전기장판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안 나오던 녹물은 또 뭔가?”
“아직 업무파악이 제대로 안 돼서…”
“이 사람아, 벌써 한 달이 다됐는데, 아직도 똥오줌을 못 가리나? 당신 경력, 3년도 넘잖아?”
“할 말이 없습니다.”
“처음 왔으면 재빨리 업무를 파악하고, 현안을 철저히 챙겨야지. 아파트, 다 뻔한 거잖아. 일주일만 하면 안 되나? 당신 어제 퇴근 몇 시에 했어?”
“6시에 했습니다.”
“그건 정상인 경우고, 업무파악도 제대로 안 됐다는 사람이 정시 칼퇴근이 뭐야?”
회장은 인상을 잔뜩 거리며 담배를 손가락에 낀 채 삿대질을 했다. 재가 날렸다.
“이건 개인적인 사정인데요,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죽을 지경입니다. 소화도 안 되고 머리도 아프고, 자려고 해도 다리기만 하고 잠이 안 와요.”
“그렇다면 병원에 가봐야지. 신경을 많이 써서 그렇겠지. 세상사는 게 다 그러려니 하라고. 아프다는 사람 잡고 이런 얘기를 하면, 뭣하지만, 김 소장, 강 이사가 추진하고 있는 동 경비원 인건비를 동별로 배부하는 문제 말이야, 어떻게든 막아야 돼. 수익자 부담 원칙보다야 법이 먼저 아니야? 김 소장이 소신 있게 이 문제에 잘 대처해야 여기서 자리 잡는 거야. 만약 강 이사 말대로 동별 평형별로 바꾸면 9동, 10동에서 가만히 있겠어. 아마 폭동이 일어날걸. 나라도 가만히 안 있겠다. 잘 연구해보게.”
“잘 알겠습니다.”
“잘 되면 김 소장 봉급을 올려 줄 수도 있어. 까짓거, 내 돈도 니 돈도 아닌데 인심이나 쓰는 거지. 내가 봉급을 확 올려 주면, 그 절반을 나한테 떼 내줄 텐가? 허허. 물론 농담으로 해 본 말이고…”
회장은 김 소장의 표정을 살피더니 옷을 여미며 밖으로 나갔다. 김 소장은 담배 연기를 내보내려고 현관문을 열어놓았다.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그 와중에 김 소장은 인터넷에 접속해 관련 단체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자료를 검색해 보고 현안 내용에 대해 케이스로 정리해 질의응답 난에 올렸다.
뒤통수를 주먹으로 톡톡 쳤다. 두 눈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타이타닉. 타이타닉에 나왔던 그 유명한 주연 배우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얼굴은 명확히 떠오르는데,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잦았다. 심지어 친한 친구 이름마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기역, 니은, 디귿, 디, 디…, 디…. 김 소장은 머리를 감싸 쥐고 책상에 머리를 찧었다. 그렇지. 디카프리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나마 네이버의 도움 없이 기억해낸 것이 기특하다.
#6. 징후
오래된 공영 서민아파트가 위치한 곳은 분지의 끝자락이다. 비록 13평 위주의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단지 내 세대수가 많아 그 덩치는 거대했다. 이천여 세대에 오천여 명이 넘는 사람이 운집해 살다 보니 주변 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계획 단계에서도 지적된 사항이었지만 먼 훗날의 일인지라 그땐 다들 눈을 감았다. 막상 세월이 흘러 슬럼화되고 범죄의 온상이 된 다음엔 그 누구도 시원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선거 때만 되면 유세차가 뻔질나게 드나들긴 했다.
공영 서민아파트 904호. 29인치 TV가 커 보이는 거실에 어른 덩치의 앳된 사내아이 둘이 닳아빠진 회색 소파에 걸터앉아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있다. 김 소장은 문 앞 거실 바닥에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누워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신문을 봤다. 그의 아내는 냉장고 앞쪽 식탁에 앉아 TV를 곁눈질하며 열심히 문자를 주고받았다. 다들 말없이 자기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TV는 그냥 혼자 겉도는 듯했지만, 다들 가끔 눈길을 주는 것으로 보아 마냥 의미 없진 않았다.
“방학했는데, 학원에라도 보내지? 두 놈 다, 허구한 날 저게 뭐야? 멍청하게 유튜브만 보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한심한 놈들 같으니!”
김 소장은 두 아들을 힐끗 돌아보며 아내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누군 학원 보낼 줄 몰라서 안 보내나? 한 과목 학원비가 얼만지 도대체 알기나 해? 오십만 원이 넘어, 오십만 원. 두 과목이면 백만 원이고, 둘이면 이백만 원이야, 이백! 당신, 쥐꼬리 봉급 받아서, 어떻게 학원 보내나? 보내 봐? 재주 있으면 한번 보내 봐, 이 인간아? 콧구멍만한 집구석에 전봇대 같은 놈 두 놈이, 허구한 날 멍청하게 입 벌리고 앉아서, 저놈의 스마트폰 보고 있는 게, 나는 뭐, 보기 좋아서 그냥 보고 있는 줄 아나? 이 인간아, 말 좀 해 봐라! 나는 그냥 놀고먹는 줄 아나? 내 먹을 건 다 벌고 있다고.”
봇물이 터진 양, 말이 쏟아져 나오자, 두 아이는 슬며시 문간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무심코 던진 말이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다. 김 소장은 급히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아내의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격앙돼 폭발하기 시작했다. 통장이 날아오고, 가계부가 날아오고, 지갑이 날아왔다.
“니가 한번 살아봐! 꼴난 니 봉급 갖고 한 달 한 번 살아봐!”
아내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 김 소장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김 소장은 아내를 피해 문을 열고 맨발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인간아, 나가려면 돈이나 내놓고 가!”
아내의 다급한 절규가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둔탁한 소리가 전해져 왔다.
“퉁탕, 드러럭 쿠다당”
#7. 의혹
중앙집중식은 지하에 거대한 보일러를 설치해 난방과 온수를 일괄적으로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온수 공급의 경우, 수도꼭지만 틀면 항상 즉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까닭에 대체로 편리하지만, 난방의 경우, 세대마다 체감 온도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개별 세대의 재량적인 온도 조절이 불가능해 늘 민원이 발생하고 그 해결이 힘들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경유 사용으로 가성비가 조금 좋은 까닭에 한때 대단지에 채택됐던 중앙집중식이었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중요해진 시대적 조류에 따라 이젠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유조차가 놀이터 앞의 기름 탱크 주유구에서 경유를 넣고 있다. 동 대표 조 여사가 주유 중인 유조차 위에 올라가서 정량을 제대로 주입하는지 지켜보았다. 동 대표들이 번갈아 가며 입회하게 되어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유조차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감독하기는 매우 어렵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더더욱 어렵다. 그래도 여자 동 대표는 조금 성실한 편이나 남자 동 대표들은 관심이 별로 없다.
통상 나오지 않는 사람이 나중에 말은 더 많았다. 김 소장도 안 나올 때가 더 많았다. 막상 나와 봐도 춥고 지겹기만 할 뿐 아무 일도 없다. 다만 기전실 직원은 누가 나와도 꼭 나왔다. 조 여사는 유조차 위에서 기름 탱크를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았다. 머리가 내둘렸던지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짚었다. 바닥이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사다리를 타고 겨우 내려왔다. 순사 열 명이 도둑 하나 못 지킨다는데… 이 짓을 꼭 해야만 되나? 조 여사는 목장갑을 벗어 기사에게 주곤 바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달포 전, 경유 탱크를 실측해 본 결과, 경유의 장부상 재고량과 실제 재고량이 크게 차이가 나서 아파트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주유소나 운전기사가 빼먹었다는 둥, 회장이 해 먹었다는 둥, 소장이나 기전실 직원들이 빼먹었다는 둥 소문이 구구했다. 지난겨울 동안 난방이 잘 들어오지 않아 춥게 지냈다는 주민 여론, 계량기 조작이 가능하다는 주장, 주유소의 선정에 의혹이 있었다는 주장, 관리소와 주유소 간 모종의 리베이트 밀약이 있을 수 있다는 추리 등의 근거 없는 풍문이 떠돌았다. 마침내 ‘육팔육’이 중심이 된 과격한 주민들이 비대위를 급조해 특별 감사를 실시하였다.
비대위의 특별 감사 결과, 관리실에서 주유소로 오백만 원을 이중으로 송금하였고, 최근 주유소에서 관리실로 동 금액이 재송금된 사실을 밝혀냈다. 모든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하기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고, 그렇다고 모두 덮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소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하는 선에서 사건을 얼렁뚱땅 마무리했다. 그리고 김진위가 새로 소장으로 부임했다.
주유량에 허용오차가 있고 계량기에도 허용오차가 있다. 장부상 재고와 실 재고의 차이는 이러한 불가피한 오차가 오랫동안 누적되어 생긴 결과일 수 있다. 기름 한 통을 담았다가 다른 통에 옮겨 부어도 정확히 원래의 양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한 소수 의견도 나왔다. 흔히 합리적인 의견일 수도 있는 것이 과격한 일부 주장에 밀려 도리어 불합리한 소수 의견으로 치부돼 그냥 묻힐 수 있는 게 현실이다.
#8. 단서
회장은 강 이사 쪽에서 경비원 인건비 부과방법 변경에 대해 주민들의 동의를 받고 다니고 있다며 김 소장에게 그 대응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현행대로 유지하는 방안에 찬성하는 주민을 규합해 맞불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관리소 직원을 동원해서라도 서명을 받으라고 했다. 김 소장은 관리사무소는 절대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으나 회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눈알을 부라리며 화를 냈다. 경비원들이 저쪽에 붙어 서명받아주는 일이 없도록 집안 단속이나 잘하라고 하고는 관리실을 나갔다.
김 소장은 소파에 몸을 묻고 머리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경리는 인터넷으로 ‘맞고’를 치다가 친구에게서 메신저가 도착하자 또 채팅을 시작했다. 여기 분위기 죽인다. ㅜㅜ 소장 자리 나겠는데…ㅠㅠ 전화벨이 울리고 경리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장님, 결재 있는데요.”
“……”
김 소장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자리에 와 앉았다. 결재판에는 전표가 가득 들어있었다. 소장은 장부와 전표를 꼼꼼히 대조하며 결재란에 싸인을 했다. 전표 결재는 상당한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다. 인터폰이 울고 유조차가 들어왔다는 전갈이 왔다. 기전실에 연락해 나가보라고 지시하곤 소장은 계속 결재에 열중했다. 장부와 전표를 대조하고 싸인을 하는 일이 생각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결재가 막 끝나갈 무렵, 유조차 기사가 들어와 휴대폰 배터리가 나갔다며 전화 한 통화만 하자고 경리에게 부탁했다.
“남북아파트죠? 지금 기름 넣으러 가도 될까요? 여기 조은아파트인데, 곧 갈게요.”
유조차 기사가 나가고 김 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경리 전화로 리다이얼링 기능을 사용해 남북아파트 관리실 직원과 통화를 시도했다.
“남북아파트 관리실이죠.”
경리가 놀란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렸다.
“거기, 오늘 경유 얼마 받아요? 만 육천요? 감사합니다.”
“미스 리, 우리도 한 번에 만 육천 리터 받잖아? 유조차 용량이 만 육 천인데, 우리한테 만 육천 넣고 빈 차로 어떻게 바로 남북아파트로 가서 또 만 육천을 넣을 수 있나?”
“다른 차가 갈 수 있잖아요? 저유소에 들를 수도 있고요.”
“다른 차? 그건 말도 안 되고. 저유소도 여기서 엄청 멀잖아? 이놈들 이번 기회에 버릇을 확실히 고쳐 놔야 돼. 확실한 물증을…….”
김 소장은 관리실을 서둘러 나갔다.
#9. 카르텔
남북아파트는 조은아파트 보다 산 쪽으로 한 마장 정도 더 들어가 있다. 김 소장이 남북아파트 관리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경리 아가씨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아가씨는 발딱 일어나 인사를 했다. 세련되었다고 하기에는 다소 표정이 굳어있다. 소장의 책상 위에는 하다만 결재서류들이 흩어져 있다.
“난 조은아파트 소장인데, 유조차 들어왔어요? 확인할 게 있는데.”
“아, 예. 오늘 들어오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어 못 온다는 연락이 왔거든요.”
아가씨는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김 소장은 벼락을 맞은 듯이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불현듯 며칠 전 퇴근 무렵 일이 떠올랐다. 귀찮긴 했지만, 퇴근의 유혹을 뿌리치고 경유 입고를 감독하고자 놀이터 앞으로 갔다. 정 주임이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 소장을 보자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정 주임이 휴대폰을 치자 조금 후 기전과장 윤태영이 상기된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난 퇴근하신 줄 알고 안 올라왔더니…”
윤 과장은 겸연쩍은 듯 두 손을 비볐다.
“민 기사, 기름 안 넣고 뭐 하는 거야? 너, 또 노즐 잘못 갖고 왔지? 자알 한다. 어리하게 해 가지고! 매일 하는 일을 그리 삐리하게 하나? 벌써 이게 몇 번째야? 빨리 가서 갖고 와! 에이 병신!”
민 기사는 죄송하다며 뒷머리를 긁었다. 윤 과장은 정 주임에게 오늘 소비할 물량은 되는지 확인차 물어보고는 민 기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일찍 오소.”
운전기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운전석에 올랐다.
#10. 탐색
보일러 앞에서 작업하던 이 주임과 송 기사가 김 소장을 보자 하던 작업을 중지하고 열 교환기 쪽으로 가서 렌치로 트랩을 툭툭 쳤다. 보일러 앞 배관에서 검은 물이 콸콸 흘러나와 배수로로 흘러나갔다.
“이 주임!”
“……”
“송 기사!”
김 소장은 큰 소리로 이 주임과 송 기사를 불렀다. 이 주임과 송 기사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김 소장 앞으로 다가왔다.
“이 시커먼 액체가 뭐요? 경유는 아닌 것 같은데. 배관을 살펴보면 경유 탱크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한데.”
“물입니다. 다 빼내야 합니다. 물이 차면 불이 안 붙거든요.”
“아니, 기름 탱크 안에 무슨 물이 생겨요?”
“결로 현상도 있고, 경유를 오래 놔두면 저절로 물이 가라앉아요. 그걸 정기적으로 빼 줘야 하거든요.”
이 주임이 귀찮은 듯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경유 탱크는 결로가 생길 정도로 차지도 않고, 설사 생긴다 해도 밖에 생기는 것이 이치에 맞고, 기름을 오래 놔두면 물이 분리된다는 이론은 여기서 첨 듣네, 그 참, 이상하다.”
“탱크가 빵구가 나서 물이 째여드는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보수를 해야지. 이거 큰일이네. 재고가 또 안 맞을 텐데. 그런데, 지금까지 왜 이런 얘긴 일언반구도 안 했지?”
“……”
“윤 과장은 어디 갔어요?”
“세대에 소방 점검 나갔는데요.”
배관에서 기름이 나오기 시작하자 송 기사는 밸브를 잠그고 이 주임은 계량기를 다시 달았다.
#11. 복마전
기전과장 윤태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결심을 한 듯 전화기를 들었다.
“위원장님, 저, 윤 과장입니다. 요즘 잘 안 보이시던데요. 소장, 새로 온 거 아시죠. 한 달쯤 됐는데요. 요즘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L 호텔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것 같던데요. ‘L 호텔관련철’을 글쎄 집에까지 갖고 가서 자세히 읽고 있답니다. 위원장님 소문이 안 좋아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송구스럽습니다. 호텔에서 2억을 받아먹었다는 말도 있고. 모르셨어요? 실컷 고생하고 이상한 이야기나 듣고, 그렇죠? 제가 다 흥분되네요.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나저러나 이번 소장이 법에 대해서는 귀신이라던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 근무지에서 도색하면서 몇천만 원 해 먹었다고도 하고, 경비 용역 넘기면서 또 몇천만 원 먹었다는 말도 돌고…. 나가고 나면 별소리 다 나오잖아요. 어쨌든 대단한 사람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지, 감히 위원장님에게 도전장을…. 간이 부었지요. 이러다가 이거 피 바람 한번 부는 거 아닙니까? 우리 같은 쫄따구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잖아요. 그건 그렇고, 위원장님, 언제 식사 한번 하러 오시죠. 예. 안녕히 계십시오.”
윤 과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출입문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전화기 번호를 찍었다.
#12. 유포
윤 과장이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과 생맥주를 마시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서 과장, 김 소장이 거기서 근무할 때, 전면 도색을 했다며?”
“했지.”
“그런데, 몇천만 원 꿀꺽 먹었다는 말은 뭐야?”
“팔백 세대를 일억 오천에 했는데, 보통 그 정도에 안 하나? 소문일 뿐이겠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것도 팔천은 공제조합에서 하자보수비로 받아냈다 하잖아. 건설회사는 벌써 망했고, 9년이 지난 아파트에. 우리 이웃 아파트들도 하자 찾아내어 돈 땡길려고 지금 난리야. 이웃 단지의 다른 소장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말도 다 못하나 봐. 어쨌든 김 소장은 대단한 사람이야.”
“십 년 차 하자라 해봐야 내력벽 하자뿐인데, 내력벽 하자가 잘 있나? 내력벽 하자가 있으려면 크랙이 심하게 가고 무너질 위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로 팔천만 원이나 받아냈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너희 아파트, 무너질 정도로 심각한 것 아니잖아? 여긴 뭔가 썸씽이 있다. 공제조합도 또라이가 아닐 텐데. …그러고 보니, 건설회사가 망했으니까 오히려 가능할 수도 있겠다. 둘이 짜서 하자를 인정하고, 특정 업체에 공사를 주고, 뒤로 리베이트를 받아 반팅이나 갈라 먹기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손해 보는 쪽은 없잖아? 회사는 망했고, 조합은 주인도 없고. 내가 너무 오버했나?”
“윤 과장, 진짜 머리 좋네. 아파트 땅굴에서 기전과장 하기 아깝다.”
“에이, 무슨 소리? 머리 좋은 놈, 씨 말랐나? 진짜 머리 좋은 놈은 그런 걸 실천하는 놈이야. 우린 헛띠기지, 헛띠기.”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
“이론적으로 가능하면 실제로도 당연히 되는 거지.”
“ 그런가?”
“자체 경비를 용역회사로 넘기며 이천 먹었다는 소문도 돌던데. 자꾸 이런 소문 돌면 안 좋은 거 아닌가? 방귀도 자꾸 뀌면 똥 싼다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니?”
“그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나? 증거도 없이 함부로 그런 얘기를 하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지역 사회에서, 뛰어야 벼룩이고, 날아가 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이런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일 년에 두 번 하게 되어 있는 물탱크 청소, 업자와 짜고 하지 않고서 한 것으로 꾸며서 돈만 빼먹었다던데? 그쯤 되면, 아마도 손 안 댄 데 없을 거야.”
“무섭다. 세상, 정말 무섭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옛말 그런 게 없지.”
“에이! 술이나 마시자. 위하여!”
“위하여!”
스테이지에서는 삼류 여가수가 경쾌하게 노래를 불렀다. 독일식 생맥주 술집에서 흐르는 일본 노래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전주곡이었다.
서 과장은 김진위 소장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과장으로 근무한다는 동료의식 때문에 자기 아파트 동 대표로 나가 김 소장을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는데, 윤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괘씸하기도 하고 혐오스럽기조차 하다고 투덜거렸다. 윤 과장은 입가심하러 가자며 서 과장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윤 과장,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서 과장, 걱정하지 마. 오늘,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 알겠지?”
윤 과장은 벌써 취한 듯 혀가 꼬였다.
#13. 공개질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때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파트 홈페이지는 현대판 신문고라 할 만하다.
김 소장은 출근과 동시에 아파트 홈페이지를 열어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다. 오늘도 무사히! 홈페이지에 관리사무소나 입주자대표회의를 비난하는 내용이나 불편 사항을 신고하는 내용이 올라오는 날은 종일 불안하고 우울했다.
여느 날과 같이 홈페이지를 돌아보던 김 소장은 게시판에 올라온 공개 질의서를 보고서 식은땀이 났다.
최근 관리사무소의 활동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고, 관리규약이나 건전한 상식에 따라 이들을 판단해 본 결과, 아래와 같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관리주체는 5일 이내에 답변서를 작성해 우리 홈페이지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서를 검토하여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부득이 법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놀이시설 등 부대시설 도장공사와 관련한 의문점으로, 관리규약엔 1) 공개 입찰하고, 2) 주민에게 진행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3) 주민들 의견을 듣도록 규정돼 있는데, 이번에 한 위 공사는 이를 위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사금액 이천만 원도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높다고 여겨집니다. 직원들을 동원해도 될 일을 거금을 써서 그것도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고 업체를 선정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둘째, 최근 난방과 온수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일이 빈발하고 있고, 온수에 녹물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지, 그 원인과 대책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직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고,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라 하겠습니다. 소장은 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 보일러 연료인 경유의 재고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정 의혹이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명백히 해명해 주기 바랍니다.
끝으로, 연쇄 절도 사건이 단지 내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리사무소는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으며, 앞으로의 예방책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여 잘못이 있다면 관련자를 문책하여 주민의 권익을 옹호하고자 합니다. 입주자대표회장과 관리사무소장은 성실히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14. 풍문
김 소장은 사무실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며 단지를 돌았다. 누리끼리한 기운이 온 도시를 덮고 있다. 보도블록이 흔들거리고 나무가 춤을 췄다. 김 소장은 간신히 파고라 기둥을 잡고 벤치에 앉았다. 1동 쪽에서 회장이 걸어왔다. 회장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단지를 순찰했다.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즉시 소장에게 시정을 지시하곤 했다.
“김 소장, 어디 아프나?”
회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김 소장 옆에 앉았다.
“아뇨. 갑자기 조금 어지러워서…”
“병원에 함 가보지. 힘들지? 힘들 거야. L 호텔 건으로 불신의 골이 깊어졌어. 게다가 기름 문제로 골이 더 깊어졌지. 그런데, 강 이사 측 진행 상황은 어떤가?”
“아직 과반수를 못 채운 거 같습니다.”
“호텔 건은 뭐 새로 나온 거라도 있나?”
“아직 발견한 건 없습니다.”
“학교정화구역 내라서 시와 교육위원회, 구청 등 삼자 합의가 필요한 사안에 입주민 중에 시 공무원, 교육청 직원, 구청 직원 등이 앞장서서 데모를 주도했다니,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나? 또, 그런 일은 무식하게 현장에서 드러눕는 게 최곤데, 소송하자고 하면서 그쪽으로 몰고 갔으니 그게 제대로 되겠어? 2억을 준다는데 그것도 마다하고 소송으로 몰고 갔으니, 주민들이 다 바보야, 바보. 행정법원에서 당사자부적격으로 각하, 대법원에서 제소기간 도과로 기각,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소위 법을 안다는 놈들이, 변호사까지 사서, 본안 심리도 못했다는 게 믿어지나? 당사자적격이나 제소기간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니냐? 그걸 모르고 소송을 진행했다는 게 이해가 되나? 나 같은 무식꾼도 아는데, 김 소장은 법을 전공했으니, 더 잘 알 거 아니냐? 당연히 의혹을 품었을 테지.”
“듣고 보니 이상하긴 하네요. 당사자적격이나 제소기간은 챙겼어야 되는데…”
“난 잘 모르겠지만, 변호사가 써준 서류를 주동 인물 모씨가 그중 일부를 고쳐서 제출했다는 말도 있더군.”
“결국, 소송으로 몰고 가서 관련 행정기관이나 호텔을 보호해준 꼴이 되었네요.”
“그렇지, 현장에 드러눕고 돈으로 협상하는 방안을 택했어야지. 법적인 절차야 공무원들이 오죽 잘 알아서 했을까. 그걸 법으로 다툰 게 우선 냄새가 나고,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허점을 보인 것이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거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는 말인가요? 져주려고 했단 말인데…”
“그건 아무도 모르고. 호텔에서 돈을 받아먹고, 직장에서 승진까지 했다는 풍문이 있어.”
“그런 얘기를 근거 없이 말했다가 여차하면 허위 사실 유포, 명예훼손에 걸립니다. 큰일 납니다.”
“나도 들은 이야기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회장은 가봐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엉덩이를 툴툴 털며 가던 길을 황망히 걸어갔다. 김 소장은 관리실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잠을 잘못 잤는지 뒷골이 마비되고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목 운동을 했다. 좌로, 좌로, 우로, 우로. 머리를 돌렸다. 머리를 돌렸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15. 진퇴양난
관리실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고 경리 혼자 인터넷 고스톱 ‘맞고’를 치다가 얼른 하단으로 숨겼다. 고요한 침묵과 싸늘한 한기가 번졌다. 전화벨이 울었다. 경리가 전화를 받아 김 소장에게 돌렸다.
“예, 맞습니다. 예? 검찰청이라고요?”
“……”
“예? 13일 오후 3시 205호 검사실요? 알았습니다.”
전 근무지 주민이 검찰 인터넷에 공제조합의 비리를 고발해 당시 소장이었던 김진위 소장의 조사가 불가피하다며 검찰로 출두해 달라고 말했다.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으로 벌써 소장을 받은 상태인데 이젠 비리 혐의 조사까지 한다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관리실이 노랗게 물들었다. 관리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도 산도 노랗게 물들었다. 노란 하늘과 노란 산이 제대로 돌아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하늘과 산이 다시 노랗게 물들기 전에 어머니 산소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아파트 상가 마트에서 소주와 과자를 사 들고 차에 올랐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눈물로 보는 겨울 풍경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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